|
제1독서
<땅을 다시 일으키려고 내가 너를 백성을 위한 계약으로 삼았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49,8-15
8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은혜의 때에 내가 너에게 응답하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와주었다.
내가 너를 빚어내어 백성을 위한 계약으로 삼았으니
땅을 다시 일으키고 황폐해진 재산을 다시 나누어 주기 위함이며
9 갇힌 이들에게는 ‘나와라.’ 하고
어둠 속에 있는 이들에게는 ‘모습을 드러내어라.’ 하고 말하기 위함이다.”
그들은 가는 길마다 풀을 뜯고 민둥산마다 그들을 위한 초원이 있으리라.
10 그들은 배고프지도 않고 목마르지도 않으며
열풍도 태양도 그들을 해치지 못하리니
그들을 가엾이 여기시는 분께서 그들을 이끄시며
샘터로 그들을 인도해 주시기 때문이다.
11 나는 나의 모든 산들을 길로 만들고 큰길들은 돋우어 주리라.
12 보라, 이들이 먼 곳에서 온다.
보라, 이들이 북녘과 서녘에서 오며 또 시님족의 땅에서 온다.
13 하늘아, 환성을 올려라. 땅아, 기뻐 뛰어라. 산들아, 기뻐 소리쳐라.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당신의 가련한 이들을 가엾이 여기셨다.
14 그런데 시온은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고 말하였지.
15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17-30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17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18 이 때문에 유다인들은 더욱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분께서 안식일을 어기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
20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어
당신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여 주신다.
그리고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들을 아들에게 보여 주시어,
너희를 놀라게 하실 것이다.
21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22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넘기셨다.
23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공경하듯이 아들도 공경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공경하지 않는 자는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않는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25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26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아들도 그 안에 생명을 가지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
27 아버지께서는 또 그가 사람의 아들이므로 심판을 하는 권한도 주셨다.
28 이 말에 놀라지 마라.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의 목소리를 듣는 때가 온다.
29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 선을 행한 이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을 저지른 자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다.
30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나는 듣는 대로 심판할 따름이다. 그래서 내 심판은 올바르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당신의 가련한 이들을 가엾이 여기셨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고 하신다(복음).
☆☆☆☆☆☆☆☆☆☆☆☆☆☆☆☆☆☆☆☆☆☆☆☆☆☆☆☆☆☆☆☆☆☆☆☆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가련한 이들을 가엾이 여기셨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하시는 것을 못마땅해 하는 이들에게, 당신의 말씀을 듣고 당신을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고 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어제 복음(요한 5,1-16 참조)에서 우리는 예수님에게 반감을 품고 그분의 치유 행위를 비난하는 유다인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규정을 위반하셨고, 하느님의 신성을 모독하셨다는 이유로 그분을 고발하였습니다(5,17-18 참조).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누구이신지 깨닫지 못하는 유다인들을 상대로 스스로 변론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보다도 아버지와 이루는 일치를 강조하십니다. 당신께서는 하느님 아버지를 떠나 홀로 말하거나 행동하지 않으시며, 오직 아버지와 온전히 일치하시어 행하신다는 사실을 선포하십니다(5,19-20.30 참조). 특별히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이루는 관계, 곧 하느님과 맺는 완전한 일치의 상태를 강조하시고자 ‘아들’이라는 개념을 여러 차례 사용하셨습니다(5,20.22.23.25.26.27 참조).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행할 때 세상 속에서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려고 이 세상에 파견되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 안에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며 아드님을 통하여 구원 계획을 완성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에 일치하여 생명을 주는 일(5,21 참조)과 심판하는 일(5,22 참조)을 수행하십니다.
아버지에게 유보된 일이 이제는 아들에게 주어진 일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에게서 부여받은 권한으로 믿는 이에게 생명을 주시고(5,24-26 참조), 믿지 않는 자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5,27-30 참조).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뜻보다 아버지의 뜻을 먼저 따른 ‘아들’이셨습니다(5,30 참조). 그분의 온 생애가 요한 복음서의 증언을 뒷받침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아버지와 맺으신 관계로 초대하시면서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기를 요청하고 계십니다.(정진만 안젤로 신부)
☆☆☆☆☆☆☆☆☆☆☆☆☆☆☆☆☆☆☆☆☆☆☆☆☆☆☆☆☆☆☆☆☆☆☆☆
길을 지나가다 같은 옷을 입고 가는 연인을 본 기억이 납니다. 저렇게까지 하고 싶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미소를 지었던 기억입니다. 사랑하게 되면 서로 같은 것을 입고, 같은 것을 먹고, 같은 곳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싶어 하는 것이 당연한 것 같습니다. 서로 각자의 것을 내어놓고 상대의 것들을 담고 살아가는 모습, 자신의 것보다는 상대의 것을 더 귀하게 여기는 것이 사랑일 것입니다. 오랫동안 함께 살아온 부부를 만나 이야기하다가 두 사람이 많이 닮아 있음을 느낀 적도 있습니다. 어쩌면 그들도 그런 마음 때문에 닮아졌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자신의 삶 속에 담고 살아간다면 그 사람과 닮아 갑니다.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도 아버지 하느님을 담고 살아가십니다. 아버지의 생각을 담아 아버지께서 바라시는 것을 알아 가십니다. 아버지께서 하신 일을 아드님께서도 그대로 당신의 삶 속에 담아 똑같은 일을 하십니다. 스스로 하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께서 바라시는 일을 하실 뿐입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삶과 마음속에 아버지 하느님을 담고 살아가십니다. 그 ‘담음’은 바로 ‘닮음’으로 변합니다. 외모뿐 아니라 생각과 마음, 그리고 사랑까지도 닮아 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들을 보고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가 됩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담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닮아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각과 마음을, 예수님의 삶과 희생을,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닮아 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그리스도요, 예수님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1).(최종훈 토마스 신부)
☆☆☆☆☆☆☆☆☆☆☆☆☆☆☆☆☆☆☆☆☆☆☆☆☆☆☆☆☆☆☆☆☆☆☆☆
제2이사야에서 뽑은 오늘 독서의 배경은 바빌론 유배 시기(기원전 6세기)에 속합니다. 끌려간 이들은 시온의 행복한 나날을 회상하며 현실의 고통을 한탄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
주님께서는 예언자를 통하여 그들에게 당신의 행복과 사랑을 상기시키십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주님께서는 다가오는 귀환으로 당신 사랑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당신께 충실한 이들을 잊지 않으시고 기억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규정을 어기면서 중풍 병자를 낫게 해 주셨다고 비난하는 이들에게 대답하십니다.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부르시고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견주어 말씀하심으로써 추문 이상의 근거를 덧붙이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어 당신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여 주신다. ……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창세기에 따르면, 하느님께서는 창조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습니다. 여기에서 ‘휴식’(안식)을 뜻하는 유다교 안식일 제도가 생겨납니다. 그러나 주님의 휴식은 일하지 않음이 아니라 오히려 창조한 만물의 생명을 보존하는 것입니다. 같은 방식으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도 구원을 베푸시고 생명을 주십니다. 그분께서는 사람을 위하여 만드신 안식일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
이 주간은 사순 시기임에도 계속 위로와 기쁨의 말씀을 우리에게 들려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의 때를 준비하시고 구원의 날에 도와주시는 분이십니다. 가련한 우리는 우리를 위로하시는 하느님을 만나야 기뻐 뛰놀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어 당신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여 주신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하느님의 뜻대로 움직이시고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만 하십니다. 안식일에 병자를 치유하시는 예수님의 행위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참뜻과 창조의 계획이 완성되는 심오한 신비를 우리에게 알려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과 동등하다고 주장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아들도 그 안에 생명을 가지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는지 알려 주시고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시는 것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그 안에 있고 그 길을 통해서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따라가는 사순 시기는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은혜의 때’이며 ‘구원의 날’입니다. 그 길에 들어서는 것은 우리의 영광이며 기쁨입니다. 마지막 날 우리는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류한영 베드로 신부)
☆☆☆☆☆☆☆☆☆☆☆☆☆☆☆☆☆☆☆☆☆☆☆☆☆☆☆☆☆☆☆☆☆☆☆☆
오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아들의 동일성을 주장하십니다. 성부와 성자, 두 분이 온전히 일치한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예수님 말씀은 하느님 말씀이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뜻이지요. 이렇게 일치하게 된 것은,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일도 당신 뜻대로 하지 않으시고, 하느님께 온전히 순명하셨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성부 하느님께 순명하신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 뜻에 순명해야만 합니다. 이때 우리는 하느님과 온전히 일치되어 사랑과 평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어 예수님께서는 앞날을 내다보십니다. 당신 죽음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보신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해를 끼치려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 운명은 어디까지나 사람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달려 있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감히 사람이 저지할 수는 없습니다.
진리는 타협의 대상이 아닙니다. 어떤 위협이라도 진리를 침묵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도 세상의 온갖 유혹과 위협에도 진리만을 따르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그 결과는 오늘 복음에서처럼 심판으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어 하느님 안에서 참된 평화와 자유를 누리는가?’ 우리가 꿈꾸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아니면 ‘부끄러움과 후회 속에서 정화의 과정을 거친 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가?’ 연옥의 상태입니다. 또는 ‘하느님을 끝내 거부하며 영원한 절망과 어둠 속에 머무는가?’ 지옥의 상태입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벳자타 연못에서 안식일에 병자를 치유해 주신 것을 두고 유다인들이 안식일 법을 들어 시비를 걸자 예수님께서 주신 답변입니다. 예수님의 이 답변은 안식일 법을 부정하신 것이 아니라 신학적으로 심화시키신 것입니다. 유다의 신학자들도 안식일에 하느님의 창조 행위가 중단된 것으로 보았지만(이렛날에 쉬셨다: 창세 2,2), 안식일에도 당신의 섭리로 그분의 다스리심은 중단되지 않았다고 구분했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행동들, 곧 가르치심과 치유의 행동들은 모두 아버지와의 일치를 근거로 합니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며, 아버지 하느님의 일을 당신의 일로 삼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아버지의 일치는 순명을 근거로 하고, 이는 또한 자신을 온전히 비울 때 가능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욕심과 목표를 내려놓고 자신을 비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요?
그리스도교의 ‘비움’과 다른 종교의 ‘비움’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비움은 예수 그리스도를 내 안에 모시려는 비움입니다. 마치, 하느님께서 예수님 안에서 온전히 일하고 계시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
☆☆☆☆☆☆☆☆☆☆☆☆☆☆☆☆☆☆☆☆☆☆☆☆☆☆☆☆☆☆☆☆☆☆☆☆
유다인들은 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을까요?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당신의 신성을 주장하셨기 때문입니다.
벳자타 못 가에서 서른여덟 해를 앓는 병자를 고쳐 주시는 예수님께서는 오늘 독서에 소개된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인고의 서른여덟 해! 그 병자는 하느님께서 이미 자기를 잊으셨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물이 출렁일 때 그를 도와 물에 들어가게 해 줄 사람이 없었던 것을 보면 가족도 이미 그를 돌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그저 잊히고 버려진 병자일 뿐, 그를 가엾이 여겨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가가셨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부른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셨습니다. 수많은 병자 가운데서도 그가 절실히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먼저 알아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둠 속에 있는 그를 빛으로 불러내셨습니다(이사 49,9 참조).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인간적 연민에서 그를 고쳐 주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그대로 하실 따름이었습니다(요한 5,19 참조). 차라리 그저 인간적 연민이었다면 유다인들은 그분을 죽이려고까지 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단지 안식일을 어긴 불경한 사람이라며 꾸짖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치유가 하느님의 행위라고 주장하셨기 때문에 유다인들은 그분을 죽이려 하였습니다.
소외되고 버려진 이들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행위가 하느님에게서 비롯될 때 사람들은 그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할 뿐, 그 안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알아보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는 당사자도 자신의 행위가 하느님에게서 비롯된다고 주장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치유 행위가 하느님에게서 왔음을 강조하시면서 당신에 대한 신앙을 요구하십니다. 치유는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이 점이 바로 벳자타의 병자를 고쳐 주신 예수님의 자애와 순전히 인간적인 자비가 서로 다른 점이며,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병자를 치유해 주시고서도 죽임을 받으십니다.
☆☆☆☆☆☆☆☆☆☆☆☆☆☆☆☆☆☆☆☆☆☆☆☆☆☆☆☆☆☆☆☆☆☆☆☆
제 1독서의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 사랑의 역사를 기억하도록 거듭 촉구합니다. 곧, 하느님은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고 도와주시며 응답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호소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당신이 하느님 아버지를 사랑하는 길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십니다. 이로써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자기 자신의 뜻이 아니라 그분의 뜻을 실천하는 데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몸소 보여 주십니다. 이제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굽어보시고 베푸신 사랑과,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인간이 주님께 응답하는 사랑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환하게 드러났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정작 지금 여기에서 그분의 사랑을 실감하지 못하는 가운데 내 의지를 그분에 대한 사랑으로 드릴 용기가 없으니 답답한 심정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그분의 사랑을 멀찌감치 바라볼 뿐, 정작 그분과 나 사이에는 사랑의 대화 대신 무거운 침묵만이 존재한다고 실망합니다. 그러나 그 침묵이 차가운 단절만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 신부는 『열린 손으로』라는 책에서 침묵의 다른 얼굴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멀리 있는 집에서 오는 빛으로 보름달이 환한, 그런 밤이 있듯이, 텅 빈 교회 뜰에 참새들이 시끄럽게 재잘거리는 평화롭고 아스라한 침묵도 있다. 그때 내 가슴은 기쁨으로 노래하고 혼자가 아님을 느낀다. …… 그러하여 나는 내가 되고 너는 네가 된다. 그때 우리는 서로를 겁내지 않고 평화와 침묵을 선물한 천사에게 우리의 모든 말을 내맡긴다."
주님의 사랑은 저 멀리 있고 우리의 사랑은 아직 연약할 뿐이어서, 그분과 나 사이에는 한밤중의 침묵만이 흐른다고 느끼는 순간이 우리 삶에 자주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 침묵이 이미 따뜻한 사랑에 물들고 있음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
'포콜라레’(Focolare)는 천주교 신심 단체 가운데 하나입니다. ‘포콜라레’는 이탈리아 말로 ‘벽난로’라는 뜻인데, 삶의 현장에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형제적 사랑을 실천하여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려는 신심 단체입니다. 포콜라레 회원이었던 키아라 루체(1971-1990년)는 열아홉 살의 어린 나이에 골수암에 걸려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2010년 10월에 시복되었습니다.
키아라 루체는 평범한 소녀였습니다. 같은 또래의 아이들처럼 운동을 좋아하고 잘 놀고 명랑한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고등학교 때에 골수암에 걸리고 맙니다. 처음에는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병원에서 여러 방법으로 치료해도 낫지 않자, 어느 날 키아라는 의사 선생님에게 직접 물어보았습니다. “제가 무슨 병이 걸렸나요?” 그러자 선생님은 “악성 종양이야. 최선을 다해 보겠지만 어려울 것 같아.”라고 말했습니다. 키아라는 그 이야기를 듣고 자기가 죽을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엄마는 집으로 돌아온 딸에게 “얘야, 좀 어떠니?” 하고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키아라는 “아직은 말 못해, 엄마.” 하고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몸을 던졌습니다. 그러고는 눈을 가린 채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소리 내어 울지도 않았습니다. 엄마는 곁에서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딸을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그렇게 한참 있다가 그는 일어나 엄마를 보고 웃음 지으면서 “됐어요. 예수님께서 바라시면 저도 바라요.”라고 말했습니다. 그 후 키아라는 예수님께서 겟세마니에서 죽음을 받아들이신 것과 같이 자신에게 닥친 고통과 죽음을 받아들이고,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나 하느님의 품으로 갔습니다(두봉 주교의 『가장 멋진 삶』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뜻이 아니라 당신을 보내신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셨기 때문에 죽음의 길마저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을 나도 바라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길입니다. 예상하지 못한 일들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 실천하려면 우리는 사랑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
예수님께서는 철저하게 아버지의 뜻을 따르십니다. 당신 뜻으로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하십니다. 당신의 능력까지도 아버지께서 주셨음을 선언하십니다. 그러기에 당신을 따르는 것이 곧 아버지를 따르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렇듯 예수님의 ‘모든 것’은 순명을 기초로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순명은 쉽지 않습니다. 평소의 노력과 훈련이 없으면 더욱 어렵습니다. 가장 큰 순명은 ‘자연’에 순응하는 일입니다. 살다 보면 가끔은 ‘가진 것’을 잃게 됩니다. 폭풍에 휩쓸리거나 바람이 쓸어 갑니다. 대자연의 ‘진짜 바람’도 있지만, 사람이 만든 ‘태풍 같은’ 사건이 더 많습니다.
나무는 폭풍이 불면 가지가 찢어지거나 뿌리가 뽑힙니다. 그러나 풀들은 바람보다 ‘먼저 눕고’ ‘먼저 일어나기’에 생명력을 간직합니다. 무모하게 맞서지 않는 것이지요. 잠시 바람에게 길을 비켜 준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세상에는 욕심의 폭풍에 맞서는 이들이 많습니다. 삶의 ‘우울’은 그렇게 해서 생겨납니다. 가끔은 탐욕 앞에서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뜻에 순명하는 모습입니다. 강한 바람이 불면 ‘풀’들은 몸을 숙입니다. 그 모습에서 자연의 지혜를 배웁니다. 그 모습에서 사람의 앞날을 봅니다.
어렸을 때 현미경을 처음 접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제 바로 위의 형님이 어디서 빌려왔다면서, 현미경을 직접 볼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현미경의 슬라이드글라스 사이에 나뭇잎, 물, 흙 등을 넣고는 현미경 렌즈로 보았습니다. 직접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눈으로 도저히 볼 수 없는 것들이 현미경 렌즈 안에 있었습니다.
내 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현미경으로 보면 선명하게 보입니다. 그 배율이 높아질수록 더 많은 것을 볼 수가 있겠지요. 그렇다면 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것도 없다.”라고 말하는 것이 정답이라 할 수 있을까요?
어렸을 때의 이 기억을 떠올리며, 하느님이 비록 내 눈에 직접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다”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를 찾을 수 있게 됩니다. 인간의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인해 당연히 볼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보기 위해서는 마음의 현미경이 필요합니다. 기도와 묵상, 그리고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믿음이 커지는 사람만이 하느님을 알아볼 수 있는 마음의 현미경을 장착하게 됩니다.
하느님을 나의 눈으로 볼 수 없다며 안 계신 분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먼저 마음의 현미경을 구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믿지 않는 유다인들에게 아버지 하느님과의 관계에 대해 말씀해주십니다.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했다는 점을 두고 유다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말씀을 “땅을 다시 일으키려고 내가 너를 백성을 위한 계약을 삼았다.”라고 전해줍니다. 그리고 이는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인해서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믿지 않음으로 인해서 계약이 이루어진 것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은 아버지와 하나의 본질이며 당신과 아버지께서 공통으로 지니신 본성에 어긋나는 행동은 할 수 없으므로 당신의 뜻과 아버지의 뜻은 하나임을 보여주십니다. 아들이 아버지와 같은 일을 한다는 것은 두 분의 본질이 하나임을 증명해 줍니다. 그래서 이런 이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중풍 병자의 치유보다 더 큰 일들을 당신 아들에게 보여주실 것입니다. ‘더 큰 일’이란 하느님만이 지니신 권능, 곧 부활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되살리시는 분으로서 당신께서 아버지와 대등하심을 또다시 확증해 주십니다.
이 주님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요? 마음의 현미경 없이는 도저히 주님을 볼 수 없으며, 주님과 함께 할 수도 없습니다.
당신의 존재는 우연이 아니다. 특별한 재능을 받았으며, 사랑을 받으며 세상에 나왔다(막스 루카도).
다비드상에 담긴 이야기
미켈란젤로는 키가 작아서 4m가 넘는 다비드상을 조각할 때 어려움이 많았다고 합니다. 어느 날, 당시 피렌체 행정부의 고위 관리가 미켈란젤로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 작품은 정말로 훌륭하지만, 코가 지나치게 높고 커서 전체 조각상과 조화가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작품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것이 기분 좋지 않았을 것입니다. 작가의 고집을 부려서 화를 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곧바로 날카로운 정을 다비드의 코에 대고 망치질을 했습니다. 망치질과 함께 대리석 가루들이 바닥으로 떨어졌지요. 이 관리는 오히려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말을 따르는 미켈란젤로가 정말 고마웠습니다.
사실 미켈란젤로는 다비드의 코에는 손도 대지 않고, 손안에 미리 쥐고 있던 대리석 가루를 조금씩 떨어트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서로의 만족을 가져올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런 지혜가 없는 것 같지만, 한 번 더 생각하고 상대방 처지에서 바라본다면 지혜로운 말과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성공과 기쁨의 날에도 함께 하시지만, 실패와 슬픔의 깊은 밤에도 함께 하시는 주님!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주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의 입을 통해서 우리 인간을 향한 당신의 뜨겁고 절절한 사랑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계시는데,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눈시울을 뜨겁게 만듭니다. 이 세상 그 어떤 부모, 그 어떤 연인들이 이같은 절절한 사랑 고백을 할 수 있을까, 싶습니다.
“시온은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고 말하였지.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야서 49장 14~15절)
예기치 않은 고통이나 환난이 찾아올 때 우리 역시 이스라엘 백성처럼 부르짖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성공과 기쁨의 날에도 함께 하시지만, 실패와 슬픔의 깊은 밤에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주님이십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등을 돌리고 떠나간다 할지라도 주님만큼은 항상 나를 떠나지 않으시고, 나와 함께 하시며 끝까지 응원하시고 지지해주시겠다니, 이보다 더 기쁜 소식이 어디 있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영원하지 않은 우리 인간 존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런저런 유형의 버림을 받습니다. 결코 원치 않았지만 활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속절없이 세월이 흐르고, 든든한 산 같던 아버지, 편안한 언덕 같던 어머니도 병들고, 늙고, 세상을 떠납니다. 엄중한 세월의 순환 주기 앞에서 그 누구도 영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만은 다릅니다. 세상의 부모들과 사랑했던 사람들, 믿었던 친구들과 숱한 인연들이 세월과 더불어 사라지고 떠나가지만 주님만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따지고 보니 참된 아버지요 진정한 어머니는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여인이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이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란 주님 말씀이 참으로 오래도록 제 가슴 속에 큰 여운을 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 한명 한명을 바라보는 주님의 시선은 분노와 실망의 시선이 아니라 한없이 따뜻하고 너그러운 시선입니다. 마치 갓 태어난 젖먹이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시선처럼 말입니다.
갓 태어난 아기를 바라보는 통상적인 어머니들의 시선은 어떻습니까? 자신의 몸을 통해 세상에 나온 자신을 꼭 빼닮은 한 생명체의 모습이 너무 신기하고 놀라울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너무나 사랑스럽고 대견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행여 어디 잘못되기나 할까? 혹시라도 어디 아플까 늘 걱정스러울 것입니다. 애지중지(愛之重之) 혹은 노심초사(勞心焦思)란 말이 딱 맞을 것입니다.
오늘 나를 바라보시는 주님의 시선 역시 은혜롭게도 애지중지, 노심초사가 가득 담긴 시선이 틀림없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나를 떠나간다 할지라도 끝까지 내 곁을 떠나가지 않으시는 분, 끝까지 내 등 뒤에 서서 나를 응원하시는 분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내가 깊은 수렁에 빠져 허덕일 때, 친구들이며 지인들이 다 나를 두고 수군거릴 때도 끝까지 나를 잊지 않고 보살피시는 분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떠나 큰 죄를 짓고 방황할 때조차도 끝까지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나를 귀히 여기시는 분, 나를 존중하고 나에 대한 구원의지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많은 고을을 다스리려면!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들이 아버지와 대등해지는 방법을 말씀해주십니다. 아들이 아버지와 대등해지는 방법은 ‘아버지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아버지가 하는 일을 할 수 있으면 아버지와 대등해진 것입니다. 자녀가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할 수 있다면 아버지처럼 성장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아버지와 대등해진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아버지와 함께 다스리게 된다는 뜻입니다. 루카 복음에서 다섯 미나로 열 미나를 벌어들인 종에게 주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잘하였다, 착한 종아! 네가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을 가져라.”
이 말은 하느님께서 당신이 다스릴 권한을 착한 종에게 준다는 뜻입니다. 고을은 분명 사람이 사는 마을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하늘에서 사람을 다스리게 된다는 말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일을 하는 것과 사람을 살리는 것, 곧 구원에 따른 ‘심판’이 연관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일을 하시는 것이 심판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넘기셨다.”
하지만 예수님은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어차피 모든 인간이 원죄로 심판받아 태어나기 때문에 예수님의 일로 구원받는 사람만이 심판을 이기게 됩니다. 아버지의 일이란 이렇듯 누군가를 구원하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결혼한 지 6주 만에 사라진 남편의 행방을 70년 뒤에 알게 된 여인이 있습니다. 1940년 스물두 살의 페기는 공군 조종사 빌리를 만났습니다. 둘은 단숨에 사랑에 빠지고 얼마 후 결혼식을 올립니다.
그러나 행복한 신혼의 달콤함은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것입니다. 공군 중위였던 빌리는 나치에게 점령당한 프랑스로 발령이 나서 부부는 쓰라린 이별을 합니다.
페기와 빌리는 그것이 마지막 인사였고 전쟁 내내 편지 한 통도 받지 못하며 긴 전쟁이 끝나도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페기는 재혼도 하지 않으며 70년 동안 남편을 기다립니다. 하지만 폐기 역시 자신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더 늦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남편을 보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얼마 전 국회의원 톤 베리에게 보낸 편지가 답장이 옵니다. 그녀는 떨리는 마음으로 편지를 열어보는데, 빌리는 기록에 따르면 임무 수행 중 실종 상태라고 하고 생사는 알 수 없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페기는 여기서 멈출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빌리와 관련된 모든 곳을 수소문하며 진실을 밝힙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페기의 삼촌이 직접 군에 찾아가 군사기록을 밝히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들은 6개월 뒤 페기와 친척들에게 뜻밖의 소식을 전합니다. 한 프랑스 여성이 얼마 전 이미 복사본을 가져갔다는 것입니다.
페기와 친척들은 당장 그 여성을 찾기 시작하였고 얼마 후 군의 도움으로 그 여성과 연락이 닿았습니다. 빌리는 프랑스 마을의 영웅이었습니다. 1944년 빌리는 적의 폭격을 맞아 방트 마을 인근에 추락하고 있었고 전투기는 화염에 싸여 아래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는데 빌리는 그냥 추락한 게 아닙니다. 그는 무고한 민간인 수백 명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죽어가는 순간에도 조종간을 마을 반대쪽으로 돌리고 있었으며 인적이 드문 장소에 추락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자신을 위해 희생한 빌리의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식까지 치러주었고 70년 동안 매년 빌리의 업적을 기리는 행사를 열고 있었습니다. 방트 마을의 주민들은 마을에 빌리의 이름을 딴 거리를 만들어 그를 기리고 있었습니다. 현재 빌리의 유골은 노르망디 국립묘지로 옮겨졌고, 방트 마을 빌리의 무덤은 영웅을 추모하는 의미로 남겨져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페기를 대대적으로 환영했고, 70년 만에 남편을 만난 페기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출처: ‘결혼 6주 만에 사라진 남편’, 유튜브 채널, ‘포크포크’]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어 당신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여주신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아버지의 일이란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그대로 보고 따라서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당신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사랑하라고 명하십니다. 그러면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이들은 구원을 받고 구원의 공동체가 형성됩니다.
빌리의 희생으로 방트 마을 수백 명의 사람이 살아날 수 있었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교회라는 공동체가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희생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은 교회 밖에서 심판을 맞게 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일을 하셨기 때문에 하늘에서 교회라는 고을을 다스릴 권한을 가지십니다. 교회를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다스림을 ‘왕직’이라 합니다.
예수님은 이 지상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그 모습대로 당신을 십자가에 희생하셨기에 교회라는 마을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나라에서 교회를 다스리게 되셨습니다. 우리 또한 그리스도께서 우리 앞에서 행하시는 모든 일을 보고 그대로 행하여 하늘 나라에서 여러 고마을 다스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부모의 사랑으로 가족이라는 작은 마을이 생기듯, 우리도 사랑하면 마을이 만들어집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만든 마을이 있고, 마더 데레사가 만든 마을이 있으며, 이태석 신부님이 만든 마을이 있습니다. 모든 마을은 그리스도를 따른 피의 희생으로 세워진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가져가야 하는 유일한 인생의 결과물은 이렇게 나의 피로 세워진 사랑의 공동체들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계몽사’라는 출판사가 있습니다. 저도 계몽사의 책을 읽었습니다. 예전에는 계몽이라는 말을 자주 들었습니다. 무지하고, 무식한 사람을 깨우치는 의미가 있습니다. 선진 문명과 문물이 뒤쳐진 문명과 문물을 이끄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계몽주의’라는 시대정신이 있었습니다. 계몽주의는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정신이었습니다. 그러나 계몽주의는 강대국의 약소국에 대한 지배를 합리화하는 위험이 있습니다. 계몽주의는 다양한 문화와 역사를 무시하는 위험이 있습니다. 21세기는 ‘공감의 시대’라고 이야기합니다. 서로 다른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100세 시대를 살면서 계몽의 시대보다는 재미와 의미의 시대를 이야기합니다. 은퇴한 후에 살아야 할 시간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가르치고, 누군가에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나누는 시대입니다. 재미와 의미가 만나서 오늘을 충실하게 사는 것이 공감의 시대를 살아가는 지혜입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는 계몽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계명과 율법을 가르쳤습니다. 사람들은 계몽의 대상이었습니다. 율법과 계명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죄인이 되었습니다. 율법과 계명을 지키지 못하는 상황에 있는 사람도 죄인이 되었습니다. 계몽의 시대에는 권위와 가식이 있었습니다. 차별과 통제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만남을 생각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계몽의 만남이 아니었습니다. 공감의 만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와서 보라고 하셨고, 제자들은 예수님 곁에서 머물면서 함께 지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벗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권위와 차별이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랐던 것은 권위와 질서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나라를 공감하였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핵심인 성체성사는 아무런 조건 없이 우리의 믿음으로 예수님과 하나 되는 성사입니다. 이보다 완벽한 공감은 없습니다. 교회가 생기를 잃어버리고,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것은 교회가 계몽의 가치를 우선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가시어 이사야서를 읽으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오빠 나자로를 잃고 슬픔에 잠겨있는 마르타와 마리아를 위로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지 사흘이나 된 나자로를 무덤에서 나오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소경, 나병환자, 중풍병자, 청각장애자의 고통을 아셨습니다. 그들의 눈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셨습니다. 제자들에게도 권한과 능력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병을 고치는 능력, 마귀를 쫓아내는 능력, 복음을 선포하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측은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보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기도드렸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5,000명이 먹고도 12광주리가 남았습니다. 교회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공감의 가치를 회복해야 하지 않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같은 마음’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품어주는 사랑입니다. 나에게 잘 해주는 사람에게만 베푸는 사랑은 세상 사람들도 할 수 있습니다. 갚을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빌려주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하느님의 마음은 세상 사람들의 마음과는 달랐습니다. 하느님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은 ‘사랑’의 마음입니다. 이 사랑이 생명을 살리고, 이 사랑이 희망을 주고, 이 사랑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신앙인들은 하느님을 닮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삶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어미가 자식을 잊을지라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을 잊지 않고 사랑하신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은 자비와 용서, 친절과 온화함입니다. 우리들 모두는 하느님의 모습을 우리의 삶 속에서 드러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생의 전부입니다.”
신앙인의 믿음 골자인 4대교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이제는 삼위일체라 하면 성부 성자 성령으로 세분이 하나라고 압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 시대에 사람들께 자신을 설명하기란 참 어려웠죠.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님과 그 말씀에 대한 책임인 성령도 힘들었죠.
하느님(성부)의 말씀(예수님)과 책임(성령)의 고차원 활동 이해어렵죠.
이천년 지난 지금 신앙인의 믿음 골자는 삼위일체가 우선자리입니다.
천주존재 강생구속 상선벌악(賞善罰惡)셋을 함께 4대교리라고 합니다.
시대와 학문발전 따라 점점 설명도 진화 되었으니 지금은 다행입니다.
그래도 사람의 지능으로 이해는 가도 인간능력은 실제 미치진 못하죠.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과 대화를 나누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
이 말씀과 같은 맥락에서 요한 복음 13장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다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예전에 어릴 적에 방학이 되면 한번은 평택에 있는 큰 집에 그리고 한번은 전주에 있는 이모 댁에 며칠 동안 머물면서 사촌들이랑 열심히 놀다 오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며칠 동안 그 곳에 머물다 돌아오면 저도 모르게 제가 말할 때 그 지방의 사투리를 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동네 친구들이 제가 사투리를 쓴다고 놀리곤 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와 비슷하게 지난번에 티브이 프로그램을 보니 한 외국 사람이 기가 막히게 경상도 사투리를 잘 쓰는 것이었습니다. 인터뷰를 하던 이가 왜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지 물어보니까 자신을 가르쳐준 선생님이 경상도 분이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보고 배우는 것이 어떤 것인가가 정말 중요합니다. 맹자 어머니가 자식을 위해서 이사를 세 번이나 했다는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라는 말도 있듯이 우리도 무엇을 보고 배우는가가 정말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세상 어떤 스승과도 비교할 수 없는 너무나도 위대한 스승이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아버지의 모습을 따라 사셨고, 우리는 예수님의 모습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참된 구원의 길임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부전자전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해 주십니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요한 5,19)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친밀하게 부르시는 것이 영 못마땅합니다. 안식일을 어기는 죄인이 자칭 하느님의 아들로, 하느님을 서슴없이 아버지라 부르다니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지요.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나는 듣는 대로 심판할 따름이다. 그래서 내 심판은 올바르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요한 5,30)
예수님께서 누차 당신과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해 설명하십니다. 그러나 마음을 열고 듣지 않는 한, 그분의 죄목은 점점 더 가중될 뿐이지요.
예수님의 존재, 말씀, 행위는 하느님 아버지를 이 세상에 보여줍니다. 사람이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 없는 하느님을 아드님께서 드러내십니다. 예수님은 사랑이신 하느님이 육화하신 사랑이십니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요한 5,24)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는 이는 아버지를 압니다. 예수님을 통해 아버지가 누구시며 어떤 분이신지 감지해 가며 아버지를 향한 사랑이 점점 더 커집니다. 결국 아드님을 믿고 아버지를 사랑하는 이는 성삼위 하느님의 사랑 안에 함께 스며들어 그 사랑을 누립니다. 그에게는더 이상 심판이 필요 없습니다. 이미 그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까닭입니다.
제1독서에는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고 또 그대로 행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 49,15)
인간 세계에서 최고의 사랑을 설명하는 표상으로 흔히 어머니의 사랑을 들지요. 그런데 주님의 사랑은 인간이 말하는 이 극치의 사랑조차 넘어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만큼 깊고 진하며 무한히 헌신하기 때문입니다.
결코 잊지 않으시는 사랑! 아버지의 그 사랑을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완성하십니다. 그분은 극한의 죽음이 닥치는 순간까지 우리 이름을 잊지 않으셨지요. 우리가 받을 심판을 죽음으로 무마하셨으니 당신이 속량하신 모든 존재의 이름은 예수님의 심장에 새겨졌고 어깨 위에 지워졌습니다!
"은총의 때이옵니다."(입당송)
사순 시기가 깊어갈수록 말씀은 징벌과 심판의 위협보다 주님의 지극한 사랑과 어지신 자비를 일깨워 줍니다. 사랑을 깨달은 영혼이 죄를 끊어내고 더 깊은 사랑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지금이 은총의 때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절대로 잊지 않으시는 그 사랑 때문에 다시 주님께로 마음을 돌려 되돌아가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주님을 믿고 성삼위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는 이는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이미 지고의 사랑을 누리며 사랑이 되어가고 있는 중이니까요. 그런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나는 해야 합니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께서
하시니
나는 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하라시니
나는 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듯이
나는 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것만을
나는 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도록
나는 해야 합니다
다시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다시’라는 말은 ‘하던 것을 되풀이해서’ 라는 뜻을 담고 있다.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요한5,21)
살다보면 죽는 순간이 많다. 재기 불능의 상황에 직면하기도 한다. 쓰레기처럼 버려질 것들이었다. 살려놓으면 또 배은망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죽지않고 살려 놓는다. 하느님의 자비 덕분이다. 벌하시려다가도 이를 거두어 들이신다. 다시 생명이다.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당신 아들을 죽였다.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다. 배은망덕의 극치였다. 이로써 그들이 지은 죄 때문에 생명으로 건너뛰기가 불가능해졌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자비로써는 안 됨을 아셨다. 이번에는 아드님의 죽음을 통해 생명으로 건너 뛰게 하셨다. 이번엔 자비에 희생이 하나 더 추가되어 사람을 죽음에서 생명이 되게 하셨다. 이렇게까지 인간을 극진히 사랑하셨다.
자비는 다시 희생으로 살아난다. 늘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가 아드님의 희생으로 다시 새롭게 태어난다. 하느님께서 아드님께 어리석음의 희생을 살도록 분부하셨다. 그 어리석음의 희생이 우리를 다시 살렸다. 다시 살리기 위해 보여주신 하느님 자비와 희생의 완결판의 요약이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송영진 모세 신부님
<사순 제4주간 수요일>(2021. 3. 17. 수)(요한 5,17-30)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 때문에 유다인들은 더욱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분께서 안식일을 어기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요한 5,17-18).”
1)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쉬지 않고 일하시니 나도 쉬지 않고 일하는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당신이 안식일에도 쉬지 않고 일하시는 이유를 설명하신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단 한 순간도 중단하지 않으시고 언제나 항상 사랑과 자비를 인간들에게 베풀어 주십니다.(하느님은 안식일에도 인간들을 보살피는 일과 인간들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 주는 일을 멈추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안식일에도 쉬지 않으시고,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창세기를 보면, “그분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창세 2,2).”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하시던 일’이라는 말은 천지창조 사업을 가리킵니다. ‘쉬셨다.’ 라는 말은 아무것도 안 하셨다는 뜻이 아니라, ‘천지창조 사업의 완성’을 뜻하는 말입니다.(하느님께서 이렛날에 쉬셨다가 여드렛날부터 다시 일을 하신 것은 아닙니다. 천지창조 이야기에서 여드렛날은 없습니다. ‘지금’은 ‘이렛날’의 연속입니다.)
십계명에 “안식일에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고 되어 있는 것은, 중노동에 시달리는 사람들, 특히 종들에게 휴식을 보장해 주라는 뜻입니다(탈출 20,8-11; 신명 5,12-15).
그래서 안식일에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은, 사랑과 선행 실천마저도 중단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평소에도 늘 사랑과 선행 실천을 해야 하지만, 안식일에는 특히 더 열심히 해야 합니다.
2) 하느님의 사랑은 ‘숨을 쉬는 일’과 같습니다. 의식을 하든지 안 하든지 간에 우리는 끊임없이 ‘숨’을 쉬고 있습니다.
그 ‘숨’이 멈추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처럼 하느님의 사랑이 멈추면 우리는 살 수가 없습니다. 또 하느님의 사랑은 ‘심장이 뛰는 일’과 같습니다.
‘숨’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의식을 하든지 안 하든지 간에,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우리의 심장은 멈추지 않고 계속 뛰고 있습니다. 심장이 멈추는 날이 곧 죽는 날입니다. 우리에게 베풀어지는 하느님의 사랑도 바로 그것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던 당신의 사랑을 거두시면, 우리는 그대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단 한 순간도 하느님의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그런데도 고마운 줄도 모르고 살 때가 많습니다.)
3)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이 하느님과 대등한 존재라고 말씀하신 것을 신성모독 발언으로 생각해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결국 죽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은 ‘진리’이며,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은 분이시고, 하느님이신 분”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들은 ‘구원의 진리’를 거부하고 배척한 사람들입니다.
‘구원의 진리’를 거부하고 배척하는 것은 스스로 멸망을 선택하는 것입니다.(반대로, 유대인들의 눈에는, 예수님을 믿고 있는 우리 모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인으로 보일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과 안 믿는 사람들은 이렇게 너무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이 간격은 구원과 멸망 사이의 거리입니다. 지금 이 말은, 신앙생활은 목숨을 걸고 하는 생활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요한 5,25).”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 선을 행한 이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을 저지른 자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다(요한 5,29).”
1)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믿는 대로 실천하면서 살았던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때가 온다.” 라는 뜻입니다.(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더라도 믿지 않으면, 그것은 들은 것이 아닙니다. 또 말씀을 믿더라도 실천하지 않으면, 그것은 믿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라는 말씀은, “이미 시작되었다.” 라는 뜻입니다. ‘종말’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이미’ 시작되었고, 지금 ‘완성’을 향해서 나아가는 중입니다. 우리는 지금 종말 한가운데에서 살고 있습니다.(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종말의 날’은 사실은 ‘종말이 완성되는 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어야 할 때도 지금이고, 믿음을 실천해야 할 때도 지금이고, 회개해야 할 때도 지금입니다. 그런데 ‘지금’이라는 시간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나중으로 미루지 말고, 서둘러야 합니다.
2) 일부 사이비 종파에서는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천당에 간다고(구원을 받는다고) 선전하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선을 행한 이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을 저지른 자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다.” 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은 선행, 사랑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선행과 사랑 실천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 사이비 믿음입니다. 믿는다고 주장하면서도 악을 저지른다면, 그것은 믿는 것이 아니고, ‘믿는 척’을 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일은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는 일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 구원을 받는 일입니다. ‘지금’이라는 시간은, 살고 싶다면 회개하고 보속하라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마지막 기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을 훈련시키신다.
-아우구스티누스-
조금 앞에서 우리는, 아버지께서는 아들이 하지 않는 일을 하신다고, --- 곧 아버지는 행하시고 아들은 보는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아버지께서는 일하시고 아들은 일하지 않고 그것을 보며 아버지께서는 당신께서 하시는 일을 보여 주신다고 생각하는 육적인 이해가 우리 마음에 살금살금 스며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하지 않는 일을 아버지께서 하고 계셨듯이 이제는 아버지께서 하지 않으시는 일을 이들이 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분께서는 어쩌면 이렇게 우리를 오락가락하게 하여 우리 머리를 복잡하게 만드시는지요! 그분은 우리가 인간적 이해에 안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이리저리로 인도하십니다. 변화로 우리를 훈련시키고, 훈련으로 우리를 정화하고, 정화를 통하여 우리가 진리를 받아들이고 능력을 갖추어 충만해질 수 있도록 하시려는 뜻입니다.
성사
김효석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은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수행하는 권한을 지닌 분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신학자들은 예수님을 일컬어 하느님의 성사라고 표현합니다. 성사란 보이지 않는 은총을 볼 수 있도록 해주는 표지나 상징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드러내려 오신 분이 아니라, 하느님을 보여주고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을 세상에 드러내시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성사가 됩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런 예수님을 세상에 드러내는 성사가 됩니다. 교회는 교회의 의지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드러내 보이시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할 때에만 참다운 교회가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빛을 받아 그 빛을 세상에 반사하는 달과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성사가 됩니다. 저마다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는 세상의 가치관과는 사뭇 다릅니다. 내 뜻과 의지가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과 의지를 따르려고 하는 것이 교회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이런 모습을 잃어버린 공동체는 짠 맛을 잃어버린 소금과 같습니다. 교회가 예수님의 모습을 세상에 보여주지 못하면 세상은 곧 교회를 외면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셨듯이 교회도 예수님의 복음을 살아가야 합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언젠가 한 번 선배 신부님께, “뭘 그렇게 열심히 하세요? 좀 쉬엄쉬엄하세요.”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그 신부님이 오늘 복음의 구절로 답을 던져 주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 그 신부님은 예수님께서 세상을 구하시기 위해 동분서주하시던 그 모습 그대로 살고 싶으셨는가 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들은 당대 유다인들은 “그분께서 안식일을 어기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셨기 때문”(18절)에 주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여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시비비를 거는 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어 당신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여 주신다. 그리고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들을 아들에게 보여 주시어, 너희를 놀라게 하실 것이다.”(19-20절)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시는지 보아오셨고, 지상에 내려오셔서 자신이 아버지와 함께 보고 실행해왔던 그대로 실행하신다고 이르십니다. 그리고 지금 눈앞의 신기한 일보다도, 우리가 상상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더 중요하고 위대한 주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날 것이라고 미리 일러주십니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24절)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성을 발견하는 이들은, 즉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을 깨닫고 알아보고 믿는 이들은 믿고 따르는 순간부터 이미 영원한 생명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시고는 지금부터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만이 아니라, 이미 죽은 이들도 새로운 생명의 나라로 초대받았다고 선언하십니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25절) 그 이유는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아들도 그 안에 생명을 가지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26절)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주 하느님께서 영혼과 생명이 죽은 이들에게 오셨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이들은 이미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새로운 생명의 세계로 초대받아 새로워집니다.
이렇게 생명을 지니시고 죽은 이들을 복음의 빛으로 비추시고 새로운 생명으로 길로 이끄시며 그렇게 하여 살리시는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는 생명을 가지고 있는 모든 이들의 심판자이십니다. “아버지께서는 또 그가 사람의 아들이므로 심판을 하는 권한도 주셨다. 이 말에 놀라지 마라.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의 목소리를 듣는 때가 온다.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 선을 행한 이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을 저지른 자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다.”(27-29절) 그 심판의 기준은 계명 준수와 업적이 아니라 사랑과 사랑을 향한 희생 봉사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생명의 구원을 위한 생생한 희생과 봉사는 우리를 새 생명의 길로 안내할 것이며, 이미 심판의 관문을 건너선 이들의 대열에 들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가르침이 헛것이나 선언만이 아니라, 아버지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권한이며 사명이라는 것을 알려 주십니다.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나는 듣는 대로 심판할 따름이다. 그래서 내 심판은 올바르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30절) 주 예수님의 말씀이 비춰주시는 새 생명의 길로 나아갑시다.
김성인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베짜타 못 에 있던 사람을 고쳐주신 후, 안식일 규정을 어긴 당신을 못 마땅하게 여기는 유다인들에게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라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들은 유다인들은, 더욱 화가 나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 규정을 어기실 뿐 아니라,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들은, 많은 것을 우리에게 이야기하는데, 요약하면, 당신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 이시며, 동시에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시라는 것, 그래서, 당신 안에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습을 온전히 드러내신다는 것 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예수님의 이 말씀에는, 유다인들을 향한 안타까움이 진하게 묻어납니다.
‘이 어리석은 사람들아.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면, 지금 나와 같이 하실 것인데, 어찌하여 너희들은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느냐? 이 세상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신 하느님께서, 서른 여덟 해 동안이나 앓고 있던 당신 백성이, 안식일 이라고 해서, 건강해지는 것을 금하시겠느냐? 건강해지고 싶은 그 사람의 간절함을, 안식일 이라고 하여, 일분 일초 라도 늦춰지는 것을 원하시겠느냐?’
‘하느님께서는 오늘 내가 너희들에게 보여준 것처럼, 어떻게 해서든, 너희들을, 행복하게 해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시며, 그 일은 나를 통해 완성될 것이다. 내 안에서, 너희들을 끔찍이도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발견하고, 받아들이고, 또 믿어라.’
우리 모두를 향해,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감사드리며, 나도 그렇게 하도록 합시다.
삼위의 일체를 보여주시는 주님,<요한5/17-30>3/17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오늘 하느님의 아들이 이신 주님은 아버지의 뜻과 일치된 일을 하시려 세상에 오시어 한 털끝도 어김없이 실천하시다고 하시며 “아무 것도 스스로 하시는 일이 없다” 하십니다. 이 공동체에 바로 오전한 공동체이며 아버지 것은 모두 아들의 것이고 아들의 것은 모두 아버지의 것이 되어 내것 네것 구별 없이 온전히 하나로 귀결되고 주님의 한 행동 하나 하나은 아버지의 뜻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차별 없이 성호경을 놓으며 성부와 상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하지만 하느님을 모상으로 창조된 우리 사람은 삼위 일체 이신 하느님을 믿으며 그 그믿음을 하느님이 하시는 것 같이 실천하지 못합니다.
나라나 가정이나 각 공동체는 각 나는 나대로 너는 너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함으로 분열의 상태에서 서로 뜻을 일치하지 못하여 갈등과 전쟁이 일어납니다.
고동체의 일치를 방해하는 것 과거 현재 미래를 가가 따로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 “ 지금 바로 그때다.” 하는 말씀안에 하느님은 현제만 있고 과거나 미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일치를 위해서 현재만 생각하여야 합니다. 사람은 영원한 존재로 태어났습니다. 서로 차별은 어제는 어떤일이 있었고 내일을 무엇을 기대하기 에 문재가 많이 생깁니다. 우리의 본질 적 삶은 현제가 제일 중요합니다. 어제의 일은 쓰례기로 취급하고 내일은 올지 않을지 몽르는 미지의 세상입니다. 분명한 것은 오늘 지금입니다. 어제 원수였다고 오늘 그연장 선에서 이러 궁 저러 궁 하며 해야될 일을 망사리는 사람과는 일이 성랍되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본질 적으로 영원 존재이니 어제도 없고 내일도 없습니다.
두 번째 이 일의 성과는 누구의 몫이냐? 누구의 영광이냐? 가 아니라 몫을 나누는 것도 아니요 자기몫을 따로 챙기는것도 아닙니다. 하느님이 우주를 창조하시였다면 말씀이 있어 즉 주님의 말씀 이면 아버지의 뜻 안에 말씀이고 성령의 활동안에 말씀입니다.
성부 수난설을 아십니까? 아들 예수가 십자가에 죽을 때 그 자리에 성부도 계섰고 성령도 함께 계셨습니다. 세상에 오신 예수님만 십자가에 죽음을 당하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도 설영도 함께 시바가 위에 현조하시였습니다. 한가지 일이 성부성자 성령의 일라면 한 가지 사건도 모두의 사건입니다. 이렇게 아버지의 고통은 아들이 고통이라면 한 가정 안에 한사람의 고통과 죄는 모든 이의 고통이며 죄가 되어야 오늘 지금 모두가 장신 차리고 악을 막고 성으로 이끄르려고 할 것입다. 너는 너 나는 나가 아니라 너는 나 나는 너 이기에 모두 것은 공동책임입니다. 이렇게 우리도 한 가장 한 공동체 모두가 하나되어 살 때 성부와 성자와 성령게 아멘. 이 질실과 사랑이 깃든 삶이됩니다. 우리가 하느님 차람 산다는 것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자비와 거룩함과 목표와 사랑이 온전이 하나입니다. 그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살아야 한다고 우리는 기도하고 있듯이 서로 하나가 되여 자유 평화 기쁨을 누리고 살도록 기도합니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함승수 신부님
미국에 있는 한 작은 마을에는 바위산이 있는데, 그 산에는 ‘큰 바위 얼굴’이라고 불리는, 사람의 얼굴 모습처럼 생긴 큰 바위가 있습니다. 이 마을에 살던 평범한 소년 ‘어니스트’는 어머니로부터 언젠가 큰 바위 얼굴과 모습이 닮은 위대한 인물이 나타나리라는 전설을 전해듣고는, 어서 그런 사람을 만나보았으면 하는 기대를 갖게 됩니다. 그러는 한편, 자기 자신은 어떻게 살아야 ‘큰 바위 얼굴’을 닮은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를 항상 생각하면서 그의 이름대로 진실하고 겸손한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돈 많은 부자, 싸움 잘하는 장군, 말 잘하는 정치인, 글 잘 쓰는 시인이 나타나 사람들 사이에서 주목을 받았고, 그럴 때 마다 어니스트는 ‘저 사람이야말로 전설에 나오는 그 인물이 아닐까’하고기대를 걸었지만, 그 때마다 ‘그는 그 정도로 훌륭한 사람이 아니다’라는 결론에 이르러 실망하곤 했습니다.
어느 덧 나이가 들어 노년기에 접어든 어니스트는 목수 일에서 은퇴한 뒤 사람들을깨우치는 설교가가 되었는데, 어느 날 어니스트의 설교를 들으러 온 시인은 어니스트가 곧 ‘큰바위 얼굴’과 닮은 인물임을 깨닫게 됩니다. 놀란 시인이 사람들에게 "보시오! 어니스트씨야말로 큰 바위 얼굴이랑 비슷하지 않은가요!?"라고 외치자, 사람들은 비로소 전설 속의 인물이 나타났다는 사실에 놀랐지만, 정작 어니스트본인은 자기보다 더 현명하고 나은 사람이큰 바위 얼굴과 같은 용모를 가지고 나타날 것이라고 말하며 자리를 뜹니다.
미국의 유명한 작가 ‘너새니얼 호손’이 쓴 <큰 바위 얼굴>이라는 소설의 줄거리입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어니스트’는 특별히 내세울 것이 없는 평범한 소년이었지만, ‘큰 바위 얼굴’을 닮은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열망을 가지고 평생을 노력한 끝에 정말 그런 사람이 되지요.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마음에 ‘담고’ 살다보면, 그 사람을 ‘닮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 아버지와 그분의 뜻을 마음에 담고 사셨기에, 하느님을 온전히 닮은 존재가 되셨지요. 그랬기에 하느님 아버지께서 보여주신 올바른 길만을 따라 걸으셨고, 언제나 하느님 아버지와 함께 하시면서 그분께서 바라시는 뜻을 온전히 실천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을, 그분의 사랑과 자비를 온전히 닮은 존재가 되셨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고, 그분의 행동을 통해 하느님의 마음을 알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면 그분을 닮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말로는 ‘천주교 신자’임을 자처하면서, 정작 행동이나 삶은 그분과 전혀 상관없는 모습으로 살아간다면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 뜻, 내 욕심과 고집을 비워내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먼저 헤아리고 따라야 합니다.
위로
인영균 클레멘스 신부님
어제 오후 시간이 나서 수도원에서 4Km 정도 떨어져 있는 ‘삼청 공소’에 걸어서 다녀왔습니다. 걷기에 참 좋았습니다. 맑은 햇살이 참 좋은 날이었습니다. 삼청공소는 나환우 정착촌에 있습니다. 우리 선배 신부님들이 세운 마을이지요. 참 오랜만에 가봤습니다.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닭똥 냄새가 찐하게 코에 들어왔습니다. 양계 사업으로 생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새 집들이 많이 있었지만 거의 그대로였습니다. 오래 전 나도 몇 차례 나환자를 위해서 이 성당에서 미사를 했습니다.
성당 앞에서 한 할머니가 묻습니다. “어데서 오셨습니까?” 나는 “수도원에서 왔습니다”고 대답했지요. 낯선 사람이 들어왔으니 묻는 게 당연합니다. 그 할머니는 성당에 들어가서 조용히 기도합니다. 무엇을 위해 기도하는지 모르지만 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 작은 기도의 마음이 온 세상으로 퍼져나가 듯이 거룩합니다. 나환우 할머니의 기도가 나를 위로합니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요한 5,25). 오늘 복음 말씀에서 주님은 지금 이 순간이 생명의 말씀을 들을 때라는 것을 일깨워 주십니다. 죽은 이들은 다름 아닌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가 두 손을 모을 때 생명이 우리 안에서 싹틉니다. 나환우 할머니가 이그러진 손을 모은 것처럼 우리도 짬을 내서 기도할 때 생명을 맞이합니다.
생명의 주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이사 49,15).
이근상 시몬 신부님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어 당신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여 주신다. 그리고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들을 아들에게 보여 주시어, 너희를 놀라게 하실 것이다.(요한5,20)
사랑하는 이에게 모든 것을 보여주셨다. 들어야 할 모든 것을 듣게 하시고,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알게 하셨으리라. 사랑하는 이에게 하는 행위다.
사랑받고 있다고 고백하며 사는 우리 역시 이 단순한 사랑을 믿도록 초대받았다. 보아야 할 모든 것, 들어야 할 모든 것, 알아야 할 모든 것이 지금 우리에게 이미 펼쳐져 있다. 이미 우리 눈 앞에 있는 것을 보겠다는 선택이 신앙고백임을 다시 한번 떠올린다.
주님이 우리게 알려주시는 소박하고 단순한 초대들은 얼마나 지천으로 깔려 있는가? 그것으로 족하지 못할 뿐.
"지금이 바로 그때다."(요한 5, 25)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생명의 순간은
바로 지금이다.
마음과
마음 사이에
생명이 있다.
생명은
변화이며
신뢰이다.
하느님을
향하고
하느님께
맡기는 신뢰가
우리들의 참된
변화이다.
우리는
하느님께
속한
하느님의
자녀들이다.
자녀들에게는
하느님의 선하신
계획이 이미
흐르고 있다.
신뢰는
신뢰로
이어진다.
지금이
바로
신뢰할
때이다.
사순시기는
참된 자아를
만나는 때이다.
우리에게는
하느님을
신뢰할 마음이
없다.
도움을 주고
사랑할 순간은
지금 바로
이 순간이다.
사랑의 순간을
놓치고 사는
어리석고
미련한
우리들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강하다.
더 나은
삶을 위한
살아있는
지금의
선택이다.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선택하신다.
살아나는
생명은
하느님의
뜻이다.
삶의 여정이란
하느님의 힘으로
살아가는 생명의
여정이다.
생명은
처음이신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그 여정이다.
영원하신
사랑
영원한 생명을
진실로 진실로
믿는다.
하느님의
구원을
믿어야 할
지금이 바로
그때다.
여러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내 몸이니까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자부를 하겠지만, 실제로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고 합니다. 저 역시 지금 하고 있는 것들을 떠올려보면 한때 나와는 상관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즉, 내 몸이지만 진정으로 자신을 알았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점에 대해 늘 궁금했던 어떤 학자가 연구를 했습니다. 자신을 보다 더 객관적으로 알아챌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말입니다. 바로 가장 오랫동안 함께 시간을 보내는 다섯 사람의 평균값이 곧 자신의 모습이라고 발표를 합니다. 그 이유를 우리 뇌의 특징을 들어서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뇌는 가까이 지내는 사람을 자기 자신과 동일 인물로 취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동이나 습관을 결정하는데 ‘진짜 자신’의 주관은 1/6밖에 작용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내 주변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가까이 할 것인지를 늘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점은 나 역시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내 자신은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가까이해야 하는 이유가 분명해집니다. 주님을 가까이할수록 우리의 모습도 주님과 하나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하면서 나의 행동이나 습관은 보다 더 좋은 모습으로 변화될 것이며, 나와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쳐서 이 세상 전체가 변화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주님과 가까이하지 못하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주님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면서 그저 자신이 원하는 것만 이루어주시길 청할 뿐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유다인들도 그러했습니다. 단순히 안식일 법에만 집착해서 함께 하시는 주님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 자체이신 예수님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고, 어떤 구실을 붙여서라도 예수님을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 하느님 아드님을 감히 인간이 심판하고 단죄하는 큰 죄를 범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아버지께서는 또 그가 사람의 아들이므로 심판을 하는 권한도 주셨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반드시 함께 해야 할 분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또 가까이하지 못하는 이유만을 계속해서 나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제 우리 앞에서 우리를 좋은 쪽으로 변화시켜 주시는 주님을 똑바로 보면서 함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어떠한 순간에도 우리를 잊지 않으시는 주님 안에서 참 기쁨과 평화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걱정은 내일의 슬픔을 덜어주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힘은 앗아간다(코리 덴 붐).
습관만들기.
사람들이 제게 어떻게 매일 새벽 일찍 일어날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면서 선천적으로 부지런하거나 새벽잠이 부족한 것처럼 생각하십니다. 하지만 신부가 될 때까지 저의 가장 큰 단점은 아침에 일어나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신학생 때에도 제일 힘든 것이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었지요. 밤늦게까지 일하는 것이 익숙했기 때문에, 밤늦게 자고 아침 늦게 일어나는 것이 저의 삶의 리듬이었습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자명종 시계를 이용해서 새벽 일찍 일어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불가능했습니다. 저도 모르게 자명종 시계를 꺼놓고 잠을 실컷 자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때 인터넷에서 습관을 변화시키는 커뮤니티 사이트를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이곳의 회원들과 함께 활동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새벽형 인간’이 된 것입니다.
함께라면 더 많은 것을 분명히 이룰 수 있습니다. 혼자 하려고 하지 마시고 함께 해보십시오. 분명히 자신이 원하는 습관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나의 이웃은 내 자신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확실할 때만 말하고 행동하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어린이들이 복사를 처음 설 때 매우 긴장하고 당황해하는 경우를 봅니다. 어떤 아이들은 식은땀을 흘리기도 하고 어떤 아이들은 심지어 제대에 구토를 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어렸을 때 저도 어찌 할 바를 몰라 혼났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배우는 복사를 소복사라 하고 선배 복사를 대복사라 합니다. 소복사를 몇 번 서봐야 대복사를 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소복사를 한 번밖에 서보지 않았는데 수녀님이 대복사를 시키셨습니다. 물론 후배가 보는 가운데 못한다 할 수 없어서 하기로 했지만 매우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때는 신부님이 미사 중 손 씻는 수건도 매우 복잡하게 접혀있었습니다. 저는 어찌할 바를 몰라 그것을 거의 5분 가까이 벌벌 떨면서 접었습니다. 잘 접히지 않으면 그냥 내버려두면 되는데 어찌할 바를 몰라 중요하지 않은 일에만 집중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성체축성 때 종을 쳐야 하는 것까지 잊고 그것에만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종을 치지 못해 신부님에게 혼이 났고 더 이상 복사를 서고 싶지 않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무슨 행동을 해야 할지 모른다는 것은 매우 큰 두려움입니다. 이 두려움 때문에 아무렇게나 말하게 되고 행동하게 되어 불행을 자초하게 됩니다. 모르면 물어보면 되고 모르면 알려줄 분을 바라보면 됩니다. 저는 신부님이 종을 치라고 눈짓을 하는데도 여전히 등을 보이고 수건을 접는 것에만 열중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것이 아니라 그것이 화가 나게 만든 것입니다. 아니면 수녀님을 보았어야했습니다. 두려움이 나 자신만 바라보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실수를 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가장 큰 이유는 하느님과 당신을 대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대등하다고 믿는 분이 무슨 두려움이 있겠습니까? 그 두려움을 없애는 길은 자신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뜻을 없애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보고 그대로 따라서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라고 하시며 언제나 아버지를 바라보고 계심을 알려주셨습니다.
초등학교 때 연극에서 대사를 잊어버리면 그 밑에서 알려주시던 선생님이 기억납니다. 어찌해야 할지 모를 때 바라봐야 할 분이 계시다는 것은 얼마나 큰 위안인지 모릅니다. 그러면 오히려 안정이 되어 선생님을 볼 필요도 없이 모든 대사를 다 외워냅니다. 내 힘으로 하려는 두려움이 그 두려운 결과를 초래하게 만듭니다.
워런 버핏은 주식투자로 세계의 거부가 되었습니다. 그의 지론은 확실하지 않은 것에 투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야구에서야 스트라이크 존에 볼이 들어오면 투 스트라이크 노 볼이라도 스윙을 하는 것이 낫다고 합니다. 하지만 투자는 삼진아웃이 없습니다. 그냥 한 없이 기다리다가 70% 이상 확실한 것이 있다면 그것에만 투자하면 됩니다. 그가 비록 마이크로 소프트나 아마존에 투자하지 못하였지만 그는 그것에 실망하지 않습니다. 그는 컴퓨터를 잘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아는 코카콜라와 같은 것에 투자했습니다. 코카콜라 값을 1센트 올리면 1년에 6조 원 가까이 더 번다고 합니다. 그는 그냥 그가 잘 아는 것에만 방망이를 휘두를 뿐이었습니다.
저도 확신이 없는 글들을 써서 실수를 할 때가 많았습니다. 확신 없이 하는 행동들이 항상 나와 남에게 피해를 줍니다. 그리고 자신이 왜 그랬는지 모른다고 말합니다. 불확실한 것 같으면 그냥 넘기면 됩니다. 확실한 것만 기다렸다고 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를 위해 내 앞에서 아직도 말씀하시고 행동하고 계십니다. 우리 또한 예수님처럼,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라고 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그분의 일을 바라보지 않아 헛수고가 되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겠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컴퓨터로 글을 쓰면서 좋은 점이 있습니다. 맞춤법이 틀리거나, 문장이 어색하거나, 외래어를 쓰면 빨간 줄이 그어지면서 고칠 수 있도록 알려줍니다. 대부분은 컴퓨터의 지시를 따르지만 강조하기 위한 말이나, 특별히 쓰는 외래어는 그냥 사용하는 편입니다. 그런데도 글 아래에 빨간 줄이 있으면 다시 고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데 사람이 어느 순간 안식일에 구속되어 있듯이, 컴퓨터도 사람을 위해서 있는데 어느 순간 컴퓨터의 뜻이 제 뜻보다 먼저인 것처럼 여겨지곤 합니다. 스마트 폰, 텔레비전, 구글, 페이스북, 카카오톡은 분명 소통을 위해서 만들어진 도구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로 인해서 명상, 독서, 기도, 희생이라는 더 소중한 것들과 멀어지기도 합니다.
가톨릭교회에는 4대 교리가 있습니다. ‘천주존재, 삼위일체, 강생구속, 상선벌악’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선을 행한 사람에게 상을 주고, 악을 행한 사람에게 벌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강생구속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심판하시고, 벌을 주시는 분이라고 생각하면 하느님을 우리의 ‘틀’에 가두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내어 주시는 자비하신 분이십니다.
오늘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관한 이야기를 제1 독서에서 들었습니다. “그들은 가는 길마다 풀을 뜯고, 민둥산마다 그들을 위한 초원이 있으리라. 그들은 배고프지도 않고 목마르지도 않으며, 열풍도 태양도 그들을 해치지 못하리니, 그들을 가엾이 여기시는 분께서 그들을 이끄시며, 샘터로 그들을 인도해 주시기 때문이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고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오늘 영성체송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하느님은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어,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심판이 아니라, 구원을 받게 하셨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도 사랑의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신 것도 사랑의 실천입니다. 표징을 보여 주시고, 제자들과 함께 지내시고,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것도 사랑의 행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같은 마음’을 이야기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품어주는 사랑입니다. 나에게 잘 해주는 사람에게만 베푸는 사랑은 세상 사람들도 할 수 있습니다. 갚을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빌려주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하느님의 마음은 세상 사람들의 마음과는 달랐습니다. 하느님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은 ‘사랑’의 마음입니다. 이 사랑이 생명을 살리고, 이 사랑이 희망을 주고, 이 사랑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을 닮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삶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어미가 자식을 잊을지라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잊지 않고 사랑하신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은 자비와 용서, 친절과 온화함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모습을 우리의 삶 속에서 드러내야 합니다.
천상병 시인의 ‘행복’이란 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나는 세계에서 제일 행복한 사나이다.
아내가 찻집을 경영해서 생활의 걱정이 없고
대학을 다녔으니 배움의 부족도 없고
시인이니 명예욕도 충분하고
이쁜 아내니 여자 생각도 없고
아이가 없으니 뒤를 걱정할 필요도 없고
집도 있으니 얼마나 편안한가.
막걸리를 좋아하는데 아내가 다 사주니
무슨 불평이 있겠는가.
더구나 하느님을 굳게 믿으니
이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분이
나의 빽이시니 무슨 불행이 온단 말인가!”
세상의 힘
곽승룡 비오 신부님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 17)
위의 성경말씀은 스콜라 철학자들에게 무척 맘에 드는 구절인데, 중세와 가톨릭 사상의 뿌리를 심어놓은 토미즘 곧 토마스 데 아퀴노를 중심으로 한 스콜라신학과 그 깊은 연관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스콜라 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그 철학적 기초를 받아들여서 하느님의 이데아를 순수행동으로서 진술하였다. 토마스 데 아퀴노는 하느님에 대해 다섯 가지 방법으로 존재증명을 진술한 바있는 데, 하느님은 최고 존재, 제1원인, 부동의 원동자, 최고선, 제일존재...이시다.
모든 사물들은 움직이는데,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에서 누군가 첫 움직임, 곧 원동(原動)이 있어야 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역사에 길이 남을 수많은 걸 작품을 만들면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다. “하느님께서 나를 움직이셨다.” 하느님이 첫 번째 움직임(first motor)이시라는 고백이다. 철학적 반성도 복음말씀의 의미를 풍요롭게 해주며, 영성생활에 필요한 지침을 내려준다.
내가 활동하고, 일을 하며, 자유롭고, 좋은 일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것도 모두 하느님께서 나에게 그 힘을 주시고 움직이도록 하시는 영적 가족관계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분께서 순수행동으로서 먼저 움직이시니 내가 움직이는 것도 주님과의 피동적 관계에 얽혀있지 않고, 하느님처럼 나도 스스로 순수하게 움직이도록 초대받고 있다.
하지만 반대로 내 위에 수동적으로 어떤 충동적 인 힘에 의해 시작과 끝 모두가 일 거수 일 투족 내가 조절되고 감시된다면, 어떻게 이런 속박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원동에 대해 유익하지 않고, 나쁜 생각과 함께 나는 오히려 악 앞에서 넘어지고 말 것이며, 내가 더 이상 나로서 그 어떤 행동도 자유롭고 다양하게 할 수 없는 마치 로봇(IA)과 같이 될 것이다.
그럴 때 나는 수동적 자세에서 파생되는 게으름과 함께 살아가게 된다. “게으름은 모든 악습들의 어머니다”라는 격언이 있듯이 옛 사람들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인 듯싶다. 그러나 반대로 노동은 나쁜 성향을 치유케 한다.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요한 5, 21)
노동하는 자는 각자의 일에서 힘을 발휘한다. 조각가는 동상, 화가는 켄버스, 재단사는 옷감과 옷 앞에서 누군가로부터 영감을 받아 그 힘을 뿜어낸다. 물질은 무엇인가를 움직일 수 없다. 다만 인간의 어떤 힘이 물질과 하나가 되어 서로 통교하고 꿈틀거린다.
빌라도가 예수님께 묻는다. “당신은 삶에서 어떤 힘을 가지고 있소?” 삶은 연약하지만, 무엇인가를 부술 수 있는 힘을 가진다. 어머니의 삶은 약 하디 약하지만 당신의 생활에서 우리를 자라게 하는 위대하고 엄청나게 훌륭한 힘을 가지고 계신다. 이렇듯 영원한 우리의 생명 위에는 하느님만이 그 힘을 주신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께 그 힘을 주셨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안에 사신다.
“아버지께서는 또 그가 사람의 아들이므로 심판을 하는 권한도 주셨다.”(요한 5, 27)
죽은 자들이 부활하는 날은 또한 심판의 날이기도 하다. 심판받는 날이면서 부활하는 날은 선이 악에서 결정적으로 분리되는 날이기도 하다. 이 모든 일은 의심의 여지없이, 오직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시다.
우리는 스스로 자신 안에서 악, 더구나 내면세계의 악을 이길 수 없다. 하지만 사람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이 힘을 받았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인간이 살아가는 역사 안에서 악을 이기고, 선의 승리를 준비하기 위해서 사도들과 제자들에게 그 힘을 전달하셨다. 그래서 이제 나도 그분께서 주신 힘으로 악을 이겨낼 수 있다.
오늘날 수많은 통계들이 온통 세상과 인간 일을 가늠하는 척도로 움직인다.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은 계산을 하는 기계들이다. 나의 어머니께서도 하느님 품에 안기시기 전에 병원신세를 여러 차례 많이 지셨는데, 그곳을 가보면 특히 병의 진행이 좋지 않을수록 복잡한 기계로 환자를 싸매고 있다. 특히 중환자실에 가보면 이곳이 병원인지 계산기계공장인지 가늠이 어렵다.
우리사회에 고아가 몇이나 되고, 복지시설에 그들이 있을 자리가 얼마나 되나, 그리고 기부금이 얼마나 모아졌나를 가늠 하는 것은 정확한 계산기로 모두 통계를 뽑아 알 수 있다.
우리나라는 선거철이면 항상 오래전부터 지지도를 조사 통계 분석하여 방송하는 일에 연일 떠들어대는 것처럼 통계, 계산은 이제 무소불위한 영역이 되었다. 그런데 그런 일의 주역인 컴퓨터도 하지 못하고 도망가는 일이 있으니, 무엇일까? 인간적이고 기계적인 통계로도 알 수 없고 계산될 수 없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계산되지 않은 “하느님의 은총”이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이 작동하는 성사가 있는데, 이 신비로운 식별을 통한 보속의 성사가 어떠한 악도 물리치고 우리를 치유하게 한다. 그 성사는 심판자 그리스도에 의해 받은 힘으로 실현되기 때문이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어기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에 더욱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다고 복음은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에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나는 듣는 대로 심판할 따름이다. 그래서 내 심판은 올바르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예화를 하나 들려드리자면 어느 나라의 임금이 한 신하를 불러 그에게 이런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우물물을 길어 저기 밑 빠진 독에 가득히 채우시오.” 사실 밑 빠진 독에 물이 채워질 리가 없었지만 충성스러운 신하는 오직 임금의 명령만을 생각하면서 밤을 새워가며 우물에서 물을 길어 그 밑 빠진 독에 물을 부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우물 바닥이 드러날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물을 퍼 올리니까 우물 바닥에 무엇인가 번쩍이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것은 엄청나게 큰 금덩어리였습니다. 신하는 임금 앞에 무릎을 꿇고 이렇게 보고를 들렸습니다. “임금님, 용서해 주십시오. 말씀하신 대로 물독에 물을 채우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우물 바닥에서 이 금덩어리를 건졌습니다.” 그 때 임금은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밑 빠진 독에 물을 채우겠다고 우물이 바닥나도록 수고했구려. 그대는 참으로 충성스러운 신하요. 그 금덩어리는 당신을 위해 준비한 것이라오.” 그렇게 임금은 미리 그 충성스러운 신하를 위해 금덩어리를 우물 안에 준비해 놓았던 것입니다.
사무엘 상권 15장에서 사무엘 예언자는 이렇게 사울 임금에게 이야기 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 바치는 것을 주님께서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 진정 말씀을 듣는 것이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낫고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숫양의 굳기름보다 낫습니다.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수난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마태26,39) 아버지의 말씀대로 살아간다는 것이 진정 구원의 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종종 아버지의 말씀보다는 내 뜻대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우리가 언제나 주님의 모습을 따라 아버지의 뜻을 따르며 참된 구원의 길로 나아갈 수 있기를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신앙인들은 대단한 차원의 인간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하느님과 예수님관계에 대해 사람으로서 알 수 없는 설명 하셨습니다.
산 자와 죽은 자의 차이가 하늘 땅차이듯 신자와 비신자 차이도 같죠.
그러니 신앙 속에 살다 하늘나라 감과 안 믿어 지옥의 차이도 그렇고.
사람은 출생 후 성장 배움 등 차이로 살지만 신앙 공감에서 만납니다.
공감하는 신앙인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말씀님으로 신앙하며 삽니다.
그러니 신앙인들은 하늘 아는 대단한 차원의 인간으로 변화된 겁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자길 직접 설명하기 아주 힘드셨겠죠.
그러지 말고 차라리 신앙인들이 설명하는 선교가 사람들께 훨 쉽겠죠.
회개하는 이들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
성 막시무스 아빠스의 편지에서(Epist. 11: PG 91,454-455)
세상이 창조될 때부터 오늘날까지 각 시대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구원 의지를 전해 준 진리의 전달자와 하느님 은총의 봉사자들은 하느님께서 사람들이 참된 회개로써 당신께 되돌아오는 것보다 더 사랑스럽고 더 기뻐하시는 것이 없다고 말해 줍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당신께로 이끄시기 위해 기묘한 일들을 행하시고 당신 영원한 사랑의 최고의 증거를 보여 주셨습니다. 즉 무한한 선의 광채이시고 유일한 계시이신 아버지 하느님의 말씀께서는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당신 자신을 낮추시고,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신 나머지 사람이 되시어 우리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분은 아직 아버지 하느님과 원수였던 우리를 하느님과 화해시키기 위해 말씀하셨고 고통당하셨으며 일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과거에 소외되었던 축복의 생활로 다시 불러들이셨습니다.
말씀께서는 기적으로 우리 질병을 고쳐 주신 것뿐만 아니라, 욕정에 넘어가는 우리의 연약함을 짊어지시어 무죄하신 분이 죄인처럼 죽으심으로써 우리의 빚을 갚아 주시고 허다한 큰 죄악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또한 여러 가지 훌륭한 교훈으로 우리가 당신을 본받아 이해와 예의와 완전한 사랑으로 이웃을 대하도록 권고하셨습니다.
그분은 말씀하셨습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다.” 그분은 또한 잃은 양을 찾아 구원하기 위해 왔다고 말씀하셨고 또 다른 기회에 당신은 이스라엘 집안의 잃어버린 양들을 위해 파견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잃어버린 은전의 비유에서도 그다지 뚜렷하지는 않지만 같은 점, 즉 당신은 우리가 죄로 인해 잃어버린 하느님의 모상을 되찾아 주려고 오셨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이 비유는 다음의 말로 끝납니다. “잘 들어 두어라.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을 하늘에서는 더 기뻐할 것이다.”
그분은 또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강도를 만나 쓰러져 있고 옷도 모두 빼앗긴 채 반쯤 죽어 있는 사람의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어 주고는, 나귀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 간호를 부탁하고 간호에 필요한 돈을 지불하고 당신이 돌아올 때 더 든 비용이 있으면 갚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분은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인자한 아버지처럼 잘못을 뉘우치고 달음질쳐 돌아오는 아들에게 입을 맞추시고 다시 당신 영광의 미로 그를 옷 입히시고, 그가 저지른 행동이 어떤 것이건 꾸짖지 않으셨습니다.
또 잃어버린 양의 비유에서 그분은 백 마리의 거룩한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언덕과 골짜기를 헤매는 한 마리의 양을 찾으신 후, 그 양을 내몰거나 때리지 않으시고 가련한 마음에서 어깨에 메고 양 우리로 데리고 오시어 나머지 무리에다 다시 넣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그리고 다시 “내 멍에를 메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이 “멍에”로써 계명이나 또는 복음적 권고에 따라 사는 생활을 뜻하셨고, “짐으로써” 회개하는 사람들의 어려운 극기를 뜻하셨습니다. 그래서 회개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그리고 하느님의 정의와 선을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명하셨습니다. “거룩한 자가 되어라. 완전한 자가 되어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아드님의 권한>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 때문에 유다인들은 더욱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분께서 안식일을 어기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요한 5,17-18).”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쉬지 않고 일하고 계시니” 라는 뜻입니다.
“나도 일하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안식일에도 나는 쉴 수가 없다.”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안식일에도 쉬지 않고 일하시는 분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설명입니다.
안식일에도 하느님께서 하시는 그 ‘일’은 바로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에게는 안식일에는 일을 하지 말고 쉬라고 명령하셨으면서, 당신은 왜 쉬지 않고 일하시는가?”
‘하느님의 사랑’은 안식일에도, 즉 단 한 순간도 중단되지 않고, 그래서 우리가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구약시대 때부터의 믿음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늘에서 살피시며 모든 사람들을 바라보신다. 당신 머무시는 곳에서 굽어보신다, 땅에 사는 모든 이들을. 그들의 마음을 다 빚으시고 그들의 모든 행위를 헤아리시는 분이시다(시편 33,13-15).”
“보라, 주님의 눈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당신 자애를 바라는 이들에게 머무르신다. 그들의 목숨을 죽음에서 구하시고, 굶주릴 때 그들을 살리시기 위함이라네(시편 33,18-19).”
하느님은 ‘언제나, 항상’ 우리를 지켜보시고 보살피시는 분입니다.
만일에 그 사랑이 안식일에는 중단된다면, 안식일은 ‘주님 없는’ 날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제가 비록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니,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가 저에게 위안을 줍니다(시편 23,4).”
하느님은 ‘언제나,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입니다.
만일에 안식일에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안 계신다면, 그러면 안식일은 ‘죽음의 날’로 변해버릴 것입니다.
이렇게 아버지 하느님께서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사랑을 베풀어 주시기 때문에 안식일에도 예수님도 쉬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십계명에서, 안식일에는 일하지 말라는 계명은 생계를 위한 노동을 하지 말라는 뜻이지, ‘사랑 실천’도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안식일에는 정말로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의 사랑은 단 한 순간도 중단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하느님과 예수님을 사랑하는 일도, 또 하느님과 예수님의 뜻에 따라서 이웃을 사랑하는 일도 ‘언제나 항상’ 끊임없이 실천해야 하는 일입니다.(유대인들은 예수님 말씀의 뜻은 알아들었지만 인정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말씀을 신성모독 발언으로만 생각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요한 5,19).”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곧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요한 3,35).”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과 ‘말씀’을 신성모독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신성모독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드님에게 모든 것을 내주신 일도 ‘사랑’이고,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하시는 것도 ‘사랑’입니다.(‘사랑’은 ‘일치’입니다.)
여기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라는 말씀은, 당신에게 아무런 권한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것을 아버지께서 바라시는 대로 할 뿐이고, 아버지께서 바라시는 것과는 다르게 당신 마음대로 하는 일은 하나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과 말씀’은 곧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과 말씀’입니다.(예수님을 믿는 것은 곧 하느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믿는다면 당연히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안식일에도 ‘사랑을 실천하는 일’을 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느님의 가르침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어 당신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여 주신다. 그리고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들을 아들에게 보여 주시어, 너희를 놀라게 하실 것이다.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넘기셨다.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공경하듯이 아들도 공경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공경하지 않는 자는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않는다(요한 5,20-23).”
구약성경을 보면, 천사들이나 예언자들도 하느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했고, 하느님께서 시키신 대로 일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는 일이나 말은 곧 하느님의 일이었고, 말씀이었습니다.
이미 그런 천사들이나 예언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과 말씀이 곧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과 말씀이라는 것은
별로 놀랄 일은 아닙니다.
여기서 ‘더 큰 일들’과 ‘사람들을 놀라게 하실 일’은 심판과 구원입니다.
그것은 그 어떤 천사나 예언자도 하지 못했던 일이고, 할 수 없었던 일입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그 일들마저도 모두 예수님에게 넘기셨습니다.
이제 사람들을 심판하고, 구원하고, 영원한 생명을 주는 일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여기서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공경하듯이 아들도 공경하게 하시려는 것이다.”라는 말씀은, “하느님을 믿고 섬기는 것과 똑같이 예수님을 믿고 섬기라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다.”로 해석됩니다.(혹시 “왜 그래야 하는가?” 라고 누가 묻는다면, “그렇게 하기를 하느님께서 바라시기 때문이다.” 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하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하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야 합니다.
이 일은 나중에 해도 되는 일이 아니라 ‘지금’ 해야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이 바로 그때다(요한 5,25).”라고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을 어긴 예수님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예수님은 유다인들의 안식일에 대한 형식법을 사랑의 법으로 완성하신다. 유다인들은 그 일을 놓고 시비를 일삼는다. 안식일에 예수님은 일하시고 유다인들은 철저하 놀고 수입을 챙긴다. 언삭일에 옆에 사람이 죽어가도 그들을 돕는다는 것은 일이라 여겨 그냥 지나친다. 그둘을 돕고 일할 엿새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 유다인들은 예수님께 왜 안식일에 일하느냐고 시비를 건다.
예수님의 답은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5,17)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아버지와 아들이 동격이 되고, 아들은 아버지의 일을 행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유다인들이 자의적 해석을 하고 반기를 들었다,
아사야 예언자눈 말한다. 유다 시온은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고 말하였지.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이사48,14-15)
사람들은 살아가며 언제나 혼인잔치를 생각을 한다. 그런데 어디 그런가? 생로병사의 과정을 거치며 혼인잔치는 사라지고 가련함에 처하기도 한다. 그럴 때 사람들은 인간적이 되어 아우성 친다. 하느님이 나를 버렸다. 나를 잊었다. 하느님이 어디 계신가? 떠져 묻는다. 지구는 여전히 태양계를 돌고 있고 사람들은 살아간다.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단 한순간도 우리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시고 구세주이시고 하느님이시며 아버지의 일을 하시고 계심을 알리가 없다.
믿음의 사람들이라면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주님이심을 고백하고 믿도록 안식일 법울 사랑으로 완성하사고 계심을 보았어야 했다. 형식에 매여있눈 유다인들의 전통이 예수님의 신원을 보지 못하고 믿지 못하게 먼들어 갈 뿐이다. 유다인들에게 예수님은 하느님을 모독하고 백성을 선동하는 마귀이며, 두목 베엘제블과 결탁한 해괴한 사람일 뿐이다.
유다인들은 하느님께 매달리지만 하느님은 그들에게 없다. 다만 궁지에 몰리면 하느님을 시험하고 대들 뿐이다.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인성 안에 감추어진 본성, 즉 신성에 대한 관심이 없고 오르지 예수에 대한 미움과 중오를 카워갈 뿐이다. 눈 먼이가 되어 예수를 박해하고 죽여버릴 기회를 엿볼 뿐이다. 유다인들은 재앙의 원인울 마련할 빌미의 먹이감을 찾아 다닐 뿐이다.
진실과 정의를 외면하려는 유다인들의 음모는 사람을 죽이고 구세주를 죽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이 잘못임이 세상에 들어날 때가 올 것이다. 부활의 때이다. 세상이 어두워질 때 구원의 빛, 은총의 밫은 더욱 밝아진다. 기복만을 추구하고 어두움을 만들어가는 거짓 그리스도인이 있다. 그들은 진실과 정의에는 관심이 없다. 깨어나야 한다. 사순절에 중요하게 여길 대목이다.
<살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살리시는 분께서
여태 살리고 계시고
영원히 살리시리니
살리시는 분께서
몸소 하시고
몸소 보여주시니
살리시는 분과 함께
참으로 살고자
언제 어디서든
멈춤 없이 해야 하는
단 하나의 일
죽는 한이 있더라도
두려움 없이 해야 하는
단 하나의 일
어느 누구 그 무엇에도
막힘없이 해야 하는
단 하나의 일
어떤 이유로도
그만둘 수 없는
단 하나의 일
말과 생각과 행동
모두 아우르는
단 하나의 일
바로 살림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가끔 세상은 너무나 가혹하고 잔인하다고 느끼는 사람들, 그리고 그 사회에서 실패하고 밀려났다고 여기며, “외롭고 힘겹고 지쳤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주 하느님께서는 오늘 독서의 말씀을 통해 힘과 용기를 던져주시며 위로해 주시는듯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고 말하였지.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 49,14-15)
저는 개인적으로 예수님의 말씀 중에 특별히 오늘 복음에 나오는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 라는 말씀이 늘 힘과 용기를 줍니다. 그리고 제가 잊혀졌다든가 버림받았다고 느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일하신다는 말은 주 하느님께서 늘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일하고 계신다는 뜻이니까요. 오늘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늘 함께하시며 같은 뜻을 가지고 나아가신다는 의미에서 이 글귀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더욱더 큰 위로가 됩니다. 늘 우리를 돌봐주시는 주 예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과 두 분을 하나로 이어주시는 성령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살리시는 것 주님의 사랑<요한, 5/17-30.>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누구나 가장 귀한 보물을 가지고 있으면 죽까지 보존하고 기지기를 바랍니다.
하느님 만물 중에 가장 귀하게 만드시고 사랑하는 사람을 죽여 없에는 것이 당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ㅇㄹ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하심 같이 사순절 은총의 시기 우리의 희생과 절제와 기도의 삶으로 악에서 선으로 죽음에서 삶으로 변회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지서 1/ 13-15을 보면 “ 하느님은 죽음을 만들지 않으셨고 산 이들의 멸망을 기뻐하시지 않으신다. 하느님은 만물을 존재하락 창조하시였으니 세상의 피조물이 다 이롭고 그 안에 파멸의 독이 없으며 저승의 지배가 미치지 못한다. 정의는 죽지 않은 다.” 하느님이 사람을 당신의 모습으로 만드신 참 의미는 살다가 죽어 없질 것을 만드신 것이 아니고 하느님 과 같이 영원이 존재하는 인격적이고 우주적이고 사회적 존재로 창조하시어 당신의 말을 알아 듣고 깨닫고 실천하도록 “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 이루어지소서.” 기도하듯이 하느님의 뜻이 하늘과 땅에 이루어기를 바라시며 살고자 하십니다.
우리는 살아 숨쉬며 하느님 아버지에게 해야 할 의무는 천사들이 하늘나라에서 찬미 찬송 하듯이 우리의 삶은 죽음을 통해 영원이 살아 찬미 찬송의 노래 부르며 마리아와 같이 아버지의 무릎 위에 앉아 진과 선과 미를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지복 직관의 경지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세례성사 때 우리의 믿음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이라 약속받고 아버지 집에 거처하게 되었습니다. 이 영광을 살아서 지속 시키는 방법은 끊임없이 기도하고 하느님 말씀을 되 색이며 말씀에 맛들이고 주님의 영광만 드높이는 삶아야 합니다. 기도의 끈을 놓지 마시고 꼭 잡고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에 동참하기를 기도합니다.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라 -치유의 구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문득 제가 좋아하는 화답송 후렴 두 곡이 생각납니다. 가끔 산책중 부르는 짧은 노래입니다.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 좋으신 분을. 영원도 하시어라, 그 사랑이여.”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하리라.”
지난 주 화답송 후렴 역시 흥겹고 은혜로웠습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오늘 화답송 시편 다음 구절도 참 넉넉하고 편안하게 합니다.
“주님은 너그럽고 자비하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넘치시네. 주님은 모두에 좋으시며, 그 자비 모든 조물위에 내리네.”
위 화답송 시편들은 고백성사 때 보속 처방전 말씀으로 자주 써드리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이런 주님께 대한 사랑의 찬미와 감사의 고백을 통해 살아 계신 사랑의 주님을 만날 때 위로와 치유, 기쁨과 평화의 선물이요,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을 닮아갑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기도 합니다.
요즘 널리 회자되고 있는 말마디가 힐링healing, 즉 치유인데 ‘사랑의 힐링’에 미사보다 더 좋은 치유제도 없습니다. 하느님의 집, 평화의 집, 자비의 집, 기도의 집이라 불리는 수도원이야 말로 말그대로 힐링센터라 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치유의 공간이 필요한 현대인들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치유의 공간을, 쉼터를 갈망하는지요. 얼마전 피정을 마치고 떠난 수녀님의 짧은 카드 메시지가 마음 깊이 와 닿았습니다.
“+길
감사합니다 수사님
쉼이 필요한 저에게 쉴 수 있는
편안한 공간을 주셔서---”
치유의 공간, 생명의 공간, 사랑의 공간, 편안한 공간에서 쉬어야 영혼도 치유되어 건강을 되찾습니다. 어제 잠시 나눈 비교에 대해 다시 한 번 나누고 싶습니다. 사랑 결핍으로 인해 자존감이 낮고 정체성이 약할 때 비교의 유혹에 빠지기 십중팔구입니다. 비교의 유혹에 빠져 본래의 제자리를 벗어날 때 우월감이나 열등감으로 어느 쪽이든 이롭지 못합니다. 비교로 인해 분수를 잊어버릴때 파생되는 불행이요 비극입니다. 비교에서 절망, 원망, 실망의 삼망도 나오고 이런 마음에 휩싸일 때 그대로 지옥체험입니다.
카인이 아벨을 살인한 것도 비교로 인한 질투였습니다. 자비하신 아버지의 비유에서 큰 아들은 아버지의 작은 아들의 환대를 비교하며 질투합니다.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에서도 바리사이는 세리와 비교하며 우월감속에 감사하며 자기도취에 빠져 기도합니다. 비교로 인한 감사와 행복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참으로 비교의 유혹에 빠질 때 우월감 또는 열등감의 질투심 누구나 흔히 겪는 내적체험입니다.
참으로 끊임없는 사랑 체험을 통한 자존감과 정체성의 강화가 비교의 유혹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감사와 감동, 감탄의 삼감의 삶을 살게 합니다. 그러니 무엇보다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행복기도 서두 부문을 다시 나눕니다.
-주님/사랑합니다/찬미합니다/감사합니다/기뻐합니다/차고 넘치는 행복이옵니다/이 행복으로 살아갑니다-
바로 주님과 사랑의 일치속에 살아간 제1독서 이사야 예언자요, 복음의 예수님이십니다. 제1독서의 이사야 예언자는 우리 모두 모든 피조물과 함께 하느님 찬미와 감사에 초대합니다.
“하늘아, 환성을 올려라, 땅아, 기뻐뛰어라. 산들아, 기뻐 뛰어라.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당신의 가련한 이들을 가엾이 여기신다. 그런데 너희는 어찌하여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님은 나를 잊으셨다.’하고 말하느냐?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해도 나는 너를 결코 잊지 않는다.”
‘나는 너를 결코 잊지 않는다’ 우리 하나하나에 대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런 주님의 사랑이, 주님의 말씀이 우리를 치유하고 위로합니다. 비교의식에서 벗아나 자존감 높고 정체성 강한 자유인으로 행복한 삶을 살게 합니다. 그러니 사랑밖엔 길이, 답이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아버지와 완전히 사랑으로 하나된 예수님을 만납니다. 이런 사랑의 확신이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로 시작되는 세 부분의 확신에 넘친 고백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오늘 미사를 봉헌하는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우리의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는, 또 우리가 영생을 얻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는 은총의 미사시간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사순시기 은혜의 때, 구원의 날에 우리에게 응답하시고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시간 당신과 사랑으로 하나된 우리 모두에게 전인적 치유의 구원을 선사하십니다. 끝으로 자작 좌우명 애송시 한 연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활짝 열린 앞문, 뒷문이 되어 살았습니다.
앞문은 세상에 활짝 열려 있어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환대(歡待)하여 영혼의 쉼터가 되었고
뒷문은 사막의 고요에 활짝 열려 있어
하느님과 깊은 친교(親交)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이렇게 앞문 사람 사랑과 뒷문 하느님 사랑이 균형과 조화를 이룬 삶일 때 행복하고 자유로운 자존감 높고 정체성 강한 삶일 것입니다. 아멘.
거대한 생명의 길목에서
최민석 신부님
올해는 유난히 꽃이 아름답게 핀다. 이름 없는 풀 동그라미를 그리며 파릇파릇 새싹이 돋는다. 천지간 찬란한 생명이 일어나는 것을 온 몸으로 알아차린다. 눈 가고 마음 가고 발길 닿는 곳마다 꽃이다. 날이 많이 따뜻해져 꽃이 일주일 정도 먼저 피기도 했지만 예년에 비해 훨씬 더 화사한 것 같다.
개나리는 더 노랗게 피어 낭창낭창하다. 개나리꽃은 화려하지는 않아도 무척 정감이 간다. 진달래 연분홍은 빛이 더 곱다. 꽃이 피어 세상이 밝으니 기분 참 좋다. 온 세상 사람들의 가슴 가슴마다 사랑의 불 활활 지펴주는 꽃을 보니 기분이 너무너무 좋다. 나의 생 비록 짧지만 이 한 몸도 하늘 꽃 한 송이라 생각하니 많이많이 행복하다.
일찍 핀 벚꽃은 봄 햇살을 받아 은은하고 화사한 촛불처럼 반짝이더니 이내 벌써 꽃비를 날리고 있다. 온갖 생명이 살아 깨어 출렁거리고 꽃이 이렇게 아름다운 날은 일하기 싫어지는 날이다. 일이고 뭐고 다 내 던져버리고 어디로든 떠나고 싶은 사람이 많을 것 같다.
다들 먹고 살기 힘들고 지치도록 일해도 늘 일에 쫓기는데 나같이 한가한 소리를 하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꽃이 너무 좋은 건 어쩔 수 없다. 다른 것도 아니고 그저 꽃이 좋아서, 햇살이 너무 좋아서 그런 것이어서 아마도 다들 이해하리라. 꽃피는 봄에는 모두들 마음도 너그러워진다.
사람의 마음도 계절에 따라 출렁거릴 수도 있고 잔잔할 수도 있다. 봄에 느끼는 넘실거리는 생명감이다. 온통 축복과 은총의 바다가 넘실거린다. 하느님의 사랑이 온 천하에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드러났다 하면 곧 사라질 것이요, 사라지는 듯 다시 시작되는 변화의 신비에 감탄할 따름이다. 있으면서 없고 없으면서 있는 만유의 실상이다.
생명 세상이다. 사람도 생명이다. 사람이 자기 생각이나 말의 한계를 스스로 알고 그것을 겸허하게 받아들일 줄 알면, 바로 그 사람은 열린 생명이다. 그런 사람은 자기가 배워서 알고 있는 것이, 사실은 자기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 뿐임을 안다. 그러기에 자기가 알고 있는 생각을 언제든 비울 수 있고 바꿀 수 있다.
머리와 가슴이 열린 사람은 언제나 새로운 지식이나 생각이 들어올 수 있고 낡은 것은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모든 생명이 그렇듯이 막히면 죽고 열려 있으면 산다. 하늘을 나는 새나 들에 핀 꽃이나 산에 사는 나무든 사람이든 무엇이든 간에 부드러운 것은 생명에 가깝고 딱딱한 것은 죽음에 가깝다.
하느님의 생명 가운데서 생명감 넘치는 삶을 사는 길은 사랑하는 길이다. 지금 여기서 하느님의 사랑을 사는 길은 지금 하는 일에 지극 정성을 다하는 것이요. 지금 만나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다. 한 가지 일을 하지만 그 한 가지 일이 만 가지 일에 연결되어 있고 한 사람이 만 사람과 연결되어 있으니, 지금 하는 일에 지금 만나는 사람에게 지극 정성을 다하는 것이다.
내 인생에 무슨 의미가 있다면, 보람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나를 찾고자 세상에 왔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던” 나를 찾아 온 것이다. 그 참나가 지금 여기에 있다. 다만 있는 것은 오늘, 영원한 오늘뿐이다. 오직 현제에 살고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사는 내가 여기에 있다. 그 삶은 그의 ‘나’가 완전히 죽는 순간에 비롯되는 봄이다.
자연은 보이는 않는 것이 보이는 생명으로 나오는 것을 보는 봄의 계절이다. 온갖 생명을 자연스럽게 만나고 볼 수 있는 ‘열린 공간’이 봄이다. 자연에는 문이 없다. 그래서 사방이 열려 있다. 지금 보니 생각지도 않은 곳에도 꽃이 피어있다. 온 세상 환히 밝히며 피는 꽃이 너무너무 예쁘다. 고맙고 대견스럽다. 꽃샘추위 심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 보란 듯이 씩씩한 가지각색 봄꽃들이 사랑스럽다.
풀은 겨우 고개를 내밀고 시냇물과 햇빛은 약하게 흐르고 숲의 초록색은 투명하다. 아직 꽃샘추위는 남아있지만 그 거대한 생명 길을 막을 수는 없다. 숲의 작은 고사리도 아직은 잎을 돌돌 말고 있다. 이른 봄 소나무 아래서 미소를 머금은 채 눈을 내리깔고 내 앞에 너는 서 있다. 너 내 거룩한 생명이다. 내 신비한 몸이다. 내 신비한 빛이다. 오오, 너 내 청춘이며, 내 꿈이다. 살아있는 너를 보고 내 너 살아 숨 쉬는 은총을 알게 되었노라.
'버티는 힘이라도'(요한 5장 17~30)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뜻을 따라 아버지가 하시던대로 원하는대로 행할 뿐, 안식일에 어떤 일을 해서도 안된다는 사람들의 눈에 예수님의 행동은 많이 거슬리고 심기가 불편합니다.
규정과 틀을 중시 여기다보면 사람 살리는 행위에 감사는 커녕 미워하고 질타하며 더 이상하지 못하게 훼방을 놓는 반대자가 됩니다.
참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로서 꿋꿋하셨지만, 그분을 따르는 우리네 삶은 자주 흔들리고 꿋꿋이 섰다 싶어도 반대에 부딪치면 연못에 돌멩이 던져진 것저럼 그 파장이 힘빠지게 하고 맥이 풀리게 합니다.
내 뜻을 버리고 그분 뜻을 따른다면 걸어 넘어뜨리려는 방해자들이 있다하더라고 결국 이루어질 것입니다.
꿋꿋이 걸어갈 힘이 빠졌다면 버티는 힘이라도 지니도록 합시다.
당신을 도우실 것입니다.
힘내세요~ 응원합니다.
잘 듣기
신중호 신부님
주님께서는 당신이 ‘아버지의 일’을 하고 계심을 밝히십니다. 아버지의 일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일이라고 하십니다. 생명을 얻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듣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할 일이 “듣는 것”임을 거듭해서 전합니다. 요한 복음 저자는 듣는 것이 영생을 위한 조건임을 자신의 복음서 다른 부분에서도 여러 차례 말씀하십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10,27)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18,37) 소음이 많은 시대를 사는 우리는 잘 듣지 못합니다. 자동차 소리, TV 소리, 스마트폰 소리… 예전에 없던 소리가 많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소리도 잘 듣지 못합니다. 부모님께서 사랑으로 하시는 소리, 자녀의 마음속 소리, 남편의 소리, 아내의 소리를 잘 듣지 못합니다. 가진 자는 가지지 못한 자의 소리를 잘 듣지 않습니다. 거기서 많은 문제가 생깁니다. 듣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사람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면,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 건네시는 소리는 더 듣지 못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 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내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의 진짜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듣는 일은 우리에게 생명을 줍니다.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아들도 그 안에 생명을 가지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
제병영 신부님
하느님의 생명은 우리의 어두운 곳, 세상의 어두운 곳, 땅이 죽은 있는 곳에 활기를 넣어 주시는 활력소이다. 그런 생명을 나는 살아가고 싶다. 다른 사람의 어둔 곳과 세상의 어두운 곳, 그리고 죽어가는 자연에 생명을 일으키는 조력자이고 싶다. 그래서 삶이 생명으로 활력을 얻어 항상 아름다움으로 밝음으로 이런 어두운 곳을 살려나가는 힘이고 싶다.
그래서 어제 개암나무 300주를 심었다. 오늘도 300주를 심을 예정이다. 식목일을 맞이 하며 정말 오랜 만에 나무의 생명을 땅에 불어 넣는 일을 해본다. 힘들지만 생명을 넣는 일이기에 마음은 가볍다.
당신을 사람의 아들이라 하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5,17-30: 아들도 살리고 싶은 사람들은 살릴 것이다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38년이나 고생한 병자를 고쳐주셨다고 하여 그분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대해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17절)라고 말씀하시면서 당신의 행위는 실상 아들 안에서 일하시는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하신다. 이렇게 아버지를 언급함으로써 당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들었다고 분노한 이들에게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말씀하셨다.
‘여태’라는 말은 아들이 말씀으로서 아버지 안에 영원히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다. 말씀을 통하여 아버지께서 창조하신다면, 그분은 창조주 하느님의 말씀이시며 당신 아버지와 모든 면에서 같으시다. 안식일의 의미를 문자적으로만 이해하는 사람들은 불쾌해했다. 하느님께서 쉬셨다고 하는 것을 더 이상 일을 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라고 하시어 그들을 혼란에 빠뜨리셨으며, 그래서 “나도 일하는 것이다.”라며 당신을 하느님과 같은 존재로 표현하시어 그들을 더욱 혼란에 빠뜨리셨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는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19절) 당신은 하느님의 모습으로가 아니라, 종의 모습으로 오셨기 때문에 당신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란 하나도 없다고 하시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이 나약하기 때문에 그런 면에서 힘이 없으시다는 말씀이다. 육은 나약하다. 그래서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마태 24,41)고 한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를 사랑하고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방식으로 아버지를 사랑하신다.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다시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21절) 죽은 이를 되살리는 것은 하느님의 속성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따로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통하여 역사하시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부활의 권능을 가지고 계시며 아들 또한 하느님의 본성상 그 권능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아버지께서는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넘기셨다고 한다. 즉 아버지께서 심판하시지만 눈에 보이는 사람의 아들을 통해서 하신다.
이렇게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공경하듯이 아들도 공경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아버지와 아들이 똑같이 공경을 받는 분임을 말하고 있다. 그렇게 그분을 믿는 사람은 이미 생명의 나라에 들어간 사람이라고 하신다. 아들을 믿지 않는 것은 바로 아버지를 믿지 않는 것이며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하신다. 또한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아들도 그 안에 생명을 가지게 해주셨기 때문이다.”(26절)라고 하신다. 또 아버지께서는 사람의 아들에게 심판의 권한도 주셨다고 했다.
그러므로 모든 말씀과 업적은 당신이 독자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함께 아드님께서 하시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아버지와 아들이 성령 안에서 이루시는 말씀과 업적이기 때문에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30절)고 하시며 당신을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는 분이심을 알고 우리도 언제나 하느님의 뜻에 따르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서른여덟 해나 앓아오던 이를 고쳐주신 날이 하필 안식일이라, 유다인들은 안식일 법을 무시한다는 혐의를 씌워 예수님을 박해하기 시작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응수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
그런데 이 말씀은 유다인들의 분노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되고 맙니다. "안식일도 지키지 않는 죄인인 주제에 감히 하느님을 아버지 운운하다니!"
분명 안식일은 태초에 하느님께서 엿새 동안 세상을 창조하신 후 쉬신 일곱째 날을 기념합니다. 그러니 이를 수호하려는 유다인들의 생각은 틀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놓친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일곱째 날을 쉬라 하신 건, 영육의 휴식이 필요한 모든 이들, 보호받지 못하는 종과 짐승에 이르기까지 누구도 제외됨 없이 차별 받지 않고 쉬게 하시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안식년에는 땅마저도 양분을 축적하도록 쉬게 놀리니까요.
쉼의 날을 통해 사람을 회복시키고 되살리고 더 풍요롭게 하시려는 하느님의 의도는 한 푼이라도 더 벌어 부를 축적하려고 약한 이들을 착취하고 제 잇속만 챙기는 불균등한 거래를 금지하시려는 조치였지만, 세대를 거듭하면서 그 정신은 희미해지고, "뭐는 되고 뭐는 안 되고" 하는 세부 항목만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사실 하느님은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고 사랑의 계명에 이바지하기 위해 다른 일을 하지 않으시는 겁니다. 하느님의 일과 사리사욕을 챙기는 인간적·세속적 일은 목적 자체에서 구분이 되어야 하지만, 문자에 집착하면서 지킬 항목이 늘어나니 숙고와 성찰은 그쳐버렸습니다. "아, 복잡하게 생각하기 싫으니까, 해도 되는지 안 되는지 결론만 말해주세요!" 하는 식으로 율법을 익히다 보니, 원 뜻과 정신의 숭고하고 아름다운 의도는 묻혀버리고 그저 기계적으로 가부를 판별하는 방법론만 늘어나고 만 것이지요.
한번 예수님을 부정적으로 보기 시작한 유다인들에게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설명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제대로 들릴 리 없습니다. 그런데도 요한 복음사가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에 꽤 긴 부분을 반복해 할애하는 건, 성자이신 예수님의 신원과 정체성이 앞으로 펼쳐질 파스카 여정에 단초가 되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그에 대한 수용과 믿음이 듣는 이들의 구원에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넘기셨다."(요한 5,22) 심판의 권한은 이제 아드님이신 예수님께 이양되었다고 선언하십니다. 또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요한 5,24)고 하시는데, 정말로 귀가 번쩍 뜨이는 말씀입니다.
나약하고 부족하며 탐욕으로 들끓는 자신의 실존적 처지를 처절히 체험하며 귀양살이 인생 순례길을 살아가고 있음을 인식하는 이라면, "심판을 받지 않는다."는 말씀에서 엄청난 위안을 받습니다. 사실 철저한 믿음으로 아무리 열심히 사는 그리스도인이라도 심판이라는 단어 앞에 온전히 자유롭기는 어렵기에 그렇습니다. 과연 내 주제에 심판이라는 관문을 제대로 통과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서는 누구도 자신할 수 없는 부분이 없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듣고 당신을 보내신 아버지 하느님을 믿는 것, 그것이 심판을 뛰어넘는 구원의 열쇠라고 하십니다. 우리와 같은 죄인에게는 마치 목적지에 이르는 지름길을 만난 듯, 지루한 컴퓨터 작업에서 단축키를 익힌 듯 반갑기 그지 없는 말씀인데, 유다인들에게는 그렇지 않은가 봅니다. 오히려 죄에 죄를 더하는 신성모독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을 믿는 이는 어떻게 심판을 피하게 될까요? 그 답은 오늘 독서에 들어 있습니다.
"설령 여인들은 (제 젖먹이를) 잊는다 해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 49,15)는 하느님의 말씀이 그 답입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사랑의 절정이 제 몸에서 낳은 아기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임을 누구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이 그보다 더 짙고 깊고 뜨겁고 애틋하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그런 하느님께서 아들의 말씀을 듣고 당신을 믿는 이에게 어찌 심판의 항목들과 잣대를 들이대실 수 있겠습니까? 사랑으로는 도저히 못할 일이 바로 그런 심판일 것이니까요.
그렇다고 심판에 대한 교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하느님을 믿고, 그 사랑의 결정이신 예수님을 사랑하는 우리에게 어느 여인보다 애끓는 사랑을 지니신 하느님께서 율법이 아니라 자비와 연민 가득한 사랑의 프리즘으로 우리를 비춰보시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는 심판의 다른 말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 당신의 크신 자애로 제게 응답하소서. 당신은 참된 구원이시옵니다."(입당송) 오늘 미사를 여는 시편 저자의 고백처럼 과연 구원은 하느님의 자애를 입고 다가옵니다. 믿는 우리에게 자애는 심판의 다른 이름입니다. 아멘.
아무리 건강 밥상을 차려도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어제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신 것 때문에 유다인들의 분노를 사는데 분노하는 유다인들을 누그러트리려 하시기는커녕 불 난 집에 기름 붙듯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시기에 당신도 일한다 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또 하시는 말씀이 당신이 하시는 일은 살리는 일이라고 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넘기셨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살리는 일을 하신다는 분이 심판도 하시겠다는 말씀과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살리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생각에 살리는 일과 심판하는 일은 반대되는 것이고, 주님은 당신이 원하시는 이들만 사랑하시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오늘 말씀에서 오해를 살만한 말씀들이 많고 그래서 우리는 오늘 말씀을 잘 이해해야 하는데 심판의 권한을 아버지께서 주신 이유가 사람들이 아들도 아버지처럼 공경케 하기 위함이라고 하심으로써 당신을 공경이나 받으려는 분으로 이해하기 쉽게 말씀하시고, 당신을 공경치 않아 당신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가차 없이 심판하시겠다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도 진정 속 좁은 우리 인간처럼 당신을 공경하는 사람만 사랑하시고, 그것을 기준으로 살리기도 하시고 죽이기도 하실까요?
그럴 리 없다는 것이 우리 믿음이고 우리의 믿음이 올바르다면 이런 믿음이어야 합니다.
사실 같은 요한복음에서 주님은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고 말씀하셨지요.
이처럼 주님은 모두가 구원받기를 원하시지만 그런데 그 구원을 원치 않는 사람이 있고 그들은 그 구원을 원치 않음으로써 결국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 요한복음의 일관된 얘기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말씀이 생명의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지만 어둠은 그 빛을 깨닫지 못하고(5절), 알아보지 못하고(10절) 맞아들이지 않기에(11절) 스스로 어둠의 세계에 남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에서 당신을 공경하는 사람이나 당신이 원하시는 사람은 당신의 말씀을 개떡같이 여기고 스스로 말씀을 걷어차는 사람이 아니라 당신 말씀을 소중히 듣고 당신을 보내신 아버지를 믿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당신을 공경한다는 것의 의미를 올바로 새기면 당신의 말씀을 믿고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제가 요즘은 엄마들의 마음을 조금 더 이해합니다. 엄마들이 가족의 건강도 생각하고 맛도 생각하여 정성껏 음식을 장만하고 상을 차려놨는데 가족 중의 하나는 말도 없이 때가 되어도 들어오지 않고, 또 하나는 아직 배불러서 안 먹겠다고 하고, 또 하나는 맛없거나 입맛이 없다고 기껏 차린 식탁을 걷어차 아무도 먹지 않으면 무척 속상할 겁니다.
그런데 당신의 정성이 헛것이 되어 속상한 것도 속상하지만 아무리 정성을 들였어도 안 먹으면 자기도 어쩔 수 없는 것이 가족들의 건강을 생각할 때 안타깝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원하신 것은 당신이 차리신 말씀의 식탁을 우리가 원하고 맛있게 먹는 것이고 그것을 원하시는 것은 당신 만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생명과 건강을 위해서입니다.
사랑을 걷어차서 스스로 심판에 들어가는 우리가 되지 말아야겠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요한 5, 30)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아무 것도 아버지
하느님 허락없이는
이룰 수 없는 우리의
삶입니다.
스스로 할 수
없음을 깨닫는
이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순종과 불순종
사이에 우리가
있습니다.
돌보아주시는
하느님이 계시기에
우리가 존재할 수
있습니다.
본연의 삶이란
하느님께서
하실 수 있도록
하느님의 힘에
맡겨드리는 것입니다.
당신자신을
우리에게
드러내시는
하느님 사랑입니다.
사랑은 영원히
함께 하는 것입니다.
참된 사랑은
모두를 기쁘게합니다.
온전한 믿음 또한
함께 하는 기쁨입니다.
십자가의 여정이란
하느님을 믿고
신뢰하는 법을
배우는 여정입니다.
단지 어린아이같이
아버지 하느님께
온전히 맡겨드리는
의탁이 필요합니다.
하느님과 함께하는
사순의 참된 여정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스스로에서
함께로 변화되는
기쁨이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아는 분 중에서 자기 몸을 끔찍하게 챙기는 분이 계십니다. 분명히 겉모습은 너무나도 튼튼해 보이는데도 어딘가가 아프다면서 힘든 표정을 많이 지으십니다. 하도 그러시기에 병원에 가보시라고 하니, 벌써 병원에 다녀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병원에서도 그 이유를 모르겠다고 하시더군요. 그러면서 늘 건강 보조제를 드시고, 유기농으로만 식단을 꾸려서 드십니다. 여기에 규칙적인 생활과 운동까지 아주 열심히 하십니다.
저는 이런 모습을 보면서 이분에 대해서 참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얼마나 오래 살려고 그러는 거야?’, ‘일부러 불쌍해 보이려고 그러는 건가?’, ‘너무 건강에 집착하니까 신경성일거야.’ 등등의 생각을 한 적이 많았습니다.
얼마 전에 저는 감기를 아주 심하게 앓은 적이 있었습니다. 머리도 아프고, 온 몸이 제 몸 같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콧물과 가래로 인해서 강의를 하는데도 불편함이 많았지요. 몸이 불편하니까 기도하는 것도 힘들고 귀찮아지는 것은 물론 좋아하는 책을 보는 것도 힘들어졌습니다. 그리고 ‘평소에 조금 더 내 몸에 신경 좀 쓸걸.’라는 후회를 했지요.
이렇게 감기를 앓다 보니 자신의 건강에 신경 쓰시는 분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오래 살려고 몸에 신경 쓰는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보다는 지금을 더 잘 살기 위해서, 지금 해야 할 것과 또 좋아하는 것을 할 수 있으려면 당연히 몸부터 신경 써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몸을 소홀하게 대하는 것을 별 것 아닌 것으로 생각하면서, 오히려 자신의 몸을 소중하게 여기는 분을 잘못 판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누구에 대해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에 앞서서 그 안의 의미를 찾는데 더욱 더 신경 써야 할 것입니다. 나만이 옳은 것이 아니라, 오로지 주님만이 옳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섣부른 판단이 아니라 내 이웃을 향한 공감과 이해의 마음을 갖는데 힘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에게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에 유다인들은 못마땅해 하고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지요. 왜냐하면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말하는 것은 커다란 불경에 해당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유다인들의 이 판단은 맞는 것일까요? 정말로 예수님께서 죽어야 마땅한 분일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 잘 몰랐고 자신들의 별 것 아닌 지식에서 벗어난다는 이유만으로도 죽어야 마땅하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예수님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우리의 이웃에 대해서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 안에서 활동하고 계시는 예수님을 판단하는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보다는 공감과 이해를 위해 노력한다면 어떨까요? 그 안에서 활동하는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인생은 지금에 대한 것이 아니라 기대감에 관한 거야. 그러니까 당신도 오늘만을 살 순 없는 거야(샤오후 궈).
절반의 생(칼릴 지브란)
절반만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지 말라/ 절반만 친구인 사람과 벗하지 말라/ 절반의 재능만 담긴 작품에 탐닉하지 말라/ 절반의 인생을 살지 말고/ 절반의 해답을 선택하지 말고/ 절반의 진리에 머물지 말라/ 절반의 꿈을 꾸지 말고/ 절반의 희망에 환상을 갖지 말라.
침묵을 선택했다면 온전히 침묵하고/ 말을 할 때는 온전히 말하라/ 말해야 할 때 침묵하지 말고/ 침묵해야 할 때 말하지 말라/ 받아들인다면 솔직하게 받아들이라/ 거절한다면 분명히 하라/ 절반의 거절은 나약한 받아들임일 뿐이므로.
절반의 삶은 그대가 살지 않은 삶이고/ 그대가 하지 않은 말이고/ 그대가 뒤로 미룬 미소이며/ 그대가 느끼지 않은 사랑이고/ 그대가 알지 못한 우정이다/ 절반의 삶은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그대를 이방인으로 만들고/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그대에게 이방인으로 만든다.
절반의 삶은 도착했으나 결코 도착하지 못한 것이고/ 일했지만 결코 일하지 않은 것이고/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은 것이다/ 그때 그대는 그대 자신이 아니다/ 그대 자신을 결코 안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때 그대가 사랑하는 사람은 그대의 동반자가 아니다.
절반의 삶은 그대가 동시에 여러 장소에 있는 것이다/ 절반의 물은 목마름을 해결하지 못하고/ 절반의 식사는 배고픔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절반만 간 길은 어디에도 이르지 못하며/ 절반의 생각은 어떤 결과도 만들지 못한다.
절반의 삶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순간이지만/ 그대는 할 수 있다/ 그대는 절반의 존재가 아니므로/ 그대는 절반의 삶이 아닌/ 온전한 삶을 살기 위해 존재하는/ 온전한 사람이므로...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군 생활은 지나고 나면 추억이지만 당시에는 힘든 일들이 많기 마련입니다. 겨울이면 동계 훈련을 했는데, 제가 있었던 용인에서 안양까지 행군을 하였습니다. 도로 양옆을 길게 줄을 서서 걸었습니다. 소총을 들고, 군장을 메고 걷는 길이 힘들었습니다. 한참을 걷다 보면 반가운 소리가 들려옵니다. ‘10분간 휴식’이라는 말입니다. 잠시 쉬면서 담배를 피우기도 하고, 군화의 끈을 다시 매기도 하고, 물을 마시기도 합니다. 잠시의 휴식이지만 다시금 행군할 힘을 얻었습니다.
예전에 낙동강을 건넌 적이 있습니다. 나환자 마을에 봉사 활동을 갔다가, 동네 아이들과 함께 꽁꽁 언 낙동강을 건너 ‘자장면’을 먹고 왔었습니다. 날씨는 추웠지만 아이들과 함께 건넜던 그 언 강이 문득 생각납니다. 강은 두껍게 얼어도 어딘가에 숨을 쉬는 구멍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강물도 숨을 쉬고, 얼음 아래 있는 물고기들도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자연의 신비는 참 묘한 것이어서, 물이 얼면 물에서 뜬다고 합니다. 사실 얼면 비중이 더 나가서 가라앉아야 하는데 물만은 위로 뜨기 때문에 물속의 모든 생명체는 얼어붙지 않고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얼음 두께가 어느 정도 되면 그 아래의 물은 얼음의 보호를 받아 더 이상 얼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자연의 신비입니다.
주변을 보면 꽉 막힌 세상에 ‘숨구멍’ 같은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서먹서먹한 관계를 따뜻하게 해주기도 합니다. 그분들은 말은 하지 않아도, 있는 것만으로도 힘을 주기도 합니다. 물론 잘 되고 있는 단체를 꽁꽁 얼리려고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자신들의 욕심과 자신들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의견과 뜻을 무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지만 그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일은 정말 쉬울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으로 우리를 이끌어주는 ‘숨구멍’과 같은 분들을 만나게 됩니다. 기도는 삭막한 세상을 이겨내는, 고통과 아픔을 견뎌내는 ‘숨구멍’과 같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인간의 몸과 마음은 모두 소중하고 가치가 있습니다. ‘心身不二’입니다. 현대인들은 마음이 없는 몸처럼 사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많은 갈등과 분쟁은 그릇된 욕망에서 시작합니다. 우리들의 몸은 하나의 개체를 이루지만 우리의 영혼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 모두 하나로 연결될 수 있음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내 몸을 위해서 다른 이들의 몸을 아프게 하고,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타인의 아픔과 고통은 어쩌면 인류라는 같은 영혼의 아픔과 고통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같은 마음’을 이야기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품어주는 사랑입니다. 나에게 잘 해주는 사람에게만 베푸는 사랑은 세상 사람들도 할 수 있습니다. 갚을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빌려주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하느님의 마음은 세상 사람들의 마음과는 달랐습니다. 하느님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은 ‘사랑’의 마음입니다. 이 사랑이 생명을 살리고, 이 사랑이 희망을 주고, 이 사랑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신앙인들은 하느님을 닮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삶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어미가 자식을 잊을지라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을 잊지 않고 사랑하신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은 자비와 용서, 친절과 온화함입니다. 우리들 모두는 하느님의 모습을 우리의 삶 속에서 드러내야 합니다. 우리를 위해서 사람이 되신 예수님께서는 따뜻한 바람이십니다. 막힌 것은 뚫어 주시고, 얼어붙은 것은 녹여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온몸을 바쳐서 우리들 구원을 위한 ‘숨구멍’이 되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를 시작하면서 생각해 봅니다. “나는 내가 만나는 사람들, 내가 속한 공동체를 얼리는 존재인가! 아니면 질식해서 숨이 멎을 것 같은 공동체에 사랑과 기쁨을 주는 ‘숨구멍’과 같은 존재인가!
하느님 체험 -지금이 바로 그때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을 체험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만나야 합니다.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 언젠가 그날이 아니라 오늘 지금 바로 여기서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느님은 언제 어디서나 계시기에 만날 수 있습니다.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사랑할 때 주님을 만납니다. 오늘 말씀은 하느님 사랑 체험의 이야기들입니다. 하느님을 주님으로 체험했던 이사야 예언자의 이야기이고 하느님을 아버지로 체험했던 예수님에 관한 복음 이야기입니다.
어제 수도형제들과의 유익했던 만남의 이야기를 나눕니다. 요즘 성소문제가 심각합니다. 남녀 수도원 모두가 성소의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성소문제를 의논하다가 도달한 결론은 우리 자신부터 ‘기쁘게’ 살자는 것이었습니다. 여기 수도원에 사는 수도자들이 우선 기쁘고 밝게 살아야 매력을 발산할 것이고 그 사랑의 향기, 기쁨의 향기를 맡고 성소자도 오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주님을 만날 때, 주님을 체험할 때 기쁨입니다. 자주 수도원을 방문하는 교구 젊은 사제의, ‘수도원은 주유소입니다. 사랑의 기름이 떨어졌을 때 수도원에 하느님 사랑의 기름을 넣으려 옵니다.’라는 말도 생각이 납니다. 또 어제 한 수도형제는 수도원을 ‘사랑의 충전소’라 했습니다. 수도원에 피정오시는 분들은 바로 영혼에 사랑을 충전하라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랑의 주유소, 사랑의 충전소란 말마디가 재미있습니다. 사랑의 기름을 넣으려 왔는 데, 사랑의 주유소이자 충전소인 수도원에 사랑이 없다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고 보니 매일 평생 끊임없이 성전에서 바치는 미사와 시편공동전례기도 시간은 사랑의 기름을 주유하는, 사랑을 충전하는 시간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언제 어디에나 현존하시는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새삼 사랑의 주유소, 사랑의 충전소를 찾지 않아도 됩니다. 하느님이 계신 곳을 찾지 말고 하느님을 찾으라는 어느 사막교부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너희는 멈추고 하느님 나를 알라.’는 시편 말씀도 생각납니다. 바쁜 중에도 잠시 멈춰 기도하며 그 영혼에 하느님 사랑의 기름을 주유하라는 것이며, 그 영혼을 하느님 사랑으로 충전시키라는 것입니다.
사순시기 지금이 바로 주님의 사랑을 체험해야 할 은혜의 때이고, 주님의 도움을 받아야 할 구원의 날입니다. 참 좋으신 하느님이십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여 마음만 열리면 우리도 이사야 예언자처럼 이런 하느님을 체험합니다.
“그들은 가는 길마다 풀을 뜯고, 민둥산마다 그들을 위한 초원이 있으리라. 그들을 배고프지도 않고 목마르지도 않으며, 열풍도 태양도 그들을 해치지 못하리니, 그들을 가엾이 여기시는 분께서 그들을 이끄시며, 샘터로 그들을 인도해 주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여기까지 살아 올 수 있었음은 하느님 사랑의 은혜입니다. 이렇게 하느님 사랑 속에 살아왔음을 까맣게 잊고 지낸 우리들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사랑 또한 발견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이사야의 하느님 사랑체험 이야기를 통해 잊었던 하느님 사랑을 발견해 내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체험에서 저절로 터져나오는 기쁨입니다.
“하늘아, 환성을 올려라. 땅아, 기뻐 뛰어라. 산들아, 기뻐 소리쳐라.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당신의 가련한 이들을 가엾이 여기셨다.”
문득 ‘수도원에서 무슨 맛으로 사느냐?’는 물음에 ‘하느님 찬미의 기쁨으로 산다.’고 즉각적으로 대답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사랑할 때 저절로 터져나오는 하느님 찬미입니다. 하늘처럼, 땅처럼, 산처럼, 기쁨으로 환성을 올리듯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시편성무일도시간이요, 바로 하느님 사랑의 찬미의 기쁨으로 살아가는 수도자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은 나보다도 더 나 가까이 계시고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하고 말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말씀을 직접 들어보세요.
“여인이 제 젓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결코 잊지 않는다.”
‘나는 너를 결코 잊지 않는다.’ 바로 이 말마디에 하느님 사랑이 응축되어 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하나된 삶을 살았던 복음의 예수님이십니다. 사랑의 일치입니다. 주님 사랑이 깊어질수록 주님과의 일치도 깊어집니다. 과연 날로 주님과 깊어지는 사랑의 관계인지요. 우리 모두를 향한 예수님 말씀을 들어 보세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할 따름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어 당신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여 주신다.”
우리의 하느님 체험은 아드님 예수님을 통해 이뤄집니다. 예수님과 일치될수록 하느님 아버지를 알게 됩니다. 하여 분도 성인도 그 무엇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앞세우지 말라 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아, 주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우리들을 두고 하는 말씀입니다.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 영원한 삶을 사는 우리들입니다. 이어지는 다음 말씀도 은혜롭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지금이 바로 우리 모두 주님의 말씀을 듣고 살아날 그때입니다. 살아있으나 실상 죽어있는 이들 영혼들도 많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살아날 때는 바로 지금입니다. 두 말마디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꼭 기억해두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영혼에 당신 사랑의 기름을 가득채워 주시고 우리 영혼을 당신 사랑으로 완전 충전시켜 주십니다. 참 좋은 사랑의 주유소, 사랑의 충전소인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아멘.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지는 장면입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벳자타에 38년 동안 누워 있는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그런데 그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이에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그와 같은 일을 했다고 문제를 삼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일하는 것이 정당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 하신 일의 정당성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사실을 말씀해 주십니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는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요한 5,19)
이는 당신께서 하느님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일을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곧 그 하시는 일에 있어서,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이 지상에서 하시는 당신의 일에, 아버지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요한 5,24)
아버지께서는 사랑으로 아들이 기뻐하는 자에게 생명을 주시고, 아들에게 재판권을 위임하시고, 아들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으로 일하십니다. 곧 사랑에 있어서,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아들도 그 안에 생명을 가지게 해 주셨기 때문”(요한 5,26)이며, 아버지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나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요한 5,30)
이는 신적 생명이 사람의 행동에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행동에서 출발한다는 말씀입니다. 곧 생명이 먼저 오고, 그 다음에 사람의 믿음이 온다는 사실을 밝히십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사람 속에 생명을 넣으시기에, 사람이 믿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신적 생명은 믿음의 결과로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보상으로가 아니라, 믿는 자가 이미 자기 속에 생명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믿게 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하나 되어 일하십니다. 곧 벳자타의 병자를 고치신 일도 아버지와 하나 되어 함께 하신 정당한 일임을 밝히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
이처럼, 아들의 일에 있어서 아버지와의 연합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일하실 때, 아버지와의 사랑의 연합에서 하셨듯이, 우리도 일할 때, 그리스도와의 사랑의 연합으로 해야 할 일입니다.
주님!
제가 하는 일이
아버지의 뜻에 맞게 하소서.
무슨 일을 하든지
당신과 함께
일하게 하소서.
사랑의 연합으로
당신께서 행하신 바를 행하고
당신의 생명이 드러나게 하소서.
당신과 함께 하는 일이 아니라면
아무 것도 하지 않게 하시고
모든 일이 당신 뜻 안에 가두어지게 하소서. 아멘.
생명을 가리는 너울을 사랑으로 벗겨내고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님께서 벳자타 못가에서 병자를 고쳐주시자 유다인들이 시비를 걸며 박해하려 듭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 하시며,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5,18) 여기십니다. 그러자 그들은 그분께서 하느님을 모독했다며 더욱 더 죽이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일을 하는 것이 당신의 사명이며(5,19), 하느님의 아들로서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리거나 심판할 수 있는 권한을 받았다 하십니다(5,21-22). 그렇게 그분은 인간의 삶에 관여하시어 하느님의 일을 하십니다. 그런데 유다인들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통해 선포되는 하느님 나라와 구원의 선물을 알아보지 못하고 철저히 배척합니다.
하느님께서는 황폐함에 풍요를, 갇힘에 해방을, 어둠에 빛을 주시고 굶주림과 갈증을 없애주리라는 희망과 위로를 주십니다(이사 49,8-13). 그러나 유다인들은 예수님이 이런 하느님의 자비를 전해주는 분이심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인정하지도 않은 것입니다. 그들은 소경이 되어 사랑의 표지를 보지 못한 채, 생명의 숨결을 멀리 하며 어둠 속으로 달려가버린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말합니다. “회개 중에 있지 않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지 않으며 악습과 죄를 일삼고 나쁜 욕정과 나쁜 욕망들을 쫓아다니며, 약속한 것들을 지키지 않고, 육적인 욕망과 세속의 근심 걱정과 살아갈 근심에 빠져 세상을 육신적으로 섬기는 이들은 참된 빛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않기에 소경입니다.”(2신자 편지, 63-66)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실행하도록 불렸습니다. 그럼에도 얼마나 많은 순간 헛군데 정신을 쓰고 마음을 빼앗기며 소경이 되어버리는지 모릅니다. 생명이요 사랑이신 주님을 만나고 그분의 일을 행한다는 건 그토록 어려운 일입니다. “죄를 짓는 일은 육신에 달콤하고 하느님을 섬기는 일은 육신에 쓰기 때문이며, 모든 악과 악습과 죄는 마음에서 솟아나오기 때문입니다(2신자 편지, 69)
그렇지만 다시 눈을 뜨고 주님께 온전히 의탁하면서, 그분이 원하시고 실천하신 사랑과 생명의 역사를 계속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을 지니도록 힘써야 합니다. 생명이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는 너울을 걷어버리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 생명의 길을 걷기 위해, 탐욕과 편견과 고정관념의 너울을 벗겨내고, 몸에 익은 습관의 벽을 허물어야겠습니다. 그 열린 지평에 비로소 생명이 솟아날 것입니다. 나아가 신앙생활이 내면적 체험이나 감성적인 만족에 그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일상의 삶과 만남과 순간들이 바로 생명을 받아들이고 전달하며 나눠야 할 생명의 터입니다.
오늘도 온갖 탐욕과 근심걱정, 악습의 너울을 벗어버리고 깨끗한 영혼과 따뜻한 사랑을 품도록 힘써야겠습니다. 그 사랑으로 길거리의 외로운 예수님, 소외당하고 무시당하시는 예수님, 배고프고 아파하시는 예수님을 알아보았으면 합니다. 사랑의 동화와 헌신적 실천으로 하느님을 섬기고, 우리 가운데 생명을 샘솟게 하는 거룩한 오늘이길 기도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고백>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2018. 03. 14 사순 제4주간 수요일 요한 5,17-30 (아드님의 권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 고백합니다.
당신 앞에서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당신 없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는 것이
삶의 현명한 방법이 되어버린 오늘날
이러한 우리의 고백은 어리석게 보입니다.
그러나 이 어리석음 안에 오히려
믿지 않는 이들이 갖지 못한 삶의 지혜가,
세상의 어떠한 유혹이나 권력도
꺾을 수 없는 삶의 열정이
날마다 새로운 모습으로 되살아납니다.
하느님께서 처음처럼
영원히 일하시고 계시고,
우리 역시 하느님을 따라
하느님과 함께 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지만,
하느님과 함께라면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는 이들은
자신의 능력에 자만하며
헛되이 모든 것을 걸기에
자신의 부족함에 좌절하여
힘을 잃고 말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부족함 속에 오히려
충만한 하느님의 능력을 느끼며
하느님과 함께 더욱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는 이들은
미지의 것을 두려워하며
자신만의 울타리 안에 머물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새롭게 주어지는 모든 것에서
미처 깨닫지 못했던
하느님의 섭리를 체험하면서
놀라움과 기쁨으로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수동적이고 자기 부정적으로 보이는
이 땅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러기에 누구보다도
가장 적극적으로 삶을 보듬고,
언제나 넘쳐나는 기쁨과 희망으로
내일을 향한 오늘을 가꾸는
열정 가득한 아름다운 사람들입니다.
검사와 변호사<요한,5/17-30.>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한 죄인을 판결하는 판사는 법을 따라 검사의 고발과 법적요이 잘 되었는지를 조사하는 변론이의 말을 듣고 최후판결을 내립니다.오늘 예수님의 판결도 “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나는 듣는 대로 심판할 것이다.” 하심은 내 뜻대로 아니고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따라서, 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데는 가야할 길이 있고 그길을 따라 가야합니다. 길을 잃거나 길을 찾지 못하여 잘못 길을 가면 비난이나 욕을 먹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그 법에 따라 벌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고발 하는 법이 있다면 변화하는 법도 있어 판결의 공정성을 띠게 됩니다. 그런데 고발만 있고 변화사가 없으면 법을 모르는 사람들은 억울하게 죄인으로 판결을 받고 옥살이를 하게 됩니다. 제가 어느 날 차를 운전하다가 졸음운전으로 내차가 가드란인을 처박고 정지 할수 없는 상태에서 150KM을 가다가 겨우 정하여 차를 보니 네바귀가 다 뻥구 났으며 차 안에 에아빽이 다 떠졌으나 저는 안전하게 있었 하느님이 아직 저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하고 감사 기도를 하고 보험화사소장을 불러 차 처리를 부탁하고 몇일간 안전을 취하고 있는데 뺑소니라는 고발장을 받고 경찰관에게 설명을 해도 저를 검찰에 고발하여 불려가 조서를 꾸미며 심문을 받았으나 저는 변호사 없이 제가 스스로 양심고백과 현실을 설명하여 무혐이 처분을 받는 순간 다시 감사기도를 들였습니다.
주님은 법대로만 판결하시는 분이 아니시고 법과 자비를 가지시고 그래서 죄인들을 위하여 세상에 오시였고 십자가의 죽음으로 우리 죄를 용서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의 은총은 우리자신이 불상이 보이고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 얼마나 가련하고 비천하고 보잘 것 없는 자임을 고백하며 하느님 자비의 은총을 받도록 기도합니다.
“내 심판은 올바르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요한.5,30)
김종오 신부님
그리스도인들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추구하는 것은 자신의 호불호를 뛰어넘습니다. 자신보다 먼저 아버지께서 좋아하시는 일을 선택합니다.
아버지의 뜻을 진정으로 추구하는 사람은 더 나아가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자신을 변화시킵니다.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이 아니라, 주님께서 추구하셨던 아버지의 나라를 추구합니다.
아버지의 나라를 추구하기 위해 우리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자신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내가 아니라 철저하게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자신을 바꾸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나를 변화시키기 위해, 우리는 관계를 통하여 드러나는 자신의 성격과 태도와 행동을 민감하게 인식하여야 합니다. 자신의 모습을 인식하고 성찰하여 깨닫는 만큼 우리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자신을 조금씩 변화시킬 수 있게 됩니다.
특히 우리는 자신의 감정에 민감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제각기 다릅니다. 언뜻 보기에 비슷하게 보이는 감정일지라도 그 깊이와 색깔은 모두 다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뜻은 다양한 우리의 감정만큼 서로 다릅니다.
인간의 감정은 우리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를 가장 잘 드러냅니다. 감정은 유일무이한 우리의 고유성을 드러내고 그 고유성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드러내는 통로입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맺는 모든 관계를 통해서 우리는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드러냅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부전자전이라는 말이 있듯이, 예수님은 아버지 하느님과 온전히 일치되어 있는 듯 보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말끝마다 다 아버지 하느님과 연결시키십니다. 정말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를 확실히 믿고 깊이깊이 사랑하시는가 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유다인들은 더욱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분께서 안식일을 어기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요한 5,18) 라고 나옵니다.
“알면 알수록 더 믿게 되고, 믿으면 믿을수록 더 알게 된다.”는 성인의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더 확실히 믿고 자세히 알아 그만큼 더 깊이 사랑하여, 주님과 하나되어 십자가의 길을 굳건히 걸어 나가기로 합시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요한 5, 24)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새로운 생명은
겨울에서 봄으로
건너가고 있습니다.
새로운 변화가
소중한 곳곳에서
일어납니다.
영원한 생명이신
하느님 안에
우리가 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 모든 것은
생명입니다.
변화를 두려워하는
우리들을 위해
하느님께서는 친히
사람이 되어 오시고
십자가에서 부활을
일구어 내십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는 죽음이 아니라
생명의 관계입니다.
생명의 관계는
집착과 소유가 아닌
사랑과 자비의
관계입니다.
생명의 한복판에
하느님이 계십니다.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생명을 가지신 분이
생명으로 우리에게
오셨고 생명으로
함께 계시기에 우리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습니다.
하느님 중심이란
생명 중심을
이야기합니다.
참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을 믿습니다.
생명의 섭리 속에 있는
죽음까지도 새로운 생명을
위한 변화임을 믿습니다.
새롭게 변화하는
은총의 사순되십시오.
건너갑시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언자 중의 예언자이자 예언자들의 대명사로서 주님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강렬한 구원의지를 잘 전달했던 이사야 예언자는 그분께서 우리 인간 존재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표현했습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이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야서 49장 15절)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 한명 한명을 바라보는 주님의 시선은 분노와 실망의 시선이 아니라 한없이 따뜻하고 너그러운 시선입니다. 마치 갓 태어난 젖먹이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시선처럼 말입니다.
갓 태어난 아기를 바라보는 통상적인 어머니들의 시선은 어떻습니까? 자신의 몸을 통해 세상에 나온 자신을 꼭 빼닮은 한 생명체의 모습이 너무 신기하고 놀라울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너무나 사랑스럽고 대견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행여 어디 잘못되기나 할까? 혹시라도 어디 아플까 늘 걱정스러울 것입니다. 애지중지(愛之重之) 혹은 노심초사(勞心焦思)란 말이 딱 맞을 것입니다.
오늘 나를 바라보시는 주님의 시선 역시 은혜롭게도 애지중지, 노심초사가 가득 담긴 시선이 틀림없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나를 떠나간다 할지라도 끝까지 내 곁을 떠나가지 않으시는 분, 끝까지 내 등 뒤에 서서 나를 응원하시는 분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내가 깊은 수렁에 빠져 허덕일 때, 친구들이며 지인들이 다 나를 두고 수군거릴 때도 끝까지 나를 잊지 않고 보살피시는 분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떠나 큰 죄를 짓고 방황할 때조차도 끝까지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나를 귀히 여기시는 분, 나를 존중하고 나에 대한 구원의지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 나를 당신 스마트 폰 저장번호 1번으로 등록해놓으신 분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이런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또 다른 극진한 사랑의 표현을 건네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요한복음 5장 24절)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계속 가슴에 남습니다. 이 사순절 참으로 고마우신 주님께서는 우리를 늘 건너가게 초대하십니다. 사순 시기는 어찌 보면 건너가는 시기입니다.
사순 시기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는 시기, 졸고 있음에서 깨어있음으로 건너가는 시기, 분심상태에서 기도로 건너가는 시기, 육적인 삶에서 영적인 삶으로 건너가는 시기입니다. 언행의 불일치에서 일치로 넘어가는 시기, 불신에서 확신으로 건너가는 시기, 의혹에서 흔들리지 않는 신앙으로 건너가는 시기, 결국 죽음의 땅에서 생명의 땅으로 건너가는 파스카(Pascha)의 시기가 곧 사순시기입니다.
벌써 사순시기도 깊어가고 있습니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갈 수 있도록 더 많이 노력해야겠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교구에 있기 때문에 더러 부탁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본당 신부님들 중에는 나이가 많은 젊은이를 신학교에 추천해 달라고 하기도 합니다. 예비 신학생 모임을 1년은 나와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젊은이를 신학교에 추천해 달라고 하기도 합니다. 면담을 하고, 회의를 하기도 하지만 부탁을 들어주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잡지사에서 본당에 홍보를 할 수 있도록 부탁을 하기도 합니다. 동창 신부님인 경우에는 문자를 보내서 부탁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부담이 되기도 합니다. 천주교의 기록물 관리 시스템에 대한 연구를 하는 형제가 다른 교구의 기록물 보관 유형에 대해 열람할 수 있도록 부탁을 하기도 했습니다. 해당 교구에 공문을 보내기는 했지만 더 이상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적극적인 성격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고, 남의 일에 깊이 관여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제가 아는 자매님은 다른 사람의 걱정과 근심을 마치 자기 일처럼 생각하고 도움을 주곤 합니다. 그런 성격 때문에 때로 어려움을 겪기도 하고, 물질적인 손해를 보기도 하지만 제가 가지지 못한 마음을 가졌고, 배울 점이 있는 분입니다. 외국에서 온 관광객이 길을 물으면 안내를 하면 되는데 직접 택시를 타고 모셔다 드리기도 합니다. 지나가는 말로 한 이야기도 꼭 기억했다가 도움을 주기도 합니다. 외국에서 온 손님을 위해서 며칠씩 운전을 하기도 하고, 한국에서 온 학생들을 몇 달씩 집에 머물 수 있도록 배려를 하기도 합니다. 말과 행동에 가식이 없기에 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배고프지도 않고 목마르지도 않으며, 열풍도 태양도 그들을 해치지 못하리니, 그들을 가엾이 여기시는 분께서 그들을 이끄시며, 샘터로 그들을 인도해 주시기 때문이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고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것이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이런 마음을 갖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때로는 모욕을 당하기도 하고, 때로는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고, 때로는 억울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하느님은 우리가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같은 마음’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품어주는 사랑입니다. 나에게 잘 해주는 사람에게만 베푸는 사랑은 세상 사람들도 할 수 있습니다. 갚을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빌려주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하느님의 마음은 세상 사람들의 마음과는 달랐습니다. 하느님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은 ‘사랑’의 마음입니다. 이 사랑이 생명을 살리고, 이 사랑이 희망을 주고, 이 사랑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신앙인들은 하느님을 닮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삶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어미가 자식을 잊을지라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을 잊지 않고 사랑하신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은 자비와 용서, 친절과 온화함입니다. 우리들 모두는 하느님의 모습을 우리의 삶 속에서 드러내야 합니다.
사랑의 일치, 사랑의 치유 -지금이 바로 그때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랑의 일치, 사랑의 치유입니다. 사랑밖엔 길이 없습니다. 일치의 중심은 예수님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한 아버지와의 일치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환히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길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께 갑니다. 우리에게 다른 길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말씀이십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가 입증하는 진리입니다. 어제 미쳐 나누지 못한 두가지 깨달음이 생각납니다.
1.
어제 제1독서 에제키엘서의 성전에서 솟는 물이 강이 되어 흘렀고 강물이 닿는 곳마다 모두가 살아납니다. 바로 강물같이 흐르는 사랑이, 미사은총이 닿는 우리를 살리는 이치를 보여줍니다. 옛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마이더스의 손이 생각납니다. 마이더스 임금의 손에 닿을 때마다 모두가 황금으로 변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마치 어제 에제키엘서에서 하느님의 손길같은 은총의 강물이 닿았을 때 모두가 살아나는 이치와 흡사합니다. 사랑은 생명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닿아야 비로소 몸도 영혼도 살아납니다. 바로 미사은총은 이런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에 닿아 영혼도 육신도 살아나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2.
또 하나의 신비로운 깨달음입니다. 공동체에 대해 섭섭했던 점을 생각하니 끝없이 솟아나는 감사와 사랑의 추억뿐이었습니다. 형제들의 단점을 생각하니 끝없이 샘솟는 좋은 장점들뿐이었습니다. 하느님에 대해 섭섭했던 점이 무엇인가 생각하니 온통 감사할 사랑뿐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동안 베풀어주신 사랑을 생각하니 요즘 불편한 몸은 정말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되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수도원 본원의 명칭인 '자비의 집'은 정말 잘 어울립니다.새삼 하느님은 사랑이심을 깨닫습니다. 삶의 본질 역시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차고 넘치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니 남은 일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한 끝없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사랑뿐임을 깨닫습니다. 어제 읽었던 짧은 ‘안겔루스 질레지우스Angelus Silesius’의 글도 잊지 못합니다.
-사람아, 본질이 되어라!
세상이 사라지면
우연은 떨어져 나가도
본질은 계속 존재한다.-
‘본질’대신 ‘사랑’을 넣어도 그대로 통합니다. 사랑이 본질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바로 사랑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통한 자기실현, 자기완성입니다. 이사야서를 통해 눈부시게 드러나는 하느님의 황홀한 사랑입니다. 은혜의 때에 응답해 주시고 구원의 날에 도와 주시는 참 좋으신 주님이십니다. 지금 주님 부활을 앞둔 사순시기가 바로 은혜의 때요 구원의 날입니다.
“그들은 배고프지도 않고 목마르지도 않으며, 열풍도 태양도 그들을 해치지 못하리니, 그들을 가엾이 여기시는 분께서 그들을 이끄시며, 샘터로 그들을 인도해 주시기 때문이다.
---
하늘아, 환성을 올려라, 땅아, 기뻐 소리쳐라.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당신의 가련한 이들을 가엾이 여기신다.”(이사49,10.13).
바빌론 귀양에서 돌아 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그대로 오늘의 우리를 통해 실현되고 있는 구원을 상징합니다. 당신 사랑의 샘터인 미사로 인도하시어 우리를 위로하시고 격려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사랑의 고백도 감동입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49,15).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바로 오늘의 복음입니다. 이런 하느님 아버지와 일치의 사랑을 사셨던 분이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십니다. 오늘 복음은 어제 벳자타 못 가에서 병자를 고치신 이후 핍박을 받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적극적으로 그들에게 아드님으로서 당신의 권한을 해명하십니다. 그대로 주님은 미사에 참석한 우리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시공을 초월해 영원한 현재성을 띄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어 당신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여 주신다.”(요한5,19-20ㄱ).
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넘어갔다.”(요한5,24).
3.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도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요한5,25).
미사를 봉헌하는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시간 아드님의 말씀을 듣고 아버지를 믿음으로, 주님과 사랑의 일치로, 다시 살아난 우리들이요 죽음에서 생명으로 넘어간 우리들입니다. 아버지를 평생 보고 배워 아버지와 사랑의 일치를 이룬 아드님 예수님처럼, 평생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사랑을 보고 배우라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 당신 생명의 말씀과 사랑의 성체를 모심으로 당신과 사랑의 일치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타고난 것과 보고 배운 것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사순절이 되면, 그것도 사순 4주간이 되면 괴롭습니다.
그게 그거 같은 요한복음의 잔소리가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장황하게 이 말씀 저 말씀 하시는데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당신도 일하시고, 아버지께서 살리시니 당신도 살리신다는 대략 그런 얘기입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하시는 그대로 당신도 하신다는 말씀, 아버지께서 하시는 대로 당신도 살리는 일을 하신다는 말씀, 이것이 실은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하시고픈 그 많은 말의 핵심이요 요약입니다.
제가 크면서 많이 들은 얘기이고 실제로 그런 것을 많이 봤는데 그것은 아비 하는 대로 자식이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애비가 바람을 많이 피워 어렸을 때 고생을 많이 하고 그래서 자기는 커서 절대로 바람을 피우지 않겠다고 했는데, 어미를 자주 때리는 애비를 보고 자기는 안 그러겠다고 했는데 그 자식이 커서는 애비 하는 짓을 똑같이 하는 그런 경우입니다.
애비도 자기처럼 하라고 하지 않았고 자식도 애비처럼 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럼에도 똑같이 한다면 그러면 그것은 도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는 DNA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보고 배운 것이 그것밖에 없기 때문이겠지요. 사실 우리의 모든 것이 크게 이 두 가지 테두리 안에 있습니다.
타고난 것과 보고 배운 것.
체질이나 성격 등은 타고난 것이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저의 체질이나 성격, 습관이나 재능은 아버지 닮은 것이 많은데 제가 일찍 아버지를 여의었는데도 닮았다면 이런 것들은 후천적인 것, 곧 보고 배운 게 아니라는 얘기지요.
그렇지만 타고난 것, 받은 것을 가지고 어떻게 사느냐 문제는 후천적이고, 그래서 내가 무엇을 보고 배우고, 어떻게 노력했느냐에 달렸지요. 체질이나 성격이나 재능은 타고 났어도 인품이나 성품은 하기 나름이고 특히 사랑하고 안 하고는 타고난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누구는 사랑의 사람으로 태어나고 누구는 사랑과 거리가 먼 사람으로 태어난 게 아니라는 얘깁니다.
그러니 체질, 성격, 재능에 따라 잘 하는 것이나 못하는 것이 있고, 그래서 하는 일이 사람마다 다를 수는 있어도 무슨 일을 하든지 그것을 사랑으로 하느냐 미움으로 하느냐, 살리는 일을 하느냐 죽이는 일을 하느냐는 선천적이지 않고 내가 어떤 지향을 가지고 어떻게 노력하느냐에 달린 겁니다.
잔인한 짓을 많이 보고 자란 사람, 나쁜 일에 자주 가담한 사람은 눈 깜짝 하지 않고 잔인한 짓을 하거나 죽이는 것을 쉽게 하고, 부모의 헌신적인 이웃 사랑을 늘 보고 자란 사람이나 동물이나 식물까지 정성껏 볼보는 가족분위기 안에서 자란 사람은 파리 한 마리 죽이지 못하고 미워하는 것조차 너무 괴로워하지요.
그러니 인간적으로도 이웃을 살리는 일을 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려서부터 뭘 보고 자랐느냐가 이렇게 중요한데 신앙적으로 하느님의 일을 하느님 뜻대로 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예수님처럼 늘 하느님을 보며 살아야 하는데 이것이 다른 말로 하면 관상이고, 관상기도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오늘 주님의 다음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하겠습니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고 있는 것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지는 장면입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벳자타에 38년 동안 누워 있는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그런데 그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이에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그와 같은 일을 했다고 문제를 삼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일하는 것이 정당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 하신 일의 정당성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사실을 말씀해 주십니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는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요한 5,19)
이는 당신께서 하느님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일을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곧 그 하시는 일에 있어서,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이 지상에서 하시는 당신의 일에, 아버지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요한 5,24)
아버지께서는 사랑으로 아들이 기뻐하는 자에게 생명을 주시고, 아들에게 재판권을 위임하시고, 아들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으로 일하십니다. 곧 사랑에 있어서,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아들도 그 안에 생명을 가지게 해 주셨기 때문”(요한 5,26)이며, 아버지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나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요한 5,30)
이는 신적 생명이 사람의 행동에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행동에서 출발한다는 말씀입니다. 곧 생명이 먼저 오고, 그 다음에 사람의 믿음이 온다는 사실을 밝히십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사람 속에 생명을 넣으시기에, 사람이 믿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신적 생명은 믿음의 결과로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보상으로가 아니라, 믿는 자가 이미 자기 속에 생명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믿게 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하나 되어 일하십니다. 곧 벳자타의 병자를 고치신 일도 아버지와 하나 되어 함께 하신 정당한 일임을 밝히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
이처럼, 아들의 일에 있어서 아버지와의 연합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일하실 때, 아버지와의 사랑의 연합에서 하셨듯이, 우리도 일할 때, 그리스도와의 사랑의 연합으로 해야 할 일입니다.
"나는 스스로 하지 않는다."
윤경재 요셉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나는 듣는 대로 심판할 따름이다. 그래서 내 심판은 올바르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요한5,19~30)
유명한 노자 22장을 읽으면 오늘 복음말씀과 중첩되어 그 뜻이 선명하게 다가오게 됩니다. 노자 22장은 보통 가,나,다 세 문단으로 나누어 읽는데 가운데 문단 글귀가 아주 비슷합니다.
“스스로 견해를 내지 않기에 분명하고, 스스로 옳다고 하지 않기에 빛나며, 스스로 뽐내지 않기에 공을 이루고, 스스로 자랑하지 않기에 오래간다. 그는 오직 다투지 않기에 세상에서 그와 다툴만한 사람이 없도다.”
(不自見 故明, 不自是 故彰, 不自伐 故有功, 不自矜 故長. 夫唯不爭 故天下莫能與之爭)
노자22장 글귀는 마치 예수님을 두고 쓴 것처럼 보일정도입니다. 노자 글귀가 성립된 것이 최소 BC220년 이전이라 보면 인류의 지혜가 무엇을 지향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참고로 첫째 문단을 읽어봅니다. “구부리면 온전해지고, 휘면 곧아진다. 패인 곳은 가득차고, 낡은 것이 새로워진다. (욕심을) 줄이면 얻고, 늘리면 미혹된다. 이러기에 성인은 ‘一(者)’를 품어 세상의 본보기로 삼는다.” 여기서 ‘一’은 道를 말하며 하느님이라 보아도 무방합니다.
셋째 문단은 “예로부터 내려오는 ‘곡즉전’이라는 말이 어찌 빈말이겠는가! 참으로 옹글어서 (만사가) 그리로 돌아간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아버지를 두고 말씀하시는 예수님 최고의 겸사가 얼마나 위력이 있고 미더운지 노자를 보면 확실해집니다. 그러나 이 때문에 유다인들은 더욱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분께서 안식일을 어기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눈이 가리면 가치전도가 얼마나 심하게 되는지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앞장서서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지는 게 이기는 길이라고 보여주셨고, 꼴찌가 첫째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최종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까지 하였습니다.
조선 후기 무관이셨던 임경업 장군은 이괄의 난, 병자호란 때 혁혁한 공을 세우셨습니다. 그의 군사적 지휘능력, 외교적 탁월성은 ‘임경업전’으로 전해질 만큼 대단합니다. 임경업 장군께서 평안북도 영변에서 방어사로 지내던 시절의 일화입니다.
영변 지역에서 북쪽 오랑캐 침입을 지키는 요충지인 백마산성을 긴급히 보수 공사를 해야 했습니다. 당시에 인근 지역 백성이 모두 동원돼 돌과 목재를 날랐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한순간에 다치거나 죽어나가는 중노동을 밤낮으로 해야 했습니다. 자연히 불만이 커져갔습니다. 방어사가 시키는 일이니 하지 않을 수는 없고 그러다 보니 백성들은 삼삼오오 모이기만 하면 쑥덕대기 바빴습니다.
하루는 누군가가 다들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임경업인지 방어사인지는 우리가 이렇게 고생하는 거 알고나 있나 모르겠어. 다들 안 그런가.”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그러게 말이야” 혹은 “방어사가 이 고생을 어찌 안단 말인가”라고 맞장구쳤습니다.
그때 한쪽에서 “여기 임경업이도 있으니 그런 걱정은 마시게”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 쳐다보니 방어사도 허름한 옷을 걸친 채 백성들과 함께 돌을 나르고 있었다고 합니다.
미군이 역사상 처음 패배한 전쟁으로 기록되는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은 민가를 불태우거나 우림지역에 제초제를 살포하였습니다.그런 행동이 당시 군 임무를 완수하는 데는 매우 효과적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유일한 대안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들은 비인도적 행위로 오늘날까지도 비난받고 있으며 직접적으로는 손해배상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그 상처를 치유하러 많은 시간과 노력, 예산이 투입되고 있습니다. 베트남 전쟁 참가국인 우리나라 군인들도 그 피해를 아직까지 겪고 있습니다.
눈앞의 이익보다 장기적인 안목으로 사태를 정리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말해주는 대목입니다. 그 사건 이후 미군은 전쟁의 교범원칙에 ‘합법성’을 추가했다고 합니다.
이 상반된 두 가지 예화는 ‘曲則全’의 이치가 여전히 유효하며 만고의 진리라는 것을 웅변적으로 보여줍니다.
몇 년 전부터 리더십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었습니다. 그 중 서번트 리더십은 겸손과 영적인 통찰력으로 구성원의 자율성과 도덕적 발전을 추구하며 구성원과 조직, 나아가 전 사회의 공동선을 이룩합니다. 위대한 리더들은 끊임없이 꿈을 꾸었고 그 꿈을 조직의 비전으로 승화시켜 구성원들과 공유하려 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리더십을 서번트 리더십의 본보기라 정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리더십이 얼마나 효율적인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을 닮기 위한 사랑의 갈망과 실행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은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벳자타 못가에서 병자를 고치신데 이어,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동등하다고 하시자 그분을 죽이려고 합니다(5,18). 그들은 예수님께서 신성모독을 했다며 적대감이 끓어올라 그분을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늘 하느님의 뜻대로 표징을 보여주시고 심판하시며(5,19-20.30),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을 받아(21-24절) 사람을 살리고 심판하니 하느님과 동등하다고 답변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안식일의 율법을 부정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당신의 말씀과 표징은 하느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고 주님 안에서 주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밝히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인간들의 삶과 죽음을 좌우하는 권능을 부여받으셨기에(21,25-26. 28-29절), 우리의 행복과 징벌(5,29)을 판가름하심으로써 삶을 올바로 이끌어주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예수님을 추종해야 할까요? 가장 근본적인 우리의 소명은 사랑이신 하느님과 나를 동일시하는 일입니다.
나를 하느님과 동일시한다는 것은 내가 하느님께 속해 있음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나 자신의 소속감을 분명히 하는 것이지요. 하느님께 속한 사람은 하느님의 자비와 선과 아름다움과 진리와 지혜 가운데 머뭅니다. 하느님의 본성을 추구하고 그분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깁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일을 하며 하느님께 대한 소속감을 분명히 드러내면 낼수록 우리의 정체성은 뚜렷해집니다. 하느님의 일을 함으로써 하느님의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기억하고(이사 49,15), 황폐함에 풍요를, 갇힘에 해방을, 어둠에 빛을 주며, 희망과 위로를 주는(49,8-13 참조) 사람이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요한 5,19) 하고 말씀하십니다. 주님 안에서 숨 쉬며 살아가는 우리의 삶의 방향도 그와 같아야겠지요.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는 어떤 처지에서도 그분의 눈길 앞에 있음을 의식하고, 그분이 원하시는 것을, 그분이 하셨던 대로 행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추종하는 길에는 늘 시기와 질투, 박해와 시련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사실 그건 피할 수 없는 십자가이지요. 그러나 마음과 의식, 생각과 말과 행동을 주님과 일치시킬 때, 내 안에서 나와 함께하시는 주님 친히 그 모든 어려움을 이겨낼 힘을 주실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그분이 하시는 것을 그대로 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의 길로 나아가야겠습니다.
오늘도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13,34) 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살아내도록 힘써야겠습니다. 세상일에 대한 근심걱정을 버리고, 오직 어떻게 사랑이신 하느님을 닮고, 어떻게 벗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으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할지 고민하는 ‘거룩한 고민’과 ‘행복한 몸짓’으로 채우는 오늘이길 희망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고백>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 고백합니다.
당신 앞에서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당신 없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는 것이
삶의 현명한 방법이 되어버린 오늘날
이러한 우리의 고백은 어리석게 보입니다.
그러나 이 어리석음 안에 오히려
믿지 않는 이들이 갖지 못한 삶의 지혜가,
세상의 어떠한 유혹이나 권력도
꺾을 수 없는 삶의 열정이
날마다 새로운 모습으로 되살아납니다.
하느님께서 처음처럼
영원히 일하시고 계시고,
우리 역시 하느님을 따라
하느님과 함께 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지만,
하느님과 함께라면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는 이들은
자신의 능력에 자만하며
헛되이 모든 것을 걸기에
자신의 부족함에 좌절하여
힘을 잃고 말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부족함 속에 오히려
충만한 하느님의 능력을 느끼며
하느님과 함께 더욱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는 이들은
미지의 것을 두려워하며
자신만의 울타리 안에 머물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새롭게 주어지는 모든 것에서
미처 깨닫지 못했던
하느님의 섭리를 체험하면서
놀라움과 기쁨으로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수동적이고 자기 부정적으로 보이는
이 땅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러기에 누구보다도
가장 적극적으로 삶을 보듬고,
언제나 넘쳐나는 기쁨과 희망으로
내일을 향한 오늘을 가꾸는
열정 가득한 아름다운 사람들입니다.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요한 5, 30)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우리가
태어난 것은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없이는
나와 너는 결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올바른 뜻은
언제나 자유롭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모두를 살립니다.
나의 뜻은
올라가는 것이지만
하느님의 뜻은
언제나 내려오는
것입니다.
사순시기는
특별히
나의 뜻을
내려놓는
시간입니다.
내려놓을수록
더욱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아무 것도
소유할 수 없는
우리의 죽음입니다.
어리석은
우리의 고집을
내려놓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무엇도
소유하지 않는
하느님의 뜻
그 자체였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또한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는 것입니다.
소유하지 않기에
건너갈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저마다의 십자가에
있습니다.
십자가로
선을 행하는
은총의 사순시기
되십시오.
"지금이 바로
그 때입니다."(요한 5,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