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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전쟁
이갑로
업(業)을 좇는 남자의 인생은 실수투성이였다.
밤 11 시 여자와 남자는 잠을 청하지 않고 앉아 있다. 여자는 침대에 누워있고 남자는 소파에 기대어 티브이를 시청하고 있다. 오늘 오전에 남자는 아들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아들은 달뜬 목소리로 소식을 전했다. 남자는 믿기지 않았지만 그저 ‘축하한다.’ 라는 말만 연신 쏟아냈었다. 남자는 아들이 성공하리라고는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들에게는 어려서부터 불치의 병이 하나 있었다. 대학신입생 까지 뚱뚱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여름방학 후에는 영문과 학우들도 모를 정도로 체중을 줄였다. 불치의 병을 이미 돌아가신 남자의 어머니는 그게 병이 아니라고 했지만 남자가 볼 때에는 가장 큰 병이었다. 철학관에 가서 무당에게 병에 대해 물으면 그냥 뱀의 사주를 가지고 태어났다고 한다. 남자는 뱀에 대해 생각해 본적이 있다. 아들의 태몽은 남자가 꾸었다. 내설악 백담사 앞 여울 같은 곳에서 남자는 정강이를 물에 담근 정자에 앉아 여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물은 한없이 투명했으며 하얀 돌들이 물고기처럼 헤엄치고 있었고 물든 낙엽은 새처럼 물 위를 날아다녔다. 물속에서 성근 뜰채를 들고 물고기를 좇으며 놀고 있는 천진한 사내아이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산에서 큰 바위 얼굴 같은 산신령이 나타나더니 잠시 산 여울까지 내려왔다가 그 길로 다시 작아지며 점처럼 하늘로 살아지는 것이었다. 일찍 천자문을 떼려고 했던 것처럼 남자는 아들에게 기대를 많이 했다. 그러나 머지않아 실망으로 다가왔었다.
부모라고 별로 해준 게 없었다. 워낙 까탈스러운 놈이라 부모의 말을 아예 들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충고라도 할라치면 ‘제가 알아서 할게요.’ 하고 앙상하게 뼈만 남은 손으로 막고 나섰다. 가끔 밥상에 앉아 반주를 할라치면 술을 따르는 손이나 받는 술잔은 심하게 떨었다. 그런가하면 두 살이나 어린 여동생 현정은 벌써 취직을 해서 국내회사와 외국인 회사를 거쳐 지금은 어엿한 경찰공무원이 되어 있었다. 남자는 뒤늦게 생각난 듯 화단에 물을 준다. 카네이션 꽃이 활짝 피어있다. 원래 카네이션이 있던 자리는 백리향이 있던 자리다. 그러나 백리향은 이렇게 아파트 17층 같은 높은 곳에는 자랄 수 없었음인지 병든 것처럼 잎이 마르다가 이내 죽어버렸다. 뽑아보면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백리향을 좋아한 나머지 또다시 심었다. 그 자리는 백리향이 있어야 어울리고 화단이 돋보일 것 같았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남자는 물을 듬뿍 준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취직을 하겠다던 약속은 2007년 삼월이 지나고 오월이 다 지나가도 면접을 보라고 연락이 오는데도 없었다. 졸업식 날 아들은 빛나는 학위증을 세 개나 받았다. 하나는 영문학 학사고 또 하나는 무역학 학사고 나머지 하나는 철학 학사였다. 자기소개서는 더 화려했다. TI 무역실무경력, 월드컵 응원전 전국 공모전 우승에다 헌혈 40회 은장까지, 남자는 결과에 실망한 나머지 여자에게도 심한 말을 했다. ‘내가 그럴 줄 알았다.’는 둥 ‘그 놈은 잘 될 리가 없다.’는 둥 아비가 자식에게 저주를 퍼붓듯이 말을 했다. 하물며 적은 용돈이지만 그 것이라도 줄여 남자의 말을 듣게 하고 싶었다. 남자와 여자는 가끔 이민을 얘기하기도 했다. ‘저 게으른 놈의 뒤치다꺼리만을 평생 하느니 차라리 해외에 나가 편한 노후를 보내자.’고 말하기도 했다.
취직보다도 남자를 더 실망시킨 것은 여자가 ‘너 그렇게 해서 장가라도 가겠니?’ 라고 물으면 장가는 가지 않겠다고 잘라 말했다. 그럴 때면 그저 농담이겠지 하던 남자도 그렇게 굳어져 가는 현실이 걱정이 되었다. 남자의 집안은 전의 이 씨는 대한민국에서 제일 오래된 족보를 가지고 있는 집안이었다. 남자는 그걸 늘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남자는 인류의 역사가 얼마인지는 잘 몰라도 아주 오래 전부터 대를 이어온 것이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자신은 대나무의 한 마디처럼 유구한 역사를 이어 온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한편으로는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을 다했으니 그만 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조상들한테는 그저 못난 놈일 뿐이다. 아들이 만약에 정 그렇다면 당장이라도 지원을 끊어버릴 자세가 되어있다. 더 나아가서 새로운 자식을 얻는 것도 불사할 것이다. 취직을 못했다면 그럴 확률이 높았다. 요즘 같은 세상에 직업도 없는 남자에게 어떤 여자가 시집을 오겠는가? 마치 속리산 깔딱 고개를 오른 것처럼 남자는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남자는 편하게 누워있는 여자한테 물었다.
“당신한테 전화가 왔을 때 종세 가 뭐라고 말 했어?”
여자는 잠시 눈을 붙이고 있다가 돌아누우며 대답했다.
“그냥 아무 말 하지 않고 돈이 다 떨어졌다고, 취직이 됐으면 나한테 말을 안 했겠어요?”
“나한테는 분명히 취직이 됐다고 말해서 ‘축하한다.’고 말해 줬는데…….”
“아직은 몰라요. 다음 월요일에 회사 사장님 면접이 있다고는 하던데, 와 보면 알겠지.”
남자는 또다시 한숨을 내쉬며 전화 받은 내용을 잠시 리플레이 해봤다. 여자는 합창연습이 있어 합창단에 갔고 혼자 사무실을 지키다 바쁜 와중에 아들이 전화를 받았다. 아들은 남자를 두려워했다. 언제 화가 폭발할지 모르는 아버지였다. 회사명은 동아공업이라고 했고 자동차부품을 생산하는 업체라고 했다. 자신은 삼성 같은 회사에나 있는 경영기획실에 근무하게 된다고 말했다. 감사업무가 겸해지고 해외에 자주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잠시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둘러댈 수도 있었다. 취직이야 했다고 했다가 취소됐다고 말할 수도 있으니까, 여자는 전혀 믿지를 않았고 남자는 반신반의 하였다.
남자는 컴퓨터 책상에 앉아 글을 쓰고 있다. 새로 시작한 일이다. 소설책을 펼쳐놓고 달력 뒷면에 옮겨 적는 일이다. 김훈의 장편소설 ‘칼의 노래’였다. 소설가가 되겠다는 새로운 도전이었다. 방법을 아는 것도 힘이라도 했다. 남자는 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성공이라는 것이 운이 좋아 되는 것이 아니라 밑바닥부터 다져나가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인기 작가 김훈을 능가하는 작가가 되려면 김훈 보다 더 피나는 노력이 필요했다. 마라톤 완주가 그랬고 시인이 되기까지가 그랬다. 집이나 사무실에 쌓여가던 이면지가 모자라 지금은 달력을 떼어다 뒷면에 밭고랑을 갈아엎듯 한자 한자 옮겨 적고 있다. 말은 안했지만 여자도 보았고 딸도 보았고 아들도 보았으리라 처음에는 무모한 도전이라고 생각했지만 여자는 남자가 해내리라고 믿는다. 신문을 키 높이만큼 쌓아두고 읽고, 읽은 것은 꼭 스크랩해서 보관한다. 필요하면 금방 찾아보기 위해서라고 한다.
아들은 서울 성동구 한양대학교 근처에 두 명의 선배와 함께 있다고 했다. 두 명의 선배는 이미 취직을 해서 직장을 다니고 있고 자신과 또 다른 친구가 곁방살이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쉬운 일이 아닐 것인데 고마운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물론 행당동에 처갓집이 있다. 힘들면 그리고 가서 도움을 청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1978년 여름 남자는 군대에 갔다 와서 시골집에 있었다. 그때도 취업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번 모(某)기업의 공채시험에 떨어지고 나니 자신감도 많이 상실되어 있을 때였다. 창피하기도 하고 어머님 얼굴 볼 낯도 없었다. 식장산 너머 서성골 시골집 골방이 남자의 방이었다. 어머니와 여동생이 안방을 쓰고 남자가 군대 있을 때 결혼한 둘째형 부부가 윗방을 쓰고 나머지 안 쓰는 살림살이나 쌀 단지가 있는 골방이 남자의 방이었다. 골방을 드나드는 좁은 길 거기다 요를 펴고 이불을 덮고 잤다. 다행히 아버지께서 새로 지은 집이라 밖으로 통하는 여닫이문이 두 개나 붙어 있었다. 격자문 사이로 달빛이 스며들었다. 책을 볼 때는 호롱불을 밝혔다. 볼 책도 없었다. 남자가 상업고등학교에 다닐 때 보던 교과서는 군대에 가있는 동안 다 버려지고 없었다. 겨우 군대에서 가지고 나온 영어회화 책이나 영어로 된 소설책이었다. 그대로 가다가는 농사를 지을 수도 있었다.
아들은 검은 양복에 캐리어를 끌고 우리 집으로 들어왔다. 깡마른 몸에 커다란 노트북 컴퓨터를 어깨와 옆구리에 가로질러 매고 들어왔다. 몸은 여전히 부실해 보인다. 그러나 하나도 지쳐 보이지 않았다.
“아들아, 수고했다. 그리고 축하한다.”
“예.”
“진짜 취직은 된 거니?”
“예, 된 거예요. 월요일 날 사장님 면접만 보면 돼요.”
“그럼, 아직은 100퍼센트 된 거는 아니네?”
“예.”
아들은 안경 쓴 눈을 흰자위가 보이도록 치켜뜨며 여자에게 짜증스럽게 대답한다.
“됐어, 그만해.”
지켜보고 있던 남자가 의자에서 일어서며 말렸다.
“저녁은 먹었니?”
“예, 먹었어요. 학교 TI 사무실에 들였다가 교수님께서 사주셨어요.”
“그래, 우선 화장실에 가서 씻고 나와라.”
남자는 속으로 생각했다. 살다보니 이런 좋은 날도 있구나. 상가 주변을 봐도 자식들 칠 할이 백수였다. 취직이 돼도 임시직이고 그러나 더러는 의사가 된 자식도 있고, 교직에 들어가는 자식도 있고, 공무원이 된 경우도 있다. 그랬다. 잘된 사람은 잘 되고 잘 못된 사람은 아버지의 가게에 나와 나름대로 경영 수업을 받고 있다. 중산층이 엷어졌다더니 아들처럼 회사에 취직한 경우는 드물었다.
“과일이나 있으면 좀 주세요.”
여자는 과일이며 군것질거리를 잔뜩 뒤 베란다에 준비해 뒀다. 아들은 평소 밥은 먹지 않고 그런 것으로 끼니를 때웠기 때문에 오늘도 시장을 미리 봐다 놨다. 여자는 한보따리 가지고 왔다.
“안경을 썼구나?”
“면접을 보는데 묻더라고요. 이력서에는 안경이 없는데 어떻게 안경을 쓰게 됐냐고, 그래서 그랬죠. 사실은 안경을 쓰지 않는데 아버지께서 ‘네, 인상이 나쁘니 안경을 쓰는 게 좋겠다.’ 고 해서 쓰고 나오게 됐습니다. 그래서 안경알이 없습니다.”
아들은 검은 뿔테 안경테 속으로 자신의 긴 손가락을 직접 넣어 보였다. 아들은 전혀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놈이었다. 그러나 너무나 영악한 세상에 저런 놈도 쓸모가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그 것만은 자신을 꼭 빼 닮았구나 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것은 타고난 천성이었다. 그 것은 아들이 해본 최초의 거짓말인지도 몰랐다. 남자는 수차례 안경을 권했었다. 그러나 번번이 탁구공처럼 거부해 왔다. 그런데 얼마 전 친할아버지 기 제삿날 ‘오뚜기식품’ 영업부장으로 있는 택로 삼촌의 충고를 받아들였다. 같은 대학 선배이기도 했다. ‘따지고 말 필요 없어. 너 정도면 안경을 써야 돼!’ 선배로서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 택로는 자신이 다니는 회사에 늘 많은 후배들을 채용했지만 남아있는 놈이 없어 회사에 창피해 죽겠다고 종종얘기 했었다. 남자는 아들에게 진즉에 그랬어야 했다고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잘했다.”
“그래, 솔직하게 말하는 게 좋은 거야, 아마 면접관들도 네가 진실해 보였을 거야.”
사실 남자도 몇 번 면접관이 돼 본적이 있었다. 주로 중소기업에서 자기의 부서에서 쓸 직원들이었다. 그럴 때면 질실해 보이는 사람이 돋보였다. 속을 썩이지 않을 사람을 우선 채용했다. 그리고 건강이었다. 그 다음이 실력이었다.
“면접 마지막으로 입사지원 각오를 말해보라고 하데요. 그래서 저는 사행시를 만들어 준비해 두었는데 잘 될 것 같지 않아 즉흥적으로 했어요. 백수(白手)가 떠올라 오른손을 들고 ‘이 손이 일을 하지 않아 지금은 하얀 손인데 입사하게 되면 검은 손이 되도록 열심히 일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좋게 보는 것 같더라구요.”
“잘 했어, 면접은 그렇게 보는 거야, 이제야 네가 면접을 볼 줄 알게 된 거야.”
“예.”
남자는 흡족했다. 지난 일 년 반이 헛되지 않았구나 생각했다. 아마 쉽게 취직을 했더라면 쉽게 그만두고 도로 백수가 되어있을 줄도 모를 일이었다.
남자는 처음 대한전선 그룹에 입사했었다. 그냥 단순히 시험보고 들어간 게 아니었다. 남자는 카투사로 있었는데 후임 병을 면회 오는 애인이 있었다. 그녀는 대한전선 그룹의 군포공장 새마을과에 다니고 있었다. 일종의 경리부였다. 남자는 문득 인연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았다. 아들이 그랬듯이 코드가 맞는다는 것처럼 자신에게도 우연처럼 느껴지지 않는 인연이 있었다.
그해 남자는 고향친구들과 강가로 천렵을 갔었다. 고향인 서성골에서 큰 냇가가 있는 군서면 은행리 서화천까지 나오려면 굽이굽이 산길을 돌아 한참이 걸리는 거리였다. 솥단지와 냄비 등, 가재도구를 챙겨왔다. 그런데 어머니께서는 밭일도 팽개치고 전보를 들고 그 먼 길을 단숨에 달려왔던 것이다. 남자는 어머니를 보며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면접을 보러오라는 전보에 취직이나 된 것처럼 기뻐하셨으니 말이다. 전보를 보낸 곳은 대한전선 그룹 군포공장 새마을과다. 남자는 감사했다. 어젯밤 꿈을 꾸었는데 집에 들어온 멧돼지를 좇아 높은 산으로 달려가는 꿈이었다. 잡지는 못했지만 처음 꾸어보는 돼지꿈이었다. 좋은 소식이 있을 것으로 믿고 있었는데 고마운 일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머니 연세가 지금 남자의 나이쯤 되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바람을 피워 대전에 딴 살림을 차린 지 오래고 큰형은 말단 지방공무원이었다. 둘째는 제대 후 임시직으로 군청에 출근하고 있었다. 막내인 남자는 어머니가 늘 걱정하는 존재였다. 어릴 때 젖이 부족하여 동량 젖으로 키웠노라고 늘 말했다. 그래서 배고픔을 참지 못한다고 말했다. 마지막 남은 남자를 취직시켜 여우살이, 라도 시키는 게 어머니의 소원이셨을 것이다. 남자는 언제나 어머니 생각만하면 눈물이 핑 돈다.
*
호스를 연결해 남자는 화단에 물을 뿌리고 있다. 실내에 있는 화단은 물을 주지 않으면 식물이나 나무들이 말라죽는다. 여자와 함께 안산시에 올라가 원룸을 하나 얻어 주었다. 아들은 아직 모른다고 했다. 1개월 이내면 그냥 잘릴 수도 있고 수습기간이 3개월 이라고 했다. 그러나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금요일 날 올라가서 이삿짐을 풀고 토요일에는 정리를 하고 일요일에는 남자의 외갓집 형의 아들 결혼식에 참가하고 내친 김에 서울 한양대학교 인근 선배 집에 있던 옷가지를 다시 안산에 있는 한양대학교 입구의 원룸에 까지 내려주고 왔다. 말하자면 역사적인 독립이었다. 아파트 화단에 있는 토끼풀(클로바)은 영역을 넓혔다. 놈들은 작은 꽃을 피웠는데 어느 날 보니 씨앗주머니를 터 뜨려 멀리 보내고 있었다. 그런 놈들이 이곳저곳에 싹을 틔우고 올라왔다. 왜란(矮蘭)의 영역까지 침투해 있었다. 생명력이 왕성한 잡초를 뽑으려다 그만 두었다. 아들은 몸이 약했다. 병이 있어서가 아니라 먹는 게 이상한 것들만 먹었다. 밥은 먹지 않고 라면만 먹었으며 초코파이 같은 것들만 주로 먹었다. 아마도 살이 붙지 않는 것은 담배를 피우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지금은 잡초 같은 근성이 필요한 때인지도 모른다.
남자는 처음 취직을 해서 안양 만안동에 있는 외갓집에 있었다. 처음 단층 슬러브 집 이었는데 곧바로 2층으로 올렸다. 지금 돌이켜 보면 설산 등정을 위한 비좁은 베이스켐프 같았다. 방 하나에 큰외삼촌과 외숙모 그리고 남자 그리고 외숙모의 조카가 함께 있었다. 마랑골 살다가 모든 것을 정리하고 안양으로 외갓집은 이사를 했었다. 산골 전답을 팔아 마련한 집이다. 골목 깊숙한 곳에 대문이 있었다. 파란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햇볕도 들지 않는 좁은 마당이 있었으며 층계 2개를 밟고 올라가면 미닫이문이 있었다. 안쪽으로 마루로 된 대청 같은 거실이 있었다. 우측으로는 근태 형이 결혼해서 살고 있었고 왼쪽 안방에는 외삼촌 내외가 쓰는 방이었다. 큰외삼촌은 술을 많이 마셨다. 시골에 계실 때 보다 건강도 많이 안 좋아 보였다. 그리고 담배를 많이 피우셨다. 외숙모는 잔소리를 하셨지만 두 분의 금슬은 좋았다. 아랫목에 외삼촌 부부가 이불을 펴고 누우면 우리는 비로소 윗목에 이불을 펴고 잠을 청했다. 가족이 많은 관계로 손님은 늘 끊이지 않았다. 그때 명자가 결혼을 앞두고 있었는데 신랑 될 장 서방은 자주 와서 밤늦게 까지 놀다갔다. 택시운전을 하는 근태형의 직장동료였다. 근태형의 첫딸인 송아가 있어 늘 웃음이 끊이질 안 했다. 형수인 송아 엄마는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 많은 사람들을 뒷바라지 하면서 한 번도 찡그린 얼굴을 하지 않았다. 남자에게도 도련님, 도련님 하면서 잘 챙겨 주었다. 외숙모님의 조카는 나보다 나이가 어렸다. 놈은 시청공무원이라고 외숙모를 속이고 매일 서울로 출근을 했다. 그도 아마 지긋지긋한 농촌을 그렇게 벗어나고 싶었으리라. 농촌에 있으면 농사일을 돕지 않을 수가 없었다. 농촌의 일은 겨울을 제외하고는 한가한 적이 없다. 아버지가 집에 없는 남자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논에서 벼를 베고 묶어서 지게에 지어 나르고 밤새워 타작을 해야 했다. 그게 생활이었다. 공부 보다는 일이 우선인 곳이 농촌이다.
아마 그도 지금쯤 정상에 서있으리라고 남자는 믿는다. 남자는 아마 그녀와 인연이 없었다면 농촌에서 젊음을 썩혔을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도 잡초 같은 인생이었다. 그러나 그는 적지만 하숙비만큼은 밀리지 않는 듯했다. 남자는 업무 차 시청에 갔을 때 확인을 해봤다. 그런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 남자에게는 말도 없이 어디로 사라졌었다.
첫 출근 날 남자는 새마을과로 갔다. 그때 남자도 계획에도 없던 사장님 면접을 봐야 했다. 취업통보서를 전보로 받고 출근 했지만 이력서의 자기소개서가 문제였었다. 새마을 과장은 의자에 앉아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남자는 양복도 빌려 입고 왔다. 넥타이도 물론 외사촌형의 것을 말도 없이 목에 매고 왔다. 어울리지 않고 어색했다. 그러나 남자의 눈빛만은 빛났다. 이번 기회를 잃어버린다면 평생 농촌에 썩어야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인디언 헤드가 어깨에 부착되고 영어 이름표가 새겨진 미제 군복을 입었을 때의 당당함은 사라지고 바쁜 새마을 과장 옆 의자에 앉아 기다려야 했다. 새마을 과장 얘기로는 자신이 신입사원 채용 결제를 올렸는데 다른 사람은 다 결제가 나서 내려왔는데 남자 것만 남겨두고 직접 면접을 보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면접시험 때 보다 남자는 더 긴장되었다. 그때 남자는 여뀌가 떠올랐다. 쇠풀을 베러 가면 부지런한 놈들이 부드러운 풀은 다 베어가고 남은 건 여뀌뿐이었다. 여뀌는 좁은 도랑을 꽉 채우며 자라있었다. 독이 있는 풀이었다. 독어초(毒魚草) 라고 불리기도 한다. 남자는 그 독초처럼 살아가리라고 늘 다짐하고 있었다. 그 독초가 살 수 있는 환경은 녹록치가 않지만 늘 마을을 이루고 있는 서성골 동네처럼 무더기를 이루며 자라고 있었다. 남자가 주목한 것은 독이었다. 돌로 찌어 물에 풀면 고기가 다 떠오른 적이 있는 독이었다. 그래서 남자는 시를 썼다. 시인은 농사를 지어도 빛날 것으로 믿었다. 독한 마음을 품어야 했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믿었다.
새마을 과장은 남자를 데리고 사장실로 향했다. 유리창 안으로 공장이 보였다. 여공들이 줄다리기 하는 사람들처럼 줄지어 앉아 있었다. 대충 잡아 1000명은 되는 듯했다. 사무실 직원도 150명이라고 했다. 사장실은 삼층에 있었다. 사장은 키가 컸다. 마른체격 각진 얼굴 마치 군 지휘관 같았다. 주눅이 저절로 들었다.
“카투사 출신이라고 했나? 자기소개서에 영어회화 가능이라고 돼있던데.”
“예, 그렇습니다.”
옆에 서있던 새마을 과장이 남자보다 먼저 대답을 했다.
“그럼, 수출과에 사람이 필요한데 서울로 올려 보내, 수출과 박 차장한테 미리 연락하고”
“예, 알겠습니다.”
그제야 새마을 과장도 긴장이 풀린 듯 했다.
“박 차장이 자네 카투사 선배일거야 열심히 일해 보게.”
“예, 알겠습니다. 열심히 일 하겠습니다.”
대답은 했지만 남자는 걱정거리가 생겼다. 공장은 출퇴근 버스가 있어 좋지만 서울은 안양에서 전철을 타야했다. 월급도 하는 일도 모른 채 입사 결정이 났다. 그리고 서울로 올라 간지 며칠 후 다시 공장으로 내려왔다. 부서를 일주일 단위로 순회하라는 것이었다. 사장님으로 보면 파격적인 대우였지만 신입사원으로는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 차라리 실무경험이 없어도 경리부서가 그리웠다. 부서를 옮길 때마다 나는 여뀌처럼 살아남을 것이라고 자기체면을 걸었다. 여뀌는 더러운 물을 먹고 독을 저장한다. 그 것이 자기방어 수단이 되기도 한다. 그러면서 폐수로 오염된 물도 정화하는 풀이었다.
이종세 신입사원은 일찍 출근했다. 맨 먼저 사무실에서 직원들을 맞았다. 큰 소리로 인사를 했다. 임직원들은 열심히 일해보라고 격려해 주었다. 자신이 일하는 부서는 전원이 자신을 포함해서 세 명 밖에 되지 않았다. 경영기획실은 대리와 과장뿐이었다. 그중 과장은 해외 출장 중이고 대리 한분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정 대리는 회의실로 불러 부서 일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다. 신입사원은 지시사항을 노트에 받아 적었다. 정 대리는 면접 볼 때도 있었다. 같은 사무실을 쓰지만 독립된 부서라고 설명해 주었다. 자동차 부품인 가스켓을 생산하는 업체로 본사 외에 10여 개의 계열사와 해외 공장이 중국과 인도에 있었다. 그리고 회계에 관한 책을 한권 줬다. 우선 공부를 하라는 것이었다. 이번에 함께 입사한 신입사원 중에는 자신의 학교 출신이 세 명이었다. 하나는 경영학과 출신으로 경리과에 그리고 또 한명은 법대출신으로 총무과에 배정되었다. 아들은 남자의 말을 떠올렸다. ‘회사가 역사가 있고 제조업이라면 네가 원하는 무역회사 보다는 고유의 아이템을 가지고 있어 훨씬 안정적이다. 너에게는 더 이상 좋은 직장은 없다. 다른 생각은 말고 최선을 다해라.’ 라는 남자의 당부가 있었다. 아들은 회사에 뼈를 묻을 작정을 했다. 회사에는 입사 십년 이십년 근속자들이 즐비했다.
남자는 신입사원 시절 안양에서 서울로 전철로 출퇴근 했다. 아마 그 당시에는 서울에도 지하철이 1. 2호선 밖에 없을 때였다. 고맙게도 형수님은 마치 누나처럼 아침밥을 챙겨 주었다. 그러면 집을 나와 안양역까지 30여분 거리를 걸었다. 낮선 거리였지만 겨울 공기는 상쾌했다. 비록 낡기는 했지만 수많은 단독 슬러브 집들, 그리고 새로 지은 이층집들과 큰길로 나오면 점포들이 즐비했다. 남자는 주로 큰길로 걸어갔다. 왠지 그리로 가면 활력이 생겼다. 지나가며 양복점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일찍 레코드 가게에서 틀어주는 음악도 들었다. 가을 양복에서 겨울양복도 준비해야 했다. 음악은 모모나 인생은 미완성 이런 곡들이 인기 있던 시절이었다. 남자는 이런 곡들을 흥얼거리며 전철역까지 갔다. 아직 촌티를 벗지 못한 촌놈처럼 유행을 따라가고 있는 중이었다. 서울로 출근 한 달쯤 되었을 때는 같이 출퇴근 하는 여자도 생겼다. 그녀는 공장 자재과에 근무하는 정희라는 사원이었다. 말을 참 세련되고 맛깔스럽게 잘하던 아가씨였다. 그녀는 ‘대한마루콘’ 이라는 회사를 그만두고 서울에 있는 모 회사로 이직을 했다고 했다. 남자가 공장에 잠시 머물 때 첫 번째 순회를 시작한 부서가 자재과였다. 그녀는 남자의 모든 것을 챙겨주었다. 공장에서 입을 옷부터 사무용품 까지 그녀는 남자의 사수처럼 보였다. 그녀는 과장이나 부장이 입는 색깔이 다른 사원 복을 남자에게 챙겨주었다. 공원이 아닌 본사 직원이 입는 옷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자재과 과장님과 자신만이 브라운 계통을 옷을 입고 나머지는 다 군청색 작업복을 입고 있었다. 남자는 사실 미안했다. 그래서 그녀와 같은 옷을 주문했으나 회사규정이라며 괜찮다고 했다. 남자는 아가씨를 미스 박이라고 불렀다. 남자는 그녀가 기다리는 것처럼 이삼일에 한번 꼴로 만났다. 남자는 처음에는 우연인줄 알았다. 남자는 주머니에 돈이 없었다. 월급으로는 때맞춰 양복을 맞춰 입기도 모자랐다.
아들은 입사 한 달쯤 후 대전에 내려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여자친구와 약속이 있다며 옷도 갈아입지 않고 나갔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따지고 화를 낸다며 구두까지 끌며 나갔다. 남자는 헛갈렸다. 아들은 늘 여자친구가 없다고 말해 왔었다. 남자는 기쁜 마음으로 보내 주었다. 그리고 여자에게 물었다.
“종세가 여자친구가 있었어?”
“있긴 뭘 있어요. 그냥 학교 친구지. 그때와 같은 줄 알아요. 그냥 학교에서 말 트고 지내는 여학생이겠지요.”
“그럼 당신은 알고 있었어?”
“몰라요. 뭘 자분자분 얘기하는 놈 이예요.”
남자와 여자는 밤이 깊도록 아들을 기다렸다. 아들은 말짱한 기운으로 예상보다 일찍 집에 들어왔다. 술이 취해야 곧잘 이야기 하던 아들이었는데, 남자는 이미 작심한 듯 예상했던 문안을 물어보기로 했다.
“회사일은 힘들지 않니?”
“하는 일 없이 놀기만 해요. 과장님은 해외출장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고, 그냥 공부만 하라고 해서 공부만 하고 있어요.”
“회사일이 그런 거지 뭐, 그렇다고 마냥 기다리지 말고 일을 찾아서 해야 될 거야. 사장이 그냥 월급 주겠어.”
“할 것도 없어요.”
남자는 아차 했다. 하마터면 이대로 대화가 끊어진 뻔 했다. 아들은 늘 단답형이었다. 오늘은 가벼운 채팅부터 시작해 보고 싶었다.
“원룸에는 불편한 것 없니? 불편한 거 있으면 말해 이제 돈도 버는데 뭐 누릴 건 누리고 살아야지, 참 텔레비전은 잘 나오니?”
아들이 제일 좋아하는 건 텔레비전이었다. 집에서도 TV는 늘 켜놓고 살았다. 이삿짐에서도 제일먼저 부탁한 것은 텔레비전은 꼭 싣고 오라고 부탁했었다. 혼자 있으면 더욱더 필요한 연인 같은 존재일 것이다.
“아니요, 연결 안했어요. 라디오를 듣다보니 그것도 들을 만해요. 책을 보면서 들을 수 있어 좋아요.”
“근데, 너 여자친구 있었니?”
여자가 싸움을 예견한 듯 중간에서 끼어들었다.
“관저동에 살 때 우리 집에 왔던 그 여자친구니? 같이 라면을 끓여 먹었다던”
“예 맞아요. 그런데 아무 사이도 아니 예요. 그냥 만나는 거예요. 노은동에 살아서”
“그래 알았다. 회사에도 여직원이 많을 것 아니야?”
“아니요, 하나도 없어요. 저 결혼 안 한다니까요.”
아들은 가지고 온 캐리어의 지퍼를 소리 나게 열고 빨래할 옷들을 꺼내고 있었다. ‘혼자 살려면 제 손으로 빨래도 해야지 왜 엄마한테 가져와’ 막 입에서 나오는 말을 겨우 입술로 막았다. 그러면서 저런 놈을 과연 도와줘야 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는 늘 말해왔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와준다.’고 늘 아들에게 말해왔었다. 그 말은 하나도 도와주지 않겠다는 말과 늘 도와줄 준비가 되어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너 좋을 대로 해라 네 인생이니까.”
“예, 제가 알아서 해요.”
남자는 꼭 일 년 육 개월 뒤에 외갓집에서 독립을 했다. 더 이상 미안해서 외갓집에서 견딜 수가 없었다. 형수님이 너무 잘해주셨다. 외숙모 외삼촌 근태 형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이다. 이사하는 날 어머니는 전세 보증금 150만원 중 100만원을 준비해오셨다. 그리고 외숙모님께서는 그동안 남자의 월급으로 적금을 들었다면서 50만 원을 내어 놓았다. 외갓집과 같은 동네였다. 외갓집에서 골목을 나와 왼쪽으로 나와 50 미터쯤 가다 좌회전해서 100미터 쯤 가서 슈퍼가 있는 골목에서 좌회전 50미터에 가서 좌회전해서 20십 미터쯤 가면 담 벽에 문이 달린 집이었다. 외갓집과는 불과 30미터쯤 떨어진 거리였다. 쪽문을 열고 들어가면 수도가 있고 우측에는 키 작은 찬장이 놓여있다. 거기에 방문이 달려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꽤 널은 방이 있었다. 말하자면 단칸방이었다. 어머니는 비닐로 지퍼를 단 비키니 옷장과 이불과 요 그리고 빗자루 쓰레기통 등 가재도구며 방 입구에 놓인 찬장, 찬장에는 밥그릇과 냄비 그 옆에는 석유곤로가 놓여 있었다. 부엌의 지붕은 투명한 플라스틱 지붕재로 덮여 있었다. 추운 겨울을 나기에는 힘들 것처럼 보였다. 방안에는 주인집 거실로 통하는 문이 하나 더 있었다. 화장실을 가려면 그리로 나가든지 밖으로 나가 대문을 들어와 대문 옆에 있는 푸세식 화장실을 사용해야 했다. 남자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부자가 된 듯 흐뭇한 마음이 들기도 했었다. 그 후로부터 남자에게 아무런 연락이 없자 어머니는 새롭게 푸시해 왔다. 서성골 고향에 내려가면 어머니는 맨 먼저 물으셨다.
“애인이 있냐?”
“예 있어요. 제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 마세요.”
어느 날 하루는 외갓집에 어머님이 올라오셨다는 전갈이 왔다. 어머니는 그냥 다니러 온 것이 아니었다. 내일 당장 여자를 데려오라는 것이었다. 남자는 황당했다. 물론 여자 친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미스 박은 결혼을 약속할 정도의 사이는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아직 정리되지 않은 한양대학교 학생인 애인이 있었다. 그리고 미스 박 집에서 세 들어 사는 인진이라는 여자 친구가 있었다. 성이 인 씨였다. 군포 공장에 출장을 왔다가 우연히 퇴근버스 옆자리에 앉은 여자였다. 같은 동네에 살고 있었다. 남자는 버스에서 내려 진과 둑방길을 걸은 적이 있었다. 그녀는 혼기가 꽉 차 보이는 여자처럼 보였다. 남자는 미스 박 보다는 진이라는 여자에게 마음이 끌렸다. 남자에게는 불리하게 두 여자는 한 대문 안에 살고 있는 여자였다. 미스 박의 아버지는 중동 건설현장에 책임자로 가있다고 했다.
“네가 여자가 있다고 해서 네 형수하고 같이 올라왔다.”
대전에 살고 있는 큰 형수님도 같이 왔다. 남자가 고등학교 다닐 때 큰형 집에서 학교를 다녔다. 말하자면 제 2의 부모님 같으신 분이기도 했다. 외삼촌 외숙모님도 함께 있었다.
“엄마, 저 아직 애인 없어요.”
실망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남자는 지금의 아내와 결국 선을 보고 결혼했다. 그렇지 않으면 아마 아들도 태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하루 종일 제 방을 무지하게 어지럽히다가 저녁때가 다 되어서 그 방에서 빠져나온 아들이 얇은 허리를 휘청거리며 말했다.
“엄마 나 삽겹살 먹고 싶어요.”
“어제 뭐 먹었니?”
“감자탕 먹었어요. 대전은 물가가 싸요. 감자탕 대(大)짜가 만 오천 원, 안산에서는 이만 오천 원인데요.”
“알았어. 금방 준비 할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여자는 주방에 가서 상추를 씻고, 남자는 밥상을 치우고 휴대용 부스타를 갖다 놓았다. 그리고 불판을 그 위에 얹었다. 남자는 미리 잔 두 개와 소주도 한 병 꺼내다 놓았다.
연일 원화 환율은 달러당 1350 원으로 급등하고 주가는 1350선으로 폭락했다. 급기야 키코(KIKO) 같은 파생상품 가입으로 흑자 도산하는 업체가 생겨나고 있다고 특집방송을 하고 있다. 달라가 부족해 투자자금을 회수하느라 외국인들은 우량주까지 대량으로 내다 팔았다. 아직 곳간에 달라가 많다고 정부당국자는 말했지만 기업의 돈줄은 동맥경화처럼 한쪽이 말라가고 있었다. 남자는 휴대용부스타에 불을 붙이고 무쇠불판이 가열되길 기다려 방금 해동된 삽겹살을 달궈진 불판에 올렸다. ‘치직, 치직’ 소리를 내며 고기가 익기 시작했다. 살 사이에 두껍게 형성된 비개 층에서 기름이 줄줄 흘러나왔다. ‘유독 세계에서 한인들이 삽겹살을 좋아한다더니….’ 남자는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끄떡였다. 그리고 멀리 떨어진 아들의 방을 향해 소리쳤다.
“종세야, 빨리 나와서 먹자.”
한참 뒤 아들은 고기가 불판에서 노릇노릇하게 익어갈 즈음 밥상에 마주앉았다.
“소주 한잔해라.”
남자는 소주 컵을 건네주고 먼저 술을 가득 따러준다. 그리고 남자도 아들로부터 소주한잔을 받았다. 손을 떨지 않았다. 남자에게만 손을 떨었나 싶게 손을 떨지 않았다. 남자는 심층면접 시 아들에게는 불리할 거라고 생각해 왔었다. 그리고 그것은 영양부족 탓이라고 생각해왔다.
“너 이제 손을 떨지 않는구나?”
“예, 괜찮아요.”
“여자 친구가 좀 지랄쟁이니?”
“왜요?”
“너 평소에 잔소리하는 거 싫어하잖아 그럼 잔소리하지 않는 여자를 골라야 네가 편하지, 안 그래?”
“결혼하기 싫어요.”
“오늘은 한번 솔직하게 말해보자. 왜 결혼하기 싫은데?”
“다 현모양처가 되겠대요. 대학까지 나온 여자들이…….”
“그 것도 괜찮은 방법이야, 요즘 아이 키우는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데 집에서 아이 키우는 것만도 얼마나 큰일인데 그러니”
상추를 한바가지 담아 가지고 온 여자가 주방에서 들었는지 대화에 끼어들었다.
“사실 내 경험으로 보면 돈은 혼자 살 때 보다는 둘이 사는 게 적게 들더라.”
“요즘 여자들이 남자들 자리에 취직하는 바람에 남자들이 힘든 거야 옛날처럼 남자는 나가서 돈 벌고 여자는 집에서 애 키우는 게 좋은데”
여자는 벌써부터 애 키우는 걱정을 했다. 만약 며느리가 맛 벌이를 한다면 자신이 애를 키워줄 도리밖에 없었다. 여자는 요즘 유행하는 ‘오는 손자 반갑지만 가는 손자 더 반갑다.’ 라는 말을 주변에서 듣고 남자에게 말한 적이 있다.
“맛 벌이를 안 해도 된다는 거야 너는”
남자는 아들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서 말한다.
“아빠, 저 결혼 안 한다니까요.”
아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제 방으로 걸어간다. 그때 단말마 같은 외마디 소리가 거실에 울려 퍼졌다.
“욱!”
남자는 가슴을 움켜쥐고 허리를 꺾었다. 가끔 가슴이 둘로 빠개지는 것처럼 통증이 왔었다. 이런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팠다. 남자는 자리에 눕고 말았다. 잠시 그러다 말았는데 오늘은 증상이 지속되었다. 남자는 바닥에서 힘없이 뒹굴었다.
“종세야! 빨리 나와 봐! 아빠 쓰러지셨어.”
술에 취한 아들은 쓰러진 아버지를 보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신의 말로 아버지가 저처럼 충격에 빠질 줄은 몰랐다.
“빨리, 119에 연락해!”
“알았어요.”
“안 되겠다. 네가 업어라 한시라도 빨리 병원에 가야 돼.”
남자는 이미 몸이 축 늘어지고 있다. 평소 몸이 약한 아들이었지만 힘껏 남자를 업고 인근에 있는 병원으로 뛰었다. 길 가던 동네사람들이 죽 늘어서 구경을 한다. 남자는 마지막 일지라도 모른다는 생각에 유언을 하려고 아들을 불렀다.
“종세야 힘들지, 내가 죽더라도 가족들을 잘 부탁한다.”
“예? 아니 예요, 꼭 사셔야 해요.”
“아니야 죽을 수도 있어. 내 목숨이 내 것이 아니잖아, 한번은 죽는 건데 뭐”
“조금만 참으세요. 병원에 다 왔어요.”
동네 병원에 퇴근시간이 있는 줄도 몰랐다. 마침 길을 건너려는데 빨간 신호등이 들어왔다. 아들은 주춤거렸다. 그때 여자가 횡단보도로 뛰어들어 차들을 막았다.
“빨리 뛰어! 이 새끼야.”
여자의 입에서 막말이 튀어나왔다. 여자는 이미 제 정신이 아니었다. 횡단보도를 건너자 여자는 남자의 엉덩이를 밀며 따라왔다.
남자의 볼에 아들의 귀가 닿는 게 느껴졌다.
“아들아! 아빠는 행복하다. 아들이 있어 이렇게 업고 뛰어주니……”
“……”
“너도 장가가서 아들을 낳아야 돼, 제일 큰 농사가 자식 농사라는 말 들어봤지.”
“예 알았어요. 조금만 참으세요.”
아들의 등이 땀으로 축축이 젖어왔다. 남자는 아들의 귀에 대고 계속 속삭였다. 아들은 여태까지 살면서 등진 아버지의 가슴이 이렇게 포근한지 몰랐다. 세상의 아버지들이 다 그렇겠지만 아버지의 가슴은 좁은 등을 감싸고도 남았다.
“마지막 부탁이 하나 더 있다.”
“말씀해 보세요.”
“네 여자친구 볼 수 없겠니?”
“……”
“많지는 않지만 유산은 전부 손자에게 가도록 서류를 만들어 놓았다.”
멀리서 119의 구급차 소리가 삐~뽀, 삐~뽀 하고 들린다. 아들은 이제 거꾸로 달린다. 종합병원인 유성 선병원이 멀지는 않았지만 한시가 급하다. 남자는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었다. 힘겹게 한마디 더 내 뱉었다.
“모든 것은 때가 있는 법이다.”
남자는 구급차에 실리자마자 실신했다. 구급대원들이 남자의 증세를 문진했지만 아들은 남자의 병세를 까마득히 몰랐다. 구급대원들이 한심하다는 듯이 아들을 쳐다본다. 여자도 같이 타고 있으나 충격으로 실신해 남자와 같이 옆에 누워있다. 여자는 겨우 눈을 뜨고 말했다. ‘가슴이 가끔 몹시 아프다고 말했어요.’ 아들은 가슴이 뜨끔했다. 자신이 죄인처럼 생각되었다. 남자는 응급실을 거쳐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협심증 이라고 했다. 내일 아침으로 수술 일정이 잡혔다. 조금만 늦었어도 돌연사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당직의사는 말했다. 아들은 문득 중환자실에서 생각해보았다. 자신이 이런 상황을 연락하면 누가 나올 수 있는 여자친구인가? 아무도 없었다. 죽어가면서도 그게 그리 중요한 일인가? 이제까지 헛살아왔다는 생각이 물밀 듯이 몰려왔다. 이렇게 갑자기 자신이 가장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는 응급실에서 용혈 제를 맞고 눈을 떴다.
“응, 아들아 고맙다. 취직해 줘서.”
“별 것 아니래요. 수술하면 곧 퇴원할 수 있데요.”
“네 덕이다. 네가 업고 뛰어서 병원에 일찍 도착할 수 있었어.”
“안심하세요.”
“요즘 취직이 얼마나 힘든데 그것도 정식사원이 됐다니 아빠는 가슴이 벅차다. 비로소 내가 할일을 다 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단다. 그런데 준령을 넘고 나니 또 하나의 산이 있는 거야 결혼 네 짝지어 주는 것 말이야. 솔직히 그건 바라지 않을 게 내 욕심이야 사실 요즘 먹고 사는 게 좀 힘들어야지.”
“저도 생각은 하고 있어요.”
“이러고 누워있으니 아빠도 할아버지 생각이 난다. 할머니를 잃고, 88올림픽을 치르던 해 꼭 49제를 치르던 날 할아버지도 할머니를 따라갔다. 네 할아버지는 귀향해 시골집 안방에 누워계셨는데 출근을 위해 서울로 가는 나를 옆에 불러 앉히더니 손을 꼭 잡아 주시더라. 그 손이 얼마나 따듯하던지 모른다. 그리고 아무 말씀도 없으셨다. 그날 밤 할아버지는 거짓말처럼 돌아가셨다. 아빠가 살면서 가장 후회되는 일이 하나 있는데 그게 뭔 줄 아니? 네 할머니 할아버지 임종을 보지 못한 거야. 낳아주고 키워줬는데 가는 마당에 못보고 떠나는 게 얼마나 섭섭했겠느냐? 그놈의 직장 탓이었지 그래서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과감히 직장을 접었어. 그게 대전으로 이사를 온 이유야 나는 네가 있어 행복하다. 사실 그런 자격이 내게 있는지 모르지만. 내가 부덕해서…”
“아빠 저 하루라도 빨리 결혼하겠어요. 귀여운 손자 안겨드릴 테니 힘내세요.”
남자의 감은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이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남자는 끝내 멀어져가는 아들을 보면서 유언을 했다. 우리 집 가훈이 ‘최선을 다하자.’ 이다. 화이부동, 동이불화라는 말이 있다. 군자는 타인을 인정하고 지배하지 않으며, 소인은 타인을 인정하지 않고 지배하려고 한다. 는 말이다. 우리 집 가훈을 ‘和而不同’으로 바꾸자. 그리고 부디 가족 간에 싸우지 말기를 바란다. 아들이 알아들을 수 없을 만큼 멀어진다.
남자는 장자의 이야기를 펌프로 자연에서 길어 올렸다. 그리고 그 물로 천천히 걸어들어 갔다.
“부모는 자식에 대해 동서남북 어디든 그 명령을 따르게 하지. 자연의 변화가 사람을 따르게 함은 부모가 자식을 대하는 정도가 아닐세. 조화가 내 죽음을 바라는데 내가 듣지 않으면 내가 순종하지 않는 것이 되네. 그 조화에 무슨 죄가 있을 것인가. 자연은 내게 모습을 주었네. 그리고 삶으로 나를 수고롭게 하였고 늙음으로 나를 편하게 하였고 죽음으로 나를 쉬게 해주네. 그러니 내 삶을 좋다고 함은 바로 내 죽음도 좋다함일세.”
남자는 수술 중 마취 중 각성이 있었다. 근육이완 제를 맞았기에 저항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의식이 있는 게 났다고 버텼다. 끝까지 버텨 냈다.
*
이종세 부장은 올해가 입사 20년이다.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아왔다. 아내와 자식들이 자신의 말을 너무 잘 듣는 게 문제였다. 아들에게는 돈을 물 쓰듯 하는 재벌가의 딸인 ‘제인’ 이라는 애인이 있다. 매일 선물을 사들고 집에 찾아왔다. 아내는 제인을 딸처럼 귀여워 해준다. 어제도 어린이날 전야라고 미리 향기 없는 카네이션을 꺾어들고 왔었다.
“아빠! 종현 씨를 낳아 주셔서 고마워요.”
제인은 겨우 중소기업 부장인 못난 시아버지 될 사람을 아빠라고 살갑게 불러주었다. 그 애를 보고 있으면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무슨 되지도 않는 소리야, 우리가 고맙지 우리 아들을 사랑해 줘서”
“결혼해서 이 집에 들어와 살아도 되죠, 시부모님 모시고 사는 게 제 꿈이었어요.”
“빈말이라도 고맙다. 그렇게 말해주니”
퇴근 후 아내와 초등학생인 늦둥이 딸을 데리고 백화점에 가서 선물을 사주고 스카이라운지에 가서 고급 한식을 먹기로 했다. 요즘 이 부장과 아내는 딸이 부리는 재롱에 파묻혀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들을 키울 때 몰랐던 행복을 누리고 있다.
벌써 2028년5월5일 어린이 날이다. 이런 날은 특히 우울해 지는 것이 어쩔 수 없다. 이 부장은 슬하에 실제 자식이 없었다. 사무실은 입사 1개월 차 신입직원과 자신뿐이다. ‘세종특별시’ 48층 스카이 빌딩에서 거리를 내려다본다. 그러고 보니 자신의 나이도 한국나이로 마흔여덟 살이었다. 대전에서 온 자기부상열차가 미끄러지듯 허공에 달린 아크릴 튜브 속을 지나간다. 소형화된 전기 자동차들이 줄지어 서있다. 전에 살던 대전광역시 유성구 노은동은 여기서 10 킬로미터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중간 중간에 가솔린 자동차가 서 있지만 이미 단종 된 차들이다. 창업주의 아들인 성 회장은 앞으로 나아갈 등대를 제시해 달라고 기획실에 강요해 왔다. 도대체 공해 없이 오늘처럼 맑은 화창한 날도 해무가 잔뜩 낀 것처럼 앞이 보이지 않았다. 화석연료는 이미 고갈되어 가고 있었다.
마음 터놓고 이야기할 가족이 없었다. 갑자기 우울해 지는 것은 또 무엇인가? 시조새 한 마리가 날아가는 길을, 따라 가는 환상이 펼쳐진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또 어디쯤 가고 있는 것일까?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다시 갈수만 있다면 부모님이 살던 저 노은동(老隱洞)으로 늙어서 살기 좋다는 노은동으로 훨훨 날아가고 싶다. 결혼하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그 잔소리는 콩 튀는 소리 같았다, 소나기가 내리고 있다. 남자는 몸에서 뱀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사주가 날씨 같은 거라면 운명은 길 같은 것이었다.’ 라고, 우울해 졌다. 그러나 남자의 손목조차 잡아줄 사람이 없다.
이종세 부장은 두 손으로 유전인 대머리를 감싸며 중얼거렸다.
“아, 게으름으로 시작한 사이버 세상은 진짜 사는 게 아니었어. 정말 아니었어!”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