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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바달다가 나의 스승이다' 나를 해치는 사람, 괴롭게 하는 사람이 나를 성숙시킨다.........2013.9.8 선교율 대법회에서
오늘은 법화경 제 12제바달다품을 공부할 차례다.
모든 품이 다 중요하지만 특히 제바달다품은 매우 중요한 품이다.
부처님을 위시해서 모든 사람들이 다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하나는 궁극적 차원으로서의 존재다. 불성인간이라고도 한다.
부처님이나 우리들이나 동일한 존재라고 하는 본래 인간 존재의 위대성을 표현하는 입장이다.
그것을 천태학 같은 데서는 본래 부처라고 해서 본불(本佛)이라는 표현으로 많이 이야기 한다.
다음으로는 역사적인 차원이다.
부처님도 몇 년 도에 누구집 아들로 태어나서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돌아가셨다, 평소에 음식은 어떻게 자셨고, 생활은 어떻게 하셨고 또 돌아가실 때는 어떤 병을 앓다가 돌아가셨고 하는 그런 역사적인 차원으로의 세존이 있다.
우리 모두 마찬가지다.
궁극적 차원에서의 불성인간에서는 누구나 동일하다.
부처와 중생이 동일하고 성인과 범부가 동일하지만 그러나 역사적인 차원에 있어서는 우리 모두가 다 차별하고 불평등하고 개별적인 입장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성이 다르고 얼굴이 다르고 태어난 가정이 다르고 생긴 모습도 다르고 쓰는 머리도 다르고 받는 복도 다르고 여러가지 현상이 다르다.
그것을 흔히 역사적 차원으로서의 우리들 자신이라고 표현한다.
역사적인 차원은 눈에 보이는 현상적인 것인데 그것을 부정할 수가 없다.
또한 궁극적 차원도 부정해서는 안된다.
이렇게 법문을 듣는다고 하는 이 사실은 어떤 조건에 의해서 법문을 듣는 것이 아니다.
여자라는 조건, 남자라는 조건, 출가인, 재가인이라는 조건, 배웠고 못배웠고 그 어떤 조건도 거기에는 다 해당되지 않는다.
그냥 듣는 것이다.문수 보현이 와서 듣든 관음 지장이 와서 듣든 누가 와서 듣든 똑같다.
모든 차별적인 현상을 다 초월한 그 궁극적 차원이 본래 인간의 위대성이다.
현상적인 차별상을 부정해서도 안되듯이 본래적인 우리들의 진실한 생명 참생명에 대해서도 또 부정해서도 안된다.
그 사실을 명확히 이해하는 것이 불교를 공부하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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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 제바달다품을 공부하면서 세존의 역사적인 차원을 보면 석가모니는 우리보다 불행한 사람이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 중에 태어난 지 칠일 만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분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조실부모했다고 꼭 불행하다는 뜻은 아니다.
세존께 있어서 참으로 불행한 일은 사촌 동생 제바달다와의 관계다.
제바달다는 이웃에 사는 사촌동생이고 같은 왕족이다.
그도 사나이로 태어나 아주 총명하고 씩씩하고 건장하였다. 학문에 있어서나 무예에 있어서나 부처님과 제바달다는 항상 라이벌로 함께 했다.
어떤 시합을 해도 최종적으로 마지막에는 늘 두 사람이 남아서 대결을 펼칠 수밖에 없는 관계였다.
세속에 있을 때부터 그런 관계였기 때문에 제바달다는 늘 부처님을 시기 질투하였다. 부처님이 출가하니 그도 출가를 했다. 부처님이 교단을 크게 번성하고 따르는 사람이 많고 제자가 많고 하니까 그 또한 질투심이 나고 시기심이 나서 참을 수 없어서 부처님의 교단을 통째 빼앗기 위해서 부처님을 살해하려고 여러 번 시도를 했다. 그런 역사적인 사실을 기본 불교를 알고 있는 분들은 다 아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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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부처 불자를 종이에 써놓으면 그 종이도 함부로 꾸기지도 못하고 휴지통에 버리지 못해서 고이 태워서 버린다. 혹 모래사장에 가서 손으로 부처 불자를 썼다 해도 발로 못지우고 손으로 곱게 지운다.
그런 정도로 불자들은 마음속에 부처님을 그리고 있다.
그런데 제바달다는 그런 분을 살해하려고 여러 번 시도 했다.
부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언덕을 지나갈 때 사람들을 동원해서 언덕 위에서 돌을 굴려서 부처님 발등을 찍어서 피를 나게 했다. 부처님의 몸에 피가 나게 하는 것은 오욕죄에 해당한다. 제바달다로부터 오욕죄가 하나씩 생기기 시작했다.
사나운 코끼리에게 술을 먹여서 부처님 앞에 풀어놓은 적도 있다.
가장 가까운 사람, 친한 사람, 친척이고 형제인 사람이 반역을 꾀하고 심지어 부처님을 살해하려고 여러 번 시도를 했다. 부처님께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이겠는가.이러한 사람을 부처님은 어떻게 소화해 냈는가.
이 문제를 여기 제바달다품에서 이야기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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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들도 살아오면서 자의든 타의든 의도적으로 저지른 일이든 자연스럽게 이해관계 때문에 저지른 일이든 가까운 사람 또는 이웃간에 원수가 된 관계들이 무수히 많을 것이다.
다 묻어두고 살아서 그렇지 그 묻어둔 사연들을 털어놓기 시작하면 친척이라든지 형제자매간에도 원수지간이 되어버린 가까운 사람들이 많다.
우리가 이런 것을 어떻게 소화해야 되는가.
가까운 사이의 원수 지간을 불교는, 부처님은,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소화해 내는가. 그런 문제를 여기 제바달다 품에서 이야기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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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가지 역사적인 사실은 금강경에 등장한다.
부처님이 많은 제자들을 두고 한창 교화를 펴는 시기에 부처님의 고국은 이웃의 큰나라인 코살라국의 침범을 받았다. 부처님은 눈을 번히 뜨고 자신의 석가족이 멸망하고 가비라성이 사라져 버리는 현실을 목도한다.
얼마나 가슴아픈 일인가. 부처님 일생에 그런 불행이 있었다고 하는 사실을 생각하면 우리는 그나마 행복한 사람이다.
부처님은 살아생전에 자기 고국을 잃어버렸고, 가장 친한 사촌 형제가 자기를 시해하려고까지 여러 번 시도 했다.
그러한 문제를 경전과 부처님과 불교는 어떻게 소화해 내는가. 이런 것 역시 해결하지 않고는 참으로 불교가 완전하다고 할 수가 없다.
이런 문제를 소화해낸 경전이 금강경의 한 대목이나 법화경의 제바달다품 같은 이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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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아파트 생활을 하는 바람에 이웃사촌이니 하는 말은 지나간 전설이 되다시피 해버렸다. 층간 소음 때문에 사람을 살해까지 하고 원수가 되고 이사를 가야 하고 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러한 시대에 처해 사는 우리들일수록 이 제바달다품이나 금강경 같은 것을 잘 이해해서 그러한 관계를 부처님이 소화해 낸 것처럼 제대로 소화해 낸다면 훌륭한 불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유교에는 ‘1억을 들여서 집을 산다면 10억을 주고 이웃을 산다’는 말이 있다.
자기 집 가치보다도 이웃 관계에 열 배를 더 들여서 서로 소통하고 우애를 나누고 관계 개선에 주력한다는 뜻이다.
처음부터 좋은 이웃은 없다. 내가 좋은 이웃을 만들어야 좋은 이웃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위층에서 어린아이들이 떠들고 시끄럽게 해서 밤잠을 설치게 한다고 하더라도 그 이튿날 만나면 ‘아이고 집의 아이들은 참 건강한가 봐요. 아주 씩씩한가봐요.’ 이렇게 말을 한다면 윗집에서도 미안해 하고 배려할 것이다.
밑에서부터 배려하면 위에서도 배려를 한다.
사람은 그렇게 되어 있다.
알고 보면 사람은 참 훌륭한 존재다.
착하게 가꾸어 가면 무한히 착한 존재가 되고 악한 방향으로 가꾸어 가면 무한히 악한 존재가 된다.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제바달다를 부처님은 어떻게 소화하는가 우리 한 번 같이 읽어 보도록 하겠다.
1. 제바달다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스승
(1) 제바달다와 석가모니불의 과거
1 이 때에 부처님께서 모든 보살과 천신과 인간 사부대중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지난 옛적 한량 없는 겁 동안에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구하기에 게으르지 아니하였으며, 여러 겁 동안에 항상 국왕(國王)이 되어 가장 높은 깨달음을 발원하고 구하는 데 마음이 물러서지 아니 하였느니라.
여섯 가지 바라밀다를 만족하기 위하여 부지런히 보시를 행하되, 코끼리, 말, 칠보, 나라, 도성, 처자, 노비, 심부름꾼, 머리, 눈, 골수, 몸, 살, 손, 발을 아끼지 아니 하였고 생명도 아끼지 아니 하였느니라.
그 때 세상 사람들의 수명이 한량이 없었지마는, 법을 위하여서 국왕의 자리를 버려 태자에게 위임하고, 북을 쳐서 명령을 내리고 사방으로 법을 구하되, ‘누구든지 나에게 대승법을 말하여 주는 이가 있으면 내가 마땅히 종신토록 받들어 드리고 시중 들리라.’고 하였느니라.
석가모니 부처님이 과거에 왕이 되어서 훌륭한 진리의 가르침,묘법연화경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 묘법연화경 진리의 가르침을 구하기 위하여 온갖 보시를 부지런히 행했다. 그리고 누구든지 이 대승법을 말해주는 이가 있으면 내가 마땅히 종신토록 받들어 드리고 시중을 들리라고 선포를 한다.
2 그 때에 한 선인이 와서 왕에게 말하기를,
‘나에게 대승법이 있으니 이름은 묘법연화경이라. 만일 내 뜻을 어기지 않으면 마땅히 말하여주리라’고 하였느니라.
왕은 선인의 말을 듣고 뛸 듯이 기뻐하며 곧 선인을 따라가서 모든 것을 시중 드는데, 과실을 따고 물을 긷고 땔나무를 하고 음식을 장만하며, 내지 몸으로 상(牀)도 되고 앉는 자리(座)가 되었지마는 몸과 마음이 게으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렇게 받들어 섬기기를 일천 년이 지나도록 하였으니, 법을 위하여 지성으로 시중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였느니라.”
그 왕은 부처님이고 선인은 제바달다 라고 하는 이야기다.
이런 대목에서 ‘가령 부처님을 머리에이고 세월을 보내고 이 몸뚱이가 평상이 되거나 앉는 의자가 되어서 삼천대천 세계만하게 한다 하더라도 만약 법을 전해서 중생을 제도하지 못하면 필경에 부처님 은혜를 갚을길이 없다 [가사정대경진겁(假使頂戴 經塵劫) 신위상좌 변삼천(身爲床座 遍三千)약불전법 도중생(若不傳法 度衆生) 필경무능 보은자(畢竟無能 報恩者)]’고 하는 게송의 근거가 나온다.
제목이 제바달다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스승이라고 하였다.
우리 주변에 ‘전생에 무슨 원수인지’ 금생에는 내가 크게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나를 그렇게 나쁘게 보고 해치려고 하고 나에게 크나큰 손해를 보이는 이가 있다면 '그를 통해서 나는 철이 들었다. 사람을 이해하는 안목이 생겼다. 사람이라는 것이 저런 것이구나 라고 이해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인간을 깨닫게 되었다' 라고 이해해야 한다.
이것을 해석하면 그런 뜻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제바달다가 나의 스승이다’라고 하였다.
여기 직접 과거에 가르쳐 줘서 스승이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속뜻은 제바달다 가 있어서 오늘날 더 훌륭한 석가모니가 되었다는 뜻이다.
과거에 선인이 있었는지 왕이 있었는지 그것은 우리가 알 바가 아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제바달다를 통해서 부처님은 훨씬 더 훌륭한 인격자가 되었을 것이다.
세속에 있을 때, 무예도 제바달다를 이기기 위해서 더 열심히 연마했을 것이고 학문도 제바달다를 이기기 위해서 더 열심히 공부했을 것이다.
또 출가해서 수행도 ‘저런 인간을 제도 안하고 내가 누구를 제도 하겠는가. 저런 못된 인간을 제도하려면 내가 더 수행을 깊이 쌓아야지. 더 높이 깨달아야지.’아마 그런 생각을 무수히 했을 것이다. 그래서 사실은 석가모니가 된 것이다.
여러분도 가끔 공부하다가 공부하기 싫을 때 나하고 경쟁자 이름 사진을 앞에 붙여놓던지 이름을 써서 붙여놓고 하면 공부가 훨씬 잘 될 것이다.
과거 왕이 있었고, 선인이 있었다고 하는 설화는 인도 역사에 있었던 것도 아니고 실재로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던져주는 교훈이나 속뜻을 알아야 된다. 그래서 경전이 어렵다는 것이다.
(3) 석가모니불의 성불(成佛)은 제바달다의 공덕
5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의 왕은 바로 내 몸이요, 그 때의 선인은 지금의 제바달다니라. 이 제바달다 선지식을 말미암은 탓에 나로 하여금 여섯 가지 바라밀다와 자비희사(慈悲喜捨)와 삼십이 거룩한 몸매와 팔십 가지 잘생긴 모양과 붉은 금빛과 열 가지 힘과, 네 가지 두려움 없음과, 네 가지 포섭하는 법과 열여덟 가지 함께 하지 않는 법과 신통과 도력을 구족하고 등정각(等正覺)을 이루어 중생들을 널리 제도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모두 제바달다 선지식(善知識)을 말미암은 연고(緣故)니라
석가모니 부처님이 성불하기 까지는 오로지 제바달다의 공덕이다 이런 뜻이다.
도오선자(道吾善者)는 시오적(是吾賊)이오 도오악자(道吾惡者) 는 시오사(是吾師)라고 하였다.
나를 선하다고 하고 착하다고 하는 사람은 나의 적이다.
그런데 나를 나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국은 나의 스승이 된다. 유교에서도 이런 소리를 하고 있다.
여기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성불은 제바달다의 공덕이다 라고 하였다.
제바달다 때문에 오늘날 부처님이 되었다.
우리 주변에 나하고 척진 사람들, 원수진 사람들, 나를 해치고 나에게 피해를 끼친 사람들 모두를 오늘부터 스승으로 생각하기로 하자.
나를 이만치 성장하게 하는 나를 사람으로 되게 하고 철들게 하는 훌륭한 선지식으로 생각하자.
경전에서는 '제바달다는 천왕여래가 된다''제바달다는 부처님이다' 라고까지 소화를 한다.
결국은 인불사상이다.
사람이 부처님이다.
그 상대가 나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든지 나를 해치는 사람이든지 모두가 부처님이다. 그렇게 이해하는 것 만이 인간관계를 좋게하는 열쇠다.
그것이 일억을 주고 집을 사서 십억을 들여서 이웃을 사는 도리다. 달리 다른 이야기가 아니다.
공을 더 들인다는 것은 물론 경제적인 공을 들이는 것도 있지만 그만치 내 마음이 이웃을 이해하고 배려하고 수용하는 것이다.
인간관계에 돈으로 안되는 문제가 얼마나 많은가.
그럴 때 ‘부처님은 이렇게 이해하셨지’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기를 죽이려고 여러 번 시도했고 교단을 송두리째 뺏으려고 했던, 어린시절부터 계속 라이벌로 나를 모함하고 나를 해치려고 했던 바로 그 인간을 나의 스승이다, 너 때문에 나는 이렇게 성장했고 너 때문에 결국 나는 성불했다.
그래서 알고 보니 너도 부처구나, 그대야말로 진정 부처님이구나 하는 차원으로 소화를 해낸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가당치 않은 무리한 주문이다.
감당하기 어려운 이런 주문을 우리가 받아들이고 소화하기 어렵다.
그러나 우리에게 꼬인 관계들도 모두 이렇게 해석하고 소화해야 한다.
나에게 손해보이고 밉보이고 나의 원수지만 결국 당신도 궁극적 차원에서는 부처님이다.
당신도 부처님이다. 이것만이 열쇠다.
달리 다른 것이 열쇠가 아니다.
인간 본래의 존귀한 입장을 우리가 진지하게 진심으로 이해하는 것만이 열쇠가 되는 것이다.
모든 평화의 열쇠는 바로 여기 인불사상에 있다.
사람이 곧 부처라고 하는 이 열쇠로써만 열릴 수 있다.
부처님은 평생 그야말로 가슴 아픈 원수를 이렇게 소화해 냈다.
얼마나 부처님 답고 얼마나 훌륭한가.
우리는 그렇게 이해하기에는 너무 벅차지만 결국은 법화경의 이 가르침만이 해결의 열쇠이지 그 외 달리 다른 열쇠는 없다.
‘내가 법화경 배웠는데, 법화경 제바달다품을 배웠는데 저 인간을 어떻게 이해해야 되나’ 그것을 갈등하고 고민해야 한다.
층간 소음이 일어나거든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야 그 집 아이는 참 씩씩한가보다. 그 집 아이는 참 건강한가보다.만나거든 부모에게 그렇게 말해주라고 했는데’
그 말이 쉽게 나올 리가 없다.
그런데 부처님은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그대야 말로 나의 스승이고 궁극적으로 당신도 부처님이다.
‘내가 그를 부처님으로 받들어 섬겨야 하는데 배우기는 그렇게 배웠건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니 이 어찌해야 좋을고’ 하고
속으로 근심하고 몸부림치고 갈등해야한다.
우리 불자들은 그런 고민이 있어야 된다.
다음으로는 제바달다가 부처님이 되는 대목이다.
그동안은 사리불이 맨 처음 수기를 받았고 가섭 수보리 가전연 목건련 이 사대성문이 수기를 받았다.
부루나 교진여가 수기를 받았고 아난존자 라후라가 수기를 받으면서 오백명 아라한이 한꺼번에 수기를 받고 이천명 아라한이 또 한꺼번에 받았다.
여기 제바달다품에 와서는 제바달다가 수기를 받는 대목이다.
액면대로만 우리가 이해하기로 하면 ‘제바달다도 부처야, 언제 부처가 될 것이야’ 라고 단순하게 수기하는 정도에 그치겠지만 사실 이 속에는 가슴 아픈 여러 사연이 숨어있다.
그 사연들을 우리가 그냥 눈감고 넘어갈 수가 없는 입장이다.
부처님과 제바달다의 관계를 뻔히 알면서 어찌 글만 읽어 넘기는가. 그 관계가 목에 걸리고 가슴에 맺히는 대목이다.
뻔히 원수인데 석가모니 부처님이 제바달다를 보고 ‘당신도 부처님이야’ 어찌 그런 소리가 나올 수 있는가.
제바달다품을 생각하면 한편 가슴도 아프지만 참 훌륭한 가르침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이런 데서 참 훌륭하다 하겠구나’ 하는 그런 감동을 받는 품이 또한 제바달다품이다.
6 여러 사부대중들에게 이르노니, 제바달다는 그 뒤에 한량없는 겁을 지내고서 부처를 이루리니, 이름이 천왕(天王) 여래, 응공, 정변지, 명행족, 선서, 세간해, 무상사, 조어장부, 천인사, 불, 세존이요, 그 세계의 이름은 천도(天道)라 하리라.
이 때 천왕불(天王佛)이 세상에 머물기는 이십 중겁(中劫)이니 널리 중생들을 위하여 묘법(妙法)을 설하리라. 항하사 같이 많은 중생들은 아라한과(果)를 얻고, 한량없는 중생들은 연각(緣覺)의 마음을 내고, 항하사 같이 많은 중생들이 최상의 도의 마음을 내어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고 물러가지 않는 자리에 이르리라.
그 때 천왕불이 열반에 드신 뒤에 정법(正法)은 이십 중겁 동안 세상에 머물러 있을 것이니라. 전신(全身) 사리로 칠보 탑을 세우리니 높이는 육십 유순이며, 가로와 세로는 사십 유순이리라. 여러 천신들과 사람들이 여러 가지 꽃과 가루향, 사루는 향, 바르는 향과 의복과 영락과 당기, 번기와 보배 일산과 풍류와 노래로 칠보탑에 예배하고 공양하리라. 한량없는 중생들이 아라한과를 얻고, 한량없는 중생들이 벽지불(壁支佛)을 깨닫고, 불가사의한 중생들이 보리심을 내어 물러가지 않는 자리에 이르리라.”
이렇게 해서 수기를 준다. 이 내용은 한마디로 제바달다도 부처님이다, 나는 부처님으로 이해하고 부처님으로 받들어 섬기겠다 라고 하는 내용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수기 주는 것보다도 수기 내용이 훨씬 풍성하다.
열반에 든 뒤에 정법이 어떻게 되고 상법이 어떻게 되고 그 다음에 탑을 세우는데 전신 사리 칠보탑을 세운다고 하였다.
대개 화장을 해서 사리가 나오면 사리로 탑을 세우거나 하는데 여기는 머리카락 하나 빠뜨리지 아니하고 전신을 그대로 칠보탑을 세운다고 하였다. 그 높이도 60유순이고 가로와 세로는 사십 유순이나 된다. 1유순이 1.14킬로미터인가 한다.
그런데 상상을 초월하는 높이다.
이와 같이 특별히 더 풍성하게 수기를 주는 내용이다.
다음은 제바달다품의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는 ‘제바달다품을 권하다’라고 하는 대목이다.
이런 이야기가 우리가 귀로 스치고 한 번 지나만 가도 우리에게는 대단한 공덕이다.
우리의 심보로 생각한다면 부처님의 이런 주문은 너무 무리다. 법화경을 공부를 하기는 하지만은 우리가 어찌 이것을 천분의 일, 만분의 일이라도 흉내 낼 수 있으랴. 이런 생각이 들지만 이러한 것을 귀에 스치고 지나가고 듣고 마음에 한 번 새기고 ‘아 법화경에는 그런 내용도 있더라. 제바달다와 부처님의 관계를 그렇게 풀었더라. 그런 원수의 관계를 그렇게 소화하고 그렇게 풀었더라’ 라고 하는 것을 기억만 하고 있어도 이것은 대단한 성숙이다.
제8아뢰야식에서 상당히 우리 인간성이 성숙될 것이다.
언젠가 이것이 씨앗이 되어 밖으로 드러날 때가 있다.
그래서 부처님이 이렇게 실천했듯이 우리 주변에 나와 같은 좋지 아니한 관계가 만약에 누가 생긴다면 한 번 쯤 제바달다품을 떠올리고 여기서 소화했듯이 또 소화할 길이 생길 것이다.
형제간에 돈 때문에 싸우거나 소송을 걸거나 심지어 자식이 아버지를 죽이고 입에 담기도 섬찟한 그런 내용들이 얼마나 지금 뉴스와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는가.
그런 문제 해결은 법화경의 이 인불사상 밖에 없다.
그래서 그런 문제도 많이 완화되리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제바달다품의 공덕이다.
3. 제바달다품을 권하다
7 부처님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는 세상에 선남자, 선여인이 이 묘법연화경의 제바달다품을 듣고 청정한 마음으로 믿고, 공경하여 의심을 내지 않는 이는 지옥이나 아귀나 축생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시방 부처님의 앞에 왕생(往生)할 것이니라. 나는 곳마다 항상 이 경전을 들을 것이며, 만일 인간에나 천상에 나면 가장 훌륭하고 묘한 낙을 받고, 부처님 앞에 나면 연꽃 위에 화생(化生)하리라.”
제바달다품을 믿고 우리가 이렇게 듣고 그것을 믿게 되면 연꽃 위에 화생하리라 했다.
우리 개개인은 전부 연꽃이다.
그런데 어디서 태어났는가. 곳곳이 전부 서로 경쟁하고 투쟁하고 빼앗고 빼앗기고 사기 협작 투성이인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 전화 한 통만 잘못받아도 사기에 걸려서 한꺼번에 몇 십만원씩 달아나는 시대다.
이것이 진흙탕물이다.
여기에 연꽃위에 화생하리라.
그런 험한 세상에 우리는 연꽃으로 이렇게 태어났다.
우리 모두 연꽃을 잘 가꿔 가야 된다.
연꽃은 진흙탕에서 피지만 그 꽃은 얼마나 아름답고 얼마나 향기로운가.
세상에 연꽃같이 아름다운 꽃이 없다.
또 세상에 사람같이 존귀한 존재가 없다.
그런데 사람이 발 디디고 사는 세상은 그렇게 험할 수가 없다.
도저히 다 기록할래야 기록할 수 없는 거짓과 협잡과 사기가 난무하는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다.
그것은 진흙탕이다.
그러나 그 진흙탕에서 아름다운 연꽃이 피듯이 우리 또한
그 험한 세상에서 이렇게 존귀한 인간으로 태어나서 부처님 앞에 이렇게 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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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에 설화같이 슬쩍 넘어가는 이야기가 있다.
거기보면 가리왕이 나오는데 그것은 코살라국의 유리왕을 말한다.
요즘도 함부로 똑같은 이름을 쓰면 법에 걸리듯이 경전에도 직접적으로 이름을 잘 언급하지 않는다.
금강경에는 가리왕이 부처님을 해쳤는데 절절지해(節節支解)라고 표현한다. 마디마디 저미고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슨 말인가.
석가모니 부처님이 많은 제자들을 가르치고 세상에서 성인 이라고 받들고 있는 시기에 바로 이웃나라 코살라국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의 고국 가비라성을 쳐들어갔다.
그래서 부처님이 그 유리왕을 제지하기 위해서 뜨거운 햇빛아래 바싹 마른 나무 밑에 가서 제자들과 서 있었다.
유리왕이 군대를 몰고 처들어 오다가 부처님 제자들이 노란 가사 입고 떡 서있으니까 말에서 내려와서 인사를 하였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종족을 멸하려고 들어가는 마당이지만 부처님이 워낙 훌륭한 분이니까 그렇게 한 것이다.
“부처님, 가지가 무성하고 잎이 무성한 나무 그늘에 있지 않으시고 왜 이렇게 바싹 마른 나무 아래 그늘도 없는 곳에 계십니까.”
“형제자매가 없고 종족이 없고 일가친척이 없는 삶이란 이 뜨거운 햇빛에 가지도 없고 잎도 없는 이 나무와 같은 처지다.”
그 한마디에 유리왕이 감동을 해서 군대를 물렸다.
두 번째도 또 그렇게 했다.
그런데 여러날 후에 세 번째로 또 쳐들어오는데 그 때는 부처님이 나가 있어도 들을 사람이 아니므로 부처님이 자리를 피해버렸다.
결국 유리왕이 가비라성을 침범해서 석가족을 전부 멸망시키고 코살라국이 가비라성을 먹어버렸다.
부처님 살아생전에 번히 눈뜨고 본 사실이다.
얼마나 가슴 아팠겠는가. 그것을 금강경에서는 절절지해다 칼로 마디마디를 오려내는 듯한 아픔이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을 금강경에서는 어떻게 소화했는가.
거기보면 무아상 무인상 무중생상 무수자상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나는 아상이 없었노라. 라고 말한다.
나라고 하는데 대한 상이 없었다.
나에 대한 생각이 없었다. 나는 이미 없는 존재다 이렇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말한다.그것은 우리가 컵을 사용하되 이미 깨진 것이라고 생각하고 사용하는 것이다.
인생은 이미 태어나자 마자 나는 없는 존재다 라고 생각하고 사는 것이다.
그러면 지금은 전부 공짜로 사는 것이다.
공짜로 살고 있으면서 이런 데 와서 법문 들으니 얼마나 횡재인가.
무아상 무인상 무중생상 무수자상이라는 것, 반야심경에서 색이 곧 공이고 공이곧 색이라는 말은 우리 인생은 이미 죽은 몸인데 이렇게 버젓이 생활하고 있으므로 이것은 공짜다 횡재다 하고 알라는 것이다.
이 또한 너무 어려운 주문이다.이 주문을 받아들일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컵이 깨어져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사용하라.
이미 깨어졌즌데 지금 사용하는 것은 공짜이고 횡재다.
우리 인생은 이미 없는 것인데 오늘 이렇게 사는 것은 횡재다. 순전히 그렇게 공짜라고 생각한다면 나에게 그 무슨 가슴 아픈 일이 있겠는가.
반야심경 260자를 나는 ‘나는없다’라고 하는 넉자로 번역을 했다. 반야심경은 한마디로 ‘나는 없다’이다.
길게 설명할 것이 없다.
‘나는 없다 나는 없다 나는 없다’ 이것을 관세음보살 외우듯이 외우고 제목을 ‘반야심경’이라고 해놓으면 될 것이다.
나는 없다는 것은 무아다.
내가 없는 입장에서 그 칼로 가슴을 오려내는 듯한 마디마디 잘라내는 듯한 아픔을 소화해 내는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 자신이 없다 라고 하는 진실로 무아라고 하는 사실을 모른다면 그 모든 역사적인 사실을 소화하지 못할 것이다.
제자들을 동원해서 곡괭이 칼, 막대기를 들고 가서 사정없이 상대해서 싸웠을 것이다. 이기고 지는 것은 둘째문제고 그까짓거 상관없이 성질대로 하는 것이다.
우리 나라를 어디서 쳐들어 와서 우리 종족과 친족을 토벌한다는데 가만히 있을 사람이 누가 있는가.
이기고 지는 것은 다음 문제이고 일단은 나가서 싸우는 것이 보통 인간의 심성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그 상황을 ‘나는 없다’‘나는 이미 죽은 존재다’라고 소화했다. 그것밖에 달리 해결 방법이 없다.
그 상황을 ‘나의 일이다’ 하고 생각해 보면 그것을 어떻게 소화했을까, 부처님 참 대단한 분이다, 진실로 부처님은 ‘나는 없다’고 했겠구나, 나는 없다는 그 경지에서 살았겠구나, 자신은 이미 없다는 사실을 알고 살았겠구나. 하고 생각될 것이다.
컵은 이미 깨져있는 것을 나는 이렇게 공짜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면 이게 아무리 몇 억짜리 고려청자라 컵이라 하더라도
당장에 깨져도 아무 감각이 없을 것이다.
이미 깨진 컵을 가지고 사용하는데 다시 깨진들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아무 상관이 없다.
불교에는 이런 도리가 있다.
우리 인생도 이미 나는 없는 존재다.
벌써 없어진 존재인데 지금 이렇게 나이가 50, 60, 70되도록 사는 것은 그냥 횡재다. 그냥 공짜다.
아파도 횡재고 감기들어도 횡재고 다리가 하나 부러져도 횡재다. 그나마 이렇게 살아있으니까 얼마나 횡재냐.
이런 가르침이 있다.
반야심경이 그런 가르침이고 금강경이 그런 가르침이다.
석가족을 멸망하는데 아주 비참한 이야기가 많다.
마하남이라고 하는 이가 왕이었는데 유리왕보고 ‘내가 이 물 속에 있다가 나올 동안까지만 전쟁을 멈추고 우리 석가족을 도망갈 수 있게 해주어라’고 하였다.
마지막 부탁인데 그거 하나 못들어 줄 것이 없었다.
물속에 들어가봤자 10분도 못있을 것은 뻔하다.
그래서 유리왕이 그 부탁을 들어갔다.
그런데 마하남이라고 하는 왕은 물속에 들어가서 바위를 안고 자신의 몸을 묶었다.
그리고는 영원히 나오지 않았다. 그동안에 석가족은 뿔뿔이 흩어져서 도망을 가서 여러 사람이 살았다.
그런 비참한 역사가 있다.
이것은 인도 역사에도 나와 있는 실화다.
제바달다품을 통해서 제바달다와의 관계, 개인적인 원한 관계를 어떻게 소화해내었는가 친족과 고국이 사라지는 정치적인 관계는 또한 어떻게 소화했는가 하는 내용을 공부했다.
지난 달에 큰스님께서 조용한 방에서 친지분을 맞이하고 계셨는데 여러 친지들 소식을 나누시다가 문득
“인생의 가을이 왔다”라고 하셨어요.
그 말씀듣고 나오는데 날씨가 너무 더워서 '아직은 여름'이라고 하고 싶었지요.
'나는 없다'라는 법문을 하실 때 많은 분들이 박수를 치셨어요.
부처님의 마음이 되어 제바달다품을 그려보라고 하셨지요.
'깨어진 컵'으로 여기면 하루하루를 횡재인듯이 기쁘게 살라고 하셨지요.
변화하고 소멸하는 계절에...
‘나는 없다’ ‘깨어진 컵’ 법문 고맙습니다.
얼른 가서 모두들 뵙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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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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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올려주시느라 늦으셨네요. 혜명화님 덕분에 법회후 다담시간 즐거웠는데 항상 헤어지기 아쉬운 시간들........
고맙습니다._()()()_
_()()()_^^ ㅜ.ㅜ 다음달 부터는 저도 일찍 갈거예요. ^^ 다담시간 정말 즐거웠지요^^~~
혜명화님 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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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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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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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명화님, 자세한 설명과 함께 법문 내용을 올려주셨네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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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없다. 제 8 아뢰아식에서 성숙되고 씨앗이 되어... 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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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맘으로 올려주신 법문 읽으며 ...짠함과 송구함과 어찌 이렇게 한발자국도 떼지 않고
날마다 ...부처님 큰스님의 방에서 유희를 하면서 삶을 같이 함에 머리숙여 감사드립니다
언젠가 큰스님 친견과 아울러 ..사경반에 공부도 할수 있는 깊은시절인연이 도래하길 맘다해 발원올립니다
염화실 많은 보살님들 이자리를 빌어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습니다 고맙습니다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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