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로 로세티(Carlo Rossetti, 1876년∼1948년)
카를로 로세티(Carlo Rossetti, 1876년 10월 18일 출생 ~ 1948년 9월 26일 사망)는 이탈리아(당시 이탈리아 왕국)의 외교관이자 해군 제독이다.
대한제국과 이탈리아와의 외교 관계는 1884년 조이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면서 성립되었으나 조약 비준서의 교환은 1886년에 정식으로 이루어졌다. 한동안 이탈리아는 외교통상업무를 대영제국 공사관에 맡기다가 1901년 12월부터 자국의 외교관을 파견하게 되었다. 초대 대한제국 주재 이탈리아 영사는 로세티의 친구인 우고 프란체세티 디 말그라(Ugo Francesetti di Malgra) 백작이었는데 그가 1902년에 장티푸스로 죽자 그가 부임한 것이다. 부임기간은 1902년 11월 6일부터 1903년 5월 15일까지였다. 그 해에 이탈리아로 귀국, 1904년부터 1905년까지 「꼬레아 에 꼬레아니(Corea e coreani)」, 「한국에서의 서한(Lettere dalla Corea)」 등 다수의 서적과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는 군인으로 활동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1889년 리보르노 해군사관학교에 입교, 5년동안 교육을 받다가 1894년 6월 16일 이학사 학위를 받고 해군 소위로 임관했다. 그가 대한제국 영사로 활동했을 당시 계급은 중위였다. 그리고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수훈을 세워 십자훈장을 받았으며, 해군 소장으로 예편되었다.
한국 역사와 문화 관련 분야에 종사하는 이들에게는 과거에 한국인들이 실제로 어떻게 살았을까 하는 문제는 언제나 특별히 흥미로운 주제가 아닐 수 없다. 드라마나 영화에 비춰지는 과거의 모습들, 이를테면 조선 시대나 고려 시대 또는 그 이전, 나아가 일제 강점기 시대 한국인들의 일상사는 예술적인 처리를 거친 만큼 신빙성을 의심케 하는 면이 없지 않다. 최근의 예를 들자면 논란이 많았던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2018)>을 들 수 있다. 그러니까 역사적인 현장들을 재현할 수 있을 법한, 대중 매체들이 등장하기 이전이나 이들이 활발하게 사용되지 않았던 시대의 모습들은 더욱 궁금하기 짝이 없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지난 2월 1일 오후 5시에서 7시까지 런던 대학교 소아스의 한국학과 주최로 진행되었던 한국학 센터 세미나 특강 시리즈 중 한편이었던 ‘20세기 초 한국에 관한 사회적 역사적 내러티브로서 카를로 로세티의 사진들(Carlo Rossetti's photographs as social and historical narratives about Korea at the beginning of the 20th century)’은 사회 역사적 고증 자료로서 사진이란 매체에 대해 숙고해 볼 수 있는 아주 흥미로운 계기였다.
이탈리아 로마의 사피엔자 대학교에 재직 중인 쥬제피나 드 니콜라교수(Giuseppina De Nicola, Sapienza University of Rome)가 소개한 이탈리아 출신 외교관 카를로 로세티 (1876-1948)의 한국 체험담은 단지 외교가로서뿐만 아니라 문화인류학자, 사회학자, 나아가 여행 문학가이자 사진예술가로서의 로세티의 삶과 면모를 조명해준 자리였다.
19세기말, 정확하게는 1884년 6월 26일 조선과 이탈리아는 수교를 하였고 같은 해에 당시의 수도였던 경성에 대사관의 문을 열었다. 1902년에 조선 주재 이탈리아 대사로 위촉되어 11월 조선에 부임해 1903년 5월까지 대략 6개월 정도를 경성에서 보낸 젊은 24세의 이탈리아인 카를로 로세티는 외교관으로서의 정무에만 전념한 것이 아니라 서구 세계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20세기 초 조선이란 나라의 사회와 역사, 조선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을 사진에 찍고 자신의 논평, 단상을 집필하여 1904년 『한국과 한국인들(COREA e COREANI)』이란 책으로 출판하기에 이른 것이다. 짧은 체류 기간에도 불구하고 개인이 소장할 수 있는 대중 매체가 보편화 되지 않았던 20세기 중반까지 상당수의 해외 주재 외교관과 관계자들이 그러했듯이 로세티는 조선의 사회 경제 지리 문화적 측면에 관한 광범위하고 귀중한 자료들을 수집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자료들 중에는 당시 조선의 영토와 사회에 관해 상세하고 설득력있는 이미지를 제공해주는 서적들뿐만 아니라 종이/한지들, 서류들이 포함되어 있다. 나아가 로세티는 카메라를 이용하여 당대 한국인의 삶을 조명해주는 단상들을 포착할 수 있었다.
주지하듯이 19세기에 서유럽의 광범위한 팽창주의와 식민주의가 팽배하면서 서유럽의 강대국들은 외교 사절들뿐만 아니라 학자들, 작가들, 상인들, 군인 등을 포함한 전문 인력을 총동원하여 해당 국가의 사회, 역사, 문화에 관한 정보들을 수집하고 이들을 이 국가들을 식민화하는 도구로 사용하였다. 이 '조력자들'의 학문적, 예술적, 문화인류학적 관점을 팔레스타인 출신의 미국인 영문학자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는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이라 칭한 것이다. 카를로 로세티의 작업 또한 문화 인류학적, 매체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서유럽의 팽창적 식민주의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1904년 로마에서 열린 한국학에 관한 학회에는 이탈리아와 통치자와 정부 관료들, 외교 관련 전문가들이 대거 참가하였고 로세티는 이 자리에서 자신이 찍은 사진들과 수집한 자료들을 공개하고 조선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할 수 있었다. 책으로 출판된 이 자료들에서는 로세티가 한국을 '지구상에서 가장 이상한 나라 중의 하나'라든가 오후에 낮잠을 자고 상점을 지키고 앉아있는 상인들을 가리키며 '한국인들은 게으르다'는 촌평 등을 찾을 수 있다.
드 니콜라교수는 로세티로 대변된 서유럽인의 관점을 오리엔탈리즘 맥락으로 간주하되 그의 작업을 문화인류학적 사회사적으로 재해석할 것을 촉구하였다. 실제로 로세티의 작업은 조선인들, 특히 여성들의 의상을 무대에 모아 예술작품으로 스테이지화하여 사진 예술을 선보임으로써 그의 조국 이탈리아 문화의 패션 감각에 주목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그가 칭한 '미개한' 조선 문화의 현대성, 아름다움, 역설적으로는 '세련된' 패션 문화의 일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는 자신을 주변에서 보좌한 한국인 비서들과 하인들, 문지기 등 스탭들의 의상과 자태, 행동 양식 등에도 비상한 관심을 보여 주의 깊게 살피고 사진에 담고 글로 묘사하는 인류학적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통신원이 볼 때 로세티의 작업과 출판물은 참으로 가치있는 자료들임에도 불구하고 그간 세중에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이 놀라울 뿐이다. 10여 년 전에 한국어로도 번역되었고 서울에서는 2014년에 전시회까지 열렸었는데 그다지 성공적인 이벤트는 아니었다고 한다.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이자마자 엄청난 공을 들여 미국과 서유럽의 문명과 문화를 일본식으로 흡수 소화하고, 나아가 일본을 방문한 서양인들의 여행기와 일본 문물 체험기를 좋든 나쁘든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소개하고 홍보하며 나아가 직접 일본 문화를 외부 세계에 알리는 노력을 이미 19세기 말부터 적극적으로 열심히 해온 일본의 문화 정책과 비교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조선 왕조의 역사', '서울의 명소', '황제와 궁', '한국 사람들의 특징', '한국의 개화', '일본의 점령', '서울의 위기', '한국의 법률과 규정', '교육 제도', '달력과 휴일', '게임과 취미', '예술' 등 제목들만 보아도 흥미로운 그의 저술과 사진들이 그동안 왜 잘 알려지지 않았는지는 그동안 한국의 문화가 외부 세계에 광범위하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연유와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한류의 원조라고 일컬을 수도 있을 이러한 작업들이 보다 비교문화적이고 보다 심층적인 차원에서깊이있게 연구되고 토론에 붙여질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한류 연구를 하려는 이들에게는 참으로 할 일이 많은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