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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 계엄군과 오늘의 검찰
[전우용의 역사에서 배우는 교훈]
국민 열망 짓밟은 12·12와 계엄군
'무도한 군부' 바통 이어받은 검찰
검찰개혁 열망 짓밟고 권력 사유화
우리의 분노는 어딜 행해야 하나
비명을 지르는 여성에게
1979년 12월, 나는 대학입시를 1년도 채 남겨두지 않은 고등학교 2학년생이었다. 비상계엄 상황이라 학교 ‘야간 자율학습’이 중단되었기 때문에, ‘야간 타율학습’이라도 하려고 서울역 부근에 있던 단과 학원에 등록했다.
12월 12일에서 며칠쯤 지난 때의 일로 기억한다. 밤 9시경, 학원 수업이 끝나 집에 가려고 서울역 앞 육교 위에 올라섰다. 육교 위에는 총 든 계엄군 2명이 서 있었다. 시국이 어수선하던 때라 육교 위의 행인은 내 앞 5~6m쯤에서 걸어가는 젊은 여성뿐이었다. 마침 그 전날 내린 눈이 굳어 있는 상태였는데, 계엄군 한 명이 젊은 여성 뒤로 달려가 미끄러지며 발을 걸었다.
짧은 치마를 입고 있던 여성은 그대로 자빠지며 비명을 질렀고, 바로 일어나지 못했다. 그 여성을 넘어뜨린 계엄군은 총을 흔들며 “우리는 계엄군이다”라고 소리쳤다. 마음속에서 분노가 솟구쳤지만, 총 든 계엄군 두 명에게 항의할 용기는 없었다. 못본 척 재빨리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그날 이후 나는 학원에 가지 않았다. 그때 불의를 보고 외면했던 나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은 평생동안 시도때도 없이 되살아나곤 했다.
이듬해 5월 광주에서 계엄군이 평범한 시민들을 학살했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을 때, 나는 그런 군인들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계엄군의 ‘장난’을 본 나도 그 기억을 평생 떨치지 못하는데, 그들의 ‘만행’을 직접 겪었거나 그들에게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오죽할까? 비상계엄이 해제된 뒤 총 든 군인들은 서울 거리에서 사라졌으나 군복을 벗은 군 장성들이 초법적 특권을 누리며 국민을 괴롭히고 수탈하여 사욕을 채우는 ‘체제’가 만들어졌다.
민주주의 요구하는 광주시민에게
전두환이 이 체제의 수괴(首魁)가 된 것은 그가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의 대표여서가 아니었다. 10.26 당시 육군 보안사령관이었던 그는 비상계엄 선포와 동시에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이 되어 수사권과 기소권을 장악했다. 수사권과 기소권을 장악하는 것은 어떤 사건이든 ‘조작’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게다가 군인들의 고문을 방지할 수 있는 어떤 장치도 없었다.
12.12 군사반란은 육군 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이던 정승화를 김재규의 일당으로 ‘조작’하는 행위였다. 전두환 일당은 이 반란으로 ‘비상군법회의’도 지배했다. 수사와 기소, 재판의 전권(全權)이 전두환과 그 일당에게 집중된 것이다. 이 시점에 전두환은 사실상 무소불위의 독재자가 되었다. 1980년 5월 17일, 전두환 일당은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김대중을 체포해 ‘내란 음모’ 혐의를 씌웠다. 그에 앞서 광주에 공수부대를 파견해 시민들의 항의를 ‘유혈진압’할 준비를 갖췄다. 계엄군의 광주시민 학살은 예비된 일이었다.
광주시민들의 항쟁을 유혈진압한 직후인 1980년 5월 31일, 군사반란 도당은 정치적·사회적 혼란을 수습한다는 명목으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하고 전두환을 상임위원장으로 ‘추대’했다. 이로써 헌법상의 대통령 최규하는 완전히 허수아비가 되었다. 정부까지 장악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는 삼청교육대를 설치하는 등 사회 전반을 공포 분위기로 몰아넣는 한편, 민정(民政)의 탈을 쓴 군사독재 체제 연장을 위한 작업을 진행했다. 8월 5일, 스스로 대장이 된 전두환은 21일 전역식을 치렀다. 이 날 열린 전군 주요 지휘관 회의는 전두환을 국가원수로 추대하기로 결의했다. 대한민국은 군부독재국이라고 내외에 천명(闡明)하는 행위였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전두환 군사독재 체제가 끝났다고는 하지만, 어떤 체제든 유제(遺制) 전부가 바로 사라지는 일은 드문 법이다. 김영삼 정권이 ‘하나회’를 척결할 때까지 군의 정치 개입은 일반적이었고, 정보기관이 정치적 목적으로 사건을 조작하여 기소하는 일도 사라지지 않았다.
검찰개혁을 요구하는 대통령에게
정치적 사건에서 검찰은 안기부나 보안사를 거쳐 내려오는 최고 권력자의 뜻을 거스르지 않았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화’ 과제는 주로 관(官)과 군(軍) 정보기관의 국내 정치 개입을 차단하는 문제와 결합해 있었다.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에 따라 정보기관의 국내 정치 개입은 확대되기도, 축소되기도 했다. 이명박 정권 때 국정원은 민간인들을 사찰했을 뿐 아니라 대통령 선거 여론조작까지 거리낌없이 자행했다. 하지만 정보기관의 국내 정치 개입은 경향적으로 줄어들었다.
국내 정치 문제에 대한 정보기관의 수사권이 축소되는 만큼, 검찰의 수사권은 확대되었다. 검찰의 표적 수사나 정실(情實) 수사의 가능성도 커졌다. 검사의 사심(私心) 때문에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바뀌었다는 원성(怨聲)은 언제나 세상에 가득했지만, 안기부와 보안사가 자행해 온 불법 수사와 살인적 고문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작은 문제’였다.
그러나 눈 앞에서 큰 산이 사라지면 작은 산이 보이는 법이다. 노무현은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검찰 경력이 없는 여성 변호사를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하고 ‘평검사와의 대화’ 자리를 만들어 검찰 개혁의 계기로 삼으려 했다. 평검사들에게는 그래도 젊은이다운 ‘정의감’이 남아 있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자리에 참석한 젊은 ‘평검사’들은 전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노골적으로 대통령을 모욕했다.
수사권과 기소권을 독점한 합동수사본부가 군사반란을 일으켰던 역사가 있었기에, 노무현 정부뿐 아니라 그 이후의 정부들도 검찰 개혁에 고심했다. 그러나 검찰은 요령껏 개혁을 회피했다. 정권 출범 직후에는 전 정권의 비리를 수사하여 검찰의 효능감을 과시하고, 정권 후반기에는 그동안 수집한 ‘현 정권 인사’들의 비리 관련 정보를 이용해 개혁을 막는 방식이었다.
국가의 모든 권력을 사유화하고
문재인 정권도 검찰 개혁을 공약했으나, 본격 착수한 것은 2019년 여름 조국 전 민정수석을 법무장관에 지명하면서부터였다. 검찰이 조국 법무부 장관을 낙마(落馬)시키기 위해 어떤 일들을 벌였는지는 모두가 익히 아는 바다. 당시 윤석열 검찰총장을 필두로 한 검사들은 언론의 전폭적인 지원을 얻어 이른바 ‘조국사태’를 둘러싼 여론전에서 승리했고, 그 기세를 몰아 윤석열을 대통령으로 만드는 데에 성공했다. 국회는 뒤늦게 검찰청법과 형사소송법을 개정하여 검찰 수사권을 축소했으나, 검찰총장 출신이 대통령이 됨으로써 검찰 개혁은 무망(無望)한 일이 되었다.
윤석열 정권 출범 이후에 벌어지는 일들은 ‘검찰 개혁 좌절’ 정도에 머물지 않는다. 정부 주요 부처는 물론 금융감독원, 방송통신위원회 등의 수장(首長) 자리를 전직 검사들이 차지했고, 심지어 국립병원 등에까지도 검찰 출신 인사들이 자리잡았다. 12.12 군사반란 이후 전두환 일당이 국가를 사유화하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게다가 검찰의 수사권과 기소권 행사는 두드러지게 편향적이다. 야당쪽 인사들에게는 과도할 정도로 엄격한 법률적 잣대를 들이대면서도 윤석열 대통령과 가까운 사람들은 구체적 혐의가 발견되거나 심지어 죄가 드러나도 수사하지 않는다. 윤 대통령과 가깝기만 하면 주가조작을 해도, 권력형 비리를 저질러도, 위장전입을 해도, 횡령과 탈세를 해도 ‘사법 리스크’가 생기지 않는다. 역시 전두환 일당이 권력을 잡은 후 벌어졌던 일들이 반복되는 듯하다.
며칠 전에는 대통령의 최측근이자 현정권의 2인자로 꼽히던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여당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전두환이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으로 ‘추대’되던 장면의 재연(再演)이었다. 여당 전국위원회는 이 추대를 ‘96.5%’ 의 찬성율로 추인했다. 전두환이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될 때 얻은 찬성 득표율은 90.2%였다. 전두환 시절보다 더 심각한 ‘맹종(盲從)’의 현상이다.
이제 분노는 어디를 향해야 할까
국회는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와 ‘시행령 정치’, ‘청문의견서 무시’로 무력해졌다. 제1야당의 대표는 10여 개의 혐의로 수사를 받는 중이고, 전(前) 대표는 구속되었다. 검사 출신 인사들의 국가 주요 기관 장악, 대통령의 여당 직접 지배, 국회 무력화, 검찰의 야당측 인사들에 대한 표적 수사 등 전두환 정권 때 일어났던 일들이 되풀이되고 있다.
영화 ‘서울의 봄’ 관객수가 1천만을 돌파했다. 영화를 보고 나온 사람들이 토로하는 감정은 대개 ‘분노’다. 하지만 주범들 다수가 영화(榮華)의 극(極)을 누리다 세상을 떠난 지금, 그들을 향해 분노를 토로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수사받던 사람을 ‘극단적 선택’의 길로 몰아 넣고서도, 무고한 사람을 간첩으로 조작하고서도, 자기 친인척의 죄를 덮어 주고서도, 사과하는 검사가 한 명도 없다.
지나가는 여성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고서도 ‘나는 계엄군이다’라고 소리치던 그때의 그들은 사라졌지만, 죄없는 사람들을 해치고도 의기양양한 ‘무도한 특권’은 아직 살아있다. 분노는 어디를 향해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