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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역사적배경
[1.삼국시대]
오늘날 우리가 순천의 연혁에 관하여 조금이나마 알고 있는 것은 '삼국시대'가 거의 끝나 갈 무렵의 일부터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지금의 순천은 삼국시대에 백제의 영토로서 하나의 군이었고, 당시의 지명은 삽평( 平)이었다.
그리고 부근에는 역시 백제의 분차군(分嵯郡:낙안, 현 보성군 벌교읍 고읍), 둔지현(부유, 주암면 창촌), 마로현(광양, 광양읍 마로산 고성), 원촌현(여수, 여천군 쌍봉면), 노산현(돌산, 여천군 화양면) 등이 있었다고 한다. 다만 순천과 그 주변지역이 언제부터 백제의 영토가 되었는지, 그리고 백제의 지방통치체제에서 순천의 위치가 어떠하였는지는 잘 알 수 없다.
그런데 백제는 660년(의자왕 20)에 신라와 당의 협공을 받아 사비성과 웅진성 등 수도지역이 침략군에게 점령되고 663년에는 항전의 중심지이던 주류성(전라북도 변산)과 임존성(충청남도 대흥)이 함락됨으로써 마침내 멸망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영토는 당과 신라에게 양분되었다. 660년 이후 4년 동안에 백제 영토의 동반부(경남의 낙동강 이서지역, 경북 서남부, 전남 북 동부, 충북 남부 동부)는 이미 신라에게 점령되었고, 그 서반부 평야지대는 당에 직속되었다.
당의 점령지, 곧 웅진도독부의 관할이 도독부와 7주 및 51현으로 개편되었으며, 동시에 그 지명들도 모조리 중국식으로 바뀌었다. 다만, 당군이 다수 주둔하여 실질적인 지배권을 쥐고 있었지만, 웅진도독에는 의자왕의 태자인 부여 륭이 임명되고 주자사와 현령에도 백제인들이 많이 기용되었다. 말하자면 백제국은 반쪽 영토에 당의 군사지배를 받으면서나마 어쨌든 형식상 부흥된 셈이었다. 이런 백제국의 부흥은 물론 백제인들을 회유하기 위한 당의 기만적 계책이며 '동이 삼국(東夷 三國)'에 대한 '이이제이책(以夷制夷策)'의 일환이기도 하였다.
즉, 신라를 이용하여 백제를 공멸한 당은 이제 백제국을 괴뢰로 내세워 신라를 견제하고
자 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당이 세운 동방정책의 다음 단계 작전이었다. 사실 당의 백제 침략은 고구려와 신라까지도 정복하려는 계획의 제1단계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한편 663년 당시에 분차(낙안)는 분명히 당령 백제의 한 주였으나, 삽평(순천)은 이미 신라령으로 편입되었던 것 같다. 당령과 신라령의 경계가 정확히 지금의 어디쯤이었는지, 또한 신라령의 편제는 어떠하였으며, 그 편제에서 삽평의 위치가 어떠하였는지는 잘 알 수 없다.
백제를 침략하여 그 영토를 분할 점령한 신라와 당은 668년에 또 동맹하여 고구려를 공멸하였다. 그러나 일단 공동의 목표가 달성되자마자 틈이 벌어져 670년부터는 서로 적이 되어 싸우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번 전쟁은 앞서와 달리 거란과 말갈을 동원한 당이 그 속령인 백제와 연합하고 신라가 일부 고구려인과 연결하여 대립한 형국이었으며, 백제가 지배했던 지역과 지금의 임진강 한강 하류 유역이 주전장이었다. 처음에는 쌍방이 일진 일퇴를 거듭하였으나, 당의 국내외 사정으로 말미암아 갈수록 신라 쪽에 유리하게 전황이 전개되었다.
그리하여 676년의 기벌포해전을 마지막으로 전쟁은 끝나고 당군은 드디어 한반도에서 철수하였다.
당군이 패퇴하자 백제는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하고 684년까지 그 전토가 신라에 병합되었다. 백제는 건국된 지 700여 년 만에 마침내 소멸되고 만 것이다.
[2. 통일신라시대]
신라는 660년 이후 20여 년 동안의 전쟁을 통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지금의 예성강∼원산만 이남의 땅을 확보하였다. 즉, 백제 영토의 전부와 고구려 영토의 일부를 탈취함으로써, 그 영역을 종전의 배 이상으로 늘리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신라는 그 전쟁에서 수백 년 이래의 숙적인 두 나라를 영구히 쳐 없애고, 넓은 새 영토까지 얻는 그야말로 획기적이고도 크나큰 성과를 거두게 된 것이었다.
물론 신라가 주도한 전쟁은 영토 확장을 위한 것이기보다는 오히려, 신라의 자구책의 하나이기도 하였다. 사실 신라는 660년 이전에 백제와 고구려, 특히 백제의 공격으로 국가 멸망의 위기에 놓여 있었다. 따라서 신라는 그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두 적국을 없애고 영토도 넓혔으며, 무엇보다도 위기를 해소하여 국가를 보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신라가 삼국의 싸움에 중국을 끌어들여 그 힘으로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사실은 그뒤의 한국사에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였고 그 영향은 너무도 절통한 것이었다.
아무튼 신라에 병합된 옛 백제 영토는 685년(신문왕 5)까지 신라식의 4주(사비 완산 발라 청)와 3소경(금관 남원 서원) 및 다수의 군 현으로 재편되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당이 중국식으로 고쳤던 지명들을 포함해 각 고을의 이름도 상당수가 점차 신라화하였다. 그때 삽평은 여전히 군으로서 변동이 없었던 것 같다.
그후 신라는 757년(경덕왕 16)에 당의 방식을 따라 주 군 현 간의 영속관계를 강화하고 동시에 전국에 걸쳐 모든 지명을 중국식 한자명으로 고쳤다. 그에 따라 무주총관부의 관내에 들게 된 삽평은 '승평'으로 개칭되었으며, 군으로서 희양현 해읍현 노산현을 관할하였다.
[3. 고려시대]
고려 초기는 비록 '통일'이 되었다고는 하나, 실상 호족시대의 후반기로서 아직 왕조의 통치권에 많은 한계가 있었다. 그러므로 고려왕조는 1018년(현종 9)에야 비로소 항구적인 지방통치제도를 마련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고려왕조는 건국한 지 100년, 영토를 통합한 지 80년이 넘어서야 겨우 지방통치의 기틀을 확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호족세력의 영향이 그만큼 컸음을 단적으로 반증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물론 1018년 이전에도 고려왕조의 통치권은 나름대로 행사되고 있었다. 우선 940년(태조 23)에는 전국의 모든 주 부 군 현의 이름을 개정했다. 그것이 제대로 준용되지 않자 성종대(981∼997)에는 이를 재확인하거나 다시 바꾸고 관 역 강 포의 이름까지도 모두 고쳤다. 그 내용은 바로 757년에 신라에서 개정했던 것을 그대로 채용하거나 새로 정한 것으로서, 좀더 중국식인 한자명으로 바꾼 것이었다. 그 목적은 지명에서 백제적인 혹은 신라적인 요소를 제거하고 분위기를 일신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때 삽평(승평)군은 '승주'로 개칭 승격되었다. 물론, 지방관이 배치된 것은 아니고 관호만의 승격이었지만, 당시 승주(순천)의 정치적 위치가 그만큼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태조부터 경종대까지(936∼981)는 지방에 상당수의 진과 서경(평양), 등주(안변) 안남(전주) 안동(경주)도호부 등이 설치되었다. 그러나 진이나 도호부는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말하자면 군사적인 거점에 불과하였고, 나머지 모든 고을들은 지방세력의 완연한 자치상태에 있었다. 따라서 상주 행정관은 배치되지 못하고 리심사(里審使), 금유(今有), 조장(稠藏), 전운사(轉運使) 등이 각 지방에 수시로 파견되어 조공을 징수하였다. 그무렵 승주 조양포(해룡면 해창리)에는 12조창의 하나인 해룡창이 있었다. 그리고 983년(성종 2)에는 처음으로 승주를 포함하여 12주에 목이 설치되었다.
995년(성종
14)에는 전국을 10도로 나누고 2경에 유수, 5도호부에 부사, 12군에 절도사 및 관찰사 자사 방어사 도단련사 단련사 등 다수의 수령을 배치하였으며, 그 고을들의 관호를 모두 '주'로 통일하였다. 그 수는 잘 알 수 없지만, 처음으로 많은 고을에 수령을 배치하여 적극적인 통치를 꾀하였던 것이다. 그 중에 2경, 5도호부, 12군은 지방통치의 중심 격으로서 후일의 계수관과 같은 것이었다. 특히 관호의 통일은 근대적인 조치라고도 할 만큼 획기적인 것이었다. 다만 10도는, 명칭까지도 대개 당의 10도를 그대로 모방한 것으로서, 조선조나 현대의 도와 달리 몇 개의 고을을 한데 묶어 나눈 단순한 구역일 뿐 도지사 같은 행정기구가 있는 상급 지방행정구획은 아니었다. 따라서 모든 주는 행정상 중앙정부와 직결되었던 것이다. 그때 승주는 12군 중 연해군에 해당하며 낙안군, 곡성군, 부유현, 광양현, 여수현, 돌산현 및 다수의 향 소 부곡을 관할하였다. 그리고 낭주(영암:안남도호부), 나주(진해군), 정주(영광:자사), 광주(자사), 패주(보성:자사), 담주(담양:도단련사) 등과 함께 해양도를 구성하였다.
그뒤 10년 만인 1005년(목종 8)에는 10도가 폐지되고 수령의 수도 대폭 감축되어, 983년(성종 2)의 상태로 후퇴하였다. 관찰사 자사 도단련사 단련사가 모조리 혁파되고, 2경과 양계의 방어진(사) 현 진(장) 외에, 군사적인 성격이 특히 강한 4도호부(안서도호부 폐지)와 12주(군 폐지)만이 남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지방세력의 반발 때문이었다. 1012년(현종 3)에는 다시 수령을 대폭 증설하여 12주를 폐지하고 그 대신 5도호부(안서도호부 복설) 외에 75도(안무사)를 설치하였다. 적어도 80여 고을에 수령을 배치하고 도호부 외 고을의 관호와 수령의 명호를 도와 안무사로 각각 단일화함으로써 다시 적극적인 통치태세를 취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왕위계승문제 및 거란의 제2차 침략(1010∼1011)으로 빚어진, 왕조와 국가의 위기를 극복함으로써
가능하였고, 또 그 때문에 필요했던 조치이기도 하였다. 75도가 어디였는지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알 수 없지만, 승주는 75도의 하나로서 여전히 수령이 없는 그 부근의 고을들을 관할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1018년(현종 9)에는 새로운 제도가 실시되어 그것이 고려 말기까지 유지되었다. 1018년에 실시된 제도는 외형상 전국을 경기(개경)와 호경(서경) 및 12계수관도로 제법 정연하게 나눈 것이었으나, 실상은 고려왕조와 지방호족세력 간의 타협의 소산으로 그 구조가 아주 복잡하였다.
첫째, 12계수관은 4도호부(경주안동대도호부 해주안서도호부 안북(안주)대도호부 안변도호부)와 8목(황주 광주 충주 청주 전주 나주 진주 상주)이었다. 그런데 그것들은 995년(성종 14)의 5도호부 12군이나 신라의 9주와 비슷한 것으로서 각 구역이 따로 있는 하나의 고을에 불과하였으며, 조선조나 현대의 도와 같은 상급 지방행정구획은 아니었다.
둘째, 한 계수관과 그에 관련되는 약간의 부(지부사), 주(방어사 지주사), 군(지군사), 현, 진 등이 하나의 계수관도를 구성하였다. 그 점에서도 계수관과 부 이하의 수령관들은 동격이었으며, 실제 주요 행정에서 상호 독립적이었고, 각각 중앙정부에 직결되고 있었다. 사실 계수관도는 온전한 행정도가 아니었으며, 그것이 군사도인 점에 더 큰 의미와 중요성이 있었던 것이다.
셋째, 계수관을 포함한 각 수령관은 그 직촌(직할지역)과 함께 수령이 배치되지 않은 고을, 즉 속부 주 군 현 향 소 부곡 처 장 등의 임내(任內)를 관할하였다. 그리고 수령관의 관할구역도 하나의 군사도였다. 즉, 한 수령관과 그에 속한 몇 개의 임내들이 모여 하나의 소군사도인 수령관도를 구성하였던 것이다.
1018년의 체제에서 승주는 나주도에 속한 나주목의 한 '영주(領州)'로서 5품 이상의 지사(知事)나 주사(州事)가 배치되는 하나의 수령관이 되었다. 983년(성종 2) 이래 12목 또는 12군의 하나로서 적어도 나주와 동격이던 승주는 한 개 지사관으로 격이 낮아졌다. 1036년(정종 2)에 승주는 또다시 5품 이상의 지군사가 배치되는 승평군으로 개칭 강격되었고, 관할구역도 줄어들었다. 즉, 부유현 광양현 여수현 돌산현과 3향 19소 14부곡은 여전히 승주(승평군)의 임내로 남게 되었지만, 곡성군과 낙안군 및 그 부근의 4소(개녕 초천 품어 가용)와 2부곡(군지 율곡)이 나주목의 임내로 이속되었다. 그처럼 승주의 지위와 관호가 격하되고 또 그 임내마저 축소된 것은 호족시대 이래 승주의 세력이 1018년을 전후하여 크게 위축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반면에 지금까지 승주의 임내이던 낙안군과 곡성군 등이 승주보다 거리가 훨씬 먼 나주목의 임내로 이속된 것은, 백제와 고려의 쟁패기부터 이미 왕건의 세력 근거지로서 고려왕실과 특수한 관계에 있던 나주세력이 그무렵에 더욱 커지게 되었음을 말해준다.
이제 승주를 중심으로 고려 전기의 지방통치
체제를 도시하면 다음 표와 같다.
그러나 '1018년의 제도'도 고려 중기 이후 많이 변모하였다. 숙종 예종대(1095∼1122)의 중흥정책과 북벌추진 및 좌절, 이자겸의 난(1126)과 묘청의 난(1135∼1136), 무인정권의 성립(1170)과 몽고의 침략(1231) 등 어지러운 정치적 격동 속에서 지방통치제도도 변화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선 3경의 설치 등으로 말미암아 계수관의 수와 그 관내(管內)의 변동이 있었다.
[4. 조선시대]
조선의 지방통치제도는 태종대(1400∼1418)에 확립되어 세조대(1455∼1468)에 일부가 수정되었는데, 그 내용은 {경국대전}(1484, 성종 15)에 수록되었다. 그러나 조선의 지방통치체제는 기본적으로 고려의 그것을 답습 보완한 것이었다. 다만 고려에 비하여 몇 가지 개선된 점이 있었다.
첫째, 한국사 초유의 상급 지방통치조직인 도제가 확립되고, 그에 따라 8도가 확정되었다. 둘째, 계수관제가 진관제로 바뀌었다. 셋째, 모든 주 군 현에 파견되는 감무관이 현감으로 통일되고, 주 군에 파견되는 지사관은 군수로 단일화되었으며, 부 대도호부 외의 모든 단부관, 즉 부의 지부사는 도호부사로 바뀌었다. 넷째, 부 대도호부 목 외에 도호부 군 현의 지명 중 '주'가 '산, 천'자로 대체되어 혼잡이 줄었다. 다섯째, 관찰사와 수령이 전임 외관으로 되었으며, 그 품질(品秩)이 승격되고 직권이 강화되었다.
그러나 조선왕조가 가장 크게 기대하고 또 주력했던 임내를 혁파하여 직촌으로 만드는 것과 월경지와 두입지의 정리, 군소 고을의 통폐합 등은 큰 성과 없이 결국 실패하였다. 즉, 그 기간에 일부 임내가 직촌화하거나 수령관이 되기도 하였지만 16세기 말까지도 아직 많은 임내가 남아 있었다. 그리고 월경지는 1906년까지도 무려 100여 곳이나 존속하였으며, 또 각 고을간에는 그 면적과 인구수의 차이가 아주 심하였다. 그것은 조선의 지방통치체제가 매우 불합리하고 불완전하였으며, 한편으로는 왕조의 통치권에 많은 한계가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겠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조선은 경도한성부와 구도개성부의 2도와 8도 예하의 4부(평양부 영흥부 전주부 경주부), 4대도호부(영변 안변 강릉 안동), 20목, 44도호부, 82군, 34현령관, 141현감관 등 총 331관으로 구획되었다. 그 체제는 큰 변동 없이 1895년(고종 32)까지 거의 그대로 유지되었다.
{경국대전} 이후의 변화로는 16∼17세기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후에 군비강화책으로 여러 곳에 독진이 증설됨에 따라, 상당수의 고을이 승격되고 약간의 고을이 강격되거나 폐합 또는 신설되었을 뿐이었다. {대전회통}(1865, 고종 2)에 따르면 당시의 편제는 5도(경도한성부 구도개성부 강도강화부 남성광주부 화성수원부)와 8도 예하의 5부(의주부 평양부 함흥부 전주부 경주부), 5대도호부(영변 영흥 강릉 안동 창원), 20목, 75도호부, 77군, 26현령관, 122현감관 등 총 335관으로, 왕조 초기의 그것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한편, 순천부는 조선 초 1413년(태종 13)의 예에 따라 순천도호부로 바뀌었고, 그보다 앞서 1396년(태조 5)에는 여수현이 다시 순천부의 임내로 편입되었다. 그리고 여수현과 함께 순천도호부 임내이던 돌산현 부유현 및 다수의 향 소 부곡 등은 대략 15세기 말경까지는 모두 직촌이 되어 잡다했던 군소 고을들이 비로소 순천도호부에 하나의 고을로 통합됐던 것이다.
1598년(선조 31)에는 광양현이 순천도호부에 임내로 병합되었다가 곧 복구되었다. 왜의 침략으로 피해가 너무 커서 현을 유지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1725년(영조 1)에는 여수도호부가 신설되어 전라도좌도수군절도사가 여수도호부사를 겸임하였다. 옛 여수현이 일약 도호부로 되어 순천도호부에서 분리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관할지역의 범위는 잘 알 수 없거니와 겨우 1년 만에 여수도호부는 폐지되고 그 땅은 다시 순천도호부에 병합되었다. 순천도호부는 두 번이나 현으로 강등되었다. 즉, 처음은 효종대(1649∼1659)에 현으로 격하되었다가 곧 복구되었고, 두번째는 1786년(정조 10)에 또 현으로 강격되었다가 이듬해에 환원되었다.
면과 리의 제도는 오랜 옛날부터 발달해왔는데 고려시대 이전에는 면이나 리를 둘 다 촌이라고 하였다. 신라시대에는 한 고을(주 군 현)이 대개 3촌(면)으로 나뉘고 그 이름이 상 중 하촌 또는 일 이 삼촌이었으며, 고려시대에는 대개 한 고을
에 4촌(면)이 있어 그 이름을 동 서 남 북촌이라고 하였다. 조선에 들어와 처음으로 면 리제가 채택되었으나 왕조 말기까지도 면급에는 촌 방 사 리 부 등이, 리급에는 촌 동 방 등의 호칭이 혼용되었다. 다만 16∼17세기에는 면과 리가 점차 널리 쓰이기 시작하고 면의 수가 늘어나면서 면이름에도 기본적인 방위명(동 서 남 북면) 외에 고유의 명칭이 더러 나타나게 되었다.면의 수가 처음으로 기록된 1670년의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에 따르면 당시에 순천도호부는 19면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리고 면이름이 처음으로 표기된 1759년의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18면(소안 장평 해촌 용두 율촌 소라포 삼일포 여수 상이사 하이사 도리 별량 송광 쌍암 주암 월등 황전 서면), 1789년의 {호구총수(戶口總數)}에는 25면, 640리로 되어 있다.
[5. 한 말]
1895년(고종 32)부터 1914년까지 한국사에서 가장 획기적이고 대폭적인 지방통치제도 개편이 단행되었다. 그 주요한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1895년에 도 부 대도호부 목 도호부 군 현 등의 고을과 지방관의 호칭이 '군(군수)'으로 단일하게 되었다. 둘째, 1895년에 8도가 폐지되고 그 대신 23부제가 실시됐다가, 이듬해에 13도로 바뀌었다. 셋째, 1906년에 모든 월경지와 대부분의 두입지가 정리되었다. 넷째, 면 촌 방 사 리 부 등의 면급 호칭이 면으로 단일화하고, 관리와 청사가 설치됨으로써 면은 정식 행정구획이 되었다. 다섯째, 1914년에 군 면 리가 대대적으로 통폐합되어 통합 전의 329군 4,336면 6만 1,473동리에서 220군 2,521면으로 줄었다. 그와 함께, 통합되는 쌍방의 이름 중 한 글자씩 합성해 새로운 지명을 만드니 생소하고 무의미하며 특히 한국인의 생활 전통과도 동떨어진 군 면 리 이름이 되었다. 여섯째, 같은 해에 인구가 밀집한 좁은 지역을 단위로 하는 근대적인 의미의 도시로서 '부 시'제가 신설되었다. 일곱째, 도 부 군의 행정기능을 제외한 재정 사법 경찰 군사 기능이 분리되었다. 이는, 지방관이 순수 전임행정관으로 되었다는 것뿐만 아니라 중앙정부의 권한을 최대한 강화하려는 조치의 하나였다고 하겠다.
그런데 개혁의 내용 중 일부는 일찍이 조선왕조가 건국 초기에 이미 시도했다가 실패한 것이었고 주로 제국주의 일본이 한국을 효율적으로 침략 지배 수탈하기 위해 조직하고 강제한 것이었다.
어쨌든 1895년(고종 32)에 순천도호부는 순천군으로 바뀌었으며, 그와 동시에 순천군은 남원부에 속하였다. 같은 해에 돌산군이 나주부 소속으로 신설되었고, 그에 따라서 남해와 순천만 광양만의 많은 섬들이 돌산군 관할지역으로서 순천군에서 분리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13도제 실시에 따라 순천군은 전라남도에 속하였다. 1897년에는 또 여수군이 신설되
어 순천군 관할지역인 율촌면 소라면 삼일면 여수면(쌍봉면)의 4면이 순천군에서 분리되었다. 그 결과, 불과 2년 만에 여수반도와 도서지역을 잃은 순천군은 면적이 반으로 줄어들고 14면만이 남게 되어 이제는 바다와 별로 관계가 없는 지역이 되고 말았다.
1908년에는 낙안군이 폐지되고 그 구역이 순천군과 보성군에 분속되었다. 즉, 옛 낙안군의 11면 중 읍내면 내서면 외서면 동상면 동하면 초상면 초하면 7면이 순천군에 병합되고 나머지 고상면 고하면 남상면 남하면의 4면이 보성군에 이속되었던 것이다. 이로써, 백제시대 이래 군의 지위를 지켜온 낙안군은 마침내 소멸되고 순천은 다소나마 그 경역이 늘어나게 되었다.
6. 일제시대
1914년에는 순천 관내의 21면이 다음과 같이 14면으로 폐합되었다. 순천면(소안면과 장평면을 통합), 해룡면(해촌면과 용두면을 통합), 서면, 황전면, 월등면, 쌍암면, 주암면, 송광면, 외서면, 낙안면(읍내면과 내서면을 통합), 동초면(동상면 동하면 초상면 초하면을 통합), 별량면, 도사면(도리면과 하사면을 통합), 상사면으로 통폐합되었다.
그뒤 1929년 4월 1일에는 동초면이 폐지되고 관할지역이 이웃 면에 분속됨으로써 군의 면적이 축소되었다. 즉, 옛 동초면의 구역 중 1914년 이전의 옛 동상면 지역이 낙안면에, 초상면과 초하면 북부가 별량면에, 그리고 동하면과 초하면 남부가 보성군 벌교면에 각각 병합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1931년에는 읍제가 처음으로 실시되어 그해 11월 1일에 순천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7. 해방후]
1949년 8월 14일, 순천읍이 부(府)로 승격되고 순천군이 승주군으로 개칭되었다. 그리고 다음날 순천부는 순천시로 승격되어 군에서 분리되었고 도사면 6리와 해룡면 북부의 3리가 순천시에 병합되었다. 그와 함께 나머지 11면만이 승주군 소속이 되었다.
1964년 순천시의 33개 법정동이 16개 행정동회로 조정되었다. 이때 와룡 삼거동을 합하여 용수동으로, 옥천 영동을 합하여 영옥동으로, 행동 금곡동을 합하여 행금동으로, 가곡 용당 석현을 합하여 삼산동으로, 덕암 생목 연향을 합하여 덕연동으로, 남정 인제를 합하여 남제동으로, 동외 중앙 남내를 합하여 중앙동으로, 교량 홍내 대룡을 합하여 대평동으로, 덕월 야홍 오천을 합하여 덕흥동으로, 대대 인월 안풍을 합하여 인안동으로, 왕지 조례를 합하여 왕조동으로, 매곡, 조곡, 풍덕, 저전, 장천의 5개 동은 그대로 두었다.
1973년 승주군 쌍암면 석흥리가 낙안면에, 보성군 문덕면 한천리가 송광면에 편입되었다. 1983년에 곡성군 석곡면 운용리가 주암면에 편입되었고, 1985년 쌍암면이 승주읍으로 개칭되면서 승주군의 치소가 되었다. 1987년 해룡면 복성리 일부가 광양군 광양읍으로 편입되었다.
1995년 1월 1일 현재 순천시(88.63㎢)와 승주군(816.52㎢)이 재통합하여 순천시(905.15㎢)라 하고 16동, 1읍, 10면을 관할하고 있다.
순천의 이미지는 전통적으로 온화하고 정이 넘치며 풍요로운 도시
교육, 문화, 교통,복지, 주거, 환경이 인간과 자연이 어우러져 전국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를 지향하고 이를 도시 브랜드로 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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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와우 잇굿 참잘했어요 ㅋㅋ ㅋㅋ
와우
우와 진짜 짱이다.!! Good job!
근데... 배꼈지?
와우!
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