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다운 자성(自性)ㆍ불성(佛性)을 참구(參究)합시다 3
- 사대오온을 떠나면 '나'는 없다
우리가 참선하기 위해서
겨울에 결제(結制)하고 여름에도 결제하고
또 그때그때 조석으로 좌선도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참선은 무엇 때문에 하는 것입니까?
흐린 물을 가만히 두면
시간이 가면서 앙금이 차차 가라앉고
나중에는 그냥 맑아져 바닥이 보이지 않습니까?
우리 마음도 이것 배우고 저것 배우고,
또 과거 전생에 업이 있고 금생에 나와서도 업을 짓다 보니
흐려질 대로 흐려졌단 말입니다.
아주 혼탁해 있습니다.
혼탁한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혼탁이 무엇인가 하면
‘나'라는 생각입니다.
공부를 좀 했다 하더라도
‘나'라는 생각을 그냥 금방 뗄 수가 있습니까?
상당한 인격자같이 보여도 어느 고비에 이르면
욕심을 부리고 자기중심적이 된단 말입니다.
‘나'라는 것이 본래 있는 것 같으면 좋습니다.
죽지 않고 영원히 있는 것 같으면
그렇게 소중히 아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허망한 것이란 말입니다.
죽을 때 이르러 없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나'는 분명히 없습니다.
사대오온(四大五蘊)이라,
지수화풍 사대의 원소로 우리 몸이 구성되고
우리 마음도 역시 수상행식(受想行識)이라,
느끼고 또는 분별하고 감상하는
부스러기가 모여서 마음이 됐습니다.
사대오온을 떠나면 그때는 ‘나'라는 존재가 없습니다.
인연 따라서 잠시간 그와 같이 된 것인데,
그것도 그대로 가만히 있으면 좋은데
그때그때 순간순간 변화해 마지않습니다.
그렇기에 제행무상(諸行無常)입니다.
모든 것은 결국 항상(恒常)이 없단 말입니다.
1초의 몇 천 분의 일 동안도 그대로 있는 것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 중생이 그런 미세한 변화를 보지 못하니까
어제의 ‘나' 오늘의 ’나'
또는 몇 십 년 뒤의 ‘나'가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서
가장 기본적인 가르침이 제행무상입니다.
시간적으로 그때그때 같은 것이 없는 무상한 것은
또 공간적으로 본다면 공(空)이란 말입니다.
모든 것이 다 그대로 이렇게 움직이고 있고 변화무상합니다.
유명한 그리스 철인 헤라클레이토스도
만법(萬法)이 유전(流轉)이라,
모든 것은 다 변화한다고 보았습니다.
1초의 몇 천 분의 일 동안도
그대로 머무름이 없이 움직이고 있으니
어떻게 존재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시간적으로 봐서 무상이기 때문에
공간적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공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이 어떻게 해서
그렇게 2천 5백 년 이상 동안에 걸쳐
우주의 실상을 정밀하게 전했겠습니까?
부처님 가르침은 사실은 존재론입니다.
존재의 실상을 말한 것입니다.
현재 실존철학이나 생철학(生哲學) 같은 것도
존재의 실상을 어떻게든 말해 보려고
어려운 논리를 다 구사하지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간단명료한 그 자리에는 이르지 못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마음을 깨달아서 성자가 못 되니까 그런 것입니다.
- 인간다운 인간, 자기 본래면목을 아는 사람이 되는 것
우리가 참선을 왜 합니까?
사변적인, 이론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우리가 실상 자체가 되는, 불성하고 자기가 하나가 되는
그런 곳에 이르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곳에 이르지 못하면 깨닫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염불삼매에 드나 화두공안 삼매에 드나 그건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허상을 떠나서 참다운 실상을 찾아가기 위해서
우리 마음을 오로지 실상경계에다 멈춰야 합니다.
우리 업장이 가벼우면
하루 이틀 앉아도 다 깨닫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지은 업이 너무 많습니다.
『능엄경』이나 대혜(大慧) 종고선사 어록에도 이런 법문이 있어요.
이즉돈오(理卽頓悟)라,
모든 존재의 원리는 다 분석해 놓고 보면 하나가 되고
일체 존재는 근원적인 실상으로 가야 되겠구나,
이런 것을 느낄 수가 있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 본래면목이 부처다,
이렇게 쉽게 비약적으로 느낄 수는 있지요.
그렇게 느끼는 것을 가리켜서
일단 돈오(頓悟)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원리는 그러하나 사비돈제(事非頓除)라,
그때그때 지어 내려온 업장은 빨리 다 녹아지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이야 모양이 없는 것이니까
마음으로는 그렇구나 해도
우리 몸에 붙어 있는 업장은 좀처럼 안 녹아집니다.
우리가 불경을 보고서
‘아, 그렇구나' 하고 마음으로 납득하고 느낀다 해도
행동으로 옮길 때는 그렇지 않지 않습니까?
그렇기에 인차제이진(因次第而盡)이라,
점차로 계행도 지키고 염불도 하고 참선도 하고
그렇게 닦음으로 해서 차근차근 없어진단 말입니다.
업장이 가벼우면 빨리 없어지겠지요.
그러나 보통 차원에서는 단박에 될 수가 없으니까
삼동(三冬) 내내 결제에 들어가는
스님이나 재가불자님들도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 업장을 단박에 떼면 좋겠지만
그냥 단박에 다 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자기 선근(善根) 따라서 차이는 있겠습니다마는,
우리가 적과 싸워서 조국을 지키는 것처럼
우리 본래면목을 찾기 위해서 비장한 각오를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한 분들은 다 성자가 됩니다.
참답고 바람직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결국은 성인 아닙니까?
성인이 참답고 바람직한 사람입니다.
자기 스스로가 다 바람직한 사람이 되어야
바람직한 사람을 만들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어떤 분야를 보나
참다운 아버지가 되고 참다운 어머니가 되고,
어떤 면으로 보나 정당한 사람이 먼저 되는 것이
가장 급선무고 최선의 일입니다.
좋은 아내가 되고 좋은 남편이 되고
음식을 잘 만들어서 맛있게 해드리고,
그런 것도 좋은 일이지만
그런 것은 새발의 피에 불과한 것이고,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은 인간다운 인간,
자기 본래면목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 출처 : 본정 김영동 법사,
첫댓글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