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오디오와 컴퓨터 원문보기 글쓴이: 管韻
01. 독소전쟁(獨蘇戰爭 Eastern Front, 1941년∼1945년)
나치 독일과 소련 사이에 벌어진 제2차 세계대전의 한 전선으로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단일전쟁이다. 1941년 6월 22일 독일이 소련과의 불가침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선전포고 없이 소련을 대규모로 침공한 바르바로사 작전이 펼쳐지면서 발발했다. 독일군은 소련의 수도인 모스크바까지 불과 30km 앞둔 힘키까지 진격했다. 베를린에서 모스크바 까지의 거리는 무려 1,500km에 육박하므로 독일군은 정말로 지척까지 갔던 셈이다. 이 전쟁은 1945년 5월 9일 소련이 베를린을 함락시킬 때까지 약 4년간 지속되었다.
하나의 '전선'으로 치기에는 그 규모가 어마어마한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단일 전쟁으로 제2차 세계대전의 대부분의 군인들이 독소전쟁에 동원되었으며, 사상자의 비중도 독소전쟁이 대부분이다. 전투 목록에 포함된 유사 이래 모든 전투들의 규모 순위를 매기면 상위 10개 중 7개, 1위부터 5위가 전부 독소전쟁에서 일어난 전투들이다. 승자인 소련이 냉전 시기에 공산권의 수장 국가였다는 점과 서구권 위주의 전쟁관, 그리고 여기에 영향을 받은 각종 매체들의 파급력으로 인해 서부전선 등이 조명받는 경우가 많지만 실질적으로 투입된 규모와 인력만큼, 2차 대전에서 동부전선의 중요성은 결코 무시되어서는 안된다.
그 직전까지는 중일전쟁이 그나마 가장 넓은 판도에서 치러진 전쟁이었지만 중국은 병력 동원력이 영 좋지 않아 거대한 인구에 비해 의외로 병력 동원이 얼마 안 되었다. 또한 일본 제국도 중국군과 싸우는 동시에 미국과 태평양 전쟁이 개전되면서 태평양 전선에도 병력을 투입하였기 때문에 생각보다 많은 병력을 동원하지 못한 관계로 중일전쟁에서 일어난 양군 간 교전의 규모는 비교적 작았다. 제2차 상하이 사변, 우한 방어전 등 가장 큰 전투들도 양군 합쳐서 100만 명 안팎이 동원되었다.
게다가 중국군은 대규모 회전을 치룰 능력이 부족했고, 일본군도 중국 본토의 거점을 점령하는 데만 집중했지 주력을 포위 섬멸하는 것에는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에 각각 전투에 큰 사상자는 발생하지 않았다. 가장 거대한 인명 피해가 나왔던 대륙타통작전이 양군 합쳐 60만 정도의 사상자가 나왔으니 상당히 큰 규모에 해당한다. 이러다 보니 중국의 희생은 대부분이 중일전쟁의 여파로 기아나 한파, 전염병으로 죽은 민간인이었고, 군 병력의 손실은 그래도 군인인지라 일본군의 3배가 조금 안되는 수준이었다.
서부전선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프랑스 침공 당시만 하더라도 양측은 총 300만 이상의 병력을 동원했으나 이 모든 병력들이 동원된 전투는 없었으며 주요 전투마다 사단-군단급 위주의 규모로 치루어졌다. 독일군의 전광석화 같은 전격전에 의해 연합군의 다른 전투병력들이 제대로 싸워보기도 전에 파리가 함락되었다. 노르웨이 침공에서도 1개 군단급 병력이 맞붙었으며 북아프리카 전역에서도 양측이 군단급에서 야전군급 병력 정도만 동원했다. 그 이상 대규모로 병력이 동원되는 전투는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후에도 아르덴 대공세 정도 외에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독소전쟁은 양 국가, 나아가 고대 이후로 동부 유럽에서 세력 다툼을 해오던 게르만족과 슬라브족, 히틀러와 스탈린이라는 두 독재자, 나치 독일을 대표로 하는 파시즘과 소련을 대표로 하는 공산주의의 흥망을 건 총력전이었으며, 양측 모두 집단군 단위의 수천만에 달하는 병력이 동원되어 치뤄진 전투가 끊임없이 벌어졌다. 극도로 치열한 전쟁이었던 만큼, 어지간한 강대국의 총 병력 숫자에 맞먹을 정도인 100만 정도의 군인이 전투 하나의 사상자인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총력전이라는 말이 결코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듯 이 전쟁의 패전으로 인해 독일 민족은 민족 중흥의 발흥지라고 볼 수 있는 동프로이센 지역을 통째로 상실했을 뿐 아니라 독일어권이나 범게르만 계열로 표현되는 언어·민족적 그룹 자체가 동유럽에서 소멸하게 되었으며, 히틀러와 파시즘, 그리고 동게르만 민족과 프로이센주의 전통들이 완전히 도태하고 스탈린과 공산주의가 지구의 절반을 정복하고 지배하게 되었다.
이 전쟁이 소련의 승리로 끝남에 따라 냉전이 시작되고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필두로 한 제2세계라는 동맹 블럭이 성립되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후의 세계 판도를 결정한 현대 세계사의 결정적 전쟁이다.
전쟁의 원인에 대해서는 논란이 분분하지만 대체로 아돌프 히틀러 총통이 게르만-아리아인 인종의 '동방생존권'인 레벤스라움(Lebensraum)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 유대-볼셰비즘(Judeo-Bolshevism)을 제거하고 '열등인종(Untermensch)'인 슬라브족을 정복 후 추방, 노예화시켜 버림으로서 최종적인 '천년제국'을 확립하기 위한 것이라는 이데올로기적 목적과, '소련을 격파하여 굴복시킴으로서 끈질기게 저항하는 영국을 굴복시킨다.'라는 히틀러 특유의 전략적 사고방식이 동시에 작용한 것으로 보이며, 히틀러의 의중에서 어느 쪽이 더 비중이 컸는지는 알 도리가 없고 자료가 밝혀질수록 논란만 가중되고 있다.
히틀러는 집권 전부터 공공연히 공산주의가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 원인 중의 하나라고 주장했으며,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에 대해서 대단히 적대적이었다.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막판에 궁지에 몰린 독일 제국은 '오히려' 공산주의자인 레닌을 러시아로 가도록 도와주는 대가로 레닌이 정권을 잡으면 전쟁에서 발을 빼기로 약속했고 진짜로 레닌은 전쟁에서 발을 뺐다. 그 덕에 독일은 그나마 남아있던 여력을 서부로 집중시킬 수 있었다. 히틀러의 주장과 다르게 1차 세계 대전 때의 소련은 도리어 다 죽어가던 독일이 조금이라도 더 버틸 수 있던 단초를 제공해준 셈이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는 독일과 소련의 밀월 관계가 있었다. 러시아 혁명 당시 소련 인사들은 독일의 도움을 받아 혁명을 성공시킨 적이 있으며 레닌도 독일 제국 측이 제공한 열차를 타고 스위스에서 러시아로 밀입국했다. 그들도 독일 공산주의자들의 봉기를 지원하려 하기도 했다. 리처드 오버리의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에서도 말하듯, 제1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전범 국가이자 베르사유 조약으로 군사력 확장을 크게 제한받고 국제 사회에서 평판이 추락한 독일과, 세계 각국의 집권층이 전혀 환영할 수 없는 이념인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은 어느 면에서는 동질성을 지녔던 것이다.
위협을 느낀 소련은 영국-프랑스-폴란드-소련 4자 안보 체제를 구상하게 되었다. 그러나 소련의 의도를 의심한 서방 측의 불신에 의해 이는 난관에 봉착했다. 소련은 겨우 체코슬로바키아와 군사 협정을 체결하였으나, 체코슬로바키아는 1938년 나치 독일에 의해 합병되었다. 소련은 체코슬로바키아라는 동맹국을 상실해 버렸고 유럽에는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소련 외무장관 막심 리트비노프는 영국-프랑스-폴란드-소련으로 이어지는 4자 안보 체제 구축을 위해 여러모로 노력했으나, 영국과 프랑스는 이에 대해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았다. 1939년 5월 3일 리트비노프는 해임되었고, 뱌체슬라프 몰로토프가 외무장관이 되었다. 리트비노프 해임의 표면적 이유는 외교적 실패였으나, 유대인이었던 리트비노프가 해임된 것은 독일에 우호적인 제스쳐를 보낸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1939년 4월 17일, 소련은 '발트해-지중해까지 모든 나라의 영토 보전을 보장하고, 그 나라 중 어느 한 나라라도 독일의 공격을 받을 경우 영국, 프랑스, 소련이 모두 전쟁에 돌입한다'는 내용의 동맹 관계를 제안하는 내용을 적은 문서를 영국, 프랑스에 전달했다. 그러나 6주가 지나서야 영국에서 답신이 왔으며, 그나마도 동맹 관계를 구축하자는 것이 아니라 예비 회담을 열자는 데 동의하는 것이었다. 몰로토프는 7월 17일, 영-프-소 외교 회담에서 군사 협약이 반드시 고려되어야 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8월 10일이 되어서야 영국, 프랑스 협상단은 비행기가 아니라 여객선 시티 오브 엑서터(City of Exeter) 호를 타고 레닌그라드에 입항하여 소련 측에 매우 나쁜 인상을 심어 주고 말았다.
8월 12일이 되어 겨우 협상이 시작되었는데, 소련 측 협상단장은 이오시프 스탈린의 최측근이자 친구,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원수였다. 스탈린의 최측근을 협상단장으로 임명한 데서 소련이 이 협상에 얼마나 진지하게 임했는지를 알 수 있다. 또한 협상 자리에는 당시 육군참모총장 보리스 샤포슈니코프 원수 등 소련군 고위 사령관들이 다수 참석하였다. 보로실로프는 스탈린에게 보고할 필요 없이 바로 군사 협정에 서명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를 증명하는 문서를 영-프 협상단에게 보여주었다.
반면 영-프 협상단장의 자격은 소련에 비해 상당히 떨어졌다. 프랑스 협상단장은 프랑스 제1군관구 사령관 조제프 두망(Joseph Doumenc) 장군이었는데 보로실로프와 마찬가지로 협상 서명권을 지니고 있었기는 하나 당시 프랑스군 내 서열 40위 정도밖에 차지하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영국 협상단장은 조지 6세 직속 해군 장교인 레지널드 드락스 경(Reginald Drax)이었는데, 그는 일개 함장 출신인 데다 영국 정부에 보고만 할 수 있을 뿐 협상 권한이 없었다. 자국의 쟁쟁한 거물급들을 협상단으로 내세운 소련으로서는 매우 불쾌할 것이 당연했다.
소련 협상단은 매우 당황했으나 계속 협상을 이어나갔는데, 소련군이 독일로 진군할 수 있도록 동유럽 국가, 특히 당시 영-프와 동맹국이었던 폴란드가 길을 내 줄 수 있는지에 대한 협약을 양국 정부와 맺었는가를 질문했다. 그러나 폴란드는 절대로 소련군을 영토에 들일 수 없다고 강경한 자세를 굽히지 않음에 따라 그런 협약은 존재할 수가 없었고, 그게 밝혀진 시점에서 이미 다자 안보 체제는 결렬된 상태였다.
참고로 냉전 당시 같은 동구권 국가였으며 민족 구성도 슬라브족으로 비슷한 면 때문에 가끔 오해하지만 폴란드와 러시아는 이란-이라크 관계급으로 사이가 좋지 않으며 그 역사도 유구하다. 1772년, 1793년, 1795년 프로이센-러시아-오스트리아 3국에 의해 영토가 3번이나 강제 분할된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러시아 또한 폴란드 기병대 윙드 후사르 때문에 심한 골치를 앓던 적도 많다. 여기에 1919년-1921년, 러시아가 러시아 혁명을 겪어 국내적으로 아주 혼란하던 시기를 틈타 영토 수복을 위해 폴란드가 선제 공격을 날려 소련-폴란드 전쟁까지 겪어 두 나라는 사이가 극도로 좋지 않다. 이러니 당시 폴란드가 독일과 홀로 싸울지언정 러시아와는 손 안 잡는다는 반응이 나올 만했다.
전쟁이 발발할 시 각국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 수치를 밝힐 때 소련 협상단은 120개 사단, 야포 5천여 문, 전차 9천여 대, 항공기 5천여 대를 투입할 것이라고 밝혔다. 실제로 소련은 독소전쟁 때 수백 개의 사단을 동원했으니 120개 사단을 동원할 수 있다고 한 소련의 호언장담은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참고로 독일 국방군은 독소전쟁을 개시할 당시 소련군이 유럽 전선에 동원 가능한 병력을 180개 사단 정도로 추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180개 사단을 모조리 전멸시킨 독일군 앞에는 새로운 소련군 360개 사단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에 프랑스는 110개 사단, 전차 4천여 대를 파병한다고 답했다. 그런데 영국 협상단은 16개 사단이라고 밝혀 보로실로프가 "통역을 잘못한 것 아닌가?"라는 반응을 보였다. 황당한 소련이 세부 사항을 캐묻자 영국은 사실은 단 4개 사단만이 전투 가능하다고 실토했다. 회담 종료 후 스탈린이 영국 대사에게 구체적으로 더 묻자, 사실 4개 사단 중에서도 2개 사단만이 제대로 된 사단이었고 나머지 2개 사단은 좀 더 시간이 지난 뒤에야 완편된다는 것이었다.
물론 섬나라인 영국이 몇십 개 육군 사단을 유럽 본토에 투입할 수 있다고 보는 것도 웃기기는 하다. 섬나라면 당연히 해군의 비중이 클 것이다. 독소 불가침조약 항목에서도 확인할 수 있지만,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는 독일과의 전쟁에서 엄청난 피해를 입었으며 영국은 1907년 맺은 삼국협상이 영국의 참전을 강제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동맹국인 프랑스가 두들겨 맞고 있으므로 어쩔 수 없이 참전하게 된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은 유럽 본토전에 대규모 파병을 굉장히 꺼릴 수 밖에 없으며, 1939년은 세계 대공황의 여파가 아직 가시지 않은 때여서 영국이나 프랑스 둘 다 경제적으로 넉넉한 처지도 아니었다.
뮌헨 협정을 맺은 것에도 알 수 있듯 영-프는 독일을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아픔을 기억하고 있는 두 나라로서는 소련의 다자 안보 체제를 소련만큼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물론 소련으로서는 '독일이랑 싸움 붙이고 니들은 손 떼려고?'라고 강하게 의심하기에 충분했다.
어쨌거나 영국-프랑스가 이런 식으로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자 소련은 자신들이 계획한 대 독일 4자동맹 안보체제가 성립할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것을 실감하며, 독일의 침략에 홀로 맞설 수도 있다는 위기감에 몰리게 되었다.
독소 불가침조약
이때 스탈린의 마음을 흔든 것은 다름 아닌 독일이었다. 독일 또한 침략 전쟁에 소련이 개입할 것을 우려하고 있었으며, 계획의 스타트를 끊게 될 폴란드 침공에 소련이 개입하면 초장부터 만사를 그르칠 수 있으므로 소련에게 추파를 보내기 시작했다. 8월 2일, 독일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가 소련에게 발트해에서 흑해까지의 지역의 결산을 제안했다.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에서는 이를 유럽에서 옛 차르 제국을 재건할 가능성이라고 표현했으며, 스탈린은 리벤트로프를 만날 때 어린애같이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고 기록했다.
1939년 8월 17일 몰로토프는 리벤트로프와의 회담에 동의했고, 같은 해 8월 19일 양국은 독소 신용 협정(German-Soviet Credit Agreement)를 체결하였다. 히틀러와 스탈린이 전보를 교환한 후, 8월 23일 리벤트로프를 위시한 독일 외교단이 소련으로 비행기를 타고 갔다. 당시 모스크바 공항에는 하켄크로이츠 깃발들이 장식되어 있었고 크레믈린에서는 스탈린이 직접 외교단을 맞이했다.
이로써 1939년 8월 23일, 독일과 소련은 독소 불가침조약을 체결했다. 독소 불가침조약과 독소 신용 협정에 의해 소련은 폴란드를 독일과 나눠먹고, 독일과 소련은 상대방이 약소국(발트 3국, 루마니아 등)을 침략하는 것을 묵인했으며, 독일은 소련에 기계류를, 소련은 독일에 자원을 공급해 주기로 약속했다.
1939년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인해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고 9월 17일부터는 소련이 참전해 폴란드 동쪽을 침략함으로써 폴란드 제2공화국은 멸망하고, 독일과 소련이 폴란드를 분할 통치하게 되었다. 1940년 6월에는 소련이 발트 3국을 강제 합병하였다. 소련은 1939~41년 사이에 독일의 전쟁에 대체로 협조적인 태도를 보였고 같은 슬라브족 국가인 유고슬라비아가 공중분해되거나 자국의 영향권이라고 인식한 핀란드나 불가리아에 독일이 손을 뻗어도 침묵하는 등 우호적인 자세를 유지했다.
그리고 1941년부터 독일의 소련 침략 징후가 서방 세계와 추축국에서 곳곳에서 전해지기 시작했다. 영국에서는 독일측 암호를 해독해 내서 윈스턴 처칠 당시 영국 총리가 스탈린에게 직접 경고하기도 했고, 1941년 봄에만 180건이 넘는 독일 항공기의 소련 영공 침범 사례도 있었으며, 일본 제국에 상주하던 전설적인 간첩 리하르트 조르게가 구체적인 수치까지 들어가며 소련에 독일의 침공이 곧 개시될 것을 알렸지만, 스탈린과 소련 방첩국, 정보국은 그것들을 모두 무시했다. 그리고 공산주의자였던 독일의 인쇄업자가 독일군에 납품한 숙어집을 소련 영사관에 보냈는데 여기에는 "항복하라", "손들어", "집단농장 의장이 어디 있나", "공산주의자냐?", "발포한다" 따위의 러시아어 표현이 실려있었다고 한다.
6월 16일 베를린에 파견된 소련 측 간첩들도 독일의 공격이 임박했음을 지속해서 알리고, 심지어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 하루 전인 6월 21일 독일군 탈영 병사였던 알프레트 리스코프(Alfred Liskov)는 독일군 내 숨어 있던 공산주의자였는데, 그가 "독일이 내일 공격할 것이다"라고 털어놓기도 할 정도로 징후는 있었다. 리스코프는 소련측의 프로파간다에 사용되다 감옥에 수감되었다 풀려나지만, 그의 최후는 알려지지 않았다. 스탈린이 독일군 탈영병을 역정보 제공 혐의로 사형시키라는 명령을 내린 기록은 있는데 그것이 리스코프인지 아니면 다른 탈영병인지는 확인 불가.
영공을 침범하는 독일 항공기에 대해서도 공격하지 말고 특별한 지시가 있기 전까지는 어떠한 행동도 하지 말라고 강력히 명령했으며, 이는 전쟁 초기 소련 공군이 루프트바페의 공습이 임박했음에도 손 놓고 있다가 이륙조차 해 보지 못한 채 대거 궤멸되는 참극을 초래하고 말았다.
물론 스탈린도 히틀러가 쳐들어 올 것에 대비를 하긴 했는지, 폴란드 점령 후 스탈린 선을 뜯어다 앞에 짓기도 했다. 하지만 1937년쯤 스탈린의 대숙청으로 많은 장군들이 숙청되었고 미하일 투하쳅스키 등 유능한 장군들도 숙청의 칼날은 피하지 못했다. 이는 안그래도 부족한 장교진의 인력난을 부추겼고 살아남은 이들도 스탈린이 무서워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등 유무형의 피해는 독소전 초기 소련의 발목을 잡는 요소였다.
참고로 소련은 독일이 서부에서 영국과 전쟁을 치르는 내내 독일에게 물자를 제공했는데, 전쟁이 시작되기 불과 하루 전에도 물자를 가득 실은 열차가 독일 국경을 넘었다.
여담으로 물자를 실은 기차말고 또 하나의 기차가 베를린-모스크바 선로를 왕복했는데 그 기차에는 독일, 소련 민간인이 타고있었다. 이걸 보고 안토니 비버는 '평화와 전쟁은 정말 한끝 차이다'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히틀러의 판단과 의도
1940년 12월 18일 소련에 쳐들어가기로 결정을 내리고 전쟁령을 승인하면서 히틀러는 돌이킬 수 없는 전략적 선택을 했다. 전쟁의 주도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조바심에서 히틀러는 몇 달 안에 소련을 무력으로 완전히 궤멸하고 소련이라는 정치 체제를 없애버리는 쪽에 목표를 두고 독일의 전쟁력을 온통 거기에 쏟아부었다. 군 지휘관들도 사석에서는 딴소리를 했을지 모르지만 히틀러의 제안에 정색을 하고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군부의 지지도 얻은 셈이었다.
돌이켜보면 참으로 어리석어 보인다. 당시 독일의 장성들이 반론을 제기하지 않은 것은 히틀러처럼 소련의 군사력과 역량을 턱없이 얕잡아보았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생각해보면 도대체 왜 그랬을까 싶지만, 그들이 정말로 염려한 것은 소련이 아니라 영국이었다. 세계의 패권국 영국을 미국이 무한한 자원으로 지원할 가능성이 점점 높아져서였다. 이런 도박을 대부분의 군사 전문가들이 군소리 없이 따랐다.
레더는 예외였지만 괴링도 처음에는 의구심을 보이다가 금세 돌아섰다. 도박이 성공하려면 넉 달에서 다섯 달 안에 소련을 때려눕혀 유럽의 패권을 잡아야 했다. 영국은 동남아시아에서 영국 영토를 노리는 일본에게 발이 묶여 있으므로 소련만 무너뜨리면 독일에게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는 계산이었다. 미국도 태평양에서 일본을 상대해야 할 테니 유럽까지 넘볼 여력이 없을 것이라고 히틀러는 내다보았다. 독일은 전쟁에서 이겨서 유럽을 장악할 것이다. 미국과는 어차피 나중에 한번 붙겠지만, 그렇게 되면 한결 유리한 입장에서 미국을 상대할 수 있다.
히틀러가 영국이라는 강적을 앞에 두고 소련 침공을 개시해 독일의 전쟁 수행 양상을 양면전쟁 구도로 만든 것은 전략적으로 치명적인 실수였다. 그러나 히틀러도 바보가 아닌 이상 나름대로 이유는 가지고 있었고 경제적, 이념적 이유 외에도 군사적인 이유도 나름대로 있었다.
육군 강국인 프랑스가 버티고 있어 서부전선을 형성해 줄 수 있었던 제1차 세계대전 때와는 달리 프랑스가 무너진 상황인 데다가, 영국은 섬나라라는 특성상 육군이 약했으며 그나마 보유하고 있던 장비의 상당수를 영국 원정군으로 파병했다가 프랑스 침공 때 날려먹고 그 이후 영국 본토 항공전이 벌어지면서 자원을 대부분 공군 강화에 투자해야 했던 상황이라 영국 혼자서는 유럽 대륙에 상륙해 독일 육군을 상대하기는 역부족이었다. 비록 1944년에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후 미국과 더불어 서유럽의 양대 주력이 되기는 하지만 당장은 육군의 장비조차도 부족한 형편이었다.
그러나 영국이 건재했기에 독일은 안 그래도 부족한 전력을 분산해야 했으며, 이 때문에 미국에서 소련으로 보내는 항로에 대한 견제가 어려워졌다. 반대로 독일이 영국을 확실히 제압해 놓았더라면 미국이 유럽에 전선을 전개하는 것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물론 당장 영국 본토를 제압할 능력이 없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지만, 바다에서의 U-보트 작전과 북아프리카 및 중동에서의 작전에 시간을 들여가며 공을 들였다면 중기적으로 영국을 굴복시키거나 협상을 이끌어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채 후방에서의 생산과 보급이 전세를 결정짓는 현대전에서 상대방의 보급 능력을 두 배 이상 향상시키고, 아군의 후방 생산 기지를 상대의 항공 세력으로 위협할 수 있는 영향권 내에 남겨둔 것만으로도 전력 약화를 야기했다고 봐야할 것이다. 이미 북아프리카 전역이 진행 중이었던 데다가, 바다에서도 싸움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양면전쟁이 아니라는 건 말도 안 된다.
전해에 독일군은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패했는데, 그 결과 영국의 정복을 위해서는 보다 훨씬 강력한 해군이나 공군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히틀러는 수십 개 사단을 해체하고 그 돈으로 해군과 공군을 증강할 계획을 세웠지만, 당장 400만의 상비군을 보유하고 유사시 천만 이상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소련을 앞에 둔 상황에서 육군을 줄이기는 너무나 부담스러웠다.
게다가 당시 독일과 소련의 인구비는 1:3였으므로 유사시 동원 능력도 큰 차이가 났다. 물론 독소전쟁 발발 직후 독일군과 소련군의 병력 손실 차이는 1:5 였지만 소련군은 전쟁이 길어질수록 물량뿐만 아니라 전략과 전술의 성공과 같은 많은 측면에서 독일군을 따라잡으면서 독소전 양측의 총 손실 비율을 1:1.5정도까지 줄여 버린다. 독일군과 무장 친위대가 점령지에서 벌인 학살로 민간인+포로 등의 소련의 사망자는 독일의 몇 배에 달했다.
독소 불가침조약이 체결되었을 때 전 세계가 놀랐던 이유가 절대 손을 잡을 것 같지 않았던 두 나라가 손을 잡은 데 있었을 만큼 독일과 소련은 결코 서로 간에 믿을 만한 국가가 아니었고 언젠가는 서로를 침공할 것이라는 예측을 이미 상호간에 하고 있는 상태였다. 따라서 미국이 참전하기 전에 소련이라는 폭탄을 제거해 두지 못한다면 영미를 막느라 상당히 약화된 상태에서 소련의 침공을 받는 최악의 시나리오에 봉착할 가능성이 농후했기에, 이는 어느 정도 필연적 선택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제1차 세계 대전 때 동부전선에서 독일에 쭉쭉 밀리다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거대한 땅덩어리를 떼주고 전쟁에서 이탈해 사실상 패배한거나 다름없었던 제정 러시아의 무능함도 한몫했다. 만일 소련이 제정 러시아만큼 무능해 또 다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과 비슷한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다면, 추후 있을 대 미국전에서 배후를 노릴 수도 있는 소련이라는 폭탄을 제거함과 동시에 독일의 고질적 문제였던 자원문제도 해결할 수 있으리란 기대감도 있었다. 동시에 이념, 정치적 목표인 레벤스라움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었으니 히틀러 입장에서는 참기 어려운 유혹, 아니 도박이었을 것이다.
이중 자원 문제는 중요한것으로 특히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한 석유가 독일엔 항상 부족했다. 미국이 1941년~1945년 까지 유럽과 북아프리카 전선의 연합국에 제공한 석유는 60억 배럴이었는데, 이탈리아와 독일은 13억배럴도 채 되지 않았다. 이 부족한 석유를 동부 지역을 침공함으로써 얻어내고 싶었던 것이다.
폴란드와 프랑스를 기갑 부대를 이용한 최소한의 희생으로 1달 정도의 단기간에 정복했듯이, 한창 물이 오를 대로 올라 있는 육군을 동원하여 기습 공격을 한다면 소련을 쉽게 정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도 있다. 당시 독일군 육군 참모본부도 소련은 10주의 작전(!)으로 정복할 수 있다는 작전을 내놨는데 이는 히틀러의 결심을 더욱 확고하게 했다. 브렌하르트 폰 로스부르크(Bernhard von Lossberg) 중령과 알프레트 요들 포병대장이 이른바 로스부르크 연구(Lossberg study)를 통해 작전을 입안했다.
물론 에리히 폰 만슈타인, 프란츠 할더, 하인츠 구데리안,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등 독일군의 주요 상급 지휘관 및 참모들은 "영국과 전쟁 중인 마당에 굳이 우리를 건드리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되는 소련을 상대로 불필요한 전쟁을 벌여서 군을 소모시킬 필요는 없다"라는 의견이었지만 적극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았다. 물론 잘못될 경우 1차 대전의 악몽이 재현될 수도 있었지만, 당시에는 그 누구도 실제로 전쟁이 개시되면 소련이 길게 버티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독일군 장성들은 소련군의 역량을 낮잡아 봤다. 모스크바 공방전 당시 독일군의 동계장비가 허술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1차 대전의 악몽이 재현됨과 동시에 한 술 더 떠서 본토까지 탈탈 털려 버렸다.
설령 영국이 협상에 나섰다 한들 소련과의 전쟁은 어느 시점에 가서는 히틀러가 염원하던 조건으로 이뤄졌을 것이다. 히틀러가 정치에 입문하고 20년 가까이 히틀러의 머리를 지배한 것은 전쟁이였고 전쟁의 중심 입안자는 누가 뭐래도 히틀러였다.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 히틀러는 전쟁을 상상하는 단계가 아니라 결전 계획을 구체적으로 짜는 단계에서도 상당히 개입하였고, 소련 공격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육군 지도부를 비롯한 국방군 수뇌부는 히틀러가 하자는 대로 했다. 그들은 히틀러를 말린 적이 없었고 말리긴커녕, 이미 독일 내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이 워낙 큰 데다가 소련의 군사력을 턱없이 얕잡아보는 바람에 군 수뇌부는 소련을 무너뜨리는 것은 식은 죽 먹기라고 히틀러와 똑같이 낙관했다.
그리고 퀴힐러, 회프너를 비롯하여 수많은 장군이 히틀러가 독소전쟁 개전하자는 주장을 묵인한 것은 순종하는 버릇이 몸과 머리에 밴 점과 이념에서도 나치 지도부와 겹치는 점이 상당히 많았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장군들 또한 히틀러와 마찬가지로 동방에 제국을 세우자는 공감대가 있었고 소련과 볼셰비즘을 쳐부숴야하는 대상으로 여기는 이념적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독소전쟁은 히틀러가 억지로 국민에게 강요한 전쟁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나치건 나치가 아니건 독일의 모든 엘리트가 수긍했고 심지어 정도와 이유는 저마다 달랐지만 환영한 전쟁이었다. 나중에 전선에서 하급 병사로 싸우는 수백만 명의 군인을 비롯하여 대다수의 독일 국민도 이것을 '볼셰비즘과 겨루는 성전'이라는 나치 선전기관이 주입한 논리를 받아들였으며, 광적인 나치 당원들은 볼셰비키 무리가 서양 문화를 파괴하는 것을 막으려는 예방전쟁이라는 해석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유대 볼셰비즘'을 발본색원하지 않는 한 유럽의 해방은 기대할 수 없다고 철썩같이 믿었으며, 이러한 믿음은 나치와 나치 지지자들에게 볼셰비즘을 제거하기 위한 절멸 계획 홀로코스트의 시작이였다.
히틀러는 일단 쳐들어가기만 하면 강압적인 공산 통치에 염증을 느낀 소련 국민들이 독일군을 환영하여 소련 체제는 공격하는 즉시 붕괴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히틀러가 소련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문을 박차고 들어가기만 하면, 저 엉터리 건물은 스스로 무너진다."
(We have only to kick in the door and the whole rotten structure will come crashing down.)
히틀러가 생각한 것처럼 직접 소련과의 전면전을 겪은 일본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는 소련이 금방 망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사실 우크라이나, 발트 3국 등은 처음에는 독일군을 스탈린의 학살, 숙청, 공포 정치에서 해방시켜 준 군대로 환영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독일군의 보답은 학살, 파괴, 약탈. 독일이 이러한 행위들을 저지른 것은 열등한 슬라브족을 멸살시키기 위해 취한 학살이며 문제는 전쟁이 장기화되고 본토 방어전으로 밀려서 학살 대상자들이 자신들의 영역에서 벗어난 이후에야 이런 끔찍한 행위가 멈췄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독일군의 잠재적 협력자가 될 뻔했던 우크라이나인이나 발트 3국인도 모두 독일군에 등을 돌렸고 후방에서 빨치산을 하든지 소련군에 앞장서 입대했다. 히틀러와 독일군은 이 침공 작전에 대해 낙관적이었는데, 소련이 비록 거대한 육군을 보유하고 있지만 서방에서 육군력이 강했던 프랑스도 수도인 파리가 함락되자 바로 무너졌던 전례가 있는만큼 소련도 그렇게 되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또 대숙청으로 소련군이 반고자가 된 상태인 데다가 소련 체제가 막장이기 때문에 소련군이 군사 작전을 펼쳐 봤자 그 범위만 컸지 결과는 프랑스와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히틀러는 소련군이 전세를 뒤집고 반격을 개시해 전쟁 막판에 베를린 전투가 벌어져 베를린이 함락되기 직전에는 오히려 "독일인이 소련인보다 약해서 이 지경이 되었으니 독일인은 모두 멸종되어야 한다"는 개소리를 지껄였다.
이렇듯 당시의 독일은 소련을 매우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사실 독일만이 아니라 다른 국가들도 소련의 역량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영국과 미국 등의 많은 나라에서도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에 소련군이 막대한 병력을 잃자 소련은 얼마 못 가서 무너지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할 정도였다. 왜냐하면 스탈린만이 군대에 대한 정보와 지휘권을 가지고 있었고 이러한 정보에 대한 보안을 철저하게 유지한 결과 외부에서 소련이 정확히 어느 정도의 군대를 보유하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고, 정보의 부족 때문에 소련 정복은 쉬울 것이라고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후방에 배치된 공업 시설의 생산능력이 제대로 증명되고 극동에 남아있던 정예 소련군이 대규모로 집결하기 전까지는 소련군은 연전연패하긴 했다. 독일은 후방 병력 견제는 일본이 해 줄 거라고 생각했지만 기대와는 달리 일본은 소련을 공격하지 않았다. 일본도 소련과 상호 간에 불가침 조약까지 체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독일의 태도가 이러한 일본의 행동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는데, 일전에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을 때 일본과 아무런 의논없이 체결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정부는 외교무능에 대한 책임을 지고 총리와 내각이 총사퇴를 할 정도로 충격이 엄청났다. 그런데도 이후 바르바로사 작전에 대해서도 히틀러가 일본에 알리지말라 지시해 아무런 언질이 없었다. 일본 외무장관이 조약을 맺기 한달전에 베를린을 방문해 불가침조약을 추진중이라는걸 알리기까지 했는데 말이다. 이러니 일본 입장에선 그렇게 필요했으면 상의라도 하지 그랬냐고 불만이 나올수밖에 없는 상황.
결과적으로 초반의 무지막지한 대패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상상을 초월하는 저력으로 저항하여 무너지지 않았다. 게다가 1941년 12월에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독일은 미국에도 선전포고를 해 버렸는데 독일의 3국 동맹이 있었다지만 진주만 공습은 일본이 먼저 시작한 공격이기 때문에 독일이 굳이 미국에 선전포고를 안 해도 되었다.
물론 선전포고를 안 하고 무시했다고 쳐도 아마 미국이 먼저 선전포고를 때리고 전쟁에 착수했을 가능성이 크다. 미국은 이미 유럽 전선에 참전하기로 영국에 비밀리에 약속했기 때문이다. 다만 이 경우에는 진주만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높은 상황에서 정부가 유럽 전선에 우선적으로 전력을 집중하는 상황을 국민들에게 납득시키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당시 미국 내의 여론은 2차 대전을 유럽내에서 일어나는 즉 이웃동네 싸움 정도로만 간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 내의 직접적인 위협이 되지 않는 한 참전할 이유가 없다는 식이었고 이는 먼로 독트린을 바탕으로 한 방임주의의 영향이 컸다. 즉 히틀러의 미국에 대한 선전포고는 미국 정부의 정치적 부담을 덜어줬고 나아가 미국이 일치단결해서 전쟁을 수행하는 데 큰 도움을 준 셈이다.
사실 이 선전포고에는 일본이 중국 그만 공격하고 소련으로 발 돌리길 요구하는 의미도 섞여있었다. 어쨌든 일본 제국 때문에 불과 6개월 전까지만 해도 해상 보급에 연명하는 영국이 독일의 유일한 상대였으나, 물량이 승패를 결정하는 현대전에서 세계 1, 2위의 공업국을 상대로 자진해서 전쟁을 벌이는 자살적인 모양이 되었고, 히틀러가 물량의 의미를 깨달았을 때 이미 전세는 돌이킬 수 없었다. 물론 소련은 초반의 기습으로 공업 역량을 상당히 빼앗긴 반면에 독일은 유럽 전역의 공업력과 자원을 끌어다 쓸 수 있었다. 미국이 본격적으로 지원을 해 준 것도 1943년에 들어서의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