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멜의 고향집에서 동양화전시회개최
<월간 조선 2016년 7월호>에 의하면, 동양화가 양순열(梁順烈·58)이 하멜의 고향 네덜란드 호린험(Gorinchem)에서 초대 전시회를 열었다고 한다. 한국을 최초로 서양에 소개한《하멜 표류기》를 쓴 하멜의 고향에서 6월 9일부터 9월 9일까지 초대전이 열리며, 주제는 ‘그립다(I long for my home)’라고 한다.
양순열이 그린 동양화〈화심(花心)〉등 8점과 조각〈호모 사피엔스〉, 홀로그램 설치작품 등 40여 점이 전시됐다. “박물관이 된 하멜의 고향집에서 열리는 첫 초대전”이라고 한다.
개막식인 6월 9일, 양순열이 쪽빛 안동포 치마에 흰 모시 저고리를 입고서 하멜을 상징하는〈호모 사피엔스〉조각을 안고 호린험시(市) 부두에서 하멜의 집까지 걸어가는 퍼포먼스를 펼쳤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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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 표류기> 소고(小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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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 표류기는 ‘난선제주도난파기(蘭船濟州島難破記)’라고도 한다. 우리 나라에 관한 서양인이 쓴 최초의 저술로서 당시 유럽인의 이목을 끌었다.
1653년(효종 4) 네덜란드 선박 한 척이 심한 풍랑으로 난파되어 선원 64명 중 36명만이 중상을 입은 채 제주도산방산(山房山) 앞 바다에 상륙, 무려 13년 28일 동안 억류되다가 8명이 탈출해 성공, 귀국했는데, 동 선박의 사무장이였던 하멜이 억류 생활중의 견문을 기록한 책이다. 조선의 실상을 비교적 소상하게 충실히 기록했다. 물론 잘못 인식한 부분도 있다.
하멜 표류기의 내용과 간행 경위는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1653년 1월 10일 네덜란드를 떠난 포겔 스트루이스(Vogel Struuijs)호는 6월 1일 자바섬의 바다비아(Badavia)에 도착했다. 선원들은 그 곳에서 며칠 동안 휴식을 취한 다음 대만(臺灣)의 안핑(安平)으로 향발, 6월 14일 도착하여, 주 임무였던 신임대만총독을 임지에 내려놓은 다음, 7월 30일 나가사키(長崎)로 향해 출항했다, 그러나 심한 풍랑를 만나 배가 침수하기 시작하고, 화물과 돛대마저 버리는 조난을 당하였는데, 때마침 제주도를 발견한 것이다.
정박을 하지 못하고 배가 난파되었다. 선원 총원 64명중 28명은 익사하고, 뭍으로 오른 36명의 생존자는 서울로 이송되었다. 서울에서 2년 동안 억류 생활을 하던중, 1655년 때마침 지나는 청나라 사신행렬에 뛰어들어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고 구원을 호소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하멜 일행은 서울에서 추방되어 1656년 3월 전라도 병영으로 이송되었다.
그동안 14명이 죽고, 남어지 22명은 663년에 다시 여수·남원·순천 등으로 분산 수용되었다. 잡역에 종사하면서 고달픈 억류 생활을 계속했는데, 때로는 구걸에 나서기도 했다. 1628년(인조 6)에 표류해 온 같은 동포인 벨테브레이(Weltevree, 朴燕)도 만났지만 도움은 되지 못했다.
하멜이 억류 생활을 한 곳은 전라도 여수 좌수영. 다행히 소형 배 한척을 마련해 먹을 것을 구하느라 부근의 섬들을 내왕하면서 그 해역의 조수, 해류, 풍향 등을 파악하게 되었다. 1666년 (현종 7) 9월 4일, 생존자 16명 중 하멜을 포함한 8명이 구입한 배를 이용, 야음을 틈타 일본으로 탈출했다. 이들로부터 조선에 잔류자가 있음을 알게 된 네덜란드당국의 요청에 따라 2년 뒤 남아있던 8명은 일본으로 송환되었다. 표류기에는 이들의 송환 사실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을 보면, 아마 집필 당시까지는 이 사실을 몰랐던 것 같다.
책은 1668년 암스테르담에서 3개 출판사에 의해 출판되었다.
회팅크(Hoetink,B.)가 1920년 에 발간한 ≪하멜표류기≫ 의 내용을 보면, 제1부는 난파와 표류에 관한 기술, 제2부는 <조선왕국기(朝鮮王國記)>로 되어 ,한국의 지리·풍토·산물·정치·군사·풍속·종교·교육·교역 등이 소개되었다.
하멜이 14년 동안 여러 지역을 끌려다니면서, 군역·감금·태형(笞刑)·유형(流刑)·구걸 등의 모진 시련을 겪는 동안, 여러 계층의 한국사람들과의 접촉을 통해, 당시의 풍물과 풍속을 엿볼 수 있었기에, 비교적 소상하고도 충실한 기록을 할 수 있었다. 한국을 거의 알지 못하던 당시의 서양 사람들에게 한국을 알린 최초의 저서로서 요긴한 자료가 되었다. 프랑스·영국·독일 등 여러 나라가 잇다라 간행했고, 우리 나라에서는 이병도(李丙燾)의 번역본이 1934년 ≪진단학보≫ 1∼3호에 실렸으며, 또 1954년에 일조각(一潮閣)에서 간행했고, 1961년 일본에서는 ≪조선유수기 朝鮮幽囚記≫라는 제목으로 간행되었다.
1980년 10월 12일 韓蘭양국이 각각 1만 달러씩 출연 ,난파지로 추정되는 南제주군 안덕면 사계리 산방산 해안 언덕에 하멜기념비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