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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주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조상 다윗의 왕좌를 주시리라(루카 1,32 참조).>
▥ 사무엘기 하권의 말씀입니다. 7,4-5ㄴ.12-14ㄱ.16
그 무렵 4 주님의 말씀이 나탄에게 내렸다.
5 “나의 종 다윗에게 가서 말하여라.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12 너의 날수가 다 차서 조상들과 함께 잠들게 될 때,
네 몸에서 나와 네 뒤를 이을 후손을 내가 일으켜 세우고,
그의 나라를 튼튼하게 하겠다.
13 그는 나의 이름을 위하여 집을 짓고,
나는 그 나라의 왕좌를 영원히 튼튼하게 할 것이다.
14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16 너의 집안과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지고,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아브라함은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였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4,13.16-18.22
형제 여러분, 13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는 약속은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얻은 의로움을 통해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주어졌습니다.
16 그러한 까닭에 약속은 믿음에 따라 이루어지고 은총으로 주어집니다.
이는 약속이 모든 후손에게, 곧 율법에 따라 사는 이들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이 보여 준 믿음에 따라 사는 이들에게도 보장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우리 모두의 조상입니다.
17 그것은 성경에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만들었다.”라고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믿는 분, 곧 죽은 이들을 다시 살리시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도록 불러내시는 하느님 앞에서
우리 모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18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너의 후손들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 하신 말씀에 따라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었습니다.
22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6.18-21.24ㄱ
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1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19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20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21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24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41-51ㄱ
41 예수님의 부모는 해마다 파스카 축제 때면 예루살렘으로 가곤 하였다.
42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에도 이 축제 관습에 따라 그리로 올라갔다.
43 그런데 축제 기간이 끝나고 돌아갈 때에
소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았다.
그의 부모는 그것도 모르고,
44 일행 가운데에 있으려니 여기며 하룻길을 갔다.
그런 다음에야 친척들과 친지들 사이에서 찾아보았지만,
45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그를 찾아다녔다.
46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그를 찾아냈는데,
그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
47 그의 말을 듣는 이들은 모두 그의 슬기로운 답변에 경탄하였다.
48 예수님의 부모는 그를 보고 무척 놀랐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하자,
49 그가 부모에게 말하였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50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51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다윗이 조상들과 함께 잠들게 될 때 뒤를 이을 후손을 일으켜 세우고 그의 나라를 튼튼하게 하겠다고 하신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아브라함은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었다고 한다(제2독서). 요셉은 꿈에 주님의 천사가 말한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인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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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탄을 통해 주님께서는 다윗에게 그의 왕좌를 이을 후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며,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라고 하신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한 아브라함이 보여 준 믿음에 따라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약속대로 세상의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한다(제2독서). 의로운 사람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 그리스도라고 부르는 예수님을 태어나게 한다(복음).
오늘의 묵상
마태오 복음서는 예수님의 족보로 시작합니다. 마태오 복음 1장 2-17절은 아브라함에서 시작하여 다윗을 거쳐 예수님으로 이어지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요약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예수님께서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탄생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 1장 16절에 따르면, 예수님의 부모는 야곱의 아들 요셉과 그의 아내 마리아입니다. 여기서 마태오는 예수님의 탄생이 성령으로 이루어진 사건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1,19 참조). 요셉의 ‘의로움’은 무엇보다 그가 하느님의 계명, 곧 율법을 충실히 따르는 사람이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그러나 엄격한 율법 준수만으로 그의 의로움을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율법(신명 22,20-21 참조)에는 혼인하지 않은 여인이 임신할 경우 받게 되는 형법적 절차가 있었지만, 그는 이를 따르지 않기로 마음 먹습니다. 이처럼 그의 ‘의로움’은 약혼녀 마리아를 향한 사랑, 법규나 규정을 넘어 그 안에 담긴 사람과 생명을 먼저 생각하는 모습에서 비롯됩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인간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온전히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순종한 데 있습니다(마태 1,24 참조).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참신앙의 모습을 배울 수 있습니다. 주님의 천사를 통하여 전해진 하느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의 뜻을 따라 결정을 내린 요셉은 신앙인의 본보기입니다. 신앙인으로서 살아가는 우리는 선택과 결정의 기준을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정진만 안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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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친구가 있습니다. 가족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한 친구입니다. 포기하고 싶을 때 함께 가자며 손을 잡아 주었고 슬퍼할 때 함께 울어 주었습니다. 기쁘고 행복하였던 환희의 순간에도, 아프고 힘들었던 고통의 순간에도, 어떤 것을 선택할지 갈등하고 고민하였던 결정의 순간에도 그 친구와 함께하였습니다. 서로 비슷한 점은 없지만 언제나 무엇이든 이해해 주고 자신의 의견보다 친구의 생각을 더 잘 알고 전달해 주는 사이, ‘벗’이라며 같은 길을 걸어가 주는 짝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우리를 부부 같다고 말합니다. 부부는 서로를 동반자, 반려자라 부릅니다. ‘함께 의지하며 짝을 이루고 같이 걸어가는 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에서도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창세 2,24)라고 이야기합니다. 행복하고 즐거운 꽃길뿐만 아니라 험난하고 어려운 가시밭길도 함께 걸어가는 이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요셉 성인을 경축합니다. 요셉 성인은 성모님의 힘들고 어려운 여정에 언제나 함께하였기에 성인을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이라 합니다. 성인은 상대의 생각과 판단을 중요시하였습니다. 약혼자의 몸가짐을 의심하거나 따지지 않고, 믿어 주고 참아 주며 끝까지 함께 걸어갔습니다. 설명할 수 없고 이해도 되지 않는 일들을 참아 내며 가족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픔과 역경을 함께 이겨 냅니다. 그래서 소년 예수님께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 사랑과 호의를 삶으로 가르쳐 주었습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따르시는 고난의 길에 요셉 성인의 모습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인은 배필이신 마리아와 함께 아파하고 함께 예수님을 따랐을 것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동반자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함께 걸어 주고 짝이 되어 주는, 그래서 세상의 모든 사람이 비판하고 손가락질하더라도 이해해 주고 안아 주고 울어 주고 고민해 주는 누군가의 동반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 동반자의 손을 잡고 오늘도 한 걸음 걸어가기를 기도합니다.(최종훈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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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 성인은 복음서에 많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탄생을 전하는 이야기에 언급될 뿐입니다. 그럼에도 요셉 성인은 예수님의 탄생에, 구원자의 탄생에 없어서는 안 될 인물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구약에서부터 예언된 메시아에 대한 약속이 이루어지는 사건입니다. 다윗의 후손을 일으켜 영원한 왕좌에 앉게 하겠다는 하느님의 예언은 예수님의 탄생을 통하여 성취됩니다. 오늘 복음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으며 그 잉태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명확하게 전합니다. 이러한 사건에서 요셉은 눈에 띄게 등장하지 않습니다. 묵묵히 마리아의 잉태를 지켜 주며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게 합니다.
의로운 요셉. 성경에서 의롭다는 표현은 하느님께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입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계명을 충실히 지키며 살아가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칭찬입니다. 그렇기에 이 표현은 요셉을 가장 잘 묘사합니다.
요셉 성인의 의로움은 구원 역사와 성가정의 바탕이 되고 모든 신앙인의 모범이 됩니다. 그 의로움은 믿음에서 옵니다. 바오로 사도도 율법과 구분되는 ‘믿음으로 얻은 의로움’을 말합니다. 마리아의 응답처럼 요셉의 의로움은 예수님 탄생의 사건이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믿고 따르는 행동을 통하여 우리 안에 이루어졌음을 강조합니다. 요셉 성인의 모습은 우리를 의로운 사람이 되도록,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이 되도록 초대합니다.(허규 베네딕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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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 정교회에서 오늘날까지 즐겨 읽는 외경인 야고보 원 복음서를 보면 요셉 성인에 관하여 자세히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 복음서에 따르면 요셉은, 대사제에게 뽑혀 성전에 봉헌된 정결한 처녀 마리아의 남편이 됩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약혼 기간 중 아이를 잉태하자 요셉은 마리아와 몰래 파혼하려 하는데, 이때 요셉의 말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혹시 뱃속에 있는 아이가 천사가 보낸 아이이기라도 하면 어쩌나. 그러다가 무죄한 피를 넘겨 사형 선고라도 받게 하면.”
마리아가 아이를 가졌다는 소식을 듣게 된 대사제는 진노합니다. 그러나 요셉은 꿈에서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하였다는 말을 들었기에 대사제 앞에서 마리아의 무죄를 증언합니다.
이를 위해 요셉은 마리아와 함께 기꺼이 ‘질책의 물’을 마시고 광야로 내보내집니다. ‘질책의 물’이란 마시고 살면 죄가 없는 것이고, 죽으면 죄가 있는 것이 되는 매우 위험한 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요셉은 기꺼이 이 시험을 받아들인 뒤 마리아와 아이의 목숨을 살려 냅니다. 이렇게 마리아와 예수님을 위하여 목숨마저 기꺼이 내어놓는 요셉의 모습에서 그가 왜 동정 마리아의 배필이 될 수 있었는지를 보게 됩니다.
성령에 의한 예수님 잉태 이야기를 들으면서 반신반인의 그림을 떠올려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에게서 온전한 인성을, 하느님에게서 온전한 신성을 받으신 온전한 하느님이시자, 온전한 인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성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이 진리를 가장 먼저 받아들인 분이 요셉 성인이었습니다. 이를 기꺼이 받아들여 마리아를 배필로 삼아 예수님을 보호하고 길러 낸 요셉 덕분에 우리는 온 세상의 구원자이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염철호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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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을 보면 요셉 성인이 어떠한 분이신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약혼자 마리아가 아기를 잉태하자 어떤 태도를 보입니까? 단호하게 법정에 세웁니까? 율법 학자들에게 고발하여 돌로 치게 합니까? 그저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먹었지요.
이런 요셉에게 천사가 나타나 주님의 계획을 전해 줍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에 요셉은 전적으로 순명합니다. 당시 상황으로서는 얼마나 이해하기 어려웠고 받아들이기 힘들었겠습니까?
그러나 요셉은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듣는 사람입니다. 자기 생각대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의 전형이지요. 그러기에 하느님 말씀을 이 세상에 실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더욱이 요셉은 가장 겸손한 사람의 전형입니다. 늘 예수님과 성모님의 뒤에서 말없이 헌신하였지요. 결코,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성모님의 남편으로서 동정을 지키며 얼마나 힘든 길을 걸었겠습니까?
그러기에 요셉은 믿는 이의 가장 뛰어난 표본이 되신 것입니다. 우리 역시 때로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을 많이 대하게 됩니다. 그러나 늘 이를 신앙의 차원에서 받아들이며, 그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겠습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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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을 보면 요셉 성인이 어떠한 분이신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약혼자 마리아가 아기를 잉태하자 어떤 태도를 보입니까? 단호하게 법정에 세웁니까? 율법 학자들에게 고발하여 돌로 치게 합니까? 그저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먹었지요.
이런 요셉에게 천사가 나타나 주님의 계획을 전해 줍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에 요셉은 전적으로 순명합니다. 당시 상황으로서는 얼마나 이해하기 어려웠고 받아들이기 힘들었겠습니까?
그러나 요셉은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듣는 사람입니다. 자기 생각대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의 전형이지요. 그러기에 하느님 말씀을 이 세상에 실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더욱이 요셉은 가장 겸손한 사람의 전형입니다. 늘 예수님과 성모님의 뒤에서 말없이 헌신하였지요. 결코,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성모님의 남편으로서 동정을 지키며 얼마나 힘든 길을 걸었겠습니까?
그러기에 요셉은 믿는 이의 가장 뛰어난 표본이 되신 것입니다. 우리 역시 때로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을 많이 대하게 됩니다. 그러나 늘 이를 신앙의 차원에서 받아들이며, 그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겠습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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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화답송에서는 하느님께서 다윗에게 하신 약속을 기억합니다. “영원토록 그에게 내 자애를 베풀리니, 그와 맺은 내 계약 변함이 없으리라”(시편 89,29). 그러나 이 시편은 다윗 왕조의 붕괴를 배경으로 하는 시편입니다. ‘하느님께서 다윗에게 후손을 약속하셨는데, 왕조가 무너지고 말았다면 하느님의 영원하신 자애는 어떻게 되는가? 하느님의 약속은 깨지고 말 것인가?’ 이것이 이 시편의 주제입니다.
믿는 모든 이의 조상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게 되면 하느님의 약속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알았지만, 이렇게 ‘희망이 없는 상황에서도 희망’했습니다(로마 4,18 참조). 시편 89편 또한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으로, 다윗 왕조가 무너져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하느님의 성실하심을 노래합니다. 여기서 실낱같은 왕정복고의 가능성을 내다보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하신 하느님의 약속이 왕정 붕괴로 깨어질 수 없기에 하느님의 자애를 노래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 자애가 보존될 수 있을지는 아직은 알지 못합니다.
신약에 이르러 그 약속은 실현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약속이 믿음에 따라 이루어지고 은총으로 주어진다고 선언합니다(로마 4,16 참조). 하느님의 은총에 협력하는 인간의 믿음, 곧 약속을 믿었던 의인 요셉은 그 약속된 후손이 태어날 수 있도록 말없이 협력합니다. 이렇게 하여,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믿어 의인으로 인정받고 믿는 모든 이의 아버지가 되었듯이,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마리아와 그 모태의 아기를 받아들인 요셉 성인은 우리 모두의 보호자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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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 성인은 가장 가난하면서도 가장 위대한 성인입니다. 마태오와 루카가 전한 예수님의 족보(마태 1,1-17; 루카 3,23-38)를 통해 그는 예수님을 다윗 혈통과 연결시켜 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경이 예언한 메시아라는 명칭을 갖게 됩니다.
또한 요셉 성인은 성경이 그리는 ‘꿈’을 실현시키는 수호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들에게 꿈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드러내십니다(마태 1,20-24; 2,13-19). 세례자 요한이 예언자들이 선포한 분을 직접 눈으로 뵙고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가 되었듯이, 요셉은 ‘꿈’의 선물을 마지막으로 받은 성경의 수호자가 됩니다(요한 28,10-20; 37,6-11). 아기 예수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난을 가는 것에서 요셉은 구약의 요셉이 행했던 여행을 재현하고 이로써 당신의 아들인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이집트 탈출이 실현되는 것입니다.
또한 요셉은 세상의 가장 가난한 곳에 육화되신 하느님의 신비를 잘 드러내는 가난한 가정의 가장이었고, 지상의 소박함이 얼마나 위대하고 하느님께서 이를 어떻게 이용하시는지를 잘 드러낸 증인이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셉은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드러내는 표지로 소개됩니다. 요셉 성인에 대한 공경은 바로 하느님께서 가장 적합한 시기에 가장 적합한 사람을 선택하신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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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 성인을 기억하며 그의 삶을 본받고자 다짐하는 날입니다. 예수님과 성모님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신 성인을 떠올리면 저 자신의 안위에 먼저 관심을 쏟는 모습이 부끄러워집니다. 또한 자신을 드러내려고 안달하는, 이른바 저 잘났다고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가련하고 초라해 보입니다. 성인을 바라보면 시끄럽게 달려가는 세상이 공허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성 경은 성인의 마음의 상태를 자세하게 알려 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깊은 인간적 고뇌의 시간이 있었으리라는 점은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마침내 주님의 천사의 명령을 따르며 성모님과 아기 예수님의 보호자로서 자신의 삶을 헌신하기로 마음을 굳히기까지 어떤 시간을 보냈을까요? 아마도 깊디깊은 침묵의 시간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침 묵과 관련해서 언젠가 독일의 세계적인 지휘자 카를로스 클라이버에 대한 흥미로운 일화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뮌헨 부근의 호숫가에 살았던 그는 주일에는 꼭 작은 성당의 새벽 미사에 참여하였다고 합니다. 그 미사에는 사람이 적어 음악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음악가가 음악을 피했다는 이야기가 이상하게 여겨졌지만, 한편으로는 완벽한 음악을 추구하는 사람은 오히려 침묵의 순간을 갈구하는 마음이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요 셉 성인은 참으로 성실한 삶에 깊이 뿌리내리고 성가정을 이끌었습니다. 그러한 삶을 가능하게 한 것은 어쩌면 삶의 중요한 순간마다 침묵과 인내의 시간을 가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음악과도 같은 삶이 순간순간 피어나 이어지기를 기대합니다. 그러한 삶은 침묵과 인내의 시간을 품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요셉 성인에게서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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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기르신 요셉 성인의 축일입니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혼인과 가난한 가정, 말 못하며 감당해야 했던 요셉 성인의 삶의 무게를 헤아려 봅니다. 오늘의 우리 아버지들의 모습을 생각하게 하는 글 “아버지는 누구인가”를 실어 봅니다.
아버지는 기분 좋을 때 헛기침을 하고, 겁이 날 때 너털웃음을 웃는 사람이다. 아버지는 자녀들의 학교 성적이 자기가 기대한 만큼 좋지 않을 때 겉으로는 “괜찮아, 괜찮아.” 하면서도 속으로는 몹시 화가 나 있는 사람이다./ ……./ 아버지가 아침마다 서둘러 나가는 곳은 즐거운 일만 기다리고 있는 곳이 아니다. 아버지는 머리가 셋 달린 용과 싸우러 나간다. 피로와, 끝없는 업무와, 스트레스이다./ ……./ 아버지는 자식을 결혼시킬 때 속으로는 한없이 울면서도 얼굴에는 웃음을 나타내는 사람이다./ 아버지는 돌아가신 뒤에, 두고두고 그 말씀이 생각나는 사람이다. 아버지란 돌아가신 후에야 보고 싶은 사람이다. 아버지! 뒷동산의 큰 바위 같은 이름이다. 시골마을의 느티나무 같은 크나큰 이름이다.
요즘 많은 아버지가 힘들어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자녀들 교육비는 점점 늘어만 가는데 가정의 경제 사정은 전보다 더 어려워졌습니다. 직장에서 경쟁은 날로 치열해지고 젊은 사람들이 자꾸 뒤쫓아 옵니다. 퇴직 후의 노후 생활도 걱정거리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들의 시름은 늘어가고 주름은 깊어만 갑니다. 그러나 자녀들에게 아버지는 뒷동산 큰 바위 같은 이름입니다. 지치고 힘들게 살아가는 아버지들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힘으로 살아갈 용기를 얻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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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 성인의 일생에는 우여곡절이 많습니다. 약혼 시절 그는 약혼녀가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놀람과 번민 속에서 조용히 헤어지리라 다짐합니다. 그는 착한 남자입니다. 하지만 그의 고뇌는 은총을 받기 위한 준비였습니다. 마음을 정한 그날 밤, 천사는 ‘하늘 나라의 비밀’을 알려 줍니다. 이후 요셉은 성가정의 수호자가 됩니다. 자신의 역할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는 성모님과 함께, 아기 예수님을 찾아온 동방 박사의 방문을 받습니다. 그 자리에 어떤 모습으로 계셨을까요? 아버지이면서 아버지가 아닌 모습으로 계셨을 것입니다. 이후 성가정은 헤로데의 학살을 피해 이집트로 피신했다가 나자렛으로 돌아와 삽니다.
요셉 성인은 성가정에 반드시 계셔야 할 분입니다. 그런데도 늘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살았습니다. 꼭 필요한 분이었지만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살았습니다. 아름다운 겸손입니다. 그러기에 오늘날 모든 교회는 그분을 수호자로 모시고 있습니다. 성가정을 수호하였듯이 우리 교회도 보호해 주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실 때에는 요셉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이미 운명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분의 죽음에는 분명 예수님과 성모님께서 함께하셨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람에게 주어진 당연한 위로입니다. 모든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듯이’ 살다 간 분이 요셉 성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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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 성인은 착하고 순박한 사람입니다. 마리아의 잉태 사실을 알았을 때 가만히 헤어지려 했습니다. 약혼녀가 자신도 모르는 아기를 가졌다면 당황하지 않을 남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는 조용한 해결을 선택합니다. 그러한 결단이 있기까지 얼마나 고뇌했을지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람은 늘 고뇌와 함께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요셉의 고뇌는 은총이었습니다. 아픔을 통해 성숙해지라는 하느님의 배려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의 ‘임마누엘’은 자신을 비우고 상처받고 포기한 뒤에야 깨달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현실을 살고 있는 우리 역시 또 다른 모습의 요셉입니다. 고뇌 없이 아버지가 되고 남편이 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누구라도 고통을 두려워하면 의심이 생기고, 편한 것만 추구하면 이기적으로 바뀝니다. 옆에서 보기에도 안쓰러울 정도로 옹졸한 남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훌륭한 남자는 자신을 감출 줄 아는 남자입니다. 그러면서도 있어야 할 자리에는 꼭 있는 남자입니다.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듯이’ 살아가는 남자입니다. 요셉 성인에게서 그러한 모습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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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은 끊임없이 도전을 받은 분입니다. 첫 번째는 약혼녀 마리아의 잉태입니다. 같이 살지도 않았는데 아기를 가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마리아에 대한 배신감이 컸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이 도전을 이겨 나갑니다. 당시 율법에 따라 마리아를 길가에 내던져 돌에 맞아 죽게 할 수도 있었지만,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작정함으로써 사랑하는 마리아의 생명을 지켜 줍니다.
그런데 두 번째 도전이 찾아왔습니다. 마리아의 잉태가 그토록 믿어 왔던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그는 꿈을 통해 깨닫게 됩니다. 마리아와 결별하고 새로운 사람과 오붓한 가정을 꾸려 평범하게 살 수도 있었지만, 하느님께서는 이조차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성모님과 아기 예수님을 책임지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이 도전도 받아들입니다.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아들! 하느님께서 이 아기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신다니 나에게도 그것은 큰 영광이고 보람이겠지.’
그러나 세 번째 도전이 이어집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아기이며 세상을 구원하실 분이시지만, 하느님께서는 그 아기를 비천한 곳에서 태어나게 하셨고, 헤로데를 피해 이집트로 피신하도록 하셨습니다. 너무나 무책임하게 보이는 그 하느님을 요셉 성인은 얼마나 야속하게 생각했겠습니까? 그러나 요셉은 이 도전도 이겨 나갑니다.
요셉 성인은 이처럼 끝없는 도전을 받으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예수님과 함께 살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산다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도전입니다.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은 인간적인 감정에서 벗어나게 하는 도전입니다.


옛날 어느 왕이 세자빈을 구한다는 방을 붙였습니다. 여러 심사를 통해 3명의 규수를 마지막 후보로 선발하고서 소량의 쌀을 나눠주면서 숙제를 주었습니다.
“너희는 이것으로 한 달 동안 먹고 지내다 오너라.”
성인이 아껴먹어도 한 달 살기는 너무나 부족한 양의 쌀을 주었으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세자빈이 되기 위해 이 명령을 충실히 따라야만 했습니다.
한 달 뒤, 두 처녀는 너무나 말랐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 처녀는 이전보다도 더 좋아진 것입니다. 그리고 떡을 한 시루 머리에 이고 궁궐에 들어왔습니다. 왕이 “적은 쌀로 한 달을 먹고, 떡까지 해올 수 있었느냐?”라고 묻자,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그 쌀로 떡을 만들어 장터에 팔았습니다. 그리고 남은 이윤으로 쌀을 사고 또 떡을 만들어 팔아 부족함 없이 살 수 있었습니다. 남은 쌀로 떡을 해서 이렇게 임금님께 바칩니다.”
어떤 규수가 세자빈이 되었을까요? 당연히 쌀로 떡을 만들어온 규수가 세자빈이 되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노력하는 모습이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무엇인가라도 해서 당신의 영광을 이 세상에 드러내길 원하실 것입니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을 맞이하는 오늘, 요셉 성인에 대해 묵상을 하게 됩니다. 성인은 아직 혼인하기 전에 성모님의 잉태 소식을 듣게 되지요. 사실 주님 탄생의 신비를 설명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으며, 그 신비는 설명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주님은 당신의 보이지 않는 신성을 보여 주시려고 눈에 보이는 육신을 취하신 것입니다.
천사는 요셉이 자제를 배우고 위로를 받도록, 그의 마음속에 있는 모든 것, 그가 느낀 것, 두려워한 것, 하고자 마음먹은 일을 그에게 낱낱이 드러냈습니다. 천사는 또 요셉에게 구원자의 이름을 붙이는 영예를 베풀었으며, 아이에게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주도록 그를 불렀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나중에 마리아를 당신 제자에게 맡기시듯이, 지금 마리아를 요셉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천사는 요셉에게, 아버지로서 아들의 이름을 붙이는 영예도 주었습니다.
이런 하느님의 뜻을 요셉은 받아들이십니다. 의로운 사람이라고 묘사된 것을 보면, 그가 성모님을 맞아들이지 않는 것이 정상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천사의 메시지를 받고서는 할 수 있는 일을 찾습니다. 바로 성모님을 아내로 맞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꿈에 나타난 천사의 말에 그대로 따라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합니다. 이로써 요셉 성인은 성가정의 수호자가 되어 예수님과 성모님을 보호하는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십니다.
행복은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아리스토텔레스).
우리 교회는 어떤 곳인가요?
우리는 종종 광고를 보게 됩니다. 식당 광고, 물건을 파는 광고, 관광지와 영화, 공연 광고 등등 참으로 많은 광고가 있습니다.
이 광고를 왜 할까요? 사람들이 이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이 식당을 이용하면 저희가 부자 됩니다.’, ‘이 영화를 많이 봐야 저희가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라면서 광고할까요? 아닙니다. 대부분 돈을 써도 절대로 손해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도록 광고합니다. 그리고 자기 돈을 쓰고라도 손해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 사람들이 몰려들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교회 역시 단순히 헌금만 내라고 하면 사람들이 모여들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 생명과 구원, 나눔과 기쁨을 주는 곳이라는 것을 알면 사람들이 모여들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교회가 어떤 곳인지를 제대로 알리고 있을까요?
인간의 의지를 버리고 하느님의 뜻에 적극적으로 순종하신 성 요셉!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읍내로 물건을 사러갔다가 인상 좋으시고 연세 지긋한 사장님을 만났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전혀 안그럴 것 같은 분위기였는데, 느릿느릿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으시는데, 한도 끝도 없었습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발소를 들렀는데, 말 잔치는 계속되었습니다. 지난 번에도 대충 들은 것 같았는데, 길고도 긴 대하드라마 같은 인생사를 고스란히 들어야했습니다. 집에 들어서면 결코 만만치 않은 분이 또 한분 기다리고 계십니다. ㅋㅋㅋ
연세 조금 드시면서 갑작스레 말씀이 많아진 영감님들 케어하며 사시는 자매님들, 참 고생이 많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런 영감님은 어디 안 계실까? 생각해봅니다.
입은 꼭 다무는 대신 얼굴엔 언제나 환한 미소를 짓고 계신 영감님, 너무 아무 말 없으면 답답하니, 가끔씩, 백만번도 더한 아재 개그가 아닌, 신선하고 재미있는 아재 개그 구사하는 영감님, 너무 자주는 말고 하루에 세번 정도 뭐 필요하냐? 뭐 도와줄까? 물어봐주는 영감님,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설거지며 집안 청소며, 기쁜 얼굴로 척척 해내는 영감님...
아마 오늘 축일은 맞이하시는 요셉 성인이 그런 분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양부이자 성모님 인생의 동반자셨던 요셉 성인은 구세사 안에 꽤 중요한 인물인데도 복음서 안에 거의 등장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만큼 요셉은 과묵한 의인, 침묵의 성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셉은 침묵의 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침묵은 그저 입 다물고 아무 말 않는 침묵이 아니라, 하느님의 육화강생이란 큰 신비 앞에, 성숙한 신앙인으로서 취한 차원높은 침묵이었습니다.
만일 요셉이 마리아의 혼전 잉태 사건 앞에서 입을 다물지 않고 크게 떠벌렸다거나,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녔다면, 예수님의 인류 구원 사업은 큰 지장을 받을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침묵하고 또 침묵했습니다. 침묵 속에 육화강생의 신비를 묵상했습니다. 성장과정에서 예수님의 이해하지 못할 언행들 앞에서 또 침묵했습니다. 지금은 비록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언젠가 때가 되면 하느님께서 알려주실 것임을 굳게 믿으면서 침묵하고 또 침묵한 것입니다.
당시 유다 결혼 문화 안에서 약혼 기간 동안 두 사람은 각자 부모의 집에서 거주했지만, 법적으로는 이미 부부로 간주되었습니다. 요셉은 이미 법적으로 마리아의 남편이었습니다. 만일 그 기간 동안 약혼녀가 다른 마음을 먹는다던지, 고무신을 바꿔 신어버렸을 경우, 큰 범죄로 간주되었습니다.
마리아의 혼전 잉태 사건의 경우 요셉은 당시 혼인법에 따라 마리아에게 이혼장을 써주고 두 증인 앞에서 차버릴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될 경우 마리아와 그녀의 부모가 받게될 모욕과 타격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인간의 의지를 버리고 하느님의 뜻에 적극적으로 순종했습니다. 천사의 말을 굳게 믿고, 큰 곤경에 처한 마리아를 끝까지 보호했습니다.
마리아의 생애에 발생한 이 특별한 사건 앞에서, 요셉이 겪었던 내적인 고통이 얼마나 컸던가 하는 것은 부연설명을 하지 않아도 잘 알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요셉은 닭쫒던 개 지붕쳐다보는 격이 된 것입니다. 어찌 보면 사랑하는 약혼녀를 일순간에 하느님께 강탈당한 것입니다. 마리아와 꿈꾸던 단란한 가정도 물건너 가버린 것입니다.
요셉은 무척이나 당황했을 것이고 고뇌했을 것입니다. 마음이 크게 동요되어 밤잠도 설쳤을 것입니다. 배신감에 치를 떨기도 헀을 것입니다. 의심도 하고 심사숙고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신중하고 사려깊은 사람이었습니다. 의롭고 신심깊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느님께 마음을 활짝 열고 그분의 말씀에 적극적으로 순명하고 협조한 요셉 덕분에 예수님의 인류구원사업은 큰 무리없이 첫삽을 뜰수 있었습니다.
요셉 성인이 알려주시는 ‘적극적 고독의 힘’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은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성 요셉을 우리는 ‘의롭다’라고 표현합니다. 의로움은 내가 죄를 용서받은 것처럼 나도 타인의 죄를 용서할 때 생깁니다.
노아의 벗은 모습을 형제들에게 알린 아들 ‘함’은 의롭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아버지 덕분으로 살아남은 사실을 잊고 아버지의 치부를 드러내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셈과 야펫은 아버지의 몸을 보지 않고 뒤로 들어와 아버지의 겉옷을 덮어드렸습니다. 그렇게 축복을 받습니다. 그리스도 덕분으로 죄가 용서받은 우리가 타인의 잘못을 들추어낸다면 의로움을 잃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 요셉은 성모 마리아께서 성령으로 잉태하신 것을 모르고 다른 남자의 아기를 가졌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잘못을 덮어주려 했습니다. 남모르게 파혼하여 성모님을 보호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성모님의 잘못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그러면 아기 예수님의 생명도 보장받지 못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를 위해 의인 성 요셉은 마리아와 약혼하여 잉태시키고 이젠 싫어지니까 파혼하고 버려버리는 파렴치한이 됩니다. 마리아의 죄를 들추어내지 않기 위해 마리아와 그 가족, 또 자신의 가족과 세상으로부터 소외되는 편을 택한 것입니다.
이렇게 타인을 의롭게 만들려면 자신은 십자가와 고독을 선택해야 합니다. 아마 사순절에 요셉 성월이나, 성인의 축일이 겹친 이유도 이러한 섭리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의 고독을 사랑하지 않으면 의로워질 수 없음도 함께 깨닫게 합니다. 예수님도 의로워지시기 위해 십자가의 길을 홀로 가셨습니다. 이 힘은 바로 의로워짐으로써 당연히 거쳐야만 하는 ‘적극적 고독’에서 나옵니다.
적극적 고독은 내가 세상과 나를 사랑했던 이들, 그리고 가족으로부터 버려지고 미움을 받을 때 머물 수 있는 ‘나만의 작은 골방’과 같습니다. 그 안에 하느님이 계신지, 계시지 않았는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그 안에 머물면 힘들기는 하지만 세상이 주지 못하는 위로를 받는 때가 있습니다. 오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 모든 사실을 알려준 것처럼 말입니다.
저도 고등학교 때 이런 고독을 느껴보았습니다. 형제는 물론이요, 부모님도 저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여기던 때였습니다. 중학교 때 친구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제가 있던 고향이 아닌 먼 곳으로 고등학교에 다녔기 때문입니다.
이 타지에서 그래도 역시 타지로 다니는 한 친구와 친했습니다. 저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소위 일진이라는 아이로부터 그 아이가 구타를 당하고 있을 때 저 혼자 나서서 아이를 구해주었습니다. 싸워서 이긴 것은 아니지만 그냥 그렇게 마무리되었습니다. 또 수원역에서 그 친구가 깡패들에게 끌려갔을 때도 그 친구를 구하기 위해 그들이 있는 곳까지 달려갔습니다. 물론 그 친구는 가진 것을 다 빼앗기고 이미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누군가와 시비가 붙었을 때 누구도 저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그 친구는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고등학교는 결국 대학을 들어가기 위해 모인 학생들의 집단이지 가족과 같은 끈끈한 우애를 발견하기는 힘든 곳이었습니다. 저는 결국 세상에 혼자라고 느꼈습니다.
이렇게 ‘외롭다, 외롭다.’라고 느낄 때 한 개신교 다니는 친구가 “너 성당 다니잖아. 예수님이 함께 계시는데, 왜 외로워?”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걸 누가 모르냐?”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그 말이 늘 머릿속에 맴돌았습니다.
저는 학교에 등하교하기 위해 한 시간 정도 자전거를 타고 시골길을 다녀야 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하고 있을 때 시원한 바람 속에서 “내가 너와 함께 있다.”라는 느낌과 함께 그분의 숨결이 느껴졌습니다. 그 이후로는 외로움이라는 것은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주위에 친구들이 엄청 많아지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외로움을 느끼니까 친구가 없었던 것이고, 고독한 나만의 방이 생기니까 친구들이 많이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외로움이나 고독은 결국 누군가와 함께 있으려는 마음입니다. 외로움은 세상 사람들과 함께 있으려는 마음이고 고독은 절대적인 분과 함께 있으려는 마음입니다. 외로움은 도시에서 느끼고 고독은 광야에서 느낍니다. 외로움은 타인을 바라는 마음에서 오는 불만족이고 고독은 절대자를 만나기 위해 내가 적극적으로 머무르려는 골방입니다.
요셉 성인이나 예수님은 이 고독의 힘으로 십자가를 지고 의로움의 길을 가셨습니다. 요셉 성인이 자신과 약혼한 여인이 타지에 갔다가 임신하고 돌아왔을 때 그 마음이 어땠겠습니까? 만약 요셉 성인에게 고독의 골방이 없었다면 용서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미워하면서, 그녀에게 돌을 던지면서도 그녀와 함께 있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사실 외로운 사람이 용서할 수 없는 이유는 미워하면서라도 그 사람을 자기 머리에 잡아놓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고독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은 그 골방이 있다는 이유로 미운 사람을 놓아줄 수 있습니다. 그 골방 안에서 운이 좋으면 절대자가 보낸 천사를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독을 즐기십시오. 이것이 ‘적극적 고독’입니다. 이 노력이 ‘광야’로 나오는 삶이고 ‘십자가의 길’입니다. 혼자 산을 올라도 좋고, 여행해도 좋고, 책을 읽어도 좋습니다.
저도 신학생 때 무작정 혼자 일주일간 여행한 적이 있습니다. 전혀 외롭지 않았습니다. 특별히 하느님을 만났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사람들과 함께 머물며 느끼는 소외감 같은 것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가족, 친구, 공동체로부터 소외당해도 괜찮은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고독도 나쁘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재수가 좋으면 천사도 만날 수 있습니다. 세상으로부터의 자유는 고독을 즐길 줄 알 때 시작되고 적극적으로 즐길 줄 알게 된다면 굳이 미움을 통해 세상 사람들을 내 안에 잡아놓을 필요까지도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의로울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마도 사순을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 알려주시는 요셉 성인의 선물일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이웃 본당 신부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주중에 장례미사가 4번 있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아침미사를 대신하겠다고 했습니다. 신부님께서도 고마워하였습니다. 아침미사를 하면서 저도 기분이 좋았습니다. 돌아보니 많은 분들이 제게 도움을 주고 있었습니다. 요셉형제님 부부가 매주 부르클린 성당까지 운전해 주십니다. 덕분에 6개월 넘게 편하게 다니고 있습니다. 지난달부터는 6주 동안 부르클린 성당에서 롱아일랜드 성당까지 저를 데려다 주십니다. 덕분에 시간에 쫓기지 않고, 편안하게 주일 미사를 2번 할 수 있었습니다. 롱아일랜드 성당 미사가 끝나면 요한형제님 부부가 신문사까지 데려다 주십니다. 세상에는 이렇게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분들이 있습니다. 밤하늘은 별들이 있기에 아름다운 것처럼, 세상은 아름다운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신학교 다닐 때입니다. 연극 반에서 3년 동안 함께 했습니다. 주인공은 거의 하지 못했고, 단역을 하거나, 뒤에서 도와주는 일을 했습니다. 연극에 필요한 의상을 구하러 다니기도 했고, 효과음에 필요한 소리를 구하러 다니기도 했습니다. 한편의 작품이 무대에 오르기까지 뒤에서 도와주는 일도 많았습니다. 무대를 만들고, 조명을 준비해야 합니다. 연습하는 동료들을 위해서 간식을 사오기도 했습니다. ‘데미안, 결혼, 크리스티나 여왕’이 무대에 올랐습니다. 아름다운 꽃이 피기위해서는 어두운 땅 속에서 양분을 찾아 올리는 뿌리가 있어야 합니다. 멋진 그림이 전시되기 위해서는 벽에 못이 있어야 합니다. 주변을 보면 뿌리와 같은 분이 있습니다. 그림을 빛내주는 못과 같은 분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요셉성인은 뿌리와 같은 분이셨습니다. 못과 같은 분이셨습니다. 성모님과 예수님이 드러날 수 있도록 묵묵히 뒤에서 도와주었습니다. 요셉 성인은 상식적인 사람이었고, 의로운 사람이었고, 법대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정도만 살아도 주위로부터 존경을 받고,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마치 운전을 한다면 준법운전은 물론 안전운전까지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보면 요셉은 이제 한 차원 더 높은 삶을 살게 됩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비록 자존심이 상하고, 이해 할 수 없을지라도 하느님의 뜻이라면 순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요셉 성인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 수는 없지만 그분께 사랑을 드리고, 그분을 한국 교회의 공동 수호자로 모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사는 사람에게 ‘시련은 있어도 절망은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구약의 요셉은 형들이 자신을 팔아 이집트로 보낸 것도 하느님의 뜻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욥은 재물, 건강, 자녀들을 잃어버린 것도 하느님의 뜻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방인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고, 여인의 딸을 치유시켜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하느님은 우리가 어떤 신분으로 살았는지, 어떤 피부색으로 살았는지, 어떤 성별로 살았는지, 얼마나 큰 업적을 쌓았는지를 가지고 판단하지는 않으실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판단하신다면 그것은 우리가 얼마나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충실하게 살았는지 일 것입니다. 그런 기준이라면 요셉 성인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 요셉 성인의 축일을 지내면서 모든 것을 마음에 품고, 하느님의 뜻대로 살았던 요셉성인을 생각합니다. 요셉 성인이 가졌던 ‘영성’을 배운다면 우리들은 다가오는 도전을 이겨내고, 참된 기쁨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요셉은 마리아가 같이 살기 전에 잉태한 사실이 드러나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지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마리아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했다는 말을 전해 듣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다고 전합니다. 사실 우리가 '의롭다'고 하는 그 기준이 무엇인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는 법치주의 국가에서 살아가면서 법을 잘 지키는 사람이 의롭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오늘 복음에 나오는 요셉은 그러한 측면에서 볼 때 의롭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요셉은 혼인 전에 잉태한 사실이 드러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경우에는 세상의 법보다도 먼저 하느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아주 중요한 신앙의 가르침을 얻게 됩니다. 그렇다고 법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의로움이란 단순히 법을 잘 지키는 삶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하느님의 뜻을 따를 때 우리는 그 하느님의 영을 통해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셉은 그렇게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였고 성가정의 가장으로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또한 요셉의 그 신앙을 본받아 하느님 보시기에 진정 의로운 사람으로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갈 수 있기를 함께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마리아를 구해줄 사람은 약혼한 요셉뿐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처녀가 아이를 가지면 동네 어른들이 돌로 때려서 죽이던 때였습니다.
동네에서 죽였는데 마리아를 구해줄 사람은 약혼한 요셉뿐이었습니다.
마리아도 요셉도 구세주를 기다리던 중 천사가 전한 말대로 했습니다.
구약성경은 하느님께서 직접 짜신 인류구원 계획의 대본시작이었고요.
신약성경은 하느님말씀 육화(肉化)로 요셉과 마리아 아들 예수님 이죠.
인류구원계획 첫단추에 꼭 필요한 아버지와 어머니의 역할이었습니다.
하느님이 선택하실만한 두 인물의 특징은 겸손 가난 희생이라 봅니다.
요셉의 겸손은 과묵과 헌신이라고 성경에서 여실히 느낄 수 있습니다.
성 요셉 대축일에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가든파티를 하다 누군가 나에게 말했다. ‘신부님, 저 마을 가운데 큰 나무, 이름이 뭐예요?’ ‘느티나무야’ ‘참 멋있어요’ ‘동네 한가운데 있으면서 마을의 애환을 다 알고 있는 나무야’
주님 강생에서 하느님께 성 요셉에게 특별한 은사를 베풀어 주셨다. 성모님의 배필이요, 보호자요 예수님의 양부로 인간 구원을 위한 적극적 동반자가 되셨다. 성 요셉은 하느님의 사람으로 불림을 받아 한 가정의 가장이요 든든한 쉼터가 되신 분이시다. 성 요셉은 성모님의 배필이며 예수님의 구원사업에 길잡이가 되셨다. 성 요셉은 의로우신 분으로 하느님의 분부를 받잡고 성실히 하느님의 약속에 충실하고 임무를 완벽하게 이루신 분이다. 이로써 성 요셉은 성가정의 모범이 되셨다.
성 요셉의 이름을 들을 때면 나는 언제나 신망애 삼덕을 갖추신 분으로 든든함의 신뢰가 가득히 묻어났다. 생애동안 묵묵히 DIY의 장인으로 일하시며 자신을 하느님께 맡겨드리며 온전히 성가정을 위해 고난 가운데 행복을 사신 분이시다. 생애 전반에 걸쳐 드러나야 할 분이 전혀 드러나지 않으신 분, 성경에서 고작 인간 구원을 위한 응답, 성모님과 아기 예수님을 이끌고 올랐던 이집트로의 피난길, 예수님의 성장을 도와 목수로 사셨다는 것 외에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그래서 더 존경스럽다.
농촌마을 한 동네 가운데 성성한 나무 한그루, 여름엔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고는 그 아래 고달픈 동네의 모두를 쉬게하고 품어주는 느티나무를 닮으신 분이셨다. 성 요셉을 떠올리면 마을을 지키며 언제나 침묵 속에 생명이 보호되고 그래서 수호성인으로 사람이 풍성하고 평화롭다. 생명이 보호를 받아 무성하고 은혜롭다. 느티나무처럼 그런 분, 나도 이런 분을 닮고 싶다.
성 요셉이시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요셉의 믿음>
송영진 모세 신부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2021. 3. 19. 금)(마태 1,16.18-21.24ㄱ)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마태 1,16).”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마태 1,18-21)”
1)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잉태 사실이 저절로 드러난 것은 아니고, 마리아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요셉에게 바로 알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잉태 사실만 말한 것이 아니라, 천사가 나타나서 한 말들과 자신이 기꺼이 응답한 일을(루카 1,26-38) 모두 말했을 것입니다.
요셉에게 성령 잉태 사실을 전할 때 마리아의 태도는 어떠했을까?
두려워하고 걱정하는 모습이었을까?
그것은 아니었을 것이고, ‘기쁨’과 ‘확신’에 가득 찬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엘리사벳을 만났을 때,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46-48).” 라고 하느님을 찬미했습니다.
요셉에게 성령 잉태 사실을 전할 때에도 똑같은 태도와 모습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1) 이 말은, 요셉이 마리아를 믿었고, 마리아의 말을 믿었음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동시에 ‘성령 잉태’를 이해하지는 못했음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요셉이 마리아를 믿고 마리아의 말을 믿은 것은, 마리아가 어떤 사람인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리아는 거짓말을 절대로 하지 않는 사람이고, 언제나 항상 하느님과 함께 사는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성령 잉태’도 믿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일에 마리아가 단 한 번이라도 거짓말을 한 적이 있었다면, 마리아를 전적으로 믿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고, ‘성령 잉태’ 라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들었을 때,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정신 나간 소리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 5,37).”
마리아는 언제나 진실만을 말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성령 잉태 사실을 요셉에게 전할 때에 자신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따로 맹세 같은 것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2) 여기서 ‘의로운 사람’이라는 말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면서 사는 사람’으로 해석됩니다. (유대교에서 원래 이 말은, ‘율법대로 사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요셉은 ‘성령 잉태’를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마리아에게 일어난 일이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몰랐고, 어떻게 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에 협력하는 것인지를 아직은 알 수 없었습니다.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라는 말은, 요셉이 마리아와 아기를 어떻게든 보호하려고 애썼음을 나타냅니다.(마리아를 믿었으니까 보호하려고 애쓴 것입니다.)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라는 말은, 마리아를 버리려고 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리아가 잉태했음을 요셉이 믿은 것은, 아기의 아버지가 하느님이라는 것을 믿었다는 뜻인데, 그렇다면 요셉은 자기는 감히 아기의 아버지가 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파혼하기로 작정한 일을, 하느님을 위해서 아버지의 위치에서 스스로 물러나려고 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파혼을 ‘남모르게’ 하려고 한 것도 마리아와 아기를 보호하기 위한 일입니다. 세상 사람들 모르게 파혼하면, 사람들은 마리아가 낳은 아기의 아버지가 요셉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마리아와 아기에게는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남모르게’ 파혼한 다음의 일은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파혼 사실을 감추려면 부부 행세를 해야 하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을 못해서 많이 망설였을 것이고, 그래서 계속 기도하면서 주님의 뜻을 물었을 것입니다.
3)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난 일은 요셉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생각됩니다. 또는 마리아가 예수님 잉태와 탄생 예고를 들은 것과 같은 일, 즉 요셉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천사가 한 말을 상황에 맞게, “마리아의 잉태는 마리아가 말한 대로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고, 아기의 아버지는 하느님이시지만,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네가 아기의 아버지 역할을 해야 한다.”로 재구성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의 아버지 역할을 해야 된다는 것은 요셉에게는 굉장히 두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두려워하지 말고’ 라는 말에는 ‘주님께서 지켜 주시니’ 라는 말이 들어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모든 일을 요셉에게만 떠맡기는 말이 아니라, “주님께서 지켜 주시니 두려워하지 말고...” 라는 위로와 격려의 뜻이 들어 있는 말로 해석된다는 것입니다.
4)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예수’(하느님은 구원이시다.) 라는 이름은 하느님께서 선택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들 앞에서 공적으로 아기의 이름을 짓는 일은 요셉에게 맡기셨습니다. 그것은 요셉이 아기의 아버지로서 권한을 행사하는 일입니다. 요셉은 자신에게 내린 계시를 믿었고, 그 계시가 ‘부르심’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하고 순종했습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믿음의 사람들이 대거 등장합니다. 복음의 요셉과 마리아, 제1독서의 다윗, 그리고 제2독서의 아브라함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마태 1,20)
약혼녀 마리아가 혼인 전에 아기를 잉태한 사실을 알고 그녀와 파혼하려던 요셉에게 주님의 천사가 꿈에 나타나 이야기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은 잉태"라는 말의 뜻을 요셉이 얼마나 이해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가 나고 자란 중동 문화 안에서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을 테니까요.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마태 1,24)
성경은 천사의 말을 그대로 따른 요셉의 모습을 군더더기없이 간결하게 전합니다. 그에게 왜 의문이나 두려움이 없었겠습니까마는, 그런 인간적인 의혹들보다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구세주 아기에 대한 희망과 하느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 더 컸던 까닭일 겁니다.
제1독서에서는 다윗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 왕국을 번영하게 만들 후손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너의 집안과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지고,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2사무 7,16)
이렇게 나탄을 통해 전해진 하느님의 말씀은 단지 다윗의 아들 솔로몬까지의 계보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두 번이나 "영원히"라는 수식어를 통해 이 나라가 단지 사람의 족보로만 계승되는 인간적 왕국이 아님을 드러냅니다. 우리가 바로 혈통과 민족을 넘어서 이어진 영원한 믿음의 후손이라는 증거니까요.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믿음으로 후손을 얻은 성조 아브라함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약속은 믿음에 따라 이루어지고 은총으로 주어집니다."(로마 4,16)
아브라함은 믿었고 따랐습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데에 늙은 나이나 떠돌이 유목민 처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지요.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 말씀에 따라 ... 믿었습니다."(로마 4,18)
눈에 보이는 결과를 기대하는 것을 희망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희망은 현재 상태에서는 보이지 않는 실체를 믿고 바라는 투신입니다. 그래서 희망이 없어도 희망한다는 말을 할 수 있지요. 그리고 희망의 근거는 망상이 아니라 믿음이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요셉 성인의 믿음과 순종, 겸손과 인내, 충실함을 기념하는 오늘은, 역사에 족적을 남긴 무수한 믿음의 조상들을 통해 우리에게까지 전해진 구원의 기쁜 소식을 기억하며 우리 각자의 삶 안에서 생생히 되살리는 날입니다.
저마다의 녹록치 않은 인생 여정 안에서, 믿음 말고는 도저히 구원을 희망할 수 없는 현실을 맞닥뜨릴 때도 있습니다. 그럴수록, 어렵지만 더욱 단단히 믿음의 끈을 조이고 '아버지의 마음으로(Patris Corde)' 나아가야 하지요. 아브라함처럼, 다윗처럼, 요셉처럼 말입니다. 미지의 불확실성을 끌어안고 역설 가득한 믿음의 모험에 담대히 뛰어든 여러분께 주님의 말씀을 축복으로 전합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영성체송)
성 요셉,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잉태라는 순전한 신비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본문이 말하는 것 이상을 파고들려 하지 마십시오. 본문이 꾸멈없이 이야기히는 것 이상을 따지고 들지 마십시오. ‘그런데 성령께서는 동정녀에게서 이 일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셨나?’하고 묻지 마십시오. 사람이 생겨나게 하는 자연의 작용조차도 완전하게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이루시는 기적의 상세한 과정을 우리가 무슨 수로 그려 낼 수 있겠습니까? 복음사가는 자신이 이야기하는 것 이상을 우리가 계속 파고들어 작가의 작업을 가로막고 헤살 놓지 않도록, 그 기적을 이루신 분이 누구신지 알려주었습니다. 그러고는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않습니다. 이는 ‘나는 그 일이 성령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밖에 모른다’는 뜻입니다.
높은 데서 비롯한 ‘나심’의 기적을 파고들려는 사람들은 부끄러워하십시오! 이 탄생은 결코 설명할 수 없으나 무수한 중인이 있으며, 오랜 옛날부터 인간의 손이 출산을 도운 진실한 탄생으로 선포되어 왔으니 말입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나심’을 호기심으로 캐고 드는 사람들은 대체 얼마나 심한 광기에 빠진 것입니까?
가브리엘도 마태오도 그 ‘나심’이 성령으로 말미암은 일이라는 사실 이상은 말할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성령으로 말미암았는가? 어떤 식으로 말인가? 가브리엘도 마태오도 설명하지 않았고, 이는 설명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작용이라는 말을 듣는 것만으로 여러분이 이 신비를 풀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 사실을 알았다고 해도 우리는 여전히 많은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무한하신 분께서 어떻게 태 안에 계실 수 있었나? 어떻게 만물을 품으신 분께서 태어나지 않은 상태로 한 여인의 태 안에 계실 수 있었는가? 동정녀께서 출산을 하시고서도 어떻게 계속 동정녀이실 수 있었나?
성령께서 그분 몸의 성전을 어떻게 지으셨는지 제게 한 번 설명해 보십시오.
묵묵한 성인
김효석 요셉 신부님
요셉 성인을 생각할 때면 ‘묵묵함’이라는 존경의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묵묵하다’는 말에서 ‘묵묵默默’은 한자인데 ‘침묵 묵’자를 두 번 붙여 쓴 것입니다. 말뜻만 보자면 침묵하고 또 침묵한다는 것입니다. 성인께서는 성모님의 잉태 사실을 알았을 때, 성모님의 흠을 마음에 간직하시고 침묵하셨습니다. 인간적인 마음으로, 성인께서는 커다란 배신감과 실망감, 분노와 격정에 휩싸이셨을 것을 우리는 압니다. 자신을 배신한 정혼자를 혹여 용서할 수 있을는지 몰라도 다시 그녀를 받아들이는 일은 평범한 사람의 일이 아닙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아들 예수님을 잃어버렸을 때 성인은 아버지가 자녀를 돌보지 못한 부끄러움 앞에서도 침묵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다시 찾은 기쁨보다는 당신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얼마나 당혹감을 느끼셨는지 짐작도 할 수 없습니다. 그분은 성모님의 허물 앞에 침묵했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큰 당혹감 앞에 침묵했습니다. 이 침묵은 단순한 조용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침묵은 잘 참아내는 인내심만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인의 침묵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내가 다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겸손의 응답이며 내 일을 하느님께서 이루어 가시도록 내맡기는 적극적인 투신입니다.
참 크고 깊고 고요한 분; 성 요셉 -정주, 경청, 순종-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은 우리 수도원의 주보 성인인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해마다 광야의 사순시기에 맞이하는 성 요셉 대축일이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참 고맙고 반갑습니다. 우리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수도자들은 참 행복합니다. 참 좋은 배경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눈에 보이는 불암산 배경이 자랑스럽습니다. 흡사 불암산의 두 봉우리가 우리 수도원의 두 수호성인인 성 요셉과 성 베네딕도 배경을 상징하는 듯 합니다. 마치 성 요셉이 형님같고 성 베네딕도가 아우같습니다. 아주 예전 어스름한 저녁에 불암산을 보며 써놨던 시가 생각납니다.
-참
크다
깊다
고요하다
저녁 불암산-
얼마전 쓴 글중 서두말이 생각납니다. “성 베네딕도 규칙서는 고전이다. 규칙서의 저자인 성 베네딕도 역시 고전같은 분이다. 아무리 세월 흘러도 ‘늘 옛스럽고, 늘 새로운(ever old, ever new)’ 고전같은 분이다.” 어찌 성 베네딕도뿐이겠습니까! 성 요셉 역시 늘 옛스럽고 늘 새로운 고전같은 분입니다. 그러고 보니 모레 3월21일은 사부 성 베네딕도 별세 축일입니다만 주일이라 다음 월요일인 3월22일로 이동하여 축일로 지내게 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성 요셉에 대한 애모愛慕의 정은 참 각별합니다. 아니 성 요셉의 부성을 흠모했던 역대 교황님들의 공통적 특징입니다. 교황님은 성 요셉의 보편교회 수호자 선포 150주년을 맞아 지난해 12월8일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부터 올해 12월8일 까지 성 요셉의 해로 정해 기념하도록 했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으로(Patris Corde)’ 라는 교황 교서의 내용이 참 풍부하고 깊고 아름다워 참 좋은 영적 묵상 자료가 됩니다. 여기에서 밝힌 성 요셉의 인품이 정말 매력적이요 닮고 싶은 의욕이 샘솟습니다. 그대로 하느님 아버지의 부성을 대변합니다.
“1.사랑받는 아버지, 2.온유하고 다정한 아버지, 3.순종하는 아버지, 4.수용하는 아버지, 5.창의적 용기를 지닌 아버지, 6.노동하는 아버지, 7.그림자 속에 있는 배경같은 아버지”
일곱의 특성으로 요약한 성 요셉의 고전같은 인품입니다. 또 어제 교황님께서 사제학생들에게 주신 메시지도 깊이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사목자들의 모델인 성 요셉은 ‘환영하는 아버지’, ‘보호자 아버지’, ‘꿈꾸는 사람’이었다.”로 요약했습니다. 주목되는 말마디가 ‘꿈꾸는 사람(Dreamer)’, 성 요셉입니다. 그대로 창세기의 꿈쟁이 요셉이 연상되었고, 평생 하느님 나라를 꿈꾸며 살았던 꿈의 사람, 하느님 아버지의 외아드님 예수님이 연상되었습니다.
분명 양부인 아버지 성 요셉의 꿈도 보고 배운 예수님이셨을 것입니다. 참으로 영원히 하느님을. 하느님 나라를 꿈꾸는 사람으로 살아갈 때 영원한 청춘에 늘 옛스럽고 늘 새로운 고전같은 삶이겠습니다. 흡사 강론이 성 요셉 예찬禮讚처럼 되었습니다. 성 요셉의 특징을 셋으로 나눠 살펴 봅니다. 성 베네딕도에게도 그대로 해당되겠습니다.
첫째, 성 요셉은 ‘정주定住의 사람’이었습니다.
한결같은 믿음은, 진실함은 정주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늘 거기 그 자리에 정주의 산처럼, 그러나 내적으로는 끊임없이 하느님 향해 맑게 흐르는 강처럼 사셨던 정주의 사람이자 신망애信望愛중 ‘신信의 사람’, 진선미眞善美중 ‘진眞의 사람’, 참 큰 산같은 성 요셉이었습니다. ‘산은 높고 바다는 깊다’는 뜻의 ‘산숭해심(山崇海深)’의 성 요셉이었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다음 대목이 이를 입증합니다.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싶지 않았으므로, 남 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마리아에 대한 요셉의 배려와 존중, 연민의 사랑이 정주의 큰 산을 연상케 합니다. 참으로 정주의 모범, 신信의 모범, 진眞의 모범이되는 큰 산 같은 성 요셉입니다.
둘째, 성 요셉은 ‘경청(傾聽, 敬聽)의 사람’이었습니다.
참으로 귀기울여 듣는, 공경하는 마음으로 듣는 경청의 사람이었습니다. 대화와 기도의 기초가 되는 경청의 자세입니다. 잘 경청하기 위한 침묵이요, 잘 경청해야 겸손과 순종의 덕도 뒤따릅니다. 보십시오. 경청의 사람 요셉에게 하느님은 속내를 다 드러내 보이시며 요셉과 꿈중에 소통하지 않습니까! 얼마나 요셉을 신뢰했던 하느님이신지 깨닫습니다.
불암산처럼 깊은 경청의 사람 성 요셉은 진선미중 두 번째 참 좋은 ‘선善의 사람’이자, 신망애중 두 번 째 ‘망望의 사람’ 즉 희망의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좋은, 희망의 사람만이 경청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청과 희망의 참 좋은 모습은 그대로 제2독서의 아브라함을 닮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믿는 분, 곧 죽은 이들을 다시 살리시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도록 불러내시는 하느님 앞에서 우리 모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었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모습이 참 아름답지 않습니까!
흡사 성 요셉의 영원한 멘토 아브라함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브라함처럼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하느님을 믿었던 요셉이요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듯이 하느님께서는 분명 깊고 깊은 경청의 사람, 성 요셉의 믿음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을 것입니다.
셋째, 성 요셉은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순종할 때 산같은 내적 고요입니다. 침묵, 경청, 겸손은 마침내 순종의 열매로 드러납니다. 억지로가 아닌 자발적 사랑과 신뢰의 순종입니다. 이런 순종은 그대로 영성의 잣대가 됩니다. 요셉의 지체없는 순종은 얼마나 사랑스럽고 아름답습니까!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복음의 마지막 말씀이 요셉의 지체없는 순종을 간명하게 요약합니다. 참으로 요셉은 순종의 사람이자 신망애중 애의 사람, 진선미중 미의 사람, 즉 사랑과 아름다움의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사실 사랑하면 아름다워지기 마련입니다.
흡사 제1독서 사무엘하권의 예언이 성 요셉과 예수님은 물론 주님을 믿고 희망하며 사랑하는 우리 모두를 두고 하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너의 집안과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지고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결론은 분명합니다. 불암산처럼 우리의 참 좋은 배경이 되어 주시는 크고 깊고 고요한 의롭기 한이 없는 성 요셉은 정주의 사람, 경청의 사람, 순종의 사람이었고, 신망애의 사람, 진선미의 사람이었음을 봅니다.
저절로 참 좋은 선물인 성 요셉을 우리 교회에, 우리 수도원에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 가득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평생 성 요셉의 덕을 사랑하고 공부하며 닮도록 도와주십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구세주의 보호자시며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이시여,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외아드님을 맡기셨고,
마리아께서는 당신을 신뢰하셨으며,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보호 속에서 성장하셨나이다.
복되신 요셉이시여,
저희에게도 아버지가 되시어
삶의 여정에서 저희를 이끌어 주소서.
저희를 위하여 은총과 자비와 용기를 얻어 주시고
모든 악에서 저희를 지켜주소서.” 아멘.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오늘은 성 요셉과 성녀 요셉피나 대축일입니다. 축일 맞으신 우리 안 요셉피나 수녀님과 요셉과 요셉피나 분들에게 축하드립니다. 다윗 가문의 요셉은 갈릴래아의 나자렛에서 목수로 일하는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마태 13,55; 1,19 참조). 그는 같은 나자렛에 살고 있던 마리아와 약혼하였는데, 같이 살기도 전에 마리아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잉태하십니다. 이러한 사실을 몰랐던 요셉은 파혼하기로 작정하며 고뇌하지만, 천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이로써 요셉 성인은 성가정의 수호자가 되어 예수님과 성모님을 보호하는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셨습니다. 성 요셉은 임종하는 이의 수호자이며 거룩한 교회의 보호자이십니다.
오늘 복음에는 예수님의 탄생 사화가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마태 1,18) 복음사가는 그렇게 기록했지만, 예수님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했다는 사실을 당대 사람들은 정확히 알지 못했던 것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요셉이 마리아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듣기는 하였지만, 천사가 꿈에 나타나 그 연유를 밝히기 전까지는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것으로 나오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19절) 마리아를 정배로 여기고, 한 평생 마리아와 함께 일생을 보내기로 결심한 요셉이 마리아가 자신과의 합방도 없었는데 임신하였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 그 배신감과 분노로 몸을 떨고 잠을 이루지 못했으리라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와 함께 할 미래의 꿈이 산산조각 난 상황에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을 것입니다. 그 갈등의 굴곡 속에서 요셉은 혼전 임신한 마리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신이 율법을 거스르면서까지 받아들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율법에 따라 상간한 여인에게 내리는 형벌인 돌로 맞아 죽게까지는 않겠다고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요셉은 이렇게 의롭고 정이 많은 착하고 어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20-23절) 천사의 등장으로 사생아가 될 뻔한 예수 아기는 의롭고 듬직한 요셉을 아버지를 맞게 됩니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24절) 요셉은 이제 단순히 착하고 어진 사람에서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주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으로 변모합니다. 그렇게 변모한 요셉은 인류 구원을 위한 예수 아기의 탄생에 양부로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새로운 인류 구원이라는 역사의 문을 열게 되고, 예수 마리아 요셉 성가정의 가장으로서 어린 예수의 보호자이자 스승으로 예수를 키워내 우리에게 구세주로 내주십니다.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 겪는 일과 상황 속에서 주님 성령의 해석과 가르침을 찾아낼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그리고 내 인간적인 해석과 처세술을 넘어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나아가기로 합시다.
<결단>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일이기에
적어도 나에게는
없길 바라는 일이기에
선뜻 받아들이기
너무나도 어렵지만
다른 누가 아니라
바로 나를 통하여
이루어져야 할
일이라고 하시니
두려움 떨쳐내고
힘 모아 정성껏 품는다
진리에 순종하는 아버지 신 요셉< 마태1/16-21.24.>3/19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요셉은 의인으로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인간적으로 넘어갈 수 없는 일도 따르고 고통의 길을 찾아 아기와 어머니를 살리는 일을 하셨습니다. 성모 마리아와 예수님 에게도 고마운 아버지 었습니다. 누구나 아버지 되려면 요셉과 같이 진리에 순종하는 아버지가 되여야 합니다. 결격 사유가 있어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고향에 가야하는 길에 임신날인대도 위험을 무릅쓰고 가시고 거처할 ᄇᆞ이 없어도 살망하지 않고 마구간이라도 구해 내고 먹고 마시는 것 준비하시고 헤로데의 푹정을 미리알고 에짚트 까지 피난길 떠나고 30년 동안 목수일로 생활의 기반을 닦으며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신분이십니다.
누구나 이런 아버지의 소명을 완수하시며 가정의 기정의 기둥으로 굳게 서 있어야 합니다.
저의 아버지는 신앙인이 아니시고 외인이었습니다. 신앙의 바대 입장에 계셨지만 결과적으로 저와 동생수녀와 가정 안에 신앙를지키고 생명의 위험에서 보호자 되셨습니다.
원산에서 자리잡고 잘살고 있었지만 해방 되면서 북쪽에서 장사를 핑계삼아 38선을 넘나 들면서 나는 김일성이 이끄는 공산당이 싫다 하시며 1947년 남쪽으로 넘어갈 계확을 면밀이 세우시고 그 위험한 38선을 소달구지 타고 몇십리 걸어서 100리를 산넘어 임징강을 넘어 추운겨울에 동두천에 도착 차를 타고 인천 까지 도착한일은 참으로 저의 60년 사제 생활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판단이 아니였으면 북쪽에서 아마 벌써 죽었을것이고 살아도 더 고통에 시달리지 않았을 까 생각하면 아버지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철원에서 동두천 까지 길은 우리를 앞세우고 볼일 있다고 하여 뒤에 오신 아버지가 따라오시지 않아 보안대에 잡혓나 하고 나는 찾아 나선 것이 길을 잃고 금산쪽으로 가다가 그기아이라 하여 또 다시 돌아오면서 다시 아버지를가 저르찾아 오시는 갈에 서로 만나서 그때 안도와 기쁨은 나는 고아기 되지않고 아버지는 귀한 장남을 찾았고 조금 요셉성인과 예수님의 일정과 일맥 상통하는 일이 있어 아버지의 대한 생각이 더 나며 아버지 감사합니다. 꿈에 나타니시면 진로소주 받아 들이 겠습니다. 꿈이 아버지 나타나면 저는 술을 받아들이는 꿈을 자주 꿈니다.
만일 아버지가 판단을 잘 못하여 좋은 직장의 장으로 여기가 살기 좋다 하여 원산에 살았으면 어찌 되었을 가? 주님을 모시고 요셉성인이 에짚트로 가시지 않았으면 주님은 어찌 되었을가? 모두가 하느님의 진리를 따라 사시는 요셉 아버지의 길이였습니다.
철원에서 걸어가는 갈을 잃어버리고 길에서 해매일 때 아버지가 저를 찾아오시지 않았으면 나는 고아가 되었듯이 잃어버린 예수님을 3일 이나 찾아 해배지 않으셨으면 예수님은 어찌 되었을까? 이모든 것을 진리를 찾는 아니 참을 찾는 마음입니다. 나를찾지 않고 너를 찾는 마음이 진리를 찾아 얻게 되는 참 길입니다. 어떤 고난에도 쥬니ᅟᅡᆷ을 찾아 나서는 삶을 살도록 기도합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마태1.19)
이민락 라우렌시오 신부님
+찬미예수님
3월은 성 요셉 성월이고 오늘은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사람을 한마디로 표현하는 것이 쉽지 않지만 요셉 성인을 가장 잘드러내는 말은 “의로운 사람”입니다.
의로운 사람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성경에 의로운 사람이라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첫째, 노아입니다. “노아의 역사는 이러하다. 노아는 당대에 의롭고 흠 없는 사람이었다. 노아는 하느님과 함께 살아갔다.”(창세6,9)
둘째,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창세15,6)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는 약속은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얻은 의로움을 통해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주어졌습니다.”(로마4,13)
셋째, 욥입니다. “우츠라는 땅에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욥이었다. 그 사람은 흠 없고 올곧으며 하느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이였다.”(욥1,1)
성경은 하느님을 믿고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고 하느님의 뜻을 찾는 사람을 의로운 사람이라 칭합니다. 의로운 요셉 성인 역시 그런 분이십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마태1,19) 요셉은 마리아의 일로 괴로웠지만 천사의 말을 듣자 그대로 실행을 합니다.
신앙인은 의로운 사람입니다. 의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고 악을 멀리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이는 의로운 사람입니다. 의로움은 하느님 선물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를 통해 말합니다. “사실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 정녕 하느님은 한 분이십니다. 그분께서 할례 받은 이들도 믿음으로 의롭게 하시고, 할례 받지 않은 이들도 믿음을 통하여 의롭게 해 주실 것입니다”(로마3,28.30)
믿어 의로움을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찾아 지금을 넘어 영원을 살게 됩니다.
정현종 시인의 시“시선을 기리는 노래”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멀리 있는 것이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가까이 있는 것과 살 수 있겠는가.
바라보는 저 너머가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여기서 살 수 있겠는가.
멀리서 우리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공간이여,
시선은 멀수록 좋아해 날개를 달고,
시선에는 실은 끝이 없으며,
시선은 항상 무한 속에 있는 것이거니.
여기 있으면서 항상 다른 데에도 있을 수 있게 하는 시선이여.
움직이지 않지만 항상 떠날 수 있게 하는 시선이여.
오 눈보다 앞서 있는
먼 공간의 시원함이여.
그러나 시선 속에는 이미
무한이 들어 있는 것이어니.”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들은 눈을 들어 영원을 바라보며 삽니다. 영원을 사는 신앙인은 지금 여기의 삶 또한 주님이 주신 의로움의 선물로 의롭게 살아갑니다. 아멘.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함승수 신부님
'성 요셉 대축일'인 오늘 복음은 요셉의 '의로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자신과 약혼한 처녀인 마리아가 결혼 전에 잉태한 사실을 알게 된 요셉이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마음 먹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율법은 여성이 지켜야 할 정결을 엄격하게 강조했습니다. 신명기 법전을 보면 이런 내용이 있을 정도였지요.
“젊은 여자의 처녀성이 증명되지 않으면, 그 여자를 제 아버지의 집 대문으로 끌어내어, 그 성읍의 남자들이 그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여야 한다.”(신명22,20-21)
'법대로' 한다면 요셉은 마리아를 고소하여 처벌할 수도 있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마리아의 잘못이 명백했기에 그가 '법대로' 한다고 해도 누구도 그를 나무라지 않을 터였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자신의 기분보다는 사랑하는 사람이 처한 입장을, 그녀가 겪게 될 어려움을 먼저 생각하였고, 그랬기에 분노라는 감정에 휩쓸려 자신과 상대방 모두를 파멸에 빠뜨리는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 정도만 해도 커다란 결단이었고 대단한 배려였는데, 주님의 천사는 그에게 더 큰 결단을 요구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두려워하지 말라'는 권고가 다소 뜬금 없습니다. '화내지 말고'나 '미워하지 말고'가 아니라 두려워하지 말라니, 요셉이 대체 무엇을 두려워했다는 것일까요? 요셉은 단순히 마리아의 '혼전 임신'으로 인해 자기가 수치를 당하거나 불똥이 튈 것을 두려워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조상들의 전통에 따라 마리아를 아내로 삼을 권리를 지닌 '약혼자'로서 그녀와 억지로 결혼할 수도 있지만, 그것이 과연 마리아가 행복해지는 길일까를 염려한 것이겠지요. 사랑하는 그녀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배려는 마리아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도록 물러나주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인의 행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참으로 지고지순한 사랑의 모습이지요.
하지만 주님의 천사를 통해 하느님의 뜻을 전해듣고는 마음을 바꿉니다. 불확실한 것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분명해졌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이라는 감정으로 드러난 내적 갈등을 하느님의 뜻에 대한 굳은 믿음으로 이겨낸 것입니다. 우리가 요셉 성인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부르며 공경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점 때문입니다. 슬프고 괴로워서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을, 도저히 이해되지 않고 납득하기도 어려운 하느님의 뜻과 섭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즉시 실행에 옮기는 결단을 통해, 요셉은 '동정 마리아의 배필'이자 예수님의 '양부'로써 해야 할 소명에 끝까지 충실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그런 요셉의 의로움을 본받는다면 지금 이 전례적 사순시기 뿐만 아니라, 우리 삶의 사순시기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고 받아들이며 따를 수 있을 겁니다.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오늘은 성요셉 대축일입니다.
성경에서 요셉에 대한 대목은 예수님의 어린시절을 기술하는 마태오 1-2장, 루카 1-2장이 대부분입니다.
다윗가문의 후손인 요셉은 성령으로잉태된 약혼녀 마리아를 보호했을 뿐 아니라 베틀레헴에서 마리아가 아기를 낳았을 때 모자를 곁에서 지켰습니다. 헤로데 왕의 어린아이들 살해계획에서 벗어나 이집트로 모자와 함께 피신하여 생활 하였던 것입니다. 헤로데가 죽자 요셉은 나자렛으로 돌아와 성가정을 이룹니다.
예수님의 소년시절, 유월축철을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축절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들을 잃고 마리아와 함께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에서 아들을 찾었던 아버지의 역할(루카 2,48)을 충실히 했던 것입니다. 요셉은 나자렛에서 목수의 일로 성가정을 이끌어 갔던 것입니다.
고향을 찾았던 예수님을 박대할 때 사람들이 예수님을 ‘목수의 아들’(마태 13,55)로 설명하는 대목에서 그의 직업이 알려집니다. 교회는 성모님처럼 성요셉을 공경하지 않았지요. 그것은 성모님에 비해서 그 역할이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2세기 경에나 이슬람을 대적하는 십자군운동과 프란치스코를 통해 공경신심이 유지되었습니다.
15세기 식스토 4세 교황님에 의해서 성인의 축일을 전교회로 확산되었고 1870년에 비오 9세 교황님에 의해 교회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된 것입니다. 1889년 레오 13세 교황, 1955년 비오 12세 교황님에 의해 노동자의 수호성인으로, 요한 23세 교황님에 의해서 재천명되었던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무염시태의 성모님과 함께 성 요셉을 교회의 공동 수호성인으로 삼은 것입니다.
성모님의 어린시절과 더불어 요셉에 대한 이야기는 야고보 복음이라는 외경에서 더 자세하게 조명되고 있습니다. 외경 야고보 복음서는 학자들 간에 이견이 있지만 대충 기원 후 100년 경, 또는 학자들에 따라 기원 후 145년까지 편집시기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저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복음서에서 다루지 않은 성모님의 유년시절과 요셉과의 결혼에 대한 그 이전의 전승들을 바탕으로 편집한 것으로 보입니다.
야고보 복음은 정경에서 외경으로 분류되면서 서방교회에서 그다지 호응을 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기원 후 382년 ‘젤라시아누스 교령((Decretum Gelasianum)’에 의해 이 복음은 배제되기까지 한 것입니다. 그 후로 약 천 여 년 동안 야고보서의 가치가 묻혀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야고보서를 멀리하게 된 계기 중에 하나는 요셉을 평생 동정으로 초대교부들이 옹호한 데에서 비롯한 것으로 봅니다. 야고보서는 요셉이 늙은 홀아비로 등장하지요.
그러다가 1552년 프랑스 예수회원인 기욤 포세텔(Guillaume Postel 1510-1581)에 의해서 이 야고보서가 라틴어로 번역하였는데 그 때 제목을 라틴어, 'protevangelium Iacobi'했던 것입니다. 그는 당시 교회의 공용어인 라틴어 뿐 아니라 히브리어, 그리스어, 아랍어, 시리아어에 능통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희랍어로 쓰여진 이 야고보 복음서를 라틴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통해서 서방 교회에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마리아의 부모 요아킴과 안나는 자식이 없음을 한탄하며 하느님께 청원기도를 바칩니다. 그런데 천사가 나타나 하느님께서 이들의 기도를 받아들여져서 마리아를 얻게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세 살부터 성전에 살게 되고 열두 살이 되었을 때 대 사제 즈카리야는 천사의 인도를 받아 온 나라에 홀아비들이 지팡이를 들고 모이게 합니다.
그런데 요셉의 지팡이에서 비둘기가 튀어나와 그의 머리에 앉는 징표를 보고 요셉을 어린 마리아의 보호자이며 배우자로 지목합니다.(야고 8,12) 요셉은 자신이 늙고 자녀들이 이미 있는데다가 마리아는 너무 어려서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는 이유로 대사제의 제의를 거절합니다. 그러나 대사제는 표징에 따라 요셉에게 엄한 명령을 내리고 요셉은 마리아를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가 머물게 합니다.
마리아가 14세 때에 물을 길으러 갔는데 그곳에서 천사가 나타나서 마리아가 성령의 힘으로 잉태하리라고 예고합니다. 그 길로 마리아는 임신을 하지요. 몸이 점점 무거워지는 마리아는 숨길 수가 없어 친정으로 피신을 합니다. 지방에서 목수 일을 하고 돌아온 요셉은 마리아가 임신한 사실을 알고 마리아를 문책합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눈물을 펑펑 쏟으며 천사의 말대로 임신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요셉은 믿기지 않아 마리아를 버릴 궁리를 합니다.
그때에 요셉의 꿈에 천사가 나타나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하였고 그 아들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한 분이니 예수라고 불릴 것을 예고합니다. (야고 10,18-19) 마태오는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마태 1,24)라고 전하는데 야고보서에서는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하느님을 찬미하고 동정녀를 보호하는 것으로 표현합니다.(야고 10,20)
그럴 즈음에 율법학자 한나스가 요셉을 방문했다가 마리아가 임신한 사실을 알고 요셉과 마리아를 고발하여 재판에 부칩니다. 극구 자신의 죄를 부인하고 사제는 요셉에게 극약을 내립니다. 요셉은 극약을 먹고 산으로 들어가는데 아무런 해를 입지 않고 돌아옵니다. 그제야 제사장은 요셉이 죄가 없음을 선언합니다.
유다인들은 모두 세금을 바쳐야 한다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칙령에 따라 요셉은 유다지파의 본고장인 베틀레헴으로 자기 아들, 요셉과 시몬을 데리고 마리아와 함께 갑니다. 그리고 마리아를 아내가 아니기 때문에 자신의 자녀와 함께 딸로 세금을 내려고 마음을 먹습니다.
그들이 베틀레헴에 도착하고 바로 마리아는 산기가 있어 하는 수 없이 부근의 동굴로 들어갑니다.요셉은 그곳에 마리아와 자신의 아들들을 두고 베틀레헴으로 히브리 산파를 찾아 나섭니다. 요셉은 드디어 산파를 만나 말합니다. “산모는 주님의 집에 있는 지성소에서 교육받은 마리아요. 내가 제비에 뽑혔지만 마리아는 내 아내가 아니고, 성령으로 잉태했소.”(14,6)
요셉은 산파와 함께 동굴로 들어서는데 찬란한 구름이 그 안을 덮는 것이었습니다. 산파가 그 광경을 보고 “내 눈이 놀라운 일들을 보았고, 구원이 이스라엘에게 이르렀으니, 오늘 내 혼이 크게 축복을 받았어요.”(14,10)라고 외칩니다.
마태오와 루카 복음에서 비록 요셉의 기록이 많지는 않지만, 또 야고보 복음에서 단편적으로 전해지지만 요셉에 대한 공통적인 것은 마리아와 예수님의 보호자이며 나자렛에서 성가정의 충실한 가장이었다는 점입니다.
교회는 성모님 신심과 함께 한결같이 성요셉도 존경하며 사랑하는 신심이 지극한 것입니다.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마태 1, 24)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아름다운
봄꽃의 설레는
계절이다.
우리 모두
배려가 필요한
소중한
사람들이다.
진심으로
사랑할 줄
아는 사람
성 요셉의
기쁜
축일이다.
소중한 마음은
언제나
소중한 실천으로
이어진다.
요셉의
참된 사랑은
평생에 걸쳐
나자렛
성가정안에서
이루어진다.
평범한 일상을
돋보이게 하는
참된 사랑이다.
힘든 삶의
고비마다
진실하게
기도하고
겸손되이
받아들였던
성 요셉의
삶이었다.
자신의 아들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았기에
더 깊이 사랑할 수
있었다.
마리아의 삶을
끝까지 신뢰하고
존중한 경청의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삶의
여정에서
성급함은
금물이다.
완벽한 가정
완벽한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다.
최선을 다해
기도하고
노력하는
삶이다.
가족 사이에서
피어나는 꽃이
가장 아름다운
꽃이다.
하느님을 향한
진실한 믿음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의 길을
걸어가게 했다.
예수님과
함께한 역사
마리아와
함께한 여정이
행복을
탄생시킨다.
우리는 누구와
함께하는가?
사랑과 믿음
보살핌과 도움은
성 요셉의 삶을
잘 표현해 주고있다.
사랑이란
도움의 손길을
내밀 때 따듯이
잡아주는 것이다.
꽉 잡아준
도움의 손길이
가장 행복한
요셉이 되게
하였다.
행복은
함께하는
시간이다.
성 요셉은
그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렇게
사셨다.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사람인
요셉 성인이시다.
성 요셉이시여
참된 사랑을
잃어버린 저희를
위해 빌어주소서.


두 눈이 모두 잘 보이던 사람이 어느 날 사고가 나서 한쪽 눈을 못 보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한쪽 눈을 못 보게 된 것을 행복하다고 생각할까요? 아니면 불행하다고 생각할까요? 그렇다면 이런 상황은 어떠할까요? 앞을 보지 못하던 사람이 각막 기증자가 나타나서 한쪽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행복하다고 생각할까요? 불행하다고 생각할까요?
똑같이 한쪽 눈으로만 세상을 바라보지만, 누구는 불행하다고 말하고 또 다른 누구는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결국, 행복과 불행은 다른 사람이나 다른 조건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 만드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행복을 만드는 ‘나’를 보지 못하고 남 탓, 환경 탓, 주님 탓을 외치면서 행복하지 못한 ‘나’를 만들고 있습니다.
이 ‘나’는 누가 통제를 할 수가 있을까요? 당연히 ‘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나의 행복도 내가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주님 탓, 남 탓, 환경 탓 등 외부에서 그 이유를 찾다가는 화만 나고 절망 속에서 헤맬 수밖에 없습니다.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내가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는지, 내가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를 따져봐야 할 것입니다. 외적인 조건들을 모두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남들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나만의 행복을 만들 수 있습니다.
성모님의 남편인 동시에 예수님의 아버지이신 요셉 성인 대축일인 오늘, 요셉 성인에 대해 묵상을 해 봅니다. 성모님과 약혼한 뒤에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은 그에게 큰 혼란을 주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아직 같이 살기도 전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잉태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또 꿈에 성모님을 아내로 맞이하라는 천사의 명령을 들었을 때, 그 뒤에 이어지는 모든 사건은 보통 사람들이 평생을 통해서도 겪을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특히 성경에 요셉을 의로운 사람으로 나오듯이, 율법에 어긋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이 상황에 고뇌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불행하다고 생각하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요셉 성인은 이 모든 상황을 받아들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 성모님을 아내로 맞아들이고, 성가정의 수호자가 되어 예수님과 성모님을 보호하는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합니다. 불행의 이유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행복의 상황으로 받아들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 곁에서 임종하는 이의 수호자이며 거룩한 교회의 보호자로 계십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행복의 이유는 분명히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의 이유만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행복을 만드는 ‘나’를 바라보는 데 집중하시길 바랍니다.
무수한 사람들 가운데는 나와 뜻을 같이할 사람이 한둘은 있을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공기를 호흡하는 데는 들 창문 하나로도 족하다(로망롤랑).
세상에서 가장 잘난 사람.
세상에서 가장 잘난 사람은 누구일까요? 바로 ‘나’입니다. 그래서 많은 판단을 다른 사람을 향해 쏟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옳다.’, ‘너는 틀렸다’라는 생각으로 상대를 무시하고 때로는 상대를 향해 화를 내는 것입니다. 그만큼 세상에서 가장 잘 ‘나’를 우리 각자는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떻습니까? 완벽한 모습도 아니고 끊임없는 실수를 반복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렇게 잘나지도, 어쩌면 가장 못났으면서도 자기 잘난 멋에 사는 것은 아닐까요? 물론 자기 자신을 비하하며 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자신감을 놓아버리고 수동적으로 살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보다 잘난 ‘나’이듯, 남들도 자기 관점에서는 잘난 ‘나’라는 것을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못 한다.’라고 말하면서 뒤로만 물러서는 것이 겸손은 절대 아닙니다.
내가 나에게 소중하듯, 남 역시 자신에게 소중함을 인정하도록 합시다. 이것이 함께 살아가는 방법이며, 나를 더욱더 건강하게 살 수 있게 하는 길입니다.
진지하게 침묵하고 숙고하며, 깊이 성찰하고 기도하던 하느님의 사람, 요셉!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때, 요셉처럼 기구한 운명의 소유자가 다시 또 있을까 싶습니다. 이미 마리아와 약혼까지 하였으며, 결혼식 날짜가 코앞으로 다가온 어느날, 해괴망칙한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약혼녀 마리아가 결혼식도 치르기 전에 덜컥 아이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약혼자로서 마리아를 향한 배신감이 하늘을 찔렀을 것입니다. 끓어오르는 분노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머리 뚜껑이 활짝 열리면서 연기가 풀풀 새어나왔을 것입니다.
요셉의 머릿 속은 별의 별 생각이 다 교차했을 것입니다.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얌전한 척 하던 마리아가 어떻게 이런 일을 벌일 수가 있지? 이 사실을 사방팔방에 확 불어버릴까? 법대로 해버릴까?’
그러나 의로운 사람 요셉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배신감을 꾹 눌러참았습니다. 그리고 쥐도 새도 모르게 마리아와 파혼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렇게 마음 먹은 요셉에게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상황을 설명하고 협조를 구합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마태오 복음 1장 20~23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 입장에서 억울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을 향해 하소연도 했을 것입니다.
“다 좋은 데 왜 하필 나냐고요?”
희귀한 사건으로 인해 마리아와의 단란하고 행복한 새 인생을 꿈꾸던 요셉의 소박한 희망은 순식간에 산산조각나고 말았습니다. 요셉의 인생은 한 마디로 닭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럭저럭 괜찮은 인생이 제대로 꼬여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이같은 생각은 단지 인간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갑작스레 다가온 마리아의 혼전 잉태가 요셉에게 엄청난 시련이요 상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납득하기 힘든 대 사건 앞에 침묵하고 기도하며 하느님을 뜻을 찾았습니다. 이해하기 힘든 사건을 인간적인 시각에서가 아니라 영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자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리아와 함께,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신비스런 신앙 여정을 출발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요셉은 깨달았을 것입니다. 마리아로 인해 자신이 겪은 희생과 포기는 절대로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는 진리를 말입니다.
은혜롭게도 하느님 아버지께서 요셉 자신을 인류 구원 사업의 협조자로 선택해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점점 커져갔을 것입니다. 그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하느님께서 내게 협조를 구하시다니요? 하느님께서 나를 동반자로 불러주시다니요?
따지고 보니 세상 만사가 그런 것 같습니다. 짧은 안목으로, 그리고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때, 우리가 매일 겪는 시련과 고통은 견딜 수 없는 불행입니다. 그러나 마음 한번 크게 바꿔 먹고, 호흡 한번 크게 하며, 긴 안목에서 바라볼 때, 시련과 고통은 더할 나위없는 축복이요 은총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인간과 철저하게 다르신 분입니다. 참으로 묘하시고 신비스러운 분이십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깊은 뜻을 이해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요셉처럼 너그러운 마음이요 의로운 성격입니다. 진지하게 침묵하고 숙고하며, 깊이 성찰하고 기도하는 태도입니다.
구원은 구원의 필요를 아는 이에게 맡겨진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한 부자가 죽기 전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자기 재산을 천당에 갖고 가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어느 날 꿈에 천사가 나타나 말했습니다.
“네 기도가 응답받았다. 그런데 한 가지 조건이 있다. 트렁크 가방 하나에만 채워가라.”
무엇으로 채워야 하나? 부자는 여러 가지 궁리를 했습니다. 현금으로 채울까? 유가증권으로 채울까? 진품 명품으로 채울까? 그러다가 부자는 황금 덩어리로 채우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고 결정 내렸습니다.
얼마 안 있어 부자는 이 땅을 하직하고 천당에 갔습니다. 천당에 가는 동안 아주 큰 고생을 했습니다. 트렁크 무게 때문이었습니다. 황금이 든 큰 트렁크를 가지고 낑낑대며 천당 문 앞에 이르렀을 때 베드로가 문을 지키고 있다가 말했습니다.
“무엇을 그렇게 힘들게 갖고 오십니까?”
부자는 환한 얼굴로 말했습니다.
“제 재산인데 특별히 허락받고 갖고 오는 겁니다.”
“여태까지 이런 경우는 없었는데, 허락을 받았다니 그럼 어디 봅시다.”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며 가방을 열게 했습니다. 가방이 열리니 눈부신 황금빛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부자는 얼굴의 땀을 닦으며 그것 보라는 듯 만족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빙긋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천당의 모든 길은 황금으로 포장되어 있습니다. 도로포장 재료를 가지고 오셨군요. 수고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가져가야 하는 유일한 것은 무엇일까요? 부자가 황금을 가치 있다고 여기면서 잃게 된 것은 또 무엇이었을까요?
헨리 나우웬 신부는 자신의 저서에서 “너는 보물을 발견한 사실에 기쁨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보물을 발견했다고 해서 네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할 때 보물을 네 것으로 만들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보물은 발견하는 것보다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내 것으로 만들려면 그것을 위해 다른 가치를 희생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보물의 진정한 가치를 안다면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큰 보물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구원자로 믿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아니면 누구도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가 아니면 다 지옥행이라고 말해도 되는 것입니다. 겁주기 위해 지옥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 그리스도가 아니면 우리는 다 지옥입니다. 이것은 교리입니다. 지옥은 하나의 개념이 아니라 실체입니다. 교회는 “죽을죄의 상태에서 죽는 사람들의 영혼은 죽은 다음 곧바로 지옥으로 내려가며, 그곳에서 지옥의 고통, 곧 ‘영원한 불’의 고통을 겪는다.”(1035)라고 가르칩니다.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서는 죄가 씻겨져야 합니다. 우리는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에서 “죄를 씻는 유일한 세례”를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그 “유일한 세례”는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세워진 성사이고 교회에 맡겨졌습니다. 교회에 맡겨진 성사가 곧 그리스도이고 그 성사의 가치를 알아야만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할 줄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절대적으로 그리스도와 그분께서 맡겨주신 성체가 아니면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을 믿어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은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성 요셉은 어떠한 믿음이 있었기에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을 맡기실 수 있으셨을까요? 성 요셉의 수많은 훌륭한 덕이 있겠지만, 오늘은 그분의 믿음을 묵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천사는 요셉의 꿈에 나타나 이렇게 말해줍니다.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이 말은 그분이 아니면 누구도 죄에서 구원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온 인류를 죄로부터 구원하실 유일한 구원자의 양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얼마나 큰 부담이겠습니까? 자신의 잘못으로 아기 예수님이 다치거나 혹 죽게 되신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지금까지 기다려온 인류의 구원이 허사가 됩니다. 자신이 맡은 가치를 알아, 이런 부담을 가질 수 있는 사람에게야 하느님은 당신 아드님을 맡겨주십니다. 요셉 성인은 온 인류의 희망이신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바치라고 하면 수천 번이라도 바칠 준비가 되신 분이셨습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분이 누구이신지 알기 때문입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다이아몬드광산 개발이 시작된 것은 우연한 기회를 통해서였습니다. 한 상인이 남아공의 어느 마을에 머물렀을 때 선반 위에서 광채를 발하고 있는 커다란 돌멩이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상인은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저 돌멩이는 누구의 것입니까?”
“저것은 내 아들이 산에서 주어온 것입니다.”
상인은 주인에게 부탁했습니다.
"내가 당신 아들을 위해 좋은 장난감을 하나 줄 테니 저 돌멩이를 내게 주지 않겠소?”
주인은 선반에 놓인 광채 나는 돌멩이를 상인에게 주었습니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감사하지요. 제 아들도 매우 기뻐할 것입니다.”
주인은 상인에게 몇 번이나 고맙다고 인사를 했습니다. 그것이 값비싼 다이아몬드라는 사실은 전혀 몰랐습니다. 결국, 이 돌은 케이프타운의 보석상에게 12만 5천 달러에 팔렸습니다. 지금은 수백만 달러가 넘습니다.
지금 가톨릭의 신앙이 매우 흐려지고 무뎌졌습니다. 무엇이 가치 있는 것인지 모르게 되었습니다. 성당을 마음의 평화를 위해 다닌다고 합니다. 집안이 건강하고 잘 되기 위해 다닌다고 합니다. 물론 맞는 말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자녀들의 성공이나 가정의 안녕과 내면의 평화를 주는 방법은 다른 곳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성당은 지옥에 안 가기 위해 다니는 것입니다. 그래야 교회가 구원을 주는 곳이 됩니다. 그래야 구원을 위해 우리 손바닥 위에 올려지는 그리스도의 성체의 가치가 제대로 보입니다.
코로나 때문에 관광객이 오지 않으니 이탈리아 베네치아 운하의 물이 처음으로 맑아졌고 지나다니는 물고기까지 보인다고 합니다. 대기도 맑아진 느낌입니다. 우리 교회도, 우리 신앙도 이렇게 깨끗해진 모습으로 이 힘든 시기를 함께 위로하고 인내하며 부활을 준비해야겠습니다.
어쩌면 한국과 바티칸 교회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이렇게 오랜 기간 성체를 모시지 못하는 시기를 지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가톨릭 신자들에게 ‘정말 성체가 우리 구원의 유일한 희망임을 믿는가?’라고 물으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성체 한 번 영하기 위해 몇 달을 산길을 넘어 미사에 참여했습니다. 호랑이에 물려 죽고 눈 속에서 파묻혀 죽었지만 성체의 가치를 알았습니다. 지금은 주차장이 부족하다거나, 여행을 가야 할 일이 있다고 주일이 되어도 성체를 영하지 않기도 합니다. 이러다가 어떤 분들은 정말 보석을 장난감과 맞바꾸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요셉 성인처럼 성체를 바라볼 수 있어야겠습니다. 손바닥 위에 놓인 성체를 바라보며, 이것이 아니면 다 지옥행임을 절실히 믿을 때, 양식이 되기 위해 말 밥통에 놓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요셉의 마음과 같아질 것입니다. 성체가 유일한 구원의 길이기에 목숨을 바쳐서라도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는 기도를 바쳐야겠습니다. 물론 이런 일은 지나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교훈은 깊이 새길 필요가 있겠습니다. 성체는 우리를 지옥에 떨어지지 않게 만드는 유일한 보물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거울을 보면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이 보입니다. 웃으면 거울 속에 비친 나도 웃습니다. 찡그리면 거울 속에 비친 나도 찡그립니다. 거울 속에 비친 주름, 눈, 코, 입, 귀, 머리카락이 바로 나의 모습입니다. 거울은 거짓말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거울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나의 의식, 마음, 생각, 신념입니다. 내가 온 길을 보면 내가 가야 할 길이 보입니다. 내가 온 길이 절망, 어둠, 두려움, 욕망의 길이었다면 앞으로 가야할 길은 슬픔, 분노, 갈등, 고독의 길이 될 겁니다. 내가 걸어온 길이 인내, 온유, 희생, 친절의 길이었다면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보일 겁니다. 믿음, 희망, 사랑, 나눔의 길이 될 겁니다.
사순시기는 나의 삶을 십자가라는 거울에 비추어보는 겁니다. 삶이 극단적이라면 길가에 뿌려진 씨와 같습니다. 누군가의 비난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애써 가꾼 사랑의 밭을 망쳐버립니다. 좋을 때는 모든 것을 줄 것 같이 행동하지만, 자존심이 상하면 모든 것을 부술 것처럼 행동합니다. 예수님을 배반했던 유다의 삶이 그렇습니다. 삶이 거짓과 위선이라면 돌밭에 뿌려진 씨와 같습니다. 타인의 희생을 발판 삼아 성공한 것처럼 보이지만 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아 진실의 빛이 비추면 곧 무너지고 맙니다. 남의 눈에 있는 작은 티는 들추어내지만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는 감추려합니다. 율법과 계명을 말하지만 실천하지 않았던 위선자들의 삶이 그랬습니다. 삶이 이웃을 억압하고, 무시한다면 가시밭에 떨어진 씨와 같습니다. 가야파는 대사제였지만 자신의 권위와 능력으로 예수님을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빌라도는 총독이었지만 자신의 권력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했습니다. 많이 배웠고, 많이 가졌지만 ‘갑질’의 삶을 사는 사람이 그렇습니다.
요셉 성인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약혼한 처녀 마리아가 결혼 전에 잉태한 것을 알았던 요셉 성인은 조용히 파혼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법대로 하면 요셉은 마리아를 상대로 고소를 할 수도 있었습니다. 당시의 법은 무척 엄격하였기 때문에 마리아는 재판을 받고 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요셉이 기분대로 사는 사람이었으면 자신 앞에 놓인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입니다. 마리아의 집에 찾아가서 한바탕 소동을 벌였을지도 모릅니다. 요셉 성인이 법대로 했다고 해도, 기분대로 했다고 해도 당시 사람들은 손가락질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은 명백히 마리아의 잘못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마리아를 고발하지도 않았습니다. 마리아의 집에 찾아가 한바탕 난리를 치지도 않았습니다. 말 할 수 없었던 마리아의 입장을 생각하였고, 조용히 파혼만 하기로 하였습니다. 사실 이 정도만 해도 커다란 배려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요셉은 이제 또 다른 삶을 살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의로운 삶’을 뛰어넘어서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요셉은 꿈에서 가브리엘 천사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잉태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뜻대로 살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 역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온 몸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 또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했습니다. 유명한 겟세마니의 기도입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고난의 잔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나사렛 성가정은 모두 ‘하느님의 뜻’을 중심에 놓고 살았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 신앙은 은총을 주며, 그 은총으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가정을 생각해 봅니다. 하느님의 뜻보다는 나의 뜻이 먼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때가 많습니다. 출세와 성공이 삶의 기준이 되곤 합니다. 왜 공부를 하는지를 생각하기 전에 공부만 잘하면 모든 것이 용서되고 이해되는 세상입니다. 돈이 삶의 중심이 되는 세상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위해서 돈을 벌고, 돈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돈의 노예가 되어서 양심을 팔고, 사람을 속이고, 소중한 것들을 멀리합니다.
오늘 성 요셉 대축일을 지내면서 나의 삶의 중심은 어디에 있는지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성 요셉 우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복되신 동정 성모 마리아의 배필이 되신 분, 남편도 아니면서 남편으로 든든한 보호자가 되신 분, 아버지도 아니면서 아버지로 충실한 부양자 되신 분, 의로운 사람으로 일생을 사셨고, 흠없이 사신 분이라하여 붙여준 이름 ‘요셉’이라 불렀다
성 요셉은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지켜보며 시작된 피난살이 희생부터, 목수이면서 예수님과 성모님을 부양하고 보호자가 되어 성가정을 이루며 봉사자로 사셨기에 노동자의 주보가 되신 분, 생을 충실히 살다가 마지막에 주님과 성모님이 지켜보는 가운데 거룩한 임종을 맞이했기에 임종자의 주보가 되신 분, 우리는 하느님의 뜻대로 흠없이 사신 요셉 성인의 대축일을 성대히 지낸다.
참 좋으신 분, 그러나 당신이 뾰족히 올라와 이거다하고 자랑거리를 말하려면 답답하신 분, 성경에 너무나 짧게 언급한 생애 외에는 뚜렷히 꺼낼 것이 마땅치 않으신 분, 구원사에 하느님의 사람으로 특별히 선발 된 것 외에는 특별히 드러남이 없으신 분, 그러나 성 요셉은 오르지 하느님의 부르심에 철저히 응답하고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보호자와 양부로써의 역할을 충실하게 하시며 구원의 협력자로 우뚝 서신 분, 희생과 봉사로 당신을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하신 분이시다. 우리를 보호하고 부양하며 사랑과 봉사로 우뚝 선 성인이 되셨다.
미사에서도 요셉 성인은 성인 중의 으뜸으로 날마다 추앙받으시고 계시면서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시는 생생한 성인이심을 알리고 있다. 오! 아름다운 요셉 성인이시여! 저희도 당신처럼 뾰족히 드러나지 않지만 언제나 충실하셔서 부름 받은 사람답게 하느님 안에서 충실한 사람되게 하소서서! 기도합니다. 저희도 요셉 성인처럼 구원의 협력자로 성실히 살도록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의로운 사람 요셉>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 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마태 1,18-21.24).”
결혼을 앞둔 요셉의 소망은, 또 그의 인생 계획은, 다른 사람들과 별로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화목한 가정을 이루어서 평범하고 소박한 행복을 누리게 되기를 소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그리고 전혀 이해 할 수 없는, 중대한 시련을 만났습니다.
여기서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라는 말은, 마리아가 잉태한 사실이 ‘저절로’ 드러났다는 뜻은 아니고, 아마도 마리아가 자신이 ‘성령으로 잉태했음’을 요셉에게 알려 주었을 것입니다. 요셉은 마리아를 믿었을 것이고, 마리아의 말을 믿었을 것입니다. 믿었으니까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고 마리아를 보호하려고 한 것입니다. (만일에 요셉이 마리아를 안 믿었다면, 그것으로 요셉의 이야기는 끝나버렸을 것입니다.)
요셉은 마리아의 말을 믿었지만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아주 많이 고민하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라는 말은, 요셉이 자기 자신의 희생으로 마리아와 아기를 모두 보호하려고 했음을 나타냅니다. (요셉이 감추려고 한 것은 마리아의 잉태 사실이 아니라, 파혼 사실입니다. 세상 사람들 모르게 파혼하면, 사람들은 마리아가 낳은 아기를 요셉의 아기로 생각할 것이고, 그러면 마리아와 아기는 무사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요셉이 마리아와 함께 살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가정에 대해서 무책임한 사람이라고, 또는 가정을 버린 사람이라고 요셉을 비난하게 될 것입니다. 요셉은 자기가 그런 비난을 받게 되는 것을 감수하고서 마리아와 아기를 지키려고 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작정하였다.’ 라는 말만 있고, ‘실행하였다.’ 라는 말이 없는 것은, 요셉이 그렇게 결심하긴 했지만 차마 실행하지는 못하고 계속 고민하고 기도했음을 암시합니다.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난 일은 요셉의 기도에 주님께서 응답하신 일입니다.
천사가 요셉에게 한 말은, 예수님의 탄생 예고 때에 마리아에게 한 말과 같습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라는 말은, 요셉이 ‘다윗의 자손’으로서 하느님의 선택을 받았음을 나타내고, 또 ‘메시아의 보호자’로 선택되었음을 나타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라는 말은,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는 일은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라는 말은, 마리아가 요셉에게 자신이 성령으로 잉태했다고 알려 준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확인해 주는 말이고, 또 이 모든 일이 다 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확인해 주는 말이기도 합니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라는 말은, 태어날 아기는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것을 알려 주는 말입니다. (아기의 이름을 짓는 것은 아버지의 권한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아버지 하느님께서 직접 지으셨습니다.)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라는 말은, 예수님이 메시아 (구세주)라는 것을 알려 주는 말입니다.
이야기를 보면, 요셉은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기계적으로(수동적으로) 움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그것은 아니고, 천사의 말을 묵상하고, 믿고, 결심하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의 천사의 명령’(주님의 명령)이라고 표현되어 있지만, 이 명령은 자유의지 없이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명령이 아니라, 요셉 자신이 자유의지로 결단해야 하는 ‘부르심’입니다. (요셉이 도저히 용기가 안 나서 받아들이지 못하겠다고 대답했어도, 그것을 죄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그럴 인물이었다면 선택되지도 않았겠지만......)
어떻든 요셉은 자유의지로 ‘부르심’에 응답했습니다. 요셉의 ‘응답’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만을 바라면서, 자신의 인간적인 소망과 계획 등을 모두 버린 일이고, 응답함으로써 지게 될 십자가들을 기꺼이 받아들인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요셉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라는 예수님 말씀을 ‘온 삶으로’ 실천한 첫 번째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요셉 자신의 입장에서 표현하면, 천사가 전해 준 주님의 부르심에 그가 응답한 일은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한” 일입니다.)
우리가 요셉의 믿음과 응답과 의로움을 본받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지금 나에게 생긴 일이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나?” 라는 문제가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 수 있나?
첫 번째로 할 일은 ‘기도’이고, 두 번째로 할 일은 영적 지도자에게 조언을 청하는 일입니다. 요셉의 꿈에 나타난 천사는 영적 지도자 역할을 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마리아에게 일어난 일을, 즈카르야와 엘리사벳 부부가 요셉보다 먼저 알았을 것이고, 그래서 자기들에게 일어난 일과 자기들의 믿음을 요셉에게 증언해 주었을지도 모르고, 그 ‘증언’을 통해서 요셉을 위한 영적 지도자 역할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신앙생활은 혼자서는 하기 어려운 생활입니다. 특히 ‘부르심’에 응답하는 일은 혼자서는 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자기가 받은 ‘부르심’이 정말로 ‘하느님의 부르심’인지를 식별하는 일과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을 결정하는 일과, 응답한다면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 등을 영적 지도자와 함께 의논하고 심사숙고해야 합니다.
(영적 지도는 대체로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이 해 주지만, 신앙생활을 나보다 더 많이 한 이웃이나 친구나 가족이 해 줄 수도 있습니다.)
곽승룡 비오 신부님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마태1,19)
공동번역은 "요셉은 법대로 사는 사람이었고"(마태 1,19)라고 말한다. 하지만 한국말 의미로 요셉은 한마디로 법 없이도 사는 사람이었다. 사실 요셉은 법 없이도 살 만큼 순수한 유다 청년이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약혼녀 마리아가 아버지 없는 아기를 가졌으니 보통일이 아니건 만 요셉은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 낼 생각이 없었다고 한다. 사실 요셉은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인가를 고심했을 것이다.
요셉은 생각 끝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조용히 원점으로 되돌아가길 원했을 것이다. 그래서 결국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었다.
그런데 요셉은 주님의 천사의 말을 듣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요셉은 자기 생각대로 살지 않는 참 줏대 없는 남자이다.
처음에는 마리아를 위해서 파혼하기로 했으나, 나중에는 천사의 말을 듣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우리는 어떤가? 얼마나 줏대있게 내 생각대로만 사는가?
모두 저의 예수님처럼 보입니다.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요셉의 너그러운 마음씨와 천사의 말 잘 듣는 의로운 자세에 놀랍니다.
성모님 배필이시고 예수님 기르신 양아버지라고 어릴 때에 배웠습니다.
요셉과 성모님 서로 동정 지키며 하늘말씀님이신 아기를 기르셨습니다.
제가 청년 때에 요셉을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의로우심에는 반했습니다.
남자의 성욕을 하느님께 고스란히 봉헌하신 점에선 더욱 감탄했습니다.
나이 들면서 점점 더 강하게 그 가치가 돋보이고 공감하게 되더라고요.
저는 예수님 기르신 요셉처럼 신자들을 돌보겠다며 서품을 받았습니다.
요새는 인터넷교리 수강하시는 분들이 모두 저의 예수님처럼 보입니다.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요셉은 마리아가 같이 살기 전에 잉태한 사실이 드러나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지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마리아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했다는 말을 전해 듣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다고 전합니다. 사실 우리가 '의롭다'고 하는 그 기준이 무엇인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는 법치주의 국가에서 살아가면서 법을 잘 지키는 사람이 의롭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오늘 복음에 나오는 요셉은 그러한 측면에서 볼 때 의롭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요셉은 혼인 전에 잉태한 사실이 드러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경우에는 세상의 법보다도 먼저 하느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아주 중요한 신앙의 가르침을 얻게 됩니다. 그렇다고 법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의로움이란 단순히 법을 잘 지키는 삶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하느님의 뜻을 따를 때 우리는 그 하느님의 영을 통해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셉은 그렇게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였고 성가정의 가장으로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또한 요셉의 그 신앙을 본받아 하느님 보시기에 진정 의로운 사람으로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갈 수 있기를 함께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하늘 뜻>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늘 뜻
남모르게
마음 깊은 곳에
곱게 품고
낯설고 두려운
길을 떠난다
쓰라리게 다가오는
헤아릴 수 없는
하늘 뜻
나를 넘어
온 누리 품으리라
믿고 바라기에
목숨을 걸고
먼저 길을 나선
사랑하는 이의
곁이 되어
하늘 뜻이 되고자
길을 떠난다.
구원 사업에 협력하는 의로움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는 약속은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얻은 의로움을 통해서 주어졌습니다.”
자기 의로움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의합한 의로움
개신교에서는 이신득의以信得義를 많이 얘기합니다. 이것은 이행득의以行得義와 비교되는 말로서 인간의 행위 또는 공로로 의로움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늘 사도 바오로의 말처럼 믿음으로 의로움을 얻음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가톨릭이 이행득의를 강조하고 자기들은 바오로 사도의 이 이신득의를 강조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의롭다고 할 때 보통 의를 위해 자신을 바치거나 의에 어긋나지 않는 행위를 하는 것을 말하고 그래서 이것을 통해서 볼 때 의로움은 자기 의로움이 아니라 자기 밖의 기준이 되는 어떤 의로움이 있고, 그 의로움에 맞는 또는 그 의로움에 어긋나지 않는 행위나 태도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내 밖의 기준이 되는 의로움이란 무엇인가요?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주어진 양심이 그것일 수 있고 각 문화나 종교에 따라 정해진 어떤 규정이나 법규가 그것일 수 있으며, 구약에서는 율법이 그것이었고 이 율법 대로 살아갈 때 의롭다 하는데 신약에 와서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하느님을 믿을 때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이 의로움이라는 얘기인 것 같습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요셉은 의로운 사람으로 일컬어지는데 요셉도 애초에는 율법을 따르는 의로운 사람이었지만 그리스도로 인해 은총으로 의로워진 사람이 되었고, 은총으로 의로워진 것은 그가 하느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예수님의 탄생을 알렸을 때 그것을 믿은 것은 마리아뿐 아니라 요셉도였습니다.
그것은 동정녀가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을 믿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도저히 불가능하고 믿을 수 없는 말이지만 하느님을 믿은 것이고, 하느님을 믿었기에 그 불가능한 일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 믿음은 '그가 하는 말은 무슨 말을 해도 다 믿겠다.'고 할 때의 그런 인격적인 믿음이고, 그 모든 어려움을 감수하겠다는 믿음이지요.
그런데 상상도 할 수 없는 생각을 한번 해봅니다.
만약 요셉이 의롭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요셉이 거부함으로 하느님 구원사업이 끝나게 되는 건가요?
하느님의 구원사업이 한 인간에 의해 좌우될 수 있는 건가요?
그럴 수는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불의한 요셉이 마리아를 거부하고 주님의 양부되기를 거부할지라도 마리아의 수락과 성령에 의한 잉태로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을 테지만 이후 구원의 역사는 사뭇 달라졌겠지요?
마리아와 아기 예수께서 엄청 고생하셨거나 아니면 하느님의 뜻을 거부한 요나가 예스할 때까지 고래 배속에서 죽다가 살아난 것처럼 하느님의 뜻을 거절한 요셉도 예스할 때까지 그래서 주님의 아버지다운 의로움을 이룰 때까지 어떤 시련을 겪었을 지도 모르지요.
아무튼 요셉의 의로움은 단지 인간적인 의로움이나 율법의 의로움이 아닌,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 협력하는 의로움임을 묵상하며 이 의로움을 본받는 우리가 되고자 다짐하는 오늘입니다.
성 요셉의 사명은 우리의 사명이다. <마태 1, 16. 18-21. 24ㄱ>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하느님의 탁월한 선택은 주님의 어머니로 마리아를 선택하신 것이지만 또 다른 선택은 요셉을 선택하여 많은 성직자와 수도자의 모범으로 두시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마련하신 이유입니다.
요셉은 혈육으로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과 관계없지만, 하느님의 큰 계획 속에는 없어서는 안 되는 자리에 계셨고, 요셉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도 사람이 감당할 수 없도록 받으셨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구원의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타당한 존재였으면 요셉은 협력자로서는 없어서 되지 않을 존재입니다.
저는 성직자가 되는 순간 저에게는 모든 이가 형제자매여서 그들을 위해서만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의식하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직접적인 자손도 아닌 사람들을 돌보고, 부모도 아닌 사람을 부모로 모시고, 민족과 국민이 아닌 이국인을 위해 희생하고, 형제 이상으로 부모님 이상으로 돌보고 깊은 관심을 가지고 수고해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보상도 받고 은총 속에 살고 있습니다.
요셉은 부부관계도 아닌 마리아를 돌보고 갖은 고생을 다하면서 자기 의무를 완수하셨으며 주님의 위험을 막아주시려고 이집트까지 피난 가시고, 나사렛에서 목수 일을 하시며 생계를 이어가고, 평화와 기쁨 중에 사시다가 주님과 성모님 품 안에서 임종하셔서 임종자의 주보가 되셨습니다. 저는 죽음을 앞둔 사람 옆에 임종을 돌보던 시절이 참으로 보람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예수 마리아! 저를 구하소서.” 지금도 비록 나이 들고 책임은 없지만, 하루에 여러 명의 친구와 대화를 하며, 각 사람의 고통을 함께 기도하며 나누는 시간은 저에게 가장 큰 일의 시작이며 마침입니다. 저녁 식사 후, 방에 들어가 보내주는 소식 속에 담긴 사연을 답장하며 해결책을 알려주고 기도해주는 시간이 저의 마감 시간입니다. 하느님이 맺어주신 인연을 책임지고 이행하며 완수하는 사람은 복 받은 사람입니다. 주님이 나에게 맡겨주신 사람을 보살피는 일은 지금 일어나는 현실을 잘 마무리 짓는 일이 될 것입니다.
오늘도 만나는 사람, 접촉하는 사람을 정성스럽게 보살피는 마음을 가지고 살기를 기도합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요셉 성인은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인지, 예수님의 성령 잉태를 강조하기 위해서인지 예수님의 아버지라는 표현보다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로 나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양아버지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마리아의 동정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인지, 성가정의 수호자로 표현하기 위해서인지, 화가들은 요셉 성인의 모습을 대체로 머리와 수염이 하얀 다소 나이가 든 마치 할아버지처럼 묘사하기도 합니다. 십 오육세의 풋풋한 처녀 마리아의 약혼자요 남편이요, 나자렛 시골의 목수로 건장한 남자인데도 총각이나 젊은 남편편으로 묘사하지 않고 좀 나이 많은 어른으로 그리곤 합니다.
신약 성경에는 요셉 성인이 예수님의 탄생과 어린시절에만 나옵니다. 마태오 복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마태 1,16)와 예수 아기의 탄생 사화(1,18-25) 때에 그 이름이 나오고, 동방 박사들의 방문(2,1-12) 때는 아마도 함께 계셨으리라는 추정할 수 있을 정도의 간접적으로, 헤로데의 박해를 피해 이집트로 피신하실(2,13-15) 때와 돌아오실(2,19-23) 때, 그리고 나자렛 회당에서 예수님의 신분을 고향 동네 사람들이 표현할(13,55) 때 나옵니다. 그리고 루카 복음에서는 마리아의 예수 아기 잉태 사건에서 마리아의 신분을 설명하기 위해(루카 1,27), 예수님의 베들레헴 탄생을 설명하기 위해(2,4), 목자들이 예수님을 처음으로 뵈러 갈(2,16) 때, 예수님을 성전에서 잃어버렸을 때와 나자렛에서 자랐다는 내용에서 부모님이라는 간접적인 표현으로(2,41-52), 예수님의 족보를 설명할(3,23) 때, 나자렛 회당에서 예수님을 불신하는 유다인들의 표현에(4,27) 언급됩니다. 요한 복음에서는 필립보가 나타나엘에게 예수님에 대해 설명할(요한 1,45) 때와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 이후 생명의 빵을 가르치실 때 불신자들이 예수님에 대한 신분을 설명할 (6,42) 때 나옵니다.
교회는 15세기 말 식스토 4세 교황님과 17세기 그레고리오 15세 교황님과 클레멘스 10세 교황님을 통해 요셉 성인에 대한 특별한 신심을 갖도록 하였습니다. 비오 9세 교황님은 1847년 요셉 성인을 ‘독생 성자의 양부’이며 ‘세상의 여왕이요 천사들의 여주인의 참된 배필’이라고 칭하시면서 그 축일을 부활 제3주일로 지내게 하셨고, 1870년에는 가톨릭 교회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시면서 축일을 3월 19일에 지내도록 했습니다. 전례성성은 요셉 성인을 구약의 요셉과 연결시켜, 어려울 때에 교회의 재산과 보화를 지키는 수호자로 삼았습니다.
1889년 레오 13세 교황님은 요셉을 가장의 모범으로 선포하면서 성인들 가운데 성모 마리아 다음의 위치로 올렸습니다. 교황님은 “하느님께서 성모님에게 요셉을 배필로 주셨다면 삶의 동반자요 동정의 증언자인 동시에, 혼인 유대를 통해 성모님의 지극한 위대함에까지도 동참하는 이가 되게 하신 것이다. 또한 말씀이신 성자께서 사람이 되시어 요셉의 아들로서 겸손하게 그의 슬하에 놓이시어, 그 아버지에게 순명과 공경과 존경을 드러내셨다. 성모님의 배필이요 성자의 아버지라는 이중의 권위로부터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것이 가장의 임무이다. 요셉은 성가정의 합법적이고 자연적인 수호자이며 가장이다. 그는 이 임무를 온 생애를 통하여 수행하였다. 가난한 성가정의 가장은 노동으로 가족을 부양하였으며, 힘이 아니라 자애로운 가르침과 모범으로 아들 예수님을 이끌었다. 가난한 노동자를 이롭게 한다는 명목 아래 하느님의 섭리로 이루어진 질서를 폭력으로 뒤집을 수 있다는 그 어떠한 이유도 정의도 없다. 다만 요셉 성인의 모범과 교회의 애덕이 상처를 치유하는 참된 약이다.”라고 밝히셨습니다.
베네딕토 15세 교황님은 요셉 성인을 교회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한 지 50주년이 되는 1920년에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의 많은 문제를 치유할 약으로 요셉을 제시하셨습니다. 교황님은 특히 임종하는 이를 위해 요셉의 전구를 청하라고 하였습니다. 노동자와 가진 자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고, 노동으로 자리를 비우는 남편과 그 아내가 갈라지는 시대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은, 오직 하느님의 권위이며 가장의 참된 권위라고 하셨습니다.
비오 12세 교황님은 1955년 이탈리아 그리스도인 노동자 협회 10주년 행사에서 성 요셉을 노동자의 수호성인이요 모범으로 제시하시고, 5월 1일을 ‘노동자들의 수호자 성 요셉 축일’로 정했습니다. 요한 23세 교황님은 1962년 성 요셉을 ‘보편 공의회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시고, 감사기도 제1양식에 성모님의 이름 다음에 요셉의 이름을 낭송하게 하였습니다. 성 요셉은 목수, 임종하는 이들, 노동자들의 수호성인이기도 합니다. 여러 청원으로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지시와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추인으로 2013년부터 감사기도 제2~4양식에도 “그 배필이신 성 요셉과”를 넣도록 하였습니다.
성 요셉, 코로나 19가 인류사회를 위협하는 이 시기에 우리 인류 가족의 안녕을 위해 빌어주소서. 아멘.
침묵의 성인
김효석 요셉 신부님
요셉 성인을 생각할 때, 그분의 모습은 “묵묵함”이라는 존경의 이미지로 다가옵니다. ‘묵묵하다’는 말에서 ‘묵묵黙黙’은 한자인데, ‘침묵 묵’자를 두 번 붙여 쓴 것입니다. 말뜻만 보자면 침묵하고 또 침묵한다는 것입니다.성인께서는 성모님의 잉태 사실을 알았을 때, 성모님의 흠을 마음에 간직하시고 침묵하셨습니다. 인간적인 마음으로, 성인께서는 커다란 배신감과 실망감, 분노와 격정에 휩싸이셨을 것을 우리는 압니다. 자신을 배신한 정혼자를 혹여 용서할 수 있을는지 몰라도, 다시 그 정혼자를 받아들이는 일은 평범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아들 예수님을 잃어버렸을 때, 성인은 아버지가 자녀를 돌보지 못한 부끄러움 앞에서도 침묵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다시 찾은 기쁨보다는, 당신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얼마나 당혹감을 느끼셨는지 짐작도 할 수 없습니다. 그분은 성모님의 허물 앞에 침묵했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당혹감 앞에 침묵했습니다. 이 침묵은, 단순한 조용함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침묵은 잘 참아내는 인내심만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인의 침묵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내가 다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겸손의 응답이며, 내 일을 하느님께서 이루어 가시도록 내맡기는 적극적인 투신입니다.
이백만 요셉 신부님
예수님의 ‘감춰진 30년’이 궁금합니다.
탄생에서 공생활 시작 전까지의 삶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30여 세의 나이가 될 때까지 무엇을 하며 어떻게 지내셨을까요.
3월은 성 요셉 성월이고, 3월 19일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교황청은 이날을 공휴일로 정하여 하루 동안 성인을 묵상토록 하고 있습니다.
성인의 직업을 실마리 삼아 ‘감춰진 30년’의 신비에 다가가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공생활 3년 동안 복음을 설파하면서 정곡을 찌르는 비유와 피부에 와 닿는 예화를 들려주십니다.
예수님은 이런 비유와 예화의 소재를 대체 어디에서 어떻게 채집하셨을까요?
예수님은 변방 갈릴래아에 살았으면서도 국제 정세에 밝았습니다.
또 갈릴래아 지역 현안에 대해서도 정확히 꿰뚫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국제 감각과 현실 감각을 습득할 수 있었을까요?
잉태되는 순간부터 당신의 신성으로 지복직관(至福直觀)을 누리셨던 예수님이시지만, 인간 세상의 지식을 나중에 습득하신 것도 분명한 사실일 텐데 말입니다.
●특수한 직업 목수
요셉 성인의 직업이 목수라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하느님이 아기 예수님을 농부나 어부가 아닌 목수에게 입양시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는 하느님의 깊은 뜻이 담겨 있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이 알아주는 효자였다(루카 2,51 참조)는 사실도 중요합니다.
효자 아들과 목수 아버지의 매트릭스에 ‘감춰진 30년’의 신비가 숨어 있는 것 같습니다.
농경 시대에 목수는 특수한 직업이었습니다.
고급 기능인으로서 장인 대우를 받았지만, 일터가 고정되어 있지 않아 이 고을 저 고을 일감을 찾아다녀야 했습니다.
고객층도 부자에서 가난한 사람까지 다양했습니다.
덕분에 목수는 각계각층의 살림살이를 직접 보고, 다양한 여론을 청취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목수의 일은 책상과 걸상 등 가구 만드는 것에 국한되지 않고 집수리와 집짓기, 인테리어 등 주택과 관련된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있었습니다.
당일치기 일이 많았겠지만, 때에 따라서는 여러 날 출장을 가기도 했습니다.
무거운 연장 보따리를 둘러메고 갈릴래아 전역을 돌아다녔겠지요.
목수 일은 이래저래 고된 중노동이었습니다.
효자 아들이 이런 아버지를 그냥 두고 봤겠습니까. 틈나는 대로 아버지를 따라가서 일을 도왔을 것이고 작업 현장에서 숙식도 함께했을 것입니다.
바로 이 대목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과정에서 세상 물정을 폭넓게 습득했을 것입니다.
지혜롭고 총명한 예수님(루카 2,52) 은 목수 일에 머무르지 않고 견문과 학식을 높이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 점에서 세포리스는 최고의 학습장이었습니다.
세포리스는 나자렛에서 불과 6km 떨어진 곳에 있는 인구 3만 명 규모의 국제도시였습니다.
그리스어를 사용했고 국제 무역이 활발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걸어서 불과 한 시간 반 거리에 있는 이 도시를 예수님은 가셨을까요, 아니면 가지 않았을까요?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예수회 사제인 제임스 마틴 신부의 견해가 흥미롭습니다.
“나는 호기심 많은 이 청년이 나자렛에 살면서, 또 나중에 일거리를 찾으면서, 이런 세계적 도시를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을 리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다시 말해 로마 사람들과 그리스 사람들의 다언어와 다문화 세계에 노출되지 않았다면 그것은 이상한 일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곳을 방문하는 동안 세포리스의 부유하고 호화로운 집들을 보셨을 것이다. 그곳은 나자렛의 가족들과 친구들이 사는 오두막 같은 집과는 상대적으로 아주 달랐을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예수님이 훗날 소득 불균형에 대해 비판하는 말씀을 하시는 데에 영향을 끼쳤을지도 모른다. 또한, 그분은 약간의 그리스어 단어와 구절들을 어깨너머로 배웠을 것이고, 그것들은 훗날 그분께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예수, 여기에 그가 있었다 1」 가톨릭출판사)
●3년을 위한 30년
저는 마틴 신부의 이 같은 추론에 동의합니다.
요셉 성인은 예수님이 다양한 분야의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일부러라도 세포리스에 가게 했을 것입니다.
성인은 단순한 목수가 아니었습니다. 어진 아버지였고 유능한 교육자였으며 훌륭한 동반자였습니다.
‘감춰진 30년’은 공생활 3년을 위한 치밀한 준비였습니다.
3년을 위해 30년을 준비했다니, 놀랍지 않습니까.
'난감 극복'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보이지 않아도 희망한다.'(마태오 1장 16.18~21.24ㄱ)
요셉은 약혼한 마리아가 아기를 가졌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지만 조용히 파혼하려 했습니다.
의로운 사람인 요셉은 납득이 안되는 난감한 상황이고 앞이 캄캄했지만 꿈에 나타난 천사의 알림을 듣고 받아들입니다.
하느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아도 희망하고 어떤 처지에서든 믿고 따릅니다.
경제가 어려울때 성요셉을 부르며 기도하십시오!
코로나로 인해 모든게 마비되었고 날이 갈수록 수익은 없고 먹고는 살아야 하니 난감할 수 밖에 없는 처지입니다.
노동의 신성함을 충실히 살면서 경제의 주보이신 성요셉의 이름을 부르며 간절히 기도합시다.
'성요셉님 저희를 굽어보소서.'
의인義人 성聖 요셉 예찬禮讚 -연민, 믿음, 순종-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보라, 주님은 당신 가족을 맡길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을 세우셨다.”
오늘 미사 입당송이 참 적절하여 고무적입니다. 오늘은 참 자랑스런 저희 수도원의 주보 성인인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이신 의인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저희 수도형제들이 영원한 롤모델로 삼고 있는 성 요셉입니다.
우리는 성 요셉을 통해서 참 신앙인은 물로 참 아버지 상을 만납니다. 아버지가 된다면 성 요셉같은 아버지가 되고 싶다는, 닮고 싶다는 생각도 듭니다. 성 요셉 축일 미사때마다 부르는 입당송 성가(280)는 늘 들어도 신납니다.
-“성 요셉 찬양하세 주님의 양부를/정결하신 성 요셉 마리아의 정배
의로우신 성 요셉 우리 양자로 삼아/언제나 우리 마음 정결케하시며
의롭게 생활하도록 이끌어 주소서”-
1절만 인용했습니다만 이어지는 2,3절 가사도 은혜롭습니다. 수도원 주차장에는 아기 예수님을 안고 있는 후덕해 보이는 성 요셉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아주 예전 성모성월 5월, 성 요셉상 옆 빨갛게 불타오르던 연산홍을 보며 즉시 떠올랐던 시도 생각납니다.
-“말없이 고요해도 가슴은 타오르는 불이다
요셉상 옆 빨갛게 타오르는 연산홍!”-2000.5.10.
외관상 고요하고 평화로운 후덕한 모습의 요셉이지만 내면의 가슴은 흡사 연민의 사랑으로 불타오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써놓은 시입니다. 요셉 수도원 배경의 불암산 역시 성가정의 든든한 버팀목이자 배경인 예수님의 양부 요셉을 연상케 합니다. 역시 아주 오래전 써놓은 글이 생각납니다.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물러/가슴 활짝 열고
모두를 반가이 맞이하는/아버지 산 앞에 서면
저절로 경건 겸허해져/모자를 벗는다
있음 자체만으로/넉넉하고 편안한 산의 품으로 살 수는 없을까
바라보고 지켜보는 사랑만으로/늘 행복할 수는 없을까
불암산처럼!”-2000.11.17
성 요셉 수도원을 품에 안고 있는 불암산처럼, 말없는 배경의 자비로운 품이 되어 성가정을 안고 있는 의인 성 요셉 양부를 통해 하느님 아버지를 어렴풋이 나마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참으로 자랑스런 우리 수도형제들의 영원한 롤모델이자 경탄의 대상인 성 요셉의 인품에 대해 세 측면에 걸쳐 나눕니다.
첫째, 의인 성 요셉은 ‘연민compassion의 사람’이었습니다.
바다같이 깊은 연민의 사람이었습니다. 자비와 지혜의 사람이었습니다. 참으로 존중과 배려, 공감의 사람, 현재의 프란치스코 교황님처럼 공감능력자였습니다. 바로 복음 서두 말씀이 이를 입증합니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 먹었다.”
우선적으로 생각한 것이 마리아의 안위였습니다. 마리아를 존중 배려한 그대로 하느님 아버지를 닮은 요셉의 바다같이 깊은 연민의 사랑이 눈물겹도록 고맙습니다. 나탄을 통해 다윗을 향한 예언은 흡사 요셉을 향한 예언처럼 들립니다. 급기야 의인 성 요셉을 통해 실현되는 나탄의 예언입니다.
“그는 나의 이름을 위하여 집을 짓고, 나는 그 나라의 왕좌를 영원히 튼튼히 할 것이다.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너의 집안과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 지고,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
그대로 2000년 전통의 가톨릭 교회를 통해 실현된 하느님의 예언, 하느님의 꿈이 아닙니까? 바로 이에 결정적 공헌을 하신 분이 오늘 축일을 지내는 연민의 사람 의인 성 요셉입니다.
둘째, 의인 성 요셉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산같이 큰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밖으로는 늘 거기 그 자리 배경의 불암산처럼 정주의 사람, 믿음의 사람 성요셉이었습니다. 기도와 함께 가는 믿음입니다. 믿음의 사람이자 기도의 사람이었던 의인 성 요셉입니다.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얻은 요셉의 의로움입니다.
참으로 침묵의 사람, 들음의 사람, 기도의 사람, 믿음의 사람인 의인 성 요셉입니다. 주님과 늘 깊은 관계의 친교를 나눴던 의인 성 요셉입니다. 하느님의 요셉에 대한 신뢰가 얼마나 컸던지 다음 내용이 이를 입증합니다. 주님은 침묵중에 늘 당신의 말씀을 경청했던 믿음의 사람, 성 요셉에게 당신 천사를 보내시어 자초지종 속내를 밝히십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맏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의인 성 요셉을 구원한 복음 말씀입니다. 요셉의 어둡던 내면이 주님의 계시의 빛으로 환해 졌음이 분명합니다. 진정 이런 주님 체험의 기억이 요셉의 믿음을 더욱 견고히 했을 것이며 장차 있을 모든 시련을 이겨낼 수 있게 하는 내적 힘의 원천이 되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에 버금가는 요셉의 믿음에 바오로 사도가 아브라함에 드렸던 고백을 그대로 성 요셉에게 드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믿는 분, 곧 죽은 이들을 다시 살리시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도록 불러내시는 하느님 앞에서 우리 모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너의 후손들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 하신 말씀에 따라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절대적 신뢰가 있기에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는, 참으로 천하무적天下無敵의 큰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에 이어 요셉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유전자DNA’를 고스란히 전수 받은 요셉처럼 생각됩니다.
셋째, 의인 성 요셉은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강같이 유연한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안으로는 끊임없이 자비의 바다 하느님 향해 맑게 흐르는 강같은 순종의 사람, 의인 성 요셉이었습니다. 순종은 영성의 잣대입니다. 침묵도 경청도 겸손도 순종의 열매로 드러납니다. 하느님은 순종의 사람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
참 아름답고 매력적인 사람이, 자발적 지체없는 사랑의 순종, 겸손한 순종의 사람이 성 요셉입니다. 하느님은 요셉의 순종이 참으로 고마웠을 것입니다. 강요할 수 없는 순종이요, 이런 요셉의 자발적 순종 덕분에 하느님은 당신 구원 역사의 꿈을 펼쳐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분명 요셉에게 고마운 마음을 다음 같이 표현했을 것입니다.
“나 그대의 자랑이듯이, 그대 나의 자랑이다!”
코로나 19 바이러스 사태로 인해 ‘신앙의 어둔밤’을 통과해 가고 있는 이 은총의 사순시기, 선물같이 주어진 의인 성 요셉 대축일이 우리 마음을 기쁨과 감사의 빛으로 환히 밝힙니다. 위로와 평화를 주고 용기백배하게 하십니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 의인 성 요셉을 닮아 바다같이 깊은 연민의 사람, 산같이 큰 믿음의 사람, 강같이 유연한 순종의 사람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얼마전 요셉 수도원을 방문했던 시찰관들의 조언을 나눕니다.
“이 수도원의 주보 성인이 얼마나 잘 선택되었는지 놀랍다. 성 요셉은 성실함, 단순성, 침묵, 고된 노동, 그리고 책임감의 모델이기 때문이다. 그분은 예수님께서 성장하실 수 있는, 그리고 다른 이들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집을 제공하신다. 그 집이 바로 요셉 수도원이다. 이곳은 여기서 매일 생활하는 수도승들과 몇 시간이나 며칠 간 수도승들과 삶을 공유하기 위해 찾아 오는 많은 이가 예수님을 만나는 장소이다. 이것은 매우 소중하다.”
얼마나 고무적이며 격려가 되는 조언인지요!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주님을 닮은 의인 성 요셉처럼, 연민의 사람, 믿음의 사람, 순종의 사람이 되도록 도와 주십니다.
“주님의 자애를 영원히 노래 하오리다. 제 입은 당신의 진실을 대대로 전하오리다. 제가 아뢰나이다. ‘주님은 자애를 영원히 세우시고, 진실을 하늘에 굳히셨나이다.”(시편89,2-3). 아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은 성 요셉 대축일이다. 우리는 성 요셉을 성가정의 수호자, 보편교회의 수호자이시며, 노동자, 가정, 동정자, 환자, 임종자의 주보로 공경 받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성서에서는 ‘의인’, ‘동정녀 마리아의 남편’이며 ‘충실하고 현명한 종’이다. 원죄 없이 잉태 되신 동정 마리아와 더불어 한국교회의 공동 수호자이시다.
복음: 마태 1,16.18-21.24a: 요셉은 천사가 일러준 대로 하였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18절) 이 잉태는 거룩한 신비이다. 성령께서 감추시어 눈에 띄지 않는 성사이다. 이 잉태로 인해 우리는 요셉의 놀라운 모습을 본다. 요셉은 조금도 마리아의 마음을 괴롭게 하지 않으려고 하면서 그 일을 해결하려 한다. 약혼은 했지만 마리아를 자기 집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것이고, 그 일을 드러내어 마리아를 재판에 넘긴다면 마리아를 죽음에 내주는 것이 된다고 생각하여 조용히 파혼하려 했을 것이다.
이때에 꿈에 천사가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20절) 이것은 요셉이 마리아의 순결을 의심하지 않도록 그 신비를 알려준 것이다. 또한 요셉이 의심이라는 악을 떨쳐버리고 신비라고 하는 선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리아는 아무 죄가 없으며 동정잉태를 인정할 수 있었다. ‘요셉’이라는 뜻은 ‘흠잡을 데 없는’이라는 뜻이다.
여기에도 신비가 있다. 창세기에서 악마는 동정이었던 하와에게 먼저 말을 건 다음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이 말은 그들에게 죽음을 건네기 위한 말이었다. 동정잉태의 사건에서는 거룩한 천사가 마리아에게 먼저 말하였고 다음에 요셉에게 말하였다. 이것은 그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앞의 사건에서는 죄를 위해, 죽음을 위해 여자가 선택되었고, 뒤의 사건에서는 구원을 위해 여자가 선택되었다. 앞의 사건에서는 여자로 말미암아 남자가 넘어졌고, 뒤의 사건은 동정녀로 말미암아 남자가 일어섰다. 그래서 천사는 요셉에게 그렇게 말한 것이다.
천사는 또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21절)라고 했다. 그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 했는데 그 뜻은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 즉 ‘구원자’라는 뜻이다. 이는 하느님께 어울리는 이름이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를 통해, ‘하느님이요 구원자는 나밖에 없다.’(참조: 이사 43,3; 호세 13,4)라고 하셨다. 그리고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주셨다.”(이사 49,1) 즉 그 이름은 하느님이시며 구원자이신 분의 육에 붙여진 이름이다.
요셉은 천사에게서 계시를 받고 기쁘게 하느님의 뜻에 따른다. 그는 마리아를 맞아들이고 기쁘게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 가게 되었다. 천사의 말은 동정 어머니를 그의 아내로 부를 자격을 갖도록 하였다. 요셉 성인이 의롭다고 하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뜻을 채우려 노력했다고 하는 것이다. 오늘 1독서에서도 보면 다윗은 하느님의 뜻을 따른 사람이었다. 다윗이 하느님의 뜻에 충실했던 상급을 하느님께서는 다윗 가문과의 약속을 통하여 그의 왕권을 튼튼히 해 주시겠다고 하신다.
2독서에 나오는 말씀의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이다. 자식이 없던 아브라함의 모습은 절망적이었다. 그러나 그가 모든 믿는 이들의 조상이 된 것은 그의 자세가 하느님을 온전히 신뢰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도 하느님을 신뢰하고 의탁하여야 한다. 우리 인간의 나약한 면만을 생각하고 그분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죄의 경중보다도 나를 사랑하시고, 언제나 자비를 베풀어주시며 당신 앞에 나아오기를 기다리시는 분이심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그런 믿음으로 그분께 나아가고 그분의 말씀을 들을 때에 우리도 요셉과 같이, 다윗과 같이, 아브라함 같은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
요셉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함으로써, 즉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고,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이루는데 협력하셨던 그 삶을 우리도 본받아, 우리의 삶의 순간순간에 주님의 뜻을 이루려고 노력하며 그분을 본받도록 하자. 요셉 성인이 어떤 큰 공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온전한 믿음을 통해서 주님께 인정을 받았다.
우리도 하느님 앞에 무슨 능력보다도 믿음으로, 신앙으로, 참된 삶으로 그분이 의롭게 여기시는 나로 변화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우리의 조그마한 행위 하나 하나가 하느님의 구원사업의 협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요셉 성인과 같이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이루는 우리 자신이 될 수 있도록 깨어있을 수 있는 은총을 구하자.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습니다."
이영근 아오스딩신부님
마태 1,16.18-21.24(성 요셉 대축일)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이신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복음사가들은 예수님의 모친이신 마리아께 대한 관심에 비하면, 성 요셉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는 그가 구속사에 있어서 해야 할 일을 다 하지 못했다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계획하신대로를 일찍이 다 이루셨다는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태오 복음사가는 두 가지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통해, 태어날 아기가 구세주 메시아임을 알려줍니다.
첫째는 그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사실이요,
둘째는 그가 동정녀에게서 태어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러한 하느님의 계획과 예언이 요셉의 믿음의 결단과 행동을 통해서 성취됨을 보여줍니다. 곧 요셉이 하느님 구원계획의 온전한 조력자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성 요셉의 인품을 세 가지로 묵상해 봅니다.
<첫째>, 그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데, 열심을 다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마태 1,19). 그 의로움으로 자신의 안락과 평안을 포기하였고, 마침내 “하느님의 뜻”을 따라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둘째>, 그는 타인에 대한 깊은 이해심과 자비심을 겸비한 사람이었습니다.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마태 1,19). 그는 공적인 고소를 통해 마리아를 수치스럽게 만들지 않으려고, 조용히 파혼하기로 작정했습니다. 물론, 그렇게 된다하더라도 결국 그에게는 모욕이 될 수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모욕을 감수하면서라도, 마리아의 안녕을 도모하고자 했습니다. 참으로 그는 사려 깊은 처사를 할 줄 아는, 참으로 자비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셋째>, 그는 순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대로 하였습니다.”(마태 1,24). 그는 깊은 침묵으로, 하느님의 음성에 마음의 귀를 열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뜻”에 행동하는 믿음으로 순명하였습니다.
사실, 요셉은 오늘 <복음>에서뿐만 아니라, <복음서> 전체에서 단 한마디의 말씀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행동하는 믿음과 순명”으로 구원받는 모든 이들의 양부가 되셨습니다.
그는 <제2독서>에서 아브라함이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었듯이’(로마 4,18), 그도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믿음으로 순명하여, 구세주의 양부가 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미 얻은 외아들을 포기했어야만 했다면, 요셉은 아들을 얻기도 전에 이미 외아들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아니, 아브라함에게는 그래도 아내가 있었지만, 요셉은 아내마저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그는 침묵하되, 참으로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믿되, 참으로 행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행동하되, 참으로 순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려 깊되, 참으로 자비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야말로, 그는 우리 신앙의 모델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뜻을 따르는 깊은 침묵, 자신의 안락과 평안을 접고 오로지 하느님께만 내맡기고 행동하는 믿음, 타인의 처지를 배려하는 사려 깊은 자비심과 사랑, 희망이 보이지 않아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참다운 순명이, 바로 우리의 모델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성 요셉께 전구하며, 하느님 구원의 온전한 조력자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마태 1,20)
주님,
믿음으로 침묵할 줄을 알게 하소서.
행동으로 사랑할 줄을 알게 하소서.
타인의 처지를 자비로 헤아리고, 희망이 보이지 않아도 희망하게 하소서.
선하신 당신의 뜻을 따르며 당신의 의로움을 따르며,
영으로 인도되는 다 헤아려지지 않은 신비를 살게 하소서. 아멘.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성가정의 보호자이신 요셉 성인을 기리는 오늘, 미사의 독서들 안에는 하느님 사람 셋이 등장합니다.
제1독서에 등장하는 다윗과 제2독서의 아브라함은 구약 역사 안에서 하느님께 각별히 사랑받은 이들로 꼽힙니다. 성경은 이 두 사람에 대해서 그들이 받은 축복은 물론 그들의 실수와 약점에 대해서도 주저없이 펼쳐놓지요.
그런데 신약의 문턱에 선 요셉에 대해서 성경은 "의로운 사람"(마태 1,19)이라는 수식 외에 어떤 표현도 절제합니다. 어디에서도 요셉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마리아와 예수님의 배경으로서밖에는 별다른 일화가 등장하지 않으니까요.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마태 1,20).
요셉이 무얼 두려워했을까요? 아니, 천사가 간파한 요셉의 두려움은 무엇일까요? 보통의 두려움이 자기가 해를 입을까 염려하는 데서 오는 감정이라면 지금 요셉의 상태에는 맞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마 보통 사람이라면 배신당했다는 분노로 떨고 있을 법도 하니까요.
요셉은 마리아의 임신으로 인해 자기가 당할 모욕이나 난처함을 두려워한 것이 아닐 겁니다. 관습에 따라 마리아에 대해 권리를 가진 약혼자로서 그녀를 억지로라도 소유할 수 있지만, 그것이 마리아의 행복에 최선이 아닐 수도 있다는 염려에서 나온 두려움일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마태 1,19)하지요. 혹시 마리아에게 사랑하는 이가 따로 있다면 자기가 조용히 물러서 주려는 것입니다. 오로지 마리아의 행복을 위한 포기의 결단이지요.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마태 1,24).
하지만 요셉은 천사의 말을 듣고 마음을 바꿉니다. 뭔지 정확히 잘 몰라도 정결한 마리아를 통해 하느님께서 무엇인가를 하시리라고 믿게 되지요. 두려움이라 표현된 그의 내적 갈등이 꿈속 천사를 통해 개입하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일순간 정리된 것입니다.
요셉의 의로움은 생각이나 이념에 있지 않고 실행에 있습니다. 그는 믿고 행동함으로써 그 자신이 진정한 의로움이 되었습니다.
제1독서에서 주님은 다윗에게 영원한 왕좌를 약속하십니다.
"네 몸에서 나와 네 뒤를 이을 후손을 내가 일으켜 세우고 ... 그 나라의 왕좌를 영원히 튼튼하게 할 것이다"(2사무 7,12-13).
하느님께서는 성자 예수님을 다윗의 후손인 요셉에게 맡겨 이 약속을 이루십니다. 제1독서와 화답송에 무수히 반복되는 "영원"이라는 단어는 하느님의 이 약속이 단지 이스라엘 왕좌의 혈통적 연속성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믿음으로 얻은 의로움"(로마 4,13)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율법에 따라 사는 이들만이 아니라 믿음에 따라 사는 이들에게도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는 약속이 보장된다고 역설합니다. 복음사가가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양부에게 부여한 "의로운 사람"이라는 표현은 요셉이 육의 질서뿐만 아니라 영의 질서 안에서도 다윗 왕좌와 예수님을 잇는 계승자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마리아와 요셉, 두 충실하고 소박한 의인들의 협력으로 실현의 물꼬가 트입니다. 인간적 합리적 계산으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건 앞에서 이해하기를 중지하고 믿기를 선택한 이들의 결단이 있었기에 구원의 역사가 이어진 것이지요.
사랑하는 벗님! 오늘날 과학과 지성이 지배하는 듯한 이 세상에도 믿음으로 복되고 믿음으로 의로운 수많은 마리아와 요셉들이 세상의 격류에 역행해 진리와 사랑의 말씀에 머무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부족하고 어리석지만 하느님의 신비 안에서 믿고 의탁하며 살아가는 벗님이 바로 그 마리아고 요셉입니다. 믿어서 복되고 믿어서 의로운 우리는 바로 그 믿음으로 구원받을 것입니다. 아멘. 피앗. 아멘.
구원 사업에 협력하는 의로움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는 약속은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얻은 의로움을 통해서 주어졌습니다.”
자기 의로움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의합한 의로움
개신교에서는 이신득의以信得義를 많이 얘기합니다. 이것은 이행득의以行得義와 비교되는 말로서 인간의 행위 또는 공로로 의로움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늘 사도 바오로의 말처럼 믿음으로 의로움을 얻음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가톨릭이 이행득의를 강조하고 자기들은 바오로 사도의 이 이신득의를 강조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의롭다고 할 때 보통 의를 위해 자신을 바치거나 의에 어긋나지 않는 행위를 하는 것을 말하고 그래서 이것을 통해서 볼 때 의로움은 자기 의로움이 아니라 자기 밖의 기준이 되는 어떤 의로움이 있고, 그 의로움에 맞는 또는 그 의로움에 어긋나지 않는 행위나 태도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내 밖의 기준이 되는 의로움이란 무엇인가요?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주어진 양심이 그것일 수 있고 각 문화나 종교에 따라 정해진 어떤 규정이나 법규가 그것일 수 있으며, 구약에서는 율법이 그것이었고 이 율법 대로 살아갈 때 의롭다 하는데 신약에 와서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하느님을 믿을 때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이 의로움이라는 얘기인 것 같습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요셉은 의로운 사람으로 일컬어지는데 요셉도 애초에는 율법을 따르는 의로운 사람이었지만 그리스도로 인해 은총으로 의로워진 사람이 되었고, 은총으로 의로워진 것은 그가 하느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예수님의 탄생을 알렸을 때 그것을 믿은 것은 마리아뿐 아니라 요셉도였습니다.
그것은 동정녀가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을 믿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도저히 불가능하고 믿을 수 없는 말이지만 하느님을 믿은 것이고, 하느님을 믿었기에 그 불가능한 일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 믿음은 '그가 하는 말은 무슨 말을 해도 다 믿겠다.'고 할 때의 그런 인격적인 믿음이고, 그 모든 어려움을 감수하겠다는 믿음이지요.
그런데 상상도 할 수 없는 생각을 한번 해봅니다. 만약 요셉이 의롭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요셉이 거부함으로 하느님 구원사업이 끝나게 되는 건가요? 하느님의 구원사업이 한 인간에 의해 좌우될 수 있는 건가요?
그럴 수는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불의한 요셉이 마리아를 거부하고 주님의 양부되기를 거부할지라도 마리아의 수락과 성령에 의한 잉태로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을 테지만 이후 구원의 역사는 사뭇 달라졌겠지요?
마리아와 아기 예수께서 엄청 고생하셨거나 아니면 하느님의 뜻을 거부한 요나가 예스할 때까지 고래 배속에서 죽다가 살아난 것처럼 하느님의 뜻을 거절한 요셉도 예스할 때까지 그래서 주님의 아버지다운 의로움을 이룰 때까지 어떤 시련을 겪었을 지도 모르지요.
아무튼 요셉의 의로움은 단지 인간적인 의로움이나 율법의 의로움이 아닌,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 협력하는 의로움임을 묵상하며 이 의로움을 본받는 우리가 되고자 다짐하는 오늘입니다.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대로 하였다.'(마태 1, 24)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봄꽃 하나
피기 위해서도
수 많은 사랑의
보살핌이
필요합니다.
요셉 성인은
예수님과 성모님을
온 삶으로 끝까지
보살펴 주십니다.
지켜야 할 것은
하느님과 우리의
뜨거운 믿음의
약속입니다.
요셉 성인은
믿음으로
주님의 보호자가
되십니다.
한 사람의 믿음이
끝내 주님의
양부가 되게합니다.
사랑 받고
사랑 하는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게됩니다.
사랑과 무관한
일은 없습니다.
믿음과 무관한
일은 없습니다.
지나가는 시간 속에
아버지가 있고
어머니가 있습니다.
뜨겁게 흐르는
사랑의
새역사입니다.
이 사순시기가
요셉 성인처럼
하느님의 뜻을
찾고 사랑을
실천하는 시간이길
기도드립니다.
생명과 믿음
공동체와 사랑은
하나이듯
세상을 바꾸는 것은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는 신앙의
참된 실천임을
믿습니다.
참된 실천은
참된 순명입니다.
서로를 살리는
순명의 길을
우리 또한
걸어갑시다.


누군가의 시선에 민감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보겠냐고, 사람들이 흉보지 않겠냐면서 늘 걱정합니다. 이렇게 타인의 시선만을 생각하며 살아간다면 그것은 자신의 인생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타인이 바라는 인생을 살 뿐입니다.
사실 타인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그것은 그 사람의 자유입니다. 내 자신이 굳이 신경 쓸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있는 ‘나’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고자 한다면, 스스로 하고 싶은 것을 그리고 스스로 있고 싶은 모습으로 살아가면 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자유롭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책임도 지지 못할 자유를 누리려고 한다면 그것은 방종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책임 질 수 있는 자유를 누리는 삶이야말로 참 행복의 길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책임지는 자유는 어디에 초점을 맞추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종종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보면 어느 것은 초점이 어긋나서 흐려지고, 반대로 초점이 잘 맞춰준 것은 선명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초점을 정확하게 맞춰야 하는데 제대로 맞추지 못해서 흐려진 삶, 만족스럽지 않은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 초점이 바로 하느님이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에 초점을 정확하게 맞추게 될 때, 분명히 우리의 삶은 더욱 더 선명해지면서 만족스러운 삶이 될 수 있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이신 요셉 성인이 바로 그런 분이십니다. 성인께서는 처녀의 몸으로 아기를 가진 성모님을 받아들이시지요. 율법을 따른다면 그의 처음 생각대로 파혼하는 것이 올바른 선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초점은 세상이 아니라 하느님께 있었습니다. 그래서 꿈에 천사의 계시를 들을 수가 있었고, 천사의 말씀을 따라 성모님을 아내로 맞아들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철저히 하느님의 뜻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예수님의 아버지가 되실 수 있었고, 죽음의 순간까지도 하느님과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어디에 초점을 맞추고 있을까요? 혹시 물질적이고 세속적이라고 불릴 수 있는 세상의 것들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요셉 성인께서 보여주신 하느님께 철저히 초점을 맞추는 삶, 그것도 강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책임을 지는 자유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우리 역시 따라야 할 때입니다.
오늘의 명언: 행복은 애써 구하는 것이 아니다. 삶에 최선을 다할 때, 목표를 향해 전진할 때 목표에 열정을 쏟아 결과를 얻는 순간 행복은 따라온다(소크라테스).
미래의 시간과 돈
“사람들에게 미래에 시간과 돈이 여유로워질지 물었다. 하나같이 여윳돈엔 인색한 반면 시간은 넉넉하게 예측했다. 우리는 시간에 제한이 없다고 착각한다. 돈은 노력하면 불릴 수 있지만, 시간은 나중이라고 해서 늘지 않는다.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시간이다. 이 시간을 어떻게 소비하고 있는가?”(에릭 바커)
분명 더 중요한 시간입니다. 그러나 무조건 ‘돈’에만 맞춰진 삶을 살려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시간을 어디에 적합하게 사용하고 있는 지를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주님께 초점을 맞추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말없이 사랑하십시오! 침묵 속에 기도하십시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다보면 진국같은 사람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말없이 사랑하는 사람.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사람. 조용히 도와주는 사람. 힘들때 든든한 배경이 되어주는 사람. 침묵 속에 기도하는 사람. 생각만 해도 마음이 든든하고 힘이 나는 그런 사람입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는 요셉 성인이 그런 분이셨습니다. 복음사가들은 그에 대해 철저하게도 함구하고 있습니다. 사실 구세주의 양부이자, 마리아의 동반자로서, 오랜 세월 구세사의 주역들을 동반하셨던 그의 역할은 참으로 막중한 것이었습니다.
요셉 성인의 특별하고 굴곡진 삶을 글로 쓰자면, 아마도 소설 몇 권으로도 부족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그는 과묵하고 진중한 사람, 침묵하고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요셉 성인은 하느님으로부터 아주 특별한 사명을 부여받았으며, 그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 일생을 봉헌했습니다. 그 사명은 예수님을 보호하고 양육하는 것이었습니다. 동시에 마리아의 순결을 보호하는 것이었습니다.
비오 11세 교황님께서는 요셉 성인의 사명이 세례자 요한의 사명이나 베드로 사도의 사명에 버금가는 막중한 것임을 강조하셨습니다. “성 요셉의 사명은 조용히 생각하는 사명이요, 침묵하는 사명이었습니다. 특히 그는 구속 사업의 비밀이 세상 사람들에게 미리 노출되지 않도록 끝까지 침묵을 지켰습니다.”
바오로 6세 교황님께서는 성 요셉의 사명은 곧 오늘날 우리 교회의 사명임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과 성모님과 함께 계실 때의 성 요셉의 사명은 보호와 방위의 사명, 수호와 원조의 사명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도 적으로부터 방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의 사명은 곧 우리의 사명입니다. 우리 역시 이 혼탁한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지키고,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 주위에 성장시킬 사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요셉 성인에 대한 신심이 각별하셨던 요한 23세 교황님께서는 그에 대한 사랑을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성 요셉! 저는 이 성인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저는 가장 먼저 그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제 하루 일과를 시작할수도, 끝낼 수도 없을 정도로 그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성모님 전문가 쇼사르 박사는 요셉 성인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성 요셉은 우리와 조금도 다름없는 보통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두발을 땅에 딛고 있었으며, 결코 지상 낙원의 꿈을 쫒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나이를 먹지 않는 영원한 청년입니다. 그는 세상 모든 가장들의 모범입니다. 그는 참으로 여성스런 동정녀 마리아와 떳떳하고 올바르게 교제할 수 있었던, 참으로 이상적이고 멋진 남자였습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이 세상, 성 요셉처럼 침묵의 사명에 충실해야겠습니다. 성 요셉처럼 하느님의 시선으로 세상 만사를 바라봐야겠습니다. 성 요셉처럼 말없이 행동하고, 말없이 사랑해야겠습니다.
“내 탓이오!”에 숨겨진 천상의 지혜
전삼용 요셉 신부님
네 명의 젊은이의 목숨을 앗아간 커다란 사고가 미국의 고속도로에서 발생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네 명의 젊은 희생자들의 시체 사이에서 부서진 위스키병 조각들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사고의 원인은 음주운전이었던 것입니다.
그 희생자 중의 한 소녀의 아버지는 그의 아름다운 딸이 그러한 뜻밖의 죽음을 당한 것에 몹시 분노했습니다. 그래서 젊은 아이들에게 술을 준 사람을 찾아내 그 한을 풀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여러 음료들을 비치해 둔 자신의 집 찬장에서 뜻밖에도 딸의 쪽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아빠, 저희가 아빠의 술 몇 병을 가지고 갑니다. 괜찮으시겠지요?”
내가 남을 심판하게 될 때 나의 불의함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사실 내가 의롭지 못하기에 남의 잘못을 들추어내는 것입니다. 의로운 사람은 자신의 불의를 감출 필요가 없기에 남의 허물을 굳이 들추어내지 않습니다. 그렇게 한다고 상대가 변화되지도 않습니다. 변화는 질책이 아니라 포옹으로 일어납니다. 이 포옹이 의로움입니다. 돌아오는 탕자를 아버지가 안아 동네 사람들이 돌을 던질 때 자신이 맞아주려 한다면 그 아버지가 의로운 것입니다. 아버지마저 자녀를 나무란다면 자신이 그렇게 잘못 키운 것까지 나무라는 것이 됩니다. 남을 나무랄 때 자신도 나무라는 것임을 알아야겠습니다.
주님 앞에 갔을 때 “너는 의로운 사람이다.”라는 말을 듣는다면 “너는 나의 나라에 들어올 자격이 있다.”라는 말을 듣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축일을 지내는 요셉 성인은 의로움의 상징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요셉 성인이 어떻게 의로움의 상징이 되었는지 잘 보여줍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약혼자가 임신한 것을 발견하면 매우 격분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 성인은 자신이 임신시켜놓고 파혼하는 것처럼 꾸미려합니다. 마리아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은 파렴치한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타인의 잘못을 자신이 뒤집어쓰는 것을 의로움이라 가르칩니다. 어차피 우리의 죄도 예수님께서 다 짊어지시고 인간에게는 죄가 없다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의롭게 되셨습니다. 그 의로움을 받은 우리들이 타인의 잘못을 들추어낸다면 그 사람은 만 달란트를 탕감 받고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나무라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를 기억하기 위해 미사 때마다 “내 탓이오!”를 외칩니다. 이는 나의 잘못만 내 탓이 아니라 이웃의 죄도 나의 탓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고백입니다. 내 탓이라고 할 때 나에게 잘못한 사람의 잘못까지도 나의 탓으로 해야 합니다. 그래야 요셉 성인을 닮은 의로움으로 이끄는 기도가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셉 성인이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작정하였을 때 하느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시어 성모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하신 사실과 그 아기는 세상의 구세주가 되실 것임을 알려주십니다. 의로운 사람만 이런 은총을 받을 수 있습니다. 남의 잘못을 찾아내는 사람은 아무 것도 모르고 어떤 은총도 받을 준비가 안 된 사람입니다. 죄가 많은 만큼 타인의 잘못도 잘 찾아냅니다.
노아가 술을 마시고 벌거벗고 자고 있을 때 세 아들 중 함이라는 아들은 이 사실을 형제들에게 알렸습니다. 나머지 두 형제는 아버지의 알몸을 보고 싶지 않아 뒤로 돌아서 들어가 옷으로 아버지를 덮어드렸습니다. 이렇게 의롭게 된 두 아들은 큰 축복을 받고 함은 저주를 받습니다. 진정으로 진리를 아는 사람들은 남의 잘못을 들추어내지 못합니다. 자신도 큰 죄인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로운 사람은 자신들이 원하는 모든 은총을 얻어낼 수 있습니다.
남의 잘못을 나의 잘못으로 삼으며 덮어준 기억이 있나 살펴봤습니다. 불행하게도 잘 떠오르지가 않습니다. 시시비비를 따지며 살아온 것 같습니다. 내가 내심 의롭지 못하기 때문에 시시비비를 가려서라도 나의 불의를 극복하고 정당한 사람이 되려고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이제는 “내 탓이오!”를 할 때 나에게 잘못한 사람과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잘못된 일에 대해 내 심장을 치려고 합니다. 그렇게 의롭게 인정받아야만 지금 받지 못하는 은총도 받을 수 있습니다. 더 받기 위해 그만큼 달라야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는 분들 모두에게 하느님의 사랑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저의 아버님은 8년 전에 하느님 품으로 가셨습니다. 말씀을 많이 하시지는 않았지만, 말씀에는 언제나 힘이 있었습니다. 물질적인 재물을 남겨 주시지는 않았지만, 제게는 언제나 높은 산과 같은 분입니다. 언제나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셨고, 책을 가까이하셨습니다. 제가 사제가 되는 날에는 손수 붓으로 쓰신 족자를 선물해 주셨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면 아버님께서 써주신 저의 서품 성구를 보곤 합니다. 제게 신앙을 물려주신 아버님께 늘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아버님과 함께했던 추억을 나누고 싶습니다.
제가 처음 본당 신부로 갔던 곳은 재정적으로 여유가 없었습니다. 어머니께서 저를 위해서 3년간 함께 살았습니다. 아버님은 어머니가 보고 싶으시면 가끔 성당으로 오셨습니다. 성당에 오시면 어르신 복사단을 만들어 주셨고, 어르신들에게 복사하는 법을 알려 주셨습니다. 하루는 아버님께서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당 담에 있는 은행나무 가지를 잘라야 합니다.’ 저는 평소에 생각하지 않았기에 ‘왜 그래야 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담벼락 바깥으로 나간 가지가 바람에 부러지거나, 태풍에 부러질 수 있고, 그러다 지나가는 사람이 다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성당에서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가을에 은행을 털어서 먹을 생각을 하였는데 아버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아버님의 말씀을 듣고 담벼락 밖으로 나간 가지를 잘랐습니다.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수녀원 마당에 꽃을 심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평소에 생각하지 않았기에 ‘왜 그래야 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수녀원 마당에 꽃이 있으면 수녀님께서 꽃을 볼 것이고, 꽃을 보는 수녀님이 기분이 좋을 것이고 그러면 신자들에게 더 잘하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수녀원 마당에 부추를 심어서 먹을 생각을 하였는데 아버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아버님의 말씀을 듣고 수녀원 마당에 꽃을 심었습니다. 예쁜 꽃을 보니 저도 기분이 좋았습니다.
나자렛의 성가정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한 적이 있습니다. 제의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요셉 성인께서 어린 예수님의 손을 잡고 있던 제의였습니다. 어린 예수님께 요셉 성인은 어쩌면 높은 산과 같았을 것입니다. 사랑을 주셨고, 손을 잡아 주셨고, 많은 것을 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힘들고 어려울 때면 요셉 성인을 생각하셨을 것 같습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요셉 성인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법대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약혼한 마리아가 임신한 것을 알았을 때, 화가 날 수도 있었지만, 조용히 파혼하려고 하였습니다. 그가 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마리아가 사람들로부터 비난과 멸시를 받지 않도록 하려고 하였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요셉은 충분히 자기 할 일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의 행동에 대해서 비난할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꿈에 천사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법대로 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대로 하기로 했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마리아를 받아들이는 것이었습니다. 요셉 성인은 이제 법대로 살기보다는 하느님의 뜻대로 살기로 하였습니다.
어제의 비로 오늘의 옷을 적시지 말고, 내일 내릴 비 때문에 오늘의 우산을 펴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걱정의 90%는 하지 않아도 될 걱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2% 가능한 걱정 때문에 90%의 삶을 걱정하고 지낸다고 합니다. 오늘 요셉 성인의 축일을 지내면서 모든 것을 마음에 품고, 하느님의 뜻대로 살았던 요셉 성인을 생각합니다. 요셉 성인이 가졌던 ‘영성’을 배운다면 우리는 다가오는 도전을 이겨내고, 참된 기쁨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안에 의로운 사람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산부인과 의사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은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사람이랍니다. 그렇다면 변호사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법 없이도 살 사람’이랍니다. 오늘 기억하는 요셉은 “법대로 사는 사람”,“의로운 사람” 입니다. 성경에서 의로움이란 하느님의 속성으로 사랑과 용서로 인간을 구하시는 하느님의 의(로마3,5 2코린5,21), 인간의 죄를 위해 무죄한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마5,17),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의 의(로마9,30. 필리3,9)를 일컫고 있습니다. 의로운 사람이란,‘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며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느님의 의로움이 인간의 징벌이 아니라 구원을 위한 것이었듯이 요셉의 의로움은 바로 한 여인을 살리는 사람에 대한 애정과 생명의 존중으로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가끔 화가 났다. 또는 홧 병이 났다는 말을 합니다. 정말 화는 불입니다. 아주 뜨거운 불입니다. 그러나 그 불로는 방을 따뜻하게 덥힐 수도 없고 밥을 지을 수도 없습니다. 더군다나 나무를 태울 수도 쇠를 달굴 수도 없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속만 태울 뿐입니다. 그러니 병이 날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화를 다스리는 법을 터득하면 좋겠습니다. 화가 나도 무조건 참는다는 것은 용수철을 눌러놓는 것과 같습니다. 무조건 누르지 말고 하늘을 보면서 잘 풀어야 합니다.
오늘 기억하는 요셉은 정말 화를 다스릴 줄 아는 분이셨습니다. 요셉과 약혼한 마리아는 결혼하기 전에 임신한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바라보는 요셉의 모습은 놀라울 정도입니다. 신명기22장을 보면 간음에 대한 규정을 말하고 있는데 “젊은 여자의 처녀성이 증명되지 않으면, 그 여자를 제 아버지의 집 대문으로 끌어내어, 그 성읍의 남자들이 그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여야 한다”(신명22,20-21).고 되어 있습니다. 법대로 사는 요셉이 이러한 규정을 알진대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마태1,19).고 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결혼을 준비하며 꿈에 부풀었을 텐데 너무도 황당한 사실에 접하게 된 것이니 실망과 좌절감 속에서 마리아에게 망신을 주고 서운함을 되갚아 주어도 시원찮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드러낼 생각을 갖지 않았다니 그러한 마음이 어디서 왔겠습니까?
돌에 맞아 죽을 허물까지도 덮어줄 수 있었던 것은 사랑 때문이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마리아를 사랑했기에 사랑하는 이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배려입니다. 사실 사랑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힘이요, 능력입니다. 그리고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더 많은 일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화를 다스리는 방법은 결국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니 지금까지 내가 하느님과 이웃으로부터 사랑받았다는 것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요 셉은 주님의 천사가 꿈에 나타나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마태1,20).했을 때 곧바로 자기의 생각을 접고 천사가 일러준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군말이 필요 없었습니다. 그저 하느님의 뜻을 따른 겁니다. 깊은 신앙은 어려울 때 드러난다고 했는데 바로 이 순간이 그의 믿음을 확인해 주었습니다. 화를 다스리는 또 하나의 방법은 철저한 믿음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믿음위에 서 있는 사람은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요셉 성인은 아주 사소한 일에도 마음 상하고 서운함을 오래도록 기억하는 우리들의 모범이십니다. 의로운 사람이란 하느님께 마음을 두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생활하며 기쁘고 진실한 마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요셉이 그런 분입니다. 그리고 요셉은 자신이 겪고 있는 일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결코 그것에 대해 알려고 하거나 해명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그저 받아들이고 살았을 뿐입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의로움을 간직한 성인의 마음을 닮고 싶습니다. “믿는 이에게는 질문이 없고, 믿지 않는 이에게는 대답이 없다”고 합니다. 오늘은 사랑으로 그리고 믿음으로 화를 다스리시길 바랍니다.
“성 요셉의 침묵과 겸손, 절대적인 신앙이 있었기에 하느님께서는 요셉을 통해 당신의 뜻을 온전히 행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우리도 하느님께 완전히 내맡겨 드린다면 그분은 우리 안에서 당신의 일을 충분히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가경자 알베리오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충실한 양부이시며 보호자이신 성 요셉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 사제의 강론에서(Sermo 2, de S. Ioseph: Opera 7,16. 27-30)
하느님께서는 어떤 한 사람에게 은총을 베푸실 때 다음과 같은 일반 법칙에 따라 하십니다. 즉 특별한 은총을 주시려고 또는 특별한 위치에 올리시려고 어떤 사람을 택하실 때 그 사람에게 자기 직분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모든 은사를 베푸십니다. 이러한 법칙은 특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양부이시며 세상과 천사들의 여왕의 참된 배필이신 성 요셉에게 훌륭하게 실현되었습니다. 영원하신 아버지께서는 요셉을 당신의 가장 고귀한 보화이신 외아드님과 성모님의 부양자와 보호자로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이 직분을 충실히 완수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에게 “착하고 충실한 종아, 네 주인의 기쁨 안으로 들어오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요셉을 그리스도의 온 교회와 관련하여 생각해 본다면, 그는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 아무런 물의를 일으키지 않고 가장 정당한 길로 오시도록 하느님께서 간택하신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교회가 동정녀 마리아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받았기에 동정녀께 큰 은혜를 입고 있다면, 동정녀 다음으로 요셉에게도 특별한 은혜를 입고 있으며 그에게 감사와 공경을 바쳐야 합니다.
요셉은 구약의 완성입니다. 요셉 안에서 예언자들과 성조들이 받은 약속은 결실을 맺었습니다. 예언자들과 성조들에게 약속으로만 주어졌던 것이 이제 실현된 것을 요셉 홀로 직접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께도 지상에 계시던 동안 당신의 아버지로서 요셉에게 보여 주셨던 그 친밀성과 지극한 존경심을 하늘에서도 거부하시지 않으실 뿐 아니라 더 완전히 보여 주신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에게 “자, 네 주인의 기쁨 안으로 들어오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영원한 기쁨은 비록 사람의 마음 안에 들어가는 것이지만, 주님께서 오히려 “사람이 그 기쁨 안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상징적으로 그 기쁨이 단순히 사람의 마음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서나 사람을 감싸 주고 마치 하느님의 끝없는 심연 속에 삼켜지듯 사람을 흡수해 버린다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복되신 요셉이여, 우리를 기억하시어 사람들이 당신의 아들로 여긴 그분께 우리를 위해 전구해 주소서. 또 당신의 정배이시며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신 동정 마리아의 자비를 얻어 주소서. 그리스도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세세에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나이다. 아멘.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다윗 가문의 요셉은 갈릴래아의 나자렛에서 목수로 일하는 의로운 사람이었는데, 그는 마리아와 같이 살기도 전에 마리아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잉태하시자, 그 사실을 몰랐던 요셉은 파혼하기로 작정하며 고뇌했지만, 주님의 천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성령에 의한 예수님 잉태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과연 인간이 그렇게 아기를 가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하느님의 개입하심을 통해 가능해지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으로부터의 신성과 마리아로부터의 인성을 받으신 온전한 하느님이시자, 온전한 인간이신 것입니다.
어쩌면 그렇게 이성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그러한 진리를 가장 먼저 받아들인 분이 바로 요셉 성인이었습니다. 그렇게 요셉 성인은 신앙 안에서 그 진리를 기꺼이 받아들임을 통해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하고, 예수님을 사랑으로 양육하며 구원의 역사에 있어서 너무나도 큰 공헌을 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제2독서 사도 바오로가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전합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믿는 분, 곧 죽은 이들을 다시 살리시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도록 불러내시는 하느님 앞에서 우리 모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너의 후손들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 하신 말씀에 따라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었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신”것입니다.>
진정한 신앙인은 아브라함과 요셉처럼 그렇게 희망이 없어 보이는 상황 속에서도 하느님 안에 굳은 믿음으로 희망을 이루어가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러한 믿음을 주십사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의로운 사람, 요셉
곽승룡 비오 신부님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마태1,19)
의로운 사람은 의로움을 사랑한다. 공동번역 성경은 “요셉은 법대로 사는 사람이었고”라고 말한다. 한국식으로 말한다면 “요셉은 법 없이도 사는 사람이었고”라고 표현을 하였을 것 같다. 그러면 “법이란 무엇인가?” 사회는 성문법으로 안정된다.
의로운 자는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다.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가 의로운 사람이다. 하느님은 그 사람을 보호하고 미래에 메시아를 파견할 것을 약속한다. 의로운 유다인들은 이 약속, 계약을 잘 지키는 백성이다.
요셉은 이 작은 자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처럼 하느님의 자비는 인간의 의로움과 만난다. 그래서일까 자비는 사랑과 약속에 신뢰함으로써 나타나는 “의롭다”는 것의 또 다른 모습이다. 여기서 “의롭다”는 의미는 남성적인 의미로 '책임'을 지는 자비(hesed)와 같은 뜻을 품고 있는 것 같다.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처녀 마리아가 어떻게 잉태되었나보다. 처녀가 애를 가졌다는 신뢰할 수 없는 처지에 있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요셉은 마리아를 벌하기 위해 법대로 해결을 하지 않는다.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요셉은 마리아에게 자비로운 행동을 취하였다. 요셉의 “의로움”은 인간적인 것을 뛰어넘는 최고 어려운 하느님의 정의인 자비였다.
요셉의 의로움은 하느님의 정의, 그분의 의로움과 비슷하였다. 그러므로 요셉은 큰 상급을 받는다. 상급이란 구원의 신비, 강생의 신비라는 하느님의 최고 신비 안에 소개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역사의 주요요소에 들어 함께한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의 삶도 하느님의 구세사의 신비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 불신앙을 가지고 있었지만, 하느님의 대표적인 인물들인 바리사이, 율법 교사들은 스스로 의로운 자들로 여겼다.
하지만 마리아는 처녀이고 하느님께 완전한 신뢰를 드렸지만, 믿지 못하는 협의를 받고 있었는데. 이것도 역시 반대 받는 표적이 되는 시대의 징표이다.
새 계약은 인간의 마음속에 숨겨져 있어 외관상 법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신앙인들은 표면적으로 거짓으로 판단되고 이해되지 않겠지만 하느님은 합당한 자들에게 숨겨진 당신 진리를 계시할 것이다.(마태 1, 18-24)
요셉의 겸손과 순명이 예수님을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다윗의 자손 요셉은 하늘의 뜻에 공감하며 자기의 뜻은 포기했습니다.
요셉의 겸손과 순명이 예수님을 통해서 하늘과 소통 문 열어줬습니다.
결국 하느님 뜻인 예수님은 직접 인간으로 오셔서 우리와 소통한거죠.
그러나 이 시대 사람들은 하늘 뜻이 자기뜻에 맞춰야한다고 대듭니다.
하늘뜻 무시하면서 자기의 뜻이 기본이라며 허무 맹랑 괴변들 폅니다.
이런 괴변 고집하며 속이니 하느님의 사랑 세상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인류가 사랑하며 평화롭게 살려면 하늘 뜻 예수님과 공감해야 됩니다.
예수님 후 사도들 통해 하나로 이어오는 가톨릭신앙 널리 선교합시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마태 1, 20)
김웅태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은 주님의 축복 담뿍 받으십시오.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저도 요셉이라는 세례명을 갖고 있는데, 오늘 축일을 맞은 모든 요셉 형제님들께 진심으로 축하 인사를 드립니다. 또한 요셉이라는 세례명을 남편으로 가진 모든 가정에 주님의 축복을 빕니다.
사순절 중에 맞이하는 성요셉 대축일은 비록 사순절이긴 하지만, 성 요셉 대축일의 기쁨을 교회는 경축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요셉이 차지하는 위치는 대단하기 때문이죠. 오늘 축일의 이름도 "복되신 동정마리아 배필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복되신 동정마리아 배필"이라는 칭호는 얼마나 아름답고 복된 것입니까? 구세주 예수님을 낳아주신 성모 마리아의 배필이시니 그 지위가 얼마나 복되고 영광스럽겠습니까?
예수님을 기르신 양아버지로서 그리고 성모마리아와 예수님과 성 요셉이 함께 이루는 성 가정의 가장으로서, 예수님의 지상 삶을 책임지셨습니다. 손수 노동의 모범을 통해서 주님께서 주신 노동의 숭고함을 몸소 보여주셨고 또 노동을 통해서 살아온 과정을 통해 하느님 집안의 충직한 관리인이셨습니다.
• 요셉 성인이 훌륭하신 것은 선택의 순간에 자신의 뜻을 찾은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에 순종하셨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자신과 약혼한 처녀 마리아가 정식으로 혼인하기도 전에, 아기를 가졌다는 말을 듣고 곰곰히 고민하며 생각하던 중에 마리아의 일을 드러내지 않고자, 즉 마리아의 일을 드러내서 창피를 주고 마리아를 곤경에 빠지게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남몰래 파혼하기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리아를 참으로 배려하는 그런 생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보통 일반 사람 같으면 어떤 배신감으로 오히려 그런 일을 드러내서 망신을 주거나 곤경에 빠뜨리려고 하는 것이 인간사회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요셉은 마리아가 그런 일을 당했다 하더라도 마리아의 처지를 배려하는 뜻으로 남몰래 파혼하기로 했다는 것은 참으로 마리아를 배려하는 뜻이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서 요셉에게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마태 1, 20~23)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마태 1, 24)
이렇게 요셉은 선택의 중요한 순간에, 자신의 뜻을 따르기보다는 주님의 뜻을 따른 것이 대단히 훌륭한 점입니다. 이것은 주님께 순종하는 것이며, 그것은 또한 자신의 의지보다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며, 자기 자신은 하느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 준 것입니다.
예수님의 아버지가 되실 분이 이처럼 하느님의 뜻에 전적으로 따랐다는 것은 대단한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류에게 대단한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 요셉은 훌륭한 아버지의 상이며 훌륭한 남편의 상도 됩니다. 충직한 가장으로서 열심히 가정을 부양하는 모습 속에서 충직한 가장이신 아버지의 모습을 볼 수 있고, 또 성모님을 자신의 평생 배필로 삼아, 마리아를 인격적 파트너로 대하면서 주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마리아의 입장을 존중하며 함께 주님께 협력했던 훌륭한 남편의 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요셉 대축일을 맞이해서 이 시대의 가정들이 여러가지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런 상황 속에서, 성요셉이 몸으로 보여주신 훌륭한 아버지 상과 훌륭한 남편 상을 본받아, 가정의 어려움 중에도 주님께 축복받는 가정이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아멘.
[생각해 봅시다]
• 성 요셉 대축일을 맞이하여 만일 내가 한 집안의 가장이라면 나는 그 가정을 어떻게 꾸려가고 있습니까?
• 또 내가 만일 한 여인의 남편이라면 나는 그 아내에 대해서 어떤 관계로 인생의 여정을 가고 있습니까?
• 이에 대한 나의 느낌은 무엇입니까?
성 요셉 대축일에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저희에게도 자비를 베푸시어,
영원으로부터 주님의 사랑을 받는 하느님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와 복된 사도들과 모든 성인과 함께 영원한 삶을 누리며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소서.”(미사 전례문 성찬의 전례 ‘전구 기도’ 끝부분)
2016년 대림시기부터 교회는 ‘복되신 동정마리아와’ 다음에 ‘그 배필이신 성 요셉과’를 전례문에 새롭게 넣어 전구 기도를 하도록 했다. 이는 교회가 ‘성 요셉’의 위치를 확고히 했음을 알린다. 우리 신앙 선조들은 위급할 때 ‘예수, 마리아, 요셉’을 불렀다.
오늘 ‘성 요셉’의 날이다. 아브라함과 버금가는 ‘믿음의 사람’ 성 요셉께 우리도 마음껏 전구를 청해 보자!
불암산 배경같은 성 요셉. -참 크고, 깊고, 고요한 분-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입당성가 280장 성 요셉 찬양은 언제 들어도 신바람이 납니다. 사순시기 우리 마음을 기쁨으로 활짝 꽃피게 합니다.
“성 요셉-찬양하세/주님의 양부를/정결하-신/마리아의 정배
의로우신/성요셉/우리 양자로 삼-아/언-제나 우리 마-음-을
정결케 하시며/의롭게/생활하-도-록/이끌어 주소서.”
오늘은 우리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의 주보 성인이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자랑스런 대축일에 참 자랑스런 요셉 성인입니다. 광야의 사순시기 흡사 오아시스처럼 느껴지는 대축일에 화당송 후렴도 우리를 기쁨으로 충만케 했습니다.
“주-여, 넘치도록 자비를 베푸시어 우리 한생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잠시 충격적이며 신선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아주 예전 함세웅 신부님이 선종완 신부님과 함께 구약성서를 번역했던 개신교 구약학 전공의 문익환 목사님과 나눴던 일화입니다.
“하루는 문 목사님께서 ‘함신부!’하고 부르시더니, ‘나는 말이야, 예수님이 미혼모 아들인 것 같아.’ 그러시는 거예요. 저희 가톨릭에서 그것은 상상조차 못하거든요. 우리는 항상 ‘동정 성모 마리아’ 이렇게 말했는데---‘구약학 전공하신 목사님이 그렇게 해석하셔도 돼요?’ 그랬더니, ‘나, 그렇게 생각이 들어.’그러셔요. 문익환 목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셔서 내가 놀랐다는 것을 가톨릭에 소개한 적이 있어요. 놀란 것은 죄가 아니니까 이렇게 소개했지요.”
계속 이어지는 함신부님이 전해 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발상 자체가 독특하고, 마리아에 대해 그렇게도 접근하다니 참 대단한 분이라고 생각했어요. ‘우리 시대의 많은 여성들, 그중에서도 미혼모의 자녀들이 세상을 구할 수 있는 구세주일 수 있다. 구세주를 꼭 하느님의 아들로서 기계적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다. 그런 역사 속에서, 약자 속에서 태어날 수 있다. 그 속에서 세상이 변화되고 구원이 이루어진다.’ 이런 과감한 구원론을 펼치시는 거예요. 그런 논의는 개신교 자유신학에서나 가능하지, 개신교에서도 근본주의에서나, 가톨릭 신학에서는 사실 불가능하거든요. 문익환 목사님의 그런 면모를 통해 신선한 자극을 받기도 하고 배우기도 했어요.”
함신부님의 진솔한 고백입니다. 우리로서는 받아들이기 참 거북한 내용이지만, ‘이런 깊고 넓은 측면의 이해도 있을 수 있겠구나!’ 하는 신선한 느낌도 듭니다. 이런 해석이 하느님과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와 요셉의 성덕에 손상을 주기는 커녕 오히려 ‘우리 하느님의 전능과 자비는 더욱 빛나고 불우한 역경을 이겨낸 예수님과 성모님, 요셉 성인의 산같은 덕은 더욱 우러러 보게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언뜩 들었습니다.
요셉 성인 하면 우선 연상되는 것이 ‘늘 거기 그 자리’ 요셉 수도원을 품에 안고 있는 듯한 배경의 불암산입니다. 꼭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의 배경이자 품같은, 아니 가톨릭교회의 영원한 배경이자 품같은, 하느님 아버지의 부성을 닮은 성 요셉이란 생각이 듭니다. 아주 예전 저녁 고요한 시간 불암산을 바라보며 써놓은 짧은 시가 생각납니다.
-“아/크다/깊다/고요하다/저녁 불암산!”-
첫째, 성 요셉은 큰 산같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에서 요셉의 지체없는 순종을 통해 그분의 산같은 믿음이 잘 드러납니다. 말그대로 인내의 믿음, 순종의 믿음, 겸손한 믿음의 큰 산같은 성 요셉의 믿음임을 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도 하느님께서 속내를 다 밝히실만큼 요셉을 깊이 신뢰하셨음을 깨닫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보다시피 나탄 예언자를 통해 주님의 말씀을 전달 받은 믿음의 사람, 다윗을 닮은 요셉입니다. 다윗에게 주어진 다음 약속은 믿음의 성인 요셉을 통해 실현됩니다.
“너의 집안과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지고,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
다윗에 버금가는 하느님의 신뢰를 한 몸에 받았던 믿음의 성인 요셉입니다. 또한 제2독서에서 바오로가 소개하는 아브라함의 믿음에 버금가는 요셉 성인의 믿음이었음을 봅니다.
“아브라함은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너의 후손들이 이렇게 많아질 것이다.’ 하신 말씀에 따라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었습니다.”
이런 믿음의 성 요셉을 참으로 사랑하셨던 성 요한 23세 교황님입니다. 교황님의 진솔한 고백도 감동입니다.
“성 요셉, 나는 이 성인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 나는 제일 먼저 성 요셉의 이름을 부르고 성 요셉의 일을 사랑하지 않고는 내 하루의 일을 시작할 수도 끝낼 수도 없을 정도로 성 요셉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둘째, 성 요셉은 참 깊은 연민의 사람이었습니다.
좋은 산은 높은 산이 아니라 깊은 산이라 합니다. 좋은 사람 역시 높은 사람이 아니라 깊은 사람입니다. 깊은 산에 맑은 물이듯 깊은 사람에 맑은 영성입니다. 산처럼, 바다처럼 깊은 사람이 성 요셉입니다. 바로 가이없이 깊은 하느님을 닮은 연민과 겸손의 성 요셉입니다.
바로 곤경에 처한 마리아에 대한 섬세한 배려에서 성 요셉의 연민의 깊은 사랑이, 참으로 겸손한 사랑이 잘 드러납니다. 그대로 하느님 같은 마음입니다.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성 요셉을 통해 참 사람 하나 만나는 느낌에 기분이 좋습니다. 참으로 연민의 사랑, 겸손한 사랑이 있어 비로소 의로운 사람임을 봅니다. 오로지 하느님같은 마음으로 마리아편에 서서 그를 보호한 의인 요셉의 고귀한 인품이 감동적입니다.
셋째, 성 요셉은 참 고요한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기도가 답입니다. 요셉 성인은 평소 끊임없는 기도로 하느님과의 관계를 깊이해 왔음이 분명합니다. 바로 이런 기도가 성 요셉을 큰 산같은 믿음의 사람, 깊은 바다같은 연민의 사람으로 만들었음을 봅니다. 요셉의 고요한 밤샘 기도중 꿈에 나타난 주님 천사의 전갈입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밤샘 고요한 기도중에 들려온 주님의 말씀입니다. 새삼 주님과 얼마나 깊은 관계의 친교를 나눈 성 요셉인지 깨닫게 됩니다. 요셉은 ‘하느님을 돕다.’라는 뜻입니다. 평생 하느님을 돕듯이 성가정을 돕고 보호하는 데 한평생 항구하고 충실하셨던 성 요셉이었습니다.
교구설정 50주년을 맞이한 안동교구는 ‘존천안빈存天安貧’을 그 영성 모토로 택했다 합니다. ‘하늘의 뜻을 가슴속에 간직하면서 가난을 편안하게 여기고 하느님의 가르침을 즐기며 살아가는 정신’이라 합니다. 그대로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너그러움과 사랑, 청빈의 정신을 담은 존천안빈의 영성입니다. 부전자전입니다. 바로 성 요셉의 존천안빈 영성을 그대로 닮은 예수님의 영성을 살려는 안동교구입니다.
참 자랑스럽고 매력적인, 하느님 아버지를 그대로 닮은 아버지의 영원한 롤모델인 성 요셉입니다. 요셉 수도원 배경의 산처럼 크고 깊고 고요한, 믿음과 연민, 기도의 사람, 성 요셉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또한 성 요셉같은 크고 깊고 고요한 믿음과 연민, 기도의 사람으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성 요셉 성월의 3월, 성 요셉에게 바치는 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우리 주 예수님을 기르신 아버지시오
정결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이시며
임종하는 이의 수호자이신
성 요셉에게 청하오니
하느님께 빌어 주시어
저희가 예수님을 사랑하며 충실히 따르게 하소서.” 아멘.
또한 죽을 때에 저희를 지켜 주소서.” 아멘,
사랑은 찬란한 고통이다.
최민석 신부님
봄이 오니 강과 산과 나무와 그 풀잎들이 소리를 지른다. 저토록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것은 추운 겨울이고 어둠이며 빛의 고통이다. 해 지는 저녁 찬란한 노을빛이 빛의 고통이다. 봄날의 새싹들은 저 찬란한 고통이다.
이 세상 모든 만물이 고통 없으면 제 색깔을 낼 수 없듯이 이 세상을 사는 모든 생명도 고통이 없을 수 없다. 만물이 색채를 지닌다는 것은 바로 고통의 빛이 있다는 증거다. 제 삶에 고통이 있다는 것은 건강하고 완전한 생을 살고 있다는 증거이자 증명이다.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하다. 그 고통을 받아들임으로써 그 고통을 이겨내는 일들이 가득 차 있다. 고통은 피할 수 없지만 고통을 받는 것은 선택이다. 있는 그대로 지금 이대로의 고통을 견디어 보면 그것이 고통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고통 저변에 자유와 평화 그리고 사랑이 살아 숨 쉬고 있다. 아 그 놀라운 자유, 고요한 평화 그리고 충만한 사랑이 거기에 있다.
“모든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다.”(히브리서 11,2) 만일 누가 어떤 사물에서 그 것을 있게 한 ‘사물 아닌 것’을 본다면 그는 시방 하느님을 보고 있는 것이다.
비어 있는 것은 차 있지 아니한 것이다. 아무리 단단한 사물이라 해도 그 실체를 들여다보면 비어 있는 것이다. 어둠과 고통 거기 있다고 말하는 순간 벌써 거기에 있다. 고통은 있다고 할 수 없고 없다고 할 수도 없다. 고통은 관념일 수 있다. 실재하지 않는데 고통스럽다고 생각함으로써 고통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사랑만 있다.
내가 보는 봄의 향연이 사랑의 고통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는 생각에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나의 삶을 주도하는 고통이야말로 삶을 아름답게 하는 절대 자유와 평화 그리고 사랑인 것이다. 이 놀라운 색깔이 고통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보잘 것 없는 내가 고통에 의해 인간이라는 색깔을 지닌다는 것은 참으로 당연하고 감사한 일이다.
고통 없는 사랑은 없다. 모든 사랑은 고통이다. 사랑이 시작되면 고통도 시작된다. 고통이 없으면 이미 사랑이 아니다. 사랑하면 너무 고통스러워 사랑하고 싶지 않다. 이것은 생각일 뿐 삶의 지혜는 아니다. 이 생각은 배고플 때 밥을 먹지 않고 배부르기를 바라는 것과 똑같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사랑은 해야 한다. 배가 고픈데 밥을 먹지 않고 어떻게 배부를 수 있는가.
사랑은 늘 비어 있고 고요하다. 그래서 헛된 생각이 일지 않는다. 사랑은 나지도 죽지도 않고 움직이지도 움직여지지도 않는다. 사랑은 맑고 깨끗하다. 인간은 마음이 어두워서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헛된 생각이 끊이지 않는다. 좋아하는 것을 취하고 싫어하는 것을 버리려 용을 쓴다. 이것이 곧 흐리고 어지러운 마음이다.
예수님 말씀에 마음이 깨끗하면 하느님을 본다고 했다. 눈으로 보면서 그 모양에 잡히지 않고 귀로 들으면서 그 소리에 잡히지 않고 몸으로 느끼면서 그 느낌에 잡히지 않으면, 그는 하느님 나라에 살고 있는 것이다. 모양에 잡히지 않으려면 모양을 잡지 말아야 한다.
“뱀은 하느님이 만드신 모든 짐승 가운데서 가장 간교하였다............. 뱀이 여자에게 말하였다. 동산 한 가운데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는 날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된다. 여자가 쳐다보니 그 나무 열매는 먹음직하고 소담스러워 보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것은 슬기롭게 해 줄 것처럼 탐스러웠다. 아담과 하와는 그것을 먹었다.”(창세기 3,6-7)
간교한 뱀이 상을 세운 것이다. 상을 세우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하느님의 시선이다. 사랑으로 보는 눈이다. 하느님의 눈은 보이는 사물의 상(像)을 망막에 비치는 순간에 지워버린다. 그 사이가 없다시피 하면 비치면서 비치지 않는다.
내가 만일 있는 그대로를 보면 하느님 아니 것이 없다. 고통은 피할 일이 아니다. 고통을 피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고통스럽다. 가능한 한 고통을 그윽이 바라볼 수 있고 따뜻하게 어루만질 수 있는 부드러운 하느님의 눈이 이미 내게 있다.
은혜로운 사순절 기간을 보내면서 십자가는 고통이면서 동시에 사랑으로 다가온다. 십자가의 고통이 누군가에게 위안이 될 때, 나의 고통이 누군가에게 사랑이 되고 존재의 의미가 될 때 그것은 오히려 감사이자 행복일 수 있다. 봄이 오고 있는 소식이 들린다. 봄은 고통이면서 사랑이다.
<하늘 뜻>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늘 뜻
남모르게
마음 깊은 곳에
곱게 품고
낯설고 두려운
길을 떠난다
쓰라리게 다가오는
헤아릴 수 없는
하늘 뜻
나를 넘어
온 누리 품으리라
믿고 바라기에
목숨을 걸고
먼저 길을 나선
사랑하는 이의
곁이 되어
하늘 뜻이 되고자
길을 떠난다.
요셉 성인만큼만 되어도 <마태오 1, 16. 18-21. 24ㄴ>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모든 가정이 닮고 싶은 성가정의 일원이며 모든 양아버지의 모범이며 의인 중의 의인이실 뿐만 아니라, 임종자의 주보이신 요셉 성인처럼 사는 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여기다 오늘 꼭 덧붙이고 싶은 말은 모든 아버지는 요셉 성인과 같이 착하고 의로운 아버지로 가정의 버팀목이 되어서 모든 가정이 평화롭고 더욱더 성스러운 가정이 되도록 기도하며 묵상 글을 써나갑니다.
요셉 성인의 성서 기록은 성모님에 대한 의로움과 보통은 생각할 수 없는 생각을 하시어 구원의 길을 완성하셨으며, 가난한 가정의 가장으로 몫을 다하시려고 어려운 목수 일을 하시며 가정을 꾸려나가셨습니다. 성령의 말을 <꿈에 천사의 말로 해석합니다> 듣고 따르는 순종의 정신으로 어떤 고난도 받아들이시고 실천하시어 주 예수를 보호하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성취하도록 도우셨습니다. 주님을 잃어버려 찾은 다음에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줄 모르셨습니까?” 하셨을 때 어떤 노여움도 없이 받아들이셨습니다.
오늘을 사는 아버지, 남편, 가장이 이만하면 족하지 않습니까? 따라 살 필요가 있습니다. 가부장적 권위를 찾고, 남자라는 위신을 찾고, “내가 다 벌어먹이는데” 하며 자기 공로를 앞세우는 사람이 요셉 성인의 모범을 따르면 어떤 가정이든지 성가정, 행복한 가정이 됩니다. 자유와 평화와 기쁨이 넘치는 하느님의 나라가 가정 안에 임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는 아버지 역할을 해야 할 위치에 있어야 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 교황, 주교, 각 공동체의 장상, 본당 신부 아니 모든 사제들, 이들은 양을 자식처럼 대하고 하늘 길로 인도해야 하는데 마음에 드는 사람만 보고 돌보아야 할 많은 이를 요셉 성인처럼 돌보지 않는 이들은 오늘 요셉 성인 축일 미사와 기도 시간에 그런 은총을 성령으로부터 받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많은 상담자들은 남편의 권위주의에 시달리고 하소연합니다. 아직도 많은 신자들이 엄한 본당 신부에게 소외되어 속 불평을 말하고 신앙생활에 장애가 있다고 말합니다. 아버지가 무서워 가출하는 아이들이 있다면 가출하는 아이가 아니라 아버지가 반성해야 합니다.
남자들이 모두 일어나 요셉 성인처럼 의롭고 착하고 온유한 남자이며 아버지로 살아 기기를 요셉 성인과 주님, 성모님께 기도합니다. 병자를 돌보는 병원의 의사, 각 분야의 전문의들이 환자에게 참 아버지 같은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믿음의 사람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님
하느님은 우리 한 사람마다 사랑의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분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1요한 4,8). 그러나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어려움은 그 계획을 발견하는 방법을 모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의 십자가입니다. 논리적으로 우리는 십자가들을 받아들이는 것에 불평하거나 저항합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의 본성입니다.
한국에 있는 우리 수도원에 살고 있는 독일인 선교사이며 수도자 한 분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주 보나벤뚜라 수사님입니다. 지금은 파키슨 병 때문에 병고에 시달리고 계십니다.
2007년 성금요일 새벽에 우리 수도원에 큰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재난이었습니다. 수도원 건물은 거의 전소되었습니다. 제 방도 완전히 불에 타고 말았습니다. 몸만 빠져나왔습니다. 수도원 건물을 다시 지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큰 문제가 있었는데, 사실 집을 지을 재원이 없었습니다.
보나벤뚜라 수사님은 요셉 성인께 기도를 많이 하셨습니다. 여기에 아기 예수님을 안고 계시는 요셉 성인상이 있습니다. 제가 스페인에 선교사로 올 때 보나벤뚜라 수사님이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수도원 재건이 끝날 때까지 이 요셉 성인상께 매일 기도하셨습니다. 수사님의 기도 덕분에 수 많은 은인들이 수도원을 재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수도원은 3년만에 지을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모든 것은 요셉 성인의 전구 덕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마리아를 보는 것은 성 요셉에게 쉽지 않았습니다 (마태 1,18). 이 잉태는 하느님의 뜻이었습니다. 요셉은 파혼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렇지만 “남모르게” (마태 1,19) 하기로 했습니다.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마태 1,20) 그에게 아기 예수님의 양부가 되어야 함을 계시하자 성 요셉은 즉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마태 1,24).
우리의 성인, 요셉 성인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순절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을 발견하는 좋은 기회입니다. 또한 이 뜻을 실천에 옮기고자 하는 우리의 꿈에 힘을 실어주는 좋은 기회이기도 합니다. “마리아의 배필이시며 믿음의 사람”이신 분의 전구를 통하여, 우리가 회개의 길을 더욱 걸어 나아가고, 성 요셉을 본받아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데 나아가며, 이웃과 더불어 애덕을 수행하는데 앞장설 수 있도록 선하신 하느님께 기도하십니다. 요셉 성인은 하느님 뜻을 따르는데 우리를 항상 도와주실 것입니다.
“성 요셉이시여, 당신 아들딸들인 우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아브라함은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였습니다.> (로마 4,18)
눈앞이 캄캄할 때가 있습니다. 앞이 도무지 보이지 않습니다. 희망이라고는 눈꼽만큼도 보이지 않고 온통 절망 뿐입니다. 이제 다 내려놓고 그냥 스러지는 것밖에 다른 길이 안 보입니다. 살다보면 이렇게 '희망이 절벽'인 때가 있습니다. 그 때가 가장 큰 위기이지만 다른 편에서는 하느님의 손길을 가장 강력하게 체험할 수 있는 은총의 기회일 수도 있습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바닥까지 내려 간 사람은 이제 더이상 내려 갈 곳이 없고 올라 갈 일만 남았으니 희망할 수 있습니다. 절망에 빠지는 사람은 그 추락의 끝이 보이지 않아서 두려울 뿐입니다. 바닥까지 내려가면 바닥을 차고 올라 올 수 있습니다.
저는 어릴 때 동네친구들과 냇가에서 멱감으며 깊은 곳 바위에서 다이빙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깊어서 바닥까지 내려가는데 시간이 많이 걸려 중도에 발버둥치며 올라오다가 엄청 물을 많이 먹고 혼난 적이 있어, 물에 대한 약간의 트라우마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만 더 인내하고 기다렸다면 바닥을 치고 더 쉽게 올라올 수 있었을 것을 괜한 두려움에 억지로 발버둥치다가 더 죽을 뻔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삶의 진리 하나를 터득했습니다. "추락에는 반드시 끝이 있다. 하느님께서는 죽지 않을만큼 견딜 힘을 주신다. 더 큰 기쁨과 축복을 위해 작은 추락은 마땅히 견디어내어야 한다."
여러분은 지금 올라가고 있나요? 그럼 힘차게 비상하십시오. 내려가고 있나요? 세상 바닥을 더 자세히 바라보십시오. 모두가 축복입니다. 오르막도 축복이고 내리막도 축복입니다. 올라감도 축복이고 내려감은 더 큰 축복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믿음의 성조 아브라함에 대해 경탄하며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였다!"고 말합니다. 믿음은 사실 희망할 수 없는 상태에서 필요합니다. 이미 희망과 가능성이 예측된 상태에서는 믿음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저는 오늘 우리가 경축하는 성 요셉에 대해서도 똑같이 경탄하며 묻고 싶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나요?" 나와 평생을 행복하게 함께 하겠다고 언약한 그 아리따운 나의 약혼자가 남의 아이를 베어 왔는데 이런 청천벽력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마리아를 받아들일 수가 있었나요? 절망의 늪 속에서 새롭게 피어나는 희망의 꽃을 어떻게 보셨나요?
벗님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여러분은 지금 미래가 희망적입니까? 희망이 보이기 때문에 희망적입니까? 아니면 희망이 없어도 희망적입니까?
신앙인은 근본적으로 희망의 사람입니다. 어떤 처지에서든 희망적이고 낙관적인 사람이 참 신앙인이지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참 신앙인입니까? 하느님께 굳은 믿음을 두고 있는 사람은 어떤 절망 가운데서도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는 참으로 사랑의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 희망, 사랑은 함께 갑니다. 신망애 삼덕은 그리스도인의 필수덕목입니다. 희망적이지 않는 사람이 결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없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결코 믿음의 사람, 희망의 사람이 될 수는 없습니다.
지금 내 삶에 명확하고 실현 가능하며 성공까지 손에 잡힐 듯한 미래가 보장된다면 행복할까요? 아브라함과 요셉의 경우에서 보듯, 신앙은 결과를 전혀 기대할 수 없을 때 발휘되고, 희망은 희망이 없어보이는 순간에 빛을 냅니다. 모든 것이 안전하게 보장된 상황이 인간적인 위안은 줄지언정, 영혼이 정신 바짝 차려 깨어 있지 않으면 믿음의 거품은 사그라지고 희망의 빛 또한 스러지고 마는 것은 시간 문제입니다.
그러니 믿음과 희망이 절실한 순간을 맞닥뜨렸다면 감사하십시오. 믿음과 희망 따위는 저만치 제쳐놓고 눈에 보이는 것만 붙잡고 따라가도 앞길이 창창하다면 오히려 두려워하십시오. 구원은 산술적 논리와 인과 관계를 발판으로 다가오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을 믿고 드러나지 않는 것을 희망하며 묵묵히 아무 말 없이 충직하게 성심껏 "없는 길"을 갈 때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신앙인은 기도를 많이하고 좋은 일을 많이하는 사람을 뜻하지 않습니다. 위대한 신앙인은 아브라함과 요셉처럼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순간조차도 희망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도 하느님의 자비를 굳게 믿음으로써, 어떤 절망 가운데서도 희망을 잃지 않음으로써 많은 이들에게 큰 사랑의 선물을 주는 자 되시길 축원합니다.
성조 아브라함,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성 요셉,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신적인 의로움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의로움은 남성의 덕 사랑은 여성의 덕이라 해도 좋겠지. 그렇기에 반대로 독선은 남성의 악덕 질투는 여성의 악덕이라고 해도 될까?
의로움이 남성의 덕이라면 오늘 축일을 지내는 요셉을 특별히 의롭다 추어줄 이유가 있을까?
사랑-이해적인 여성에 비해 남성이 사리-판단적이고 그래서 남성이 여성보다 더 의로움을 중시하고 의로움에 강점이 있다 해도 모든 남자가 다 의로운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의로움이란 진리를 지향하고 진리를 수호하며 진리에 순응하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삶에는 진리를 저버리게 하는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첫 번째 것이 人情입니다.
인정에 끌리어 우리는 의로움을 잃기도 합니다. 잘 아는 이의 딱한 사정을 봐주다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친구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불의를 저지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두 번째 것이 욕심입니다.
누구 때문이 아니라 자기 욕심 때문에 진리를 저버리는 경우입니다. 욕심에 눈이 멀면 진리가 보이지 않고 진실도 왜곡합니다.
그러므로 의로우려면 이런 인정과 욕심을 칼처럼 잘라내야 합니다. 그러나 욕심은 과단성 있게 잘라내야 하지만 사랑마저 그렇게 해도 된다는 것은 아니겠지요. 냉정할 필요는 있어도 무정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무정함과 사랑 없음은 가장 큰 불의이기 때문입니다. 진리에 부합하게 하는 것이 가장 큰 사랑이지만 최고의 진리는 사랑의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도 사유화하지 않고 진리도 사유화하지 않을 때 우리는 최고의 진리 안에서 사랑하고 최고의 사랑으로 진리에 의합함으로 신적인 의로움에 도달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축일을 지내는 성 요셉은 이 신적인 의로움에 가까이 다가간 남자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루카 19, 20)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겨울을 뚫고 나온
봄꽃소식이 여기저기서
들려옵니다.
마리아를 진심으로
존중했던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그저 사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사랑하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진심을 잃어버린
우리들에게 성 요셉은
진심어린 가슴을
다시 찾아 줍니다.
사람을 살리는 것이
참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마리아를 끝까지 도와주고
감싸 안아 줍니다.
요셉 성인이
우리에게 보여준 지혜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다시
시작하는 지혜였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기위해
뒤로 물러나는
겸손함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겸손과 순종은
평범한 일상안에서
자연스레 드러날 수 밖에
없습니다.
언제나 먼저 상대를 배려하는
요셉 성인의 삶이었습니다.
서로를 지켜주는 것은
신앙을 바탕으로 한
건강한 책임감입니다.
지켜주고 보살펴주는
사랑없이는 그 어떤 것도
자라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삶을 뒤돌아보면
삶의 요소요소마다
신앙의 디딤돌같은
요셉 성인이 있었습니다.
우리또한
누군가를 빛내게 하는
작은 성 요셉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참다운 신앙의 동행은
먼저 하느님 말씀을 듣는
겸손과 순종에서 비롯됩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 말씀을 들으려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길
기도드립니다.
참된 사랑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됨을 성 요셉에게서
다시 배우는 은총의
대축일 되십시오.


영국에서 실시한 연구 결과를 보면 아주 인상적입니다. 우선 10대에게 부모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인지를 물었습니다. 응답자의 약 75%가 자신의 말에 귀 기울여주고 이해해주는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그렇다면 부모는 자녀의 말에 귀 기울여주고 이해해주는 것을 얼마나 중요하다고 생각했을까요? 단 41%만이 귀 기울여주고 이해해주는 것이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원하는 바를 들으려고 또 알려고도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사실 부모가 아이의 말에 귀 기울이면 아이는 자존감이 높아질 뿐 아니라 독립심이 강해져서 사회적인 능력이 향상된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부모들은 아이들의 말과 생각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부모 자신의 말과 생각에 자녀들이 무조건 귀 기울이고 따르기를 원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는 부모와 자녀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은 아닐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타인의 말에 귀 기울여주고 또 이해하기 보다는 자신의 생각만을 주장하고 강요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진정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분명 한쪽에서는 아픔과 상처를 안게 됩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의 말에 귀 기울여주고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과연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이해하려고 할까요? 그렇지 못합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의 말에도 귀 기울이지 못하는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될 것입니다. 사람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주님의 모든 행동에 대해서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아마 늘 주님께 대한 불평불만만 가득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요셉 성인을 떠올려봅시다. 그는 갈릴래아의 나자렛에서 목수로 일하는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즉,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면서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지요. 그런데 약혼한 마리아가 같이 살기도 전에 아기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요. 인간적인 판단을 하게 되면 자신의 아기가 아니니 파혼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사람들에게 알려서 공개적인 심판을 받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듣고 또 이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꿈에서 들은 주님의 천사의 말씀을 듣고는 이해해서 아내로 맞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들으려고 하지 않고 또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았다면 꿈에서 들은 메시지를 따를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기준보다는 하느님의 기준을 늘 이해하려고 했기에 꿈에서 들은 메시지라도 소홀히 하지 따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기준에 따라서 듣고 이해하는 넓은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넓은 마음이 하느님의 아드님과 함께 할 수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우리 역시 어떻게든 듣고 이해하는데 최선을 다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하게 해주시고, 제가 할 수 없는 것은 체념할 줄 아는 용기를 주시며 이 둘을 구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정문정).
나의 관심은?
여행 관광 가이드를 만나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가 이런 말을 합니다.
“신부님, 제가 가이드를 잘 하기 위해 제일 많이 보는 책이 무엇인지 아세요?”
“관광 가이드 책이나 역사책이 아닐까요?”라고 답하니 뜻밖의 대답을 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식물도감’이라고 합니다. 한국에서 오신 분들은 그 지역에 대한 질문이나 유적지에 대한 질문보다는 한국에서 보기 힘든 나무나 꽃을 가리키면서 이름이 무엇이냐고 너무 자주 물으신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그 지역에 오래 살았어도 그 나라를 대표하는 나무나 꽃이 아니고서는 어떤 것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겠지요. 저 역시 갑곶성지에 있는 모든 나무와 꽃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마치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생각하는지 끊임없이 나무와 꽃을 가리키며 물어보신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관심 있는 것이 궁금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관심이 없으면 질문도 있을 수 없으니까요. 즉, 질문이 있는 곳에 나의 관심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의 관심은 어디에 있을까요? 주님께 관심은 있는 것 같습니까? 주님께 대한 질문이 없다면 그만큼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닐까요?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전에 성당 마당에 식당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가건물이었지만 그래도 식당의 모습을 갖출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먼저 땅을 파고, 바닥을 견고하게 하였습니다. 바닥이 견고하지 않으면 건물이 제대로 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처음 바닥에 시멘트를 부울 때만 보았지 나중에 건물이 세워진 뒤에는 땅에 묻힌 바닥을 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건물이 튼튼하게 설 수 있는 것은 바닥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식당에서 많은 사람들이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주방 설비도 마련하였고, 책상과 의자도 준비했습니다. 선풍기도 달았고, 창문도 예쁘게 만들었습니다. 모든 것들은 눈으로 볼 수 있었지만 바닥은 여전히 볼 수 없었습니다.
우리의 몸도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바로 볼 수 있는 얼굴이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바쁘게 움직이는 손과 발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우리들의 얼굴과 손과 발을 보면서 판단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몸이 건강하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하루를 살 수 있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쉬지 않고 움직이는 고마운 존재가 있기 때문입니다. 신선한 공기와 양분을 전해주는 혈관이 있습니다. 우리가 먹은 음식물을 소화시키고 영양분으로 만들어 주는 소화기관이 있습니다. 언제나 바른 자세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해주는 골격이 있습니다. 관찰하고 판단하여 행동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뇌가 있습니다. 어쩌면 중요한 것들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인지 모르겠습니다.
운전 중에 타이어가 파손된 적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일찍 발견하였고, 주변에 차량이 없었기 때문에 타이어를 교체하였습니다. 차에는 스페어타이어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제가 2007년에 차를 구입했습니다. 다른 타이어들은 모두 2017년의 타이어였습니다. 작년에 새롭게 교체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스페어타이어는 여전히 2007년도 타이어였습니다. 차의 트렁크 밑에서 지난 10년 동안 한 번도 바깥을 보지 못했습니다. 스페어타이어는 단 한번 사용되기 위해서 10년 동안 어두운 트렁크에 있었던 것입니다. 파손된 타이어는 새것으로 교체하였고, 스페어타이어는 다시금 트렁크 아래에 두었습니다. 별것 아닌 것 같았지만 스페어타이어는 깊은 영성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만 알아주신다면, 한 번도 세상에 나오지 못해도 만족해하는 신앙, 단 한번 세상을 구경하고 다시금 어두운 곳으로 가게 된다 할지라도 만족해하는 신앙을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요셉 성인의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저는 생각합니다. 요셉 성인은 건물의 바닥과 같은 분이 아닐까! 요셉 성인은 드러나지 않지만 우리의 건강을 위해 꼭 필요한 혈관과 같은 분이 아닐까! 요셉 성인은 단 한번 세상에 드러나지만 위기의 순간에 꼭 필요했던 스페어타이어와 같은 분이 아닐까? 요셉 성인은 오늘도 말없이 우리들에게 깊은 영성을 보여주시는 것 같습니다.
요셉 성인은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사는 사람에게 ‘시련은 있어도 절망은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구약의 요셉은 형들이 자신을 팔아 이집트로 보낸 것도 하느님의 뜻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욥은 재물, 건강, 자녀들을 잃어버린 것도 하느님의 뜻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하느님은 우리가 어떤 신분으로 살았는지, 어떤 피부색으로 살았는지, 어떤 성별로 살았는지, 얼마나 큰 업적을 쌓았는지를 가지고 판단하지는 않으실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판단하신다면 그것은 우리가 얼마나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충실하게 살았는지 일 것입니다. 그런 기준이라면 요셉 성인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 요셉 성인의 축일을 지내면서 모든 것을 마음에 품고, 하느님의 뜻대로 살았던 요셉성인을 생각합니다. 요셉 성인이 가졌던 ‘영성’을 배운다면 우리들은 다가오는 도전을 이겨내고, 참된 기쁨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참 좋은 배경의 사람, -성 요셉-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은 우리 요셉 수도원의 주보성인이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저희 요셉수도원이 설립(1987.3.19.)된지 만 31주년이 되는 해이고, 자치수도원으로 승격(2014.3.19.)된지 만 4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잠시 성요셉 신심에 관한 교회 역사를 살펴보겠습니다. 성 요셉 신심은 초기교회부터 시작되어 전교회에 퍼졌습니다. 9-10세기 성요셉은 주님의 양부로 불리었고, 이태리의 볼로냐에 1129년 최초로 성요셉의 이름으로 성전이 봉헌되었습니다. 식스투스 교황(1471-84)은 전례력에 성요셉을 도입했고 비오 9세는 1870년 전교회를 성요셉의 보호아래 두었습니다. 성요셉은 중국의 수호자이기도 합니다. 성요셉의 보호는 신비체 교회 모두를 망라하고 있습니다. 즉 신자가정과 학교들, 목수들, 아버지들, 노동자들, 그리고 중재를 청하는 모든 개인들, 특히 임종자들의 수호성인이기도 합니다.
참 반갑고 기쁜 대축일입니다. 대축일의 전례력상 위치도 참 절묘합니다. 해마다 광야의 사순시기 후반부에 자리 잡고 있는 휴식과 충전의 오아시스와 같은 성요셉 대축일입니다. 대림의 광야시기 한복판에 오아시스처럼 자리 잡고 있는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대축일의 위치와 흡사합니다. 성 요셉과 성 마리아를 공평히 배려한 교회 전례가 참 고맙습니다. 입당성가(280)와 방금 부른 화답송 후렴은 얼마나 흥겹고 힘찼는지요.
“성요셉 찬양하세/주님의 양부를/정결하신 성요셉/마리아의 정배
의로우신 성요셉/마리아의 정배/우리 양자로 삼아
언제나 우리 마음을 정결케 하시며/의롭게 생활하도록 이끌어 주소서.”
“주여 넘치도록 자비를 베푸시어/우리 한생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화답송 후렴)
광야의 사순시기, 성요셉 대축일을 통해 우리 모두가 주님의 축복을 가득 받는 느낌입니다. 이어지는 입당성가 2-3절의 내용도 참 은혜롭습니다. 참 좋은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묵상하면 묵상할수록 참 매력적인 모든 덕을 갖추신 요셉성인입니다.
우선 부각되는 참 좋은 배경의 사람 성요셉입니다. 바로 오늘 강론 제목이기도 합니다. 덕중의 덕이 ‘배경의 덕’입니다. 예수, 마리아, 요셉 성가정의 참 좋은 배경이 되시는 요셉 성인은 흡사 요셉수도원의 참 좋은 배경인 불암산과 흡사합니다.
배경이 좋아야 합니다. 불암산 배경이 없는 요셉수도원을 생각해 보세요. 참 초라하고 빈약하기 이를데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부족하고 약해도 가톨릭 교회, 예수님, 하느님, 그리고 무수한 성인들의 참 좋은 배경이 있기에 든든하고 힘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음으로 참 좋은 백을 갖게 된 우리들입니다. 아주 오래전 써놓은 ‘산처럼!’ 이란 시가 생각납니다. 불암산을 바라보며 참 좋은 배경의 사람, 성요셉을 그리며 쓴 ‘산처럼!’ 이란 시입니다.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물러/가슴 활짝 열고
모두를 반가이 맞이하는/아버지 산 앞에 서면
저절로 경건 겸허해져/모자를 벗는다
있음 자체만으로/넉넉하고 편안한/산의 품으로 살 수는 없을까
바라보고 지켜보는/사랑만으로/늘 행복할 수는 없을까
산처럼!”-(2000.11.17.)
요셉수도원의 불암산처럼 참좋은 배경의 어른이 성요셉입니다. 노인은 있어도 어른이 없다는, 선생은 있어도 스승이 없다는 가난한 시대에 이런 롤모델 같은 아버지상을 보여주는 성요셉입니다. 이런 배경같은 어른을 모신 공동체는 참 부요하고 행복합니다. 무엇이 이런 성요셉같은 배경의 사람을 만들었겠는지요.
첫째, 사랑입니다.
‘사랑의 사람’ 성요셉입니다. 바다같이 넓고 깊은 사랑입니다. 모두를 받아드려 바다라합니다. 겸손한 사랑의 사람 성요셉입니다. 예상치 못한 임신으로 곤경에 처한 마리아에 대해 배려와 존중으로 드러나는 성요셉의 사랑이 참 감동적입니다. 이런 관대한 아량雅量의 사랑이라면 웬만한 문제는 다 해결될 것입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이 한마디에 요셉의 인품이 요약되어 있습니다. 마리아에 대한 요셉의 배려와 존중의 사랑이 참 감동적입니다. ‘의로운 사람’은 바로 존중과 배려의 ‘사랑의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둘째, 희망입니다.
‘희망의 사람’ 성요셉입니다. 하느님께 희망을 두었기에 마음을 열어 하느님께 귀를 기울입니다. 바로 침묵과 기도입니다. 희망의 사람은 바로 침묵과 기도의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꿈에 천사가 나타났다는 말은 성요셉이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침묵중에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대로 ‘희망이 없어도 희망했던’ 아브라함에 비견되는 성요셉의 희망입니다. 아마 평소에도 밤의 침묵중에 많이 기도했던 요셉임이 분명합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침묵의 기도중에 들려온 천사를 통한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이어지는 자상한 천사의 말을 통해 요셉에 대한 하느님의 신뢰가 얼마나 지대했는지 깨닫게 됩니다. 제1독서에서 다윗에게 주님의 말씀을 전한 나탄예언자처럼 요셉에게 주님의 말씀을 전한 주님의 천사입니다. 마침내 다윗에게 한 예언은 다윗의 자손 성 요셉을 통해 서서히 실현되기 시작했음을 봅니다.
“너의 집안과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지고,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
성요셉의 배경이 있었기에 나탄의 예언은 마침내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을 통해 실현되게 되었습니다.
셋째, 믿음입니다.
‘믿음의 사람’ 성요셉입니다. 순종과 겸손으로 표현되는 믿음입니다. 하느님의 사람들의 특징이자 참된 영성의 잣대가 순종과 겸손입니다. 하느님 향한 믿음의 표현이자 사랑의 표현이 순종과 겸손입니다. 영적 아름다움도 순종과 겸손의 사랑에서 유래합니다. 다음 복음 마지막 구절이 성요셉의 순종과 겸손의 믿음을 요약합니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맏아들였다.”
성요셉의 지체없는 순종입니다. 하느님은 성요셉의 순종의 믿음이 얼마나 고맙고 자랑스러웠겠는지요. 저절로 떠오르는 ‘성요셉 하느님의 자랑이듯이, 하느님 성요셉의 자랑이어라.’ 말마디입니다. 하느님께 순종할 때 하느님도 그에게 순종한다 합니다. 순종의 사람을 통해 일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흡사 성요셉에게서 믿음으로 의롭게 된 아브라함의 면모를 보는 느낌입니다.
결국 의로운 사람 성요셉은 믿음, 희망, 사랑의 신망애信望愛의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우리의 배경이신 주님과 깊어지는 관계와 더불어 선사되는 주님의 참 좋은 선물이 신망애의 향주삼덕向主三德입니다. 우리가 모두 궁극으로 목표할 바는 배경이 되시는 주님과의 관계요 신망애 향주삼덕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당신과의 신망애 관계를 날로 깊게 해 주십니다.
끝으로 오래 전에 써놓은 ‘하늘과 산’이라 제 자작 애송시를 나눕니다. 요셉수도원의 로고가 상징하는 바와도 일치합니다. 하늘을 배경한 산처럼, 하느님을 배경한 성요셉이요 우리들입니다.
-“하늘 있어/산이 좋고
산 있어/하늘이 좋다
하늘은/산에 신비를 더하고
산은/하늘에 깊이를 더한다
이런 사이가/되고 싶다
이런 사랑을/하고 싶다”-1997.2.- 아멘.
하느님 뜻을 따라 책임지는 의로운 삶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양아버지 요셉을 통하여 법적인 다윗의 후손(마태 15,23)이 되었고 메시아로 불릴 수 있었습니다(22,42). 요셉은 마리아와 약혼하였는데 같이 살기 전에 그녀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했음을 알게 됩니다(마태1,18). 율법에 따르면 약혼녀의 부정행위는 간음으로 여겨져 돌로 쳐 죽이든가 극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신명 22,23-24).
이 당혹스런 상황에서 요셉은 파혼하기로 작정합니다. 두 가지 이유에서였습니다. 먼저 그는 ‘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의인이란 신심 깊고, 하느님을 충실히 섬기는 사람입니다. 의인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며,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사람입니다. 의로운 요셉은 자신이 겪게 될 난처한 상황과 고통보다 하느님의 뜻을 더 중요하게 여겨 파혼하기로 한 것입니다.
또 그가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마태 1,19). 그는 율법을 뛰어넘어 하느님께서 주신 인간생명이 인간에 의해 침해받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나아가 그는 그 일을 세상에 드러내는 그 자체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데 걸림돌이 됨을 알았을 것입니다.
요셉은 마리아의 혼전임신으로 자신 안에 일어난 당혹감과 배신감과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입니다. 이는 타자의 고통을 대신 지는 행위입니다. 그는 파혼으로 곤란한 상황을 회피하거나, 관계 단절로 모든 것을 끝내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파혼이라는 십자가를 침묵 가운데 짐으로써, 마리아와 태중의 생명을 지켜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요셉이 파혼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잉태한 아이가 백성을 구원해주실 메시아이니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1,20-23) 하는 말을 꿈에서 듣습니다. 그는 그 말을 순순히 따릅니다. 그렇게 그는 예수님의 양부가 되고, 나아가 우리 모두의 어버이가 되었습니다.
요셉은 돌로 쳐 죽임을 당할 수 있는 마리아의 생명을 지켜준 의인입니다. 그는 구원의 길을 가야하는 마리아와 예수님의 십자가를 하느님의 뜻으로 여겨 침묵 가운데 받아들인 참 의인입니다. 그는 당혹스런 상황을 하느님의 뜻에 맡기며, 믿음 안에서 받아들였습니다. 이로써 세상 구원의 길이 열린 셈입니다.
한편 요셉은 마리아와 예수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난을 가야 했고, 생계유지를 위하여 몸소 목수 일을 했습니다. 그는 사랑과 침묵 가운데 온갖 어려운 상황을 감내하며 가정 안에 하느님의 빛을 밝혔습니다. 그는 예수의 이름을 짓고(1,21. 25), 성전 정화 예식에도 데려갑니다(루카 2,22). 그는 이렇듯 하느님의 성실한 종이자 가정의 책임자로서, 마리아와 예수의 여정에 말없이 동반합니다.
우리도 요셉을 본받아 인간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성실히 실행하도록 힘써야겠습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의 삶에 대해 믿음과 사랑으로 책임을 질 줄 알아야겠지요. 매일의 삶에서 다가오는 고통과 분노, 배신과 당혹스러움을 성 요셉처럼 묵묵히 받아들일 수 있어야겠습니다. 오늘도 요셉과 더불어 하느님의 의로움을 살아낼 수 있었으면 합니다.
<오늘의 요셉이 되어요>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오늘은 한국 교회의 공동 수호자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교회가 일 년 열두 달 중에서 3월 한 달을 요셉 성인을 기억하고 본받기 위한 ‘성 요셉 성월’로 정할 만큼, 성 요셉은 교회의 주춧돌과 같은 분입니다. 우리는 오늘 구세주 아기 예수님과 성모님의 따뜻한 보금자리였던 성 요셉, 성가정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성 요셉을 기억합니다. 단지 오래 전 위대한 인물을 회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삶을 우리의 삶 안에서 다시 이루기 위해서 말입니다.
하지만 성 요셉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미미할 따름입니다. 요셉 성인은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탄생기와 성장기에만 나타날 뿐, 예수님의 공생활 이후에는 일절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처럼 구세주 예수님의 탄생의 위대한 협조자이며 성모님의 든든한 배필이신 요셉 성인은 하느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충실하게 수행하신 후에 조용히 사라지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해, 요셉 성인을 애써 기억하고 성인의 삶을 돌아봄으로써,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삶을 쇄신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오늘, 절대적인 남성 우위 시대에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의 남편’이라는 수치스러운 호칭으로 복음서에 기록되었던 보잘것없는 사람 요셉을 기억합니다. 이 기억 속에서 우리는 모두가 큰 사람이라고 외쳐대며 다른 이들 위에 군림하려는 혼돈 가득한 시끄러운 세상 안에서 요셉과 같은 작은이를 그리워합니다. 그리고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다른 이들을 짓밟고서라도 높이 오르려 발버둥치는 사람들을 탓하기 전에, 바로 우리 자신이 요셉처럼 자신을 낮추고 모든 이의 든든한 밑거름이 되기를 다짐합니다.
우리는 오늘, 율법을 충실하게 지키던 의로운 사람이었지만, 마리아를 진정으로 사랑하였기에 처녀가 잉태하면 돌로 쳐서 죽이는 관습을 거슬러 약혼녀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고 남모르게 파혼함으로써, 마리아를 살리고자 했던 참사랑을 지녔던 요셉을 기억합니다. 이 기억 속에서 우리는 자신의 살길을 찾아 고통에 신음하는 형제와 벗들을 외면하고, 심지어 이들의 고통을 발판삼아 자신의 안위를 도모하는 것이 일상사가 되어버린 냉혹한 세상 안에서 요셉과 같은 사랑을 간직한 이를 그리워합니다. 그리고 이기적인 소유욕과 사랑을 혼동하여, 인간관계 안에서 달면 삼키고 쓰면 내뱉는 사람들을 탓하기 전에, 바로 우리 자신이 요셉처럼 다른 이를 살리기 위해서 스스로 죽음 같은 고통을 감내하는 참사랑을 실천하기를 다짐합니다.
우리는 오늘, 약혼녀 태중의 아기가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라는 천사의 말을 굳게 믿으며 구원을 향한 희망으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인 용기 있는 신앙인 요셉을 기억합니다. 이 기억 속에서 우리는 세상 물결에 휩쓸려 자신의 안락을 도모하기보다 세상을 거슬러 주님의 뜻을 일구려는 요셉과 같은 용기 있는 이를 그리워합니다. 그리고 믿음을 부와 권력을 획득하는 수단으로 여기거나 거룩하고 고상한 사람으로 보이게끔 하는 화려한 장식물처럼 여기는 사람들을 탓하기 전에, 바로 우리 자신이 요셉처럼 자신의 뜻보다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고 추구하는 굳건한 믿음으로 삶을 채우기를 다짐합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벗님들, 오늘 교회와 세상은 제 2, 제 3의 요셉을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다른 누가 아니라 바로 우리가 오늘의 요셉이 되어야 합니다.
선택된 당신 <마태 1, 16. 18-21. 24ㄱ>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요셉은 평범한 목수로 사는 것이 행복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남보다 어려운 길을 선택받고 승인하셔서 다른 사람이 겪지 않은 어려움을 겪고도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끝까지 참고 인내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 고난의 길을 따라 사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하느님의 종이며 하느님의 양, 아버지라 부르며 의인으로 부르고 성인의 삶을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가난했지만, 가난을 극복할 줄 알았으며 말구유에 누워계신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서 모시고 기도하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그는 부조리를 부조리로 보지 않고 하느님의 큰 뜻으로 받아들였고, 시기 질투의 사신이 예수 아기를 죽이려고 할 때 낯설고 외로운 먼 나라에 죽음의 고통으로 피하시려고 고생길을 가셨고, 성전에서 예수님을 잃었을 때도 찾으실 때까지 삼일을 길거리에서 헤매시고 그런 길을 잘 견디어 내셔서 주님과 일생을 함께하시고, 주님의 품 안에 운명하시고 하느님의 품 안에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저도 ‘이 길을 선택하지 않았으면 평범한 사람으로 살았을 것을’ 하고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오늘 아름답고 깨끗하고 평범하게 살면서 큰 어려움 없는 행복한 생활을 다 던져 버리고 고독과 외로움 험난한 수도자로 일생을 살려고 입회하는 이에게 용기와 힘을 나누어 주려고 입회 미사에 가려고 합니다. 아들 예수를 세상의 십자가에 부르신 것같이 십자가 밑으로 부르시어 요셉 성인이 겪은 어려움보다 더 어려운 일을 극복하면서 하느님 품 안에 살 것을 희망하며,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모두도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도록 기도합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가톨릭 사회 교리서 ‘무엇을 해야합니까?’(DOCAT) 라는 교황님들과 교회 가르침 중에, ‘가정은 사회에 무엇을 가져다주나요?’ 라는 항목이 있습니다. 거기 보면, “교환과 시장 논리에 앞서 이와는 전혀 다른 논리, 곧 이미 ‘선사된 존재’와 ‘받아들여진 존재’가 있다는 논리를 가정에서 체험할 수 있습니다...... 가정 외에 어디에서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이나 나이든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배울까요? 어디에서 외로워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이해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까요? 인간이 자신의 가족에게서 배우지 않는다면, 어디에서 구조적 사회적 곤경에 관심을 가질 수 있을까요?”(간추린 사회 교리 213. 246; 가톨릭 교회 교리서 2207~2211; YOUCAT 369.370; DOCAT 118항)
요즘같이 늙었다는 이유로 노인이 사회에서 문제가 되고, 그것도 짐으로 취급되는 상황에서 교회의 이 가르침은 참 위로가 됩니다. 특별히 “젊은이들은 자기 자신만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배웁니다. 노인들이 병들고 도움이 필요할 경우, 의료적인 간호와 부양은 물론, 사려 깊은 대우와 환경이 조성되어야 합니다.”(DOCAT 121항) 라는 항목이 마음에 깊이 와 닿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셉 성인은 약혼자인 마리아가 결혼하기 전에 잉태한 것을 보고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마태 1,19) 하지만 꿈에 천사가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20-21절) 라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24절) 라고 전합니다. 성 요셉은 눈에 보이는 현실의 부담과 고통을 넘어, 천사의 말을 듣고는 현실을 재해석하며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여 새로운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저는 눈에 보이는 십자가가 짐이 아니라 우리 구원의 선물이라는 교회의 가르침을 다시 한 번 새겨봅니다. 특별히 저는 교회가 노인문제에 있어서, 무엇인가를 내놓아야 하는 짐이 아니라 우리가 무엇인가를 해드릴 수 있는 기회라는 면에서 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선물로 제시해준 가르침을 잘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성가정의 수호자이신 성 요셉 대축일에 그리고 이 사순절에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가 우리에게 나를 내놓고 쏟아 부을 수 있는 봉사의 기회요 우리 구원의 기회라는 면에서 감사드리고 기쁘고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걸으렵니다.
김종오신부님
오늘은 예수님을 양육하신 아버지이시며, 동정 성모 마리아의 배필이시며, 임종하는 이의 수호자요 거룩한 교회의 보호자이시며 성모 마리아와 더불어 한국 교회의 공동 수호자이신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자신의 혼인 전에 벌어진 너무나 낯설고 큰 일 앞에서 성 요셉은 당황하며 두려움에 떨어야 했습니다. 인간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마리아의 혼전 잉태는 요셉에게는 상상할 수도 없이 낯선 일이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요셉 성인은 낯설게 다가온 자신의 인간적인 당황스러움과 두려움을 믿음으로 이겨내었습니다. 더 나아가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는 주님의 뜻에 순명할 수 있었던 것은 요셉 성인의 충실한 믿음이었습니다.
말씀을 따라 사는 요셉 성인의 순명 정신은 주님에 대한 믿음에서 나옵니다. 믿음은 현실적인 두려움을 이겨내게 합니다. 믿음은 낯선 상황을 맞이하면서 느끼는 두려움을 회피하기보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헤쳐 나가게 합니다.
낯선 상황에서 느끼는 당황스럽고 두려운 느낌들은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문입니다. 새로움은 습관적이고 안주하려는 우리 마음에 종종 두려움으로 다가옵니다. 주님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은 두려움을 넘어 새로움이라는 은총의 선물을 우리에게 줍니다.
믿음으로 말씀에 순명함으로써 요셉 성인은 새로운 선물을 인류에게 주는 통로가 되셨습니다. 더 나아가 요셉 성인은 오늘 인류 구원과 은총은 낯선 상황을 맞이하는 열린 마음을 통해서 온다는 지혜를 우리에게 일깨워 주십니다.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마태 1, 24)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믿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믿음과 아픔은
늘 함께 갑니다.
아파하지 않는
삶이란 없습니다.
아픔과 두려움을
믿음으로 헤치며
나간 요셉성인의
축일입니다.
주어진 삶을
아름답게 사는 것이
무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요셉 성인은
사람을 진정
사랑할 줄 아는
분이셨습니다.
사랑을 깨어나게
하는 것은 분명
믿음입니다.
평탄한 믿음은
없습니다.
자신의 뜻을
내려놓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입니다.
비탈길도
위험한 길도
마리아를
힘껏 떠받치며
함께 걸어갑니다.
가장 믿음직한
모습으로
동행하고 있는
요셉 성인입니다.
우리또한 소중한
누군가가 가장
필요로 할 때
그의 옆에 있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사순시기가
아름다운 삶이
정녕 무언지를
다시 배우는 은총의
시간이길 희망합니다.
아름다운 삶은
아름다운 사람이
되는 것이며
아름다운 사람은
아름다운 믿음이
만들어내는 축복입니다.
먼저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요셉 성인이시여,
삶의 가혹한 시간까지
견딜 진정한 믿음을 위해
빌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