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묵상] 마태복음(19장~21장) 묵상
※ 오후 5시에 온 포도원 일꾼(마20:1~16)
포도원 품군의 비유는 마태복음에만 나타나는 비유로서
부자 청년에 대해 베드로와 제자들이 혹시 느꼈을 우월감에 직결된 것이다.
마19:27에 보면
베드로는 부자 청년이 근심하며 떠나는 것을 보고
우월감에 사로잡혀 주님께 이렇게 말했다.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이 말은 다음과 같은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우리는 주님의 첫 번째 제자입니다. 그
사람은 주님께 등을 돌렸고 지금 다시 돌아온다 해도 이미 마지막 시간이 아닙니까?
우리는 처음부터 주님과 함께 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겠습니까?’.
이에 대해 우리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마19:28-29에서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 열 두 제자들이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며,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영생을 상속할 것을 약속해 주셨다. 그러면서 결론적으로 마19:30절에,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는 경고의 말씀도 함께 주셨다. 오늘 이 포도원 품군의 말씀은 이 경고에 대한 하나의 예증이다. 주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서 제자들에게 천국에서의 보상에 대한 진리를 가르쳐 주셨고, 그들의 잘못된 우월감을 교정해 주셨던 것이다.
그러면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본격적으로 살펴보자. 주인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삯을 주기로 품꾼들과 약속하고 그들을 포도원에 들여보낸다. 당시는 하루 한 끼 먹기도 힘들었던 시절이었으므로 이른 아침 첫 번째로 주인의 택함을 받아 하루 종일 일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그 자체가 큰 복이었다. 주인은 제 삼시, 곧 우리 시간으로 오전 9시에 다시 장터에 나가보니 아직도 일자리를 찾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다. 주인은 그들에게도 상당한 품삯을 약속하고 포도원에 들어가 일하게 했다. 뿐만 아니라 주인은 12시와 오후 3시에도 그렇게 했다. 그런데 오후 5시에 나가 보니, 아직도 빈둥거리며 놀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새벽 인력시장에 나가보면 튼튼하고 기술을 가진 일 잘하게 생긴 사람들부터 차출되어 간다. 시간이 지나면 기술도 없고 약해 보이는 사람들만 남는다. 아마도 오후 5시까지 남아 있게 된 사람들은 기술도 없고 품꾼으로 쓰기에 합당하지 않은 여러모로 부족한 자들이었을 것이다. 오후 5시가 되도록 포도원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거리에서 빈둥거려야 되는 이들의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이제 한 시간만 지나면 해가 저물고, 하루를 공치고 빈손으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내일 양식이 걱정이다. 아내와 자식들이 눈에 아른거린다.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라는 힘없는 그들의 대답 속에 인생의 비애가 묻어난다. 주인은 그들의 형편을 안타깝게 여기시고 그들에게도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고 하셨다. 그들에게 이 말이 얼마나 놀랍고도 기쁜 소리였겠는가? 비록 한 시간밖에 일할 수 없지만, 그로 인해 많은 품삯을 기대할 수도 없었지만, 그들은 공치지 않고 일할 수 있게 되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날아갈 듯이 기뻤을 것이다. 그들은 비록 짧은 한 시간이었지만 주인에 대한 감사함으로 온 마음과 힘을 다해 성실히 일했을 것이다. 드디어 날이 저물어 품삯을 지불하는 시간이 되었다. 주인은 청지기에게 일러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품삯을 주라고 했다. 오후 5시에 온 사람들은 겨우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받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전혀 기대하지도 않았던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받게 되었다. 이들이 받은 한 데나리온의 품삯은 아침 일찍이 택함을 받아 포도원에 들어가 하루 종일 일한 일군들이 받는 품삯이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 당시 노동관습에 비추어볼 때 대단히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이를 지켜보던 먼저 온 자들도 깜짝 놀랐을 것이며 한 시간 일한 사람이 한 데나리온씩 받았는데 나머지 사람들은 당연히 더 많은 품삯을 받을 것으로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똑같이 한 데나리온의 품삯이 주어졌다. 이것은 주인이 처음 포도원에 들여보낼 때 그들과 약속한 하루 품삯이다. 그러므로 주인은 그들에게 정당한 품삯을 지불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침 일찍부터 포도원에 들어와 일한 사람들은 주인을 원망했다.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보면 이들의 원망은 일견 일리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자신들의 정당한 품삯을 받았다. 그러므로 주인이 한 데나리온을 주었다고 해서 원망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도리어 일찍부터 택하여 일하게 하신 주인의 은혜에 감사해야 했다. 그리고 비록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않았지만 그들에게도 똑같이 하루치의 품삯을 주신 주인의 인자하심과 큰 은혜에 도리어 감사하고, 그런 훌륭한 주인이 이 세상에 어디 있느냐며 존경해야 했다. 사실 세상에 이런 은혜로운 주인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그들은 세상적인 가치관과 비교 의식에 사로잡혀 한 시간 일한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준 주인의 행위가 도리어 부당하다고 원망했다. 그들은 세상 경제 논리와 가치관에 사로잡혀 처음 주인과 한 약속을 생각하지 않았다. 아침 첫 시간부터 일하게 해 준 주인의 은혜를 망각하였다.
이 비유에서 상식을 벗어난 고용주, 곧 집주인의 너그러운 모습을 하나님의 모습으로 제시해 주고 있다. 이 비유는 고용주의 보상 방식이 일반 경제 원리를 벗어난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결코 부당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해 주고 있다. 고용주가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던 그 시대적 상황 속에서 이 비유의 고용주는 일반적으로 악한 고용주들의 보상 원리와 정반대였다. 그는 노동자들에게 덜 주는데 관심이 모아져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 누구도 일자리를 제공하기 꺼려하는 생산력이 떨어지는 노동자들에게까지도 남은 노동시간과 관계없이 일자리를 제공해 주었고 그뿐 아니라, 그들에게 더 주는데 모든 관심이 모아져 있었다. 이는 인간의 공정함의 원리를 뛰어넘은 관대함과 은혜의 원리이다. 그의 보상의 원리는 받을 것보다 적게 받은 자는 아무도 없되, 어떤 이들은 자신들의 기대보다 훨씬 더 많이 받는 원리였다.
이 비유의 교훈은 맨 처음 제자로서 예수님의 사역 기간 내내 누구보다 더 많은 일을 했다고 생각하고 그에 대한 더 많은 보상을 기대하는 12 제자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적 원리와 전혀 다른 하나님 자신의 원리, 곧 은혜와 사랑의 원리가 적용되는 나라이다. 아멘.
- 꿀송이 보약 큐티 365일 성경 통독
남아공 노록수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