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신> 감춤의 또 다른 시법―전이(轉移)에 관하여 / 임보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冠)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본다. ― 노천명 「사슴」 전문
로메다 님, 널리 알려진 노천명의 「사슴」입니다. 긴 목과 화려한 뿔을 가진 외모와 함께 향수에 젖어 먼 곳을 바라보는 외로운 사슴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인이 이 작품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사슴에 관한 정보나 정서라기보다는 사실은 시인 자신에 관한 얘기입니다. 자신의 얘기를 사슴을 통해 간접적으로 말하고자 한 것이지요. 자신이 지닌 과묵성, 고고성, 비극성 등을 사슴의 그것에 의탁해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 작품은 노천명의 자화상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직설적인 자화상이 아니라 사슴의 형상을 통해 간접적으로 그려낸 자화상이지요. 이처럼 화자(話者)[시인]의 입장이 다른 사물이나 타자에게 옮겨서 간접적으로 표현되는 감춤의 한 기법을 나는 전이(轉移)라고 부릅니다. 전이에 관한 다음의 글을 읽어보기 바랍니다.
시의 은폐(隱蔽) 지향성·2 ― 전이구조(轉移構造)
상징과 더불어 전이(轉移)는 시에서 대표적인 감춤의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전이의 사전적 의미는 '옮김'이다. 즉 어떤 상황의 공간적 이동을 뜻한다. 그러나 내가 시학(詩學)에서 사용하는 이 용어의 의미는 다르다. 시인의 주체적 요소가 자신을 통해서 직접 표출되지 않고 사물이나 혹은 타자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드러나는, 감춤의 한 표현 기법을 의미한다. 사물을 통해 표현되는 경우를 우리는 흔히 '감정이입(感情移入)'이라는 용어로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시인의 주체가 전이되는 경우는 작품 속에 등장하는 다른 인물을 통해 이루어지기도 한다.
松花가루 날리는/ 외딴 봉오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 집/ 눈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 대이고/ 엿듣고 있다. ― 박목월 「閏四月」 전문
겉으로 보기에 이 작품은 대상을 객관적으로 담담히 그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표현의 주된 대상은 깊은 산골에 사는 천한 산지기의 딸인 눈먼 처녀다. 불행의 극에 놓여 있는 한 인물을 화사한 봄을 배경으로 대조적으로 드러내 놓고 있다. 작자는 무슨 의도로 이러한 작품을 만들어 낸 것인가. 가만히 따져보면 표현의 이면에 감추어져 있는 작자의 의도를 전혀 엿볼 수 없는 바도 아니다. 작자가 이 작품에 등장한 눈먼 처녀를 보다 비극적으로 그린 것은 바로 그 처녀에 대한 독자들의 동정심을 유발하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 있다. 그런데 그 처녀는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이라기보다는 허구적 존재일 가능성이 높다. 설령 현실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현실 그대로가 아니라 작품 속에서 극적 변화를 일으킨 변질된 것이다. 말하자면 화자 자신의 '외롭고 불행한 인생'이 극적 인물인 눈먼 처녀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표상된 것이다. 시인의 주체가 작품 속의 한 인물에 전이되어 감추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입을 가지고도 제대로 말을 할 수도 없고 모든 자유와 권리가 박탈된 식민치하에서의 시인은 자신의 존재를 얼마나 암담하게 느꼈겠는가. 우리는 그 눈먼 처녀에게서 불행하고 암담한 시대를 살았던 시인 자신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화구畵具를 메고 산을 첩첩疊疊 들어간 후 이내 종적이 묘연하다. 단풍이 이울고 봉峰마다 찡그리고 눈이 날고 영嶺우에 매점賣店은 덧문 속문이 닫히고 삼동三冬내― 열리지 않었다. 해를 넘어 봄이 짙도록 눈이 처마와 키가 같았다. 대폭大幅 캔바스 우에는 목화木花송이 같은 한떨기 지난해 흰 구름이 새로 미끄러지고 폭포瀑布소리 차츰 불고 푸른 하눌 되돌아서 오건만 구두와 안신이 나란히 노힌채 연애戀愛가 비린내를 풍기기 시작했다. 그날밤 집집 들창마다 석간夕刊에 비린내가 끼치였다. 박다博多 태생胎生 수수한 과부寡婦 흰얼골이사 회양淮陽 고성高城사람들 끼리에도 익었건만 매점賣店 바깥 주인主人된 화가畵家는 이름조차 없고 송화松花가루 노랗고 뻑 뻑국 고비 고사리 고부라지고 호랑나비 쌍을 지어 훨훨 청산靑山을 넘고. ― 鄭芝溶 「호랑나비」
하나의 정사(情死) 사건을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이름없는 한 화가와 산장 매점의 주인이었던 한 과부가 한겨울 깊은 산 눈 속에서 사랑을 나누다 저 세상으로 떠난다. 그리고 그들의 변사체가 봄이 되어서야 세상에 알려진다는 얘기다. 신문기사로나 보도됨직한 하나의 사건이 소재로 다루어지고 있다. 어쩌면 신문에 보도된 이와 비슷한 사건이 이 작품을 만들게 된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문제는 작자가 이 정사 사건에 대해 긍정적이고 호의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릇 모든 문인들은 자연을 동경한다. 세속적인 욕망에 젖어 서로 헐뜯고 살아가는 소란하고 오염된 일상으로부터 벗어나 조용하고 맑은 자연 속에 머물고 싶어한다. 더욱이 그 자연이 청정한 눈으로 가득 덮인 깊은 산골이고 보면 이 얼마나 아늑하고 정결한 공간이겠는가. 그런 성지(聖地)에 때묻지 않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다면 그곳을 바로 낙원이라 할 수 있으리라. 그러한 행복을 누리는 연인들은 그들의 그 지복(至福)한 순간을 영원히 지속하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힐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죽음으로 그들의 행복을 구원화(久遠化)한다. 정지용은 이 연인들의 죽음을 넘어선 구원한 사랑을 청산으로 날아가는 호랑나비 한 쌍을 통해 암시하고 있다. 말하자면 이 「호랑나비」는 정지용의 청정무구한 자연회귀의 소망과 구원한 순애정신이 구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작품 속에 등장한 화가는 곧 작자의 전이된 인물이다. 현실적으로 성취될 수 없는 작가의 욕망이 작품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실현된 것이다. 상징에서보다도 전이는 보다 적극적으로 시인이 자신의 모습을 대상 속에 감추는 변장술이라고 할 수 있다. ―『엄살의 시학』 pp.57~60
로메다 님, 사람이란 체면과 부끄러움을 아는 존재입니다. 어떤 욕망이 일어나도 체면이나 부끄러움 때문에 이를 억제하고 감추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억제된 욕망이 꿈을 통해 간접적으로 실현된다고 프로이트는 설명합니다만 시인의 경우는 상징과 전이의 기법을 통해 간접적으로 실현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상징이나 전이 같은 감춤의 기법은 '숨어서 말하기'라고 할 수 있는데 화자가 자신의 몸을 숨기고 말하는 즐거움도 적지 않습니다. 목소리의 주인공이 어디 있는지 모르고 어리둥절해 하는 독자들을 보면서 화자는 세상을 농락하는 쾌감을 맛볼 수도 있으니까요. 로메다 님, 가을빛이 짙어갑니다. 어제는 시를 좋아하는 몇 친구들과 함께 가을산을 보기 위해 화양동을 찾았습니다. 화양동은 충북 괴산에 자리한 아름다운 계곡입니다. 이제 막 물들기 시작한 잡목들의 고운 단풍과 밑바닥까지 환히 들여다보이는 계곡의 맑은 물이 자꾸만 걸음을 멈추게 했습니다. 자연처럼 아름다운 시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간들의 손에 의해 빚어진 시가 아무리 빼어나기로 한 떨기 꽃이나 단풍의 신묘한 빛깔에 이르기에는 얼마나 먼가를 새삼 느끼고 돌아왔습니다. 시의 가장 큰 스승은 자연입니다. 가능한 한 자주 자연과 가까이 지내면서 그 청정과 겸허와 조화를 배우기 바랍니다. 건투를 빕니다.
화양동의 <파천>--물결이 용의 비늘처럼 반짝이는 석곡
화양동의 <학소대>--학이 깃들였다는 절벽
화양동 <암서재>---우암 송시열이 머물었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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