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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하착(放下着)
'내려 놓아라'라는 뜻으로, 불교에서 화두로 주로 쓰이는데, 마음속의 집착을 내려 놓는다는 뜻의 말이다.
放 : 놓을 방(攵/4)
下 : 아래 하(一/2)
着 : 붙을 착(目/6)
무소유를 의미하는 불교 용어로 '방하착(放下着)'은 손을 내려 밑에 둔다는 뜻이다. 흔히 '내려놓아라', '놓아 버려라'라는 의미로 불교 선종에서 화두로 삼는 용어이다.
중국 송대의 불교서적인 오등회원 세존장의 일화에 방화착이라는 용어가 나온다. 흑씨범지가 합환한 오동꽃을 받을어 세존께 공양하자, 부처님이 범지를 불러 "방하착하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있다.
방하착하라는 것은 단순히 손을 내려놓으라는 의미가 아닌 꽃을 공양했다는 집착된 마음마저 내려놓으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는 인간의 마음속 깊이 자리하고 있는 탐욕을 버림으로써 무소유를 통한 인간의 자기회복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방하착의 의미는 선종에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화두로 쓰이고 있다. '착(着)'은 앞의 '방하(放下)'를 강조하는 어조사이다.
산사의 스님들 사이에 방하착이란 예화가 자주 등장하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한 스님이 탁발을 하러 길을 떠났는데, 산세가 험한 가파른 절벽 근처를 지나게 되었다. 그때 갑자기 절벽 아래서 '사람 살려!'라는 절박한 소리가 실낱같이 들려왔다.
소리가 들려오는 절벽 밑을 내려다보니 어떤 사람이 실족을 했는지 절벽으로 굴러 떨어지면서 다행히 나뭇가지를 붙잡고 대롱대롱 매달려 살려달라고 발버둥을 치고 있는 것이었다.
스님이 묻기를 "이게 어떻게 된 영문이오?" 라고 스님이 물어보니 다급한 대답이 들려왔다. "사실은 나는 앞을 못 보는 장님입니다. 산 너머 마을로 양식을 얻으러 가던 중 발을 헛디뎌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졌는데 다행히 이렇게 나뭇가지를 붙잡고 구사일생으로 살아 있으니 뉘신지 모르오나 어서 속히 나 좀 구해주시오. 이제 힘이 빠져서 곧 죽을 지경이오!" 하는 것이었다.
스님이 자세히 아래를 살펴보니 그 장님이 붙잡고 매달려 있는 나뭇가지는 땅 바닥에서 겨우 사람 키 하나 정도 위에 있었다. 뛰어 내려도 다치지 않을 정도의 위치였던 것이다.
그래서 스님이 장님에게 외쳤다. "지금 잡고 있는 나뭇가지를 그냥 놓아 버리시오. 그러면 더 이상 힘 안들이고 편안해 질 수 있소!"
그러자, 절벽 밑에서 봉사가 애처롭게 애원했다. "내가 지금 이 나뭇가지를 놓아버리면 천길 만길 낭떠리지로 떨어져 즉사할 것인데, 앞 못 보는 이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어 제발 나 좀 살려주시오" 라고 애걸복걸 했다.
그러나, 스님은 장님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살고 싶으면 당장 그 손을 놓으라고 계속 소리쳤다. 그런 와중에 힘이 빠진 장님이 손을 놓치자 땅 밑으로 툭 떨어지며 가볍게 엉덩방아를 찧었다.
잠시 정신을 차리고 몸을 가다듬은 장님은 졸지 간에 벌어졌던 어처구니 없는 상황을 파악하고 멋 적어 하며 인사치례도 잊은 채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그렇다. 우리도 앞 못 보는 장님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장님이 붙잡고 있는 나뭇가지가 오직 자신을 살려주는 생명줄인 줄 알고 죽기 살기로 움켜쥐듯이, 끝없는 욕망에 집착하며 현재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놓아버리면 곧 죽고 못 살 것처럼 아둥바둥 발버둥치는 청맹과니 같이 눈 뜬 장님이 바로 우리들이 아닌지.
썩은 동아줄과 같은 물질을 영원한 생명줄로 착각하고 끝까지 붙들고 발버둥치는 불쌍한 우리네 중생들, 자기를 지켜주는 생명줄이라고 집착하고 있는 것들을 과감하게 놓아 버려야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길이라고 알려 주는데도 불구하고, 귀담아 듣는 사람은 별로 없다.
방하착(放下着)은 '집착하는 마음을 내려놓아라', 또는 '마음을 편하게 가지라'는 뜻이다. 우리 마음속에는 온갖 번뇌와 갈등, 스트레스, 원망, 집착 등이 얽혀있는데, 그런 것을 모두 홀가분하게 벗어 던져버리라는 말이 '방하착'이다.
중국 당나라 때 선승 조주스님이 말씀하셨다는 '착득거(着得去)'는 '지고 가거라'는 말로 방하착의 반대이다.
방하착(放下着)
높은 빌딩을 사들이고 수많은 땅과 돈을 축적하며 산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나이 99세, 위암에 걸렸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오래 산 편이라고 말했지만 정작 죽음을 앞둔 당사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평생 모은 재산을 두고 죽으려니 너무 억울했던 것입니다.
남은 시간은 6개월 정도 그는 자신이 사들인 높은 빌딩 앞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것들을 두고 어떻게 죽나!"
하루는 통장을 보며 안타까워하고, 또 하루는 사들인 땅에 찾아가서 억울한 심정을 토로하며 남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쓰지 않고 모으는 것만이 기쁨이자 보람이고 취미였던 99세의 노인, 그는 죽기 하루 전날도 자신의 빌딩을 바라보며 아쉬워했다고 합니다.
노인이 죽은 후, 그가 가장 사랑했던 빌딩 앞에 자식들이 동상을 세워 주었습니다. 무릎 위에 양 손을 펼치고 편안하게 앉아있는 동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의 동상에 누군가 낙서를 해 놓았습니다. "빈 손"
건물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그 글을 보며 모두 씁쓸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악착같이 모으며 살던 노인에게 그 말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사람들은 알았기 때문입니다. 벌어도 쓰거나 나눌 줄 몰랐던 노인. 빈 손 동상이 유명해지기 시작하자 노인의 자식들에 의해 결국 동상은 치워졌습니다.
살아서 "회장님"이라고 불렸지만 결국은 "노인네"로 남은 그의 일생. 그래도 일생은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돈을 쓰지도 못하고 모으기에 급급한 것, 그러다가 조금만 빠져나가도 불안해 한 것, 이러한 마음도 일종의 병입니다.
살면서 '빈 손'이라는 것을 자주 의식해야 합니다. 세수할 때 양 손에 비누칠을 하면서 '그래, 빈손이다. 이 정도면 많은 것 아닌가!' 라는 생각도 해야 합니다.
그것이 내러놓는 연습입니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방하착(放下着)'이라고 합니다. '마음을 내려 놓으라'는 뜻으로 애착을 쉬라는 말입니다.
방하착(放下着)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방하착(放下着)은 집착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마음을 편하게 가지라는 것이다.
마음 속 번뇌와 갈등, 원망, 집착, 욕심 등을 모두 벗어 던져 버리라는 것이다. 손에 물건을 쥐고 있다가 아무런 의식도 없이 떨어뜨려 손에 아무 것도 남기지 않는 것, 다 비워 버리고 아무 것도 남기지 않는 것을 말한다.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否認)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자기 부인(自己 否認)은 자신의 인생에서 자신의 주인됨을 내려 놓고 하나님의 주인됨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자기 부인에 있어서는 더 이상 자기 의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기 부인을 위해서는 집착을 버려야 한다. 부와 명예, 권력, 쾌락, 즐거움, 자식에 대한 집착, 곧 끊기 어려운 세상의 우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방하착(放下着)이든 자기 부인(自己 否認)이든 말이 쉽지 쉬운 것이 아니다. 허상(虛像)에 집착을 하고 실상(實像)을 보지 못하며 살아가는 작금의 세태 속에서 '방하착(放下着)'의 울림이 가능할지나 모르겠다. 울림이 없다면 마음이라도 편안하게 하고 베푸는 기쁨이라도 느껴보자.
방하착(放下着)
화두(話頭)가 성성(惺惺)하면, 망상(妄想)은 저절로 적적(寂寂)하리니
오늘은 여름안거가 시작되는 결제일입니다. 출가 사문들이 세간을 벗어나 출세간의 도를 구하는 이 일은 참으로 기특한 일입니다.
어떤 선객이 백장(百丈) 회해(懷海) 선사를 찾아가서 "어떤 것이 기특한 일입니까(如何是奇特事)?" 하고 물으니, 선사는 "홀로 우뚝 앉아있는 대웅봉이다(獨坐大雄峰)"고 하였다. 그러자 선객이 절을 하니 선사가 때렸다.
회해선사가 머물던 산 이름이 백장산(百丈山)이며 그 주봉(主峰)이 대웅봉(大雄峰)이다. 투자(投子) 의청(義淸) 선사가 이 독좌대웅봉(獨坐大雄峰) 이야기에 대해 절창(絶唱)을 남겼다.
巍巍峭逈出雲宵(외외초형출운소)
저 멀리 구름 밖에 우뚝 높이 솟아있는
頂鎖氷寒勢外遙(정쇄빙한세외요)
찬 눈 덮인 정수리는 하늘까지 뻗었는데
坐觀四望煙籠處(좌관사망연롱처)
사방을 둘러보니 안개 연기 서린 곳에
一帶靑山萬水朝(일대청산만수조)
푸른 산은 만 개울의 근원을 품고 있네
기특한 독좌대웅봉(獨坐大雄峰)이란 백장산의 대웅봉 산꼭대기에 혼자 앉는 것이 아닙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의 대웅(大雄)처럼 홀로 우뚝 앉아 있는 대웅봉이라야 기특한 것입니다.
세간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여름안거를 하는 우리 조계총림 대중들은 이 조계산 속에서 조용히 혼자 앉아 지내는 것이 기특한 것이 아닙니다.
백장산의 주봉인 대웅봉처럼 이 조계산에 임금제(帝) 자처럼 기상 높게 홀로 우뚝 솟아있는 조계봉(曹溪峰)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홀로 앉은 비대면(非對面)의 기특한 안거가 될 것입니다.
獨坐曹溪峰
홀로 우뚝 앉아있는 조계봉이여!
白雲閒去來
흰 구름이 한가롭게 오고가는데
山鳥朝夕鳴
산새들은 아침저녁 지저귀면서
百花四季開
계절 따라 온갖 꽃이 피어나구나.
엄양(嚴陽) 존자가 조주(趙州) 선사를 찾아가서 "한 물건도 가져오지 않을 때는 어찌합니까(一物不將來時如何)?" 하니, 조주선사가 "내려놓아라(放下著)"고 하므로, 엄양이 "한 물건도 가져오지 않았는데, 무엇을 내려놓습니까(一物不將來 放下箇甚麼)?" 하니, 조주가 "그러면 붙들고 있으라(恁麼則着得去)"고 했다.
붙잡고 있는 것을 다 놓아버리는 것이 방하착(放下著)이요, 놓지 않고 꽉 붙들고 있는 것이 착득거(着得去)입니다. 이번 안거 대중들은 어떻게 방하착(放下著)하며 어떻게 착득거(着得去)할 것인가?
마음속에 얽혀있는 시비(是非) 선악(善惡), 고락(苦樂) 유무(有無) 좌우(左右)인 양변(兩邊)의 분별망상을 놓아버리는 것이 방하착이요, 본참공안(本參公案)의 화두를 오나가나 마음속에 빈틈없이 붙들고 간절하게 의심(疑心)하여 의단(疑團)이 독로(獨露) 하여 타성일편(打成一片) 되는 것이 바로 착득거입니다.
화두(話頭)를 성성(惺惺)하게 착득거하면 본래 실체가 없는 허망한 망상(妄想)은 저절로 적적(寂寂)하여 자연히 방하착하게 될 것입니다. 염불 기도하는 분들은 부처님의 명호를 일념으로 붙들고 염송하면서 '着得心頭切莫忘' 생각이 다하여 무념의 비대면으로 들어가야 참 부처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절하는 능례(能禮)와 절하는 대상인 소례(所禮)가 둘이 아닌 비대면의 진성(眞性)에서 연기되는 것임을 알아, 지극한 마음으로 진성을 공경하면 무명은 자연 굴복될 것이니, 이것이 진정한 예경(禮敬)입니다.
좋고 나쁜 경계의 근본이 본래 청정하고 공적(空寂)한 줄을 바로 보는 정견(正見)이 방하착이요, 성성(惺惺)한 영지(靈知)로 연기(緣起)를 바르게 사유[正思惟]하는 것이 착득거이니, 우리 대중들은 이번 여름안거를 이처럼 성성적적하게 선정과 지혜를 가지런히 닦도록 합시다.
방하착(放下著)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말기 암 진단을 받고, 조용히 생을 마감하려고 혼자 산속에 들어가 살다보니 어느 샌가 암 덩이가 사라져 버렸다는 얘기를 더러 듣는다.
모든 걸 다 내려놓고 삶에 대한 미련조차 버렸을 때, 오히려 죽음이 비켜가고 건강을 회복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불가에서 말하는 방하착(放下着)이 진리인 까닭이랄까.
예수도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버리라"고 했지만, 나는 아직 '자기를 버린' 기독교인을 만나본 적이 없다. 물론 진정 하심(下心)을 가진 불교도를 보지도 못했다.
텔레비전 종교방송에 나오는 유명 설교(설법)자들도 대다수가 덕지덕지 아집과 독선에 찌든 모습이었다. 입으로 청산유수 경전과 교리를 말하는 사람일수록 아집과 독선의 도그마에 더 깊이 빠져 있는 걸 보게 된다.
사도 바울이 깨달은 예수는 사랑이었다, 그래서 비록 천사의 말을 하고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고,
관자재보살은 오온(五蘊)이 다 공(空)임을 조견(照見)하고 일체고액(一切苦厄)을 건너 구경열반(究竟涅槃)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공(空)이고 무(無)인데 무엇에 집착을 하고 무얼 안다고 잘난 체 하는가, 다 내려놓으라는 것이다.
교인들의 헌금으로 호의호식하고 치부(致富)하는 목사들, 정치적 이념에 함몰되어 사리분별을 못 하는 신부들, 주지자리를 놓고 유혈난투극을 벌이는가 하면 신도들 시줏돈으로 룸싸롱에 드나들고 도박판을 벌이는 승려들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아무것도 모른다는 무지렁이들보다 무얼 잘 안다는 자들이 사실은 예수나 붓다에게서 훨씬 더 멀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많다.
사랑이란 그저 사랑하는 것이고, 공(空)은 무(無)일 뿐인데 도대체 무얼 알고 뭐가 잘났다는 것인가, 일찍이 노자(老子)는 도(道)라고 이름 지을 수 있는 것은 이미 도(道)가 아니라고 했다. 그러니 도니 법이니 떠들어대는 자체가 부질없다는 것이다.
무얼 안다는 것이야말로 가장 지독한 속박이고 감옥이라는 걸 깨닫는 일은 쉽지가 않다. 재물이나 권세나 명예보다도 더 내려놓기 어려운 것이 바로 그 '안다'는 독선과 아집이다. 자신이 무얼 모르는지를 아는 것이 진짜 아는 것이라고 하지 않던가.
창녀나 도둑놈들이 목사나 승려들보다 오히려 예수나 붓다에 더 가까울 수 있는 까닭이다.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는 말처럼 기독교나 불교의 교리나 제도에 얽매이지 않을 때 오히려 진면목이 보이는 게 아닐까.
종교계가 그럴진대 정치판이야 오죽할까. 권력에 눈이 멀고 당리당략에 함몰되면 아집과 파렴치의 화신이 되기 십상이라는 걸 절감하는 요즘이다.
권력의 칼자루를 쥐면 법이고 윤리고 다 팽개치고 자기편이면 무슨 짓을 하더라도 비호하고 밀어붙이는 후안무치가 판을 치고 있다.
검찰이 지난 정권의 비리에 칼을 휘두를 때는 박수를 치더니 그 칼끝이 자신들을 겨누자 온갖 협박과 중상모략으로 검찰총장을 쫓아내려고 혈안이 된 정부와 여권의 작태가 참으로 악착스럽고 노골적이다.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이쯤에서 그만 내려놓기 바란다.
집착을 내려놓음
사람의 생활은 간단할수록 행복한 것이다. 그러나 이 도리를 사람마다 다 알지는 못한다. 세인들이 현실생활 속에서 만약 시류에 따라 흘러 단지 물질적인 향락만 추구한다면 각종 생활압력과 정신적인 압력에 직면할 것이다.
오랫동안 이런 정신적 부담이 있으면 사람이 느끼는 고통은 말로는 표현하기 어렵다. 홀가분하고 자유로운 사상경지에 도달하려면 반드시 모든 일에서 마음을 내려놓고 하늘의 뜻에 따라야 하며 억지로 구하지 말아야 한다.
중학교 동창의 어머님께서 병으로 돌아가셨을 때의 일이다. 그는 날마다 교실에서 울었고 누구의 말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어느 날 화학 선생님께서 물 한 컵을 가져오시더니 수업 중에 학생들에게 물으셨다. "너희들 이 물 한 컵의 중량이 얼마인지 아니?" 일부 학생들은 "20g이요", "50g이요"라고 대답했다.
선생님이 다시 말씀하셨다. "이 물의 중량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단다. 중요한 것은 너희가 얼마나 오랫동안 들고 있을 수 있는가이다."
순식간에 모두들 대답이 없었다. "1분간 들고 있다면 모두들 문제없이 가지고 있을 수 있겠지. 한 시간이면 아마 많은 사람들의 손이 아플 것이다. 하루 내내 갖고 있다면 어떤 사람은 아마 쓰러질 것이다. 사실 나는 학생을 아주 동정한다. 그러나 학생은 어머니를 위해 이미 일주일을 넘게 울었다. 계속 이렇게 한다면 너의 건강은 어떻게 되겠니?"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는 학생은 크게 깨달았고, 흐느낌을 멈췄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세상에 계실 때 흑지(黑指)라고 부르는 브라만이 앞에 와서는 신통을 부려 두 손으로 두 개의 꽃병을 들어 부처님께 드렸다.
불타(佛陀)는 큰 소리로 흑지 브라만에게 말했다. "내려 놓으시오!" 브라만은 왼손에 들고 있던 그 꽃병을 땅에 내려놓았다. 부처님은 또 말했다. "내려 놓으시오!" 브라만은 다시 오른손에 들고 있던 꽃병을 내려놓았다.
그러나 부처님은 계속 "내려 놓으시오!"라고 말했다. 흑지 브라만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저는 이미 두 손이 비어 있습니다. 더 이상 내려놓을 것이 없는데 왜 또 내려 놓으라고 하십니까?"
불타는 말했다. "나는 당신에게 꽃병을 내려 놓으라고 하지 않았소. 내가 당신더러 내려 놓으라는 것은 마음이오. 당신이 마음 속 번뇌 망상을 전부 내려놓았을 때에야 비로소 생사의 윤회에서 해탈할 수 있소."
선(禪) 수행에서는 방하착(放下着; 집착을 버림)을 수행의 기본으로 한다. 마음이 맑고 욕심이 적으면 홀가분하고 자유자재하며 환경에 잘 적응하면서도 스스로 즐길 수 있다. 내려놓음이 바로 해탈이다.
인생을 살아감에 사실 복잡한 사상이 필요하지 않다. 오로지 이 간단한 지혜만 갖춘다면 인생의 길은 고통과 슬픔에서 멀어질 것이다.
완벽한 비움
죽음은 '완벽한 비움'이다. 그런데 그 방식이 특이하다. 소유한 물건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소유자를 없애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인생은 자신의 소유물을 꾸준히 늘려가는 과정일지 모른다.
소유물은 돈, 물건 따위의 재물에 국한되지 않는다. 신분, 지식, 명예, 권력 등 실로 다양하다. 이사를 해보면 실감할 것이다. 불과 몇 년 만에 집안의 물건들이 얼마나 많이 불었는지 말이다. 이렇게 축적된 소유물은 죽음을 맞으면 순식간에 모조리 증발된다. 죽음이 무섭고 두려운 이유이다.
인디언 머클래스족은 매년 죽음과 부활의 집단의식을 치른다. '버스크'라는 연례행사를 통해 완벽한 비움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들은 첫 곡식이 나오기 전에 미리 새 옷, 새 솥 등 새로운 가재도구들을 마련해놓고 깨끗이 마을을 청소한다. 그러고는 모든 헌 옷과 낡은 물건, 곡식들을 한 곳에 모아 불을 지른 후 사흘간의 단식에 들어간다. 단식 기간 중에는 성욕 등 일체의 자극적인 행위가 금지된다.
족장은 대사령을 내려 죄인들을 풀어준다. 제사장은 마을 안의 불씨를 모두 없앤 뒤 단식이 끝난 다음날 아침 광장에서 마른 나무를 비벼 새 불을 피운다. 마을 사람들은 새로 탄생한 불을 막대기에 붙여 자기 집으로 가져간다. 햇곡식과 햇과일로 잔치를 벌인 뒤 새롭게 정화된 이웃들과 함께 살아간다.
우리도 죽음이 다가오기 전에 인디언처럼 각자 버스크 의식을 치러보면 어떨까. 그들처럼 단식이나 가재도구 태우기를 할 순 없지만 묵은 것을 비우고 버리면 좋을 듯싶다. 물질적인 것뿐이 아니라 마음도 함께 말이다.
우리가 마음이 무겁다고 자주 하소연하는 것은 이런 비움을 실천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마음속에 욕심, 분노, 증오 등을 가득 채우고 있으니 무거울 수밖에 없지 않겠나. 이런 삶의 찌꺼기들을 끌어안고 살아가면 인생이 고단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방하착(放下着)! 내려놓아라. 인디언도 하는 것을 우리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 放(놓을 방)은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등글월문(攵=攴; 일을 하다, 회초리로 치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方(방)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등글월문(攵)部는 손으로 무엇인가 하다, 무리하게 무엇인가 시키다의 뜻이 있고, 음(音)을 나타내는 方(방)은 좌우(左右)로 퍼지다, 중앙으로부터 떨어지다의 뜻이 있다. ❷회의문자로 放자는 '놓다'나 '내쫓다', '그만두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放자는 方(모 방)자와 攵(칠 복)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方자는 소의 등에 물리는 쟁기를 그린 것으로 '방위'나 '방향'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렇게 '나아가다'라는 뜻을 가진 方자에 攵자를 결합한 放자는 몽둥이로 내쳐서 보낸다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참고로 方자가 좌측에 위치할 때는 旅(군사 려)자가 생략된 것이지만 放자는 예외에 해당한다. 그래서 放(방)은 나쁜 사람을 중앙으로부터 쫓아내는 형벌(刑罰), 나중에 내놓다, 내버려 두다, 살짝 물건을 놓다, 그리고 총포(銃砲)를 쏘는 횟수를 세는 말, 발(發) 등의 뜻으로 ①놓다, 놓이다, 석방(釋放)되다 ②내쫓다, 추방(追放)하다 ③내놓다, 꾸어주다 ④버리다 ⑤달아나다, 떠나가다 ⑥널리 펴다, 넓히다 ⑦(꽃이)피다 ⑧(빛을)발하다 ⑨내걸다, 게시(揭示)하다 ⑩그만두다, 내버려 두다 ⑪방자(放恣)하다, 멋대로 하다 ⑫어긋나다 ⑬본받다, 본뜨다 ⑭(배를)나란히 늘어놓다 ⑮이르다(어떤 장소나 시간에 닿다), 다다르다 ⑯준(準)하다(어떤 본보기에 비추어 그대로 좇다), 기준으로 삼다 ⑰의지(依支)하다 ⑱서로 닮다 ⑲지급(支給)하다 ⑳바라다 ㉑크다 ㉒크게 ㉓형벌(刑罰)의 한 가지,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흩어질 만(漫), 소통할 소(疎), 느릴 완(緩), 풀 해(解), 풀 석(釋)이다. 용례로는 풀어 내어 줌을 방면(放免), 돌보거나 간섭하지 아니하고 그냥 내버려 둠을 방임(放任), 한꺼번에 확 내놓음을 방출(放出), 목을 놓아 욺을 방곡(放哭), 힘차게 내달림을 방분(放奔), 학교에서 학기를 마치고 한동안 수업을 쉬는 일을 방학(放學), 오줌을 눔을 방뇨(放尿), 풀어서 헤침을 방산(放散), 안심하여 주의를 하지 않음을 방심(放心), 텔레비전으로 방송하는 일을 방영(放映), 어려워하거나 삼가는 태도가 없이 건방짐을 방자(放恣), 정처없이 떠돌아 다님을 방랑(放浪), 가두어 놓은 물을 터서 흘려 보내는 것을 방류(放流), 가축을 놓아 기름을 방목(放牧), 사람에게 잡혀 죽게 된 짐승을 놓아서 살려 줌을 방생(放生), 사람이 일부러 불을 지르는 것을 방화(放火), 그대로 내버려 둠을 방치(放置), 말이 담을 벗어났다는 뜻으로 제멋대로 놀아나는 일을 방날(放捋), 다잡지 아니하여 제 멋대로 자라난 아이를 욕하는 말을 방돈(放豚), 목을 놓아 크게 욺을 일컫는 말을 방성대곡(放聲大哭), 마음먹은 대로 아무런 거리낌 없이 큰 소리로 말함을 일컫는 말을 방언고론(放言高論), 부자를 빼 놓고 가난한 사람을 부역하게 하는 짓을 이르는 말을 방부차빈(放富差貧), 건방지고 꺼림이 없음을 일컫는 말을 방자무기(放恣無忌), 술과 여자에 빠져 일은 하지 아니하고 불량한 짓만 한다는 말을 방탕무뢰(放蕩無賴) 등에 쓰인다.
▶️ 下(아래 하)는 ❶지사문자로 丅(하)는 고자(古字)이다. 밑의 것이 위의 것에 덮여 있는 모양이며, 上(상)에 대한 아래, 아래쪽, 낮은 쪽, 나중에 글자 모양을 꾸며 지금 글자체가 되었다. ❷지사문자로 下자는 '아래'나 '밑', '끝'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下자는 아래를 뜻하기 위해 만든 지사문자(指事文字)이다. 下자의 갑골문을 보면 윗부분은 오목하게 아랫부분은 짧은 획으로 그려져 있었다. 윗부분의 오목한 형태는 넓은 대지를 표현한 것이다. 아래의 짧은 획은 땅 아래를 가리키고 있다. 그래서 下자는 아래를 가리키고 있다 하여 '아래'나 '밑'이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모습은 금문에서 숫자 二(두 이)자와 자주 혼동되었기 때문에 소전에서는 아래의 획을 세운 형태로 바꾸게 되면서 지금의 下자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下(하)는 (1)아래. 밑 (2)품질(品質)이나 등급(等級)을 상(上)과 하(下), 또는 上, 中, 下로 나눌 때의 가장 아랫길(끝째). (3)일부 한자로 된 명사(名詞) 다음에 붙이어 ~밑에서, ~아래서의 뜻으로, 그 명사가 조건이나 환경 따위로 됨. 나타냄. ~하에, ~하에서, ~하의 형으로 쓰임 등의 뜻으로 ①아래 ②밑(물체의 아래나 아래쪽) ③뒤, 끝 ④임금 ⑤귀인(貴人)의 거처(居處) ⑥아랫사람 ⑦천한 사람 ⑧하급(下級), 열등(劣等) ⑨조건(條件), 환경(環境) 등을 나타내는 말 ⑩내리다, 낮아지다 ⑪자기를 낮추다 ⑫못하다 ⑬없애다, 제거하다 ⑭물리치다 ⑮손대다, 착수하다 ⑯떨어지다 ⑰항복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낮을 저(低), 낮을 비(卑), 내릴 강(降), 항복할 항(降), 낮출 폄(貶),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윗 상(上), 높을 존(尊), 높을 고(高)이다. 용례로는 공중에서 아래쪽으로 내림을 하강(下降), 값이나 등급 따위가 떨어짐을 하락(下落), 어떤 사람의 도급 맡은 일을 다시 다른 사람이 도거리로 맡거나 맡기는 일을 하청(下請), 아래쪽 부분을 하부(下部), 강이나 내의 흘러가는 물의 아래편을 하류(下流), 산에서 내려옴을 하산(下山), 낮은 자리를 하위(下位), 공부를 끝내고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옴을 하교(下校), 한 달 가운데서 스무 하룻날부터 그믐날까지의 동안을 하순(下旬), 정오로부터 밤 열두 시까지의 동안을 하오(下午), 차에서 내림을 하차(下車), 위에서 아래로 향함을 하향(下向), 보호를 받는 어떤 세력의 그늘을 산하(傘下), 일정한 한도의 아래를 이하(以下), 치적이 나쁜 원을 아래 등급으로 깎아 내림을 폄하(貶下), 상대방을 높여 부르는 말을 귀하(貴下), 끌어 내림이나 떨어뜨림을 인하(引下), 원서나 소송 따위를 받지 않고 물리치는 것을 각하(却下), 낮아짐이나 내려감 또는 품질 따위가 떨어짐을 저하(低下), 아랫돌 빼서 윗돌 괴고 윗돌 빼서 아랫돌 괴라는 뜻으로 임기응변으로 어려운 일을 처리함을 일컫는 말을 하석상대(下石上臺), 붓만 대면 문장이 된다는 뜻으로 글을 짓는 것이 빠름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하필성장(下筆成章), 아랫사람의 사정이나 뜻 등이 막히지 않고 위에 잘 통함을 일컫는 말을 하정상통(下情上通), 어리석고 못난 사람의 버릇은 고치지 못함을 이르는 말을 하우불이(下愚不移), 아래로 아내와 자식을 기름을 일컫는 말을 하육처자(下育妻子), 아래를 배워서 위에 이른다는 말로 낮고 쉬운 것부터 배워 깊고 어려운 것을 깨달음을 이르는 말을 하학상달(下學上達), 아랫사람의 뜻을 윗사람에게 전달함을 일컫는 말을 하의상달(下意上達), 아랫사람에게 후하고 윗사람에게 박함을 일컫는 말을 하후상박(下厚上薄),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능가하여 윗사람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다는 뜻으로 세상이 어지러움을 이르는 말을 하릉상체(下陵上替),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이 수치가 아니라는 뜻으로 누구에게든지 물어서 식견을 넓히라는 말을 하문불치(下問不恥) 등에 쓰인다.
▶️ 着(붙을 착, 나타날 저)은 ❶형성문자로 著(착)의 간자(簡字), 著(저)의 속자(俗字)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습관(習慣) 상(上) 착의 뜻으로는 주로 이 着(착)을 쓴다. ❷형성문자로 着자는 '붙다'나 '착용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着자는 羊(양 양)자와 目(눈 목)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着자는 '나타나다'라는 뜻을 가진 著(분명할 저)자에서 파생된 글자이다. 著자는 사탕수수즙을 마시고 있는 모습을 그린 者(놈 자)자에 艹(풀 초)자를 더한 것으로 '분명하다'나 '나타나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하지만 著자는 글자의 조합과는 관계없이 다양한 뜻을 표현하기 위해 만든 글자이다. 그러므로 着자에 쓰인 羊자나 目자는 '붙다'라는 뜻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래서 着(착, 저)은 '붙을 착'의 경우는 도착(到着)의 뜻으로 지명(地名)이나 시간(時間)을 나타내는 말 다음에 쓰이어 ①붙다 ②(옷을)입다 ③(머리에)쓰다 ④(신을)신다 ⑤다다르다 ⑥시작하다, 그리고 '나타날 저'의 경우는 ⓐ나타나다, 나타내다(저) ⓑ분명하다(저) ⓒ드러나다, 분명해지다(저) ⓓ두드러지다(저) ⓔ그리다(저) ⓕ짓다, 저술(著述)하다(저) ⓖ두다, 비축(備蓄)하다(저) ⓗ쌓다(저) ⓘ세우다, 확립하다(저) ⓙ이루다, 이루어지다(저) ⓚ생각하다(저) ⓛ정(定)하다(저) ⓜ알다, 알리다(저) ⓝ보충(補充)하다(저) ⓞ오래되다(저) ⓟ좋다, 마땅하다(저) ⓠ분명(分明)함, 뚜렷함(저) ⓡ정성(精誠)(저) ⓢ지위(地位), 계급(階級)(저) ⓣ자리(저) ⓤ오미자(五味子)(저) ⓥ뜰(집 안의 앞뒤나 좌우로 가까이 딸려 있는 빈터)(저)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이를 도(到), 붙을 부(附), 붙을 점(粘),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필 발(發)이다. 용례로는 어떤 일에 손을 대어 시작함을 착수(着手), 공사를 시작함을 착공(着工), 비행기나 비행선 따위가 공중에서 땅으로 내려 앉는 일을 착륙(着陸), 옷을 입음 또는 남의 금품을 부당하게 자기 것으로 함을 착복(着服), 자리에 앉음을 착석(着席), 의복 등을 몸에 입거나 참을 착용(着用), 사람이 또는 사람의 태도가 허튼 데가 없이 알차고 실다움을 착실(着實), 어떤 일을 눈여겨 보아 그 일을 성취할 기틀을 잡음을 착안(着眼), 사물이 순서대로 되어 가는 모양을 착착(着着), 일의 실마리가 될 만한 생각을 착상(着想), 목적한 곳에 다다름을 도착(到着), 어떤 것에 마음이 늘 쏠려 떨치지 못하고 매달리는 일을 집착(執着), 어느 곳에 자리잡아 오래도록 사는 것을 정착(定着), 단단히 달라 붙음을 교착(膠着), 빈틈없이 단단히 달라 붙음을 밀착(密着), 의복이나 가구나 장비 따위를 붙이거나 착용함을 장착(裝着), 앞뒤가 서로 맞지 아니함을 당착(撞着), 물질 따위가 가라앉아 들러붙는 것 또는 사람이 어렵거나 위급한 일을 당했을 때 서두르거나 당황하는 데가 없이 차분하고 안정된 마음으로 행동하는 상태에 있음을 침착(沈着), 딱 붙어서 떨어지지 않음을 부착(附着), 무사히 도착함을 안착(安着), 대대로 그 땅에서 삶을 토착(土着), 어떤 사물과 떨어질 수 없게 그것을 사랑하고 아낌을 애착(愛着), 최종으로 도착함을 종착(終着), 발을 붙이고 설자리가 없다는 뜻으로 기반으로 삼아 의지할 곳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착족무처(着足無處), 자기의 언행이 전후 모순되어 일치하지 않음을 이르는 말을 자가당착(自家撞着), 같은 사람의 문장이나 언행이 앞뒤가 서로 어그러져서 모순됨을 이르는 말을 모순당착(矛盾撞着), 들은 것을 마음속에 간직해 잊지 아니하는 일을 이르는 말을 입이착심(入耳着心), 썩은 새끼로 범을 잡는다는 뜻으로 터무니없는 짓을 꾀함을 이르는 말을 초망착호(草網着虎)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