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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공 선생. 지금 수업 시작한 지가 언젠데 안 들어가고 아직까지 그러고 서있습니까?"
"아, 죄송합니다."
복도를 울리는 교장의 목소리에 냉큼 고개를 숙인 해나는 미련없이 계단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
눈이 마주쳤다. 심지어, 이름까지 불렀다.
왜?
다른 말소리는 다 들리지도 않았으면서 왜 그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만큼은 뚜렷하게 들렸던 걸까.
어째서?
날 기억하고 있다.
온 몸에 긴장감이 돌았다. 예상치 못한 재회였다.
*
*
"다들 시험준비 잘 하고, 이번 시험은 중간고사보다 쉬울거야."
"맨날 쌤들은 시험 쉽다고 하시던데요오. 저희는 늘! 어렵다구요!"
투정 부리듯 어리광을 부리는 학생들의 모습에 미소지은 해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 만큼 점수 후하게 주는 사람이 어딨니?"
"그건 그래요."
꺄륵, 낭낭한 웃음소리가 퍼지고 그와 동시에 수업이 끝났다는 챠임이 울렸다.
"내일 보자 애들아."
"네, 안녕히 가세요!"
마지막 수업이 끝났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어서 빨리, 이곳을 탈출하고 싶었다. 아니, 아니지.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집, 자신의 공간. 누구도 들어올 수 없는.
집에서 시험 문제까지 완벽하게 만들어놓은 해나였기에 오늘도 어김없이 칼퇴근을 할 수 있었다.
무심코 버릇처럼 차키를 찾던 해나는 아차, 하며 외투를 걸치며 가방을 들었다.
오늘은 대중교통이지.
"먼저 들어가보겠습니다."
"아, 공 선생님. 수고하셨어요."
"네, 내일 뵙겠습니다."
꾸벅, 인사를 하고는 교무실을 나와 학교 건물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교문을 넘어서서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는 길.
"오랜만이네."
우뚝.
걸음이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뒤를 돌아보기가 무서웠다. 분명, 자신이 지금 생각하고 있는 그 남자가 있을 게 분명했다.
이를 악문 해나는 냉큼 거짓 미소를 얼굴에 띄우고는 천천히 돌아섰다.
"…오랜만이네요."
"잘 지냈어?"
"… 그럭저럭요."
당신은요?
묻고 싶었지만 물을 수 없었다.
"잠깐 얘기할 수 있을까?"
"… …."
손목에 찬 시계를 흘끗 쳐다본 해나는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차디찬 가을 바람이, 그들의 사이를 갈라놓을 것처럼 세차게 불어왔다.
*
*
"어떻게 지냈어?"
"그냥, 바쁘게 지냈어요."
"그렇구나."
정적이 흘렀다.
"나는 안 물어봐?"
"뭐가요?"
"…내가 어떻게 지냈는지 안 궁금해?"
"네. 안 궁금해."
어떻게 그렇게 단호해 질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단 한 번도 이 남자에게 단호해질 수 있었던 적이 없었다. 늘 자신이 더 사랑했고, 더 많이 좋아한다 말했다.
그랬던 해나가 단호했던 적은 이별을 통보한 그 날 이후로 처음이었다.
애초에 그 날 이후 만났던 적도 없었지만.
남자의 얼굴에 씁쓸함이 번졌다.
서로의 다른 감정을, 이제와서 마주보게 된 것이 이토록 아플 줄이야.
"할 말은, 그거 뿐이에요?"
"촬영해."
"네, 그런 것 같아요."
"세랑 고등학교에서."
"…네?"
"들어가는 작품이 세랑 고등학교가 배경으로 결정났어."
"… …."
이건 신의 장난일 것이다. 이럴 수 없었다.
"자주 보게 될 것 같아서. 겸사겸사 인사도 하고 싶었고."
"… …."
"무엇보다 나는 궁금했거든. 네가 잘 지내는지."
"… …."
"보고싶었어."
입을 뗄 수 없었다.
가슴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감정은 해나도 익숙하게 알고 있는 감정이었다.
'사랑'. 살면서 오로지 저 남자만이 나에게 주었던, 단 한 번뿐인,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그 느낌, 그 감각.
대답조차 하지 못한 해나는 냉큼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에서 벗어났다.
그 자리에 조금만 더 있었다면 이성을 잃을 뻔 했다.
이럴 순 없었다. 신이 있다면 이토록 자신에게 잔인하게 굴 순 없었다.
어떻게 집에 도착했는지도 몰랐다.
그저 버스를 타고, 내리고, 집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해나는 아무렇게나 가방과 외투를 벗어던지고는 곧바로 화장실로 향했다.
이제는 너무나도 익숙해져 버린 일과였다.
날카로운 작은 단도를 든 해나의 손이 거침없이 그녀의 허벅지로 향했다.
스윽.
아무런 거부감도 없이, 마치 과일을 자르려는 것처럼, 그렇게 가볍게 그녀의 허벅지 위를 지나갔다.
붉은 선이 그어지고, 곧 새빨간 피가 다리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살아 있어."
발바닥에 몽글몽글 뭉쳐진 피들의 행렬은 본 해나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살아있었다. 자신은. 아직도, 여전히.
이 지옥같은 삶 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듯.
"왜…."
붉은 선혈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아팠지만 아프지 않았다.
해나에게 있어서 아픔이란 살아있단 증거였다. 눈으로 보고 확인해야만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수없이, 몇 번이고 그었던 허벅지 안 쪽에는 여러 흉터들이 자리를 잡아 고스란히 내비쳐지고 있었다.
죽고 싶었지만 죽을 수 없었다.
해나는 살아야만 했다. 반드시. 그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걸 알기 때문에 해나는 손목을 그을 수 없었다. 멋대로 할 수 없는 운명이, 인생이 너무나도 가혹했다.
"…살려주세요…."
누가, 제발….
이 지옥같은 삶 좀 끝내줘요.
간절함 속에서 피어오르는 작은 희망은, 감히 상상해서도 안 되는 사람이었다.
"로안…."
*
*
수많은 사람들이 학교를 돌아다니며 카메라를 설치하고 있었다.
영화 촬영을 위해 일주일에 두 번, 휴교를 결정하게 됐고, 학생들에게 전달하는 교사들은 그들의 호기심을 막느라 애를 썼다.
해나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무슨 영화래요? 누구 나오는데요?"
"선생님은 보실 수 있는거예요? 부럽다!"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연예인에 대한 기대감과 선망들. 올망졸망한 눈동자를 보고 있으니 웃음이 나올 수 밖에 없었다.
"나도 못 봐. 자, 어서 집 가자."
해가 하늘에 떠있는 시간이었다. 그것도 드높게.
하교하려면 몇 시간이고 더 있어야만 했지만 오늘은 휴교를 결정한 첫 날이었다.
등교한 학생들은 불과 몇 분 만에 다시 하교해야만 했다. 불만을 토로하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집에 일찍 간다며 신나하는 아이들이 훨씬 많았다.
모든 학생들이 하교하고 조용해진 학교. 교사들은 교무실에 남아 일을 해야만 했다.
"공 선생."
"네, 선생님."
느닷없이 부르는 교장의 목소리에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난 해나는 잠시 들어오라는 눈짓에 한숨을 내쉬며 교장실로 들어섰다.
문을 닫고 고개를 든 순간, 숨이 턱 하고 막혀왔다.
소파에 태연하게 앉아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로…."
무심코 그의 이름을 입에 담을 뻔 한 해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공식적으로는 모르는 사이였다. 그는 배우였고, 해나는 한낱 고등학교 교사에 불과했으니까.
"이쪽은 로티안 씨일세."
"아, 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인사를 가볍게 주고 받자마자 교장은 본론을 꺼내들었다.
"이번에 우리 학교가 영화 배경으로 선정된 건 알고 있지?"
"네, 알고 있습니다."
"직접 학교를 둘러보고 싶다고 해서 말이야. 자네가 소개 좀 해주게나."
"…알겠습니다."
왜 하필 나냐고 묻고 따지고 싶었지만 직장에서 그럴 순 없었다.
이곳은 자신의 어리광을 받아주는 곳이 아니었다.
소파에서 일어난 로티안은 해나를 뒤따라 교장실을 나왔다.
교무실이 아닌 복도로 통하는 문으로 나온 덕분에 다른 교사들의 이목을 끌지 않았다.
"맨 윗층부터 차례차례 소개해드릴게요."
"네."
익숙하다는 듯 엘레베이터에 올라선 해나는 5층을 눌렀다.
"…공해나."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해나야."
"그 부름은 더 싫습니다."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하지?"
"… 부르지 마세요."
제발 부르지 마세요.
"그럴 수는 없단 거 알텐데."
띵.
"이쪽이에요."
무심해져야 했다. 더 이상 그에게 신경을 써서도, 그가 나에게 관련이 되어서도 안 된다.
"5층은 주로 실습실로 이루어져 있어요. 체육관이라든지 과학실, 음악실이요. 외부에서 섭외해서 오시는 강사님들 교무실도 5층에 있고요."
"외부 강사도 와?"
"네. 의외로 예체능 계열로 가고 싶어하는 친구들이 많아서요."
"그렇군."
소소한 대화를 하며 교내 안내를 하던 해나는 무심코 걸음을 멈췄다.
허벅지에서 흘러내리는 느낌이 심상치 않은게 아무래도 어제 지혈한 허벅지에서 다시 피가 나는 것 같았다.
"왜 그래?"
"…아무것도."
붕대가 젖어가는 느낌이 선명하게 느껴졌지만 로안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해나는 애써 멀쩡하게 걸음을 옮겼지만 걸을 때마다 욱씬거리는 통증은 그녀에게 현실을 일깨워주기만 했다.
이 거지같은 현실을, 하필이면 학교에서 깨닫게 되다니.
익숙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괜찮아지는 건 아니었다.
"어디 다쳤어? 걸음 걸이가 이상한데?"
배우라더니, 눈썰미도 좋지.
해나가 절뚝이는 걸 눈치챈 로안은 냉큼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해나를 멈춰세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순순히 얘기해 줄 생각은 없었다.
이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게 좋으니까. 그에게도, 그리고 나에게도.
"아니에요. 더 이상 소개해드릴 곳이 없네요. 전 이만 돌아가보겠습니다."
"공해나."
"그렇게 부르지 마시라…!"
"…해나야."
그의 향기가 코를 타고 온 몸으로 들어와 해나를 지배하려는 듯 퍼지기 시작했다.
두근거림이 멈추질 않았다. 로안의 품에 안긴 그녀는 눈을 크게 뜬 채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했다.
귓가에서 애절하게 들려오는 목소리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이렇게, 로안을 안아줘야만 할 것 같았다. 그러나 허벅지에서 느껴지는 고통이 그 행복을 허락할 리 없었다.
"놔요."
"공해나."
"배우라면서 이렇게 막 끌어안아도 되는 거예요?"
"… …."
"아직도 착각하는 것 같으니까 말할게요. 우리는 아무사이도 아니에요."
"… …."
과거와는 너무나도 달라져버린 해나의 모습에 얼어붙은 로안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얼굴을 가리려는 듯 들어올린 손은 무심하게 그의 머리를 한 번 쓸기만 할 뿐, 더 이상의 제스쳐는 없었다.
이 모습을 알고 있다.
애써 감정을 억누르고 있을 때 하는 그의 버릇이었다.
알고 있지만 모르는 척 해야만 했다.
"로티안 씨. 앞으로 공적인 만남만 이루어졌으면 좋겠어요."
사적으로 당신과 만나고 싶지 않아.
두 번이나, 당신에게 내 삶을 흔들리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얼른, 촬영이 끝났으면 좋겠네요."
우리가 다시는 볼 일이 없게.
첫댓글 아 여주ㅠㅠ 안쓰러워ㅠㅠㅠㅠ
이 소설은 본격 여주가 안타까운 소설입니다...흑흑
@몽글랑 작가님 지금 정주행하고 있는데 너무 안쓰러워요푸ㅠㅠㅜㅜㅜ
@뉴하류 학쓰 정주행이라니...! 그런 영광을...ㅠㅠㅠㅠㅠㅠ진짜 여주가 젤 불쌍해요 여기서는...
@몽글랑 으어어ㅓㅓㅓㅓ엉어엉ㅇ어엉어엉엉 ㅠㅠㅠ 진짜 심장에서 저릿저릿해여ㅠㅠㅠㅠ
@뉴하류 쓰면서 슬퍼라 슬퍼라 슬퍼라 하고 쓴 거에요... 이건 약간 로맨스 라기보다는 여주의 트라우마를 풀어가는 소설에 더 가까울 것 같아요! 질질 끌 생각이 없어서 전개가 빠르게 넘어간답니당
@몽글랑 작가님 화이팅>_<
@뉴하류 헉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당! 더 열심히 써랴겠아요!!
저도 응원할게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