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x) 정규 4집 ⟪4 Walls⟫ 리뷰
지난 10월 27일, f(x)(에프엑스)가 1년 3개월 만에 네 번째 정규 앨범 ⟪4 Walls⟫로 돌아왔다. 동명의 타이틀곡 <4 Walls>는 몽환적인 딥하우스 장르의 EDM으로, 영국의 작곡가 팀 런던노이즈가 작곡을 맡아 화제가 되었다. 발라드부터 일렉트로닉까지 소화할 수 있는 걸그룹으로 특유의 이미지를 쌓아온 f(x)는, 이번 앨범에서 좀 더 본격적인 EDM을 노래한다. 세계적인 프로듀싱팀 스테레오타입스와 팝 가수 칼리 레이 잽슨 등 국내외 다양한 아티스트들의 참여로 한 층 더 완성도 높아진 사운드가 인상적이다. 딥하우스, 신스팝 등의 댄스곡부터 라틴, 하우스 기반의 라운지, 트랩 비트의 힙합까지 다채로운 장르가 수록되어 있다.
f(x)는 또다시 이상한 나라에서 이상한 소녀의 포지션으로 현실과 동떨어진 것을 노래한다. 하지만 전과 달리 이들은 이제 차원이동을, 새로운 모험을 시작한다.
이상한 나라의 미지수, f(x)
아이돌에게 음악적, 미학적 완성도가 요구되기 시작하면서, 많은 아이돌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이하 『앨리스』)를 모티브로 한 컨셉을 내놓았다. 그 모티브를 가장 적극적으로 사용한 아이돌 중 하나가 바로 f(x)였다. f(x)는 데뷔부터 ‘속을 알 수 없는 소녀’, 그래서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소녀’를 표방해왔고 그 배경에는 그가 살아가는 이상한 나라가 항상 존재했다. 현실에서 동떨어진, 마치 소녀의 분열된 정신 그 자체인 듯한 세계를 구성한 것이다. 그 정신세계를 반복해 그려내면서 독립적인 캐릭터가 형성되었고 이후 아이돌 산업에서 가장 독보적인, ‘괴상하지만 아름다운’ 이미지를 획득했다.
SM 엔터테인먼트의 비주얼&아트디렉터 민희진은 2014년 7월 웹진 <ize>와의 인터뷰에서 f(x)에 관해 말하며, “아이돌이 대중에게 인형처럼 소비되지 않았으면 한다. 제일 메이저라고 할 수 있는 곳에서 마이너한 시도를 하고자 한다”고 답한 적 있다. 이처럼 f(x)는 마이너의 극단에서 파헤쳐 보지 않으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앨범을 만들어 왔다. 그리고 앨범에서 이어지는 모든 서사의 근간에는 『앨리스』가 있었다.
영국의 작가 루이스 캐럴의 대표작 『앨리스』 시리즈는 특유의 분위기로 세계에 따라 계속 변화하는 소녀, 고양이, 체스, 거울 등 대표적인 이미지를 그리며 전세계 문화에 영향을 미쳤다. 시리즈 전반에 수학자였던 루이스 캐럴 고유의 농담이 사용되고 있는데, 줄거리보다도 강박적으로 등장하는 그 괴이한 농담과 수학적 퍼즐, 물리학과 논리학이 뒤섞인 설정 등이 고유의 ‘이상한 나라’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f(x)는 『앨리스』의 여러 상징적 이미지를 모티브로 가져와 직접 사용하는 대신, 그 이상한 형식 자체를 가져왔다. 설명되지 않는 배경을 바탕으로 계속해서 자아의 변주를 보여주며 그 성장기를 대중에게 전시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그것이 줄거리가 된다. 이 줄거리에는 상징과 은유들만이 나열되어 있을 뿐 발단, 전개, 결말의 인과관계가 드러나지 않는다. 대중은 이 예측할 수 없는 개성을 매력으로 수용했고 갖은 해석을 내놓으며 그 세계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그러나 같은 식의 구성이 반복되면서 이들이 오로지 특이한 것만을 추구하는 건 아닌지, 이상하다는 점 외에 무엇이 남는지, 언제까지 예측불가의 소녀성을 강조할 수 있는지 등의 한계를 지적받았다. 언제가 되었든 소녀는 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와야 했고 다시 다른 곳으로 향해야 했다. 이는 시간이 지나면 ‘소녀에서 여성으로 돌아왔다!’ 식의 변화를 해야만 하는 여성 아이돌의 숙명과 맞닿아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기존 다섯 명의 멤버 중 이른바 ‘통통 튀는 매력’을 담당하고 있던 한 멤버가 탈퇴하면서 소녀들의 세계는 그 변화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거울 나라 식 풀잇법
이번에 선보인 앨범 ⟪4 Walls⟫는 표현 방식에서 그간 시도해온 반항적이고 실험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있지만(과도하게 비현실적인 컨셉아트나 기존에 시도되지 않았던 티저 공개 방식 등), 아예 과거의 내면 세계를 벗어나며 직접 자신을 발견하고 더 적극적으로 헤매는 방식의 이야기를 선택했다. 마치 이상한 나라에서 돌아온 앨리스가 다음 시리즈에서는 거울 나라로 떨어졌던 것처럼, f(x)는 기존 앨범에서 스치듯 사용되었던 ‘거울 앞에 선 자아의 분열’을 이번 앨범의 주요 사건으로 다룬다. 여전히 난해하고 불친절하지만 앨범 전면에 생동하는 이야기를 드러낸다는 것 자체가 큰 변화였다.
“꽃잎처럼 갑작스럽게 피어난 사랑으로 인해, 사방이 벽인 공간 속에 갇혀버린 것처럼 느껴지는 혼란스러운 감정을 담았다”는 타이틀곡 <4 Walls>의 가사에서는 그 분열적이고 추상적인 감상이 계속 나열되고 있다. “Love is 4 Walls 너로 채운 Mirror Mirror”, “투명하게 날 그려내던 거울 속엔 내가 아닌 네가 비춰와”, “눈 마주친 그 순간 내게 미소 지어” 등 거울에 투영되는 그림자가 크게 강조되고 분리되어 나타난다. 소녀들은 거울을 통해 직접 자신과 대면하며 동시에 쪼개져 있던 사방의 자아를 인지한다. 뮤직비디오 역시 네 명의 멤버를 모두 한 인물의 각기 다른 인격처럼, 또 전혀 다른 인물이지만 동시에 하나로 묶여있는 사념체처럼 설정하고 이들이 유기적으로 움직이며 서로를 발견하고 또 구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뮤직비디오는 f(x)의 타이틀곡 뮤직비디오 중에서 유일하게 안무를 조망하지 않은 형태이기도 하다.
멤버 탈퇴 소동 이후 처음 발표하는 앨범인 만큼 남은 멤버 간의 결속력을 강조하고자 하는 의도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의도야 어떻든 이 기형적인 성숙은 그동안 f(x)가 보여준 성장기의 자연스러운 결과물처럼 보인다. 과거 f(x)가 가장 집요하게 다뤄온 것이 미성숙의 혼란과 그 과도기에 놓인 자아였기 때문일 것이다. “나 어떡해요 언니?”, “의사 선생님 이건 뭔가요?” 등 호기심을 앞세웠던 초창기를 지나 “진짜 사랑이란 어쩌면 아주 느린 파동”이란 답을 스스로 도출하기까지, 몇 번인가의 사랑을 경험했지만 늘 화두의 중심은 그 사랑 속에서 이토록 혼란스러운 ‘나’였다.
앨범 ⟪4 Walls⟫에서는 ‘나’로 정립되는 개성보다 정규 4번째 앨범을 4명의 멤버가 만들었다는 ‘4’의 상징성을 집요하게 강조한다. 4개의 벽이 있는 이미지를 로고와 앨범 디자인에 사용했고,‘제4의 벽(The Fourth Wall)’을 암시하는 프로모션으로 4개의 벽면에 티저 이미지를 영사하는 전시회 <4 WALLS AN EXHIBIT>를 열기도 하였다.
‘제4의 벽’은 무대를 하나의 방으로 설정하고 관객들을 위해 한쪽 벽을 제거한 형식에서 등장한 연극 용어로, 무대와 객석을 구분하는 가상의 벽을 뜻한다. 이 개념은 이후 다양한 예술 장르에서 작품 속의 등장인물은 작품 밖을 인식할 수 없다는 클리셰로 발전했다. 그리고 이 ‘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을 돌파하려는 예술적 실험이 계속 시도되었다. 등장인물들이 작품 밖의 세계와 관객을 직접 인지하는 듯한 묘사가 바로 그것이다. 전시가 열린 갤러리는 실제로 출입구가 있는 면이 투명한 유리로 되어있으며, 벽면을 무너트린 듯한 모양으로 디자인한 공간이었다. f(x)는 이 전시를 통해 그들의 상징이었던 폐쇄적인 세계를 조금씩 넘어설 것을, 대중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것을 전했다.
‘제4의 벽’에 대한 묘사는 거울 앞에 선 정신분열증환자와 비슷한 구석이 있다. 주인공은 벽면을 보고 있지만, 실체를 인지하지 못하며, 벽면에 닿을 수는 있어도 벽면 안의 실체와 주인공은 가로막혀 있어 서로 간섭할 수 없다. 같은 것을 보고 같은 호흡을 하고 있지만, 분명히 주인공과 벽면 너머는 다르다. 주인공에게 이 면은 넘을 수 없는 것으로 규정된 벽이지만 어떤 예술적 실험으로, 심리학적 병리로 인해 경계를 넘나들며 벽 바깥의 인물과 직접 소통하기도 한다.
과거 f(x)는 이 벽과 잠시 마주한 적이 있었다. 지난 정규 두 번째 앨범 ⟪Pink Tape⟫의 수록곡 <미행>의 가사를 보자. <미행>은 주인을 사랑하게 된 그림자 시점에서 쓰인 곡으로, 그림자인 화자는 “너의 웃음 눈물 나는 모두 아는 걸”, “겁 먹지 마 우린 태양이 맺은 인연 함께일 운명” 등의 가사로 화자와 주인이 연결된 하나의 몸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절에서는 “거울 속 그 앤 너와 함께 웃고 있어 난 몰라”, “거울 속 그 앤 반짝 또 반짝 널 닮은 미소가 너무 부러워질수록” 등 거울 속 또 다른 제3의 인격을 발견해낸다. 이를 통해 그림자의 본체인 주인공은 자각하지 못한 상태이지만 이미 여러 분열이 일어난 상태일 것임을 추측할 수 있다.
⟪4 Walls⟫를 이 서사의 확장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미행>이 거울 앞에 선 미친 사랑이었다면 다음 앨범의 <Red Light>는 다른 차원의 경고였고 ⟪4 Walls⟫는 끝내 그 거울 속으로 들어가 사랑을 정의할 수 있게 된 이야기이다. 한 면의 거울을 보고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삼 면의 거울에 (네 번째 벽은 말 그대로 제4의 벽, 열린 가상의 벽으로 두고) 둘러싸여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렇게 f(x)는 모두 하나인 동시에 각기 다른 네 개의 형태로 존재하게 된다. 이는 함수의 사분면 그래프 역시 연상시킨다.
이렇듯 ⟪4 Walls⟫는 앞서 이루어진 모든 분열이 다시 합체하는 과정이고 경계에 서 있던 과도기를 지나 완전히 성장했음을 보여주는 일종의 리부트이다. 이 새로운 시작은 자기 정체성의 재확립이라기 보다 자기애의 완성에 가깝다. 우리는 드디어 변화의 목격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