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9년 5월 20일 부활 제5주간 월요일 (교육 주간)
제1독서 : 사도 14,5-18
복 음 : 요한 14,21-2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1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22 이스카리옷이 아닌 다른 유다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에게는 주님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지 않으시겠다니 무슨 까닭입니까?” 하자,
23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24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
25 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이것들을 이야기하였다.
26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주님의 사람
-사랑의 사람, 말씀의 사람, 성령의 사람-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사랑이 우선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계명을, 말씀을 사랑합니다.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습니다. 말씀은 주님의 현존입니다. 말씀을 통해 주님을 만납니다.
참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자유롭게 하는 말씀입니다.
얼마 전 참 좋은 제목의 수도승 영성에 관한 책이 있어 원장에게 주문을 부탁했습니다.
“시간되면 다음 2권의 책도 주문해 주세요. 수도승 영성에 관한 좋은 책 제목과 내용만 봐도 마음이 설레네요.”
“예, 주문했습니다.”
“감사합니다! 행복합니다.”
주고받은 메시지 내용이 지금도 선명합니다.
참 좋은 말씀과 책을 대하면 부자가 된 듯 참 행복함을 느낍니다.
어제는 주문한 2권의 책을 받고 마음이 기쁨으로 설레었습니다.
책 표지의 제목(1. 렉시오 디비나, 2. 영원한 삶에 이르는 길)과 그림만 봐도 행복했습니다.
말씀에 대한 사랑도 늘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사랑과 말씀이 주님을 만나는 데 얼마나 결정적인지 다음 주님 말씀을 통해 깨닫습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얼마나 위로와 힘이 되는 말씀인지요.
막연한 주님 사랑이 아니라 참으로 주님의 계명을, 말씀을 지키는 사람이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요 바로 이때 주님의 사랑도 받고 주님을 만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말씀 사랑은 주님 사랑이요 말씀을 통해서 주님을 만나니 말씀의 역할은 얼마나 결정적인지요.
말씀을 만나야 살아나는 영혼입니다. 주님은 다시 말씀을 지킬 것을, 말씀에 순종할 것을 권고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나를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이래서 말씀을 늘 지니고 살아야 합니다.
늘 말씀을 지니고 지키며 살 때 아버지께서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주님도 친히 우리와 함께 살 것입니다.
하여 제가 늘 피정자들에게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영성생활은 습관입니다.
매일 평생 규칙적으로 끊임없이 실천하여 습관화, 생활화하여 제2천성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선 날마다 매일미사책에 나오는 말씀들을 묵상하십시오.
매일미사에 참석하시든 못하든 ‘입당송부터 영성체후기도’까지 말씀을 묵상하십시오.
이보다 더 좋은 영성습관은 없습니다. 매일미사에 참석하시면 더욱 좋구요.
하루의 중심과 질서를 잡아주는 매일미사입니다.
매일미사책갈피에 제가 드린 기도문 끼어 놓고 자주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저도 늘 말씀과 가까이 지내고 싶은 갈망에 또 매일 강론 준비를 위해 늘 매일미사책을 들고 다닙니다.”
이런 요지로 말씀의 생활화를 강조합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주님 말씀의 중요성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을 통해 주님을 만나고 날로 주님을 닮아갑니다.
바로 여기서 결정적 도움을 주시는 분이 성령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성령을 통해 일하십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의 고별사에서 약속하신 성령이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성령보다 더 좋은 스승도 영적지도자도 없습니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참으로 주님의 사람은 말씀의 사람이며 성령의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의 빛나는 모범이 사도행전의 바오로와 바르나바입니다.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은 성령을 통해 두 사도와 하나 되어 복음을 전하며 일하십니다.
“두 발로 똑바로 일어서시오.”
바오로 사도는 태생 앉은뱅이가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음을 알고
큰 소리로 말하자 그는 벌떡 일어나 걷기 시작합니다. 말씀의 힘, 성령의 힘입니다.
바오로를 통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치유 받은 사람입니다.
두 사도를 헤르메스와 제우스 신들로 착각한 무지몽매한 리스트라 사람들을 일깨우는 말씀과 성령의 사도들입니다.
“여러분, 왜 이런 짓을 하십니까?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다만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할 따름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헛된 것들을 버리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또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살아 계신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답입니다. 살아 계신 하느님을 만날 때 비로소 회개요 겸손입니다.
살아 계신 하느님만이 우리 삶의 중심이자 의미입니다.
가까이 계신 살아 계신 하느님을 잊어, 잃어 방황이요 혼란입니다.
세상 헛된 것들인 우상들에 빠져 자기를 잊고, 잃고 지냅니다.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을 통해 성령 안에서 만나는 살아 계신 하느님입니다.
또 하나 기쁜 소식을 소개합니다. 오늘 5월20일은 ‘세계인의 날’입니다.
이 날은 국민과 재한외국인이 서로의 문화와 전통을 존중한다는 취지로 지정된 법정 기념일로
지난 2008년부터 매년 5월20일에 기념식을 갖습니다.
그런데 이번 세계인의 날에는 농촌발전과 교육사업에 매진했던 전 안동교구장님이셨던
프랑스 출신의 두봉주교님(90세)이 ‘올해의 이민자상’을 받게 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입니다.
90세의 고령에도 영혼은 영원한 청춘인 사랑의 사제, 말씀의 사제, 성령의 사제 두봉 주교님이 참 자랑스럽습니다.
사실 믿음의 눈만 열리면 온통 하느님 사랑의 선물로 가득한 세상임을 깨달을 것입니다.
어제 내린 단비로 가뭄에 목 타던 대지와 초목들이 생명으로 촉촉이 젖었으니
이 또한 자비하시고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자비하신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를 파스카 신비의 은혜로 새롭게 창조하시어
당신 말씀의 사람으로, 성령의 사람으로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주님, 저희가 아니라. 오직 당신 이름에 영광을 돌리소서, 당신은 자애롭고 진실하시옵니다.”(시편115,1).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저는 만년필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거의 모든 글을 만년필로 쓰고 있습니다.
사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만년필은 비록 고가는 아니지만
가볍고 필기감이 좋으며 제 손에 딱 달라붙을 정도로 느낌도 좋습니다.
그밖에도 장점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이 제가 잘 쓰고 있는 만년필을 보고서 이렇게 말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신부님, 왜 그런 만년필을 쓰는 거예요? 유명 브랜드도 아니고, 필기감도 떨어지지 않나요?
저도 이 제품을 써 본 적이 있는데 못 쓰겠더라고요.”
이런 식으로 좋아하는 만년필에 대한 나쁜 말만 늘어놓는다면 기분이 좋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에 상대방에게 반대의 의견을 내놓을 수도 있고,
또 말해봐야 소용없다고 판단되면 그냥 무시하면서 침묵할 것입니다.
만년필에 대한 예를 이렇게 말했지만,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는 내 가족에 대해서 누가 흉을 늘어놓습니다. 이때에 기분이 좋을까요?
“맞아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라면서 맞장구를 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정말로 좋아하는 것, 또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이것에 대한 믿음이 생기면서 누가 뭐라 해도 상관없이 이를 지키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는 고민을 털어놓는 분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왜 신앙심이 생기지 않는 것일까요? 주님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주님을 좋아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먼저 주님을 좋아하고 사랑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누가 뭐라 해도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믿음이 생길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분들이 세례를 받으면 저절로 주님께 대한 믿음이 생기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주님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주님께 대한 믿음도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을 받아 먼저 지켜야 합니다.
이렇게 먼저 지켜나갈 때 주님의 사랑을 받게 되고,
언제나 주님과 함께 하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계명을 따르는 것조차 주님께서 알아서 해달라고 떼를 쓰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내 자신이 주님의 계명을 따르는 것이 먼저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계명을 실천하는 사람만이 주님과 함께 하면서
주님을 좋아할 수밖에 없고 또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자유를 주는 사랑
반영억 라파엘 신부
살아가면서 사랑이라는 말을 달고 삽니다.
구지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사랑이라는 말은 언제나 기대되고 가슴 설레게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내 방식의 사랑이기에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기대하는 만큼 받지 못해서 애달프고 준다고 주는데 있는 그대로 받아주지 않으니 속이 상하고 그야말로 미워집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사람도 미워하는 사람도 만들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사람은 못 봐서 애타고 미워하는 사람은 봐서 애타기 때문입니다”(법구경).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요한14,23-24)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계명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지키지 않는다면 주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 무엇인가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의 결속관계를 지속시켜주는 힘은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행하는 가운데에서
또한 예수님의 말씀대로 실천하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우리가 서로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보면 압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은 여러 가지로 나타나지만 먼저 상대의 말을 듣는 것입니다.
사랑은 들음으로써 완성됩니다. 상대의 원의를 듣고 그에 상응하는 행동을 취함으로써 증거 됩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서로의 말을 들어주지 않고 있다면 아직 참사랑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듣지 않고 오히려 내 것을 강요하고 있다면 사랑을 빌미로 상처만 남길 것입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끼리 서로 닮아가서 상대방의 모습으로 바뀌기까지는
결코 완전한 것일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십자가의 성 요한).
“너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 되는 내적 일치의 사랑,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입니다”(박병규).
여러분은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그분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분의 계명을 지키십시오!
여러분의 배우자를 사랑하십니까? 배우자의 소리를 들으십시오.
자녀를 사랑하십니까? 그들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부모를 사랑하십니까? 그분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이웃을 사랑하십니까? 그들의 소리에 귀 기울이십시오.
나의 소리를 시끄럽게 들려주지 말고 먼저 듣고 원하는 바를 분별 있게 행하십시오.
사실 듣는다는 것은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3) 하고 말하였습니다.
귀로만 들을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새겨들어 행동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이의 말을 귀담아 들을 수 있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사랑은 분별없이 마구 퍼주고 철없는 탕아처럼 다 내주고도 너무 적게 준 것이 아닌지 걱정합니다.
사랑은 온기처럼 사방으로 퍼져 나가야 하며 형제들의 온갖 필요에 응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구원하길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산책하면서 인문학에 대한 강의를 듣는 것은 작은 즐거움입니다.
예전에 학교에서 배웠던 것이 생각나기도 하고, 지금까지 몰랐던 것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학을 배우기 전에 철학을 배웠습니다.
철학은 인간의 감성, 지성, 이성으로 자연현상, 사회현상, 인간 자신을 성찰하기 때문입니다.
자연현상은 자연과학, 사회현상은 사회과학, 인간 자신은 인문과학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우리가 사물을 인식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라고 합니다.
하나는 오감을 통해서 체험하고 경험하는 인식입니다.
다른 하나는 지성을 통해서 사유하고 분석하는 인식입니다.
경험은 모두가 같을 수 없고, 경험은 부정확하기에 때로 회의적으로 흐르게 됩니다.
지성은 모두에게 주어지 않기에 지성을 소유한 이들에 의해서 독점될 수 있습니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인간 인식의 잣대로 규정할 수 없는 것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동양의 노자 철학에서 이야기하듯이 ‘도를 도라고 규정하면 이는 도가 아니다.’라는 말과 비슷합니다.
경험과 지성의 크기로는 초월적인 자아, 우주, 신을 규정할 수 없다고 합니다.
실천과 판단을 통해서 절대적 자아, 우주, 신의 그림자를 느낄 수 있다고 합니다.
철학은 ‘나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입니다.
변화하는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것을 찾는 것입니다.
신학은 사물을 인식하는 새로운 차원을 이야기합니다.
‘절차탁마(切磋琢磨) 줄탁동시(啐啄同時)’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직관과 절대자에게서 오는 사랑이 새로운 차원의 세계로 우리를 안내하는 것입니다.
오랜 수양을 통해서 깨달음의 경지에 오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지성과 경험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인간의 수양과 기도가 절대자의 자비와 사랑을 만나면 역시 지성과 경험의 차원을 넘어서는 세상을 만나게 됩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만나는 사건이 계시이며, 은총이며, 성령의 역사입니다.
다락방에서 떨고 있던 제자들이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박해하던 사울이 이방의 세계에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도,
경험과 지성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하고, 변화되었기에 할 수 있었습니다.
변화된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며, 가진 것을 나누고, 교회를 세운 것은 성령의 이끄심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엥베르 주교는 만 리가 넘는 길을 떠나 조선으로 왔습니다.
인간의 지성과 경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결정입니다.
말이 통하지 않았고, 외모가 달랐고, 문화가 달랐고, 박해가 심해서 잡히면 죽어야 하는 곳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열정과 성령의 이끄심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기해박해를 피하지 않았고, 순교하였지만
그분들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청했고, 신앙의 별이 되었습니다.
자연과학, 사회과학, 인문과학은 인류의 문명과 문화의 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변화하는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초월적인 자아, 우주, 절대자를 만나기 어렵습니다.
굶주림에 떨고 있는 사람,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 전쟁과 폭력에 희생되는 사람,
자연의 파괴에 신음하는 지구별의 아픔을 치유하기 어렵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평화를 두고 가며, 내 평화를 줍니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습니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여러분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은총을 받을 좋은 그릇이란?
전삼용 요셉 신부
어느 고을에 착하고 예의바른 농부가 살았습니다.
그는 매우 가난했습니다. 농사라곤 손바닥만한 밭뙈기를 부치는 게 전부였습니다.
그 밭에 무씨를 뿌렸더니 정말 좋은 무가 났습니다.
착한 농부는 “농사가 잘 된 것은 모두가 원님 덕분”이라며 제일 큰 무 하나를 원님에게 바쳤습니다.
원님도 이렇게 착한 사람이 내 고을에 있는 것을 신통방통해하며 관리를 시켜 선물을 주라고 했습니다.
농부는 큰 황소 한 마리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심술궂은 농부가 이 소문을 들었습니다.
무를 바쳐 황소를 받았다면 자신이 기르는 황소를 바치면 더 큰 선물을 받겠다 싶었습니다.
과연 이 농부는 “저희가 잘 사는 것은 다 원님 덕분입니다.”라며 기르던 황소를 바쳤습니다.
원님은 이처럼 착한 백성이 많다고 칭찬하며 “창고에 무엇이 있느냐?”고 관리에게 물었습니다.
창고에는 착한 농부가 바친 무가 있었습니다. 원님은 심술궂은 농부에게 그 무를 선물했습니다.
청하는 사람의 마음을 크게 나누면 두 가지입니다. 먼저 꼭 필요해서 쓰려고 청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다지 필요하지는 않지만 미래를 대비해 청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모으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누구에게 더 큰 은총을 주실까요? 어떤 사람의 청이 더 간절할까요?
어떤 사람의 청이 더 진실할까요?
만약 모으려고 청하는 줄 알면서도 준다면 그 주는 사람이 이용당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청한 것을 받으면 이제 하느님께 덜 의지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당신께 의탁하기를 바라십니다.
가진 것이 충분한 사람은 덜 의탁합니다. 그러니 청할 때 모두 소진할 마음으로 청해야합니다.
그래야 주시는 분이 보람 있어 하십니다.
하느님의 선물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을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신이 가진 성령의 에너지를 다 소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은 이런 사람 안에 머무십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에겐 사랑이 계속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하면 당신의 말을 지킬 것이고
그러면 당신께서 그 사람에게 가서 살 것이기 때문에 당신을 만나게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을 만났기 때문에 당신의 계명을 지키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것을 보고 만나러 오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사랑을 하려고 하는 의지를 먼저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사랑을 원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더 바라는 이에게 먼저 선물을 주는 것은 당연합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시종에게 며느리 될 사람을 찾아오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시종은 아브라함의 가문에 맞는 사람을 고르기 위해 자신의 낙타 10마리에게 물을 길어주고
자신에게도 주는 여인이라면 하느님께서 점지해 주신 며느릿감이라고 여기겠다고 기도합니다.
레베카란 여인이 그렇게 합니다.
낙타 한 마리가 40리터의 물을 마신다고 하니 한 여인이 하기는 너무도 벅차고 바보 같아 보이는 일인데도
레베카는 목말라하는 낙타와 사람에게 물을 길어줍니다.
사랑의 의지가 없다면 이런 일은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다 하고 탈진 상태에 있는 레베카에게 아브라함의 시종은 금은보화와 장신구를 줍니다.
하느님의 선물을 받는 것입니다. 이 선물이 성령이십니다.
공동 작업시간에도 동료들과 어울리지 않고 기도만 하려고 드는 수녀에게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기도를 그만 하라고 명령했다고 합니다.
기도는 성령을 받는 일인데, 그것이 이웃사랑에 소진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행복하려면 성령을 받아야합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으려면 그 성령을 소진할 줄도 알아야합니다.
모으기만 하는 사람처럼 청하면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더라도 내면은 사막처럼 말라버릴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하면서도 기쁨과 평화도 함께 잃게 됩니다.
충만히 퍼내어 이웃에게 줄 수 있는 사람만이 성령께서 주시는 충만한 행복을 누립니다.
기도와 활동의 균형이 맞아야합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늘의 복음 부분은 분량이 길지 않은 편이지만 엄청난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23)
구약 시대를 성부의 시대라 하지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민족과 계약을 맺으시어 당신 백성으로 삼으시고,
당신은 그들을 돌보시며, 백성은 당신만을 섬기게 하십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로 새로운 계약이 이루어지는 시기를 성자의 시대라 합니다.
그때는 실제로 하느님의 아들께서 세상 한복판에서 사람들 사이에 현존하셨습니다.
성부의 시대와 성자의 시대를 칼로 베듯 단절할 수는 없습니다.
성부와 성자께서 한 분이신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또 구약 역사의 토대 위에서 새로운 계약이 나왔고,
구약의 율법과 예언서의 내용이 성자를 통해 실현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 말씀을 지키는 이들에게 아버지와 함께 가셔서 함께 살 것이라고 하시지요.
성부, 성자는 사랑 역시 독자적일 수 없습니다.
육을 지니고 오신 예수님을 사랑함으로써 아버지의 사랑까지 얻는다니,
게다가 성부, 성자께서 친히 오셔서 우리와 함께 사신다니
피조물인 우리에게는 다시 없을 엄청난 행운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거기서 한 술 더 얹어 주십니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요한 14,26)
예수님께서 성령까지 언급하시면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모두를 제자들에게(우리에게) 드러내십니다.
곧이어 다가올 성령의 시대는 교회의 시대라고도 하지요.
예수님께서 당신이 떠나신 후 세상에 남을 제자들을 지켜주시고
아버지의 뜻을 실현할 힘과 용기를 북돋워 주실 성령,
아버지의 뜻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일깨워주시고 기억하게 해주실 성령을 소개하십니다.
그러니 "한 처음에" 세상이 창조된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류는 단 한시도 하느님의 현존을 벗어난 적이 없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사람이 인정하건 인정하지 않건 모든 피조물, 전 인류는
성부, 성자, 성령의 이어지는 보살핌 속에 기나긴 세월을 대대손손 이어온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 우리는 리스트라에서 일어났던 해프닝을 듣습니다.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한 앉은뱅이를 치유하자 군중이 그들을 신으로 여겨 제물까지 바치려 한 소동이지요.
"신들이 사람 모습을 하고 우리에게 내려오셨다."(사도 14,11)
기적을 체험한 군중이 소리를 높여 외칩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얼마나 듣고 싶어하셨을 신앙고백입니까!!!
물론 "육화, 강생"의 신학적 개념과 "사람 모습"이란 말의 미묘한 차이를 볼 때 똑같은 표현이라 보기는 어렵지만,
치유 기적 한 번으로 신의 현존을 고백하는 이방인들의 열린 마음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입니다."(사도 14,15)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그들을 진정시키면서 그동안 그들이 섬겨온 것들의 헛됨을 일깨워주는 동시에,
"지난날에는 하느님께서 다른 모든 민족들이 제 길을 가도록 내버려 두셨다."(사도 14,16)는 것,
그러나 "양식과 마음의 기쁨"(사도 14,17 참조)으로 당신 자신을 드러내셨다는 걸 가르쳐줍니다.
그동안 리스트라 사람들이 얻은 일용할 양식은 창조주 하느님께서 세우신 자연의 질서를 통해 왔다는 것,
그리고 어디에서 오는지도 모르면서 누렸던 마음의 기쁨은 실상 성령의 현존이었다는 것을 설파한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하느님도 성령도 몰랐지만,
당신 이름도 모르는 이들에게 사랑을 베푸신 하느님을 이야기하는 이 대목은,
후일 아테네 설교(사도 17,16-34 참조)에서 드러나듯, 이방인 선교의 기초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삼위 하느님과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우리와 꼭 같은 인간으로 오셨기에 더욱 친숙한 예수님을 사랑함으로써 아버지도 얻고 성령도 누리는 겁니다.
죽음으로 인류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믿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아들과는 친한데 아버지는 어렵고 성령은 모르겠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무지하고 우매한 우리로서는 어느 한 분도 제대로 알지 못하지만,
부족한 채로 예수님께 드리는 불완전하고 보잘것없고 초라한 우리의 사랑이
우리를 삼위 하느님과 함께 살게 해 준답니다.
렙톤 두 닢어치도 못 되는 가난한 사랑을 보시고
삼위 하느님께서 우리보다 더 기뻐하시며 함께 달려오시니,
이 사랑은 정말 한번 해볼 만하지 않습니까?
존재를 걸 만하고 일생을 걸 만한 배팅이 아닌가요?
이 사랑의 초대에 흔쾌히 응답하여 그 사랑의 큰 은혜를 누리시는 벗님을 축복합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