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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실에서 천사흘밤 원문보기 글쓴이: 천야
논1968강윤정2020삼산독립운동
한말 일제강점기 전주류씨 삼산문중(三山門中)의 독립운동
강윤정(姜允丁), 한국국학진흥원, ‘삼산 류정원의 삶과 학문세계 학술대회’ (2020. 11. 11.).
[강윤정(姜允丁, 1968-) 안동대학교 사학과 조교수.]
차례
1. 머리말
2. 국권회복운동과 삼산문중
3. 1910년대 항일투쟁
4. 1920년대 이후 항일투쟁
5. 맺음말
[내용은 첨부 파일에서 볼 수 있습니다.]
#어릴 때 여름 방학에는 천전동(내압) 외가에 가서 지낸 적이 여러 번 있다. 그 내압(의성) 김씨 어른들은 농담으로 외손을 좋아하는 것은 방구를 좋아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 이 말은 서른이 넘어서야 묘자리가 다르다는 것으로, 그리고 내압과 무실 사이의 이야기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삼산류를 무시하지는 않았지만 다른 문중들과 마찬가지로 “삼산이 매쳤다”고 하였다. 매쳤다는 말투는 미쳤다의 사투리이다. 우리 집안이 미쳤다고? 난을 그리다를 난치다고 하듯이, 매화를 그리다를 매치다고 한단다. 왜냐하면 안동의 다른 문중은 거의 개화(開花)를 했었는데, 삼산문중은 매화(梅花)했다는 것이다. 너무 일찍 꽃을 피워서 된서리를 맞았다는 것이다. 된서리를 맞다니. 새로운 사조를 즉 사회주의를 너무 빨리 받아들였다는 의미인가. 어머니께서 시집오니 삼산은 하인에게 하대를 하지 않고 예대를 하는 것이 너무 이상했다는 말씀하시곤 하셨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세상도 바뀌었고, 인터넷에서 서핑해보면 우리집안에서 1920-30년대 당시 20대 30대 중에서 학식이 뛰어난 이들이 안동콤에 가담했다는 것도 요즘에 이야기로 나온다. 나도 놀랐다. 역사가의 글 한 페이지를 믿어야 하는지도 의문이다. 집안에서는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은 금기 사항이었으며, 사라진 사람들에 대해 언급조차 없었기 때문인데, 정말로 이번에 안동콤에 가담한 이들이 있다는 것을 기록상으로 처음 알았다. 난(초)을 치지 않고, 매(화)를 쳤는가 보다.
그리고 이를 내몰아서 배제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광기라고 한다면, 푸꼬가 광기의 역사에서 다루는 주제와 닮았으리라. 광기, 속좁은 이성에 의한 소외. 광기란 어떤 사회가 그에 맞지 않은 사유를 내몰고, 통치적 사고에 맞는 방식으로 몰아간 사회, 니체도 열광하는 음악에서 바이마르 공국을 그렇게 보았던 것 같다. 프랑스 18-19세기 사유의 자유와 깊이(심층)을 연구한 철학자가 푸꼬였다. 그 과정에 권력에 속하려고 예속하는 과학의 광기를 보았을 것이다. 푸꼬처럼 이렇게 깊이를 사유하는 경우를 들어가 보면, 동시대에서 통상적 사고와 다른 사유가 흐르다가 표면으로 올라오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 같잖은 사유라고 된서리를 맞겠지만. 시대의 변곡점에서 표면으로 솟아나는 사유의 장면이 들뢰즈의 ‘고원’인 셈이다. 삼산문중이나 경성콤이 일제시대의 통상에서 벗어났다는 점에서 광기일 수 있고, 매친 것일 수 있다. 일제는 자기들에 적대적인 사유에 대해 억압과 야만을 휘둘렀다고 하더라도, 이를 억압하고 배제하는 사고가 해방 이후에 이제까지 이어지는 것은 일제 폐단에 이어 미국 제국에 젖은 영어화 사고의 광기가 아닐까? 고원은 시대의 변곡점이 우여곡절의 고비 마다 있어왔었다. 또한 변곡점들은 어느 시대나 어느 사회에서도 있어왔다. 죽 있어왔다는 의미에서 그 내재성 즉 무의식은 실재성이며, 그 기억은, 과거의 단면인 추억과 달리, 실재성이다.
이 한 세기에 앞서서 변혁과 혁명을 실현하려고 노력했던 적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과거의 역사와 현 세상이 달리 보일 수 있다. 시대가 광폭하고, 몽매하더라도, 계열과 선들이 흐려져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없는 것처럼 되었다고 하더라도, 덩어리의 흐름이 절편으로 파편으로 조각으로 흩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그 리좀은 심층(깊이)에서 흐르고 달리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들뢰즈 표현을 비유적으로 ‘왕관 쓴 아페이론’은 내면에서 흐르고 탈주선을 찾고 있었다. 이번에 안동콤을 인터넷에서 서핑하면서, 야체이카(세포)라는 단어를 처음 알았는데, 이런 야체이카 조직이 경성콤과 안동콤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경주 월성, 안동 영주, 충청도, 그리고 제주도에도 있었고 원산에도 있었다고 하니, 매친 지역이 하나 둘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내가 월성지구 출신인 벗 권용원을 만났었을 때도, 그런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온다고 했었지만 내용의 실재는 몰랐었다. 그는 양동과 경주의 글 줄 하는 이들은 일제 시대에 모두 빨갛다고 하였고, 나도 안동 봉화 지역에서도 글 줄 하는 집은 색깔이 빨갛다고 하면서, 깊이 흐르는 리좀의 흔적도 모르는 채 의기투합하기도 했었다.
해방 후에 우리나라으 방향을 사회주의로 가자는 여론이 지배적이었다고 하는 것은 그냥 유머 거리가 아닐 것이다. 푸꼬가 말하는 광기는 권력의 집단의식이 강압과 폭력으로 유지하는 것으로, 그 시대가 야만이라는 것이다. 오랜 군부 정권은 말할 것도 없고, 얼마 전 그 군부를 향수처럼 기리는 집단의 광기가 멎은 것도 촛불에 의해 새로운 분출에서 이다. 이 시대에도 문재인 대통령을 김정은의 지시를 받는 자라고 떠드는 교회 목회자, 정치가, 연예인, 만화가 등도 광기의 역사의 여진일 것이다. 이 광기를 광기라고 부르지 못하는 연구자들의 가슴앓이가 있을 것이다.
방송의 패널들이나 평론가들이야 자본의 주구로서 탐욕과 과욕, 탐음과 음험으로 배 채우기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연구하는 학자들이야 그렇게 해서 되겠는가라고 소수자가 말하곤 한다. 그러면 요즘 학자들이 어디 있냐고도 하기도 한다. 자기가 이미 발표한 것을 이리저리 짜깁기해서 논문 내고 자리 유지하기도 바쁘다고들 한다.
아니, 그래도 한 주일동안 콤에 관련한 것들을 이리저리 서핑해보니, 이곳 저곳에 파편과 절편들이 널려있다는 것도 알았다. 아직 탈주선이 이어지지 않고 분출선이 솟아나지 않았을 뿐인 것 같다. 그렇다. 예전에는 프랑스 인물들 중에 한사람을 알아가는 데도 많은 날들 또는 달들이 필요했는데, 이제 잠시 시간을 내어 인터넷을 뒤지면 온갖 이야기들 발견할 수 있다. 이게 10여년이 안 된다는 것이다. 다른 글을 읽을 수 있는 노력만하면, 누가 무엇을 말하고, 누가 거짓을 말하는 지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거짓 이야기가 너무나 많이 돌아다녀서 진실과 사실을 찾기 어렵다고들 한다. 그 말은 좀 더 노력 하지 않는 것이리라. 선현들의 말처럼, 쓰잘데 없는 이야기 가까이하지 말고, 진실하고 진솔한 이야기를 보고 듣고자 하면, 거짓 이야기는 자연스레 퇴출되리라. 지금 넘쳐나는 것은 탐욕과 탐음 속에 타락하고 야만으로 가는데, 탈주선을 잇고 분출선을 만드는 길, 변곡점을 깨우쳐 움직일 때, 변혁의 주체화일 것이다. (54LMC) (54LMG)
## 사람들은 전주류문(全州柳門) 중에서, 삼산문중(三山門中)의 독립운동이 많다고들 한다. 물론 무실문중와 박실문중에도 많다고 들었다. 여기 이 논문에서는 삼산문중 만을 다루고 있다. 이 논문을 기준으로 보면 1920년대로부터 그리고 1930년 이후에 삼산문중은 변혁운동으로 계몽운동, 사회주의, 아나키즘 등으로 새로운 길(들뢰즈 표현으로 탈주선, 변곡점, 되기)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내가 들었던 바에 의하면, 이런 세 가지 형성 되기(devenir)는 일제의 항거라는 의미에서 하나로 수렴되었다가(?), 해방 후에는 여러 갈래의 분출선으로 갈라지는 것이 아닌가 한다. 아직도 이야기를 전달해 줄 사람들이 말을 아끼고, 그 분들이 이제는 거의 다 사라졌고, 이야기를 들은 이들은 여전히 몸 사리고 있는 것 같다. (54LMC)
삼산문중에서 다른 문중보다 사유의 변역(變易)과 사회의 변혁(變革)에 관심이 많았던 것은 삼산의 역학(易學)에 기인한다고들 한다. 그의 사유는 성리학적 도를 지키면서도 ‘시세에 맞게 처신해야 한다(隨時變通 수시변통)’는 것이다.
기록을 위하여, 독립운동에 관련했던 인물들을 간단히 소개하자 논자는 세대를 구분하였다. 1세대인 류창식(柳昌植, 1858-1912)과 류필영은 위정척사(衛正斥邪)적 인식에 기반을 두고 의병항쟁을 전개하였다. 류필영(柳必永, 1842-1924)의 파리장서운동은 그 연장선에 있다고 할 수 있다. / 2세대 류인식(柳寅植, 1865-1928)은 성리학적 바탕 위에서 성장했지만 계몽주의로 전환하여, 2세대와 3세대를 잇는 가교역할을 하였다. / 그리고 류인식의 영향을 받은 3세대 류림(柳林, 화영(華永), 1898/1894-1961) 류준희(柳浚煕, 1892-1925) 류기태(柳基泰, 1920-1981)류기만(柳基萬, 1906-1950) 류기복(柳基馥, 1906-?) 등은 아나키즘과 사회주의 등 다양한 사상을 수용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류기복(柳基馥) 등은 안동콤그룹 활동이후는 알려지지 않은 채 심층으로 흐르고 있다.] / 4세대인 류기준(柳基俊(1924-?)은 1940년대 일제의 전시체제에 굴복하지 않고, 한국광복군에 지원하여 활약하였다. [류기태(柳基泰, 1920-1981)의 두 아들 류종대(柳鍾大, 1923-?)류종영(柳鍾英, 1926-?) 등으로 이어지는 심층의 흐름은 아직도 탈주선을 찾지 못하고 있는가 보다.]
<변역(變易)의 사상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 그 때문에 변화하는 시세(時勢)를 읽어내는 탄력성을 가지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투쟁적 실천적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배경에는 성리학적 도를 지키면서도 ‘시세에 맞게 처신해야 한다(隨時變通 수시변통)’> 강윤정의 「한말 일제강점기 전주류씨 삼산문중(三山門中)의 독립운동」에서 (54LLE) (54LM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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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은 이야기로 삼산문중은 공화정에 매력을 느꼈다고 한다. 그 공화정의 매력이 파리장서운동에 연관 있을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공화정의 의미를 1919년 3.1독립선언보다 일찍 일어났던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 또는 무오독립선언서(戊午獨立宣言書)’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아래 서명자 목록이 있다). 이 대한독립선언서의 공화주의자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아마도 이들은 손문의 신해혁명과 이어서 등장한 원세계를 폐위시킨 공화정을 수립한 것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즉 일본의 방식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 시기의 공화정이 무엇인지를 탐구해 보아야 할 것 같다. (54LMH)
# 시대사 ***********사건들 **
[1911년 쑨원은 난징에서 신해혁명을 크게 성공시킴으로써 1912년 1월 1일 중화민국 임시대총통이 되었으나, 북양군벌의 거두 원세개와 타협, 같은 해 3월 1일 원세개에게 실권을 위임하였고 급기야는 같은 해 3월 10일 원세개에게 대총통직을 넘겨주었다. 같은 해 '제2혁명'에서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 이듬해 중화혁명당을 결성하여 반원(反遠, 반 원세개)운동을 계속했다. 1917년 광저우에서 군정부를 수립, 대원수에 취임하고, 1918년 여름무렵에 레닌과 소련 정부에 축전을 보냈다. 1919년 10월 10일에 중화혁명당을 중국 국민당으로 개칭하고 총부를 상하이에 두었다.]
1919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 또는 무오독립선언서(戊午獨立宣言書)는 1919년 2월 1일(음력 기미년 1월1일)에 발표된 독립선언서이다. 일명 대한독립선언이라고도 불리며 3·1 운동의 전초가 된 독립선언서 발표 사건이다. 선언문은 조소앙(趙素昻)이 작성하였다. - “..아 우리 마음이 같고 도덕이 같은 2천만 형제자매여! 국민본령(國民本領)을 자각한 독립임을 기억할 것이며, 동양평화를 보장하고 인류평등을 실시하기 위한 자립인 것을 명심할 것이며, 황천의 명령을 크게 받들어(祇奉) 일절(一切) 사망(邪網)에서 해탈하는 건국인 것을 확신하여, 육탄혈전(肉彈血戰)으로 독립을 완성할지어다.” - 서명 서른아홉 + 가명 여섯 = 도합 마흔 다섯명이다.
1919 3월 1일 기미독립운동 33인. “吾等은 玆에 我 朝鮮의 獨立國임과 朝鮮人의 自主民임을 宣言하노라 此로써 世界萬邦에 告하야 人類平等의 大義를 克明하며 此로써 子孫萬代에 誥하야 民族自存의 正權을 永有케 하노라. ...”
1919 4월 12일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보내기 위해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서한을 작성한 사건. 호서지방의 유종(儒宗)인 전 승지 김복한(金福漢)을 중심으로, 대부분 의병에 참여하였던 김덕진(金德鎭)·안병찬(安炳瓚)·김봉제(金鳳濟)·임한주(林翰周)·전양진(田穰鎭)·최중식(崔中軾, 혹은 崔中式) 등에 의해 이뤄졌다. 영남유림에서도 곽종석(郭鍾錫)·김창숙(金昌淑) [류필영(柳必永)] 등이 필두로 같은 목적의 일이 추진되고 있었다. 그 뒤 영남유림은 이런 사실을 알고 영남본(嶺南本)을 전용학(田溶學)에게 주며 홍성으로 가서 호서본(湖西本)과 비교, 검토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교정본이 작성되기 전에 파리강화회의 대표로 선정된 김창숙이 시급히 상해(上海)로 출발하게 되었다. 이에 서울유림들은 영남본이나 호서본의 내용이 서로 뜻이 같으나, 영남본이 호서본보다 포괄적이면서도 뜻이 명확하다는 여론에 따라 김창숙에게 영남본을 주어 출발시켰다. 그리고 장서 말미에 134명 유림대표가 서명하였으며, 대표파견 경비는 황일성(黃佾性)이 조달하였다. 그러나 장서는 김창숙이 파리로 가져가지 못하고, 당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 대표로 선정되어 파리에 가 있던 김규식(金奎植)에게 송달되었으며, 또한 국내 각 향교에도 우송되었다.
- 파리장서비는 1972년 10월 서울 장충단공원에 처음 세워졌다. 이후 1977년 경남 거창, 1997년 대구 달서, 2006년 충남 홍성, 2007년 경남 합천, 2014년 경북 봉화에도 건립됐다. [경남 밀양, 전북 정읍 등도 있다.]
1919년 3.1 운동 직후 대한국민의회, 상해 임시 정부, 한성정부 등 각지에 임시 정부가 수립된 뒤, 같은 해 9월 11일 한성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원칙 하에 상하이를 거점으로 대한국민의회, 상해 임시 정부, 한성정부 등 국내외 7개의 임시 정부들이 개헌형식으로 통합되어 대한민국 임시 정부로 개편되었다.
1920년 가을에 유인식(柳寅植, 1865-1928)의 지도로 조선노동공제회안동지회가 조직되었다. [구성원: 이준태(李準泰, 1892- 1945이후미상), 김남수(金南洙, 1899-1945)]
1923년 11월에 김남수(金南洙, 1899-1945)는 안동으로 내려와 양반지주 출신들인 이준태(李準泰)·권오설(權五卨)·안상길(安相吉) 등과 더불어 풍산소작인회(豊山小作人會)를 조직해 안동에 사회운동의 뿌리를 내렸다. [권오설(權五卨, 1897-1930) / 안상길(安相吉, 1892-1958), 안상훈(安相勳, 1898~?)]
1923년 7월 권오설(權五卨, 1897-1930)은 서울에서 결성된 사회주의사상단체인 신사상연구회(후에 화요회로 개칭)에 참여하였다. 1924년 4월 창립된 조선노농총동맹에서 화요회를 대표해 중앙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5 이준태(李準泰, 1892-1945이후미상) 1월 안동에서 사회주의사상단체인 화성회(火星會)를 조직하고 집행위원이 되었으며, 그곳에서 ‘보천교성토회(普天敎聲討會)’ 개최를 이끌었다. [화성회: 김남수(金南洙, 1899-1945), 안상길(安相吉, 1892-1958)]
1925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Communist Party of Korea)은 1925년 4월 17일 창건된 공산주의 정당이다. 조선로동당의 전신이다. 서울 시내 식당 아서원에서 박헌영, 김단야, 조봉암 등에 의해 비밀리에 조선공산당이 정식으로 창립되었고 초대 책임 비서로 김재봉(金在鳳)을 선출했다. 1928년 일본의 탄압과 내부분열로 해산되었다가 1945년 8월 15일과 8월 20일 각각 장안파와 재건파가 출범하였다. 8월 24일 최종통합되어 조선공산당이라는 당명으로 재건되었다가 1946년 11월 23일 조선신민당, 조선인민당과 합당하여 남조선로동당의 전신이 되었고, 또한 조선로동당의 전신이다.
1925년 12월 서울에서 조선공산당이 극비리에 2차로 재조직되었다
1926 6·10 만세 운동(六十萬歲運動)은 일제 강점기 조선에서 학생을 중심으로 하여 일어난 독립운동이다. 순종의 인산일(因山日)인 1926년 6월 10일에 일어났기 때문에 6·10 만세 운동으로 명명되었다. 1926년이 간지로 병인년이므로 병인만세운동(丙寅萬歲運動)으로 불리기도 한다.
1926년 12월 정우회선언에 따라 조선공산당(3차)이 재건되었다. 이를 ML당이라고 한다. 이 당은 조선공산당사상 이른바 ‘파쟁청산의 통일적 당’이라고 한다. 당책임비서를 김철수·안광천·김준연(金俊淵)·김세연(金世淵) 등으로 수시로 바꾸었지만, 그들은 1928년 2월 일경에 의해 검거되고 말았다. / 코민테른은 ML당에 대하여 당조직 운영방침, 단일의 민족혁명전선 조직방침 및 운영방침 등에 대한 11개 조의 지령을 비밀리에 내려 보냈으며 특히 단일 민족혁명전선의 운영방침을 명시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1927년 황태성(黃太成 1906-1963) 경북지역의 사회주의 세력들과 함께 조선공산당 경북위원회(경북도당) 결성에 참여하고, 조선공산당 경북책임위원 및 고려공산청년회 경북책임자와 고려공산청년회 김천 야체이카로 활동하였다.]
1927년 4월 동산 유인식: 청년운동에 있어 지도적 조직체였던 화성회(火星會)를 해체.
6월 [황태성(黃太成 1906-1963)] 신간회(新幹會) 김천지회 설립에 참여하였다.
8월 동산 유인식: 신간회(新幹會) 안동지회를 설립
1928 조선공산당은 1928년 일본의 탄압으로 해산되었다.
1929 광주학생운동
1930 경북공산당사건으로 안동 지역의 사회주의운동이 위기를 맞게 되었다.
1931년 3월 20일 안상윤·이필·권중택 등이 중심이 되어 비밀결사조직 안동콤그룹을 결성하였다. 안동콤그룹 일제강점기 안동 지역에서 결성된 사회주의운동 비밀결사단체이다.
- 권중택은 1931년 4월 권예윤(權藝潤)과 함께 안동읍을 중심으로 적색노동조합을 조직하였다. 1931년 7월 중순경에는 김공망(金公望), 김후식(金厚植) 등을 중심으로 임하그룹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예안면에서도 예안노농행동대(禮安勞農行動隊)를 조직하였다. 또한, 안동콤그룹은 야체이카(세포) 조직을 영주와 봉화 지역으로 확대하였다.
1931년 5월 16일 신간회는 창립대회 이후 처음으로 연 전체 대회에서 찬성 43, 반대 3, 기권 30으로 신간회는 해소안을 가결하고, 창립 4년여 만에 사실상의 해체의 길을 걷게 된다.
1931년 9월 일본의 만주침략이 격화되면서 본격화되었고, 만주에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은 독립투쟁은 무장투쟁으로 전환되어 간다. 조선혁명당과 조선혁명군은 중국공산당과 연대를 이룬다. - 동북항일연군 등.
1939 경성콤그룹(京城)은 일제 강점기 말기에 조직된 독립운동단체이자 비밀결사 조직이다. 1939년부터 1941년 사이에 경성부를 중심으로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기 위해 활동한 조직으로 1930년대 초반에 있었던 각 콤그룹의 당재건운동과 그 후 1930년대 중반에 있었던 경성의 이재유 그룹과 원산의 이주하 그룹의 당재건운동을 계승한 1930년대 후반 대표적인 당재건운동 단체다. 일제강점기 국내파 사회주의, 공산주의 운동가들의 최후 집결체로 평가받고 있다. 명칭은 경성 코뮤니스트 그룹을 줄여 부른 것이다. 박헌영, 이현상, 이관술, 이재유, 김태준 등이 주로 활동하였다.
# 전주류문(全州柳門) 인명록 ***
1331k 류습(柳濕)[1331k-1400k] 전주류씨 시조 장령공: 장령공파(掌令公派) 시조 류습(柳濕)은 고려(高麗) 말에 다섯 아들이 모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장령(掌令)에 추증(追贈)되고 완산백(完山伯)에 추봉(追封)되었다. / 한.위키: 류습(柳濕, 1367년 10월 27일-1439년 8월 6일)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다. 본관은 고흥(高興). 류탁(柳濯)의 차남이다.
1500 류윤선(柳潤善. 1500-1557), 전주류씨 수곡파(全州柳氏 水谷派)의 파시조 류윤선(柳潤善. 1500-1557)은 전주류씨 시조 장령공 류습(柳濕)의 7세손이다. 제학공( ...
1673 류석구(柳錫龜, 1673-1737) 유정원의 아버지. 삼산의 어머니는 이천린(李天麟)의 따님인 연안이씨(延安李氏)이다.
** 삼산문중(三山門中) 독립운동 연관자들
-[여섯 집안] 진(震)휴, 명(明)휴, 일(日)휴, 경(敬)휴, 만(萬)휴, 필(弼)휴
[1703 류정원(柳正源, 1703-1761) 조선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순백(淳伯), 호는 삼산(三山). 아버지: 류석구(柳錫龜), 어머니: 연안 이씨(延安李氏) 이천린(李天麟)의 딸 / 서제: 류후원(柳厚源) 서제: 류발원(柳發源) ]
1842 류필영(柳必永, 1842-1924) 자 경달(景達). 호 서파(西坡). 침산정(枕山亭)을 지어 강학에 힘써 후진을 양성하였다. 1919년 파리에서 만국 평화 회의가 열리자 영남을 주축으로 한 대한 제국 유림은 독립 청원서를 보냈는데, 이때 파리 장서(巴里長書)에 서명하여 항일 의지를 확고히 밝혔다. 이 거사를 전후해서 남도에는 곽종석(郭鍾錫)이요, 북도에는 유필영이라 하여 남곽북유(南郭北柳)라고 불렸다. 저서에 《서파집(西坡集)》이 있다.
[일휴(日休)- *문 –치* - *진 – 필영 - 인식
[곽종석(郭鍾錫, 1846-1919) 본관 현풍(玄風), 자 명원(鳴遠), 호 면우(俛宇) 경상도 단성(丹城) 출신. 그는 1895년(고종32)에 비안 현감(比安縣監)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때마침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안동과 제천에서 의병 진영을 살폈다. 그의 1905년(광무9)에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약의 폐기와 조약 체결에 참여한 매국노를 처형하라는 내용으로 상소하고, 3ㆍ1 운동 때는 파리의 만국 평화 회의에 독립 호소문을 보내어 옥고를 치렀다. 저서에 《면우집(俛宇集)》이 있다.
1865 류인식(柳寅植, 1865-1928) 자 성래(聖來), 호 동산(東山). 류필영(柳必永)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류기영(柳祈永)의 아들로 입양되었다. 류필영은 퇴계 학통을 계승한 류치명(柳致明)의 제자였으며, 1919년 3·1운동 직후 유림들의 항쟁인 파리장서의거에 참여했다가 투옥된 인물이다. 안동지역의 청년운동에 있어 지도적 조직체였던 화성회(火星會)가 1927년 4월 해체를 선언하고, 신간회 안동지회 설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1927년 독립운동계에 좌우합작운동의 결과인 신간회가 탄생하자 8월에 안동지회를 결성하고 회장으로 활동. 대동사(大東史) 대동시사(大東詩史) 동산전서(東山全書) 동산문고(東山文稿)가 있다.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일휴(日休)-도문 기문–(치양)치형-정진–필영–만식 인식-준희]
1858 류창식(柳昌植, 1858-1912) 자 계팔(啓八), 호 만산(晩山), 강개(慷慨)지절(志節). [첫째 진휴(震休)-종문(宗文)-치묵(致默)-택진(宅鎭)-찬영(纘永)-창식(昌植)-]
1892 류준희(柳浚煕, 1892-1925) 류인식의 아들, 1907 협동학교 1회 졸업생(류림도 1회 졸업생?). 1920년 5월 동아일보 안동지국 총무로 활약하였다. 또 1920년 9월 23일에 창립된 조선노동공제회 안동지회에 참여하여 1921년 7월 제2회 총회에서 간사로 선출되었다. 조카 류면희는 서울에서 6 10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일휴(日休) - *문 –치* - *진 – 필영 – 인식 – 준희]
1898 류림(柳林馥, 본명, 화영(華永), 1898/1894-1961) 단주(旦洲), 아버지는 유이흠(柳李欽)이며, 어머니는 의성 김씨(義城金氏), 임시정부 국무위원, 독립노농당 초대 당수. 독립노농당(獨立勞農黨)을 결성하여 당수에 취임하는 한편, 1946년『노농신문』을 발간하여 자유·평등이라는 평생의 이념선양에 힘썼다. / 1922년 대만 청두대학(成都大學) 사범부 문과에 입학한 뒤 아나키스트로 전향하였다. 1925년 이 대학을 졸업한 뒤 광둥(廣東)·상해·우한(武漢)을 내왕하면서 중국 국민당내 좌파를 이루는 아나키스트원로들과 사귀었고, 천두슈(陳獨秀, 1879-1942), 진형명(陳炯明, 1878-1933) 등 사회주의 세력과도 접촉을 하면서 광둥의거(廣東義擧)·우창폭동(武昌暴動)에도 참가하였다. 한편, 김두봉(金枓奉)·신채호 등과 『한글말본』·『깊더조선말본』 등을 저술하였다. *묘: 서울 강북구 수유동 127-3 [경휴(敬休) -수문 술문–치섭–호흠 이흠–희영 만영 돈형 화영(림)]
1906 류기복(柳基馥, 1906-?) 신간회 안동지회에 참여하였으며, 신간회 안동지회가 해소되자 류기만은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전개한 안동콤그룹에 참여하여 항일투쟁을 이어나갔다. [진휴(震休)-종문(宗文)-치묵(致默)-택진(宅鎭)-찬영(纘永)-창식(昌植)-건희 진희 운희 원희–기복 기하 기홍 기준]
1906 류기만(柳基萬, 1906-1950庚寅) 일제강점기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사회주의운동가. 예안공립보통학교 졸업. 1931년 3월 20일 안상윤(安相潤)·이필(李鉍)·권중택(權重澤) 등이 결성한 안동콤그룹에 참여하였다. 조직훈련부 책임자로 활동하다 1933년 8월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1934년 7월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언도 받았다. [진휴(震休) .. .. 창식-건희, 진희-기만- ]
1916 류면희(柳冕熙, 1916-1940) 이명 류호백(柳虎伯) 1926년 6 10만세운동을 이끌었다. 이 활동으로 경찰에 검거된 그는 1926년 6월 14일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27년 4월 1일에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형이 결정되었다. 출옥 후 그는 1929년 5월에 조선학생과학연구회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6년 당시 중앙고보(中央高普) 4년에 재학 중이던 류면희는 조선학생과학연구회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일휴(日休) - *문 –치* - *진 –필영–인식 만식–성희 면희 석희 욱희 ]
1920 류기태(柳基泰, 1920-1981辛酉) 호 曙崗(서강). 한학자로 신간회 운동에 참여했던 우국지사였다. 선친은 재종조부였던 동산(東山) 류인식(柳寅植) 선생의 학문과 사상적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 종손의 생부 류종환 씨는 대구 능인고등학교에 37년간 봉직한 교육자며 교장으로 퇴임했다. 처가는 경주 양동 무첨당 종가며 외가는 존재 이휘일 종가인데, 존재는 재령이씨 석계 이시명의 아들이며 갈암 이현일의 형이다. [진휴(震休)... 창식–건희–기태(종손)-[종환]- 동철 ]
1920 류기원(柳基元, 1920-?) 배 한양조씨(도계) [일휴(日休) - *문–치*-*진–필영–인식-준희-기원]
1923 류종대(柳鍾大, 1923-?) 배 의성김씨(해저) [진휴(震休)-종문(宗文)-치묵(致默)-택진(宅鎭)-찬영(纘永)-창식(昌植)-건희-기태-종대 종영]
[진휴(震休)-종문(宗文)-치묵(致默)-택진(宅鎭)-찬영(纘永)-창식(昌植)-건희-기태(基泰)-종대(鍾大)]
1924 류기준(柳基俊(이명 柳基馝, 1924-?[미기재])은 한국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하였다. 류기준은 1941년 3월 만주 안동중학교를 졸업하고, 북경 신민학원에 다니다가 1944년 10월 중퇴하였다. 그 뒤 류기준은 한국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하여 1944년 12월 1일부터 해방 때까지 활동하였다. [진휴(震休) ... 창식 - 건희, 진희, 운희, 원희 – 기복, 기하, 기홍, 기준.]
1926 류종영(柳鍾英, 1926-?) 배 전주최씨(해평) [해방되던 해 스물아홉이다] - [진휴(震休)-종문(宗文)-치묵(致默)-택진(宅鎭)-찬영(纘永)-창식(昌植)-건희-기태(基泰)-종대(鍾大) 종영(鍾英) ] - [진휴(震休)... 창식–건희–기태-종대 종영 종수 종환- 동철.]
1931 류기욱(柳基旭, 1931-?) [전쟁 시 스물이었다.]
* 연관인물들 **
1858 이상룡(李相龍, 1858-1932) 자 만초(萬初), 호 석주(石洲). 생가는 99칸 임청각(臨淸閣)이다.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고성(固城)이고, 1925년 9월 24일부터 1926년 1월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역임하였다. 일명 이상희(李象羲), 이계원(李啓元)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었다. 1907년경부터 교육의 역할을 중시하는 애국계몽운동으로 방향을 전환, 협동학교 설립 및 대한협회 안동지회 창설, 시국 강연 등을 벌였다. 유인식(柳寅植, 1865-1928), 김동삼이 이때부터의 동지들이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878 김동삼(金東三, 1878-1937) 대한제국의 군인 겸 정치가이자 독립운동가. 본관은 의성. 아명(兒名)은 김긍식(金肯植)이며 아호는 일송(一松).
***연구자들
1932 조동걸(趙東杰, 1932-) 국민대 교수, “巴里長書의 性格과 歷史的 意義, 1997”
1954 김희곤(金喜坤, 1954-) 경북대 학석박. 안동대 사학과 교수. <상해지역 한국독립운동단체연구, 경북대, 1991, [미기재]> “동산 류인식의 생애와 독립운동”, 민족 위해 살다 간 안동의 근대인물, 안동청년유도회, 2003.
1959 박걸순(朴杰淳, 1959-) 충북대 사학과 교수. <한국근대사학의 전개와 고려사인식에 관한 연구, 1993, 충남대, 권태원.> “시대의 선각자 혁신유림 류인식”, 지식산업사, 2009.
[1959 장세윤(張世胤 1959-), 중국 동북지역 민족운동과 한국현대사, 명지사, 2005, P. 616, 특히 제1부 제1장, 안동 출신 명망가들의 만주 망명과 독립운동 참조]
1960 권오영(權五榮, 1960-),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최한기 전공?, <[미등재], 1994>, “전주류씨 수곡파의 가학연원과 사상적 특징, 전주류씨 수곡파 자료로 본 조선후기 양반가의 생활상”, 한국국학진흥원, 2004. / 권오영, 定齋學派의 형성과 衛正斥邪運動, 한국근현대사연구 10, 한국근현대사연구회, 1999.
1968 강윤정(姜允丁, 1968-) 안동대학교 사학과 조교수. / 강윤정, <定齋學派의 현실인식과 구국운동, 단국대박사학위논문, 2007.>
김주한?-?, 東山 革舊維新之道 簡介, 민족 위해 살다간 안동의 근대인물, 2003. [학봉에 대한 글도 있다는데, 그는 KRI에 등장하지 않는다. <簡介(간개)?>
신구현(?-?), 東山 柳寅植 선생의 애국 계몽사상, 민족 위해 살다간 안동의 근대인물,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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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조 1****
무오독립선언서(戊午獨立宣言書) [가나다순도 아니고, 나이순도 아니고??]
이름, 생년-몰년, 출신지역, 종교, 정치이념, 운동계열, 당시활동지역, 건국훈장 년도, 비고
김교헌(金敎獻, 1868-1923), 경기 수원, 대종교, 공화주의, 북로, 만주, 독립장 1977 -
김규식(金奎植, 1882-1931), 경기 양주, - , 공화주의, 북로군정서. 만주 독립장1963[2]
김동삼(金東三, 1878-1937), 경북 안동, 대종교, 공화주의, 서로, 임정, 만주 대통령장1962
김약연(金躍淵, 1868-1942), 함북 회령, 기독교, - , 북간도국민회, 만주, 독립장1977
김좌진(金佐鎭, 1889-1930), 충남 홍성, 대종교, 공화주의, 북로, 만주 대한민국장 1962
김학만(金學萬, 1884-1931), 함남 단천, - , - , 연해주, 노령, 애국장 2012
정재관(鄭在寬, 1880-1930), 황해 황주, 기독교, 공화주의, 미주, 노령 미주, 애국장 1990
조용은(趙鏞殷, 1887-1958), 경기 파주, - , 공화주의, 임정, 만주, 대한민국장 1988
여준(呂準, 1862-1932), 경기 용인, 대종교, 공화주의, 서로, 만주, 독립장 1968
류동열(柳東說, 1879-1950), 평북 박천, - , 공화주의, 임정, 만주, 대통령장 1989
이광(李光, 1879-1966), 충북 청주, - , 공화주의, 만주, 상해-중국 본토, 독립장 1963
이대위(李大爲, 1878-1928), 평남 평양, 기독교, 공화주의, 미주, 중국 본토, 독립장 1995
이동녕(李東寧, 1869-1940), 충남 천원, 대종교, 공화주의, 서로, 임정 노령, 대통령장 1962
이동휘(李東輝, 1872-1935), 함남 단천, 기독교, 공화주의, 임정, 노령, 대통령장 1995
이범윤(李範允, 1856-1940), 경기 고양, - , 복벽주의, 북로, 만주, 대통령장 1962
이봉우(李鳳雨, 1873-1921), 경남 동래, - , 공화주의, 간도, 만주, 독립장 1980
이상룡(李相龍, 1858-1932), 경북 안동, 대종교, 공화주의, 서로, 임정 만주, 독립장 1962
이세영(李世永, 1869-1938), 충남 청양, - , 복벽주의, 만주, 만주, 독립장 1963
이승만(李承晩, 1875-1965), 황해 평산, 기독교, 공화주의, 미국 임정, 미주, 대한민국장 1949
이시영(李始榮, 1869-1953), 한성, - , 공화주의, 서로 임정, 만주 대한민국장 1949
이종탁(李鍾倬)[3] - - , 경상도 , - , - , 서로, 만주 -, -, 가명 추정
이탁(李沰, 1872-? ?, 평북 정주, - , 공화주의, 서로, 만주 -, -본명
문창범(文昌範, 1872-1938), 함북 경원, - , 공산주의, 만주, 임정, 노령, 대통령장 1990
박성태(朴性泰, 1873-? ?), 한성, 대종교, 공화주의, 북로 만주
박용만(朴容萬, 1881-1928), 강원 철원, 기독교, 공화주의, 미주, 미주, 대통령장 1995
박은식(朴殷植, 1859-1925), 황해 황주, - , 공화주의, 임정, 중국 본토, 대통령장 1962
박찬익(朴贊翊, 1884-1949), 경기 파주, 대종교, 공화주의, 임정, 만주, 독립장 1963 -
손일민(孫逸民, 1884-1940), 경남 밀양, - , 공화주의, 임정, 만주, 애국장 1990
신정(申檉, 1879-1922), 경북 고령, 대종교, 공화주의, 임정, 중국 본토, 대통령장 1962
신채호(申采浩, 1880-1936), 충남 대덕, - , 공화주의, 연해주 계몽, 중국본토, 대통령장 1962
안정근(安定根, 1885-1949) 황해 신천, 카톨릭, 공화주의, 중로 임정, 만주, 독립장 1987
안창호(安昌浩, 1878-1938), 평남 강서, 기독교, 공화주의, 연해주 미주, 미주, 대한민국장1962
임방(任邦)[3] - - - - - - 만주 - 가명 추정
윤세복(尹世復, 1881-1960), 경남 밀양, 대종교, 공화주의, 대종교, 만주, 독립장 1962
조욱(曺煜, 1875-1948), 한성, 대종교, 공화주의, 임정, 만주, 대통령장 1962
최병학(崔炳學, ? - ?) - - - - -간도 만주- - 재만 한인 대지주
한흥(韓興, 1888-1959), 함남 신흥, - , 공화주의, 신간회, 국내, 독립장 1968
허혁(許爀, 1851-1939), 경북 선산 , - , - , 부민단, 만주, 애국장 1991, 허겸(許蒹)
황상규(黃尙奎, 1890-1941), 경남 밀양, - , 공화주의, 북로 임정, 만주, 독립장 1963
(서른 아홉인)
참여자로 추정되는 사람
이름, 생년-몰년, 출신지역, 종교, 정치이념, 운동계열, 당시 활동지역, 건국서훈년도, 비고
나우(羅愚, [5]1884-?) 평남 용강 - - - - -- 본명 나순응(羅順膺)
정안립(鄭安立)[5] 1873-1948) 충북 진천 - - 간도 만주 - - 정영택
정신(鄭信)[5] 1898-1931) 함남 홍원, 대종교 - 북로, 임정 만주 독립장 1963 -
서상용(徐相庸)[5] 1873-1961) 함북 길주 - - 노령 노령 독립장 1977 -
서일(徐一)[5] 1881-1921) 함북 경원, 대종교 - , 노령 노령 독립장1962 서기학(徐夔學)
신팔균(申八均)[5] 1882-1924) 충북 진천, - -, 서로 만주 독립장1963 일명 신동천(申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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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실에서 천사흘밤 원문보기 글쓴이: 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