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 황진이 (200자 X 18매)
천태봉
부둣가에 나서면 종종 눈길이 가는 곳이 있다. 항만 저편 산기슭, 나무들 뒤에 수줍은 듯 숨어있는 한 쌍의 둔덕이다. 봉긋봉긋 솟은 두 봉오리 은근히 사람의 마음을 잡아맨다.
‘여자의 가슴은 남자의 영원한 고향’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평생을 저 멀리 바다에 나가서 살아가는 우리 선원들에게는 아릿한 정한을 불러일으키는 말이다. 배는 망망한 바다 위를 뉘엿뉘엿 가고 있고, 침실에는 대양의 적요가 고즈녘한 밤이 있다. 그럴 때면 가슴에 허전함이 물결처럼 일렁이며 좀체 잠이 들지 않는다. 지구 저편으로 떨어져 있는 여인의 따스한 가슴이 그리워진다. 명징하게 맑아지는 의식의 한 가운데를 찔러오는 비수 같은 그리움이다. 회사에서는 빨리 오라고 성화인데 바다는 성이 나서 선체를 붙들고 가랑잎인 냥 흔들어 댄다. 그렇게 샌드위치가 되어서 숨이 막힐 때 우리는 그 가슴에 머리를 묻고 고요히 한 숨 쉬기를 갈망한다. 나는 요즈음 그러한 여인의 한 가슴을 얻었다. 그 가슴 앞에서 심신이 이완되고 영혼은 맑게 개어서 원초적 안식을 누린다.
오대양을 가로질러 다니다가 여기 북녘 땅 금강산 아래 장전항에 삶의 닻을 내린지 수삼 개월이다. 바다를 잃어버린 마드로스의 상심을 명산감상으로 달래고 있다. 아슴한 눈으로 산 더듬기를 얼마 만에 어느 날 나는 무엇인가를 보았다. 항구 저 편, 멀리 만물상에서 뻗어온 천불산의 자락이 바닷가로 흘러내리고 있는 곳이다. 그 산기슭에 한 여인이 다소곳이 누워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해안의 모래톱 위쪽에 나무들로 가려져 있지만 봉긋봉긋 두 봉오리 아담하게 솟아있지 않은가. ‘로마의 휴일’, 청순한 공주 오드리햅번의 하얀 부라우스 속에 솟아오른 그 모습 같기도 하다. 검은 달 떠는 정자에 앉아 떠난 견우님 그리는 황진이의 저고리 속에 숨은 듯 솟은 애달픈 가슴인 것도 같다. 주위를 살펴보니, 그 아래 길게 늘어진 금빛 사장은 그녀의 허리띠요, 그 앞으로 펼쳐진 바다는 파란 치맛자락이 되어서 미풍에 팔랑인다. 다소곳한 자태가 한국의 미인임을 알겠다. 나는 ‘그녀’를 내가 그리워하는 황진이로 삼기로 했다. 그리고 화담 서경덕선생의 산수화 같은 사랑을 배워 보기로 했다. 항만을 가로질러서 살랑이는 물결 위로 연심의 다리를 놓고 금강산버젼의 플라토닉러브를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황진이에게 유혹되어 파계한 지족선사를 괜찮은 로맨티스트로 치기도 했다. 십년공부 도로에 연연하지 않고 그녀의 꾐을 알면서도 넘어가 주었다는 것이다. 젊어서 한 시절에 할 만한 낭만적인 사랑일 것 같다. 그러나 사람은 연륜에 따라 세상으로 향해 번득이던 눈길이 차츰 내리깔리며, 마침내 자신의 내면을 향하며 정적인 존재로 변해간다. 이러한 인간 구조의 변화에 따라 사랑의 양상도 달리해 가지 않을까. 이제 세상을 내면의 창으로 담담히 바라봐야하는 이 중늙은이는 화담선생의 관조적 사랑이나 흉내 내야 하지 않을지 모르겠다.
희대의 바람둥이 돈환이 이 여인 저 여자 전전한 것은 누구에게서도 여심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을 들은 적이 있다. 많은 여인들과 사랑을 나누었지만 그는 여전히 허전했단다. 그는 여성에게서 젖과 꿀이 흐르는 달콤한 그 무엇이 있음은 느꼈던 모양이다. 그는 여성을 접하기만 하면 그 여심을 얻을 줄 알았다. 그러나 막상 여인의 가슴을 헤집어 봐도 영혼의 빈 뜰을 채워 줄 무엇을 맛볼 수 없었다. 그래서 또 다른 사람을 찾아 헤매기를 반복하게 된 것이란다.
그러한 돈환은 우리 범부들의 대표 주자다. 그의 끝없는 방황은 우리들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다. 우리들도 그렇게 여인의 육신에 이끌린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을 심층적으로 살피는 심리학자들은 좀 다르게 얘기한다. 우리 내면이 진정 원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고 한다. 육신을 쫓지만 육신이 아니라 그 속에 있는 여인의 따스하고 촉촉한 서정이란다. 그 여심이라는 것은 종鐘의 구조에 비유될 수 있단다. 종은 쇳덩어리로 소리를 내지만 쇳소리가 아니다. 사람의 영혼을 감동시켜 듣는 이로 하여금 스스로의 모습을 가다듬게 하는 영성적인 무엇인 것이다. 여심이라는 것도 여자의 몸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지만, 육신의 울림이 아니다. 우리 돈환들은 종 자체가 아니라 그 깊은 종소리에 영혼을 일깨움 받고 싶은데, 진정한 자신의 그 내면 욕구를 모르고 쇳덩어리만 쫓아다니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화담선생은 이미 그 본질을 취하셨을까. 깊은 밤, 산중 거처의 선생에게 황진이 찾아와 구애를 하니, “나는 이미 자네를 취했네.”하고 선생은 말했단다. 그러자 역시 황진이, 이내 알아듣고 망설임 없이 나붓히 절 했으리라. 그리고 즉흥 송도삼절을 읊었을 것이다.
선생은 그녀의 무엇을 취했을까. 손목 한 번 잡지 않고 그녀에게서 선생이 취한 것이 바로 우리 돈환들이 찾아 헤매는 바로 그것이었을까. 여자의 가슴 깊은 곳에서 발원하는 여심의 종소리 말이다. 어쩌면 그것은 여성을 통해서 나오는 우주의 심연에서 우러나는 근원적인 어떤 기운인지 모른다. 그것은 대지처럼 아늑하여 남자들의 고달픈 삶을 안식케 하고, 이슬처럼 촉촉하여 사내의 거친 마음을 부드럽게 윤활하는 천상의 서정이다.
꽃잎을 열어서 꿀을 얻으려는 벌나비처럼 우리들은 자나 깨나 그 문 앞에서 서성거린다. 남자들에게 그 대지의 이슬은 생명수 같은 것이다. 그것에 영혼을 적시지 않으면 정서가 마르고 틀어져서 도깨비가 되어 간다. 그래서 꽃다발로 배알하고 그 왕국의 백성이 되려고 안달한다. 여왕의 머슴이 되고 종이 되기를 기꺼워한다. 그러나 화담선생은 축지술이라도 부렸는가. 그런 공도 들이지 않고 그 피안을 차지하고 꽃밭을 향유하는 것이다. 가만 앉아서 여궁의 주인이 되는 선생의 핫라인은 과연 무엇일까. 선생은 그녀를 어떻게 취했을까. 황진이 내외면의 아름다움을 한 번 보고는 그 서정을 이미 접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그것을 넘어선 큰 정신의 선생님, 그녀를 만나나 안 만나나 그 여정女情의 감미로움을 이미 누리고 있는 것이었을까.
어느 존경하는 선생님께 이곳 명산 구경을 오십사 한 적이 있다. 그분 말씀하시기를, 금강산의 아름다움 알고 그 산 거기 있는 줄 아니, 자기 마음속에도 있다며 굳이 오지 않아도 명산과 더불어 기쁘고 즐겁다고 하셨다. 어쩌면 화담선생의 황진이 사랑도 이와 유사한 것이었을까. 네 마음 내 마음 구분 없이 소통하는 선생의 가슴에 황진이 가슴의 그 생명수 나라와 하나가 되어 종소리를 향유하듯 은은히 기뻐하고 있는 것일까.
한 풍류 한다는 사내들 그녀 꽁무니를 꽤나 따라다녔을 테지만 그녀는 고독했을 것이다. 무리 속에서 고독했고, 비천 속에서 고상했던 그녀의 모습이 시대를 넘어서 오늘날까지도 뭇 남자들에게 환상을 심어주고 있다. 세월을 뛰어넘은 영원의 여인에게 살이 접해야만 마음 이어질까. 선생은 마음만으로도 살처럼 접할 수 있는 길을 보여 준 것은 아닐까. 나는 언제 철들어 마음만으로 그런 다정을 나눌 수 있을까. 홀로 정제되고 더불어 융화하는 사람됨이라면 육신의 막을 투과하여 사람간의 본정本情이 직접하는 경계에 이를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 마음은 물 건너 산기슭의 황진이에게 속절없이 설레이기만 한다. 저 소담스런 봉우리, 천하절경 금강산을 무색케 하는 저 작은 한 쌍 언덕의 인력에 나는 그만 흡인되어 버리고 싶다. 육신을 망각하지 못하는 자의 피가 돈환의 충동질을 받는 것인가. 그러나 파계도 불사한 지족선사의 낭만적 여유 또한 내게는 없는 모양이다. 봉오리 너머로 화담선생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사랑이 도에 이르고 도가 평상심으로 흘러내리는 선생의 관조의 사랑이 남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안온할 것 같다. 혼란스러운 인간, 차안에 안주하지 못하고 피안으로 건너지도 못한다. 머뭇거리는 나에게 황진이 눈 흘기며 내뱉는다.
“드엉신!”
(‘샘과 가람’ 2003년 여름호)
첫댓글 그 소녀의 다른 성화도 들어 주실랑강?
또 성화부린거 없는데?
딱! 걸렸어 그 소녀를 아무도 모르는디,,,,
자알 ~~생각해 보이소
또 다른 성화가 보일 것입니더
저~~어기 불 들고 뛰오지예~~
사랑은..슬픈 몰논리..
잘 읽었습니다. 역시 한국 문단의 맥을 이으신 분의 글 답습니다.
벨라의 맥도 이을 듯 싶어예~
이글을 읽으면 여자 사람이 되어 남자 사람을 어쩌면 조금 이해할 수 있을것 같기도 하고...ㅋ
세월이 흐를수록 빛을 발하는 그 사랑의 내공을 아직도 이해못하는 나도 드엉신~
드엉신 구디기다 벨라는
파란 나무님~ 여자들의 돌림자를 알고 계시는지 요부 요조 요년 들 다양한 부류들이 있다는것 단디 보이소~
난 요년!
1. 우리 동네서 살을 뛰어넘으신 도사님 : 막새바람
2. 살에 갇혀 있는 샘 : 파란나무 +1 ( 참고로 파란나무는 푸르르지면 무릅베개 내줄 수 있음.)
3. 살 오매불망 분 : *** 기타
갇힌 살은 어디에 계실까요?
무릎베개를 해 보면 알라나?
'떠돌이 창녀시인(娼女詩人) 황진이(黃眞伊)의 슬픈 사타구니 같은 변산(邊山) 격포(格浦)로나 한번 와 보게.' 서정주 시인의 '격포우중'에 나오는 싯구입니다. 종래에는 길가에서 객사하여 짐승들에게 사타구니가 찢겨나간 비련의 여인이기도 하였지요. 그래서인지 그녀의 화려한 남성편력은 일개의 연애가 아니라 남존여비라는 유교이념에 매몰된 조선여성들의 슬픈 몸짓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직도 그 현실은 여전하고요. 짐승에게 보시된 황진이를 위하여 글 한 줄 보탰습니다.
남존여비가 여전 하다고 외치시는 결락님의 신변이 걱정 되면서,,,(요즘 왠지 여존남비의 분위기에)
황진이의 서글픈 사랑이 위로 받았으리라 생각 합니다
결락님 댓글을 읽어니 어제 막새바람이 들여준 이야기가 생각나네~ 남편이 쓰러졌는데 호랑이가 남편의 꼬치를 비무서 아내가 남편을 안고 살아도 파이다 살아도 파이다 하며 통곡했다는이야기~
남존여비의 뜻은 다들 알지요? 남자가 존재하는 이유는 여자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다.
저는 화면으로 글을 읽어보고 좋아서 인쇄해서 버스 타고 집으로 오면서 다시 서너번 더 읽었답니다. 글도 참 좋고 파란나무님의 서정의 숲에 잠자고 있는 감성을 보았답니다. 그 글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이랄까^^ 참 차분하다 마음도 차분하겠지. 이런저런 생각을 했답니다. 황진의 사랑은 과장된 면이 조금 있는 듯합니다. 절세미인은 마음도 사랑도 아름다웠으리라 믿는 마음, 실제 황진이의 이야기를 읽어 보면 어느 것이 사실인지 알 수 없으나, 남성처럼 걸걸하고 여성성과 남성성을 뛰어 넘은 인재였다고^^ 사랑도 주변 눈치보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에 솔직했다고^^ 저는 여전히 그 솔직함이 마음에 쏙 들어서 따라하고 싶어도
사랑에도 내공이 필요한 법! 아직 저는 고수가 되지 못하여 지극히 소시민적이고 몸사리는 사랑만 하고 있습니다.
파란나무님 입 찢어 지는 모습이 보이시나요?
그랴! 또 한 여인의 마음을 얻었구먼! 화담선생 별거 아니구먼!
절세미인 - 절에 세 들어 사는 미국 사람ㅋㅋㅋ
요즘, 벨라방에 오면 불납니다. 새로운 분이 좋은글로 입성하셨으니 ...저는 개인적으로 다른 것은 거두절미하고
황진이를 문학사적으로 위대한 시인이라 생각합니다. 어디를 가든 선비들과 어깨를 겨누고 대화하며 뛰어난 한시나 시조를 지었다니 그녀의 문학성은 대단했었다지요.허난설헌과 더불어 한국 여류 문학의 양대산맥으로 불릴 만큼 황진이의 작가적 평가에 대해서는 당시 양반사회 유학자들이 많은 경우 유교적 교리의 직설적인 해설에 치우치고 있는 데 반해, 인간 정서를 솔직하고 선명하게 표현했고 그러한 심리묘사의 섬세성과 참신하고 세련된 시형성의 창조자로써
17세기 이후에 대두한 서민문학의 선구자적 작품으로 높은 문학사적 평가를 내리고 있답니다.
역사적 여성 인물 중 가장 보편적인 현모양처형 인물로는 신사임당, 강직한 민족적 인물로는 유관순
지성적인 인물로는 허난설헌, 예술적 재능을 가진 인물로는 황진이가 개별 항목에서
가장 높은 순위에 제시될 가능성이 높답니다. 어차피 세상은 남자 여자로 얽혀 살아가고 배제할 수 없는 부분이 사랑이겠지요.황진이는 스스로 작파한 삶을 살았고 구멍난 마음을 문학으로 승화 시켜 갔으리라 봅니다.
파란나무님의 문체는 우유체...솔직한 표현이 맘에 듭니다. 댓글에 늘 게을렀던 저가 모처럼 장황한 소리 하고 갑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허난설현을 좋아합니다. 어찌나 시가 아름답고 구구절절한지 시적 감수성은 기어서라도 따라가고 싶은 심정입니다. 생가에서 시집을 샀는데 다음에 몇 편 올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