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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론의 이슈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세상의 악 문제에 관한 질문인 신정론은 수세기 동안 신학적 토론과 논쟁의 주제였습니다. 신정론에 대한 신학자들 혹 철학자들 견해는 이렇습니다.
1) 성 어거스틴
어거스틴은 악과 그 존재에 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악이 존재하지 않도록 하는 것보다 악에서 선을 이끌어내는 것이 더 낫다고 신은 판단했다."
기독교 신학에 영향을 미친 어거스틴의 신정론은 하나님이 더 큰 선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세상에 악과 고통을 허락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은 악이 자유 의지의 결과이며, 신이 최악의 상황에서도 선을 가져올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2) 라이프니츠
18세기에 철학자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Gottfried Leibniz)는 자비로운 신이라는 개념과 악의 존재를 조화시키는 방법으로 "가장 좋은 세계"라는 개념을 제안했습니다.
라이프니츠는 신이 반드시 악을 포함하는 최상의 가능한 세계를 창조했지만, 신은 여전히 정의롭고 자비롭다고 주장했습니다. 라이프니츠는 자신의 저서 "Theodicy"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이것은 가능한 모든 세계 중 최고입니다…”
3) 니체
19세기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우주가 본질적으로 무의미하며 인간의 존재는 고통과 투쟁으로 특징지어진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자비로운 신의 개념을 전면 거부했습니다. 니체는 그의 작품 <The Gay Science>에서 유명하게 선언했습니다.
"신은 죽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를 죽였습니다."
니체는 인간이 신성한 목적 없이 자신의 가치와 의미를 만들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3) 존 힉(John Hick)
현대 종교철학자 힉은 악의 문제에 대한 답으로 '영혼 만들기'라는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힉은 삶의 목적이 주로 행복하거나 고통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성품을 계발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즉, 그리하여 더욱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과정에는 도전과 고난에 직면하는 것이 포함될 수 있으며, 이는 궁극적으로 더 큰 영적 성장으로 이어질 것으로 보았습니다.
4) 랍비 하롤드 구쉬너(Harold Kushner)
구쉬너는 고통과 절망에 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통과 괴로움을 만났을 때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절망에 굴복하거나 경험에서 의미와 목적을 찾을 수 있다."
유대인 신학자 쿠슈너는 <선한 사람들에게 나쁜 일이 생길 때>라는 유명한 책을 썼는데, 이 책에서 악의 문제를 개인적인 관점에서 탐구했습니다.
구쉬너는 신이 세상의 모든 고통을 막을 수는 없지만 우리는 여전히 우리 자신의 투쟁과 도전에서 의미와 목적을 찾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5)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
희망의 신학자 몰트만은 악의 문제에 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연대는 악의 문제를 이해하는 열쇠이다."
몰트만은 고난 가운데서 인간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몰트만은 하나님이 우리의 고통 속에서 우리와 함께 고통을 당하신다고 믿었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세상의 최악의 악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한다고 믿었습니다.
6) 앨빈 플랜팅카
플랜팅카는 <지식과 믿음> 책에서, 마지막으로 유신론 믿음을 위협하는 가장 무시무시한 파기자가 바로, ‘악의 문제’라고 하였습니다.
악에 근거한 강력한 반신학적인 반증은 무엇일까요?
사람들은 고통, 악의 양, 다양성, 분포에 관한 지식이 신자에게 전혀 다른 종류의 문제를 안겨 준다고 주장하였는데요. 이는 고대 에피쿠로스까지 그 기원이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논의는 철학자 데이비트 흄(1711~1776)에게도 되풀이 되었습니다.
“에피쿠로스의 옛 질문은 아직도 대답을 듣지 못했다.
그는 악을 막고 싶지만 막을 수 없는가? 그렇다면 그는 무능하다.
막을 수 있지만 막고 싶지 않은 것인가? 그렇다면 그는 악의적이다. 막을 수 있고 또한 막고 싶은가? 그렇다면 악은 어디에서 오는가?”
- Dialogues Concerning Natural Religion, ed. Richard Pokin (Indainapolis: Hackett, 1980)
앨빈 플랜팅카는 악에 근거한 논증을 제시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와 악의 존재가 양립할수 없다고 하는 주장에서, 더 나아가서, 증거론적(evidential) 혹 개연론적(probabilianstic) 논증으로 돌아섰다고 하였습니다.
악과 자유의지 변론
악의 문제를 어떻게 이해해 왔나요?
a) 이신론 마니교?
마니는 선대 종교, 특히 조로아스터·붓다·예수의 계시의 진리를 부분적으로 통합시켜 보편적인 세계 종교를 창설하려 했습니다. 단순한 혼합주의를 넘어서 다양한 문화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해석될 수 있는 진리를 추구했습니다.
이렇듯 마니교는 상황 의존적이었고, 이 점에서 이란 및 인도 종교, 그리스도교, 불교, 도교와도 비슷했습니다. 마니교의 핵심은 진리에 대한 영적인 지식(靈知 gnosis)을 통해 구원에 이른다는 이원론 종교인 영지주의(靈知主義 Gnosticism)에 속하였는데요.
마니교는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마니교는 이원론적 사상으로, 선한 힘과 악한 힘이 있는데, 서로 대치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선한 신과 악한 신이 서로를 제압하려고 하고, 이런 과정 중 세상에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고 보았습니다.
결국에 선한 신이 돌아와 악한 신을 물리치지만, 선한 신이 현실의 문제를 다 통제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마니교의 교리에 의하면, 살인자 속에 어둠의 악한 세력이 그 사람을 범죄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b) 이신론
이신론은 신은 존재하지만 신이 창조한 세계에 간섭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신론적 발상은 악의 문제와 전혀 모순되지 않았습니다.
c) 일신론
악의 문제는 전지전능하고 지선한 유일신을 숭배하는 일신론에서는 매우 심각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사실 악의 문제는 신이 전지하지 않거나, 전능하지 않거나, 지선하지 않거나 중 하나만 부정돼도 모순이 매우 간단하게 해결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일신론 계열 종교에서 신이 전지하지 않거나, 전능하지 않거나, 선하지 않은 존재라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이단의 발상에 가까웠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결론을 피하고 있었습니다.
d) 기독교 안에서 악의 문제
악과 고통이 왜 존재하는지 사람들은 묻습니다.
이런 부정적인 것이 있으니,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신을 부인하는 논리, 근거로 말합니다.
신은 전지전능하지 않다고 합니다. 고로, 신은 없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선과 악이 함께 할 수 없는데, 이는 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이 못하시는 게 없나요?
첫째, 동그란 세모는 없고요.
둘째, 하나님은 거짓말을 할 수 없고요.
셋째, 게다가, 하나님은 도덕적 자유인에게 자유를 안 줄 수 없었다는 겁니다.
즉, 꼭두각시로 창조하실 수 없고요. 전능한 하나님은 악한 세상을 창조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자유를 가진 인간? 로봇 같은 인간?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만드시길 원하셨을까요? 앨빈 플랜팅카는 악 때문에 안 믿는 사람들이 있지만, 악은 하나님이 완전한 자유인으로 만드려고 허락하신 것으로 보았습니다.
플랜팅가 <자유 의지 변론> (free will defense)에서 악의 존재와 전지, 전능, 전선한 신의 존재는 양립불가능하다는 입장을 비판하였습니다.
플랜팅가의 논증에 따르면 "신이 전능함에도 불구하고 그에겐 악을 선택하지 않는 자유로운 피조물이 있는 세계를 창조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뿐만 아니라, 신이 전적으로 선하다고 해도ㅡ만약 도덕적 선이 자유로운 도덕적 피조물들이 필요하다면ㅡ신은 악이 존재하는 세계를 창조하기를 원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플랭티카는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신의 전지, 전능, 전선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양립불가능한가?”
“유의미하게 자유로운 (악한 행위들보다 더 선한 행위를 자유롭게 행할 수 있는) 피조물을 포함하는 세계는 다른 모든 조건이 동일할 경우 전혀 자유롭지 않은 피조물을 포함하는 세계보다 더욱 가치가 있다. 이제 신은 자유로운 피조물을 창조할 수 있지만, 신은 피조물이 옳은 것만 행하도록 야기하거나 결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신이 그렇게 한다면 그들은 결국 유의미하게 자유롭지 못하며 옳은 것을 자유롭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은 도덕적 선을 행할 수 있는 피조물을 창조하기 위해 도덕적 악을 행할 수 있는 피조물을 창조했음에 틀림이 없다.”
_신, 자유, 악 God, Freedom and Evil / 앨빈 플랜팅가 57쪽,
선악과를 만드신 이유?
악을 존재하게 이유는 무엇일까요?
다 하나님의 뜻이 있기에 만드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악은 인간이 져야 할 책임을 제대로 하지 않아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자연반신학의 가장 대표적인 악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플랭틴카는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악이 실재한다면 신의 존재를 믿는 것은 비합리적인가?”
결론적으로 플랭티카는 악에 관한 훌륭한 반신학적 논증이 없다고 믿었습니다. 신의 존재는 악의 존재로 인해 배제되지도 않으며 비개연적이지도 않다고 했습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과 재난은 유신론자에게 하나의 문젯거리를 만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문제가 그의 믿음이 논리적으로 또는 개연적으로 양립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_ 신, 자유, 악 God, Freedom and Evil / 앨빈 플랜팅가 113쪽
7)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 신정론
과거도 그렇고,
오늘날 인간의 이성은 하나님의 신정론을 인정하지 못하게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포스트 모더니즘의 문제는 없을까요?
지젝이 보는 포스트 모더니즘 문제점은 무엇일까요?
현대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1949~)
포스트모더니즘
지젝은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을 주창하는 사상가들과 대립하였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주체를 해체함으로써 저항의 거점 또한 해체했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포스트 모더니즘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데카르트의 ‘코기토’로 대변되는 주체가 인간을 해방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억압과 구속에 빠뜨렸다고 말했는데요. 지젝이 보기에 근대적 주체의 극복은 그들과 같은 방식으로 이뤄져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지젝은 그들 나름의 성과를 보존하며 저항과 혁명의 주체를 새롭게 되살리려 시도했습니다.
지젝은 라캉의 실재계의 눈으로 주체와 세계를 조명하면서, 개인을 ‘상징계의 꼭두각시’로 간주하는 포스트 모던주의의 견해에 반대했습니다. 포스트 모던적 사유 속에서 주체는 ‘무의식적 담론이나 이데올로기적 담론의 효과’로 간주될 뿐, 더 이상 스스로 결단하고 행동할 여지를 갖지 못한다고 보았습니다.
이 포스트 모던적 상황을 지젝은 ‘재귀성’으로 규정했는데요. 재귀성은 ‘아무도 우리의 삶을 책임져주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우리를 둘러싼 모든 문제는 결국 우리로부터 비롯되고 다시 우리에게로 ‘회귀’한다는 것을 가리킨다고 보았습니다.
상황에 대하여 책임 있게 문제제기하고 답을 제시해 주어야 하지만, 그 모든 책임을 떠안고 있는 나는 제시할 답을 갖고 있지 못한 상황, 그래서 삶 중심의 부재를 겪는 역설적 상황이 바로 포스트 모던적 사회라고 했습니다.
게다가 포스트 모더니즘은 상대주의를 외치면서 절대주의를 추구하지 못 하게 하지만, 결국에는 자체적 상대주의화한다는 절대주의로 상대주의적 견해를 갖지 못 하게 하고 있습니다.
실재계의 눈으로 현실 상황을 조명한다는 것은 바로 지금 여기의 주체가 상징계의 대타자(the big other)가 요구하는 틀 구조 속에서 꼭두각시처럼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 틀 구조 자체를 새롭게 창출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지젝은 인간은 그냥 사는 존재가 아니라 이데올로기에 갇혀 사는 존재로 보았습니다.
앨빈 플랭틴카도 역시 그렇게 보았습니다.
철학 vs 기독교 = 신앙 vs 신앙의 대립이었습니다.
진화론 vs 기독교 = 신앙 vs 신앙의 대립이었습니다.
맑시즘 vs 기독교 = 신앙 vs 신앙의 대립이었습니다.
플랜팅카는 “자명한 것만 수용해야 한다는 말은 이미 자명하지 않다”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주장 자체가 자명하지 않고, 이 말대로 자명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말은 포스트 모던에서 “모든 것은 상대주의적이어야 한다”라는 말이 더 이상 상대주의적이지 않은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플랜팅카는 성령의 사역을 강조하였습니다. 인식 기능 정상 회복이 성령을 통해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플랜팅카는 틀렸다는 증거가 나오기 전까지는 옳다고 했는데요. 이렇게 말한 것은 고발자가 신이 없음을 증명해야 하는데,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슬라보예 지젝이 말하는 이데올로기 속에 갇힌 주체?
지젝은 주체에 관해 말했는데요.
지젝이 말한 주체는 ‘코기토’로 대변되는 자기완결적인 근대의 주체가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완전히 해체되어 버려서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체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지젝이 말한 주체는 무엇이었나요?
바로, 역동적이며 저항적인 주체였습니다. 이 작업에 동원된 것은 역시 헤겔, 마르크스, 라캉의 철학이었습니다.
지젝은 근대 철학이 상정했던 자기 완결적이고 충만한 주체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주체란 균열, 틈새, 단절을 내장한, 내적 불화를 겪는 주체일 수밖에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런 주체는 말 그대로 “까다로운 주체”였습니다.
하지만 이 주체는 자신의 불완전성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행위를 책임지는 기능을 수행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입론에 기대어 지젝은 세계 질서에 변화를 가져올 행동의 주체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지젝의 실재계적 해방은 상징계의 대타자로부터의 해방이었습니다. “어떤 대타자의 보증도 포기하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자율적인 윤리의 조건”이라는 라캉의 말을 인용하였는데요.
지젝은 오직 자기 자신에게서만 권위를 부여받는 혁명 즉 “대타자에 의해 보호받지 않는 혁명적 행위”를 주장하며, 이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림으로써,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모든 위험을 무릅쓰는 주체”를 주장하였습니다.
상징계에서 실재계로 나아가야 한다고 했는데요. 인간은 실재계로 갈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쇠렌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이 자살하는 이유를 한계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플랜팅카는 성령 하나님을 언급하고, 그 도움을 말했습니다. 실재계에 하나님을 상징계에 인간을 돕게 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노자의 사상도 현상계를 벗어난 초월을 말하였지만, 기독교적 사상과는 달랐습니다.
지젝은 우리가 상처 입은 주체라고 하였습니다.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갇혀, 경제적 자유, 부한 삶을 추구하지만 이룰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는 존재라고 보았습니다.
지젝은 인간을 가두는 상징계와 상징계를 통제하는 대타자에게서 벗어나는 주체를 말했는데요. 이런 지젝의 주체는 자신의 행위들을 아무에게도 미루지 않고 기꺼이 망설임 없이 받아들이는 자유롭게 행위하는 윤리적 존재였습니다.
기존 상황의 의견이 강요하는 이익 관계들과 인과관계들의 망을 무시하고, 자유롭게 행위하고 선택하는 윤리적 주체를 말했습니다.
그렇게 대타자에 의존하지 않고 관계의 사슬을 깨부수고 나오는 자유로운 주체였습니다. 이런 주체는 자신의 운명을 바꾸는 존재가 되어, 절대적 고독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위해 스스로를 던지며 사라지는 존재였습니다.
이런 주체의 행위는 자신의 존재를 규정하는 선험적인 좌표계 자체를 바꾸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무엇보다도 대타자의 토대를 무너뜨려, 대타자가 지탱하는 사회적 관계구조 자체를 끊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아 상징계를 넘어 실재계로 바짝 다가가는 주체를 갈망했습니다.
앨빈 플랜팅카는 이런 주체가 온전해지는 것이 성령 하나님을 통해 가능하다고 하였습니다.
#욥기 1장 6-22절, #김영한, #아침개인묵상, #성경하브루타 코칭
6.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탄도 그들 가운데에 온지라
7.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땅을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나이다
8.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1) 천상회의가 벌어졌는데요. 누가 참여 하였나요? (6절)
- 하나님의 아들들이 하나님 앞에 섰고, 사탄도 그들 가운데에 왔습니다(6절).
2) 사탄은 어디에 다녀왔다고 하였나요? (7절)
-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어디서 왔는지 묻자, 땅을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다고 했습니다.
3) 하나님은 사탄에게 욥에 관해 어떻게 말씀하셨나요? (8절)
-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자라고 하셨습니다.
4) 하나님께서 나 자신을 누군가에게 소개한다면, 어떻게 말씀하실까요?
9.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10.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 때문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의 소유물이 땅에 넘치게 하셨음이니이다
1) 사탄은 하나님께 어떻게 대답하였나요? (9절)
- 까닭 없이, 이유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2) 사탄은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유를 무엇이라고 하였나요? (10절)
- 집, 모든 소유물로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였습니다.
- 하나님께서 욥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여, 소유물이 땅에 넘치기에 그렇다고 하였습니다.
3) 나 자신은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나요?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4) 여기 본문에 사탄은 하나님을 대항하는 자 보다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은가요?
- 하나님 앞에 고발하는 자의 역할을 감당하는 듯 보입니다.
11.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12.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탄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
13. 하루는 욥의 자녀들이 그 맏아들의 집에서 음식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실 때에
14. 사환이 욥에게 와서 아뢰되 소는 밭을 갈고 나귀는 그 곁에서 풀을 먹는데
15. 스바 사람이 갑자기 이르러 그것들을 빼앗고 칼로 종들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아뢰러 왔나이다
1) 사탄이 욥의 소유물을 치라고 하자, 하나님은 어떻게 반응하셨나요? (11-12절)
- 하나님은 사탄에게 욥의 소유물을 다 사탄 손에 맡긴다고 하셨습니다.
- 그러나 욥의 몸에는 손을 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2) 이런 상황을 모르는 욥은 어떤 하루를 보내고 있었나요? (13-14절)
- 욥의 자녀들이 맏아들의 집에서 음식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3) 욥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나요? (14-15절)
- 사환이 욥에게 와서 이상한 상황을 보고하였습니다.
- 소는 밭을 갈고, 나귀는 곁에서 풀을 먹는데, 스바 사람들이 갑자기 이르러 그 짐승들을 빼앗고, 칼로 종들을 죽였다고 하였습니다.
16. 그가 아직 말하는 동안에 또 한 사람이 와서 아뢰되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떨어져서 양과 종들을 살라 버렸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아뢰러 왔나이다
17. 그가 아직 말하는 동안에 또 한 사람이 와서 아뢰되 갈대아 사람이 세 무리를 지어 갑자기 낙타에게 달려들어 그것을 빼앗으며 칼로 종들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아뢰러 왔나이다
18. 그가 아직 말하는 동안에 또 한 사람이 와서 아뢰되 주인의 자녀들이 그들의 맏아들의 집에서 음식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시는데
19. 거친 들에서 큰 바람이 와서 집 네 모퉁이를 치매 그 청년들 위에 무너지므로 그들이 죽었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아뢰러 왔나이다 한지라
20.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1) 어떤 재앙들이 연달아 일어났나요? (16-19절)
- 불이 하늘에서 떨어져서 양과 종들을 살라 버렸습니다(16절)
- 갈대아 사람들이 세 무리를 지어 갑자기 낙타에게 달려 들어 빼앗고, 칼로 종들을 죽였습니다(17절).
- 맏아들의 집에서 먹고 마시던 욥의 자녀들에게 큰 바람이 와서 집 네 모퉁이를 쳤습니다. 그 자녀들이 죽었습니다(18-19절).
2) 여러 재앙이 순식 간에 벌어질 때, 욥은 어떻게 했나요? (20절)
-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였습니다.
3) 나 자신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할 것 같은가요?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4) 욥의 특징은 1장 1-5절에 4가지로 나오는데, 욥의 고난도 4가지로 나옵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일까요?
- 욥기 1장 2-3절에 욥의 소유에 관해 묘사되어 있는데요. 반면, 욥기 1장 14-19절에서는 욥에게 전달되는 ‘재난의 소식’은 네 번에 걸쳐 이루어집니다.
a) 1:2-3에 마지막에서 언급된 소와 나귀와 종들에게 가장 먼저 닥칩니다.
b) 그 다음에 양과 낙타,
c) 종들에게,
d) 마지막으로 욥의 자녀들에게 일어납니다.
- 즉, 욥에게 찾아온 재난의 수는 네 개인데, 앞서 언급한 축복과 대비됩니다.
- 뿐만 아니라, 네 재난의 장소가 교차로 대구를 이룹니다.
a) 스바 사람 [땅],
b) 하늘에서 내려온 불 [하늘],
c) 갈대아 사람 [땅],
d) 큰 바람 [하늘].
즉, 땅과 하늘을 번갈아 교차합니다.
- 네 번의 보고 끝에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가 계속 등장하며, “그가 아직 말하고 있는 동안에 또 한 사람이 와서”라는 표현 역시 세 번이나 반복됩니다.
- 이러한 반복적인 표현들은 이 네 가지 재난이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 줍니다.
21.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22.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1) 욥은 어떤 신앙을 고백했나요? (21절)
-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은즉, 알몸이 그리로 돌아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 주신 이도 여호와이시고, 거두신 이도 여호와라고 하였습니다.
- 그러나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2) 재앙 중에 욥은 어떤 신앙 생활을 하였나요? (22절)
- 모든 일에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3) 나 자신이 최근 하나님께 실망하고, 원망한 일은 무엇이었나요?
4) 오늘 말씀 중 받은 도전 혹 은혜는 무엇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