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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상영관의 싸구려 영화 기려
일단 ‘그라인드 하우스’에 대해 짚고 넘어가자. 그라인드 하우스는 잔인한 액션이나 공포영화, 선정적인 영화 등 흔히 싸구려 장르라고 말하는 영화들을 상영하던 극장을 말한다. ‘그라인드 하우스’에서는 종일, 밤새 싸구려 영화를 틀어주기도 했다. 타란티노가 ‘저수지의 개들’과 ‘펄프 픽션’에서 인용한 홍콩 영화들이나 70년대의 액션영화, ‘재키 브라운’의 원형인 ‘블랙스플로이테이션 영화’(1970년대 흑인 관객을 대상으로 제작된, 흑인 배우들이 주연한 상업영화), ‘킬 빌’에서 뒤죽박죽으로 재현된 잡다한 장르 영화들의 상당수가 바로 ‘그라인드 하우스’의 영화였다. 한국의 영화광이 동네 재개봉관에서 영화의 꿈을 발견했던 것처럼 타란티노의 수원지는 ‘그라인드 하우스’였다.
하지만 ‘그라인드 하우스’의 영화들이 결코 영화사적으로 인정을 받는 영화는 아니었다. 타란티노가 좋아하는 영화는, 예술적으로 걸작이라고 평가되는 영화보다는 선정적이고 폭력적이라고 비난 받았던 영화가 많다. 그럼에도 그런 영화의 장면들을 총집합시켜 놓은 듯한 ‘킬 빌’은 영화적으로 탁월하다며 찬사를 받았다. 두 번째 영화인 ‘펄프 픽션’으로 칸 영화제 그랑프리를 수상한 타란티노가 영화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감독인 것은, 인정을 받지 못했던 ‘싸구려 장르영화’의 매력과 가치를 재발견했을 뿐만 아니라 현대적으로 재창조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데쓰 프루프’ 이전까지 타란티노는 싸구려 장르영화를 현대적으로 부활시키는 데 주력했다. 누가 보아도 세련되고 화려할 뿐 아니라 심오한 의미를 담아내는 데까지 성공했던 것이다. 하지만 ‘데쓰 프루프’는 의도적으로 ‘싸구려’의 길을 걷는다.
타란티노를 키운 B급 영화의 매력
‘데쓰 프루프’가 만들어진 것은 ‘엘 마리아치’와 ‘씬 시티’의 감독 로버트 로드리게즈 때문이다. 로드리게즈가 연출하고 타란티노가 쓰고 출연한 ‘황혼에서 새벽까지’부터 타란티노가 일부 장면을 연출한 ‘씬 시티’에 이르기까지, 타란티노와 로드리게즈는 영화적 취향이나 작업에서 절친한 친구이자 동지였다. 타란티노의 집에서 ‘그라인드 하우스’의 포스터를 본 로드리게즈는 ‘동시 상영 영화’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각자 한 편의 영화를 만들어 동시에 개봉하자는 프로젝트였다. 타란티노와 로드리게즈는 바로 실행에 옮겼고 ‘그라인드 하우스’의 느낌을 재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영화의 색을 날리고, 편집을 어설프게 하고, 캐릭터와 이야기까지 의도적인 과장과 유치함을 남겨두었다. 그리고 롭 좀비와 엘리 로스 등의 신진 공포영화 감독에게 존재하지 않는 영화의 예고편까지 만들게 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영화가 퀜틴 타란티노의 ‘데쓰 프루프’와 로버트 로드리게즈의 좀비영화 ‘플래닛 테러’이다. ‘그라인드 하우스’ 문화가 있었던 미국에서는 ‘그라인드 하우스’란 제목으로 두 편의 영화를 동시 개봉했지만, 미국 이외의 지역에서는 각각 개봉된다. 두 편의 영화가 하나의 컨셉트로 만들어졌지만, 완전히 독자적인 영화이기 때문에 따로 보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오히려 두 편의 영화를 한꺼번에 보는 것이 더 부담이 클 수도 있다. 어쨌거나 ‘그라인드 하우스’의 영화들은 한국에서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영화였기 때문이다. 영화의 수입이 제한되었던 70, 80년대에는 주로 할리우드의 A급 영화들만이 들어왔기 때문에 ‘그라인드 하우스’의 영화를 보기는 힘들었다. 80년대 후반 비디오가 보급되면서 비로소 싸구려 B급 영화들을 무수히 볼 수 있었다. 조악한 스토리와 한심한 연기, 선정적이고 폭력적이긴 하지만 뭔가 어설픈 영화들. 하지만 이런 B급 영화들 중에는 가끔씩 보물이 숨어 있었다. 싸구려로 만들었지만 뭔가 눈이 번쩍 뜨이는 장면이나 기묘한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무엇이 있었던 것이다. 타란티노는 그런 느낌을 일찌감치 발견했고, 지금 자신의 영화에 담아 관객에게 보여주고 있다.
천대받던 하위문화, 주류로 등극
‘데쓰 프루프’가 중요한 이유는 현재의 대중문화에서 점차 고급과 저급, 상업과 예술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그저 오락용이라며, 킬링타임용이라며 무시하던 것들이 새롭게 조명을 받으며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매체로 본다면 만화가 그렇고, 구체적인 장르로 본다면 추리와 공포 등이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미국에서는 공포와 SF, 그리고 주로 만화를 각색한 수퍼히어로물이 이미 주류문화로 대접을 받고 있다. 과거처럼 숨어서 보던, 은밀한 쾌락이 아닌 것이다. 타란티노는 그런 은밀한 쾌락에 열광했고 빠져들었다가, 그것을 자신만의 언어로 재현한 천재적인 감독이다. 타란티노가 아니었어도 천대받던 하위문화들은 언젠가 주류로 올라왔을 것이다. 하지만 타란티노가 있었기에 적어도 10년은 빨라졌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데쓰 프루프’는 냉동되었던 ‘그라인드 하우스’의 영화를 그대로 해동시켜 놓은 듯한 영화다. 어딘가 촌스러우면서도 강렬한 에너지를 담고 있다. 그러면서도 타란티노가 숭상하는 강한 여성의 이미지와 생생한 자동차 추격전의 흥분 등 새로운 즐거움으로 가득하다. 이 ‘싸구려 영화’가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나갈 수 있었던 이유는, 단지 타란티노가 만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데쓰 프루프’가 영화의 원초적인 희열을 한껏 느낄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타란티노는 단순한 싸구려 영화의 예찬론자가 아니라 영화를 비롯한 대중문화의 쾌락이 무엇인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감독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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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석씨는 영화ㆍ만화ㆍ애니메이션ㆍ게임ㆍ음악 등 대중문화 전반을 투시하는 전방위 평론가로 ‘B딱하게 보기’를 무기로 한 ‘봉석 코드’의 달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