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제도의 또 다른 피해자, 사형집행인
전쟁 때도 아닌데 사람이 사람을 합법적으로 죽이는 행위, 잘 아는 바와 같이 이것이 사형이다. 그 동안 줄곧 논란이 된 사형 제도가 우리나라에서도 머지않아 폐지될 것 같다. 2008년 현재 사형을 집행하지 않은 지 10년이 넘은 우리나라는 국제적으로 사실상 사형제 폐지국으로 분류되어 있다.
여기서는 사형제도에 대한 찬반 논란은 접어 두고, 사형집행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그동안 사형 제도를 논할 때 사형수, 그리고 피해자와 그 가족들만 주목했을 뿐 사형제도의 또 다른 피해자인 사형집행인을 생각하는 이들은 적었다.
1950, 60년대 서대문형무소에서 근무했던 권영준이란 분은 1971년 중앙일보에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이라는 기고문에서 그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는 사형장 풍경과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지금은 역사전시관으로 변한 서대문형무소에서 근무한 그는 직책상 사형 집행장에 자주 입회했다고 한다. 당시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을 집행하는 곳은 구내 서북쪽 끝 담 밑에 위치한 20평 남짓한 목조단층의 독립가옥이었다. 죄수들은 이 곳을 ‘넥타이 공장’이라 불렀는데, 사형장 문에 들어서는 사형수의 열 명 중 일곱, 여덟 명은 거의 주저앉아 발버둥을 치곤 했다고 한다.
그런데 61세의 나이로 진보당 사건에 연루되어 1959년 7월 31일 오전 10시 45분에 사형장에 들어선 조봉암(曺奉巖)의 경우는 여느 사형수와 달랐다고 그는 말한다. 조봉암은 사형 집행 직전까지 너무도 조용하고 침착한 표정을 지었고, 그의 마지막 요구 사항은 ‘술 한 잔과 담배 한 대’가 전부였다고 한다.
한편, 최근의 신문 기사에서 필자는 20여 년 전에 한 구치소에서 근무하며 10여 차례에 걸쳐 사형을 집행한 전직 교도관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그는 사형수를 사형장까지 데리고 갈 때, 사형수의 목에 밧줄을 걸 때, 사형수의 의자 밑 마룻바닥이 아래로 꺼지도록 ‘포인트’(교도관들이 그 장치를 이렇게 불렀다고 한다)를 잡아당길 때의 느낌이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하다고 증언하고 있다.
사형 집행에 참여하는 일은 사람이 할 일이 아니었고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지는 일이었다. 그래서 사형 집행자 명단에 빠지기 위해 교도관들은 온갖 핑계를 대기도 했다지만, 며칠에 한 번씩 사형을 집행하는 것이 예사였던 1970년대 유신정권 말기에 교도관으로 근무했던 사람들의 고통은 짐작하기 쉽지 않다.
사형 집행에 참여한 전직 교도관들 중에는 마약에 손을 대거나, 속세를 떠나 불가(佛家)에 귀의한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가 종종 들리는 것을 보면 분명 이들도 사형제도의 또 다른 피해자임에 분명하다.
조선시대의 참수형 집행 광경
그런데 다소 엉뚱한 비유가 될지 모르겠지만 오늘날의 사형집행인의 고통은 조선시대 참수형을 담당한 이른바 ‘망나니’에 비하면 오히려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교수형으로 끝나는 지금의 방식에 견주어 본다면 조선시대의 사형 집행은 훨씬 참혹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사형은 목을 매는 교수형(絞刑)과 함께 목을 베는 참수형(斬刑)도 있었다. 그나마 신체를 온전히 보존할 수 있는 교수형에 비해 참수형이 훨씬 무거운 형벌이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물론, 사형 집행 방식은 이 외에도 능지처사(陵遲處死), 군문효시(軍門梟示), 오살(五殺), 육시(戮屍) 등 듣기 섬뜩한 사례가 있지만 이것은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참수형에 집중하기로 한다.
당시 참수형을 집행하는 장소로는 지금의 노량진 건너편 노들강변의 새남터, 삼각지로터리에서 공덕동로터리 쪽으로 가면 나오는 당고개, 서소문 밖 네거리, 무교동 일대였다. 사형수라 하더라도 사형 집행은 대개 추분부터 춘분 사이에 이루어졌다. 그런데 죄가 매우 중한 사형수는 ‘부대시(不待時)’라 하여 판결 즉시 처형했는데, 일제 때 경성형무소장을 지낸 중교정길(中橋政吉)에 따르면 무교동 일대에서 집행하는 사형수는 부대시(不待時) 죄수였다고 한다.
이 쯤 해서 읽기 거북하더라도 참수형 집행 광경을 설명하기로 하자. 참수형 집행은 조선시대 내내 반드시 동일한 방식으로 행해진 것은 아니었지만, 한말의 관리나 선교사들의 말을 종합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먼저 소달구지 적재 칸에 사형수의 양팔과 머리칼을 매단 채 감옥에서 사형장으로 그를 압송한다. 달레 신부가 쓴 『한국천주교회사』를 보면 사형장에는 사방 약 50보 내외의 넓이로 장막을 둘러치고 구경꾼이 들어오는 것을 금지하였지만 이는 잘 지켜지지 않았다고 한다. 죄수가 형장에 도착하면 사형집행인, 즉 망나니는 죄수의 옷을 벗기고 죄인의 두 손을 뒤로 묶은 뒤 그의 턱 밑에 나무토막을 받쳐 놓고 길다란 자루가 달린 무시무시한 칼로 목을 자른다. 때로는 상투에 줄을 매어 목을 베었는데, 이는 잘린 목을 나무에 매달아 효시(梟示)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였다.
사극 같은 것을 보면 참수를 맡은 망나니는 대개 술에 취한 채 칼을 머리 위로 쳐들고 정신없이 춤을 추다가 흥분 상태에서 그 여세로 칼을 내리쳐 목을 베는 장면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또한 사형수의 가족이 사형 집행 당일 망나니에게 뇌물을 주지 않을 경우 망나니는 사형수를 단칼에 죽이지 않고 일부러 여러 차례 칼을 사용해 죄수에게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안겼다는 이야기도 전해지지만 반드시 그랬다고 단정 짓기에는 극적인 요소가 너무 많다.
아무튼 지금 ‘망나니’에 관한 이야기는 다소 희화되어 알려지고 있지만, 참수는 사람이 할 일이 아니었다. 사실 아래에서 보듯 죽기 싫어서 해야 할 일이 망나니짓이었다.
망나니를 위한 변명
여기서 궁금한 사실 하나. 도대체 누가 ‘망나니’가 되었을까? 망나니는 도수(刀手), 회자수라고도 불렸는데, 사람들의 목을 단 칼에 베어야 하는 조선시대의 망나니가 원래 사형수들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드물다.
사형수가 사형수의 목을 벤다? 다소 의아해하겠지만 이것은 사실이다. 18세기에 만들어진 『신보수교집록(新補受敎輯錄)』이라는 법전의 형전(刑典) 추단(推斷) 조문 중에는 행형쇄장(行刑鎖匠), 즉 참형 집행을 맡은 망나니는 사형수 중에서 자원하는 자가 할 수 있도록 허락한다는 숙종 임금의 수교(1703년)가 실려 있다. 이보다 100여 년 뒤인 고종 초기의 법률서 『육전조례(六典條例)』에도 지금의 서울구치소에 해당하는 관청인 전옥서(典獄署) 소속 행형쇄장(行刑鎖匠) 1명을 사형수 중 원하는 자를 국왕께 아뢰어 결정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물론 조선시대 내내 사형수만이 망나니 일을 전담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위의 기록들을 볼 때 적어도 조선후기 망나니의 모집단은 사형수였음이 분명하다. 그러면 이들이 왜 자원했을까? 망나니가 되는 일, 이는 말할 필요도 없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 자신의 목숨을 보존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망나니가 된 자는 사형에서 감형되었고, 그들은 감옥에 머물면서 사형 집행이 있을 때만 눈 딱 감고 칼을 휘두르면 되는 일이었다.
앞서 언급한 『육전조례』를 보면 이들 망나니가 사용하는 칼을 ‘행형도자(行刑刀子)’라고 하였는데, 앞서 참수형을 집행하는 모습을 담은 『형정도첩』의 그림에서 보듯이 칼날이 초승달 같다고 해서 붙여진 중국 고대의 무기 언월도(偃月刀)와 모양이 비슷하였다. 한말에 망나니가 실제 사용했던 행형도자(行刑刀子)는 칼날의 길이가 두 자, 자루 길이가 세 자 정도나 될 정도로 무겁고 길었다고 한다.
사형수에서 하루아침에 망나니로 둔갑한 그들은 어찌 보면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동료 죄수들을 향해 칼을 휘두른 흉악무도한 인간들이었을 지도 모른다. 또한 비록 생을 연장할 수 있었지만, 살기 위해서 칼을 든 망나니들의 삶이 과연 죽기보다 나은 것인지도 장담하기 어렵다.
『승정원일기』 숙종 2년 5월 6일자 기사에는 전옥서 소속 망나니 의종(義宗)이 탈옥한 사건이 실려 있다. 의종은 마적(馬賊)으로 체포되어 처형될 날 만을 기다리다가 망나니를 자원하여 사형 집행을 담당하던 인물이었다.
탈옥에 성공한 의종의 행적을 이후 기사에서는 찾을 수 없지만 과연 의종은 새 삶을 얻었을까? 나는 의종이 죄책감, 두려움 등으로 알콜 중독, 혹은 환청, 환각에 시달리다 자살을 했을 지도 모른다고 감히 상상을 한다. 사람이 사람을 도살하는 일은 최소한의 양심을 가진 인물이라면 차마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