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박찬욱 감독의 데뷔작 [달은 해가 꾸는 꿈]을 본 적이 없다. 나뿐만이 아니다. 이제는 국제적 감독으로 부상한 박찬욱 감독의 데뷔작에 대해 새삼스럽게 궁금해 하는 사람이 많다. 부산국제영화제 기간에 있었던 제 5회 부산영평상 시상식이 진행도니 해운대 메리어트 호텔에서 나는 박찬욱 감독을 만났다. [올드보이]는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을 받았고 나는 시상식의 사회를 보았다. 가수 이승철 주연으로 알려진 그 영화에 대해 박찬욱 감독은 어느 자리에서 [비디오 테이프를 모두 회수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나는 다시 그에게 물어보았다. 정말 비디오로 출시되었느냐고. 왜냐하면 시내의 유명한 비디오 가게를 수소문 했지만 [달은 해가 꾸는 꿈]의 비디오는 어디에도 없었다. 정말 박 감독이 모종의 작전을 개시해 자신의 데뷔작을 모조리 회수한 것은 아닐까? 그의 데뷔작은 그 정도로 부끄러운 작품일까? 그러나 박 감독은 완강하게 부인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그럴 사람은 아니다. 나는 박 감독이 겉은 멀쩡하지만 속은 더 멀쩡하다고 생각한다. 지난 총선에서 영화계의 민주노동당 입당 러시를 이룬 장본인이 바로 그다.
그는 지금까지 살면서 체득한 게 있다면, 군대에서 뿐만 아니라 인생에서도 줄을 잘 서야 하는데, 자기가 볼 때 민주노동당이 앞으로 전망이 밝고 집권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민주노동당에 입당한다고 말했었다. 나는 그의 선택을 지지한다. 그는 정말 줄을 잘 선 것이다. 나도 그 뒤를 따라 줄을 서고 싶지만, 영화인들의 민주노동당 입당이 너무 시끄럽게 플래시를 받은 것을 생각하니 줄 서려는 마음이 쑥 들어간다.
지난 1993년에 출간된 내 소설 [블루스 하우스]를 충무로의 어떤 영화기획자가 영화화하겠다고 나서면서 감독으로는 박찬욱을 적극 추천했었다. 아직 신인이지만 기존의 충무로에서는 보기 힘든 놀라운 실험정신이 들어있는 [달은 해가 꾸는 꿈]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나는 알았다고 대답했지만 가수 이승철이 주인공이라는 말에 웬지 믿음이 가지 못했고, 결국 그 비디오를 보지 못했었다. 그 영화는 1992년에 나왔으니까 당시에는 비디오 가게에서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을 때였다. 그렇게 나는 박찬욱 이라는 이름을 알게 되었다. 박찬욱 말에 의하면, 영화사에서 당시 인기절정이었지만 마약 파동으로 방송활동을 못하던 이승철을 주인공으로 하지 않으면 영화를 못 찍게 했다는 것이다. 바쁜 이승철을 영화 촬영 하루 전에야 처음 만났는데, 이승철이 하는 말, [감독님, 줄거리가 뭐예요?]
결국 내 영화의 프로젝트는 중간에 무산되었고, 나는 1995년 KBS 아침 정보 프로그램 [전국은 지금]에서 매주 금요일 영화 소개를 하고 있었다. 갑자기 유럽 여행을 하고 싶어서 방송을 그만두고 두 달 동안 여행을 한 뒤 돌아왔는데 내가 없는 동안 내 자리에서 영화를 소개한 사람이 박찬욱 감독이었다. 생방송 들어가기 전에는 날씨 안내가 있고, 영화 코너 끝난 뒤에 조금 있다가 다시 한 번 날씨 소개가 있다. 당시 KBS의 날씨 담당은 장모 리포터였다. 그녀의 오빠는 배우 장세진씨고 그녀 역시 영화에 대한 관심이 아주 많았다. 생방송 셋트 곁에서 영화 담당자와 날씨 담당자는 수다를 떨 수밖에 없다.
그 결과, 1년 뒤 장 리포터는 지금은 영화감독이 된 이무영씨와 결혼하게 된다. 중매자는 박찬욱 감독이었다. 알려져 있다시피 이무영은 박찬욱 감독의 가장 절친한 친구다. 그들은 서로의 성을 따서 [박리다매]라는 유령회사를 만들기도 했다.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JSA]나 [복수는 나의 것] 혹은 이무영 감독의 데뷔작 [휴머니스트]를 보면, 기획 박리다매라고 나온다. 그들이 회사 이름대로 정말 시나리오를 무지 많이 생산해내서 원고료는 조금만 받고 많이 팔았다는 소문은 어디에도 없다.
다시 1997년, 영화평론가가 되어 그의 두 번째 작품 [삼인조]를 시사회에서 보았다. 이번에는 두 눈 뜨고 스크린이 뚫어지도록 열심히 보았다. [삼인조]는 B급 감성으로 무장된 영화였다. 이경영 김민종 정선경 등이 나오는 그 영화는, 무장강도가 된 두 남자가 아이를 찾으려는 여자를 도와주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이상한 이야기다. 발랄하고 재치 있었지만 너무 마이너리티 감성에 호소하는 작품이었다. 나는 그에 대한 평가가 지나치게 과장되었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또 몇 년이 흘렀다.
[공동경비구역JSA]가 [쉬리]의 기록을 넘어 579만 명이라는 당시까지 한국 영화 최고의 관객을 동원하면서 박찬욱 감독은 스타 감독으로 부상했다. 관객숫자는 나중에 [쉬리]팀에서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지만, 그 당시는 일부 지역에서 지역 배급자에게 영화를 매도하던 시기여서 정확한 관객 집계가 어렵게 되어 있다. [공동경비구역JSA]는 흥미로운 영화였지만 나는 박찬욱 감독의 영화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 영화는 제작사인 명필름의 영화였다. 왜냐하면 감독 자신의 의지보다는 영화사의 드라이브가 너무 강하게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박찬욱 감독은 자신이 만들고 싶어 하는 수 십개의 시나리오를 명필름에 보여주었지만 모두 거절된 상태였고, 명필름에서 판권을 보유하고 있던 박상연의 [오늘의 작가상] 수상 장편소설 [DMZ]의 각색을 의뢰받으면서 영화가 시작되었다. 박찬욱 감독은 이무영과 함께 1년 동안 [공동경비구역JSA]의 시나리오를 12번이나 고쳐 쓰면서 영화를 준비했다. 그 작품이 없었다면 그는 다시 영화를 찍기 힘들었는지도 모른다.
진정 박찬욱표 영화는 [복수는 나의 것]부터이다. 시사회가 있던 중앙극장 무대에 올라 박찬욱 감독은 [내가 보고 싶어 하는 영화를 만들었다]라고 말했다. 너무나 당당했고 자신감에 차 있었으며 행복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영화는 실패했다. 40억원 가까운 제작비가 들어가고 송강호 신하균 배두나 등 당대 최고의 배우들을 모아서 찍은 영화치고는 전국 관객 50만 명이라는 숫자는 초라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감동했다.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된다. [복수는 나의 것]을 보고 나오던 오후 4시 중앙극장 앞 명동의 하늘이. 나는 시퍼렇게 소름이 돋아 온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박찬욱에 대한 증오심에 사로잡혔다. 당시의 내 마음을 그대로 표현하자면, 그를 죽이고 싶었다. 영화는 너무 좋았다. 지금까지 내가 본 한국 영화 중 최고였다. 나는 지금도 [올드 보이가]가 [복수는 나의 것]을 뛰어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비록 영광은 [올드 보이]가 독차지했지만, 그 월계관은 [복수는 나의 것]이 써야 마땅하다고 믿고 있다. [이 영화를 다시 만든다고 해도 이 이상의 배우들은 없다. [공동경비구역JSA]보다 10배는 더 많은 공을 들여 찍었다]고 그는 말했다.
[올드 보이]의 미국판 리메이크 감독이 결정되었다. [배터 럭 투모로우]로 데뷔한 젊은 감독 저스틴 린이 맡게 되었다. 그러나 국내 팬들의 대체적인 반응은 실망스럽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그 영화는 약물과 섹스, 폭력에 찌들어 있는 틴에이저들의 모습을 강렬하게 그리고 있는 저스틴 린 감독에 대해 아직 실망할 때는 아니다. 박찬욱 감독은 [올드 보이]의 리메이크에 대해서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리메이크 된 영화는 그의 작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산영평상 시상식에서도 박찬욱 감독은 유머를 잃지 않았다. 그의 동시대 작가주의 감독으로 인정받는 김기덕 감독이 공격적이고 홍상수 감독이 대언론에 소극적인 데 비해서 그는, 따뜻한 유머를 잃지 않으면서도 활발하게 접촉하고 있다. 영평상 시상식에서 그는 단연 스타였다. [나도 각본을 상당히 잘 쓴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지금까지 받은 상은 전부 감독상뿐이다. 다음에는 시나리오를 잘 써서 꼭 각본상을 받도록 노력하겠다]라는 인사말만 해도 그렇다.
시상식이 끝난 뒤 리셉션에서도 가장 바쁜 사람은 남녀주연상을 받은 배우가 아니라 박찬욱 감독이었다. 그는 계속되는 팬들의 사인공세, 사진촬영 공세도 너그럽게 받아주었다. 나는 그를 보면, 좋은 집안에서 잘 교육받고 자란 남자의 전형을 발견한다. 1963년생 서울 토박이고 그의 부친은 대학 학장을 지냈으며 그는 서강대 철학과를 나왔다. 그러나 박찬욱의 다른 점은 잘 정돈된 삶에서 무서운 일탈을 꿈꾸고 있다는 것이다.
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작 중 마지막 작품이 될 [친절한 금자씨]는 이영애를 주인공으로 11월 16일 첫 촬영에 들어간다. 지금 이 순간에도, 영국에서 일본에서 [올드 보이]의 극장 개봉에 따른 관객들의 반응이 폭발적이라는 보도가 들어오고 있다. 그의 복수 3부작의 피날레를 장식할 [친절한 금자씨]의 사사회장에서 더 큰 전율에 사로잡혀 있을 나의 모습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