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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문학관 엮음, <꽃은 져도 노동은 남네>, 푸른사상, 2022년 4월
코로나 시대의 노동시
맹문재
1.
2019년 12월 말 중국 후베이성 우한시에서 처음 보고된 코로나19(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상황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 정부는 사회적 거리 두기를 완화하고 조만간 전면 해제할 것이라고 밝혔다. 정부의 계획대로라면 2020년 5월 3일에 시작했던 사회적 거리 두기는 종료되고, 사회의 방역 규칙도 전면적으로 해제되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일찍 엔데믹(풍토병 전화)으로 전환하는 국가가 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오는 실정이다.
위와 같은 정부의 계획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코로나19로 인해 전 세계 인구의 550만 명 이상 사망했고, 한국에서도 6,000명 이상 목숨을 잃었다. 사망자가 급증해 장례식장과 화장장의 대란이 일어나고 있고, 위중증 환자도 계속 늘고 있다. 또한 알파 변이 바이러스를 시작으로 베타형, 감마형, 델타 변이 바이러스, 오미크론 변이 바이러스, 스텔스 오미크론 변이 바이러스, 오미크론과 스텔스 오미크론의 조합인 XE 변이 바이러스 등이 계속 발생하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우리의 일상은 큰 고통을 겪고 있는데, 무엇보다도 경제적인 면을 들 수 있다. 대면 접촉과 인적 및 물적 이동이 제한되면서 경제활동이 크게 위축되고 있는 것이다. 비대면에 기반을 둔 디지털산업은 그나마 지속되고 있지만, 대면에 기반을 둔 산업들은 심각한 타격을 받고 있다. 정부에서는 긴급 재난지원금을 제공했지만,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지원금으로 수요를 창출하는 것을 넘는 일자리를 마련해야 하는데, 노동시장은 1997년의 외환위기 못지않게 위태로운 지경이다. 불안정한 고용, 저임금, 열악한 노동 환경, 실업 등의 그림자가 사회 전체에 드리워져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코로나19의 상황을 극복할 수 있을까? 인간 가치가 실현되는 사회를 가져올 수 있을까? 지역성과 세대간의 이기주의로 막을 내린 20대 대통령 선거의 결과를 보면 그 희망이 이루어지는 일이 쉬워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수많은 자연 재난과 질병과 전쟁 등에 함몰되지 않고 이룩해온 우리의 역사가 있기에 끝내 극복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시인들이 이 시대를 고민하는 모습도 그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
2.
집 안만이 물 밖이다
집 밖으로 나선다는 건 물속으로 들어간다는 것
마스크가 없으면 물속으로 갈 수가 없다
가서는 안 된다 마주 오는 마스크와 마주치면
내외를 하거나 따가운 눈총을 견뎌야 한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도 차 한 잔 마실 수도 없다
남녀는 물론이고 노소도 예외가 없다
마스크가 마스크에게 말을 걸고
마스크와 마스크가 마스크 때문에 언성을 높인다
여분의 마스크가 구원이고 신의 은총이다
집 밖은 언제나 깊은 물속이다
마스크가 바람에 펄럭인다
잎 떨어진 가지에 마스크가 나부낀다
빨간 마스크 노란 마스크 검은 마스크
공항의 감시견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마스크다
승객은 물론이고 비행기도 마스크를 쓴다
공항의 돌하르방도 예외일 수는 없다
마스크가 바람을 이끌고 낙엽처럼 나뒹군다
공원의 비둘기는 마스크에 발 묶여 옴짝달싹 못 하고
어부의 그물에는 물고기 대신 마스크가 잡힌다
한 해에 6백억 마리의 닭 뼈가 지층을 이루는 지금이다
집안에 들어서야 마스크 벗고 잠자리에 드는 오늘이다
― 김수열, 「호모 마스크스」 전문
위의 작품에서는 코로나19의 상황을 “집 안만이 물 밖”이고, “집 밖으로 나선다는 건 물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라고 비유하고 있다. 집 안만이 물에 빠지지 않는 안전지대이고, 집의 바깥은 물속이어서 위험지대라는 것이다. 따라서 안전을 생각하면 집 안에만 있어야 하는데, 실제로 그것은 가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지도 않다. 현대사회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의 토지를 소유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가족의 의식주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물속으로 들어가 다른 사람들과 교류를 해야만 하는 것이다.
코로나19의 상황에 직면한 사람들은 “마스크가 없으면 물속으로 갈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가서도 안 된다. 만약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고 물속으로 가다가 “마주 오는 마스크와 마주치면/내외를 하거나/따가운 눈총을 견뎌야 한다”. 또한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도 차 한 잔 마실 수도 없다”. 이와 같은 처지는 누구도 예외가 아니다. “마스크가 마스크에게 말을 걸고/마스크와 마스크가 마스크 때문에 언성
을 높인다”. 결국 “집 안에 들어서야 마스크 벗고 잠자리에” 들 수 있는 것이다.
코로나19는 마스크가 인간 사회를 지배하는 환경을 가져왔다. 거리에는 “빨간 마스크 노란 마스크 검은 마스크”로 뒤덮여 있고, 공항에는 “감시견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마스크”로 차 있다. “승객은 물론이고 비행기도 마스크”를 쓰고, “공항의 돌하르방도” 마찬가지이다. 버려진 마스크가 “바람에 펄럭”이고, “잎 떨어진 가지에” 매달려 나부낀다. 바람이 마스크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마스크가 바람을 이끌고 낙엽처럼 나뒹군다”. “공원의 비둘기”가 마스크에 발이 묶인 채 움직이지 못하고, “어부의 그물에는 물고기 대신 마스크가 잡”히고 있다.
또한 코로나19로 인해 “한 해에 6백억 마리의 닭 뼈가 지층을 이루”는 결과를 가져왔다. 코로나19의 재난은 인간에게 마스크를 쓰게 강요했을 뿐만 아니라 동물들에게도 피해를 주고 있다. 그중에서도 닭은 인간이 선호하는 음식의 품목이어서 큰 희생을 당하고 있다. 과학자들은 공룡의 뼈가 중생대의 화석으로 발견된 것처럼 인류세의 화석으로는 플라스틱, 콘크리트, 그리고 닭 뼈가 발견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코로나19의 상황에서는 사람들의 왕래가 줄어들어 환경오염이 감소한 면이 있지만, 또 다른 면에서는 심화된 것도 사실이다. 그중의 한 가지가 코로나 쓰레기이다. 사회적 거리 두기가 시행되면서 배달 음식이 급증했는데, 그 음식을 담는 용기가 썩지 않는 플라스틱 제품이다. 플라스틱 제품의 일종인 마스크의 생산도 이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 증가했다. 우리나라에서 한 해에 쓰고 버리는 마스크가 73억 장 정도인데, 땅에 묻혀 썩으려면 450년이 걸린다. 코로나19가 가져온 환경오염은 이처럼 심각한 것이다.
썩은 잇몸에 기생하는 P진지발리스 균이
뇌세포를 장악하고 기억을 뺏어가는 알츠하이머처럼
쥐도 새도 몰래 지구도 자존을 상실해가고 있다
허겁지겁 삼킨 식사가 위장을 망가뜨리고
그렇게 체한 공장들과 자동차들이 뿜어대는 매연에
숨쉬기조차 힘겨워진 지구가 헐떡이네
과잉생산과 과잉소비가 촉발한 대책 없는 발열에
몸살을 앓네
일어날 기력도 없이 병들어 신음하고 있네
곧 지구 환란이 올 것이네
여기저기 화산이 맨틀을 박차고
용솟음칠 것이네
지진이 맨틀을 갈라놓으며 사람을 삼킬 것이네
심해의 중력조차 바뀌면서 해저지진이
거대한 해일로 도시를 삼킬 것이네
지구를 숨 쉬게 하던 거대한 숲이 사라지고
턱턱! 숨을 조여오는 사막이 사막을 배설할 것이네
뜨거운 지구에 녹아내린 빙하가 물의 절대순환 양을 폭증
시켜
방주로도 살아남을 수 없는 대홍수가 대지를 휩쓸 것이네
장기 가뭄으로 쩍쩍 갈라진 땅을 견뎌내지 못한 대기근에
가슴뼈가 앙상하게 오그라들 것이네
불어난 물이 바다를 넘쳐
야금야금 낮은 섬부터 잠식할 것이네
공장에서 상품으로 대량 사육되는 가축들이
성장촉진제에 시달리다가
야만의 폭식에 살육당한 동물들의 혼이
대지를 뒤흔들 것이네
뜨거워진 지구를 견디다 못해 녹아내린 북극 빙하에
냉동되어 숨었던 수천만 년 전의 강력한 세균들이 되살아나
모든 살아 있는 심장을 거두리!
― 정원도, 「지구가 살해되고 있다」 부분
위의 작품은 일종의 묵시록처럼 읽힌다. 지금처럼 인간이 지구를 학대하면 “썩은 잇몸에 기생하는 P진지발리스 균이/뇌세포를 장악하고 기억을 뺏어가는 알츠하이머처럼/쥐도 새도 몰래 지구”는 생명을 잃을 수 있다. 실제로 “체한 공장들과 자동차들이 뿜어대는 매연에/숨쉬기조차 힘겨워진 지구가 헐떡”이고 있다. “과잉생산과 과잉소비가 촉발한 대책 없는 발열에/몸살을 앓”고 있는 것이다.
깊은 병에 걸려 신음하고 있는 지구에 곧 환란이 닥칠 것이다. “여기저기 화산이 맨틀을 박차고/용솟음칠 것”이고, “심해의 중력조차 바뀌면서 해저지진이” 거대한 해일을 몰고 와 도시를 삼킬 것이다. “지구를 숨 쉬게 하던 거대한 숲이 사라지고” “숨을 조여오는 사막이 사막을 배설할 것”이다. 또한 “뜨거운 지구에 녹아내린 빙하가 물의 절대순환 양을 폭증시켜/방주로도 살아남을 수 없는 대홍수가 대지를 휩쓸 것”이고, “장기 가뭄으로 쩍쩍 갈라진 땅을 견뎌내지 못한 대기근에/가슴뼈가 앙상하게 오그라들 것”이다. 심지어 “공장에서 상품으로 대량 사육되는 가축들이/성장촉
진제에 시달리다가/야만의 폭식에 살육당한 동물들의 혼이/대지를 뒤흔들 것”이고, “뜨거워진 지구를 견디다 못해 녹아내린 북극 빙하에/냉동되어 숨었던 수천만 년 전의 강력한 세균들이 되살아나/모든 살아 있는 심장을 거”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더 늦기 전에 나무를 심고 가꾸고, 넘치는 공장을 해체하고 대지를 정화하는 일이 필요하다. 바다를 장악한 플라스틱을 건져내어 물고기를 살리는 일도 요구된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과제를 해결하기는 쉽지 않다. 인간이 이룬 과학과 기술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구에서 살지 못하게 되는 그날을 대비해서 다른 행성으로 탈출하는 꿈까지 꾸고 있다.
우리는 제레미 리프킨(Jeremy Rifkin)이 『엔트로피』에서 경고한 지구의 형편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지구에는 사용 가능한 에너지가 감소하고 있다. 다시 말해 환경오염이 말해주듯이 사용 불가능한 에너지가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에너지는 창조되거나 소멸될 수 없고 그 형태가 사용할 수 있는 데서 사용할 수 없는 데로 바뀐다는 진리가 무시되고 있다. 로널드 베일리(Ronald Bailey)는 『에코스캠』에서 리프킨의 주장이 과대포장된 것이어서 과학기술의 진보를 가로막는다고 비판했다. 그렇지만 자원 고갈, 오존층 파괴, 생물 다양성 감소, 지구 온난화 등을 걱정해야 한다. 결국 자본주의 체제가 추구하는 이익에 함몰되어서는 안 된다는 자각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3.
코로나19의 상황으로 말미암아 “매장에 손님은커녕 파리도 얼씬 않”(유덕선, 「월곶에서」)을 정도로 경제활동이 고통을 겪고 있다. 사회적 약자의 경우 더욱 그러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개념은 다양한 관점에서 규정될 수 있지만, 비정규직 노동자로 보아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그들은 고용 신분이 불안하고,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 환경에 시달리고, 비인격적인 대우를 받고 있다. 따라서 사회로부터 소외되는 그들을 사회적 약자로 부를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걸레다 나는 비정규직이다
반란을 꿈꾸는 비전향 장기수이다
노동의 독이 밴 노동 중독자이다
나를 충동질하여 내 노동을 빨아먹는 그들은
걸핏하면 내 귓등 간질이며 사랑을 주절거리고
가랑이에다 기름을 부어 떡메질 일삼는다
그럴 때면 그의 거친 숨소리에
덩달아 흥분하기 일쑤고
그의 다급한 정에 연민을 느끼기 일쑤고
그러다 그만 계약 연장에 동의해버리기 일쑤고
동의를 받아낸 그는 즉시
나를 구정물 속에 처넣어 인정사정없이 흔들어댄다
그간 얻어먹은 거 다 토해내라 윽박지른다
그 악덕 조항이 애초 기본 규약에 숨어 있었다는 걸
나중에야 알지만
또 속았구나 후회하는 반복이지만
다 잠든 밤 구석에 처박혀
노동의 독물 빼내기만도 힘이 버거운
난치성 결벽증후군까지 품어 안고 살아가는
천형의
그러나 결코 포기되지 않는 봉기의 땀으로
꿈자리 늘 축축한
피톨마다
면면히 흐르는 비분 의열의 검은 피
나는 나는 외세 소탕꾼 아나키스트의 후예이다
― 정소슬, 「걸레」 전문
위의 작품에서 화자는 비정규직인 자신을 “걸레”라고 비하하고 있다. 그와 같은 면을 “내 노동을 빨아먹는 그들은/걸핏하면 내 귓등 간질이며 사랑을 주절거리고/가랑이에다 기름을 부어 떡메질 일삼”는데, 그때마다 자신이 “덩달아 흥분하”고 “연민을 느”껴 “그만 계약 연장에 동의”하는 것으로 밝히고 있다. 화자는 갑을관계에서 경제적인 형편이나 시간적인 여유가 부족하고, 정보 취득이나 인맥 조직이 열악해 사용주가 제시하는 계약 조건을 수용하고 만 것이다.
그 결과 “동의를 받아낸” 사용주는 즉시 화자를 “구정물 속에 처넣어 인정사정없이 흔들어”대었다. “그간 얻어먹은 거다 토해내라 윽박지”르기도 했다. “그 악덕 조항이 애초 기본규약에 숨어 있었다는 걸/나중에야 알”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법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요건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또 속았구나 후회”할 뿐이었다. 또한 “다 잠든 밤 구석에 처박혀/노동의 독물 빼내기”에도 힘이 벅찼다.
그렇지만 화자는 자신이 “반란을 꿈꾸는 비전향 장기수”이고, “노동의 독이 밴 노동 중독자”라고 말한다.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결코 포기되지 않는 봉기의 땀으로/꿈자리 늘 축축”할 정도로 분노하고 있다는 것이다. “피톨마다/면면히 흐르는 비분 의열의 검은 피”를 가진 “외세 소탕꾼 아나키스트의 후예”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화자의 이와 같은 외침이 힘있게 들리지 않는다. 그의 열정이나 용기가 부족해서라기보다는 그를 둘러싸고 있는 갑의 힘이 워낙 강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더 이상 외치지 못하고 주저앉게 될 것이라고 여겨진다. 마치 “광부의 팔뚝은 종종 분노의 혈관이 핏발을 세우”(정연수, 「꽃은 져도 노동은 남네」)지만, 끝내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와 같은 것이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형편이 나아지려면 갑이 을을 대하는 태도가 전면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렇지만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데 함몰되어 있는 갑에게 그와 같은 자세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정규직 노동자들이 자신의 기득권을 양보하고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연대하는 것이 필요하다. 정규직 노동자들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연대해 사용주의 횡포를 막아낸 뉴코아―이랜드의 투쟁이 좋은 사례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예는 아주 예외적인 경우이다. 정규직 노동자들 역시 자본주의 체제가 요구하는 이익 추구를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형편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고 있다.
우리 사회에 비정규직이라는 개념이 등장한 것은 한국 정부가 국제통화기금(IMF)이 제공한 구제 금융을 받으면서부터이다. 국제통화기금은 한국 정부가 요청한 구제 금융을 들어주는 조건으로 부실한 기업 정리, 기업의 인수 및 합병 허용, 노동시장의 유연화, 은행의 자기 자본 비율 8% 이상 유지 등을 제시했다. 다급한 한국 정부는 그 조건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기업들의 구조 조정이 본격화되어 노동자들이 대량으로 해고되었고, 단시간 근로(파트 타임), 기간제 근로, 파견 근로 등의 비정규직 고용 방식이 본격화된 것이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열악한 노동 환경과 사회적 차별은 코로나19의 상황으로 한층 더 심해졌다. 자본과 기술, 정보, 인맥 등이 부족한 그들이 겪는 고통은 정규직 노동자의 경우에 비해 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하청에 재하청을 수락”(권위상, 「공사장 가는 길」)한 일거리를 맡거나, “위험한 일은 언제나 용감한 당신에게/급하고 무거운 일은 기운 센 당신에게”(김윤환, 「특수사업자 K」)라고 사용주가 꼬드기는 일을 하게 된다. 또한 “아파트 경비원 아저씨 두 분이/나란히 사표를”(이태정, 「먹먹해지는 일」) 쓴 데서 보듯이 억울하게 해고당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새벽 인력시장에서 허탕”(장우원, 「해장라면」)을 치고, “공사판에서 잘린 아버지”(조호진, 「부천역 아이들 1-편의점 털이범」)의 경우처럼 일거리 자체를 구하기도 힘들다. 그리하여 비정규직 노동자는 “어둠에 이마를 대고”(정세훈, 「어둠에 이마를 대고」) 눈물을 흘리고, 심지어 생명을 잃기도 하는 것이다.
적색 신호등이 켜진다.
땅에 발을 딛고 헬멧을 벗는다.
풀려난 것에게 바람이 와닿는다.
이자 붙는 몸뚱이 하나 있어 요행이다.
섭씨 30도가 넘는 피크 타임에 붙는 천 원이 있어
점심은 굶어도 좋다.
배달통에 담긴 냉면 얼음이 녹기 전이라면
땀이 등줄기를 흘러내려도 좋다.
참 잘했다.
오지 않는 손님 기다리며 쌓여가는 고지서 보지 않도록
새벽 걸음으로 준비한 찬거리 버리지 않도록
건물주 전화 소리에 화들짝 놀라지 않도록
아내의 엉터리 웃음 보지 않도록
딸내미 처진 어깨 보지 않도록
오토바이 면허 따길
참 잘했다.
아내는 안면이 떨리는 게 스트레스 때문이라지만
내가 스트레스 받을 일이 뭐가 있나.
냉면 받아든 청년들이 고맙다, 고생 많다는 말 한마디가
에어컨만큼 시원한 것을.
누더기가 된 딸내미 꿈도 오토바이로 한 걸음 한 걸음 기
워나가는 것을.
폐업의 잿빛 경고등 앞에서도 아내 눈빛 켜지던 것을
운전 조심하라는 늙으신 어머니 문자가 있는 것을.
길을 막는 적색 신호등
곧이어 청색으로 바뀌는 것을.
청색 신호가 들어오고,
등줄기로 한 줄기 바람이 타고 들어왔다.
23톤 화물차 아래로 1톤 오토바이가 미끄러진다.
밀린 잠을 자기로 했다.
― 유국환, 「바람이 머물렀다 간 자리-어느 배달 라이더의 죽음에 부쳐」 전문
위의 작품에서 “어느 배달 라이더”는 운전 중에 “적색 신호등이 켜”지자 오토바이를 잠시 멈추고 “땅에 발을 딛고 헬멧을 벗는다”. “풀려난 것에게 바람이 와닿는” 것을 느끼며 잠시 휴식을 취한다. 아울러 자신이 배달 라이더가 된 현실을 떠올린다.
그는 무엇보다 “이자 붙는 몸뚱이 하나 있어 요행”이라고 생각한다. “섭씨 30도가 넘는 피크 타임에 붙는 천 원이 있”을 정도로 일할 수 있는 몸이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점심은 굶어도 좋”고 “배달통에 담긴 냉면 얼음이 녹기 전이라면/땀이 등줄기를 흘러내려도 좋다”고 여긴다.
그는 배달 일을 하기 전에 음식점을 운영했는데 장사가 잘되지 않았다. “오지 않는 손님 기다리며 쌓여가는 고지서 보”면서 걱정을 많이 했고, “새벽 걸음으로 준비한 찬거리”를 버릴 때는 속이 상했다. “건물주 전화 소리에 화들짝 놀라”기도 했다. “아내의 엉터리 웃음”도, “딸내미 처진 어깨”도 가슴 아파하며 바라봐야 했다. 그는 그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오토바이 면허 따” 배달 일을 시작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가 자신에게 “참 잘했다”고 칭찬하는 배달 라이더의 일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코로나19의 상황으로 물품 주문이 증가하면서 수입이 늘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일거리가 많아지면서 위험이 늘어난 것도 사실이다. 어느 날 그의 아내가 “안면이 떨리는 게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걱정한 것이 그 모습이다. 그렇지만 그는 “내가 스트레스 받을 일이 뭐가 있나”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오히려 “냉면 받아든 청년들이 고맙다, 고생 많다는 말 한마디가 에어컨만큼 시원”하다고 보람을 느낀다. 더 나아가 “누더기가 된 딸내미 꿈도 오토바이로 한 걸음 한 걸음 기워나가”고 있고, “폐업의 잿빛 경고등 앞에서도 아내 눈빛 켜지”고 있기에 희망을 갖는다.
그러나 그의 보람과 희망은 한순간 사라지고 말았다. “길을 막는 적색 신호등”이 끝나고 “청색 신호가 들어오”는 순간, 그는 빠른 배달을 위해 오토바이를 움직이다가 사고를 당했다. 그의 잘못인지 상대방 운전수의 잘못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그는 “23톤 화물차 아래”에 깔려 목숨을 잃은 것이다.
교통사고에서부터 배달 중에 발생하는 각종 사고에 이르기까지 라이더의 책임으로 떠넘겨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배달서비스 업체들은 배달 사고와 관련해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한다. 배달비가 온전히 라이더에게 지급되는 것도 아니고 일부만 들어온다. 라이더의 업무가 가중될수록 배달서비스 업체가 이득을 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일반 회사원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일하지만 수입은 결코 더 많지 않다. 아스
팔트 노면의 굴곡으로 충격을 받으며 일하다 보니 허리디스크며 목디스크를 앓고 있다. 자신이 원하는 시간만큼 일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사업주 중심으로 운영되기에 노동 시간도 자유롭지 못하다. 근로계약을 맺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근로기준법에 규정된 권리도 보장받지 못한다. 심지어 음식 배달 라이더의 경우 수많은 고객의 음식을 배달하지만, 정작 자신은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한다. 밥먹는 시간을 줄여 더 배달해야 목표 금액을 맞출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배달 라이더의 모습이 곧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형편이다. 그들은 배달 라이더처럼 안전 사각지대에서 희생당하고 있다. “지하철 깊은 서울의 공사판에서/철철 비 맞으며/땅을 파”(박선욱, 「창밖에 비가 내릴 때」)다가 안전사고를 당한다. “벌건 대낮에 음침한 일터에서 발버둥 치던 멱/바싹 틀어쥐고 불구덩이로 몰아넣는 산업 궁전에서/단말마도 없이 스러”(김이하, 「목숨, 환한 봄 목련 지듯」)진다. “사오 층 높이의 흔들리는 아시바 위에서/벽돌과 벽돌 사이를 매끄럽게 메우”(박관서, 「가난과 궁기의 다른 이름」)다가, 또는 “순간 밧줄이 곤두박질”(옥효정, 「외줄」)쳐 사망하기도 한다.
4.
코로나19의 상황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는 고용 조건이 불안할 뿐만 아니라 일자리 자체도 갖기 어렵다. 임경묵 시인이 「기타 노동자」에서 알렸듯이 콜트콜텍에서 기타를 만들던 노동자 127명은 2007년 정리해고된 뒤 아직도 기타를 만들지 못하고 있는 것이 그 모습이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문제는 곧 정규직 노동자의 문제이다. 사용주는 필요에 따라 언제든지 정규직 노동자를 비정규직으로 만들 수 있다. 따라서 비정규직 노동자의 문제는 결국 정규직 노동자의 문제라는 점을 자각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어느덧 우리 사회의 노동자는 이전 시대와는 전면적으로 다른 환경에서 생존을 모색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디지털 시대의 도래로 말미암아 노동자는 고용 자체가 어렵고, 고용된 노동자도 해고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자신이 언젠가는 해고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노동자들도 스스로 인지하고 있다. 그에 따라 노동자들은 새로운 세계 인식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디지털 시대 이전으로 인류의 역사를 되돌릴 수 없기에 노동자에게 유리한 세상이 도래하기는 어렵다. 신자유주의 체제가 주도하는 컴퓨터가 작업장에 계속 들어서고 있기에 노동자의 해고를 막을 수 없다. 노동자들은 컴퓨터가 요구하는 기대치를 감당할 수 없다. 교육 수준이 높고, 고급 기능이 있고, 경험이 많은 노동자도 “당신, 창의력이 너무 늙었어!”(공광규, 「몸관악기」)라는 평가로 밀려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제레미 리프킨이 『노동의 종말』에서 우려했듯이 컴퓨터의 기술이 인간의 정신 자체까지 대체할 수 있는 상황에 이르렀다.
따라서 노동자는 정치적 인식을 가지고 행동할 필요가 있다. 노동자가 개별적으로 사용주와 계약할 때 임금, 노동 시간, 근무 환경, 복지, 산업재해 등의 사항에 유리한 조건을 확보하기는 어렵다. 노동자들의 정치 행동은 생존권 확보 차원에서 요구된다. 노동자의 노동 환경은 정치 환경과 깊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19의 상황에 맞서는 노동자들의 삶은 힘들지만, 시인들의 노동시를 읽으며 그 동참을 기대한다.
孟文在 | 문학평론가·안양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