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연구회에 김상씨가 一道安士라는 이름으로 올린 글입니다.
여율이란 위서에 기록된 주몽- 여달- 여율- 막래에서 비롯된 이름이고
김상씨는 여기서 여달과 막래의 존재는 확인되나 여율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을 포착해 글을 쓴 것입니다.
제 생각은 이 글 뒤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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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왕 여율
삼국사기는 고구려 초기 왕계를 다음처럼 기록하고 있다.
1. 동명왕(BC 37- BC 19)
2. 유리명왕(BC 19-18)
3. 대무신왕(18-44)
4. 민중왕(44-48)
5. 모본왕(48-53)
초기 5왕은 모두 해모수, 해부루 등과 같은 성씨인 解씨이다. 훗날 2세기에 정권을 장악한 高씨는 건국자인 동명왕에게 高씨를 추존하였다. 이는 백제도 마찬가지인데 온조왕은 아버지인 동명왕을 따라 解씨이다. 그러나 훗날 5세기에 정권을 장악하고 백제사를 쓴 부여씨가 건국자인 온조왕에게 부여씨를 추존하였다.
삼국사기를 보면 5왕 중에 1-3대는 강력한 왕이고 4-5대는 유명무실한 왕으로서 이후 왕통이 해씨에서 고씨로 전환되는 계기가 된다. 광개토왕비문에서 1-3대만 언급한 것은 4-5대는 적을 만한 인물이 못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3대 대무신왕은 부여를 통합한 왕인데, 초기 고구려의 전성기를 열었다는 점에서 비문과 삼국사기의 증언이 같다.
그런데 중국의 사서는 초기 고구려의 왕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三國志; 왕망 1년(서기 12년, 유리왕 31년)에 新(漢)의 장군 엄우가 고구려후 추를 꾀어 죽였다.
北史; <주몽>이 죽자 아들 <여달>이 서고 또 <여달>이 죽자 그의 아들 <여율>이 섰다. <여율>이 죽자 또 그 아들 <막래>가 서서 이에 부여까지 통합했다.
隋書; 주몽이 나라를 세우자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 하고, 高로 성을 삼았다. 주몽이 죽자 아들 여달이 왕위를 이었고, 그 손자 막래 때에 이르러서는 군사를 일으켜 부여를 삼켰다.
魏書; 주몽은 아들의 이름을 여달이라 고치고 나라 일을 맡겼다. 주몽이 죽자 여달이 대를 이어 섰고, 여달이 죽자 그 아들 여속이 대신 섰으며, 여속이 죽자 그 아들 막래가 이어 서서 부여를 정벌하여 부여가 크게 패하니 드디어 이를 합쳤다.
周書; 주몽은 자라자 재주와 지략이 있으므로 부여 사람들은 그를 미워해서 내쫓아 흘승골성에 살게 했더니, 그는 스스로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 하고 高로 성을 삼았다. 그러던 것이 그 손자 막래에 이르러 세력이 점점 강성해져서 부여를 쳐서 신하로 삼았다.
* 중국사서는 연이어 통치한 두 왕의 관계를 잘 모르면 부자관계로 기록한다. 따라서 중국사서의 부자관계는 왕통을 이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무조건 신뢰해서는 안 된다.
얼핏보면 삼국사기의 기록과 중국사서가 전하는 고구려 초기 왕력이 다른 듯 하다. 그러나 잘 보면 둘이 같다.
막래가 부여를 통합하였으므로 3대 대무신왕인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주몽이 일을 맡긴 여달은 유리왕인 것이 분명하다. 그러면 문제는 여율이 누구이며, 新(漢)과 전투 중에 죽은 고구려후 추는 고구려왕인가? 만일 왕이라면 어느 왕인가가 문제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그 답이 있다. 고구려본기 유리왕조를 보면 통치기간이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가) 유리왕의 통치시대
유리 원년(BC 19); 즉위
유리 2년(BC 18); 비류국 송양의 딸로서 왕비를 삼음
유리 13년(BC 9); 부여왕 대소가 볼모를 요구
유리 20년(AD 1); 태자 도절 사망
유리 22(AD 3); 왕이 질산의 음지로 사냥을 나감
유리 23(AD 4); 해명을 태자로 세움
유리 28(AD 9); 태자 해명이 죽음
유리 31(AD 12); 漢의 왕망이 胡를 치는데 협력할 것을 요구하여 전투에 나갔으나 오히려 漢을 공격함. 漢의 장군 엄우가 고구려 장군 연비를 꾀어 죽임
(나) 왕자 무휼 통치시대
유리 32(AD 13); 부여의 공격을 무휼이 격퇴함
유리 33(AD 14); 무휼이 태자가 되고 군국의 정사를 위촉받음
유리 37(AD 18); 왕자 如津이 물에 빠져 죽음, 왕이 죽고 무휼이 즉위함
유리왕의 기록은 漢의 왕망과의 전쟁을 전후하여 유리왕의 통치시기와 왕자 무휼의 통치시기로 나뉜다. 유리 32년부터 유리왕은 실제로 없고 무휼이 실권자이다. 유리 33년조는 태자 무휼에게 군국의 정사를 위촉하였다고 하고 있다. 유리왕은 늦어도 이때는 죽었다. 이와 유사한 구절이 태조 69년조에 있는데 태조대왕은 이미 이때 죽었고 차대왕이 실제 왕이었다.
그러나 무휼의 즉위는 왕자 여진이 죽으면서 이루어진다. 이는 유리32-유리37 사이의 6년 동안 고구려왕이 여진이었다는 뜻이다. 그는 어떤 이유로 즉위하지 못하고 통치하는 명목상의 왕이었다. 보통 다음 왕이 즉위하지 못하고 통치하는 경우는 그가 실권자가 아니거나, 또는 오늘날의 북한처럼 국가에 큰 비극이 발생하여 애도기간이 길어 즉위라는 절차가 아직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경우이다.
그렇다면 유리왕 31년에 漢의 엄우에게 죽은 것이 고구려 장군 연비만이 아니었을 가능성을 내포한다. 당시 漢군에게 속아 연비만 죽은 것이 아니라 유리왕이 죽었거나 중상을 당했을 가능성이 있다. 유리왕 즉위전사를 보면 활쏘는 이야기가 나온다. 추모란 활 잘쏘는 사람을 뜻하는 보통명사이므로 유리왕도 활을 잘 쏘았을 가능성이 있다.
유리 28년 태자 해명이 죽고 태자 책봉이 없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하다. 이때 如津이 태자로 책봉되었거나, 아니면 무휼보다 서열이 앞서, 유리왕이 갑작스럽게 죽자 그가 왕이 되고, 실세인 무휼은 태자로 책봉되었을 것이다. 마치 조선초 정종이 실세 동생인 태종을 세자로 책봉한 것과 같다. 고구려본기는 대무신왕을 유리왕의 제3자라고 하고 있는데 구태여 쓰지 않아도 앞에서 2명의 태자가 죽었으므로 3자라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도 3자라고 썼다. 이는 사정이 있으니 믿어달라는 뜻이다.
하지만 실세는 무휼이어서 여진은 즉위하지 못한 채 어정쩡한 형태로 고구려를 통치하다 6년 만에 실세에게 밀려나 죽은 것이다. 따라서 중국사서의 고구려왕 여율은 고구려를 6년간 통치하다 AD 18년에 죽은 왕자 여진일 수밖에 없다. 고구려본기는 어쩔 수 없이 여진의 통치기간을 유리왕의 기간을 연장하여 포함시키고, 그 대신 무휼이 태자로 책봉되어 군국정사를 맡는 것으로부터 여진이 죽는 것까지를 기록하였다. 그래서 잘 읽어보면 누구나 사실을 알 수 있도록 하였다. 비류인 祭須가 여진의 시신을 찾아내어 알리니 祭須에게 큰 상을 내렸다고 하여 정변의 주모자가 누구인지도 알려주고 있고, 여진을 예로써 王骨嶺에 장사지냈다고 하여 여진의 신분이 보통이 아니었음도 알려주고 있다.
如津(여진)의 본래 이름은 아마 如律(여율)이었을 것이다. 삼국사기에서는 천년도 넘는 세월을 전해 내려오는 동안 律자가 津짜로 바뀌어 전해졌을 것이고, 중국의 사서는 글자를 보지 못하고 발음만 들어 如栗이라고 적었을 것이다. 그러나 如律은 즉위하지 못해 고구려본기로부터 시호를 받지 못하고 속명만 남아서 삼국사기와 중국사서 모두에 전해진 것이다.
삼국사기와 중국사서가 고구려 초기의 숨어있는 왕에 대한 기록까지 일치하는 것을 볼 때 중국사서가 전하는 나머지 왕에 대한 이름도 모두 당시의 정확한 속명이었을 것이다. 그러면 유리왕의 속명은 '여달'이고 대무신왕의 속명은 '막래'이다. 남의 사서인 중국사서는 간략히 이름을 통한 왕통의 변화만 적었지만 당사자의 기록인 고구려본기는 그 배경과 자세한 내용까지 적고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가 이 정도 정확한 것을 보면 BC 37년에 동명왕이 새로운 국가를 건국하고 그 이름을, 마치 오늘날 남한은 삼한에서 국호를 따오고 북한은 조선에서 국호를 따왔듯이, 과거 고구려현에서 따서 고구려라 했다는 것이 정확하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 김 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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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엉터리다.
지금 논하자는 것은 여율에 관한 것이므로 다른 것에 대해서는 기회가
된다면 이야기 하겠다.
김상씨는 태자 해명이 죽고 무휼이 태자가 될 때까지의 6년을 킥 포인트로 잡았다. 그래서 의문점을 던젔다. 왜 태자가 죽고 바로 다른 아들을
태자로 임명시키지 않은 것이었을까...
그러나 여기에서 또 하나의 사건에 대하여 부연설명이 있었어야 했다.
그것은 도절이 죽은 지 3년후에가 지나서야 해명이 태자로 된 점이다.
만약 전례라고 할 수있는 여기서의 3년을 설명하지 못한다면 해명이 죽은 뒤 6년후에 무휼을 태자로 임명시킨 것에 대한 의문점을 가질 근거가 사라진다. 만약 이 3년이란 공백에 대해 해명에 대한 상 기간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고구려는 부모의 상이외에는 3년상을 지내지 않는다. 형제상은 3개월 혹은 한달이라고 한다. 자식이 죽었을때 부모가 죽었을때와 동렬로 맞출수는 없다. 이 때 상을 형제상과 맞춘다고 한다면 상 기간은 한달내지 길어야 3달을 넘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이유도 성립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은 광개토태왕릉비문과 위서이다.
여기서 위서와 비문은 거의 동시대에 쓰여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두 기록은 전부다 고구려의 공식적인 기록인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저번에 유정님은 두 가지의 전승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셨으나 공식적인 사신을 맞이하면서 두 가지 전승을 이야기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만약 이오가 민간에서 내려오는 전승을
듣고 기록하였다면 위서에는 분명 그 다른 사서에서 처럼 그 나라 사람들은 이라는 표현이나 一云이라는 부연기록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위서의 기록에는 이런 것이 없다. 그것은 위서와 비문에 나타난 고구려의 계보가 동일한 것을 말해주는 것이고 고구려의 공식입장이라는 것이다.
한가지 더 덫붙이자면 김상씨는 여진의 장사기록을 보고 그가 보통신분이
아니었다고 하는데, 왕자가 그럼 보통신분인가?
해명이 죽었을때는 유리명왕이 사당까지 세워주는 예우까지 보여주었다.
이것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물론 여기서의 여율이라는 인물에 대한 의문점과 대무신왕이 왕위에 올랐을때의 문제점은 분명 존재한다. 나는 대무신왕의 즉위를 쿠데타 혹은
그와 비슷한것으로 생각하고 있다(이것에 대해서는 공부중)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는 연구가 진척되어야 할 부분이므로 섣불리 이런식으로 여진=여율이라는 것을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추신: 비문에 4, 5대 임금을 적지 않은 이유는 4대와 5대왕이 별 볼일 없었기 때문이다라는 김상씨의 말.... 이 어이없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그럼 왜 6대왕은 안 적었냐... 라고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