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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을 詩로 바꾸는 세 가지 묘책
― 세 편의 디카시에서 읽는 창작의 기술
나병훈 / 문학평론가
1. 머리말
디카시 작품을 하나의 신비평적 인식의 분석 틀 안에서 묶는 핵심은 작품의 우열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풍경’이 어떻게 서로 다른 창작의 묘책을 통해 시로 전환되는가를 밝히는 데 있다고 본다. 전북지역에서 행정적 지원을 바탕으로 전국적인 디카시의 메카로 발돋움하고 있는 「부안디카시 – 2025년 제8호」 에 초대된 디카시 중견시인( 김사륜,소하, 장병연)을 만나면서 드는 생각이다. 특히 디카시 창작 스킬을 비평의 숨은 골격으로 분석하는 일이어서 주목 할 만 하다. 세 작품을 한자리에 놓으면 놀라운 공통점이 발견된다. 사진 속 사물을 문자에서 그대로 호명한 작품이 없다. 비약과 시 사이에는 ‘닮음’이라는 다리가 있다. 특히, 서로 어울리지 않는 두 의미가 한 작품 안에서 서로를 밀어내면서도 끝내 함께 존재하도록 만드는 스킬이 적용되고 있다. 또한 평범한 풍경을 다르게 볼 줄 아는 예리한 시선이 공통으로 빛을 발하고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순수한 신비평의 관점에서는 작가의 전기나 창작 의도를 가능한 한 배제하고 사진과 문자 사이에서 형성되는 긴장·역설·아이러니·상징·유기적 통일성 등을 읽어내는 묘책을 탐사해고자 한다.
Ⅱ. 풍경을 詩로 바꾸는 세 가지 묘책
디카시를 흔히 ‘사진에 짧은 시를 붙이는 문학’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이는 디카시의 외형을 설명할 수는 있어도 그 미학적 발생 원리까지 설명하지는 못한다. 사진과 문자가 한 화면 안에 놓였다고 해서 그것이 저절로 시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진이 풍경을 보여준다면 시는 그 풍경에서 아직 보이지 않는 것을 발생시켜야 한다. 그러므로 좋은 디카시의 출발점은 아름다운 풍경을 발견하는 데만 있지 않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사진과 문자 사이에 어떤 거리를 만들어낼 것인가’에 있다.
필자가 생각하는 디카시 창작의 기본 과정은 다음과 같다. ①풍경을 본다. → ②풍경에 질문한다. → ③관계를 뒤집어본다. → ④문자를 발생시킨다. → ⑤ 독자가 그 둘 사이의 여백을 건넌다. 이러한 창작과정 중 어느 한 단계에서라도 장애가 발생하면 디카시 쓰기는 망치는 일이 될 것이다.
결국, 사진 역시 의미를 완성하지 않는다. 문자도 정답을 제공해서는 안 된다. 사진은 단서를 제공하고, 문자는 그 단서를 변형한다. 그리고 사진과 문자 사이에 생긴 틈을 독자가 스스로 건너면서 제3의 의미를 만들어내야 한가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장병연의 「직업병」, 소하의 「무성영화처럼 슬픔이 커졌다」, 김사륜의 「빗자루」는 매우 흥미로운 비교 대상이다. 세 작품 모두 일상에서 쉽게 지나칠 수 있는 풍경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풍경을 시로 바꾸는 방식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직업병」은 한 사물의 형상을 전혀 다른 삶의 세계로 옮겨놓는다. 「무성영화처럼 슬픔이 커졌다」는 작은 자연현상을 고래와 우주의 비극으로 확장하면서 ‘소리 없는 울음’이라는 역설을 만들어낸다. 빗자루」는 사진 속 사물의 이름을 바꿈으로써 사물의 존재방식과 삶의 의미까지 전복한다.
본고에서는 이를 각각 전이의 묘책, 확장과 역설의 묘책, 명명과 전복의 묘책이라 부르고자 한다.
2-1. 전이의 묘책 : 보이는 것을 쓰지 말고 닮은 세계를 불러온다
아버지는 헤파이스토스의 후예였다
달구어진 쇠로 인생을 조련 하였다
수많은 호미와 낫이 밥과 등록금으로 주물 되는 동안
그는, 망가지고 있었다
-장병연, 「직업병」 전문, 《부안디카시 제8호,2025>
사진의 중심에는 오래된 나무의 깊은 공동(空洞)이 놓여 있다. 검고 깊게 파인 내부는 상처이거나 오랜 부식의 흔적처럼 보인다. 그러나 문자가 개입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나무의 구멍으로 머물지 않는다. 대장간의 화덕으로 변한다. 여기에서 첫 번째 창작의 묘책이 발생한다. 사진 속 사물의 이름을 그대로 반복하지 않는 것이다.
나무의 공동을 단순히 ‘상처 난 나무’라고 표현한다면 사진과 문자는 거의 겹쳐진다. 사진이 이미 보여준 것을 문자가 설명하는 순간 의미의 긴장은 사라진다. 그러나 이 작품은 시각적 유사성을 발판 삼아 전혀 다른 의미의 세계로 건너가며 다음과 같이 전이되고 있다.. < 나무의 공동→ 화덕→ 대장간→ 대장장이→ 아버지>. 즉 하나의 시각적 형상이 연쇄적으로 다른 의미 영역으로 전이되는 것이다.
첫 행, “아버지는 헤파이스토스의 후예였다”는 이러한 의미 전환을 결정적으로 수행한다. 헤파이스토스는 불과 대장장이의 신이다. 따라서 사진 속 검은 공동은 이제 불을 품었던 화덕의 기억을 획득한다. 그러나 이 작품의 힘은 신화적 비유 그 자체에만 있지 않다.보다 중요한 것은 작품 내부에서 일어나는 역전이다.아버지는 쇠를 달구고 두드려 호미와 낫을 만들었다. 그 호미와 낫은 다시 ‘밥’과 ‘등록금’으로 변한다.
여기에는 또 하나의 변환 구조가 숨어 있다. <쇠 → 농기구 → 노동 → 밥과 등록금 → 자식의 성장>의 전이구조다. 그런데 이러한 상승의 끝에서 갑작스러운 반전이 일어난다. 그는, 망가지고 있었다. 아버지는 쇠를 조련했지만 정작 조련당한 것은 자신의 육체였다. 쇠는 새로운 도구로 태어났으나 인간은 점점 망가졌다. 가족의 삶은 채워졌으나 아버지의 몸은 비워졌다. 바로 이곳에서 신비평이 주목했던 역설(paradox)과 긴장(tension)이 발생한다.
이러한 전이구조를 통해 단단한 쇠와 망가지는 육체, 생산과 소진, 자식의 성장과 아버지의 쇠락이라는 대립항들이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하나의 작품 안에서 팽팽하게 버틴다. 그리고 다시 사진으로 돌아가면 나무의 공동은 새롭게 보인다. 처음에는 화덕처럼 보였던 검은 공동이 이제는 평생 가족을 위해 자신을 태우고 난 아버지의 몸처럼 읽힌다. 사진이 문자를 낳았지만, 다시 문자가 사진을 바꾸어버린 것이다.
따라서 「직업병」에서 얻을 수 있는 첫 번째 묘책은 분명하다. 보이는 것을 쓰지 말고, 그것과 닮은 다른 세계를 불러오자는 애기다. 시인은 사물의 이름을 받아 적는 사람이 아니라 사물 속에 숨어 있는 또 하나의 관계를 발견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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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확장과 역설의 묘책 ― 보이지 않는 울음을 들리게 하라
폐그물에 걸린 고래 한 마리
신음소리 알알이 우주로 퍼져 나간다
놀란 달이 서둘러 달려오는 저녁
서쪽 하늘가로 별똥별 하나 쓰러진다
온 우주가 듣는데 나만 못 듣는 울음
- 소하, 「무성영화처럼 슬픔이 커졌다」 전문, 《부안디카시 제8호,2025>
사진에는 거미줄에 걸린 노란 낙엽 한 장이 있다. 주변에는 작은 물방울들이 맺혀 있다. 흔히 아름답다고 말할 법한 자연의 미세한 풍경이다. 그런데 시인은 사진 속 사물의 실제 이름을 거의 모두 지워버린다. 낙엽은 고래가 되고, 거미줄은 폐그물이 되고, 물방울은 신음소리가 된다. 여기에서 첫 번째 의미의 폭발이 일어난다. 그러니까 사진 속 작은 자연현상이 갑자기 바다의 거대한 비극으로 확대된다.
하나의 작은 풍경이 바다를 지나 우주까지 팽창한다. 이것이 이 작품의 첫 번째 묘책인 확장이다. < 낙엽→ 고래, 거미줄→ 폐그물, 물방울→ 신음, 저녁 하늘→ 우주>와 같이 확장되고 있다. 그러나 작품을 한층 깊게 만드는 것은 제목이다.‘무성영화’란 본질적으로 소리가 없는 영화다. 그런데 본문은 온통 소리로 가득하다. 고래가 신음하고, 그 신음은 우주로 퍼지고, 온 우주가 그것을 듣는다.
따라서 < 무성(無聲) ↔ 신음소리, 침묵 ↔ 우주적 울음, 들리지 않음 ↔ 온 우주가 들음>과 같이 변주하며 제목과 본문 사이에는 강렬한 역설이 형성된다. 이 역설적 긴장이야말로 이 작품을 단순한 생태적 알레고리에서 시적 구조물로 끌어올리는 중요한 힘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마지막 행이다. “온 우주가 듣는데 나만 못 듣는 울음”이 결구를 구성하는 한 행에 이르면 작품의 방향이 다시 뒤집힌다. 처음에 독자의 시선은 폐그물에 걸린 고래에게 향한다. 우리는 고래를 연민하게 된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시적 질문은 고래에게서 인간에게 이동한다. 달은 듣는다. 별도 듣는다. 우주도 듣는다. 그런데 ‘나’만 듣지 못한다.
여기에서 진정한 비극은 고래의 죽음만이 아니다. 듣지 못하는 인간의 감각이다. 따라서 제목의 ‘무성’은 고래가 소리를 내지 못한다는 뜻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이 그 울음을 듣지 못하기 때문에 세계가 ‘무성영화’가 되어버린다는 역설적 독법도 가능해진다.
사진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낙엽도 침묵하고, 거미줄도 침묵하며, 물방울도 침묵한다. 그런데 문자는 그 침묵을 우주적 비명으로 바꾼다. 이 작품의 창작적 묘책은 바로 여기에 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들리지 않는 것을 들리게 만드는 것. 디카시는 시각예술과 언어예술의 결합이지만, 뛰어난 작품에서는 사진에 없는 청각·촉각·시간까지 문자에 의해 발생한다. 사진은 침묵하고 있는데 독자는 울음을 듣는다. 바로 이 모순(矛盾)이 바로 기카시다.
2-3. 명명(命名)과 전복의 묘책 ― 사물에게 다른 이름을 주어라
오늘의 여정 후회 없이 쓸었습니다
혼신을 다해 쓸었기에
온몸에 충만함이 몰려들었습니다
몽당빗자루 되어지지만
부끄럽지 않은 하루입니다
- 김사륜, 「빗자루」 전문, 《부안디카시 제8호,2025>
사진의 중심에는 붉은 맨드라미 한 송이가 서 있다. 그런데 제목은 뜻밖에도 〈빗자루〉다. 시적 사건은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시작되었다. 맨드라미를 맨드라미라고 부르지 않고 ‘빗자루’라고 명명하는 순간, 사진 속 사물의 정체가 바뀐다. 독자는 자연스럽게 질문하게 된다. 왜 맨드라미가 빗자루인가? 바로 이 질문이 중요하다. 사진에 맨드라미가 있다고 제목까지 ‘맨드라미’라 붙였다면 사진과 문자의 거리는 거의 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빗자루’라는 제목은 사진과 충돌한다. 그 충돌이 독자를 작품 안으로 끌어들인다.
그리고 제목의 ‘빗자루’는 첫 행의 동사와 연결된다. “오늘의 여정 후회 없이 쓸었습니다” 이때 ‘쓸다’는 단순한 청소 행위를 넘어선다. 하루를 쓸고, 시간을 쓰고, 자신을 소진하는 행위가 중첩된다. < 빗자루 → 쓸다 → 닳다 → 몽당빗자루 → 하루를 온전히 사용한 존재>로 전이되고 있다. 제목 하나가 작품 전체의 의미망을 지배한다. 특히 중요한 시어는 ‘몽당빗자루’다. 몽당빗자루는 닳은 사물이다. 일반적인 가치체계에서 닳는다는 것은 감소이며 손실이고 쇠퇴다.
그러나 작품은 그것을 정반대로 읽는다. “온몸에 충만함이 몰려들었습니다”그리고 “부끄럽지 않은 하루입니다” 소진이 충만으로 바뀐다. 닳음이 완성으로 바뀐다. 결핍이 자긍으로 전환된다. 비워졌기 때문에 오히려 가득 찬다. 이 역설이 작품의 중심축이다. 사진 속 맨드라미 역시 붉게 충만하게 피어 있지만 저녁빛 속에서 하루의 끝을 맞고 있다. 따라서 사진에는 이미 ‘충만과 소진’이라는 이중성이 잠재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시인은 그것을 ‘빗자루’라는 전혀 다른 이름으로 호출했을 뿐이다.
여기에서 세 번째 묘책을 얻는다. 제목은 사진의 이름표가 아니라 사진의 의미를 뒤집는 첫 번째 기표여야 한다. 좋은 제목은 작품을 설명하지 않는다.오히려 질문을 발생시킨다.
Ⅲ. 세 편의 디카시에서 읽는 창작의 기술
3-1. 세 작품은 모두 사진을 한 번 배반한다
세 작품을 한자리에 놓으면 놀라운 공통점이 발견된다. 사진 속 사물을 문자에서 그대로 호명한 작품이 없다. 「직업병」은 나무의 공동을 화덕으로 바꾼다. 「무성영화처럼 슬픔이 커졌다」는 낙엽을 고래로 바꾼다. 「빗자루」는 맨드라미를 빗자루로 바꾼다. 이것을 ‘사진의 배반이요 시적 비약’이라 부를 수 있다. 물론 사진을 버린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사진에 충실하기 위해 사진의 표면적 의미를 한 번 배반하는 것이다. 여기에 역설이 있다. 사진에 충실하려면 때로 사진에서 멀어져야 한다. 사진을 그대로 설명하면 사진 이상으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세 작품의 구조를 압축하면 다음과 같다. 「직업병」에서는 ‘전이의 묘책’을 읽을 수 있다. 즉, < 나무의 공동 → 화덕→ 대장장이→ 아버지→ 가족을 위해 자신을 소모한 생애>로 전이되고 있다. 이어서 「무성영화처럼 슬픔이 커졌다」는 ‘확장과 역설의 묘책’을 시사해준다. 즉, < 낙엽→ 고래→ 폐그물→ 신음→ 우주→ 듣지 못하는 인간>으로 「빗자」에서는 명명과 전복의 묘책으로 < 맨드라미→ 빗자루→ 쓸다→ 닳다→ 몽당빗자루→ 후회 없는 하루> 로 전이시키고 있다. 서로 다른 작품이지만 이들 사이에는 하나의 공통된 창작 원리가 있다. 그것은 ‘보이는 것에서 출발하되 보이는 것에 머물지 않는다’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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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비약과 시 사이에는 ‘닮음’이라는 다리가 있다
그렇다면 사진과 문자는 멀수록 좋은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아무런 관련도 없는 의미를 사진에 가져다 붙이면 그것은 시적 비약이 아니라 자의적 관념에 그칠 위험이 있다. 세 작품이 설득력을 갖는 까닭은 의미의 도약 아래에 최소한의 시각적 근거가 있기 때문이다.
나무의 공동과 화덕은 닮아 있다. 거미줄에 걸린 낙엽과 그물에 걸린 고래 역시 형태적 연상을 가능하게 한다. 붉은 맨드라미의 형상은 빗자루를 연상시킨다. 따라서 세 작품에는 공통적으로 다음의 구조가 존재한다.
<시각적 닮음 → 의미의 전환 → 정서적·철학적 확장> 의 구조를 지니는데
이 구조가 중요한 것은 첫 단계가 없으면 상상은 공중에 뜬다. 둘째 단계가 없으면 사진 설명에 머문다. 셋째 단계가 없으면 단순한 말장난이나 재치에 그친다. 좋은 디카시는 이 세 단계를 거의 동시에 수행한다.
사진은 현실의 닻이고 문자는 상상의 돛이다. 닻만 있으면 배는 움직이지 못한다. 돛만 있으면 배는 표류한다. 좋은 디카시는 둘의 긴장 속에서 항해한다.
3-3. . 신비평으로 읽는 디카시 ― 사진까지 하나의 텍스트다
신비평은 작품을 작가의 전기나 창작 의도의 증명물로 읽기보다 작품 자체의 구조, 긴장, 역설, 아이러니, 상징과 유기적 통일성을 중시한다. 이러한 관점은 디카시를 읽는 데 특히 유효하다. 다만 디카시에서는 ‘텍스트’의 범위를 문자에만 한정해서는 곤란하다. ‘사진 + 제목 + 문자 + 여백’이라는 전체를 하나의 확장된 텍스트로 읽을 필요가 있다.
그렇게 보면 「직업병」에는‘단단함 / 망가짐, 생산 / 소진, 가족의 성장 / 아버지의 쇠락’이라는 대립항이 「무성영화처럼 슬픔이 커졌다」에는 ‘침묵 / 신음, 미세한 낙엽 / 거대한 고래, 아름다움 / 죽음, 무성 / 우주의 울음, 들음 / 듣지 못함“이 이 있다. 「빗자루」도 마찬가지다. ‘충만 / 소진, 피어남 / 닳아감, 몽당 / 완성, 결핍 / 자긍’이 있다. 이처럼 좋은 작품은 이러한 대립항 중 어느 하나를 제거하여 의미를 단순화하지 않는다. 서로 반대되는 두 힘을 한 작품 안에서 끝까지 버티게 한다. 바로 그 긴장에서 시적 의미가 발생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창작의 묘책’은 기발한 비유를 찾아내는 잔재주를 뜻하지 않는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 두 의미가 한 작품 안에서 서로를 밀어내면서도 끝내 함께 존재하도록 만드는 기술, 그것이 보다 본질적인 묘책이다.
3-4.. 사진은 단서를 주고 문자는 그 단서를 변형한다
다시 디카시의 기본 원리로 돌아가 보자. 1) 사진은 의미를 완성하지 않는다. 2) 문자도 정답을 제공하지 않는다. 3) 사진은 단서를 제공한다. 4) 문자는 그 단서를 변형한다. 5) 둘 사이에 여백이 생긴다.6) 그리고 독자가 그 여백을 건넌다.
「직업병」에서 사진은 ‘구멍’을 보여주지만 문자는 ‘화덕’을 호출한다.「무성영화처럼 슬픔이 커졌다」에서 사진은 ‘낙엽’을 보여주지만 문자는 ‘고래’를 호출하고 있다. 「빗자루」에서 사진은 ‘맨드라미’를 보여주지만 제목은 ‘빗자루’를 호출한다.
그러면 독자는 묻게 된다. 왜 화덕인가? 왜 고래인가? 왜 빗자루인가? 바로 이 ‘왜?’가 발생하는 순간이 디카시의 시적 발생점이다. 설명은 질문을 없앤다. 시는 질문을 남긴다. 그런 점에서 사진과 문자의 관계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완전한 일치다. 사진이 이미 보여준 것을 문자가 다시 말하면 독자가 건너야 할 여백이 사라진다. 그러나 둘의 거리가 지나치게 멀어져도 곤란하다. 독자가 건널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좋은 디카시란 독자가 건널 수 있을 만큼 가깝고, 건너야 할 이유가 생길 만큼 먼 거리를 만드는 문학이다.
3-5. 세 가지 묘책, 세 가지 질문
세 작품에서 발견한 창작 원리를 실제 창작의 질문으로 바꾸어보면 더욱 선명해진다. 첫째, 이것은 무엇과 닮았는가? 「직업병」이 던지는 질문이다. 사물의 실제 이름을 잠시 지우고 형상만 바라본다. 그 순간 나무의 구멍에서 화덕이 보일 수 있다. 사물에서 다른 사물로 건너가는 전이의 묘책이다. 둘째, 이것을 가장 먼 곳까지 밀어내면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 「무성영화처럼 슬픔이 커졌다」가 보여주는 방법이다. 낙엽 하나를 고래까지 밀어내고, 거미줄 하나를 바다까지 밀어내며, 물방울 하나를 우주의 신음까지 확장한다. 그러면서 침묵과 울음을 충돌시킨다. 미세한 것을 거대한 의미로 확장하고, 그 안에 역설을 심는 묘책이다. 셋째, 이것에게 다른 이름을 붙이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빗자루」의 방법이다. 맨드라미에게 ‘빗자루’라는 이름을 붙이는 순간 꽃은 식물에서 행위하는 존재로 변한다. 그리고 ‘쓸다―닳다―충만하다’라는 새로운 의미망이 생겨난다. 명명을 통해 사물의 관계를 전복하는 묘책이다. 결국 좋은 디카시를 쓰기 위해 필요한 것은 특별한 풍경만이 아니다. 평범한 풍경을 다르게 볼 줄 아는 시선이다.
Ⅳ. 맺으면서
카메라는 풍경의 표면을 붙잡는다. 그러나 시인은 그 표면에 머물지 않는다.나무의 구멍에서 평생 자신을 태운 아버지를 보고, 거미줄에 걸린 낙엽에서 폐그물에 걸린 고래의 울음을 듣고, 저녁 빛 속 맨드라미에서 하루를 온전히 써버린 한 존재의 당당함을 읽어낸다. 이것이 세 작품이 보여주는 창작의 묘책이다. 묘책은 화려한 수사나 기발한 언어유희가 아니다. 익숙한 관계를 낯설게 하고, 사물의 이름을 잠시 지우고, 사진이 끝나는 자리에서 또 하나의 의미를 발생시키는 것이다. 필자가 퇴고 중인 디카시 평론서 『풍경을 넘어 詩가 되는 순간』에서도 직시하고 있듯이, “풍경을 찍는 것은 카메라지만, 풍경의 뒤편을 찍는 것은 시인의 생애다.”그러나 작품이 독자에게 건너간 뒤에는 그 생애마저 작품 뒤로 물러나야 한다. 남는 것은 사진과 문자다. 그리고 둘 사이의 팽팽한 거리다. 독자는 그 거리를 건넌다. 나무에서 화덕으로, 화덕에서 아버지에게로. 낙엽에서 고래로, 고래의 신음에서 듣지 못하는 인간에게로. 맨드라미에서 빗자루로, 몽당빗자루에서 한 생의 충만으로. 그리고 독자는 다시 처음의 사진으로 돌아온다. 그때 나무는 더 이상 처음의 나무가 아니다. 낙엽도 처음의 낙엽이 아니다. 맨드라미 또한 처음 보았던 꽃이 아니다. 사진은 그대로인데 보는 사람의 인식이 달라졌다. 바로 그 지점에서 풍경은 사진을 넘어 시가 된다. 좋은 디카시는 사진을 바꾸지 않는다. 다만 그 사진을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는 다시 볼 수 없게 만든다. 그것이야말로 풍경을 시로 바꾸는 가장 오래되고도 새로운 창작의 묘책일 것이다. 풍경을 넘어 진정한 의미의 디카시가 되는 순간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