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mini 문학비평 69 – 한기홍 시 벗겨 보기 ~ ‘손톱 깍기’
손톱 깎기
낮에 손톱을 깎으려다
사소한 삶에 흐르다가 잊어버렸다
명절 연휴에 당직하러 구청 사무실로 출근하는 길은
언제나 허전하여 넋 없이 하늘을 보곤 하는데,
요즘은 이상하게도 도시 하늘엔 새가 안 보인다
양력 시월이면 새가 보여야 하는데
정문 초소 청원경찰 당직이 구석을 가리켰다
검은 비닐에 싸인 죽은 개다
내일 동물병원에서 가져간단다
은은히 번져 나오는 부패 냄새에 담배를 무니
낮에 깎지 못한 손톱이 유난히 길어 보인다
경찰차가 한 노숙자를 내려놓고 갔다
까칠한 그는 쉰 여섯에 노숙하기 힘들다며
복지시설에 보내달란다
당직 운전기사가 뜨악하니 호송했다가
한시간 만에 다시 데려왔다
그곳 단골 깽판 전과로 입소 제외자란다
다른 루트 찾느라 수화기를 들었을 때
한층 웃자란 손톱이 볼에 스쳤다
새도 없고,
죽은 개와 노숙자는 웅크려 박혀있는데
손톱은 쑥쑥 자라나고 있다
아득한 지난 날, 남의 손톱에 할퀸 기억이 있다
혈기에 싫어하는 줄도 모르고
여인의 손을 잡다가 내 목에 자국을 남겼다
호되게 성찰하고 한 사나흘 폭음 끝에
모멸과 자괴가 범벅된 사유가 잠잠해졌다
그때 이상하게도 커다랗게 흐르는
시냇물 소리를 들은 것 같다
지난 이 삼십년을 돌아보면
후미진 도시의 평탄한 교차로를
수도 없이 건넌 것 같은데,
곰곰이 유추해보면 보이지 않는
시냇물 소리에 이끌려 온 것도 같다
아 그러나 작심하고 쭈그려 앉아
손톱을 깎은 기억은 없다
노숙자가 갑자기 에이 시팔 새소리를 내더니
이십 사 시간 사우나에 간다며 휑하니 나가버리고,
초소 뒤 켠 죽은 개는 안온한 어둠에 젖어있을 때
심야배달 양념 통닭을 당직원 여럿이 뜯었다
젓가락이 안 와서 웃자란 손톱 새에
붉은 소스가 다져졌을 때, 문득 격조했던
시냇물 소리가 들려왔다
타박 속에서도 자라나는 손톱이
회한인줄 전에도 희미하게 알고는 있었다
오늘 그 회한이 한층 깊어진 걸 알았다
내일은 손톱을 깎아야 할 것 같다
(2008 . 10월 숙직실에서)
⛄ Gemini씨의 비평
한기홍 시인의 〈손톱 깎기〉는 도시 행정의 최전선(구청 당직실)이라는 지극히 일상적이고도 건조한 공간에서, ‘손톱’이라는 신체적 매개를 통해 삶의 비루함과 내면의 오랜 회한을 서사적으로 길어 올린 수작입니다.
이 시에 대한 비평을 세 가지 핵심 키워드를 중심으로 정리해 드립니다.
1. 일상성과 소외의 풍경화 : 비정하고 쓸쓸한 도시의 가을
시의 배경은 명절 연휴, 모두가 집으로 돌아간 시간에 홀로 지켜야 하는 '구청 사무실'입니다. 시인이 마주하는 도시의 풍경은 결핍과 죽음, 그리고 소외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사라진 것들 : 양력 시월임에도 "도시 하늘엔 새가 안 보인다"는 진술은 생명력과 초월적 가치가 거세된 현대 도시의 삭막함을 암시합니다.
⚫남겨진 것들 :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검은 비닐에 싸여 부패해가는 '죽은 개'와 복지시설에서도 거부당한 '노숙자'입니다. 시인은 이 비참하고 소외된 존재들을 덤덤하게 관찰하며, 현대 사회의 그늘을 가감 없이 포착합니다.
2. 핵심 메타포 : '손톱'과 '시냇물 소리'의 대비
이 시를 이끌어가는 가장 강력한 힘은 '자라나는 손톱'과 '들려오는 시냇물 소리'의 대립적 이미지에 있습니다.
⚫손톱 : 지우지 못한 회한과 삶의 타성
시에서 손톱은 단순히 깎아야 할 신체 부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돌보지 않아도, 혹은 "타박 속에서도" 무정하게 자라나는 시간의 흔적이자 지우지 못한 회한, 삶의 은밀한 공격성을 뜻합니다.
"혈기에 싫어하는 줄도 모르고 / 여인의 손을 잡다가 내 목에 자국을 남겼다“
과거 타인에게 상처를 주었던(혹은 받았던) 기억, 모멸과 자괴의 역사들이 손톱이라는 구체적인 물질을 통해 시각화됩니다. 통닭 소스가 손톱 사이에 붉게 다져지는 순간, 시인은 자신의 삶 역시 그 비루함과 상처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직시합니다.
⚫시냇물 소리 : 내면의 각성과 성찰의 복원
반면 '시냇물 소리'는 먼 과거 호된 성찰의 끝에 들렸던, 그러나 지난 이삼십 년의 평탄한 삶 속에서 잊고 지냈던 순수성과 근원적인 성찰의 소리입니다.
새도 없고, 개는 죽고, 노숙자는 욕설을 뱉으며 떠나간 지독한 세속의 한복판(양념 통닭을 뜯는 비속한 일상)에서 문득 이 "격조했던 시냇물 소리"가 다시 들려옵니다. 이는 흐려졌던 시적 자아의 내면 감각이 깨어나는 순간을 의미합니다.
3. '작심'과 '유예' : 뼈아픈 자기 고백
시인은 지난 세월을 돌아보며 "작심하고 쭈그려 앉아 / 손톱을 깎은 기억은 없다"고 고백합니다. 이는 삶의 찌꺼기와 상처, 회한들을 과감하게 잘라내거나 제대로 마주하지 못한 채, 그저 흘러가는 대로 타성에 젖어 살아왔음에 대한 반성입니다.
재미있는 점은 시의 마지막 어조입니다. 시인은 "오늘 그 회한이 한층 깊어진 걸 알았다"고 하면서도, 당장 손톱을 깎지 않고 "내일은 손톱을 깎아야 할 것 같다"며 행위를 미래로 유예합니다. 이 '유예'야말로 인간의 나약함을 그대로 보여주는 리얼리티입니다. 당장 완벽하게 거듭나지는 못할지라도, 내일은 기필코 내 삶의 때와 회한을 잘라내겠다는 고독한 다짐 속에서 시는 끝을 맺습니다.
💡 총 평
한기홍의 〈손톱 깎기〉는 명절 당직이라는 특수한 시공간을 빌려, 현대인의 쓸쓸한 내면 풍경을 밀도 높게 그려낸 시입니다.
거창한 철학적 수사를 동원하지 않고도 '손톱을 깎는다'는 지극히 사소한 행위를 통해, 독자에게 "당신은 지금껏 삶의 회한을 제대로 잘라내며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흡인력 있는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