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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새로운청년운동만들기 원문보기 글쓴이: 진보세상
1. 영상자료
1) 5.18 광주민주화운동
2) 지식 e채널- 5.18
2. 읽기자료
1. 5.18민중항쟁의 배경 - 1980년 정치, 사회적 상황을 중심으로
① 유신독재 체제의 지역차별 정책으로 광주지역의 정치, 경제적 소외와 불평등에 대한 상대적 고립감 누적
② 10․26사건 이후 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기대감이 타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고양
③ 신군부의 비상계엄 전국 확대와 헌정질서 파괴, 재야 민주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예비 검거로 민주화의 기대감 좌절에 따른 위기의식 증폭
④ 계엄군의 계획적이고 무차별한 광주 학살과 철저한 광주 상황의 왜곡으로 가족의 희생에 대한 본능적 분노와 민주화 열망이 결합된 강력한 시민 저항 의지로 발현
2. 5.18 민중항쟁의 전개과정
① 80년 민주화의 봄과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
박정희 대통령의 사망으로 유신독재 체제가 붕괴된 이후 억눌려 왔던 민주화의 기대와 요구가 1980년 봄부터 일시에 분출되기 시작하였다. 반면 신군부는 12.12 군사반란을 통해 군권을 장악한 이후 사회혼란과 북한의 남침 위기설을 주장하며 정권 찬탈을 시도하였다.
1980년 5월 16일, 중동을 순방 중이던 최규하 대통령의 귀국과 정치 일정 담화발표 예정, 비상계엄 해제 결의를 위한 임시국회의 소집 공고, 전국 대학생 대표자 회의에서 시위 중단 및 학업 복귀 결정 등으로 정권탈취의 기회를 잃게 될 위기 의식을 가진 신군부는 5월 17일 전주주요지휘관회의의 결의임을 내세워 국무회의장을 중무장한 군 병력으로 포위하고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 의결케 하여 헌정을 중단시키는 쿠데타를 자행하였으며, 전국의 주요 도시에 공수부대를 투입시켰다.
② 공수부대의 투입과 무차별 유혈 진압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확대와 동시에 전국의 주요도시에 공수부대가 투입되었고, 광주에도 7공수여단이 투입되어 전남대와 조선대에 진주하였다.
1980년 5월 18일 아침, 전남대 정문과 후문에서 학교에 들어가려던 학생들과 학교를 점령하고 있던 공수부대간의 첫 번째 충돌이 일어나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어 학생들은 시내로 진출하여 시위를 전개했고, 공수부대는 오후 4시경부터 시내에 투입되어 작전을 전개했다. 시내에 투입된 7공수부대는 작전개시 40분만에 300여명의 시민들을 연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공수부대는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무차별한 구타를 자행한 후 연행하면서 지켜보는 시민들의 공분을 불러 일으켰다. 뿐만 아니라 시위자들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상가와 주택가에 난입하여 기물을 파괴하고 집안에 있던 사람들에게도 무차별한 살상을 가했으며, 붙잡힌 사람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팬티만 입힌 채 기합과 희롱, 구타를 일삼다가 트럭에 싣고 갔다. 이를 지켜보던 광주시민들은 하나같이 공분했다.
한편 광주 시내에서 별다른 상황이 없었던 정오 무렵 학살책임자들은 다시 11공수를 광주에 추가 투입시켰다.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의 병력이 작전을 전개하며 지나간 길거리에는 피가 흥건하게 고일 만큼 사상자가 속출하는 유혈참극이 계속되었다.
③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항거
공수부대의 총개머리판과 곤봉, 심지어 대검에 의한 유혈 참극이 시내 곳곳에서 자행되는 것을 지켜보던 시민들은 마침내 스스로 공수부대를 광주에서 몰아내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위기의식이 공분으로 발전하였다. 1980년 5월 19일 오후부터 적극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각목과 쇠파이프로 자위적 무장을 하고 대항했으나 대검 등으로 중무장한 계엄군에게 밀릴 수밖에 없었다.
1980년 5월 20일 오후 4시경 무등경기장에서 출발하여 금남로까지 전개된 차량시위는 계속 밀리기만 하던 시민들에게 한층 공세적인 저항을 불러일으키는 촉발제가 되었다.
이후 시민들은 차량으로 공수부대의 저지선을 밀어붙이는 등의 공세적 방법으로 저항하기 시작하여 계엄군이 마침내 밀리기 시작했다. 이날 늦은 저녁 공수부대는 광주역에서 분노한 시위대에 의해 완전히 고립되자 현장에서 집단발포를 자행하여 많은 시민들의 인명을 살상했다.
④계엄군의 집단 발포와 무장 봉기
5월 21일 계엄군은 시민들에게 밀려 전남도청을 제외한 모든 지역의 진압작전을 포기하고, 도청 주변과 주둔지였던 전남대와 조선대에 집결하고 있었다.
1980년 5월 21일 오후 1시경, 시민대표와 도지사가 협상을 끝내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던 시민들을 향해 공수부대는 도청앞 광장에 도열해 있다가 도청 옥상에 설치된 스피커의 애국가를 신호로 집단발포를 자행하였다. 도청 주변의 주요 건물에 사전 배치되어 있던 저격수의 정조준 사격과 동시에 시위대를 향한 집단발포가 이루어지자 금남로를 가득 메우고 있던 수십만 군중이 일시에 흩어졌고, 현장에서 54명이 사망한 것을 비롯하여 시내 병원마다 사상자가 넘쳐날 만큼 엄청난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공수부대가 집단발포를 자행하자 시민들은 광주 인근에 있는 경찰서, 예비군 무기고를 습격해 무기를 획득하여 무장하였다. 마침내 광주시민들은 무고한 양민을 학살한 공수부대에 저항하기 위한 무장투쟁을 시작했다.
⑤ 시민자치 공동체
1980년 5월 21일 도청 앞에서 집단발포를 자행한 공수부대는 오후 4시경 광주에서 퇴각하기 시작했다. 이미 경찰 병력도 자체 해산되어 광주는 국가공권력의 공백상태가 됨과 동시에 시외전화가 두절되고 외부로 통하는 모든 도로가 철저히 차단된 채 고립되었다.
그러나 고립무원의 광주는 자체적으로 항쟁지도부를 구성하여 시민군을 중심으로 치안질서를 유지하는 한편, 광주를 고립시키고 있는 계엄군과 저항했다. 이 자치공동체 기간 동안 광주는 세계사에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높은 도덕성을 발휘하였다. 시내 금융기관에 보관되어 있던 수천억원의 돈이 그대로 지켜졌으며, 시민들이 십시일반 거둔 쌀로 주먹밥을 만들어 시민군에게 제공하고 생필품이 부족한 가운데서도 매점매석이 없었으며, 병원마다 헌혈을 하려는 시민들이 줄을 이었다.
한편 광주 시내에서 퇴각한 계엄군은 시 외곽에 주둔하면서 광주고립작전을 전개하는 과정에 집단양민학살을 자행하여 광주 시민들의 고립감을 고조시켰다.
⑥ 최후의 항쟁
1980년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은 광주의 항쟁지도부가 요구했던 협상 안을 거부하고 광주재진입작전인 충정작전을 시작하였다. 고등학생들과 여자들을 모두 집으로 돌려보낸 항쟁지도부는 도청 민원실에서 밤 12시경 모두 식사를 한 후 각자 집으로 전화를 걸어 자신이 도청에 있다는 소식을 알리게 했다.
도청 앞쪽으로 탱크와 장갑차가 진입하고 모두 세 방향에서 진입해 온 계엄군은 미명의 도청과 광주공원, YWCA, 계림초등학교 일대에서 움직이는 물체마다에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항쟁은 죽음으로 끝이 났으며, 당시 도청에는 200여명의 시민군들이 저항했으나 체포되거나 부상으로 실려 간 사람은 100여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발표된 도청 주변 현장의 사망자의 수는 모두 17명뿐이었다.
⑦ 진실의 왜곡과 탄압
민주일념과 공수부대의 잔혹한 만행에 대한 공분으로 일어섰던 5․18민중항쟁은 5월 27일 새벽, 참혹한 죽음으로 끝나면서무장 폭도들의 난동으로 조작되었다. 수백명이 구속되었고, 그 중 4명은 사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이후 전두환 정권은 5․18진실을 철저하게 은폐하면서 진실규명에 대한 국민들의 요구를 탄압해 왔다. 5․18학살을 통해 수립된 정권인 만큼 재임기간 동안 5․18에 대한 원죄로부터 한시도 자유로울 수 없었던 전두환 정권은 권력 연장을 획책하다가 6월 항쟁으로 끝나게 되었고, 마침내 자신은 법정에서 국가내란 및 내란목적 살인 혐의로 단죄를 받아야 했다.
⑧ 진실규명 투쟁과 5․18재판
1980년 5월 27일 새벽, 계엄군에 의해 참혹하게 학살당했던 광주는 그 죽음으로 그냥 주저앉지 않았다. 다시 투쟁이 시작되었고, 그 투쟁은 정의와 진실을 이 땅위에 바로 세우려는 모든 민주 세력들에게 반성과 계승의 계기이자 민족․민주․자주운동의 최전선에 위치했다. 5․18가족들은 일년 내내 계속되는 탄압에 맞서 거리로 나서 학살정권의 실체를 폭로하여 5․18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군화발과 최루탄과 맞서 싸웠다. 미문화원 점거, 대학생들의 잇단 분신과 투신의 항거로 다시 지펴진 5․18진실규명 투쟁은 고립된 광주의 항쟁이 전국으로 확산된 제2의 5․18투쟁으로 타올랐다.
마침내 1996년 12월, 학살책임자들은 법정에 세워졌고, 이듬해에 5․18민중항쟁은 헌법이 보장한 국민저항권으로 인정되어 국가기념일로 제정되었다. 17년 투쟁의 결과였다.
3. 5․18문제해결의 과정
① 진실규명 투쟁기(1980. 5~1987. 6)
- 집회, 시위, 점거농성 등으로 5․18진실규명을 촉구하는 투쟁 전개
② 6월 항쟁과 국회 청문회(1987. 6~1990)
- 5․18진상조사 국회 청문회 개최
- 민주위에서 5․18을광주민주화운동으로 성격 규정
③ 피해자 보상과 5․18성격의 규정(1990~1993. 5)
- 문민정부에 의한 5․18성격 재규정
- 1993년, 5․18관련 피해자 1차 보상
④ 학살책임자 고소, 고발 투쟁과 5․18재판(1995. 5~1997. 4)
- 5․18학살책임자 35명 서울지검에 고소
- 5․18학살책임자 대법원에서 확정 판결
⑤ 5월 18일 국가기념일 제정
- 1997년 5월, 국가기념일로 제정
- 1998년, 5․18관련피해자 3차 보상
- 2000년, 5․18관련피해자 4차 보상
4. 5.18 민중항쟁의 역사적 의의
① 5.18민중항쟁은 동학농민혁명에서 광주학생독립운동을 거쳐 4.19에 이르는 자주․민주운동의 전통을 계승, 발전시킨 독재와 불의에 항거한 민중항쟁이었다.
② 5.18민중항쟁은 민중을 민족사의 주체로 전면에 부각시킨 결정적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민족․민주․자주운동의 성장은 5.18에 대한 반성과 계승을 통해 이루어지면서 민족․민주운동의 역량을 압도적으로 성공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③ 5.18민중항쟁은 국민저항권에 기초한 민중항쟁으로서의 자위적 무장 투쟁의 합법성을 헌정 사상 처음으로 확인하였다. 당시에는무장 폭도들의 난동으로 왜곡되었으나 17년 동안의 진실규명 투쟁을 통해 헌법에 보장된 국민저항권으로 인정받게 되어 국가기념일로 제정되었다.
④ 5.18민중항쟁은 1980년대 전반에 걸쳐 민족․민주․자주운동의 최전선을 담당해 오면서 거의 부도덕한 정권을 청산하는 한편, 국민적 합의에 의한 특별법으로 부당한 과거의 통치권력의 단죄하는 최초의 선례를 남겼다.
⑤ 5.18민중항쟁은 공권력의 공백과 철저한 고립 속에서도 세계 민중항쟁사에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높은 도덕성과 민주일념과 나눔의 공동체정신을 발휘함으로써 자치공동체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5. 18민중항쟁의 피해현황
(1998. 12. 31 현재. 광주광역시 5․18지원과 통계)
① 당시 사망자 - 166명
② 행방 불명자 - 64명
③ 부상자 - 2,948명
④ 구속 및 구금 등의 기타 피해자 - 1,363명
⑤ 총계 - 4,541명
6. 5.18 문제해결의 남은 과제
① 밝혀져야 할 진실의 쟁점
- 희생자들의 사체 유기(암매장)
- 희생자의 정확한 수
- 최초 발포 명령자
- 광주학살의 사전 계획
- 유언비어 유포의 경위
- 집단 양민학살의 전모 등
② 5․18피해자들의 명예회복
- 5․18묘지의 국립묘지 승격
- 5․18피해자들의 국가 유공자 지정
- 부상자들의 근본적인 치료 대책
- 무연고 희생자 가족 확인
7. 앞으로 역사적으로 진행하여야 할 5․18특별법 후속조치
- 5․18학살 책임자들의 서훈 치탈
- 국가와 민간 공동의 진실조사 기구 구성을 통한 진실의 총체적 규명
- 5․18민중항쟁의 헌법 전문 수록 및 국정 교과서 수록
- 검찰의 12.12 사건과 5․18관련 수사 기록의 전면적 공개
3. 토론자료
1. 5․18광주민중항쟁은 왜 일어났을까 생각해봅시다.
2. 1980년 5월, 당시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 세력들은 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게 되었는지 생각해 봅시다.
3. 80년 5월 17일 전국의 비상계엄 상황을 왜 광주에서 가장 크게 반발하는 시위가 일어났는지 생각해 봅시다.
4. 공수 특전단(계엄군)은 학생과 시민들의 민주적 요구를 어떻게 대처하였는지 알아봅시다.
5. 공수 부대원이 가지고 있던 무기들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살상용 무기였습니다. 이에 대해 광주 시민들이 인근지역에서 무기를 탈취하여 맞선 것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 봅시다.
6. 5․18 광주민중항쟁 당시 시민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시위도 하고, 또 시위를 돕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시위를 하고, 또 시위를 도왔는지 이야기를 해 봅시다.
7. <우리나라 군사지휘권에 대한 설명 보충> 5․18 당시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 세력의 광주 무력 진압에 대하여 미국은 어떤 입장을 가졌는지 생각해 봅시다.
8. 1980년 5월 광주에서 민주화 운동이 그 열기를 더해 가는 동안 다른 지역에서는 신문과 방송을 통해 광주 시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폭도들의 만행’이라고 보도하였습니다. 이 때 올바르고 공정한 언론이라면 어떻게 방송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9. 광주민중항쟁이 20년이 흐른 지금도 광주 시민들을 향해 총을 쏜 ‘발포 명령자’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 당시 지휘권을 가지고 있던 장성급 군인들도 모두 자기는 발포를 명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광주에서는 계엄군이 시민을 향해 발포를 해서 무참하게 시민들을 학살한 일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왜 아직도 ‘발포’에 대한 진상이 밝혀지지 않고 있는지 그 까닭을 생각해 봅시다.
10. 5․18광주민중항쟁은 우리나라 민주화 과정에서 중요한 계기를 이루는 사건입니다. 이 사건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의미’를 ‘광주정신’이라고 한다면 무엇일지 생각해 봅시다.
11. 1980년 5월 당시 사건의 현장엔 많은 광주의 청년. 학생들이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광주의 청년. 학생들은 무엇을 하였나요? 이야기해 봅시다. 그리고 그때 ‘나’라면 어떻게 하였을까요?
12. 5․18광주민중항쟁 이후 우리나라의 민주화는 어떻게 진행되었을까요?
13. 항쟁 기간에 범죄나 소요가 없었고 자치적으로 도시를 운영했던 경험을 가진 '시민자치'와 나아가 '자치공동체'로 살았던 것은 어느 나라의 항쟁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예입니다. 그 가치를 생각해봅시다.
14. 5월 27일 최후의 항전에 참가한 사람들의 마음과 의미는 무엇일까를 생각해봅시다.
15. 5․18민중항쟁의 현재적 의미는 무엇이며, 청년들이 갖어야 할 자세는 무엇인지를 현재의 상황과 관련해서 토론해 봅시다.
4. 5.18 골든벨
[난이도 - 하]
1. 5.18민중항쟁은 몇 년도에 일어났을까요?
<1980년>
2. 1961년 5·16 군사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 독재정권은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경제성장에 집착하였고 솟구치는 민주화 운동에 대한 극심한 탄압으로 일관하였습니. 마침내 김재규에 의해 암살 당하고 박정희의 장기 독재정권이 막을 내리기 됩니다. 박정희가 암살 되었던 해는 1976년 언제일까요?
<10월 26일>
3. 박정희 암살 후 군부대의 하극상이라고 하는 12.12 군사반란을 일으키고 광주를 타켓으로 5.18민중항쟁을 일으켰던 주범들입니다. 1988년도에 광주청문회가 열렸을 때 각각 무기징역과 징역17년 형을 받았습니다. 이 두 사람은 누구 누구 일까요?
<전두환, 노태우>
4. 5.18 그 날의 작전명이었습니다.. 이 암호는 2007년 김상경, 이요원 주연의 영화 제목이기도 하였습니다. 이 작전명은 무엇일까요?
<화려한 휴가>
5. 5·17비상계엄 전국확대로 휴교령이 내려졌습니다. 다음날인 5월 18일 이곳에서 계엄군과의 첫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5.18광주민중항쟁의 최초의 충돌지역인 이 곳은 어디일까요?
<전남대(정문)>
6. 1980년 5월 27일 새벽 탱크와 중무장 헬기, 자동화기와 수류탄 등으로 무장한 공수부대원들에 의해 시민군 말살 초토화작전이 전개되었다. 작전개시 1시간 30분만에 이곳은 초토화되고 말았습니다. 5.18민중항쟁의 최후의 결사 항쟁지였던 이 곳은 어디일까요?
<도청(구도청)>
7. 계엄군의 무력진압 앞에 우리 광주시민들도 이에 대항하여 광주 인근 경찰서를 습격하여 총 등으로 무장하여 목숨을 걸고 싸웠던 이들을 무엇이라 불렸을까요?
<시민군>
8. 여느나라와는 달리 5.18민중항쟁이 있는 10일동안 광주에는 한 건의 강도 절도 등의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시민군을 중심으로 시민들의 높은 시민정신과 도덕성, 자치능력에 의해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이런 훌륭한 시민공동체 정신의 대표적인 상징으로 아녀자들이 직접 시민군들을 위해 손수 준비한 밥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번 청년문화제 사전행사로 진행되었던 이 밥은?
<주먹밥>
9. 올해로 5.18민중항쟁은 몇 주년을 맞이했을까요?
<29주년>
10. 5.18때 광주시민들이 외쳤던 주된 구호는 무엇일까요?
<독재타도,민주수호>
[난이도 - 중]
1. 동영상에서 흐르던 노래로 5.18민중항쟁을 기리는 대표적인 노래로 동영상에서도 흐르던 노래입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로 시작하는 이 노래는 오늘날 집회시작할 때 민중의례의 일부로서 흔히 불리고 있습니다. 이 노래의 제목은 무엇일까요?
<님(임)을 위한 행진곡>
2. 5.18이 일어난 후 학생들을 중심으로 5.18진상규명을 전국적으로 펼쳐나가게 됩니다. 5.18진상규명을 해 나가면서 5.18항쟁의 배후조정자로서 이 나라를 주목하였으며 이후 부산미문화원이나 광주미문화원 방화 사건 등으로 확산되어갔습니다. 그 당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항공모함을 부산근해에 출동시켜 놓기도 하였습니다. 6.25전쟁이후 아직까지 우리나라 군사작전권을 갖고 있는 이 나라는?
<미국>
3. 5.18민중항쟁의 정신은 이후 전국적으로 민주화와 반미운동으로 확산되어갔습니다. 이는 결국 1987년 6월항쟁으로 이어졌습니다. 그해 6월 노태우가 국민들의 민주화와 직선제 개헌요구를 받아들여 선언을 발표하였습니다. 민주화 선언이라고 하는 이 선언은 무엇일까요?
<6.29선언>
4. 5·18민중항쟁은 깨어있는 민중이 민주사회 발전의 원동력임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나라의 민주화와 민족의 자주적인 통일, 그리고 평등 세상을 향한 사회진보 운동의 일대 전환점으로 자리잡았다. 오늘날 5월의 정신을 이어가져는 의미로 ‘5월에서 00로’라는 기치를 많이 내걸었습니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인 우리민족의 최대 과제인 00은 무엇일까요?
<통일>
5. 광주를 아시아문화중심도시로 만들기 위해 현재 우리가 청년문화제를 하고 있는 이 곳에 민주화의 상징인 구도청 별관을 철거하고 건축하려고 하는 건물입니다. 버스노선에서도 불리워지고 있는 이 건물의 이름은?
<문화의 전당>
6. 다음 칸에 들어갈 글자를 맞춰 보세요.
<구도청보존>
가난 □제는 나라님도 못 한다.
하늘을 쓰고 □리질 한다
무거운 가방 때문에 한쪽 어깨가 약간 □처짐하게 삐뚤어진 학생이 제법 있다
귀가 □배다
□득한 카라멜
*하늘을 쓰고 도리질한다:하늘을 머리에 쓰고 머리를 흔든다는 말이니 세력이 대단하다는 뜻
*청저짐하다 :아래쪽으로 좀 처진 듯하다.
[난이도 - 상]
1. 민주화를 향한 염원은 많은 이들의 소중한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5.18민중항쟁때 민주화를 위해 목숨걸고 싸웠던 이들의 가족이 모여 만든 5월단체 중 하나입니다. 지금 구도청 보존을 위해 천막을 치고 농성중인 이 단체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5.18민주유공자유족회
2. 현재 5.18국립묘지는 원래의 묘지였던 원묘역과 새롭게 조성된 신묘역으로 나뉩니다. 원묘역 입구에 홍성담씨의 유명한 목판화가 돌 위에 새겨져 있습니다. 이는 5.18의 하나된 세상을 나타낸 작품입니다. 이 작품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대동세상
3.
1. 다음 글은 고 김남주 시인의 시입니다. 이 시의 제목은 무엇일까요?
학살2
오월 어느 날이었다19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광주 1980년 오월 어느 날 밤이었다
밤 12시 나는 보았다총검으로 무장한 일단의 군인들을밤 12시 나는 보았다야만족의 참략과도 같은 일단의 군인들을밤 12시 나는 보았다야만족의 약탈과도 같은 일군의 군인들을밤 12시 나는 보았다악마의 화산과도 같은 일단의 군인들을
아 얼마나 무서운 밤 12시였던가아 얼마나 노골적인 밤 12시였던가
오월 어느 날이었다19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광주 1980년 오월 어느 날 밤이었다
밤 12시도시는 벌집처럼 쑤셔놓은 심장이었다밤 12시거리는 용암처럼 흐르는 피의 강이었다밤 12시바람은 살해된 처녀의 피묻은 머리카락을 날리고밤 12시밤은 총알처럼 튀어나온 아이의 눈동자를 파먹고밤 12시학살자들은 끊임없이 어디론가 시체의 산을 옮기고 있었다
아 얼마나 끔찍한 밤 12시였던가아 얼마나 조직적인 학살의 밤 12시였던가오월 어느 날이었다19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광주 1980년 오월 어느 날 밤이었다
밤 12시하늘은 핏빛의 붉은 천이었다밤 12시거리는 한 집 건너 울지 않는 집이 없었고무등산은 그 옷자락을 말아올려 얼굴을 가려버렸다밤 12시영산강은 그 호흡 멈추고 숨을 거둬버렸다
아 게르니카의 학살도 이렇게는 처참하지 않았으리아 악마의 음모도 이렇게는 치밀하지 못했으리.
▣ 기타 회원들과 같이 할 수 있는 교육방법
[특명1 : 편지글]
① 당시 내가 광주 시민이었다면?
② 희생된 분들에게 드리는 편지
③ 다른 지역의 친구들에게 편지를 쓴다면..
④ 항쟁 진압자들에게 항의 편지 보내기?
[특명2 : 생생 현장취재]
① 5ㆍ18 관련 장소에 다녀온 후 기사문 쓰기 - 망월동 5ㆍ18 묘역, 5ㆍ18 자유공원
② 망월 묘역 참배하고 묘역 안내하기 - 묘비명 적기 (열사 소개 등)
③ 관련 노래 및 시 감상하기 - 그림 그리고 시 소개 및 느낌 표현
④ 광주민중항쟁에 관계된 인물 만나 인터뷰하기(정리하여 기사문쓰기)
- 가족 및 부상자, 혹은 부모님, 친인척(직간접적으로 항쟁경험하신 분)중
⑤ 5ㆍ18 관련 행사나 장소에서 만남 사람과 인터뷰하기
⑥ 세계에서 독재에 항거한 사례 조사하여 발표하기
⑦ 5ㆍ18 관련 행사에 참여하여 기사문 쓰기
첫댓글 광주 역사기행에 함께 할 파주청년회 회원을 기다립니다. 많은 참여바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