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긴급조치9호 선포
← 긴급조치9호 선포를 알리는 기사 박정희 대통령이 `국가안전과 공공질서의 수호를 위한 긴급조치9호` 일명 긴급조치9호를 1975년 5월 13일 선포했다. 이는 앞으로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겪을 시련을 의미했다. 4월 17일 크메르가 공산 게릴라에 항복하고, 4월 30일 월남이 공산화되자 박 정권은 고조된 안보 위기의식에 편승, 총력안보와 국민총화를 굳힌다는 미명 아래 긴급조치9호를 선포, 5년7개월에 걸쳐 민주주의를 짓밟았다. 긴급조치9호는 헌법 비방이나 반대, 유언비어 유포, 허가없는 학생시위ㆍ집회 금지 등을 주요 골자로 이전의 긴급조치1호에서7호까지의 내용을 거의 포괄하고 있었다. 긴급조치9호가 시행됨으로써 한국사회는 전시상태나 다름없는 비상체제로 진입했다. 박 정권은 반정부활동을 언론이 보도하거나 전파하는 일까지 금지했고 조치 위반자에 대해서는 영장 없이 체포ㆍ구금할 수 있게 했으며 이 조치를 비방하는 행위 역시 1년 이상의 징역형에 10년 이상의 자격정지가 부과됐다. 긴급조치9호 발동 후 그 강압적인 기세에 눌려 반정부운동이 잠시 잠잠지는 듯 했으나 같은 해 5월 22일 서울대 ‘민속가면극연구회’ 주동으로 시작된 학생시위를 기점으로 민주 인사들의 ‘민주구국선언’ 등을 통해 다시 일파만파로 커져만 갔다. 결국 긴급조치9호는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사망 후 같은 해 12월 8일 0시를 기해 해제됨으로써 끝이 났다. 5년7개월간에 걸쳐 시행된 이 조치로 1천20명이 연루됐고 이 가운데 5백30명이 구속됐다.
[1832년] 프랑스의 동물학자 퀴비에 사망
← 비교해부학자이자·고생물학자였던 퀴비에. 프랑스의 동물학자인 퀴비에가 1832년 5월 13일 파리에서 사망했다. 퀴비에는 본래 슈투트가르트 카롤리레에서 경제학을 공부했으나, 바다동물을 연구하여 주목받기 시작하면서 자연과학쪽으로 연구방향을 돌렸다. 퀴비에는 비교해부학과 고생물학을 확립한 사람이다. 비교해부학은 여러 동물의 형태나 구조를 서로 비교 연구하는 학문이고, 고생물학은 화석을 통해 고생물의 구조, 생리, 생태 등의 역사적 변천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퀴비에는 1795년 파리 자연사박물관의 비교해부학 교수를 지냈고, 1799년에는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박물학 교수를 지내기도 했다. 또 그는 나폴레옹1세의 신임을 얻어 장학관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1817년 저술한 `동물계`에서 퀴비에는 동물이 척추동물, 연체동물, 관절동물, 방사동물로 나뉘어져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E.G.생틸레르는 동물계 전체를 한 형으로 보아서 과학아카데미에서 퀴비에와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퀴비에는 다윈의 진화론에 반대한 천변지이설을 주장했는데, 이 이론은 화석이 지층마다 다르다는 것을 보고 지질시대에 천변지이가 되풀이되어 생물군이 절멸되고, 살아남은 것이 번식하여 지구상에 분포된다는 허술한 이론이다.
[1940년] 처칠 영국 총리 취임
1940년 5월 13일 윈스턴 처칠이 네빌 체임벌린의 후임으로 영국 총리에 취임했다. 젊은 시절에 언론인·군인 등의 경력을 가졌던 처칠은 1900년 10월 올덤에서 보수당 하원의원으로 당선되면서 정치에 입문했다. 이후 다시 자유당으로 소속을 옮긴 그는 자유당 내각에서 식민차관, 애스퀴스 내각에서 통상장관·내무장관 등을 역임하면서 경력을 쌓았다. 1924년 다시 보수당에 입당한 처칠은 1939년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해군장관에 임명되었다. 1940년 5월 13일 신임 총리에 오른 처칠은 의회 연설에서 "나에게는 피와 수고와 눈물과 땀 이외에는 내놓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의 상징이 된 'V' 사인으로 사기를 진작시키고, 여러 중요한 회담을 성사시키는 등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활동은 그를 뛰어난 전쟁지도자로 만들었다.
[1981년] 요한네스 파울루스 2세 암살 기도
1981년 5월 13일 교황 요한네스 파울루스(요한 바오로) 2세에 대한 암살이 기도되었다. 산피에트르 광장에서 터키 국적을 가진 메흐메트 알리 아그카가 교황을 저격해 중상을 입혔다. 3명의 불가리아인이 아그카 및 다른 3명의 터키인과 공모한 혐의를 받았으나 증거부족으로 석방되었다. 요한네스 파울루스 2세는 456년 만에 처음으로 선출된 비(非)이탈리아계 교황으로 전세계를 광범위하게 여행하며 적극적으로 교황직을 수행했다. 그는 낙태, 피임 기구 사용, 이혼을 금지하는 등 전통적인 가톨릭 견해를 강력히 옹호했다.
[1717년] 마리아 테레지아 Maria Theresia 출생 1717년 5월 13일 태어남 / 1780년 11월 29일 죽음 마리아 테레지아는 오스트리아의 대공,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여왕(1740~80 재위)이며,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란츠 1세(1745~65 재위)의 황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요제프 2세(1765~90 재위)의 모후이다. 합스부르크 왕가 카를 6세의 맏딸로, 카를 6세는 외아들이 사망하자 딸도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토를 물려받을 자격이 있다는 이른바 국사조칙이라는 법령을 내렸고, 대부분의 열강이 이를 승인했다. 그러나 카를 6세가 죽자 상속권을 둘러싸고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으로 프로이센에게 슐레지엔을 넘겨 주었으나, 영국과 손을 잡고 국사조칙에 대한 각국의 승인을 얻어냈다. 프리드리히와 함께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토를 공격한 군주들 가운데 하나인 바이에른 선제후 카를 알베르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 선출되기도 했지만, 결국 마리아 테레지아는 남편 프란츠 스테판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자리에 앉혔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그녀가 모든 국정을 담당했으며, 군사력 증강에 주력했다. 슐레지엔 수복을 목표로 프로이센과 7년전쟁을 일으켰지만, 프랑스와의 동맹으로 영국이 등을 돌려 뜻을 이루지 못했다. 프랑스왕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앙뜨와네트 [1755.11.2~1793.10.16]의 어머니
[1914년] 미국 권투 선수 루이스 [Louis, Joe, 배로, 브라운] 출생
본명은 Joseph Louis Barrow. The Brown Bomber라고도 함. 1914. 5. 13 미국 앨라배마 렉싱턴~1981. 4. 12 네바다 라스베이거스. 1937년 6월 22일 시카고에서 제임스 J. 브래독을 8라운드 KO로 이긴 뒤 1949년 3월 1일 은퇴할 때까지 헤비급 세계 챔피언 타이틀을 보유했다. 그 당시 그는 헤비급 역사상 최장수 챔피언으로 무려 25차례의 방어전을 치뤘으며 그중 21번은 KO승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 미국 육군에서 복무하게 되어 방어전을 더 치르지 못했다. 루이스는 디트로이트에서 복싱을 시작해 1934년 미국 아마추어 경기연맹에서 주최한 라이트 헤비급 선수권대회에서 우승했으며 골든글러브 타이틀도 차지했다. 1934년 7월 4일 프로 데뷔전을 가졌으며 그후 12개월 사이에 전(前)챔피언이었거나 후에 챔피언이 된 프리모 카네라, 맥스 베어, 잭 샤키, 브래독, 맥스 슈멜링, 저지 조 왈콧 등 6명의 헤비급 선수를 KO시켰다. 프로 시절에 3번의 패배를 당했는데, 그중 맥스 슈멜링과의 경기에서 첫번째 패배를 기록했다. 1939~42년에 전성기를 누렸으며 1940년 12월부터 1941년 6월까지 7차례의 타이틀 방어전을 가졌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활동이 저조했으며 오랜 은퇴생활로 에자드 찰스에게 챔피언 자리를 내주어야 했다. 1950년 9월 27일 찰스에게 도전했으나 15라운드 판정패를 당했다. 1951년 10월 26일 그의 마지막 경기에서 훗날 챔피언이 된 로키 마르시아노에게 8라운드 KO패를 당하고 말았다. 그는 1934~51년까지 71전 68승 54KO를 기록했다. 2번째의 은퇴 후 재산의 운영부실로 막대한 액수를 부당하게 연방소득세로 내야 했다. 말년에 루이스는 네바다 주 라스베이거스에 있는 '시저스팰리스 호텔'에서 현관 안내인으로 일했다.
[1906년] 한국 소설가·법학자·정치가 유진오[兪鎭午] 출생
1906. 5. 13 서울~1987. 8. 30 서울. 호는 현민(玄民). 1924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29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를 졸업했다. 재학시절 뜻맞는 친구들과 문우회(文友會)를 조직하고 동인지 〈문우〉와 시집 〈십자가〉를 펴냈으며, 경제연구회라는 서클을 조직했는데, 이 연구회 회원 가운데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가입한 사람이 있어 학교에서 해산명령을 내렸다. 이효석(李孝石)과는 선후배 사이이며, 이때부터 창작에 몰두해 〈조선지광〉·〈현대평론〉 등에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그는 1936년 보성전문학교(지금의 고려대학교) 법학과 교수가 된 뒤, 1944년 4월 학교명이 경성척식경제전문학교로 바뀌자 교수 겸 척식과장이 되었으며, 8·15해방 후 학교명이 보성전문학교로 환원되자 교수 겸 법과과장으로 있었다. 1946년 종합대학으로 승격되어 학교명이 고려대학교로 바뀌자 1949년 법정대학 학장을 거쳐 1952~65년 총장을 역임했다. 1948년 대한민국헌법 기초위원과 법제처장을 지내면서 대한민국헌법을 기초했으며, 1951년 한일회담 한국대표, 1953~68년 국제법학회장, 1959년 국제적십자위원회 한국대표, 1960년 한일회담 대한민국 수석대표 및 대한교육연합회 회장, 1961년 국가재건국민운동 본부장, 1961~63년 국제연합(UN) 한국협회장 등을 역임했다. 한편 1965년 고려대학교 총장에서 물러나 정치계에 입문한 뒤로 1966년 민중당 입당, 1967~70년 신민당 총재, 1967~71년 국회의원, 1970~72년 신민당 고문, 1980~87년 국정자문위원, 1982~87년 옥계유진산선생기념회장 등을 지냈다. 1955년 연세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와 1966년 경희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54년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이 되었다.
법학자·정치가로 활동했던 그는 소설가로서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1920년대에는 당시 사회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KAPF)에 소속된 작가들과 비슷한 경향의 작품을 발표했으나 KAPF에는 가담하지 않았다. 그의 문학활동은 크게 3시기로 나눈다. 첫번째 시기에 해당되는 작품으로는 〈스리〉·〈파악〉(조선지광, 1927. 7~9)·〈5월의 구직자〉(조선지광, 1929. 9) 등이 있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가난에 허덕이는 민중들의 생활을 그리거나 지식인들이 겪는 정신적 갈등과 그를 통한 역사적 임무의 자각을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다. 2번째 시기에 해당되는 작품으로는 〈송군 남매와 나〉(조선일보, 1930. 9. 4~17)·〈여직공〉(조선일보, 1931. 1. 2~22)·〈형〉(조선지광, 1931. 2~5)·〈5월제전〉(신계단, 1932. 11) 등이 있다. 이 시기에 그는 동반자적 특성을 가장 전형적으로 드러냈는데, 그것은 주로 노동자를 주인공으로 설정해 그들이 자신의 삶이나 일제강점기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헌신적으로 싸우는 모습이다. 당시 KAPF에 참여한 작가들과 같은 소재를 취하면서도 선악의 대립이 조선인 노동자와 일본인 자본가로 설정되어 있다는 점, 주인공이 정치의식이 뛰어난 인물이 아니라 어떤 계기를 통해 사회와 현실에 눈뜨게 되는 노동자로 설정되어 있다는 점이 그들과 다른 점이다.
3번째 시기에 해당되는 작품으로는 〈김강사와 T교수〉(신동아, 1935. 1)·〈간호부장〉(신동아, 1935. 12)·〈화상보 華想譜〉(동아일보, 1939. 12. 8~1940. 5. 3) 등이 있다. 이 시기의 작품은 일제의 탄압이 갈수록 심해짐에 따라 이전의 열정을 상실하고 다시 차가운 지성의 세계로 복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1941년 이후에는 그의 작품에서 끈질기게 이어지던 현실에 대한 냉철한 비판과 정신적 가치에 대한 지향의 팽팽한 끈이 더이상 유지되지 못하고 적극적인 친일행위로 나타난다. 소설집으로 〈봄〉(1940)·〈화상보〉(1941)·〈김강사와 T교수〉(1976)·〈서울의 이방인〉(1977) 등과 수필집으로 〈젊은 날의 자화상〉(1976)·〈미래를 향한 창〉(1978) 등이 있다. 그밖에 법이론서로 〈헌법이론과 실제〉·〈헌법기초회고록〉·〈헌법강의〉·〈민주정치의 길〉 등이 있다. 1959년 대한민국 학술원상, 1962년 대한민국 문화훈장 등을 받았다.
[1857년]영국의 세균학자 로스 (영국 세균학자) [Ross, Sir Ronald] 출생
1857. 5. 13 인도 알모라~1932. 9. 16 런던 퍼트니 히스. 말라리아에 대한 연구로 1902년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받았다. 아노펠레스속(―屬 Anopheles)에 속하는 모기의 위장관에 기생하는 말라리아 기생균을 발견하여 이에 의해서 말라리아가 전파됨을 밝혔고, 이 병의 퇴치에 대한 기초를 확립했다. 1879년 의과대학을 졸업한 뒤 인도 군의료단에 들어갔고 3차 미얀마전쟁(1885)에 참전했다. 1888~89년 런던에서 세균학을 공부하고 인도로 돌아와 1892년 말라리아에 대한 일련의 연구를 시작했다. 말라리아는 모기가 전파한다는 가설을 성공적으로 검증했는데 여기에는 패트릭 맨슨의 연구와 조언이 크게 작용했다. 1899년 영국으로 돌아가 후에 리버풀대학교가 된 리버풀 열대 의학교에 부임했다. 1911년 기사작위를 받았고, 1912년 런던 킹스 칼리지 병원에서 열대병 분야의 내과의사로 일했으며, 그뒤에는 그를 기념하여 세운 로스 열대병원 및 부속연구소의 책임자가 되었다. 수학논문·시·소설 외에도 〈말라리아 예방법 The prevention of Malaria〉(1910)을 저술했다.
[1840년] 프랑스의 작가 알퐁스 도데 (프랑스 작가) [Daudet, Alphonse] 출생
1840. 5. 13 프랑스 님~1897. 12. 16 파리(?). 주로 프랑스 남부 지방의 인물과 생활을 익살스럽고 정감있게 묘사한 것으로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다. 그의 장편소설 〈동생 프로몽과 형 리슬레르 Fromont jeune et Risler aîné〉(1874)는 아카데미 프랑세즈 상을 받았다. 도데는 견직물 제조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1849년에 아버지는 공장을 팔고 리옹으로 이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리옹에 간 알퐁스는 처음에는 그 습기찬 공기에 불쾌감을 느꼈지만, 곧 엉뚱한 짓과 론 강의 생활에서 위안을 찾았다. 그는 14세 때 처음으로 시와 소설을 썼다. 1857년 아버지의 사업이 망하는 바람에 도데는 대학 진학의 꿈을 버려야 했다. 그는 알레스에 있는 한 학교에서 사환으로 일했는데, 이 불행한 생활은 6개월 만에 결국 해고당하는 것으로 끝났지만, 그의 반(半)자서전적 소설인 〈꼬마 Le Petit Chose〉(1868)에 주제를 제공해주었다. 이 소설은 그때의 경험에 살을 붙이거나 생략하여 재미있게 꾸민 것이다. 1857년말에 그는 형 에르네스트가 있는 파리로 갔다. 그후 도데는 글쓰는 일에 몰두하는 한편 보헤미안 문단과 사교계 문단을 모두 드나들기 시작했다. 젊고 잘생긴 그는 모델인 마리 리외와 관계를 맺고, 유일한 시집인 〈연인들 Les Amoureuses〉(1858)을 리외에게 헌정했다. 그는 리외와 오랫동안 골치아픈 관계를 계속했는데, 이 관계는 훨씬 나중에 〈사포 Sapho〉(1884)라는 반자서전적 소설에 반영되었다. 그는 또한 신문, 특히 〈피가로 Le Figaro〉지에 자주 작품을 기고했다. 1860년에 그는 19세기 프로방스어 문학부흥운동의 지도자 프레데리크 미스트랄을 만나, 남프랑스의 생활에 열중하게 되었다. 남프랑스의 생활은 북부의 윤리적이고 지적인 엄격성과는 반대로 열정적이고 예술적이며 관능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같은 해 그는 모르니 공작의 비서로 일자리를 얻었다. 그의 건강은 가난과 그리고 결국은 그의 목숨을 앗아간 성병에 서서히 침식당하고 있었다. 도데는 1861년에서 1862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을 알제리에서 보냈다. 이 여행에서 얻은 성과 가운데 하나가 〈사자 사냥꾼 샤파탱 Chapatin le tueur de lions〉(1863)으로, 이 소설의 주인공인 사자 사냥꾼은 도데의 미래의 주인공 타르타랭의 첫번째 스케치라고 할 수 있다. 도데가 처음으로 쓴 희곡 〈마지막 우상 La Dernière Idole〉은 1862년에 파리의 오데옹 극장에서 초연되었고 커다란 반향을 얻었다. 〈방앗간 소식 Lettres de mon moulin〉(1869)에서 그는 1862년말 코르시카에서 보낸 겨울을 회상하고 있다. 1863~65년(모르니 공작이 죽을 때까지)에 겪은 풍부한 사회생활은 그가 〈르 나바브 Le Nabab〉(1877)에서 무자비하게 분석한 자료를 그에게 제공해주었다. 1867년 1월에 그는 재능있는 작가인 쥘리아 알라르와 결혼했는데, 그는 그녀를 깊이 사랑했고, 그녀는 그의 이후 작품에 큰 도움을 주었다. 그들은 레옹과 뤼시앵이라는 두 아들과 에드메라는 딸 하나를 낳았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은 그의 2번째 단편집 〈월요일 이야기 Les Contes du lundi〉(1873)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그의 글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전쟁 때 도데는 군에 입대했지만, 1871년 파리 코뮌의 공포정치 때 파리를 탈출했다. 그의 〈타라스콩의 타르타랭이 겪은 놀라운 모험 Les Aventures prodigieuses de Tartarin de Tarascon〉(1872)은 별로 호평을 받지 못했지만, 모험을 좋아하는 이 소설의 주인공은 천진함과 허풍스러움을 풍자한 인물로서 유명하다. 〈아를의 여인 L'Arlésienne〉이라는 희곡도 역시 실패했으나 1885년에 재공연 되었을 때는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의 다음 소설인 〈동생 프로몽과 형 리슬레르〉는 아카데미 프랑세즈 상을 받고 성공을 거두었으며, 그 후 몇 년 동안(적대적인 비평이 전혀 없지는 않았음) 그는 부귀와 명성을 누렸다. 말년에 도데는 성병이 척수까지 번져 심한 고통을 겪었다. 〈고통 La Doulou〉(1931년까지 출판되지 않았음)은 고통을 연구함으로써 완화하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그는 감탄할 만한 자제심으로 온갖 종류의 책을 써서 파리의 문단과 음악계를 계속 즐겁게 해주었다. 그는 젊은 작가들(예를 들면 마르셀 프루스트)의 친절한 후원자였다. 1895년에 그는 런던과 베네치아를 방문했다. 그리고 2년 뒤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심리학적으로 볼 때, 도데는 상충하는 요소들의 통합을 보여준다. 모든 사회계층에서, 그리고 여행하는 과정에서 실제로 겪은 체험은 그가 타고난 재능을 개발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남프랑스 사람이었던 도데는 정념에 대한 이해와 지중해적인 세계관을 결합했고, 인간행동의 세부에 대한 관심을 늦추지 않으면서도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칠 수 있었다. 그는 평생 동안 다른 사람들을 관찰한 내용을 작은 공책들에 기록했고, 이 공책들을 영감의 보고로 이용했다. 소설은 "어떤 역사도 갖지 못할 사람들의 역사"이어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접근 방식은 냉정한 객관성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그는 줄곧 감상적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선입관에서 자유로웠던 그는 동료 자연주의자들과는 달리, 세계의 추악한 면에만 관심을 쏟는 소설가들은 세계의 다양성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고 믿었다. 그는 겉으로 드러난 세부적인 면에 객관적인 관심을 갖고 있었지만, 그의 글에는 이런 관심과 동시에 유난히 동정심이 많은 인간성과 사물 및 개인의 신비에 대한 외경심도 표현되어 있다. 그의 세계에 있는 모든 것은 내적인 진실성을 갖고 있으며, 그는 물질적 현상을 묘사할 때처럼 충실하게 이 진실성을 재현했다. 나아가, 그는 정념에는 운명의 힘과도 같은 무엇이 있다고 생각했으며, 이러한 생각은 그의 많은 글에서 열매를 맺어 그의 풍자는 동정심으로 부드러워지곤 한다. 이런 점에서 그는 모파상뿐 아니라 영국의 찰스 디킨스와도 유사점을 갖는다. 도데의 작품은 전체적으로 볼 때 하나의 계통을 따라 계속 발전했다기보다는 오히려 다양한 문학적 경향이 서로 동떨어진 삽화들처럼 잇따라 나타난 일련의 과정이었다. 그래도 〈타라스콩의 타르타랭이 겪은 놀라운 모험〉에 나타난 반낭만주의적 풍자는 〈방앗간 소식〉에서는 점묘파나 인상파 화가들과 비슷한 사실주의로 바뀌었고, 이것은 다시 남프랑스의 특성을 조롱한 초기작품을 수정하기 위해 쓴 〈아를의 여인〉의 비극적 색조로 이어졌다. 또한 〈꼬마〉와 〈월요일 이야기〉에는 풍자보다 오히려 동정과 염려가 더 많이 담겨 있다. 도데는 나이가 들수록 인간관계의 갈등에 점점 더 몰두하게 되었다. 〈자크 Jack〉(1876)는 육체적 사랑과 모성애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 한 여인을 묘사하고 있고, 〈뉘마 루메스탕 Numa Roumestan〉(1881)은 남자와 여자의 북부적 성격과 남부적 성격 사이의 적개심을 묘사하고 있으며, 〈전도사 L'Évangéliste〉(1883)는 종교적 광신과 싸우는 아들의 애정을, 〈작은 교구 La Petite Paroisse〉(1884)는 질투심의 모순을 다루고 있다. 〈사포〉에서 제기하는 도덕적 문제는 자신이 버리고 떠나는 소녀에 대한 동정심과 자유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연인의 해묵은 고민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한 세대 전체의 청년들에 대한 도데의 평가가 그 밑바탕을 이루고 있다. 〈아를라탕의 보물 Le Trésor d'Arlatan〉(1897)과 〈삶에 대한 단상(斷想) Notes sur la vie〉 및 〈새로운 단상 Nouvelles notes〉은 프로이트보다 앞서서 억압된 잠재 의식을 분석한 대담한 심리학자 도데의 모습을 보여준다. 도데의 걸작에는 서로 대립하는 요소들, 즉 진실과 환상, 무자비한 묘사와 시, 명석한 진지함과 유머 감각, 아이러니와 연민 등 인간의 존엄성을 이루는 요소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1792년] 교황 교황 피우스 9세 [Pius IX, 마스터가 페레티] 출생 본명은 Giovanni Maria Mastai-Ferretti. 1792. 5. 13 교황령 세니갈리아~1878. 2. 7 로마. 교황(1846~78 재위). 역대 교황들 가운데 가장 오래 재위했고, 자유주의에서 보수주의로 선회한 것으로 유명하다. 재위기간 동안 1854년 무원죄잉태(無原罪孕胎) 교리를 공포했고,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70)를 소집했는데, 이 공의회 동안 교황 무류설(無謬說)이 권위있게 정의되었다. 세니갈리아의 장관 지롤라모 마스타이 페레티와 여백작 카테리나 솔라치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1827~32년 혁명이 일어나 혼란한 시기에 스폴레토의 대주교를 지내면서 최초로 명성을 얻었다. 1832년 중요한 이몰라 교구의 주교가 되었으나, 1840년이 되어서 비로소 산피에로에마르첼리노의 사제추기경이 되었다. 1846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6세를 계승할 만한 가장 유력한 자유파 후보자가 아니었으나 교황비밀선거회의는 이틀만에 그를 교황에 선출해 보수파 루이지 람브루스키니가 교황이 되는 것을 막았다. 교황이 된 다음 자신의 친구이자 이몰라의 주교를 지냈던 피우스 7세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의미에서 피우스 9세라는 이름을 택했는데, 이 이름을 택한 것은 어떤 점에서 보면 예언적인 일이었다. '피오 노노'(피우스 9세)는 피우스 7세처럼 교황이 되자마자 자유주의 사상을 지원했는데, 이는 자유주의자들이 오히려 성직제도에 자주 반대하고 나선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하여 배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1846년에는 이 모든 것이 아직 장래의 일이었고, 유럽은 자유주의자가 교황이 되었다는 비상한 현상을 주목하고 있었다. 교황은 어려운 상황에 부딪쳤다. 아마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를 제외한 유럽 전체는 교황령이 개혁을 해야 할 절박한 처지에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1831년 로마 주재 프랑스·오스트리아·러시아·프로이센 대사들이 서명한 각서는 지방 정부를 돕기 위한 협의회를 세울 것, 선출된 대표들로 구성되는 중앙 기구가 재정을 통제할 것, 더 이상 성직자들이 행정과 사법 체제에서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제시했다. 자유파는 그레고리우스 16세의 교황재위기간을 통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이 조치들을 열망하고 있었다. 그외에도 교황청은 오스트리아가 이탈리아 반도에 대해 지배권을 유지하기 위해 이용해온 이탈리아 민족주의자들에게 끊임없이 공격을 받았다.
1848년 혁명 이 혁명은 시칠리아에서 시작되어 곧 유럽 전체를 달아오르게 했고, 피우스는 자유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로부터 자신의 능력을 훨씬 넘어서는 요청들을 받았다. 3월 14일 강요에 굴복하여 양원제(兩院制) 의회를 수립하는 내용의 헌법을 승인했다. 3월 23일 사르디니아의 카를로 알베르토는 오스트리아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다. 피우스는 한동안 중립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4월 29일 추기경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자신은 이탈리아를 휩쓸고 있는 혁명활동들에 대해 사심 없는 구경꾼일 뿐이며, 자신의 개혁작업은 오랫동안 권력으로부터 압력을 받아온 작업을 이행하는 것일 따름이라고 주장했다. 당시의 분위기에서 이러한 감정표현은 민족주의 진영에 대해 철저한 거부감을 나타낸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로마에서마저 혁명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인기 있는 인물들을 장관으로 임명하는 데 동의했으나, 임명된 사람들 가운데 누구도 그 상황을 장악할 능력이 없었다. 상황은 꾸준히 악화되어가다가 11월 5일 마침내 그들 가운데 하나가 암살당하는 것으로 치달았다. 급진적인 성향의 장관이 임명되었고, 스위스 군인들로 구성된 교황청 수비대가 해체되면서 교황은 사실상 포로가 되었다. 11월 24~25일 프랑스와 바이에른 대사들의 도움으로 나폴리 왕국에 있는 가에타로 도망했다. 그가 없는 동안 제헌의회를 위한 선거가 치러졌고, 1849년 2월 9일 이 의회는 교황의 세속통치권이 끝났음과 민주공화정 수립을 선포했다. 이에 교황은 프랑스·오스트리아·스페인·나폴리 군주들에게 공식적으로 지원을 호소했다. 교황이 복귀할 수 있으려면 교황령에 있는 입헌정부를 어느 정도 선에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는 것이 일반적인 관측이었고, 또한 새로 선출된 프랑스 대통령 루이 나폴레옹도 이러한 정책에 찬성했으나, 피우스는 어떠한 양보에도 반대한다고 밝히면서 어떠한 제약도 받지 않고 자신의 세속 권력을 행사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 그 뒤 프랑스와 오스트리아가 일정 기간 군사 및 외교 정책을 편 결과 교황통치는 무조건적으로 회복되고 1850년 4월 12일 피우스는 자신의 수도로 되돌아왔다.
로마 문제 피우스가 과거에 자유주의자였다가 편협한 반동주의자가 되어 로마로 돌아왔다는 주장들이 종종 있어왔다. 물론 로마로 돌아온 뒤 그의 정책이 바뀐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태도는 변하지 않고 남아 있었다. 교회의 이익이 언제나 그의 최우선적인 관심사였다. 민족주의와 자유주의가 교회에 해를 끼치지 않을 때는 이에 대해 얼마든지 용인할 수 있었지만, 경험을 통해 이것이 혁명으로 이어진다는 점을 배웠고, 처음부터 그런 줄 알았으면 용인하지 않았을 것이다. 더 나아가 자기 편에서 정치적인 양보를 함으로써 영적인 권력에도 공격을 당했다고 판단하고서, 영적인 권력은 오직 세속 권력을 꾸준히 행사함으로써만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피우스는 자신의 주권이 지니는 이 2가지 면이 일단 확고하게 연결되자 당연히 세속 군주로서 자신의 지위를 변경하려는 어떠한 시도에 대해서도 반대했다. 피우스는 1846년 교황에 즉위하면서 교황령 내부 개혁과 이탈리아 국가들의 체제 변화를 위한 적법한 요구들에 대처하려면 새출발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가 교황에 즉위하자마자 단행한 행정상의 개혁작업들 가운데 대부분은 여전히 추진되고 있었고, 1850년대 이후 유럽의 부(富)가 전반적으로 증가함에 따라 교황령도 그 덕을 입었다. 그러나 입헌정부는 다시 회복되지 않았고, 교황의 복귀에 대해 내려진 사면(赦免)은 가치가 없을 정도로 반대가 심했으며, 교황은 민족감정을 표출하는 일체의 행위를 적대시했다. 교황정부가 전제적이었다는 말은 아니지만, 교황정부는 정치에 관심이 쏠린 이탈리아인들의 통일의 길에 철저히 장벽을 쌓았다. 1870년 9월 20일 이탈리아 군대가 로마를 점령했고, 10월 국민투표가 실시되어 그 결과 절대 다수가 로마를 이탈리아 왕국에 포함시키는 데 찬성했다. 피우스는 그의 말을 빌리자면 여생을 바티칸에서 죄수가 된 상태로 보냈다. 이탈리아 정부와의 접촉을 철저히 거부했고, 따라서 교황청과 정부의 관계는 11월 이탈리아 의회가 통과시킨 법에 근거하여 이루어졌다. 이 법은 교황이 비록 영토는 상실했으나 그 주권은 훼손되지 않았으며, 영토를 상실한 대가로 매년 일정액의 돈을 받게 된다고 명시했다. 또한 교황에게 다른 나라들과 외교관계를 맺을 수 있는 권한과 바티칸 자체와 그 주위의 작은 구역에 대해 독점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준다고 명시했다. 이탈리아를 제외한 지역에서는 교회와 국가가 분리된다고 명시했다. 이로써 교황청이 비록 1929년의 정교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이 사실을 공인하지 않았으나 로마 문제는 해결되었다.
교황지상주의 위에 기술한 사건들이 교황권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듯이, 피우스의 재위기간 동안 이러한 정치적 재난들에서 직접 발생한 교리의 발전도 대단히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교황지상주의는 갈리아주의와 요제프주의에 반대한 조제프 드 메스트르가 교회를 교황권에 더욱 밀접히 연결시킴으로써 교회를 세속권력의 통제라는 사슬에서 해방시키려는 데 그 뜻이 있었다. H.-F.-R. 드 라므네는 전반적으로 정치적 자유가 확대됨에 따라 교회도 그 덕을 입을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이 교리를 발전시켰다. 그레고리우스 16세는 라므네가 자유를 종교마저도 부인할 수 있는 자유를 뜻할 수도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그의 가르침을 단죄한 바 있다. 1846년 피우스 9세는 자유주의로서 실험을 시도했으나, 나중에는 그레고리우스 16세가 그것을 의심했던 것이 옳았음을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피우스가 이탈리아에서 한 가지 교훈을 배웠다면, 샤를 드 몽탈랑베르를 대변인으로 삼은 프랑스 자유주의 가톨릭교도들은 성직권을 지지한 샤를 10세 때보다 루이필리프의 자유주의 체제 때 교회가 더욱 번영을 누린 프랑스에서의 발전상을 보고 정반대의 결론을 이끌어 냈다는 점이다. 반면에 제2제국이 등장하자 구식 교황지상주의를 주장한 루이 뵈이요가 이끌던 프랑스 자유주의 가톨릭교도들은 자유주의와 완전히 결별하고서, 혁명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하려고 하던 권위주의 국가에서 교회의 자유를 얻으려고 했다. 1850년 이후 한동안 피우스의 정책은 어느 편의 교황지상주의에게든 주목을 끌지 못했다. 교황청 국무장관이며 추기경인 자코모 안토넬리는 피우스 7세 때 국무장관을 지낸 콘살비와 같은 길을 걸으면서 가톨릭 군주들로부터 더욱 유리한 정교조약을 얻어내려고 노력했다. 이렇게 해서 체결한 조약들은 정치적으로는 가치가 있었는지 몰라도 지적인 반성직주의(反聖職主義)를 막는 데는 아무런 효과도 얻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피우스는 교회 앞에 놓인 진정한 위험은 자유주의 가톨릭교도들이 교리에 포함시키려고 노력하는 현대 세속 사상들에 있음을 점차 확신하게 되었다. 1860년의 사건들을 계기로 마침내 '자유국가 내의 자유교회'라는 개념이 함정이었음을 깨달았다. 1861년 교황회칙 〈Jamdudum Cernimus〉를 발행하여 피에몬테 사람들의 침략뿐만 아니라 현대 정치론까지도 비판했다. 리소르지멘토(Risorgimento:19세기 이탈리아 국가통일 운동)를 겪으면서 피우스는 교회에서 자유주의를 반드시 뿌리뽑아야 한다고 확신했고 자유주의 가톨릭교도들은 피우스에게 많은 고통을 주었던 사람들에게 지원을 호소해야 하는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몽탈랑베르가 주장한 대안은 더이상 구체제의 원칙들에 무조건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권위를 교황에게 집중시켜야 할 필요를 강조하는 새로운 형태의 교황지상주의였다. 이로써 제1차 바티칸 공의회와 교황무류성 교리를 위한 토대가 마련되고 있었다. 그러나 먼저 가톨릭 교회 안에서 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자유주의세력을 물리쳐야만 했다. 1863년 몽탈랑베르는 말린에서 열린 대규모 가톨릭 대회에 연사로 초청되었고, 이로써 '자유국가 내의 자유교회' 사상을 옹호하고, 불관용을 비판할 기회를 잡았다. 피우스는 답변에서 자신은 이 2가지 관점에 대해 피우스 6세와 그레고리우스 16세의 권위주의적인 선언들에 반대하고 있음을 지적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몽탈랑베르는 이 답변만 가지고도 1864년 말린에 와달라는 2번째 초청을 거절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으나, 그의 지지자 F.-A.-P. 뒤팡루가 대리자 역할을 훌륭히 해냈다. 한편 1863년 뮌헨에서 열린 대회에서 J.J.I. 폰 될링거는 학자들에게 독자적인 연구를 할 권리를 인정해달라고 호소했다. 교회가 국가 및 현대 학문과의 관계에 대해서 권위 있는 선언을 해야 하는 상황에 있음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고, 따라서 이 목적을 위해 에큐메니컬 공의회의 소집 가능성에 관한 토론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논쟁에서 로마 문제가 다시 한번 결정적으로 끼어들었다. 1864년 9월 15일 프랑스 정부와 이탈리아 정부는 2년 안에 프랑스 수비대를 로마에서 철수하도록 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조약을 체결했다. 실제로 군대가 최종적으로 철수한 것은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이 시작된 다음의 일이었지만, 피우스는 9월 회담의 결과를 보고 자유주의에 대한 즉각적인 행동을 취하기로 결심했다. 1864년 12월 8일 교황회칙 〈Quanta Cura〉에 '우리 시대의 주요오류들' 80가지를 나열한 유명한 〈교서요목 Syllabus〉을 덧붙여 발행했다. 이 오류들은 이미 공식연설들과 회칙들, 그리고 그외 목회서신들을 통해 단죄된 것들이었기 때문에 〈교서요목〉은 새로운 내용이 없었고 따라서 이의를 제기할 만한 것도 없었다. 이 회칙의 중요성은 과거에 오직 주교들을 통해서만 설교를 듣던 세계를 대상으로 발행되었다는 점과 과거에는 특정 사건들에 관련된 구체적인 단죄들이었던 것을 일반화했다는 점에 있었다. 그러므로 이 가운데 아마 가장 유명한 항목으로서 "로마 교황은 진보와 자유주의, 그리고 현대문화에 적응하고 동의할 수 있으며 또한 반드시 그러해야 한다"는 견해를 비판한 80번째 항목은 교황의 권위를 〈Jamdudum Cernimus〉에서 수립된 이탈리아 왕국과의 교류를 거절한 데 두려고 했다. 〈교서요목〉은 자유주의 가톨릭교도들의 지위를 훼손시켰는데, 이로써 지식인들은 그들을 추종하지 않았으며 그들의 계획을 하찮게 여겼다. 뒤팡루는 〈교서요목〉의 배경을 요구하면서 그 안에 담긴 부정적인 면을 강조함으로써 평가절하하려고 노력했지만, 그럼에도 〈교서요목〉은 자유주의 가톨릭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해 1864년 이후로는 더이상 가톨릭 논쟁가들에게 부담을 주는 주요쟁점이 되지 않았다. 루이 뵈이요의 일부 추종자들은 장차 공의회가 열리면 교회가 사회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에 대한 확고한 정통교리 진술이 〈교서요목〉에 대한 부정적인 비판내용들을 대치하게 되리라는 희망을 가졌다. 대다수는 그 싸움을 이미 이겨놓은 것으로 보고 관심을 신(新)교황지상주의 계획(로마 교회의 권위를 세속 국가의 통제에서 충분히 벗어날 만큼 중앙집권화하는 계획)의 핵심인 교황무류성을 정의하는 문제로 돌렸다.
바티칸 공의회 교황무류성 교리 자체에는 새로운 것이 없었다. 이 교리는 이미 1854년 12월 8일 성모 마리아가 잉태하는 순간 원죄의 모든 오염에서 깨끗하게 되었다는 '무원죄잉태' 교리를 변호할 때 쓰인 바 있다. 교황은 이미 주교들과 다른 성직자들을 대상으로 폭넓은 조사활동을 벌여 자신의 분명한 대권행사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없음을 알았다. 그러나 1862, 1867년 로마에서 주교들과 그외 고위성직자의 모임에서 무류성 교리를 권위있게 정의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을 때 뒤팡루는 이 계획에 반대하는 데 성공했다. 이 계획을 반대한 근거로서, 이러한 정의가 시기적으로 적절하지 못하고, 교회와 현대사회 사이의 틈을 더욱 넓게 벌려놓으며, 교회에서 권위의 근원에 대해 한편으로 치우친 견해를 내놓게 될 것이라는 점들을 들었다. 교황이 하느님에게서 직접 나오는 권력을 소유한다면 주교들도 똑같은 권력을 소유한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주교들의 일반적인 사법권은 교황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임명이나 제도가 아닌 하느님에게서 유래하며, 따라서 교회의 본질이 지니는 다른 면들을 참고하지 않은 채 교황의 권력을 정의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피우스는 공의회로 하여금 원래 계획했던 포괄적인 쟁점은 제쳐둔 채 편협한 정의 문제에 몰두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비판받아야 했다. 물론 이것이 교황지상주의자들이 바라던 바였다. 실제로 교황지상주의자들은 많은 교회들로부터 지지를 받았는데, 그것은 지난 몇십 년간 발생된 정치적인 재난들 때문이기도 했고, 피우스가 오랫동안 비극적으로 교황에 재위하면서 누린 폭넓은 명성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이유는 당시에 지식주의에서 벗어나 경건에 치중한 신앙으로 돌아가려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1869년 12월 8일에 열렸다. 독일·프랑스·미국의 주교들로 구성된 반대파는 〈교서요목〉이 제시한 원칙에 따라 교회의 교리와 본질을 정의하는 것을 막을 만큼 강력했다. 그러나 교황지상주의파는 이전보다 훨씬 더 강력한 입장을 가지고 무류성 문제를 의제로 상정했다. 피우스는 1870년 2월 20일과 4월 29일에 공의회 절차를 바꾸는 데 결정적으로 개입했으며, 그결과 무류성에 관한 논의를 제외한 모든 논의들을 차후로 연기했다. 7월 13일 결정적인 투표가 실시되어 451명이 무류성 교리에 찬성하고 88명이 반대하고 62명이 일부 수정을 조건으로 찬성했다. 그뒤 소수파는 로마를 떠났으며 7월 18일 최종 정의안이 533:2로 통과되었다. 무류성은 교황의 성좌선언(聖座宣言 ex cathedra)에 해당하는 경우들에만 한정되었다. 피우스는 그뒤 8년을 재위하면서 이탈리아 정부와 더욱 멀어졌고, 서유럽 전역에서 반(反)성직주의 운동이 일어나는 것을 목격했다. 독일에서는 이 운동이 비스마르크의 '문화투쟁'(Kulturkampf)으로 절정에 달했는데, 이에 대해 피우스는 1875년 2월 5일 회칙 〈Quod Nunquam〉을 발행하여 단죄하고 문제 해결은 후임 교황에게 남겨두었다. 1878년 오랜 재위기간 동안 근대 교황권을 확립한 다음 죽었다.
그의 재위기간에 대한 평가 재위기간 동안 발생한 사건들에 대한 피우스의 정확한 책임은 아직도 쟁점으로 남아 있으나, 그 결과는 훨씬 분명하다. 교회와 국가는 최종적으로 갈라섰고, 교회의 권위는 로마에 집중되었으며, 교회는 주요정치세력들의 반대편에 서게 되었다. 피우스에 대한 가장 치명적인 비판은 사건들의 중요성은 평가하지 않고 오직 한 가지 방향으로만 단정했다는 주장일 것이다. 그의 재위기간에 발생한 큰 사건들은 그때문에 일어났다기보다는 그를 무시하고서 일어났다. 그러므로 그는 〈교서요목〉에서 교회와 국가가 분리된 사실 자체를 단죄했고, 제1차 바티칸 공의회(사상 최초로 세속 가톨릭 군주들이 초청되지 않음)가 해결해야 할 작업으로 보았다. 피우스는 수시로 당대의 중요한 운동들을 이끈 지도자들, 자유주의파 추기경들, 교회정치가들, 개신교에서 개종한 금욕주의자 H. E. 매닝의 도움을 얻었다. 그러나 그가 본래 가지고 있던 정치원칙들을 바꾸었다고 말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그는 개인 신앙생활 원칙을 제외하고는 어떤 원칙도 갖고 있지 않았고, 따라서 언제나 경험에 따라 살았다. 그러나 세속 권력을 잃음으로써 교회에 이익을 가져다 주었는데 세속 권력을 잃게 하는 데 가장 크게 이바지한 것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세속 권력을 유지하려던 피우스의 결심이 아니었는지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I.F. Burton D. Woodruff 글)
[1913년] 도산 안창호 주도 민족운동단체 ‘흥사단’ 창립
안창호 선생 가족 1913년 5월 13일, 흥사단(興士團)이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1878~1938)의 주도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창립됐다. 정치운동을 초월하고 민족부흥운동을 전개하는 것이 창립 취지였다. 일제하에서 인격수양과 실력양성을 강조하다 보니 ‘싸움을 회피하는 준비론’이라는 비판론도 제기됐지만 흥사단은 언제나 있어야 할 곳을 묵묵히 지켰다. 3·1운동 후에는 상하이에 원동위원부를 조직, 독립운동에 힘을 쏟았고, 서울과 평양에는 수양동맹회(1922년)와 동우구락부(1923년)를 결성, 국내에서 합법적인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두 단체는 이후 수양동우회(1925년)로 통합됐다가 다시 동우회(1929년)로 개칭됐으나 1937년에 불어닥친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안창호를 비롯한 200여명의 회원이 검거·투옥돼 강제해산되는 비운을 겪었다. 광복 후에는 본부를 국내로 이전했고 1969년에는 사단법인으로 등록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밖에 2007년 제56회 국제언론인협회(IPI) 총회 터키 이스탄불서 개막 2006년 '한국의 햄릿'으로 불린 배우 김동원씨 별세 2003년 체첸 지방 즈나멘스코예 정부청사에 자살 폭탄테러, 59명 사망ㆍ300여명 부상 2001년 인기 댄스그룹 H.O.T. 사실상 해체 2001년 이탈리아 총선에서 베를루스코니의 야당 승리 1997년 북한 두가족 서해로 귀순 1994년 헬륨원소보다 2.5배 무거운 `헬륨10` 세계 최초 발견 1994년 이스라엘, 요르단강 서안의 중심지 예리코시를 팔레스타인 경찰에 정식이양 1993년 독일, 1955년 연방군창설이래 처음으로 유엔소말리아전후복구작전에 파병개시 1993년 일본 사회당, 사회주의노선 포기하고 한국정부의 미-일 안보조약 인정하는 획기적 내용의 당강령개정초안 마련 1993년 간첩활동으로 수감 중인 황인욱씨, 다른 조직원을 통해 비밀문건을 밀반출하려다 적발 1990년 `5.9사태` 배후혐의로 김근태씨 검거 1988년 행정개혁위원회 발족 1988년 가락동농수산물시장 개장 1987년 이재형 국회의장 피선 1985년 12대 국회 개원 1983년 정부 수도권정비 기본계획 시안 공개 1979년 이란 혁명 최고재판소 전 팔레비 국왕에 사형선고 1972년 일본 오사카서 백화점 화재 118명 사망 1971년 통혁당 재건기도 간첩단 11명 검거 1965년 동부 파키스탄에 태풍 12,000여명 사망, 이재민 10만 1964년 시경 경향신문 편집국장등 7명 구속 1961년 민자통 주최 남북학생회담환영 및 통일촉진 궐기대회 1958년 알제리 시민들 완전독립을 요구하며 프랑스 정청 습격 1954년 미국 수폭실험 완료 발표 1940년 근대 헬리곱터 원조인 시콜스키 VS300 첫 비행 성공 1930년 일본 소설가 다야마 가타이 사망 1930년 ‘북극 탐험가’이자 ‘난민 인권 외교관’ 난센 사망 1926년 조선박람회 열림 1918년 세계최초의 항공우편 우표, 미국에서 발매 1907년 스웨덴 보통선거 실시 1905년 인도의 대통령(1974-1977) 아메드 출생 1902년 원산에 협무회사 설립 1882년 입체파 발전에 공헌한 프랑스의 화가 브라크 출생 1857년 온들(Oundle) 학교를 재조직한 영국의 교육학자 샌더슨 출생 1856년 사진미학의 이론을 정립한 영국의 사진가 에머슨 출생 1762년 영조, 사도세자 뒤주에 감금 1618년 선조때 정치가 백사 이항복, 유배지 북청서 사망 1607년 서애 유성룡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