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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설교를 부평중부감리교회 성도들에게 바칩니다. 저는 이 설교를 듣는 순간부터 부평중부감리교회에게 필요한 좋은 설교라고 생각했습니다. <세상을 향하여 겸손히 섬기며> 이 슬로건이 제가 다닐 때나 지금이나 부평중부교회의 슬로건입니다. 그러나 이 설교를 들어보시면 그 슬로건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세상은 섬길 곳이 아니고 복음을 전파할 곳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세상을 향해 복음을 전파해야 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이 카페도 부평중부감리교회에서 시작했습니다. 지금 부평중부교회에서 사용하는 BCMC.co.kr도 제가 지은 것입니다. 그때는 순종하며 열심히 교회에서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아닙니다. 복음을 듣고 구원받은 후에 교회생활을 해야 합니다. 저의 소원은 저를 아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련을 통하여 저에게 복음과 바른 성경을 통해서 진리를 알게 해 주셨습니다. 이제 제가 알게 된 이 진리를 한 사람의 혼이라도 더 구해오는데 쓰이기를 바랍니다.
한국의 대부분의 교회가 이런 상태가 된 것은 바른 성경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성경에 삭제된 구절이 13개나 있는데도 그 개역개정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루시퍼(사탄)이 들어갈 자리에 계명성(예수 그리스도)으로 바꾸어 놓고도 상관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혼동의 창시자가 아닙니다. 믿음의 마음으로 또 바른 성경으로 읽을 때 조명을 주십니다. 저는 부평중부교회가 바른 성경인 한글킹제임스성경으로 빠른 시간에 바꾸기를 기도합니다. 바른 성경이 없이는 바른 믿음이 뿌리내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동영상 바로가기 https://www.youtube.com/watch?v=dECSVf000tE&t=31s
제목 :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성경: 오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우리 하나님은 한 분 주시니 너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혼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할지니라. (신명기 6:4,5)
(동영상 처음부터 7:56까지 입니다.)
성경에서 사랑 LOVE가 처음 등장하는 구절은 창세기 22장 2절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아들, 곧 네가 사랑하는 네 독자 이삭을 이제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서, 산들 중에서 내가 네게 알려 줄 한 산에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하시더라.>
그러니까 성경에서 일차적으로 정의를 내리고 있는 사랑은 남녀 간의 사랑이 아니에요. 친구들 간의 우정이나, 전장에서 피어나는 전우애도 아니지요? 심지어 자기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사랑도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일차적인 사랑은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이 사랑하는 아들을 죽이는 것으로 이어진다는 것이에요.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주님께 번제로 바치게 됩니다. 이것은 자기의 아들 이삭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한다는 한 차원 더 높은 사랑을 나타내 보인 거예요. 자! 이처럼 아브라함에게는 그의 독자 이삭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크고 더 높은 차원의 사랑, 그러니까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하는 그 사랑이 있었지요? 이처럼 아버지 하나님 께서는요 그분의 아들을 향한 사랑보다 한 차원 더 크고 더 높은 사랑을 세상 죄인들에게 보여주시기 위해서 그분의 사랑하는 아들을 한순간 포기하시고 죄와 저주로 삼아 십자가에 내어주신 거예요. 왜 그럴까요? 사랑은 주는 것이기 때문이기에 그렇습니다.
자! 완전한 사랑은 죄 없으신 분께서 더러운 죄인인 우리 모두의 죄들을 제거하기 위해 죽으신 사랑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나타났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우리로 그를 통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일서 4:9>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독생자를 사랑하신 사랑보다 더 크고 위대한 사랑을 갖고 계셨는데, 바로 갈보리 십자가의 피 흘리신 사랑이었어요. 갈보리 십자가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의 절정을 보여준 위대한 사랑이었어요.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랑으로 이 자리에 앉으신 구원받은 여러분을 사랑하고 계시는 거예요.
어느 CCM가사처럼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사랑받고 있지요> 이게 아니에요. 왜 그런지 아십니까?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은 욥기 5:7절에서처럼 고생하려고 태어났기 때문에 그래요. 허물과 죄들 가운데 영이 죽은 채로 태어나서 지지리 고생만 하다가 죄의 삯은 사망대로 몸은 죽고 혼은 불타는 지옥 그리고 불과 유황이 타는 영원한 못으로 던져지기 위해서 태어난 거예요. 엄밀히 말하면.
그래서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렇게 노래할 것이 아니라 이렇게 노래를 바꿔야 돼요. 당신은 죄로 인한 저주와 심판을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을 때 그 모든 저주와 심판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받게 된 사람, 이렇게 바꿔야 되는 것이지요. 그냥 무작정 아무한테나 대고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났다 그건 거짓말이거든요.
그 사람이 구원받아야 사랑받을 수 있는 거지요. 구원도 안 받았는데 하나님께서 막 사랑하십니까? 그건 올바른 하나님이 아니지요. 여기에 사랑이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죄인들이 하나님 사랑하는 거 보셨습니까? 구원받지 않은 죄인들이 하나님 사랑하는 거 보셨어요? 없잖아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의 아들을 우리 죄들을 위하여 화목제물로 보내신 것이라. 요한일서 4:10 > 이게 사랑이에요. 아무나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그거 부르면 안 되는 거예요.
이러한 사랑이 있기 때문에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이렇게 정의를 내렸지요. 하나님은 사랑하신다가 아니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이에요. 자! 하나님은 사랑이시지 결코 사랑이 하나님은 아니지요. 바뀌면 안 됩니다. 악한 현 세상은 사랑을 신으로 섬기지요. 사랑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한단 말이에요. 그래서 이들에게는 불륜도 사랑이에요, 간통도 사랑이에요, 혼전 성관계 같은 간음과 음행도 사랑이에요. 동성연애도 사랑이에요. 그래서 섹스를 위해 돈을 쓰고 모든 인생을 탕진하기까지 하지요. 왜요? 사랑이 그들의 신이니까요.
하지만 성경은 완전하고 가장 높은 차원의 사랑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셔서 그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16)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에요. 완전한 사랑이지요. 마틴 루터는 이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을 성경의 심장이요, 복음의 축소판이라 했어요. (중략)
(동영상 12:30~16:40)
1. 하나님을 사랑하고 계십니까? 첫 번째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악을 미워하고 죄를 짓지 말아야 돼요. 시편 97: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주를 사랑하는 너희들아, 악을 미워하라.>
악을 미워하지 않고서는 주님을 미워한다고 말할 수 없어요. 죄와 거짓교리와 나쁜 습관들을 미워하지 않고서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도덕적이든 교리적이든 온전히 성별 하지 않고서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어요. 세상을 미워하지 않고서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성경 어디에서도요 세상을 사랑하라는 명령은 주어지지 않았어요. 어떤 사람은 그러지요, 아까 제가 인용했던 말씀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그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 아,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데 왜 세상을 사랑하라는 명령이 없다고 그렇니까? 이 표현을 잘 보셔야 돼요. 과거형입니다, 과거형.
2000년 전에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사랑하신 적이 한 번 있었어요, 딱 한 번. 그래서 독생자를 주신 거예요. 그건 과거입니다. 세상을 향해서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사랑은 과거 2000년 전 십자가 사건 때였던 것이지 지금도 계속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세상을 향해 주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오히려 <누구든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그는 우리 주께서 오실 때 저주를 받을지어다. 고전 16:22> 이렇게 저주를 선언하지요.
하나님은 지금 세상을 향해서 저주하고 계십니다. 분노하고 계세요. 죄에 대해 아주 못마땅해하시는 하나님의 노여움이 가라앉지 않고 있는 거예요. 세계 전역에서 태풍 기근 홍수 산불 전염병 전쟁 등의 재앙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신다면 이런 게 왜 일어나겠어요? 다 막아 주시지요. 다 막아주시지요. 죄가 들끓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징계와 재앙들을 보내시는 거예요.
자! 그런데 보내시는 목적은 무얼까요? 구원받으라는 거예요. 회개하라는 거예요. 돌이키라는 거에요. 정신차리라는 것이에요. 죄를 그만 지으라는 거에요.
예수님 께서는요 세상을 위해 기도조차 안 했습니다. 심지어 성경은 무어라고 그래요? <세상과 친구 되는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의 원수가 되니라. 야고보서 4:4> 그랬어요.
죄인들을 향해서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받고 있지요> 이런 CCM가사나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며 당신을 향한 놀라운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로 시작하는 CCC전도지 사영리, 이 첫 문구, 자! 이런 것들은요 세상 사람들의 호감을 사고 싶어 하고 죄인들의 귀를 즐겁게 해 주기를 좋아하는 목사들과 교인들이 자주 사용하는 거짓말이에요. 하나님은 사랑하지 않으세요. 분노하고 계시는 거예요.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싶다면 방법이 있어요, 없는 게 아니에요. 2000년 전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이 주어졌던 십자가를 통과해야 돼요. 죄인들의 구속을 위해서 죄인들을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시고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믿으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사랑받는 것이지요. 사랑받는 순간 이제 그를 위한 놀라운 계획이 펼쳐지는 것이에요.
하지만 그전까지는요, 죄인들을 위한 계획은 딱 한 가지, 뭘까요? 구원받으라는 거예요. 그것밖에는 없어요. 죄인들을 위한 유일한 계획은 지금 당장 무릎 굻고 예수님 믿겠다고 기도하라고 그것 밖에는 없습니다. 그 믿음을 갖지 않는 이상 하나님은 그에게 사랑을 베플 수 없어요. (중략)
(동영상 22:22~ 24:17)
2. 하나님을 사랑하고 계십니까? 두 번째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해야 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계명들, 말씀들을 지켜야 됩니다. 요한복음 14:21절을 보겠습니다. <나의 계명들을 가지고 그것들을 지키는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니,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나의 아버지께 사랑을 받으리라. 또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 사람에게 나 자신을 나타내리라.”고 하시더라.> 자! 이 말씀 매우 실제적인 말씀이에요.
말씀들을 지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거예요. 말씀들을 안 지키면 뭐예요? 사랑하지 않는거예요. 이보다도 분명한게 어디있어요. 자 여기서 말씀들을 지킨다는 것은 두가지 의미에요. 우선 말씀들을 보존한다는 겁니다. 영어로는 Keep, 이 단어는 간수하는거에요. 그런 의미에서 지킨다는 거에요. 첫번째 의미는. 즉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들을 잏어버리지 않는 거에요.
이미 말씀들이 없어진 성경들이 있다면 그건 보지 말아야 됩니다. 없어진 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계속 붙들고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한게 아니에요. 첨가되고 삭제되고 변개된 성경을 믿고 사용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왜요?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지 못한 거에요. 잃어버린 거예요, 일부분을. 그걸 아셔야 됩니다. (중략)
(동영상 29:15 ~30:45)
이미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 사람은요, 말을 안 해요. 뭘 하고 있습니까? 행동을 하고 있지요. 굳이 말을 다 안 해도 하나님 다 아시지요. 굳이 말로 해야 아나요. 그런데 세상 교회들, 세상 가짜 교인들은요, 말을 계속하지요. 주님 사랑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은사주의 집회를 가보세요. 그들의 하는 말은 다른 게 없어요. 주님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이 말만 계속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뭐라고 그러는지 아세요? 고백했더니 하나님께서 나의 귀에다가 <그래, 나도 알아. 내 아들아, 내 딸아, 나도 널 사랑한단다.> 이런 말 한다는 거예요. 좋아요, 그런데 그들이 말이 맞다고 쳐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 말만 하지 않을걸요. 그 뒤에 뭐라고 그랬을까요? <그래, 네가 나 사랑하는 거 아는데, 이제 말만 하지 말고 나가서 복음을 좀 전해, 복음을. 엉덩이 차기 전에 빨리 나가> 이 말은 쏙 빼는 거지요.
은사주의자들이 복음 전하는 거 보셨습니까? 그들이 거리설교 하는 거 보셨습니까? 구령하는 거 보셨습니까? 변개된 성경을 쓰는 사람들이 과연 거리에서 설교하고 구령하는 거 보셨습니까? 그냥 사람들 끌어모으는 거 그거 말고, 통기타 치면서 CCM 부르고, 커피 끓여주고, 휴지 나누어 주고, 그거 말고요. 제대로 된 복음 전도지를 가지고 성경을 펼쳐서 복음을 정확하게 전해서 영접기도를 통해서 초청하고 있냐고요? (중략)
(동영상 32:35~ 38:03)
3.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사랑한다면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섬겨야 합니다. 최우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물으셨지요? 요한복음 21:15절에서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
그냥 나를 더 사랑하느냐 그게 아니었어요. 이 사람들보다, 자! 베드로의 양심과 정곡을 찌르는 아주 날카로운 질문이었어요. 왜 예수님께서는 그냥 사랑하느냐 보다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왜 이렇게 물었을까요?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붙잡히시던 날 밤 베드로가 뭐라 그랬어요? 설령 모든 사람이 주로 인하여 실족할지라도 나는 결코 실족하지 않겠습니다 그랬어요. 그거에 대한 하나님께서 다시 한번 확인하시는 거예요. 네가 그렇게 말했잖아? 모든 사람이 다 실족해도 너는 실족 안 한다고 했잖아! 그런데 실족했잖아. 그렇다면 지금은 어떠니? 지금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물으시는 거예요.
자 이 질문은 여러분에게도 주어지고 있습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사랑하는 누구누구야 너는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너의 부모보다, 너의 자녀보다, 너의 남편보다, 너의 아내보다, 너의 친척들보다, 너의 직장 동료보다, 너의 가장 친한 친구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물으시는 거예요. 좀 더 확장해 보면요 네가 가진 돈보다, 너의 직장보다, 너의 사업보다, 너의 학위보다, 네가 가진 명예나 권력보다, 너가 가진 집보다, 부동산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 질문은 우리의 양심을 파고들고 있습니다. 이 질문은 이렇게 바꾸어 볼 수 있어요. <너는 오직 나를 위해서라면 너가 사랑하는 다른 사람들, 너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 포기할 수 있어?> 이 질문이에요. 심지어 이런 질문이기도 합니다. <오직 나를 위해서라면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을 미워할 수 있겠어?> 아니 어떻게 부모를 미워합니까? 물론 주님께서는 "부모를 미워하라." 이런 명령을 안 주시지요. 부모를 미워하라고 했을 때에는요 그것은 상대적인 관점이에요. 즉 부모보다 나를 더 사랑할 수 있느냐? 그 말이에요.
자! 그래서 누가복음 14:26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는 거예요. "누구든지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내나 자식이나 형제나 자매나, 정녕,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않은 채 내게로 오면 그는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느니라." 당연히 우리는 부모를 사랑해야 되지요, 자녀를 사랑해야 되지요, 남편과 아내를 사랑해야 되지요.
그런데 하나님과 남편을 선택해라, 하나님과 아내를 선택해라, 하나님과 부모를 선택해라, 하나님과 네가 사랑하는 기타 등등의 것들을 선택해라 했을 때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어요?
하나를 미워하지 않으면 하나를 선택할 수 없는 거예요. 둘 다는 있을 수 없어요.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했잖아요? 하나님을 섬기려면 내가 재물을 포기하는 거예요. 재물을 섬기려면 내가 하나님을 포기해야 돼요. 중립지대는 없습니다. 자! 상대적인 관점에서 선택을 했을 때 나는 무언가를 미워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그것을 아셔야 됩니다. 하나님은요, 절대적인 분이시기 때문에 둘을 놓고 선택할 대상이 아니에요. 그 어떤 것들과 관계없이 유일하게 나는 무조건 하나님을 선택하는 거예요. 이건 재는 게 아니에요, 이건. 하지만 하나님보다도 그 사람들을 더 사랑하는 사람들, 하나님보다도 다른 어떤 것을 더 사랑하는 사람들은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 주님의 질문 앞에요, 하염없이 눈물만 흘립니다. 왜 그럴까요? 주님 죄송합니다. 저는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결코 포기할 수 없어요. 그래서 주님을 올바르게 섬기지 못하는 거예요.
하지만 베드로는 주님께서 그런 질문을 했을 때,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주여 그러하옵니다. 주께서는 내가 주를 사랑하는지를 아시나이다." 그러자 베드로의 진솔한 사랑을 확인한 예수님은 지체 없이 임무를 맡기시죠. "양들을 먹이라. 양들을 치라." 베드로의 잃어버린 제자의 직분을 다시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에 주님께서는 일을 맡기신 거예요. 그 결과 사도행전에 가면은 어떤 일이 벌어진 줄 아십니까? 베드로가 행한 설교를 통해서 3,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구원받습니다. 또 사도행전 15장에 가게 되면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문제에 관한 논쟁이 벌어졌을 때, 베드로는 "믿음을 통해 받는다, 구원을."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믿음을 통해 받는 구원에 대해서 정연하게 설명을 합니다. 자기가 경험한 사례를 들어서, 그러면서 형제들의 잘못된 부분들을 바로잡아 주지요. 주님을 향한 사랑의 고백이 있었을 때 이런 놀라운 일들이 있는 거예요. (중략)
(동영상 47:19~49:17 끝)
바울이 이야기했지요? < 모두 자기 자신의 일만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은 구하지 아니하느니라. 빌 2:21> 가장 큰 이유가 무얼까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이 마지막 배교한 교회시대에는요, 가장 문제가 사랑의 문제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뭘 사랑해요? 자기 자신을 사랑해요. 자기 자신을 사랑하다 보니까 자기의 정욕을 채우기 위해서 돈을 사랑하게 되고, 자기 정욕을 채우기 위해서 쾌락을 사랑하는 것이에요.
결국 하나님보다도 쾌락이나 돈을 사랑하는 게 더 커져버린 것이지요. 그러니깐 주님을 위해서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 1도 안 되는 것이지요. 내가 왜 그걸 해야 되지? 내가 왜 그런 손해 보는 짓을 해야 되지? 세상에서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직장일도 바빠 죽겠는데, 학교에도 공부할 게 얼마나 많은데, 내가 주님을 위해 섬길 시간이 없는데. 정말 여러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주님께서 그런 정도의 하나님밖에 안 되시는 거예요? 여러분의 인생에는요?
주님은 여러분을 위해서 그분의 몸을 다 내어주셨는데, 여러분은 주님을 위해서 무얼 하셨지요? 주님께서 묻습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정말로 그렇게 고백하잖아요? 광명 찾았잖아요? 지옥에서 빠져나왔잖아요? 아! 그런데, 하나님께서 질문하실 때,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 질문 앞에서 주저주저한다면 정말 구원받은 거 맞습니까? 자! 이러한 질문 앞에 주여 그러하옵니다. 주께서는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아시나이다. 이렇게 진솔하게 기꺼이 말뿐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그렇게 반응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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