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지방에 있는 친구가 와서 저녁을 먹게 되었다. 식사가 끝나고 서울에 왔으니 내가 계산 하겠다고 하니 그 친구가 더치페이 하자고 했다. 그래서 1차 식사는 내가 낼 테니 대신 2차로 가볍게 맥주한잔 사라고 하며 계산을 했다. 여러명이 같이 식사를 했다면 부담이 될 수 있지만, 둘이 먹으면서 돈을 나누어 각자 내는 것은 왠지 마음이 불편했다.
일상에서 자주 쓰는 ‘더치페이(Dutch pay)’는 돈을 각자 부담하는 것을 말한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네덜란드 사람을 일컫는 Dutch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더치 트리트(treat·대접하다)’라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한턱내거나 대접하는 것을 즐기는 네덜란드인들의 문화이다.
그런데 네덜란드와 전쟁을 치르며 식민지 경쟁을 하던 영국인들이 그들의 문화를 비하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트리트’ 대신 ‘페이(pay·지불하다)’로 바꿔 표현했다. ‘자기가 먹은 음식의 비용만을 지불하는 인색한 사람들’이라고 조롱하기 위해 쓰기 시작한 것이 더치페이의 유래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기성세대엔 조금 어색하지만 젊은 세대엔 자연스러운 것이 바로 더치페이 문화이다. 젊은 사람들은 밥이나 술을 먹고 난 다음 돈을 각자 나누어 내는 걸 당연시하고 있다. 요즘은 50+세대에게도 전파되어 사회활동하면서 많이 정착되어 가고 있다
더치페이와 비슷한 의미의 우리말은 ‘추렴’이다. 한자어 ‘출렴(出斂)’이 원말이다. 추렴은 ‘모임이나 놀이 등의 비용으로 여럿이 각각 얼마씩의 돈을 내어 거둠’을 뜻한다. 이와 비슷한 뜻으로 많이 쓰는 한자어 각출(各出). 갹출(醵出·거출) 이 있다.
통상적으로 돈을 나누어 낼 때 흔히 ‘n빵(1/n)하자’라고 많이 한다. 또한 ‘뿜빠이 하자’라고도 하는데, 分配(ぶんぱい, 분빠이)라는 일본말이다. 종종 쓰지만 가끔 헷갈리는 말이 ‘각출’과 ‘갹출’이다. 둘 다 돈을 나누어 내는 것은 맞는데 그러나 ‘각출’을 쓰느냐, ‘갹출’을 쓰느냐에 따라 의미가 조금 달라진다. ‘더치페이’는 각출이나, ‘뿜빠이’는 갹출이다.
‘각출(各出)’은 ‘각각 내놓음’, ‘갹출(醵出)’은 ‘같은 목적을 위해 여러 사람이 돈을 나누어 냄’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예를 들면, 5만원의 밥값을 다섯 사람이 1만원씩 나눠 냈다면 ‘각출’한 게 된다. 그러나 좀 여유 있는 사람은 2만원을 내기도 하고, 돈이 별로 없는 사람은 1만원이나 5천원을 내기도 해 총 5만원을 거뒀다면 ‘갹출’한 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말과 비슷한 순우리 토박이말 중에 ‘노느매기’ 라는 예쁜 우리말이 있다. 사전에는 ‘물건 따위를 여러 몫으로 갈라 나눔. 또는 그 몫’ 이라고 한다. 배분(配分), 분배(分配), 할당(割當)이 비슷한 말이다. 예를 들면, ‘일에 참여한 사람들이 억울하지 않게 노느매기를 하느라 창수는 진땀을 뺐다’. ’그녀는 하루 종일 주워 모은 조개를 나에게 노느매기해 주었다’ 에 쓰인다.
그런데 이런 ‘더치페이’의 문화가 우리 사회에도 빠른 속도로 퍼져 있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는 합당한 이유를 대며 “오늘은 내가 한턱 쏜다”는 점을 미리 말하지 않는 한, ‘각자 지불’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고 한다. 한 식당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식사를 하던 일행이 계산대 앞에 줄을 서서 각자의 신용카드로 제 밥값만 치른다. 요즘 음식점 계산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이처럼 둘 이상이 만나 비용을 나눠 내는 것을 외래어로 더치페이, 우리말로 추렴, 한자어로 갹출 또는 각출이라고 한다. 국립국어원은 외래어인 ‘더치페이’ 대신 알기 쉬운 우리말 ‘각자 내기’로 순화할 것을 권고했다. 우리 사회가 그만큼 야박해진 건지 아니면 허세가 사라지고 실질이 자리 잡게 된 건지 쉽게 판단이 서지 않는다. 정 때문인지, 체면 때문인지 ‘각자 내기’가 아직은 어색하지만 서로 부담 없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첫댓글 히야!!! 각출, 갹출, 추렴, 노느매기. 재밌네요~
그동안 별 생각없이 구분하지않고 막 썼는데 말이죠ㅎㅎ
비슷하지만 다른 의미가 있죠...ㅎㅎㅎ
🌹
의미있는 답글...?
더치페이 그냥 나누어낸다 라는 정도로만 알고 있어는지
의미를 알고보니 ~~음~~~
각출
갹출
ㅏ와 ㅑ의 차이
대단하네요.
ㅎ
식견을 넓혀주셔서 감사합니다.
의미을 알면 더 재밌지요..
저도 최근에 더치페이 경험했는데 좋았어요.
상대는 같이 공부하는 사람으로 만난 지 1개월된 사이였는데,
상대방이 먼저 제의하니 부담감 제로!
임샘은 생각이 참 깊으신듯 합니다....
박학다식 박호영샘
과찬의 말씀.... 남희샘! 안 뵌지가 꽤오래 된것 같은데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