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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곡물시장을 쥐락펴락하는‘ABCD’를 아십니까? 카길(Cargill)·아처대니얼스미들랜드(ADM)·번기(Bunge)·드레퓌스(Dreyfus) 등 4대 기업 얘기입니다. ‘곡물 마피아’로 불리는 세계 곡물 메이저기업들입니다. 이 가운데 1865년 세워진 카길은 독보적인 세계 최대 곡물 기업으로 현재 직원만 14만2000여명을 두고 세계 67개국에 지사를 두고 있는데 지난해 매출이 1367억달러(약 144조 9020억원)입니다. 비상장 가족기업으로 이 회사의 주주 구성이나 세부매출은 비밀에 감춰져 있습니다.
카길이 취급하는 품목은 농산물 유통 전 분야입니다. 문제는 세계 곡물 시장을 쥐고 흔드는 카길 등을 빼고는 농산물 거래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는 점입니다. 우리나라 유통 시장도 마찬가지죠. 지난해 국내 수입된 곡물 중 이들 4개 회사를 통해 들여온 게 61%에 달합니다.
◇한국 정부의 야심찬 ‘한국판 카길 계획’
문제는 우리나라는 자체적으로 곡물을 생산해 조달하는 자급률이 상당히 낮은 국가로 최근 통계치인 2011년에는 자급률이 22.6%로 OECD 회원국 중 최하위라는 겁니다. 쌀 정도만 안정적일 뿐 밀, 옥수수, 콩 등은 모두 국내 자급률이 한자릿수입니다. 부족분은 해외에서 수입해야 합니다. 그래서 몇 년 전부터 등장한 용어가 자급률이 아닌 자주율입니다. 유사시를 대비해 자급률(自給率)이 아닌 자주율(自主率)을 높여야 한다는 거죠.
이를 위해 이명박 정부는 곡물을 조달해올 독자적인 기구를 만드는 방안을 추진했습니다. 2010년 초 시작된 ‘한국판 카길’ 계획입니다.
핵심은 농수산물유통공사(aT·현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가 안정적인 수입선 확보를 위해 국제 곡물 거래 시장의 주 무대인 미국에 회사를 세워 물량을 조달해오는 것입니다. 실제로 2011년 4월 농수산물유통공사는 삼성물산, 한진, STX 등과 공동으로 AGC(aT Grain Company·이하 aT그레인)를 미국 시카고에 세웠습니다.
당시 aT그레인은 산지 엘리베이터(현지 내륙운송시설), 강변 엘리베이터, 수출 엘리베이터를 확보해 첫 해부터 콩 5만t, 옥수수 5만t을 국내로 들여올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시행 5년 차인 2015년부터는 연간 215만t을 들여오겠노라고 야심찬 포부를 펼쳤습니다.
하지만 2년이 지난 지금 사정은 어떨까요? ‘소문난 곳에 먹을 것 없다’는 말 그대로 aT그레인이 국내로 들여온 물량은 첫해 콩 1만1000t이 전부입니다. 왜 그럴까요? 여러 농업관계자를 만나본 결과, 대다수 의견이 “정부가 너무 성급했다”라고 성토하더군요.
차근차근 실행계획을 세워 실천하기 보다 ‘한국판 카길이네’라며 동네방네 소문을 내니 국제 곡물시장에서 “한국판 카길? 그래 한번 니들 맘대로 해봐라”라는 식의 ‘왕따 문화’가 형성됐다는 겁니다. 말씀 드린 것처럼 세계 곡물시장은 선수가 몇 명 되지 않고 업종의 특성상 매우 보수적입니다.
곡물유통시장에는 엘리베이터가 중요한 운송 수단입니다. 곡물이 있으면 그걸 강이나 물류 중심지로 모으는 시설이 필요한데, 이 시설이 곡물엘리베이터입니다.
산지 엘리베이터에서 모아진 곡물은 강변에 있는 엘리베이터나 내륙에 좀 더 큰 시설로 옮겨서 싣죠. 그리고 주요 곡물수출항에는 큰 규모의 수출엘리베이터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곡물 유통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엘리베이터를 제대로 확보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일본의 끈질기고 집요한 세계 곡물시장에서의 ‘사투’
원래 aT그레인은 10기 정도의 산지 엘리베이터를 인수하고 강변 엘리베이터나 수출 엘리베이터에는 일정 부분 지분에 참여하는 투 트랙(Two Track) 방식을 준비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aT그레인은 산지 엘리베이터를 보유한 중소규모 기업 몇몇과 접촉했지만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을 제시하는 바람에 실제 계약으로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처음부터 우리 전략을 다 노출시켰으니 누가 거래에 적극 응했겠습니까.
정부는 다시 전략을 산지 엘리베이터 인수에서 수출 엘리베이터 지분에 참여하는 것으로 바꿨습니다. 그러나 이마저도 쉽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곡물가가 오르고 있는데 기존 선수들이 누가 빠지겠습니까. 결국 고심하던 정부는 대안으로 STX팬오션이 메이저 곡물회사 번기, 일본 종합상사 이토추와 공동으로 세운 곡물유통회사 EGT(Export Grain Terminal)의 STX팬오션 지분 20%를 매입하는 것을 비밀리에 추진합니다. 그런데 이마저도 결국 실패했습니다.
정부 관계자의 증언입니다.
“2011년, 2012년 투입된 정부 예산이 640억원 정도 있어 20% 지분(약 430억원)을 구입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어요. 그런데 정작 이토추와 번기 쪽에서 원한 것은 ‘앞으로 관련 시설을 추가적으로 지어야 하는데 당신네(농수산물유통공사)가 꾸준하게 돈을 댈 수 있는가’였습니다. 그 부분에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자 두 회사는 우선매수권을 행사해 STX팬오션 지분을 사들여 이마저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한국판 카길 사업은 사실상 ‘올 스톱’ 됐습니다. 정부는 이번 기회에 곡물조달시스템 전체를 다시 손보겠다고 하지만 국회 상임위는 ‘무용론’을 앞세우며 관련 예산을 회수할 태세입니다. 실적도 없고 앞으로도 진척을 내기 힘들다는 판단에서입니다.
‘한국판 카길 프로젝트’의 실패 경험을 통해 일본의 치밀한 전략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일본은 미츠비시, 이토추, 미쓰이 등 종합상사들이 해외곡물 조달에 적극 나서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해 이들 회사로부터 사들인 곡물량이 전체 수입량의 13%나 되죠. 일본 역시 쉽게 노하우를 터득한 건 절대 아닙니다. 일본 종합상사들도 처음에는 미국 농가와 농업관련 기업들로부터 수많은 배척을 당했다는군요.
하지만 일본은 철저하게 전략을 숨기고 하나둘씩 현지엘리베이터와 수출 엘리베이터를 매입해 지금은 현지 생산부터 조달까지 모두 아우르는 일관 시스템을 갖췄습니다. 시스템을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이 무려 30여년이었으니 엄청난 노력의 대가이자 인내심의 승리라고 할 수 있죠.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해외곡물조달은 정말 중요한 걸까요. 이에 대해선 여전히 두 가지 입장이 팽팽합니다.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쪽에서는 aT그레인과 같은 기업이 조달해온 곡물의 가격이 현 시스템대로 갖고 오는 것보다 싸겠느냐고 반문(反問)합니다.
곡물시장은 철저히 규모의 경제로 돌아가기 때문에 aT그레인과 같은 우리 민관합동기업의 납품가가 대형 회사들 것보다 비쌀 경우, 수입당사자인 우리 업체들이 이를 받아들일 수 있겠냐는 논리입니다.
두 번째는 전 세계적으로 곡물 위기가 찾아왔을 때 해당국가 정부가 금수(禁輸) 조치를 취하면 어쩌겠느냐는 지적입니다. 물론 이 부분은 전혀 실현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조달시스템을 만들어야 하는 쪽에서는 또 우리 식탁을 카길과 같은 외국기업들에게 맡기거나 통째로 내줘서는 절대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값싼 수입 농산물을 제공한다고 식탁을 온통 그들에게 맡기고 내놓았다가 나중에 비싼 돈을 내고 먹으라면 어쩌겠냐고 말이죠. 이 두 가지는 여전히 논란거리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곡물조달시스템은 성급하게 단기 성과를 내기 위해 추진할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5년 단임제 정부에서 치적용 대상도 결코 아닙니다. 선진국인 일본도 30년이 걸려 차곡차곡 일궈냈다는 점을 명심하고 세계 무대에서 힘을 키우고 전략적 접근을 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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