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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해달별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으뜸빛
조선 최고의 요리서 ‘음식디미방’ 저자 장계향의 친정집 <57> 안동 광풍정과 경당고택 | |
2013.04.25 01:00 [김창원 기자] |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요즘 |
380여 년 전의 주인 경당이 나타나 반겨줄 것만 같다.
살다간 주인을 닮은 듯 분위기가 고졸하고 품이 넉넉하다. 1630년, 경당 장흥효가 처음 초당을 지어 200여 명의 제자들과
함께 담론을 즐기며 공부하던 곳으로 현재의 모습은 1838년(헌종 4년)에 지역 유림들이 다시 세운 것이다.
경당은 정자 뒤 솔밭을 견고하게 지키는 바위를 제월대라 이름 붙여졌다. 20세기 초에 들어 그의 10대 손이 그 위에 작은
정자를 짓고 바위의 이름을 따 정자의 당호를 붙인 터에 이제 광풍정과 제월대는 경당고택터와 어우러져 발길이 잦은
명소가 되고 있다.
경당은 비록 아들이 없었지만 영특한 외동딸이 있었다. 경당은 어린 딸 계향을 끔찍이도 아낀다. 저녁상을 물린 부녀는
으레 제월대 솔밭을 거닐면서 바람과 달빛을 노래하곤 한다.
배꽃이 지고 대문 앞 해묵은 탱자나무에서 분처럼 피어나는 하얀 탱자꽃을 바라보며 계절의 변화를 찬미하는가 하면 5월의
달빛에 일렁이는 청솔가지가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이 된 정겨운 모습도 함께 바라본다.
어느날 경당은 아름다운 규수로 성장한 계향을 데리고 솔밭 아래 길게 늘어뜨려진 그네를 흔들면서 이야기를 나눈다.
“애야, 성인이란 뭐냐” “아버지, 성인도 우리들 보통 사람과 같지요”
“그렇다면 우리도 성인이 될 수가 있느냐” “그럼요, 성인이 되려고 배우고 노력하면 되지요, 그러나 그렇게 배우지 않는
것이 걱정이랍니다”
쉼 없는 자기성찰로 성인의 도에 이를 수 있다고 믿는 딸이 너무나 대견하고 자랑스러웠다. 어린 날 그네를 타고 시를
읊조리며 놀던 그 자리에서 어느새 훌쩍 자란 딸이 아버지의 학문적인 물음에 주저하지 않고 잠언적인 대귀를 하는 게
남아처럼 미덥기만 하였다.
광풍정 아래 햇살 바른 곳에 위치한 경당의 옛집은 1945년, 서후면 성곡리 현위치로 옮겨진 이후 지금은 채전밭으로 바뀐
채 빈터만 남아있다. 현재의 경당고택은 옛집을 옮기고 허물어 개축한 것으로 정침과 사당 등 건물의 배치공간이 전형적인
‘ㅁ’자형이다.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2칸 그리고 4칸의 우물마루가 깔려 있고 사당은 정침의 동북쪽 뒤에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사랑채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전면 반 칸은 툇마루를 깔고 난간을 설치해
놓았다. 종손 장성진씨에 의하면 개축하기 전과 건축구조는 변함이 없으나 생활공간을 조금 넓혔다고 하는데 조선시대
반가에 있는 전통 가옥의 면모를 짐작하게 해 준다.
대문에 들어서면 오른편 흙담 아래로 그 옛날 계향과 마주했으리라 상상되는 굵직한 탱자나무가 오랜 세월을 견디고 있다.
그 나무는 70여 년 전 금계리에서 옮겨 올 때 함께 온 고목으로 해마다 여름이면 여전히 진초록의 가지마다 하얀 찹쌀 같은
흰 꽃을 탐스럽게 피운단다. 그리고 정침을 건너 널찍한 뒤뜰로 가면 굽은 청솔가지에 긴 끈으로 매달은 그네가 눈에 띈다.
외딸 계향이가 어린 날 즐겨 타던 그네를 다시 옮겨 놓은 건 아닌지….
◆ 퇴계학맥의 교량자 경당 장흥효
학봉(김성일)과 서애(류성용) 그리고 성주의 한강(정구)으로부터 직접 수학한 경당은 관직에 나가지 않고 향리에 은거하면서
저작과 교육에 몰두한다. 오로지 거경학(居敬學)에 중심을 둔 경당은 지역의 안동 권씨를 비롯한 의성 김씨, 진주 하씨, 원주
변씨 그리고 안동 장씨 등 다섯 문중이 연합하여 지은 경광서당(鏡光書堂)의 교수 겸 당장으로 초빙된다. 그의 나이 서른일곱,
학문적으로나 인간적으로 성숙한 때이다. 그의 일과는 제월대와 경광서당을 오고 가면서 서책과 학생들 속에 묻힌 생활이다.
어느 날 경당은 수업을 파하고 총명하면서도 심지가 굳은 제자 석계 이시명을 불러 길동무 삼아 살림집이 있는 제월대까지
함께 걸었다. 주거니 받거니 하는 사이에 오릿길이 여느 때보다 가깝기만 하였다.
제월대 바위마루에 오르자 초여름의 살가운 바람결에 짙은 솔향이 풍겨나고 산비둘기 우짖는 소리가 처마 끝을 스치고 간다.
산매화 진 자리에 마치 초록 치마 끝을 길게 드리운 듯 산 목련이 우아하게 피어 있다.
사제가 풍류를 즐기는 자리에 딸, 계향이가 사뿐히 차를 날랐다. 그즈음 경당은 상처한 지 몇 해 지난 터라 딸에게 차 심부름을
시킨 것이고 석계도 과년한 계향을 한 두 차례 면식이 있었던 터라 그리 어색하지 않았다.
솔잎 서걱이는 제월대 아래 마주 앉은 스승과 제자는 두루 학문을 논하다가 다향이 깊어갈 즈음에는 집안사 이야기로 옮겨간다.
결국 경당은 열아홉의 나이가 되도록 시집을 보내지 않은 무남독녀 계향을 이시명에게 부탁한다. 상처한 지 근 3년이 되도록
재혼을 하지 않은 시명은 스승 경당의 진정어린 청원에 재색을 겸비한 계향과의 인연이 분에 넘치는 일이라며 스승의 뜻을
받들었다.
그날 이후 경당과 석계는 사제간의 관계를 넘어 장인과 사위가 되고 경당의 학풍은 그대로 사위 석계에게 전수된다. 이후
경당이 죽고 난 뒤 석계는 자신의 둘째 존재(이휘일)와 셋째 갈암(이현일)등 일곱 아들을 불러 앉히고 ‘안동 금계의 거문고
줄이 끊어지고 이제 너희에게 퇴계의 도통이 맡겨졌으니 더욱 정진하고 학문발전에 노력하라’고 당부한다.
그런 가학의 풍토 위에서 성장하게 된 셋째아들 갈암은 부친의 문집 중 ‘석계행장’에서 ‘아버지는 경당을 만나 학문적인
큰 도(道) 듣기를 기뻐하고 돈독하게 믿으면서 경당 학문의 오묘함을 전수 받아 광명정대한 지결을 자득하고 깨달았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장윤수, 선비의 삶,영덕 갈암 이현일의 종가) 그 관계를 유학사적으로 보면 퇴계학이 경당에 의하여 석계를
거쳐 존재와 갈암 형제에게 가학으로 이어지게 되었으니 경당은 퇴계학의 연결고리가 되었던 것이다.
그 후 갈암은 퇴계 이후 100여 년의 세월 동안 주리중심의 퇴계학을 주기중심의 율곡학과 차별화하는 영남지식인의 대표로
우뚝 솟는다. 경당에게 직접 수학한 부친 석계와 둘째 형 존재에 더하여 생모이자 경당의 딸인 장씨 부인의 체화된 학덕이
갈암의 학문적 탯줄이 된 것이 아닌가.
17세기 이후 퇴계학 중심의 영남유학은 다양하게 발전해 나가지만 그 중심에 흐르는 학맥은 퇴계에게 친자(親炙)한 서애와
학봉에 이어 경당 장흥효-갈암 이현일과 이재 부자-대산 이상정과 류치명과 김흥락-이진상-곽종석-그리고 회봉 하겸진 등
으로 계승 발전되어 왔다고 이해할 때 경당은 곧 퇴계 학맥을 갈암에게 전승시킨 충실한 교량 역할을 한 것이다.
경광서당을 중심으로 안동지방에서 많은 제자를 가르치면서 올곧은 선비로 살다간 경당은 ‘경당문집’과 ‘경당일기’ 등 다수의
저작을 남긴다. 그중에서 ‘경당일기’는 경당의 나이 51세(1614년) 때부터 62세(1625년) 까지 11년 6개월간의 일기를 엮은 책
으로 당시대를 이해하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일기의 내용이 때로 소략하기도 하지만 가정사와 자기성찰, 공부한 내용 그리고 교육활동 등 다양한 주제를 담고 있다.
모두 3권이데 그 상권은 분실되고 중권과 하권만이 남아있다. 경학을 실천해 나간 자신의 공부록이자 행동기록서라고 할
수 있어 조선 중기 선비의 일상과 수양의 면모를 엿보게 해준다.
◆ 딸, 장계향과 음식디미방
석계와 부부가 된 계향은 금계를 떠나 영해의 인량리에서 신접살이를 하다가 고개 넘어 영양의 석보면 두들마을로 옮겨
앉는다. 그 당시는 인량리와 두들이 모두 영해 땅이었다.
두들에서 정착한 장씨부인은 전처 자식과 아울러 열 명의 자녀를 양육할 뿐만 아니라 친정의 계모로부터 얻은 이복동생
4남매까지 거두어야 했던 철인과 같은 삶을 산다.
반가의 부인으로서 남다른 자녀교육에 대한 열정이 갈암과 같은 대유학자를 길러냈으며 아울러 시화를 즐기는 운치도
지녔다. 그리고 대가족을 거두어야 했던 까닭에 다양한 음식 만들기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음식마다 그 요리법을 일일이
기록으로 남긴다.
‘이 책을 이렇게 눈이 어두운데 간신히 썼으니, 이 뜻을 알아 이대로 시행하고 딸자식들은 각각 베껴 가되 이 책을 가져갈
생각일랑 절대로 내지 말며, 부디 상하지 않게 간수하여 빨리 떨어져 버리게 하지 말아라’
그의 나이 75세에 저작한 한글 최초의 요리서, ‘음식디미방’의 후기다. 146가지 요리법을 자세하게 설명한 다음, 음식을 아끼는
주방의 어머니로서 저작자로서 내린 훈령이다. 애써 만든 책이기에 손쉽게 들고 갈 것이 아니라 형제끼리 서로 만나 체취와
웃음을 섞고, 음식을 만들고 나누면서 소통하라는 간곡한 뜻을 남긴 듯하다. 장계향의 유지를 잘 받들어 현재 영양 두들마을에는
석계종부가 ‘음식디미방체험관’을 운영하고 있다. 석계종부가 전하는 디미(知味)의 레시피가 참으로 특이하다.
당시 고추를 식용화 하지 않았던 시대이던 까닭에 디미방에서는 후추와 재피 혹은 마른생강(건강)으로 맛을 조절했다고 한다.
그리고 바다가 가깝던 영해지방에서 시집살이를 했던 장씨 부인은 어만두, 대구껍질 만두 등 해물재료를 이용한 만두와 과질이
고운 동아를 얇게 썰어 피를 만들고 말아낸 동아만두를 즐겨 만들었단다.
어느 누구도 달리 흉내 낼 수 없는 디미방의 그 식단들은 옛 삶을 아로새겨주는 미식 중의 미식이다.
아녀자의 지혜야말로 그 친정에다 뿌리를 두고 있는 법이고 보면 장씨부인이 지닌 손맛의 근원도 친정이 아닐까? 장계향의
친정아버지 경당은 외손 갈암을 키워 낸 위대한 교량자다.
다만, 숙종대에 정부인의 품계를 얻은 딸 계향과 외손자 갈암의 걸출한 인물에 그 이름이 가려졌을 뿐이다. 경당은 어쩌면
자신의 모든 역량과 기운을 딸에게 고스란히 전해 준 선비라는 생각을 해본다.
최근 들어 정부인 장계향 선생을 기려 ‘경북여성선양인물 제1호’로 선정 하고 정부표준영정도 제작하기에 더욱 그 아버지
경당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김정식
담나누미스토리텔링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