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레기'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심각한 언론 불신 현상을 겪고 있는 요즘, 대안언론으로 사회전반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면서 종횡무진 활약하고 있는 뉴스타파 최승호 앵커가 양화진을 찾았다. 양화진 문화원(원장 박흥식)은 6일 뉴스타파 최승호 앵커를 초청해 ‘뉴스의 혼돈, 그리고 대안언론’이란 주제로 목요강좌를 진행했다.
최승호 앵커는 1961년 생으로 경북대 행정학과를 졸업했다. 그는 제5공화국 시절인 1986년 MBC에 입사해 PD수첩, 이제는 말할수 있다 MBC스페셜 등을 연출했으며 2003년부터 2005년까지 MBC노조위원장을 역임했다. PD수첩 책임 프로듀서 겸 진행자로 2005년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 문제를 방송한 그는 2012년 MBC에서 해고된 후 2013년 뉴스타파로 자리를 옮겨 국정원의 간첩증거 조작사건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자백이야기’를 연출했고 현재 간첩조작 의혹사건을 파헤치고 있다.
최 앵커가 MBC에 입사했을 당시만 해도 전두환을 찬양하는 땡전뉴스가 방송에 가득했다. 대문에 최 앵커는 “MBC 입사시험을 치르는 것에 대해 자랑스럽지 못했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다 87년 6월 항쟁 이후 방송민주화 운동이 이어지면서 MBC 내부구성원들은 땡전뉴스를 하지 말자는 결의를 맺고 노동조합을 만들어 단체협약을 통해 국장책임제라는 제도적 틀을 만들었다. 이 제도는 보도에 있어서 경영진들이 직접적인 관여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 관행을 유지시켰다. 최 앵커는 이런 국장책임제의 성과물 중 하나로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 조작 논란에 대한 보도였다. 이 사건은 당시 거의 우상과도 같은 인기를 누렸던 황우석 박사에 대한 도전과도 같은 것이어서 많은 국민들의 충격으로 다가왔다. 최근 개봉한 영화 ‘제보자’를 통해 다시금 화제가 되고 있는 줄기세포 조작 사건에 대해 그는 “이 취재는 국장책임자라는 룰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당시 황우석 박사의 존재는 대한민국에서 범접할 수 없는 존재로 언론들은 황우석 교수의 입만 바라보고 있었고 그의 발언은 그날그날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고 그때의 상황을 설명했다.
최승호 앵커는 줄기세포가 가짜일 가능성이 많다는 유영준 현 강원대 교수의 제보를 받은 후 의혹은 있으나 증거가 없는 상황이라 굉장한 딜레마에 빠졌다. 또한 이 문제에 대해 과학계를 상대로 취재를 할 경우 황우석 박사의 귀에도 취재를 한다는 사실이 들어갈 가능성은 자명한 일로 만약 조작된 것이 아니라면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는 이를 아무 근거도 없이 공격했다는 역적과도 같은 대우는 물론 PD수첩에 까지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안이었다.
최승호 앵커는 보도국장실로 들어가 이 문제에 대해 논의를 했고, 당시 보도국장은 “증거가 갖춰지기 전까지는 나에게까지만 보고하라”고 말했다. 국장책임제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최 앵커는 “6개월 동안 취재를 했고 줄기세포가 가짜라는 증거를 가지게 됐다. 국장책임제라는 제도적 틀이 없었다면 도저히 불가능했던 취재”라며 줄기세포 조작사건 취재를 하면서 받았던 압박으로 지금까지 혈압약을 먹고 있다는 사실을 훈장처럼 이야기했다. 최 앵커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이명박 전 대통령을 서로 비교하며 언론에 대한 그들의 상반된 태도를 이야기했다. 노 전 대통령은 청와대 홈페이지에 글을 기고해 “납득가지 않는다”고 표현할 뿐 직접적인 압력을 행사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명박 정권에서는 최승호 앵커가 4대강 사업에 대한 취재를 시작하자 김재철 전 MBC사장의 압력과 함께 청와대에서는 방송금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내기도 하면서 직접적인 압박을 가했다. 최 앵커는 “이 전 대통령의 4대강 사업에 대해 나도 이해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 조금이라도 도움되는 것이 있지 않겠는가 하면서 말이다. 대통령이 그렇게 하고 싶어하는데 강을 좋게 하는 것이 하나라도 있지 않을까하면서 정말 많이 고민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좋은 점을 발견하지 못했고 결국 4대강 사업이 이 전 대통령이 그렇게 하고 싶어 하던 대운하 사업의 변형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이 일 이후 최승호 앵커는 MBC경영진에 의해 미운 털이 박혔고, MBC가 파업을 했다는 이유로 해고를 당한다.
최 앵커는 “MBC의 이런 해고 조치가 80년대 초반 대량해고 이후 20년 만에 나타난 증상이었고, 사회적인 민주주의 체제는 당시 전두환 정권과는 비교도 못하지만, 언론의 자유 측면에서 만 보면 87년 6월 항쟁 이전 정도로 생각된다”며 현재 국내 언론 민주화 사정이 굉장히 건강치 않다고 밝혔다. 최 앵커는 이런 비정상적인 언론의 상황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 바로 ‘세월호 참사’라고 했다. 언론에서는 처음 368명 모두 구조됐다는 뉴스를 보도했다. 당시 목포MBC 기자들은 자신들이 체크한 팩트를 4차례나 서울MBC에 건의했지만, 서울MBC 데스크는 이를 묵살하고 중앙안전대책본부가 발표한 엉터리 집계만을 앵무새처럼 보도했다.
최 앵커는 이를 두고 “자사 기자들보다 정부의 말을 따르면 오류가 생겼을 때 편안하다. 현장 기자들이 전해주는 이야기들은 정부에게 불편한 내용이고 자기들에게도 불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완전한 언론참사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고 말했다. 최 앵커는 이런 언론들의 보도를 결국 정부까지도 사실로 믿게끔 했다는 것이 박근혜 대통령이 “아이들이 구명조끼를 입었는데 구조하기가 힘듭니까”라는 발언을 했던 계기가 됐을 것이라 추정했다. 또한 최 앵커는 해경이 제대로 된 구조를 펼치지 않은 이유도 이런 언론보도기 한 몫을 했다고 분석했다. 그 이후로도 언론은 제대로 된 자신들의 역할을 수행하지 않았다. 사고 지역은 바닷물이 파도하나 없는 잔잔한 상태였고 해경은 세월호 주위를 돌기만 할 뿐 제대로 된 구조조차 하지 않았음에도 언론들은 아주 열심히 최선을 다해 구조에 힘쓰고 있다는 식의 보도를 연이어 내놨다. 이는 유가족들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고, 최승호 앵커가 준비한 영상에는 한 기자가 “처음에는 세월호 유족들과 같이 밥도 먹고 그랬는데 나중에는 팽목항에 들어갈 수도 없을 만큼 우리를 흘겨봤다”고 눈물을 흘리며 증언하는 모습이 나왔다. 그리고 또 하나의 재미있는 사건이 발생했다. KBS 김시곤 전 보도국장이 “세월호 사고로 돌아가신 분들 숫자는 교통사고 사망자 숫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는 발언을 했다는 것이 언론 매체를 통해 보도됐고, 이는 이를 악물고 참고 있던 유족들이 KBS로 달려가는 시발점이 됐다. KBS에서 제대로 된 사과를 받지 못한 유족들은 곧바로 청와대로 발길을 옮겼다. 이는 길환영 전 KBS 사장이 청와대의 요구로 김시곤 전 보도국장을 불러 “청와대가 당신의 해고를 요구한다. 잠시 나가 있으면 나중에 좋은 자리를 마련해 주겠다”며 회유를 하게 했고, 이를 김시곤 전 보도국장이 언론에 폭로했다. 최승호 앵커는 이런 세월호 참사로 드러난 언론의 행태와 공영방송 이사진의 편향성 등을 통해 이 시대의 심각한 언론 지형 문제를 지적했다. 또한 최 앵커는 “이런 과정에서 길환영 전 사장이 물러나고 잠시 동안 해방을 맞을 시기에 터진 것이 문창극 사태”라며 이를 기자정신에 입각한 보도라고 칭찬했다. 최승호 앵커는 “지난 대선 전 노무현 전 대통령의 NLL포기 발언도 당시 남북정상회담 실무진들이었던 이들을 언론이 취재했더라면 소모적인 논쟁에 휩쓸리지 않았을 것”이라며 제대로 된 언론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면서 오히려 갈등을 부추기는 그들의 모습을 안타까워 했다. 최승호 앵커는 공영방송이 대중적인 영향력과 탐사보도에 유리한 특성들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하며 KBS와 MBC등이 제 역할을 해주길 기대했다. 최승호 앵커는 현재 탐사보도 전문 언론인 뉴스타파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는 뉴스타파에서 서울시 간첩사건 조작에 대해 취재해 그동안 합동신문센터에서 간첩조작 관행이 있다는 사실 등을 폭로했다. 최 앵커는 “뉴스타파는 탐사보도를 통해 우리 사회를 조금이라도 더 후퇴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고 그 의미를 부여했다.
최근 대안언론이 많아지는 이유에 대해 최승호 앵커는 “현재의 언론 상황과 공영방송의 상황은 지난 대선 때를 보더라도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있어선 안 되는 역할을 많이 했다. 때문에 대안적인 언론에 기대를 많이 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다음은 질의응답>
문) 취재를 하면서 감시나 혹은 외압 등과 관련된 어려움과 사실을 입증하기 위한 노력, 둘 중 어떤 것이 가장 어려운가, 그리고 그 2가지를 어떻게 점검해 가는지? 답) 권력에 대한 비판보도를 많이 하는데 그것은 사실 그렇게 어렵지 않다. 뉴스타파는 칼날 위에 항상 서있어서 조금이라도 삐끗하면 크게 다친다. 모든 상대를 향해 비판하는 존재기에 우릴 둘러싼 많은 국정원이나 보수언론들이 다 융단폭격을 할 것이다. 우리는 보도를 정말 최선을 다해 완전무결한 그리고 깨끗한 보도를 하자는 모토로 보도 과정에 조금이라도 흠결이 있으면 보도를 못하게 하는 등 굉장히 조심하는 편이다. 나는 PD수첩 이후로 음주운전과 같은 어떠한 위반행위는 절대로 하지 않는다. 국정원에서도 아마 답답할 것이다. 걸게 있어야 걸 텐데 말이다. 팩트를 점검 하는 것이 훨씬 어렵다. 늘 사실에 대해 겸손해야 한다는 생각을 마음속에 가지고 있다. 우리도 실수할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마음이 아프고 다시는 이런 실수 하지 말아야지 다짐하고 있다.
문) JTBC에 손석희 보도국장의 뉴스방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답) 손석희 선배를 아주 좋아한다. 노조활동도 같이 했고, MBC를 떠나 JTBC에 간다고 했을 때 다른 분들은 비판적으로 바라봤는데 나는 그렇지 않고 잘 결정하셨다고 했다. MBC에 있을 필요가 없는 상황이었다. (손석희 선배가) 김재철 사장이 나갈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했는데 MBC후임사장도 만만치 않은 사람이어서 더 있을 의미가 없었다. (손석희 선배가) 새로운 뉴스를 하겠다고 JTBC에 갔다. 손석희란 분이 가서 아무나 하는 뉴스를 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뉴스타파와 비교하면 성격 다르다. 우리는 심층탐사보도를 중시하고 JTBC는 데일리 뉴스 성향이 있다. 탐사보도는 우리가 강점을 보인다.
문) 유병언의 죽음에 대한 질문을 하겠다. 누가 죽인건지, 왜 수사를 안하고 있는지, 정말 죽은 건지, 아무도 관심을 안 갖는 이유와 혹시 취재를 한 적이 있는지 알려 달라.
답) 그 부분은 취재를 안했다. 세월호를 취재하면서 중간에 유병언 회장에 대한 관심이 언론에서 지나치게 부각시키기에 우리에 제보도 있고 (구원파를) 취재할 수도 있었는데 우리까지 거기에 초첨을 맞추면 판도가 온전치 못해서 우리는 사고 상황과 구조상황에 초점을 맞췄다. 시신이 발견된 후 잠깐 취재해볼까하는 고민도 했는데 미처 하지 못했다.
문) 뉴스타파를 비롯한 대안미디어끼리 상호 협력과 교류를 하는지, 대안언론이 합쳐지는 것이 나은지 아니면 각자 갈 길을 가는 것이 좋은지?
답) 합치기는 어렵다. 그것이 좋은가 하는 생각도 하는데 각자 나름의 장점들이 있다. 우리가 심층탐사보도를 전문적으로 한다면 국민TV는 데일리 중심적인 보도를 한다. 각자 나름대로의 장점을 살려 일단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한 목표다. 그 후 안정적으로 몇 년이 지나면 그런 문제를 검토할 때가 오지 않겠는가 생각을 하는데 쉽지 않다. 색깔도 조금씩 다르고 언론인들을 한군데 모아놓으면 적응을 잘 하지 못한다.
문) 4대강을 비롯해 간첩조작 사건을 취재할 때와 같은 중요한 사건을 취재할 때 우선순위는 무엇인가 사명감인가 공익인가 아니면 뉴스타파의 호기심인가? 답) 호기심은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다. 호기심이 강한 사람이 취재도 잘한다. 사실 크게 보는 것은 이 사안이 얼마나 중요한가이다. 이것이 우리 사회에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이대로 방치했을 때 어떤 문제가 생기는가? 바로잡았을 때는 어떻게 될 것인가를 고민한다. 황우석 박사 사건의 경우도 우리는 그것에 취재를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몇달 동안 아내한테도 비밀로 했는데 혈압이 올라가고 스트레스도 받고 밤잠을 못자고 괴로워하니 아내가 눈치를 채고 나한테 물어봤다. 그때 한학수 PD와 비밀로 하자고 이야기했는데 한학수 PD가 먼저 이야기를 했더라. 아내는 “당장 그만둬라 큰일난다”라고 이야기했다. 그만큼 그 취재를 굉장히 두려워했다. 훨씬 큰 어마어마한 일들이 실제로 일어났다. 광고가 떨어져 나가고 해서 MBC를 그만두는 날 왔구나 싶었고, MBC를 그만둘 뿐 아니라 PD수첩이 없어지고 평생 국민들로부터 아이들까지 “너의 아버지는 나쁜 사람이야”라는 소리를 들을지도 모르는 상황까지 잠깐 느꼈던 순간이 있었다. 하루정도였지만 그런 일들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공명심과 특종까지는 아니지만 이런 사안을 PD수첩이 아니면 어디서 하겠나 해서 그것만으로 버텼다. 우리 대한민국 국민 모두를 숭배 감정까지 느끼게 만든 사안이 진실이 아니고 거짓이다는 것을 언론이 알았는데 점검도 안해보고 그냥 넘어가면 그런 대한민국은 무엇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돼 죽을 둥 살 둥 하게 됐다.
문) 세월호 참사와 4대강사업, 황우석 사건에서 발생한 국가공권력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답) 기본적으로 굉장히 우리는 나태한 국가공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국가 공권력이 정상적으로 작동했으면 줄기세포는 ‘사이언스’도 점검 못한 문제지만 나중에는 점검할 수 있는 것들이 있었는데 국민의 이익을 바라보기보다 위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자기 개인에 돌아올 이익을 생각하고 (또 아랫사람은) 윗 사람에게 필요한 결정을 문제가 있어도 그냥 지나가는 것이 반복된다. 간첩조작 사건과 세월호도 일련의 나태가 극에 달한 모습을 보여줬다. 서해경찰청은 (전원구조 등의 보도가)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제대로 보고도 안하고 그런 국가 파탄상태기 몇 시간을 연장시켜 국민과 공익을 생각하는 공인의 마인드가 아닌 사익을 추구하는 공직자들이 대한민국 사회의 근간을 차지하는 불행한 상황에 처해있고 더 심해지고 있다. 새로운 국정원장이 들어왔을 때 환골탈퇴를 해야 할텐데 그렇지 않았다. 창조간첩의 주역들이 유가려(서울시간첩사건 피해자 유오성 씨 동생)에게만 간첩조작을 했겠는가? 이런 상황을 고치고 개선하기 위해서는 언론이 지적해줘야 한다. 문) 대안언론 꾸러나가는 데 어려움이 있는가?
답) 사실 다른 대안언론에 비하면 행복한 편이다. 후원자 3만5천명으로 충분하지는 않지만 그래서 아직까지는 괜찮다. 하지만 어떤 프로젝트를... 지금 원전묵시록을 두 달째 하는 상황인데 다른 큰 사건이 갑자기 터진다거나 그럴 때는 잘 대응을 못하는 상황이다. 그래서 많이 도와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시민들은 대단하다. 내가 브라질에서 열리는 세계탐사보도 총회에 다녀왔는데 비영리 탐사보도 매체 대표들이 그 자리서 내가 “우리는 한 달에 만원씩 내는 시민들의 후원만으로 거액의 후원없이 탐사보도를 하고 있다”고 하니 그분들이 굉장히 놀라워했다. 대부분 매체들이 개개인의 후원보다는 큰 재단에서 후원받고 있다. 미국같은 선진국에서는 시민후원은 비율이 많지 않다. 한국의 모델이야말로 진정한 미래의 모델이 아니냐는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가 좀 더 잘하면 많은 시민들이 지지하지 않겠는가. 그러면 언론 영역의 지형도 새로운 지형 생길 것이다.
문) 황우석 사건을 생각하면 흔히들 그 많은 국민의 압박과 권력으로부터 독립을 이야기하지만, 그것만큼 중요한 것이 줄기세포 과학을 연구하지 않는 아마추어 언론인이 세계적인 과학잡지도 입증하지 못한 것을, 아마추어가 전문가를 이긴 사건이기도 하다. 어떻게 아마추어가 전문가주의를 이길 수 있었는가?
답) 기본적으로 전문가주의에 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이 하는 말이기에 믿어야 한다는 의식이 없었다. “우리가 알아볼거야! 우리가 파서 나오는 게 뭔지 보고 난 뒤 맞는지 틀린지 우리가 판단하겠다”는 생각 때문에 밝혀낼 수 있었다. 아마추어이기 때문에 최종적인 판단은 못해 겸손하게 모두가 인정할 수 있는 사실이 나올 때까지 끝까지 갔다. 전문적 방법으로 테스트를 해봤을 때 줄기세포를 황우석 박사 연구팀에서 받아 유전자 검사를 해봤다. 이때가 결정적 순간이었고 지금도 미스테리하다. 줄기세포 11개의 줄기세포로 유전자테스트를 했는데 결과를 공개될 시간에 떨려서 차마 보고 있지 못했다. 유영준 교수와 한학수 PD, 메인작가 (결과를)보려하는데 여는 순간 떨려 나는 못 보겠더라. “학수야 난 담배를 태우고 올테니 너가 봐라”며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메인작가도 따라 나오더라. 마지막 순간 PD가 짐을 지고 나서는 수밖에 없다. 그때 결국 결과가 2번을 제외한 4번부터 12번까지의 줄기세포 검사는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모종의 조치 취해진 것이 아닌가 했다. 만약에 2번도 안 나왔으면 미궁에 빠지는 상황이었다. 미궁에 빠짐과 동시에 PD수첩은 죽는 것이고 황 교수 연구팀에서 PD수첩에서 비전문가기 우리의 소중한 줄기세포를 가져가더니 검사결과를 통해 아무것도 내놓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거의 죽는 것이나 다름없는데 다행스럽게 2번에서 가짜라고 결과가 나왔다. 정말 그 결과는 구사일생이 딱 적당하다. 2번이란 것이 중요한 이유는 순서대로 번호 순서대로 만들어지는데 2번이 가짜면 2번을 만든 방법으로 3번도 만들었다는 것인데 그러면 가짜일 가능성이 크다. 만약 2번에서 검출이 안 되고 5번이나 6에서 가짜가 나오면 설사 5번과 6번이 가짜라도 몇 개는 진짜일수도 있다는 이야기될 수도 있다. 한 개라도 진짜를 만들 수 있으면 나머지 과정은 가짜가 나와도 추가실험을 통해 보완할 수 있는데 PD수첩에서 왜 이러나 하는 반응을 보일수 있다. 그 과정을 쭉 하면서 항상 도와준 전문가들이 있어 도움을 받으면서도 전문가 판단에 100%를 맡기지 않고 우리가 끝까지 이해하려 했다. 그 결과 우리도 납득하고 우리도 전문가도 납득하는 결과를 얻었다.
우리 사회 많은 곳에서 전문가주의 혹은 권위에 눌린 문제들이 사실 많이 발생한다. 법원 판결에 대해서도 우리가 대법원 판결d[ 문제제기가 가능하다고 본다. 대법원이라고 늘 옳은 판결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기 때문에 제심이란 것이 있고, 이것을 통해 오래전에 잘못된 판결을 뒤집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 언론들은 대법원이 판결을 내리면 그것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인다. 이번에도 어떤 간첩사건에서 대법원의 선고에 문제가 많았다. 어마어마하게 많은 무죄 증거를 50여 가지나 보도했고, 이런 자료가 대법원 재판부에 제출됐는데 대법원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런 것을 보지 않아도 되는 판례가 있어서 그 판결은 진실규명의 판결이 아닌 법 논리에 불과한 판결이다. 판결을 할 때 언론들은 무죄판결이 날 줄 알고 국정원에 대한 비판 보도를 위해 많은 기자들이 왔다. 그날 대법원에서 ‘상고기각’이라고 그러는데 그 즉시 무죄 판결이 났을 때 문제점을 보도하겠다고 온 기자들이 하루 동안 낸 기사들은 ‘역시 대한민국에 간첩이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우리가 그렇게 많이 간첩사건의 문제점에 대해 진보언론에서도 한 면을 털어 문제점 보도했는데 대법원에서 정반대의 판결이 내려지면 그 내용에 대해서도 정당하게 문제 제기를 할 수 있어야 하는데 하지 않았다. 그 진보언론은 아예 대법원 판결을 신문에 싣지 않았다. 그게 제일 나쁘다. 그냥 어디서 하면 다 전문가의 권위에 대해 복종한다. 그게 편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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