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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35 - 내란을 수습하고 로마를 안정적인 궤도에 올린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282년 로마 43대 황제로 즉위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사두정치체제 (테트라키아) 창시자니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테오도시우스 황제를 로마제국 분할의 아버지로 친다면, 그는 군인황제 시대의 혼란을
끝낸 황제로 이전의 고티쿠스, 아우렐리아누스, 프로부스 황제 처럼 일리리아 (발칸반도 서부) 출신입니다.
그의 업적은 콘스탄티누스 1세, 테오도시우스 1세, 유스티니아누스 1세등 3대제 이상임에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건, 제국의 혼란을 끝냈다는 평가 외엔 인기가 좋은 황제는
아니었기도 하거니와...... 그가 대규모로 그리스도교를 박해한 황제 였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로마 대제' 라는 칭호 자체가 후대 기독교인 역사가들이 추가한 것으로 업적을 떠나서 기독교적
영향이 크며 매우 주관적인데, 기나긴 혼란을 끝내고 천년을 이어갈 후기 로마제국의 기틀을
정립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업적으로 치자면 대제라고 칭송받는 콘스탄티누스 1세 그 이상 입니다.
기독교 탄압은 기독교가 싫어서라기 보다는 중앙집권화 정책으로 기독교가 본격적으로 확산하기 시작한게
260년부터로 3세기 말쯤이면 귀족층에도 기독교가 퍼져나가는데.... 나중에는 이길수 없으면 올라
타라는 말 처럼 로마 황제가 기독교를 인정하고 통합 기구로 삼으면서 완전히 기독교 조직과 합체 됩니다.
콘스탄티누스 때인 '313년' 에 기독교를 합법화하고 '325년' 니케아 공의회를 통해 로마황제가 기독교 세계의
조정자 역할을 하게 되며, '380년' 에는 아예 기독교를 국교화 하면서 나머지를 전부 이단과 이교로 만들어
버리고 교구는 행정구역, 주교는 지역권력 , 황제는 교회 '수호자' 역할을 하면서 로마는 기독교 제국이 됩니다.
서기 244년 크로아티아인 달마티아 지방의 스플리트(라틴어 스팔라툼 Spalatum, 아스팔라토스
Aσπάλαθος) 근처 살로나 (솔린 Solin) 에서 태어났으며 하층민 출신으로 여겨
지는데, 에우트로피우스는 그가 아울리누스 라는 원로원 의원의 해방노예의 아들이었다고 합니다.
하층민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 도움준 사람은 부모의 옛주인 아울리누스의 아들로 원로원 의원인 가이우스
아울리누스 였다는데..... 이탈리아 혈통으로 아프리카 속주에 본적을 뒀던 로마 귀족이니 옛
파트로누스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카루스, 누메리아누스 아래에서 경호대장까지 오르는데 힘을 썼습니다.
아울리누스는 302년 7월부터 아프리카 속주 총독으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기독교 탄압 칙령을 따랐으며,
훗날 막센티우스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결전이 다가오자 영리하게 처신해, 반대편인 콘스탄티누스
군이 승리한 뒤에도 "국가를 위한 봉사를 계속해주십시오." 라는 요청까지 받았는데, 12명의
원로원 의원과 각자 400,000 세스테르티우스를 기부해 로마 공공 건축물 개보수에도 힘을 쓴 인물입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직업군인의 길을 선택해 병졸을 시작으로 하급 장교까지
가는 내내, 막대한 도움을 주면서 중앙 정계까지 길을 터준 쪽은
확실히 부모의 옛 주인 부자인 아울리누스이며 갈리아에서 복무했다고 합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이름이 등장한건 원로원 의원 출신 프라이토리아니(근위대) 대장 카루스가 제위에
오른 이후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카루스 황제의 은덕과 안니우스 아울리누스의 후원으로
38세 나이에 카루스의 차남인 누메리아누스 황제를 경호하는 프로텍토레스의 기병 지휘관이 됩니다.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과 전쟁에 참전했으니 카루스 황제 로마군은 유프라테스강을 건너 셀레우키아 점령후
티그리스 강을 건너 수도 크테시폰마저 장악하면서 승승장구했지만, 283년 8월 벼락이 황제의 막사에
떨어져 카루스 황제가 즉사하니 원정군은 혼란에 빠졌고 누메리아누스 황제는 망연자실해 어쩔줄 몰랐습니다.
283년은 서방은 형 카리누스, 동방은 동생 누메리아누스가 맡았는데 누메리아누스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의욕을 잃었으니, 원정을 지속할수 없다고 판단하고는 철수해 로마로 귀국하던 중에 눈병에 걸리게 됩니다.
이때 프라이토리아니 친위대장으로 젊은 황제의 장인 아리우스 아페르는 새 황제가 눈병에 걸렸으니 마차에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지시를 내렸는데, 이 사람 외에는 어떤 병사들도 황제가 탄 마차 근처도 접근하지
못했으며 원정군과 황제가 탄 밀폐된 마차는 시리아의 에메사를 시작으로 북쪽 비티니아까지 올라갔습니다.
소아시아에서 트라키아로 향하는 보스포루스 해협에 당도하기 직전인 284년, 숙박 예정지인
비티니아에 도착했는데 누메리아누스는 병사들에게 나타나지 않았고 이상한 냄새가 난다는
이야기도 돌던터라, 황제 호위 경호대장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황제가 탄 마차 안을 열게 했습니다.
이때 일에 관해 에우트로피우스와 아우렐리우스 빅토르 등은 디오클레스와 부하들이 마차를 연 순간
시체가 부패한 냄새가 났고.... 커튼이 외부에서 마차를 볼수 없도록 가려져
있었는데, 커튼을 걷어내자 침상 위에 칼에 찔린 뒤 죽은 채로 누워있는 황제가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누메리아누스가 암살된채 발견되자 장군들은 사태 수습및 황제 승계여부를 위한 회의를 니코메디아에서
열었는데 황제의 장인 아페르는 지지를 호소했지만 장군들은 카리누스나 아페르에게 충성을 선언
하지 않고, 누메리아누스의 경호대장으로 이번 사태와 무관한 디오클레스를 황제로 선정하고 옹립합니다.
새 황제가 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보라색 망토를 입은뒤 누메리아누스 암살범과 자신이 무관함을 선언했으며
칼을 태양에 비추어 맹세를 한뒤, 아페르를 황제 암살죄로 단칼에 베어 죽였고 그후 누메리아누스의
형 카리누스와 모에시아에서 전투를 벌여 불리한 상황에서 카리누스가 부하에게 암살되니 단독 황제가 됩니다.
카리누스 황제는 전투력은 좋았으나 인망이 없었던지라 원로원 의원, 총독등 여러 인사가 디오클레티아누스
와 내응했거나 그로 전향했으니 달마티아 속주 장관 플라비우스 콘스탄티우스도 있었는데,
속주 장관과 집정관직을 겸직하고 있었으니 그 두 직을 유임할 수 있도록 허락받는데 정치는 줄을 잘 서야?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황제에 올랐을째 로마 제국은 “3세기의 위기” 라는 미증유의 혼란 상태에 빠진 시기로
규모와 세력, 체제면에서 전과는 비교안되게 강해진 게르만족과, 파르티아 보다 강력한 국력을 기른
사산조 페르시아등 외부 위협 및 날로 더해지고, 재정난에다가 빈번한 내전으로 로마 제국은 만신창이였습니다.
다행히 로마군은 세베루스 왕조의 황제들과 갈리에누스,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의 오랜 노력
끝에 제국을 수호할 힘은 있었는데..... 군대는 종래의 레기온 체제에서 탈피한지
오래로, 페르시아식 군사 제도와 야만족 군대 양상을 취사선택 및 개조한 상태였습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때 중장기병대인 클리바나리의 아이디어가 차용되기 시작했고 카라칼라
황제때 종심방어에 필수적인 기동타격대 아이디어가 도입되었으며 갈리에누스
황제는 북부 이탈리아에 기지를 둔 상설 예비대를 창설했고 기병의 비율을 세배 가까이 높였습니다.
무어인 기마 투창병과 달마티아 기병, 복합궁을 사용하는 오리엔트 궁수부대, 페르시안 장창병대에 쐐기꼴
대형으로 전투하는 게르만계 보병, 낙타부대를 적극적으로 도입했고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에 의해
중장기병대 클리바나리가 대폭 확대되어 동로마 제국이 천년을 더 버티게한 군대의 원형이 갖추어졌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군대를 이끌고 내우외환을 진압해나가기 시작했으니 서방은 동료 막시미아누스를
285년에 부제로, 286년에 공동 정제로 올려 서로마로 파견해 갈리아에서 일어난 바가우다이 반란을
287년에 진압하고 제국 해군을 확충, 볼로뉴항에 해군 기지를 건설해 프랑크 해적들의 공세를 저지합니다.
사령관 카라우시우스가 비리를 저지르니... 도버해협을 프랑크 해적이 통과해 노략질을 하도록 방임한뒤
재물과 노예를 싣고 돌아가면 출동해 해적소탕을 하고 재물을 빼앗는 재테크 능력을 발휘했다가
처벌을 피해 도망가 브리타니아에서 독립을 기도하다 서방 부제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에게 진압됩니다.
서방 정제 막시미아누스가 진압하지 못한걸 부제 콘스탄이우스가 성공한 것이고, 그외 반란 세력인
카르타고의 율리아누스, 알렉산드리아의 도미티아누스와 아킬레우스를 모두 진압해 내부를
정리하고 사산조 페르시아 또한 부제 갈레리우스의 활약에 힘입어 승리해 외적의 침공도 저지합니다.
아르메니아의 쫓겨난 왕자 트르다트 3세를 287년 바흐람 2세와 조약으로 왕위에 올리는
등 대외 영향력도 뻗쳤으며, 289년에는 동북방 유목민 사르마티아족과 싸워
승리했고 291년에는 에티오피아 지역의 악숨 왕국과 평화 조약을 맺었으며
전면적인 체제개혁을 수행하여 전제정을 구축하고는...... 서기 305년 돌연히 은퇴합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303년 11월 세명의 황제와 함께 로마시에서 승리를 기념하는 개선식을 거행했는데, 로마
시민들이 디오클레티아누스를 군주나 황제 보다 귀족 지도자로서 친근하게 대하자, 일반 시민은 감히
범접할수 없는 절대적인 권위를 추구했던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심기가 불편해져 303년 12월 로마를 떠납니다.
이후 304년 1월 라벤나에서 집정관 취임식을 거행한뒤 도나우 강으로 향한후 갈레리우스의 대
카르피족 원정에 참여했는데.... 이때 걸린 병이 악화되자, 늦여름에 니코메디아로 돌아가
304년 11월 니코메디아 궁전 인근에 열린 서커스 개막식에 참석한후 궁궐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305년 3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모습을 드러내면서 죽었다는 소문이 거짓이라는게 확인되었지만, 많이 수척해져
있었고 5월 황제들과 근위대 장교들, 군단 대표자들을 소집한뒤 약함과 휴식의 필요성, 은퇴 의지를 표명한후
막시미아누스와 함께 퇴위하고 콘스탄티우스 1세와 갈레리우스가 아우구스투스로 선임될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20년간을 통치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자진하여 퇴위한 것은 충격이었는데, 건강이 상한듯한 모습을
보였지만 로마 제정후 사두정 시기까지 자진 퇴위한 황제는 전혀 없었으니.... 디오클레티아누스
가 죽었을때 황제의 관례대로 사후 신격화가 되는데, 죽기 직전에는 일개 로마 시민일 뿐이었음에도?
스팔라툼(스플리트) 에 바다에 접한 개인 궁전을 건설하고 은퇴해 농사지으며 살았으니 스플리트에는 궁전의
흔적을 중심으로 시가지가 형성되어 있는데, 306년에 제위에 복귀해 달라는 막시미아누스의 전갈에
"내 손으로 직접 심은 양배추를 보여 줄수 있다면, 그도 권력을 추구하는데서 행복을 찾는 짓을 단념할 텐데."
이후 콘스탄티우스 1세 클로루스의 급사에 따른 혼란을 정리하고자 복귀한 막시미아누스 전
황제, 정제로 즉위한 갈레리우스와 함께 308년에 회담을 열기도 했지만 310년에
막시미아누스가 콘스탄티누스에게 처형된 이후에는 정치 문제에서 완전히 손을 떼게 됩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죽은 정황은 자세히 전해지지 않는데, 자신이 구축한 체제가 내전을 초래
했다는 점, 그렇다고 자의로 물러났는데 복위할수도 없게 된 점으로 실의에 빠져
자살했다고도 하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말년에 참담한 심정이었다는 말은 사실일 것입니다.
그의 영향력이 소멸된 대표적인 사례는 아내인 아우렐리아 프리스카와 그의 외동딸이자 동방 정제
갈레리우스의 아내였던 갈레리아 발레리아의 죽음에서 드러나니, 막시미누스 다이아는
갈레리우스 정제의 조카로 동방 부제 직에 있다가 갈레리우스의 사망 이후 동방의 정세를 장악합니다.
서방의 정제로 올라선 콘스탄티누스 1세와, 서방의 정제였다가 슬금슬금 동방으로 넘어가 라이벌
관계가 되어버린 리키니우스가 공동의 적에 대처하기 위해서 혼인동맹을 맺게 되자 위기감을
느낀 막시미누스 다이아는 죽은 갈레리우스의 미망인 발레리아에게 청혼을 했으나 거절 당합니다.
화가 난 그는 발레리아와 그녀를 보기 위해 와있었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처 프리스카를 감옥에 넣자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항의 서한을 보냈고, 막시미누스 모녀를 석방했으나 재산을 몰수하고 오리엔트로
추방시켰으며, 이후 막시미누스 다이아가 리키니우스에게 패배하자 발레리아와 프리스카는 리키니우스
에게 의탁하려고 했는데, 그 무렵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죽으니 리키니우스는 군대를 보내 모녀를 살해합니다.
즉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마지막으로 회담을 연지 5년 만에 그는 자신의 아내와 하나뿐인 딸도 지키지
못하는 신세로 전락한 것이었으니.... 그리스도교를 조직적으로 박해했던 사람
답지 않게, 의외로 권력의 속성과 사람의 심리에 지나치게 순진하고 이상주의적이었던 듯 합니다.
사두정치는 설계 부터 지속 가능성이 떨어졌는데.... 나중에 콘스탄티누스 1세가 복수는 해 주지만
그마저도 그가 살아 있을 때가 아니라 죽은 뒤였고, 경쟁자를 숙청하는 과정에서
어쩌다가 복수해준 셈이 되었을 뿐이었으니 그가 만들어준 자들인데도 권력은 이첳럼 무자비 합니다.
자진퇴위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정치적 선택이었을지는 몰라도 그가 구축해놓은 체계는 물론이고 가족도 비극적
으로 최후를 맞는 결과를 냈으니, 수많은 정책을 멀리 내다보고 강한 결단력으로 밀어붙여 성공했으나
후계자 지명에서 갈레리우스의 정치적 이익에 맞게 비상식적으로 안배하는 바람에 초래된 안타까운 결과였습니다.
사위로 동방 정제 갈레리우스의 조카에 불과한 막시미누스 다이아를 부제로 선정한건 큰 실수였으니,
오히려 아버지 서방 정제 막시미아누스 보다 정치적인 자질과 인격, 자제력이 뛰어났던데다가
갈레리우스의 사위기도 했던 막센티우스를 동방 부제로 선정했다면 이렇게까진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본인의 결말은 좋지 못했지만 무너지던 대제국을 재건하여 1,000년을 더 지속시키는 큰 업적을 남긴 황제
였으니, 체제 개혁에 대한 기여라면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에 비견할 만한 큰 업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도미나투스”는 전제정이라는 뜻이며 동양의 전제정과 일치하는데, 270 ~ 275년까지 제국을 통치한
아우렐리아누스 황제 아래, 도미나투스 체제는 황제와 신하 사이의 용어로 예고된 일이었습니다.
로마 황제들은 프린키파투스(원수정) 체제가 가진 단점을 보완하고자 자신들의 권한을 향상시켰으니,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도미티아누스, 하드리아누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황제자문회의, 사법부, 행정관료 계서제, 조폐발행권 장악, 속주 총독
임면권을 통해 황제권 강화와 '프린켑스= 임페라토르' 로 대변되는 황제 지위 일원화에 힘썼습니다.
세베루스 황제 아래에서 원시적 도미나투스라고 할수 있는 황제를 중심으로 한 프라이토리아니와 로마군,
황제 자문회의의 계서제가 완성됐으며, 군인황제시대 이전인 알렉산데르 통치기 부터 황제를
최정점으로 하는 계서제 아래 관료제는 완성된 상태였으니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없던걸 만들어낸건 아닙니다.
3세기 아우렐리아누스는 로마제국 국제를 뜯어고치고 '도미누스 에트 데우스' 를 내세워 제정을 바꾸려 했으니
3등분된 제국을 274년 재통일한후, 군대 계급편제와 가정내 '주인과 노예'/' 가부장과 가족원' 관계를
행정에 접목해 태양신과 동일시된 황제 자신을 도미누스(주인님)로 명하게 하고 1인 전제정을 시작했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가 진행한 도미나투스(전제정) 에서, "황제 = 절대적인 군주이자 신과 같은 존재" 였으니
절대자인 황제는 살아있는 신이며 대리인이었고, 로마 전통을 수호하는 수호신이었으니 로마인의 종교
관습에 따라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는 경우들은 있었으나,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공식적으로 강조한 것입니다.
이 결과 황제의 권위는 과거 프린키파투스 아래에서의 황제와 달리 권위가 대단했으니,황제는 로마
제국이라는 집안에서 국가 전체의 가장이며, 전통의 수호자이자 제국의 구심점이 됐으니
황제의 권위, 위엄, 자유는 절대적이며 원로원의 권위, 위엄, 자유와는 격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황제를 제외하면 신민에 불과하다는 것을 뜻했으니, 이전 황제들을 만나려면 찾아가 문을 두드리면 비서관
이 응접실에 대기시킨 다음에 황제가 직접 나와 만나줬다면, 디오클레티아누스 이후는 만나기 위해
찾아가면 파트르누스와 클리엔테스 관계처럼 약속이 잡혀있지 않는 이상 면담 기회조차 갖지 못합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황제 권위를 높이는 것만으로는 단독으로 거대한 제국 방어를 수행하는 것은 어렵다고
보고 넷으로 늘렸으니, 로마 제국에서 '공동 황제' 체제는 이전에도 자주 있었지만, 이전에는
'후계자 지명' 혹은 임의적인 체계였던 반면에 사두정치 제도는 상설화 되고 체계적인 제도라 할수 있습니다.
동방 정제와 서방 정제를 하나씩 두고 그 아래 동방 부제와 서방 부제를 임명해 각자 맡은 관할
구역에서 군사 분야는 대부분의 권한을 가지고 방어에 임하는 것이며, 또한 두 정제는
일정기간 이후 은퇴하고 두 부제가 정제 직위로 올라가 새로운 부제를 임명하는 방식입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시기 황제들의 담당구역은..... 동방 정제 디오클레티아누스 (니코메디아) 아나톨리아,
오리엔트, 이집트, 동방 부제: 갈레리우스 (시르미움) 판노니아, 모이시아, 트라키아, 일리리아,
서방 정제 : 막시미아누스 (메디올라눔) 이탈리아, 가까운 아프리카, 먼 아프리카, 히스파니아,
서방 부제 :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 (아우구스타 트레베로룸) 브리타니아, 갈리아, 비네엔시스
이 제도의 목적은 제위 계승에 군대의 개입을 방지하기 위함인데, 이전 군인황제시대의 혼란상을 학습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방지하려했으니 황제 유고시 부황제가 자동적으로 승계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두 번째는 방어의 효율성 증가로, 황제가 아니면 불가능한 여러 대책을 동시에 수행해 방어의 효율성을
높이는 것이니 즉 여러 방향에서 외적이 동시에 공격이 들어와도 즉시 대처가 가능합니다.
세 번째는 내란의 조기진압이니, 네 명의 황제가 상대적으로 좁아진 자신의 관할구역을 철저히
감시해 내란의 가능성을 줄이고 내란이 일어난다 해도 조기에 진압하는데,
내란이 단순한 소란으로 끝나며 길게 이어지거나 확대돼서 내전이 되는 것을 막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능력 위주의 황제 즉위이니 방어를 최우선적으로 고려하여 임명되므로 다른 건
몰라도 군사적 능력 하나는 우수한 인물들이 혈통에 관계 없이
황제위에 오를 수 있으니 그럼으로써 로마군의 전투능력을 높은 상태로 유지할 수 있습니다.
군사적인 측면에 한정되고, 내정이나 외교등 다른 분야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단독으로 권한을 움켜쥐고
있었으며, 1차 사두정치 기간에는 동서방 정제/부제의 진퇴까지 좌지우지할수 있을 정도로
권한이 컸으니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명칭 중에 세니오르 아우구스투스 는 "선임(先任) 황제" 가 있었습니다.
동방 부제 갈레리우스는 페르시아에 패했을때는 일개 장수 취급을 받았으며 막시미아누스는 서방
정제이면서도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 반강제로 끌려 같이 은퇴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나 은퇴한 뒤에는 다른 황제들을 억누를 권위가 있는 황제가 없었고, 제위 계승에서
제외된 황제들의 자식들(콘스탄티누스, 막센티우스) 이 자신들의 권리를 요구하면서 체제는 무느집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종심방어체제를 효율적으로 운영하려 민정과 군정을 분리시켰으며,
체계적인 관직제도를 구축하니 황제와 부제가 정점에 서고, 4개의 "대관구"
와 12개의 "관구" 를 두고 관구의 장 (비카리우스 Vicarius, 대리인) 을 신설합니다.
그 밑으로 110개 속주 (province) 의 장들이 위치하며, 대대장이었던 트리부누스 밀리툼은
이들과의 위계 체제에서 동급 혹은 밑에 서면서 같은 체계 안에 편입돠었으며
프라이펙투스 경우 중요 대도시를 담당하면서 일부는 비카리우스와 대등한 위치에도 섰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원로원의 입법을 박탈했으며 민회에서 선출하던 집정관을 임명하였고 법안을 원로원 의결
이 아닌 황제의 칙령으로 바꾸면서 관료제도를 도입했으니 행정업무는 전문화되고 체계화되며 관료의
숫자 증가, 속주와 총독 수 증가에 따른 재정 팽창, 군대의 확대와 황실행정 등장에 따른 재정 고갈이 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자신의 사업과 대대적인 개혁을 위해 로마 제국 전체의 화폐 및 재정 체계 재편을 목적
으로 286년 화폐개혁을 단행했는데, 금과 은의 새로운 화폐 체계를 장기적으로 정착케 하려고
했으니 새 아우레우스로 한 금화로 대체시키니 금 1 파운드의 60% 에 해당된 새로운 아우레우스 였습니다.
아울러 은화 1판운드의 96% 비율의 새로운 은화 '아르겐테우스' 도 발행했는데 네로 시대의 은화 데나리우스
와 비슷한 은화였으며, 소액 주화의 필요성으로 3가지의 은 도금 청동 주화들을 발행하니 '폴리스'입니다.
화폐개혁을 단행해 장기적으로 정착시키면서 새로운 세제 개혁 아래 생산물에 정규적 소득세를 대체
부과하는 신설 부과세가 도입됐으며, 아울러 이탈리아를 포함한 제국 전역에 새로운 세금제도의
제정까지 발표되고 시행되니 이때부터 이탈리아는 본국의 특권을 잃고 일반 속주와 동등해지게 됩니다.
필요한 재정 액수를 황제가 1년에 한번씩 결정하는데, 국가의 필요에 따라서 세액을 결정하고, 결정된 세액은
실질적인 수익과 관계없이 납세자에게 부과하는데 세무는 중앙정부가 통합 관할하며, 농경지에 부과하는
'토지세'(jugatio) 와 사람에게 부과하는 '인두세'(capitatio) 로 이분화 해서 액수는 5년에 한 번씩 사정합니다.
흉년이 들어도 세금은 정해진대로 거두다 보니 납세자들 입장에서는 고문이나 다름없었지만,
국가 예산이 어느 정도일지에 대해 예상이 가능하며, 고정적인 수입이 들어올게 예측
가능하므로 세금 및 국채 발행의 남발을 막고 체계적인 세제를 수립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임시세를 전쟁을 직접 수행하던 속주에 부과할 때가 잦았으니 즉 납세 자체가 불공평하게
되고 있었다는 것으로 내내 로마제국 인민이 문제삼던 부분이었는데,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전쟁을 상시로 하지 않는 평온한 내부 속주들에게도 제국 방어 비용을 균등히 부담시킨 것입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내우외환 위기를 극복하는데 군대의 힘을 많이 빌렸으나 동시에
3세기의 위기에는 이 군대 문제가 컸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고, 군제 개혁을
통해 군사반란의 가능성을 줄이고 좀 더 효율적인 종심방어를 구축하고자 노력합니다.
레기오들을 벡실라티오란 파견대로 쪼개 야전지역에 보내도록 해놓고, 레기오 본부엔 병력을 천명씩만
남겨놓았으며, 쪼갠 벡실라티오들을 합쳐서 임시 편성했고 때에 따라 분리 합체를 반복했으니
"파견대" 들이 점점 야전 부대로서 상설화되는 반면 국경 지역에 남은 본대는 점점 질이 떨어집니다.
군대 전체를 증가시키는데 3세기의 위기 기간에 임시로 창설됐던 군대를 상설화하고 부족한 부분을
더 채우는 정도였으니 로마군은 45~ 50만 선으로 추정되는데, 다만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선방어" 개념을 포기한 바 없었고, 국경 요새들을 촘촘히 거미줄처럼 깔아놓는 전략을 시행합니다.
로마 제국 체제의 효율성을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로마 제국에 있어 위험요소
라 생각한 사상이 로마 제국으로 침투하는 것을 파괴하고자 했으니 그리스도교와 마니교 였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조직과 교리를 정립하여 무시할수 없는 세력으로 성장해 있었으니, 4세기초 그리스도교도
들은 10% 이상을 차지했으며, 로마제국의 동부지역에 집중해 있었으니 일부 지역에서는 다수를
차지했는데, 후일 총대주교 5개 중에 4개가 콘스탄티노플,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 입니다.
철저한 중앙집권적 전제정권을 수립하고 로마제국의 효율성을 증대시켜 위기를 극복
하고자했던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스스로를 신성화했으니.... 그리스도교는
자신의 체제개혁과 정반대에 있는 적대세력이므로 제거해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기독교 박해 시작은 297년으로 모든 공무원들과 병사들에게 제단에 제물을 바침으로써 충성심을
증명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일부는 사임했고, 시늉만 하는 사람도 있었으며 극렬히 반대
하는 활동을 벌였던 일부는 처형당했으며 303년, 니코메디아의 황궁에 발생한 화재를
그리스도교 탓으로 돌리고는 성당을 철거하고 성물을 파괴하며 재산은 압류해 국고에 넣었습니다.
304년 마지막 칙령은 그리스도교인은 고발 없어도 추적하여 고문할수 있도록 했고, 모든 사람이
로마 신의 제례를 거행해야 하며, 어기면 사형이나 강제노동에 처하겠다고 명령했으며
더 나아가 배교냐 죽음이냐의 이지선다를 강요했으니 이로 인해 순교자와 배교자가 발생합니다.
교회 자료에는 순교자가 3천명 정도라 하지만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는 알길이 없으며 그리스도교
박해는 309년까지 지속되었고 311년에는 잦아들었는데, 313년에는 신앙의 자유를
선포한 콘스탄티누스 1세와 리키니우스가 공포한 밀라노 칙령으로 박해가 완전히 끝나게 됩니다.
마니교도 박해의 대상이니 마니교는 로마 제국의 제1적국인 페르시아에서 유래한 종교이므로 박해할 이유를
찾기 쉬웠고, 그리스도교 보다 덜하므로 제거하기도 쉬웠으니 302년,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마니교를
페르시아에서 뻗어온 흉물스런 집단이며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른다는 칙령을 내리고 강력하게 탄압합니다.
마니교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박해 이후에도 꾸준히 탄압받아 결국 소수종파로 연명했을 뿐 크게
성장하지는 못했는데, 하지만 4- 5세기의 저명한 교부 아우구스티누스가 생전에 마니교도가
된 적이 있다고 술회하였던 만큼 지역에 따라서는 나름대로 마니교가 세가 강했던 곳도 있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