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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연 1953년 올드버러 페스티벌
배경 17세기 엘리자베스 1세 만년의 시기
<2013년 6월 로열 오페라 하우스 / 163분 / 한글자막>
로열 오페라하우스 오케스트라 & 합창단 연주 / 폴 다니엘 지휘 / 리처드 존스 연출
엘리자베스 1세.....수잔 벌록(소프라노)
에식스 백작..........토비 스펜서
마운트조이...........마크 스톤
롤리....................클리브 베일리
세실....................제레미 카펜터
페넬로페..............케이트 로열(소프라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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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덕션 노트 ===
브리튼의 탄생 100주년과 엘리자베스 2세의 즉위 60주년을 함께 기리는 프로덕션
브리튼은 1953년 엘리자베스 2세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하여 엘리자베스 1세를 다룬 오페라인 <글로리아나>를 완성하였다. <글로리아나>는 1588년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퇴한 영국군이 여왕을 향해 외쳤던 찬사에서 연유한 별칭으로, 영국 최고의 전성기를 열었던 여왕에 대한 가장 적절한 호칭으로 기억된다. 오페라는 만년의 엘리자베스 1세와 에식스 백작 로버트 데버루 사이의 애증의 관계를 주요 내용으로 다루었다. 즉 도니제티의 오페라 <로베르토 데브뢰>와 동일한 소재를 담고 있는데, 로맨틱한 러브스토리로 각색된 도니제티의 작품과 달리, <글로리아나>는 보다 역사적 사실에 충실한 편이다.
본 공연은 2013년 6월 작곡가의 탄생 100주년과 엘리자베스 2세의 즉위 60주년을 함께 기념하여 로얄 오페라 코벤트가든에서 펼쳐졌던 리처드 존스의 최신 프로덕션을 담고 있다. 존스는 일종의 극중극 포맷을 이용하여 이 작품을 흥미롭게 연출하였다. 수잔 벌록은 실제 인물과 거리가 있는 통통한 외모임에도 불구하고 여왕의 이미지에 걸맞은 위엄과 카리스마를 설득력 있게 그려내었다.
16세기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는 평생 독신으로 지내면서 국력신장에 헌신했던 군주였다. 그러나 여왕 역시 인간이었던지라 몇 명 신하가 여왕의 연인 자리를 거쳐 갔다. 마지막을 장식했던 인물은 35세나 연하였던 에식스 백작 로버트 데버루(Robert Devereux)였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의 러브스토리는 비극으로 끝났다. 여왕은 아일랜드의 반란을 진압하지 못한 것에 대해 로버트에게 책임을 물었는데, 이에 분개한 그는 여왕에 대한 반역을 도모하였다. 하지만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고, 결국 그는 목이 잘리고 말았다. 이 유명한 얘기는 도니체티의 <로베르토 데브뢰>라는 오페라로 남았고, 20세기 최고의 오페라 작곡가 벤자민 브리튼 역시 1953년에 이 내용을 토대로 엘리자베스 2세의 즉위를 축하하는 오페라를 완성하였다.
도니제티의 <로베르토 데브뢰>가 가공의 인물까지 동원하면서 여왕과 에식스 백작 사이의 치정관계에 치중한 반면, 브리튼의 <글로리아나>에 등장하는 두 사람의 관계는 보다 역사적인 사실에 충실한 편이다. <로베르토 데브뢰>의 엘리자베타가 국가에 대한 반역보다 자신의 애정에 대한 배신에 더 분노하는 등의 비상식적인 행태를 보여준 것과 달리, <글로리아나>의 엘리자베스는 보다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여왕의 모습을 보여준다.
=== 참고 자료 === <출처 : 2009년 1월 15일자 발행 네이버캐스트 / CBS라디오프로듀서 정혜윤 글>
[인물 세계사]
잉글랜드 여왕
엘리자베스 1세
Elizabeth I, 1533.09.07 ~ 1603.03.24
1558.1.15 엘리자베스 1세가 잉글랜드 왕위에 오르다
대관식이 거행된 1월 15일은 매섭게 추웠다. 스물다섯의 엘리자베스는 웨스터 민스터 홀에서 걸어 나왔다. 흰 담비 털가죽으로 안을 댄 실크 망토에 베네치아산 황금과 진주가 달린 진홍색 벨벳 모자로 잔뜩 치장한 채였다. 교회들은 한꺼번에 종을 울렸고 오르간, 트럼펫 소리와 수 만개 촛불이 성스럽고 화려하게 넘쳐흘렀다.
헨리 8세와 '천일의 앤'사이에 태어난 명민한 공주
영국에서 16세기는 해외 원정에 돈을 쏟아 붓던 탐험과 모험의 시대라 할 수 있다. 최초로 잉글랜드 식민지를 건설했던 월터 롤리 경과 세계를 항해했던 프렌시스 드레이크 경의 시대이기도 했다. 이처럼 원정에 나선 결과, 평생을 독신으로 보낸 여왕을 기리기 위해 미국 플로리다 북부를 '버지니아(처녀의 땅)'라 명명할 수도 있었다. 이 여왕이 바로 영국의 16세기를 빛낸 엘리자베스 1세였던 것이다.
날씬한 몸매이면서도 위엄에 가득 찬 엘리자베스 1세는 헨리 8세와 두 번째 왕비인 앤 불린 사이에서 태어났다. 앤은 첫 번째 왕비인 캐서린의 시녀였는데, 엘리자베스를 낳은 후 1536년 5월 19일 참수당했다. 간통을 스물 두차례나 저질렀다는 죄목으로 헨리 8세가 참수를 지시했다. 이어, 엘리자베스는 사생아로 취급 받았다. 하지만 헨리 8세가 엘리자베스의 교육에까지 무관심한 것은 아니었다. 엘리자베스는 여섯 살 때부터 군주로서의 자질을 개발하기 위해 당대 최고의 학자들로부터 교육을 받았으며 그녀 스스로도 ‘그리스, 로마의 내로라하는 학자들을 뛰어넘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 결과 그녀는 라틴어, 프랑스어, 그리스어, 에스파냐어, 이탈리아어, 웨일스어를 자유롭게 쓰고 읽고 대화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철학과 역사에 관심이 많아서 매일 세 시간씩 역사책을 읽었다.
엘리자베스에게는 헨리 8세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던 배다른 동생 에드워드가 있었는데, 헨리 8세의 세 번째 부인 제인 시모어가 낳은 아이였다. 그러나 병약한 에드워드가 열다섯 살에 죽어버리자 역시 배다른 언니 메리가 여왕이 된다. 메리는 헨리 8세와 캐서린 왕비 사이에 태어났으며, 신앙심에 극도로 의존한 결과 신교도를 마구 탄압해 '블러디 메리(피의 메리)'라 불렸다. 메리는 엘리자베스가 신교를 믿는 게 아닌가 의심해 석 달간 런던탑에 가둬버린다. 엘리자베스는 런던탑에서 우여곡절 끝에 풀려나는데, 정쟁에 휘말려들지 않으려 시골에 콕 박혀 지낸다.
"평생 처녀로 살다 간 왕이라는 비석만 세울 수 있다면 만족한다"
엘리자베스의 은둔 생활을 끝내게 한 것이 메리 여왕의 서거였다. 다음 왕위의 승계자로 지목된 그녀는 즉위식 날 두 가지 영국 왕의 징표를 얻게 된다. 오른손 넷째 손가락에는 백성들과의 결합을 상징하는 반지를 꼈고, 무게가 3킬로그램에 이른다는 잉글랜드 왕실 왕관을 썼다. 그녀는 당면한 두 가지 안건을 면밀히 검토하기 시작했다. 바로 결혼과 종교. 첫 번째 문제인 결혼에 관한 그녀의 결론은 이랬다.
“한 시대를 통치했던 여왕이 평생 처녀로 살다 생을 마감했다는 비석을 세울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그녀는 처녀 여왕의 전설을 만들고 그것을 최대한 활용했으며 그 이유 때문에라도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대관 이후 25년 간 후계자와 관련해 여왕의 결혼 문제는 끝없는 추론과 억측 속에 온갖 기기묘묘한 소문을 낳았다. 이미 사생아를 낳아서 기른다거나 혹은 난잡한 사생활을 즐긴다거나 청혼 받는 게 취미라거나 몸이 남자를 받아들일 수 없는 막으로 둘러싸여 있다거나 혹은 자궁이 기형적인 안드로겐 내성 증후군 환자라는 등의 소문이었다. 그녀는 당대의 ‘훈남’ 로버트 더들리와 사랑하는 사이였는데, 더들리의 아내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뒤에는 특히 소문이 극성을 부렸다. 여왕이 추악한 살인을 못 본 척하고 더들리와 결혼해 왕국과 스스로의 명예를 실추시키려 한다는 소문이었다.
종교에 관한 한 그녀는 언니와 달리 광신도가 아니었고 신교, 구교 가리지 않고 광신적 행위라면 혐오했다. 그녀는 평생 인간의 양심은 타인이 좌지우지할 수 없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사람들 마음 깊숙한 곳과 비밀스런 생각을 억지로 들여다보고 싶어하지 않았다. 어쨌든 엘리자베스 1세 치하에서 개신교가 잉글랜드 국교가 되었고 그때부터 종교적인 탄압은 종교적인 차원이 아니라 정치적인 필요에서 이뤄졌다.
여왕의 보석에 새긴 좌우명은 셈페르 에어뎀(semper eadem)······'항상 같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복잡 다단한 인물이었다. 자신보다 책을 많이 독파한 학자는 거의 없다고 자랑했으며 죽는 날까지 키케로나 플루타르크 번역을 소일거리로 삼았다. 화를 가라앉히기 위해 스물여섯 시간 내내 ‘철학의 위안’이란 책의 번역에 매달리기도 했다. 라틴어를 말하다가 실수하느니 에스파냐, 프랑스, 스코틀랜드 사람을 한꺼번에 상대하는 편이 낫다고 말할 정도로 학문을 사랑했다.
노골적으로 불경한 욕설을 날릴 배포가 있었고 짓궂은 장난을 좋아했다. 성적 매력과 자신감으로 남성들을 뇌쇄시켰으며, 잃어버린 젊음을 되찾기 위해 극단적인 몸부림을 치면서 나이 들어갔다. 그녀는 궁정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란 말을 듣는 것을 즐겼다. 승마와 사냥, 고난도 기술이 필요한 춤을 좋아했으며, 적게 먹고, 겉치레에 치중했다. 노년에도 목이 깊게 팬 드레스를 입었고 아침에 몸치장을 하는 데 두 시간씩을 바쳤다. 가늘고 호리호리한 몸에 위엄과 수줍음이 적절히 조화된 감탄할 만한 미모의 소유자란 말을 들었다. 그런 몸에 걸어다니는 게 신기할 정도로 온 몸을 다이아몬드와 진주로 휘감아 치장했다.
보석에 특히 집착한 그녀의 컬렉션은 단연 유럽 최고 수준이었다. 보석에는 그녀의 좌우명인 셈페르 에어뎀(semper eadem. 항상 같다)을 새겼다. 진주 장신구를 처녀성의 상징으로 활용한 그녀는 궁정인들에게 철저한 도덕관념을 강요했다. 난잡한 사생활은 절대 묵과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녀들은 사랑에 빠져도 감히 이를 발설하지 못했다. 여왕은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남자 없이 살 수 없는 여자여서 남자 궁정인들의 관심을 독차지해야만 직성이 풀렸다. 이들 남자 궁정인의 역할은 감히 손에 넣을 수 없는 고귀한 여인을 그저 먼 발치에서 지켜보며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절망하는 것이었다.
여왕 자신은 알록달록하고 번쩍이는 의상을 입되 시중드는 여인들은 검은색과 흰색만 입게 했다.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지 않아 상대방을 안절부절 못하게 하는 재주가 있었고 눈으로 본 것을 입 밖에 내지 않는다는 철학을 고수했다. 장난치고 허물없이 굴다가 쌀쌀맞게 돌변하기도 했다. 가장 놀라운 것은 정치적으로도 어찌나 똑똑한지 ‘어떤 이야기를 꺼내도 이미 다 알고 있는 여자’로 칭해졌다는 것이다.
"남이 쓴 왕관은 영광스러워 보이지만, 직접 써보면 그다지 즐겁지 않다"
그녀는 신체적으로는 건강했으되 정신적으로는 신경불안을 앓고 있었다. 죽기 전 마지막 2년 간은 정신이 황폐해지고 사는 데 지쳐 뭘 해도 만족과 기쁨을 얻을 수 없다고 종종 말했다. 임종을 앞두고 여왕이 의회에서 행한 마지막 연설은 '황금의 연설'이라 불리게 된다.
“단언하건대 나만큼 국민을 사랑하는 군주는 없을 것이다. 신께서 나를 여왕으로 만들어 주신 데 감사하지만 내가 누릴 수 있었던 가장 큰 영광은 백성의 사랑을 받으며 통치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신께서 나를 왕좌에 앉히셨다는 점보다 이렇게 애정을 보내준 백성의 여왕이 되어 그들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위험에서 구하도록 하셨다는 점이 훨씬 더 기쁘도다. 내가 부여한 권한이 백성들에게 불만이 되고, 특권이 탄압으로 여겨지는 상황을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내린 특권을 오용하고 남용했던 자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신께서는 그들의 죄를 내게 묻지 않을 것이다. 왕관은 남이 쓴 모습을 보고 있을 때 영광스러운 법이며 직접 써보면 그다지 즐겁지 않다. 신께서 내게 주신 책무를 이행하고 신의 영광을 드높이며 백성을 안전하게 지켜야 한다는 양심의 명령이 없었다면 나도 이 왕관을 누구에게든 주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나는 내가 백성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날까지만 살아서 통치할 생각이다. 나보다 더 강하고 현명한 군주는 과거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지 모르지만 나만큼 백성을 사랑하는 군주는 이제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여왕은 이 말을 마치고 의원들 하나하나가 자신의 손에 입을 맞추게 한 뒤 나팔 소리와 함께 퇴장했다. “나만큼 백성을 사랑하는 군주는 이제까지 없었고 앞으로 없을 것이다”란 말을 하는 동안 그녀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을 지극히 개인적이고 인간적인 장면들은 어떤 것이었을까. 템즈강의 뱃놀이? 셰익스피어 연극 관람? 젊은 날의 연인 로버트 더들리와 춤을 추던 장면? 인생 최후의 연인 에식스에게 반지를 건네주던 장면? 그를 반역죄로 처형시키고 도저히 슬픔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던 날들?
잉글랜드를 극빈국에서 유럽 최강국으로 만들었던 여왕
여왕 생애 마지막 2, 3일의 모습은 어땠을까? 엘리자베스를 돌보던 사람들은 그녀가 치료를 받으면 더 살 수 있을 것 같이 보였지만 치료를 끝내 허락하지 않고 알약 하나 먹으려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굵은 빗줄기가 창문을 두드리던 3월 밤 엘리자베스 여왕은 벽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다시 깨어나지 못할 깊은 잠에 빠져들었고 그 모습은 ‘양과 같이 순하고 다 익은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듯’ 평온했다고 전해진다. 1603년 3월 24일 목요일 새벽 3시가 되기 전. 하늘이 또 다른 새벽을 준비하고 있는 바로 그 시간이었다.
엘리자베스 1세 재위 45년간 잉글랜드는 극빈국에서 유럽 최강국으로 부상했다. 잉글랜드 해군은 에스파냐의 무적 함대를 격파해 경외의 대상이 되었고 종교적 화해도 이루었다. 물론 실패도 있었지만 그녀의 후계자가 된 제임스 1세 치하에서 신하들은 종종 이런 생각들을 했을 것 같다. ‘다시 그녀와 현실에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엘리자베스 1세의 서거 이후 한 세기가 지나지 않아 왕과 의회는 정면 충돌하게 된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엘리자베스 1세 시절의 향수에 젖게 되고 그녀의 이야기는 살아있는 신화가 된다. 그녀의 이름이 내뿜는 광명은 절대 망각에 묻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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