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의 마을버스]② 홍제천 변 포방터시장에 간다면
홍은동과 홍제동을 왕복하는 서대문13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홍제역 일대는 항상 북적인다. 지하철은 물론 서울 시내버스와 경기도 광역버스가 지나는 교통의 요충지이며, 전통시장에 각종 생필품점과 식음료점, 거기에 노점까지 들어선 활기찬 상점가이기도 하다. 그런 홍제역 일대에 사람들이 모이고 서대문의 마을버스들이 대거 지난다. 그중 서대문13은 통일로 동쪽의 홍은동과 홍제동을 왕복한다.
홍제역 1번 출구 앞 마을버스 정류장. 서대문의 마을버스들이 승객을 기다리고 있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홍제원, 그리고 홍제동과 홍은동
홍제동과 홍은동 지명의 유래는 홍제원(弘濟院)에서 따왔다. 조선시대에 원(院)은 관원들이 지방으로 갈 때 묶는 국영 숙박시설에 붙인 명칭이다. 서울 청계산 인근의 원지동(院趾洞) 등 지명에 원이 들어간 곳은 대개 숙박시설이 자리했던 곳이었다.
홍제원은 조선시대에 돈의문, 즉 서대문을 나와 북쪽으로 향하면 맨 처음에 나오는 원이었다. 돈의문 밖은 의주까지 연결하는
의주로의 시작 지점이었는데 독립문 자리에 있었던 영은문(迎恩門)을 지나 무악재를 넘으면 홍제원에 닿았다. 홍제역 동쪽
골목에 자리했다고 한다.
중국 사신 관점에서 보면 홍제원은 한양 방면 가장 마지막에 나오는 숙박시설이었다. 그래서 중국에서 오는 사신들은
홍제원에서 묶곤 했다. 이들을 위한 공관이 따로 있었는데 중국 사신들이 휴식을 취하고 예복을 갈아입는 등 도성으로
들어가기 위해 준비하던 시설로 이용했다. 홍제원은 현재 홍제역 인근의 표석으로만 흔적이 남았다.
홍제천은 홍은동과 홍제동을 나누는 기준이다. 홍제천 북쪽(사진에서 왼편)이 홍은동, 남쪽(사진에서 오른편)이 홍제동이다.
홍제동은 조선시대에 한성부 북부의 연은방에 속했다. 도성 밖 성저십리 지역이었다. 1914년에 조선총독부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경기도가 되었고, 고양군 은평면 홍제내리에 속하게 됐다. 홍제내리는 홍제원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1936년에 다시 경성부로 편입돼 홍제정(弘濟町)이 됐고, 해방 후인 1946년에 서대문구 홍제동으로 바뀌었다.
홍은동도 조선시대에 한성부 북부 연은방에 속했었는데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고양군 은평면 홍제외리에 속하게 됐다. 1936년에 홍제내리가 경성부로 편입될 때 홍제외리 일부 지역이 포함됐다. 이때 대부분의 홍제외리는 경기도에 남았고, 해방 후 1949년에야 서울 서대문구로 편입됐다. 1950년에 홍제외리의 홍과 은평면의 은을 따 ‘홍은동’이 됐다.
홍제내리와 홍제외리는 홍제원을 기준으로 나눈 행정구역이었다. 홍제원이 사라진 지금 홍제동과 홍은동을 구분하는 기준은 홍제천이다. 홍제천의 남쪽이 홍제동이고 북쪽이 홍은동이다.
국민주택의 자취
마을버스 서대문13의 기점은 홍은동 국민주택 정류장이다. 홍제역에서 홍제천을 따라가다 하천을 건넌 마을버스는 포방터시장을 지나 경사진 주택가를 올라간다. 그 꼭대기에 나오는 동네가 국민주택이다. 서대문13은 북한산 끝자락 등산로 입구에 차고를 뒀고, 노선 일부가 겹치는 서대문11과 차고를 공유한다.
홍은동 주택가 언덕길을 오르는 서대문13. 이 일대가 홍은동 국민주택단지였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홍은동 국민주택을 따로 정리한 자료를 찾기는 어려웠다. 주택법상 국민주택은 ‘국민주택기금에 의한 자금을 지원받아 건설되거나 개량하는 주택’을 의미하는데 ‘주거전용면적이 85㎡ 이하인 단독주택, 아파트, 연립주택 등 주거용 서민주택’이 여기에 해당한다.
하지만 ‘홍은동 국민주택’은 1950년대 말에 대한주택영단(지금의 한국토지주택공사)이 조성한 주택 단지를 일컫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 전쟁 후 서울 등 대도시들은 심각한 주택 부족을 겪었다. 그래서 1957년부터 대한주택영단에서 국민주택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국민주택은 단독주택이나 연립주택으로 지었는데 관련 자료를 보면 ‘단독주택은 대지 40평에 건평 15평 규모, 연립주택은 한 개 동에 4세대가 입주하는 2층 규모의 집합주택’이었다.
국민주택은 주로 도시의 변두리 지역에 건설됐다. 서울에는 1950년대 말에 불광동, 1960년대 초에 갈현동과 수유동에 국민주택단지를 건설했다. 이 시기 홍은동과 홍제동에도 국민주택단지가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홍은동 국민주택단지 일대.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홍은동 국민주택단지의 한 골목.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마을버스 서대문13의 기점인 홍은동 국민주택 정류장에서 한 주민에게 물어보니 “이 동네 집들이 거의 국민주택이었다”고 알려준다. 도로변에는 새로 건축한 주택이 대부분이지만 산 쪽으로 올라가는 골목 양편에 지은 지 오래돼 보이는 집들이 모두 국민주택이었다는 것.
계단을 오르며 동네를 내려다보니 집들이 같은 규격으로 보인다. 마당 크기도 주택 크기도 비슷해 보이고 나란히 줄지어 선 듯한 모습 또한 질서정연해 보였다. 통일된 계획과 설계로 들어선 주택 단지의 특성을 보여주는 동네다.
담장이 있어 내부를 자세히 볼 수는 없지만, 오랜 세월이 느껴지는 건축물이다. 새로 칠을 하고 수리를 했어도 지붕과 담장과 벽면의 느낌은 빈티지한 장소를 방문한 그런 느낌을 주었다.
조용해진 포방터시장
홍은동 국민주택 정류장에서 도로를 따라 내려오면 포방터시장이 나온다.
시장에 걸린 포방터 유래에 따르면 임진왜란 이후 도성을 지키기 위해 설치한 오군영(五軍營) 중 포 훈련을 했던 곳이고,
6·25전쟁 때는 포를 설치해 서울을 방어했던 장소였다고 한다.
전쟁 후 포대가 철수하니 공지로 남았을 것이고 사람들이 모여들어 집을 짓게 됐을 것이다. 사람들이 많이 살게 되니 자연스럽게 시장도 열렸을 것이고. 시장 측에 따르면 포방터시장의 역사는 1960년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홍제천 쪽 시장 입구 한켠에는 대포 모형이 있는데 포방터였다는 정체성을 보여주는 듯했다.
홍은동 포방터시장. 입구 왼쪽 대포 모형이 포방터시장의 정체성을 보여준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홍은동 포방터시장. 방송에 나와 떠들썩했던 돈가스집이 있던 자리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3월 어느 점심 즈음에 찾은 포방터시장은 썰렁했다. 장 보기에 이른 시간이지만 식당마저 손님이 드물었다.
몇 해 전 핫한 맛집으로 떠들썩했던 그 포방터시장이 아니었다. 한 주민은 “주말에나 좀 사람들이 찾아온다”고 했다.
그는 “TV에 나왔을 때 가게 앞은 물론 홍제천까지 사람들이 줄을 서서 난리도 아니었다”며 유명했던 돈가스집을 언급했다.
유명한 돈가스집이 있던 그 자리는 지금도 돈가스집이다. 점심시간이고 작은 공간임에도 빈 테이블이 보였다.
포방터시장 측은 “토요일엔 포방터”라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그 바람처럼 주말에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올까.
배차가 길어도 기다리는 수밖에
홍제역으로 모이는 서대문의 마을버스들은 대개 기점으로 다시 돌아간다.
홍제동에서 홍제역으로 왔다가 다시 홍제동으로, 혹은 홍은동에서 홍제역으로 왔다가 다시 홍은동으로 돌아가는 것.
그런데 서대문13은 홍은동에서 홍제역을 거쳐 인왕산 자락의 홍제동까지 운행한다.
돌아갈 때는 홍제동에서 홍제역을 거쳐 기점인 홍은동으로 향한다.
서대문13이 홍제동의 인왕산 자락 아파트단지의 종점에서 대기하고 있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홍제역 앞 대로에서 홍제동 아파트단지 쪽으로 진입한 마을버스는 인왕산 자락의 종점을 향해 올라간다. 엔진이 힘겨운 소리를 낼 정도로 경사가 급한 길이다. 대로변에서 종점까지 그리 멀지는 않지만, 그 경사가 마을버스의 존재 이유를 알려주는 듯하다.
다만 서대문13을 타려는 승객들은 버스 안내 어플을 잘 이용하거나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 배차 간격이 26분이기 때문이다. 차를 놓친다면 거의 30분을 기다려야 한다. 그래도 마을버스 서대문13은 홍은동 고지대 주택가와 홍제동 고지대 아파트단지 사이를 왕복하는 소중한 발이다.
첫댓글
좋은아침입니다 잘읽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