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중앙연구원 성씨와 본관에 소개된 10개 본관의 안씨(安氏)에 관련된 기록
본관 |
시조 |
성씨의 유래 |
공산안씨(公山安氏) |
안익(安翊) |
공산안씨(公山安氏)는 고려시대 찬성사(贊成事)를 지낸 안익(安翊)을 시조로 하고 있다. 한편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는 안익이 조선조의 인물로 나타나 있다. 공산안씨의 경우 문헌이 없어 자세한 세계(世系)나 본관의 유래에 대해서는 전해지지 않는다. |
광주안씨(廣州安氏) |
안방걸(安邦傑) |
고려 태조 때 대장군(大將軍)을 역임하고, 이후 광주군(廣州君)에 봉해진 안방걸(安邦傑)이 광주안씨의 시조이다. 안방걸은 고려태조 왕건이 삼국을 통일하는 시기에 광주지방의 鄕吏로 광주지방의 안정에 공적이 있어 大將軍의 軍職을 가지고, 土姓分定에 의한 성씨를 安씨로 스스로 가지고 廣州를 생활 근거로 거주하였으므로 후손이 本貫으로 삼아 왔다. |
순흥안씨(順興安氏) |
안자미(安子美) |
시조 안자미(安子美)는 고려시대 흥위위보승별장(興威衛保勝別將) 신호위상호군(神號衛上護軍)에 추봉되었다. 따라서 시조 이전의 세계(世系)는 알 수 없으나, 그 후대로 순흥현(順興縣)에 세거했기 때문에 관향(貫鄕)으로 삼았다. 안자미의 아들 안영유(安永儒), 안영린(安永麟), 안영화(安永和)를 기준으로 1,2,3파로 구분된다. |
안산안씨(安山安氏) |
안자유(安子由) |
안산안씨(安山安氏)는 고려시대 충목왕 때 첨의평리(僉議評理)를 지낸 안자유(安子由)를 시조로 하고 있으나, 정확한 세계나 유래에 대해서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한편 평리(評理)를 지낸 안맹(安孟)을 시조로 하는 문헌도 있는데, 이는 자유(子由)가 맹(孟)으로 잘못 전해진 것 같다. |
제천안씨(堤川安氏) |
안적재(安迪材) |
제천안씨의 시조는 고려시대 평리(評理)를 지냈다고 하는 안적재이다. 다만 문헌이 없어 세계는 알 수 없고, 세조10년(1464) 문과(文科) 병과(丙科)에 급제하여 한림(翰林)을 지낸 안처량(安處良)이 후손으로 전한다. 2000년 현재 252명이 있는 것을 조사되었다.
제천(堤川)은 원래 고구려의 내토군(奈吐郡, 일명 大堤郡)이었다. |
주천안씨(酒泉安氏) |
안정방(安挺方) |
안정방(安挺方)은 고려 때 호장(戶長)을 지냈다고 전해진다. 문헌이 없어 본관의 유래는 알 수 없으나,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모시고, 주천을 본관으로 삼아 현재에 이르고 있다.
공신이며 원성군(原城君)에 봉해진 안중경(安仲敬) 혹은 안경중(安敬仲)이 일파로 전해진다고 한다.
주천(酒泉)은 본래 고구려의 주연현(酒淵縣)으로 주요 성씨로는 안(安), 윤(尹), 조(趙)씨 등이 있었다. |
죽산안씨1(竹山安氏) |
안방준(安邦俊) |
오늘날 죽산안씨의 시조로 알려지는 안방준(安邦俊)은 당나라 종실(宗室) 이국정(李國貞)의 아들인 이원(李瑗)의 장남 이지춘(李枝春)이라고 한다. 그는 864년(경문왕 4)에 이엽춘(李葉春), 이화춘(李花春) 형제와 왜구토벌에 큰 공을 세우자, 왕이 ‘안국지신(安國之臣)’이라는 뜻에서 안씨(安氏) 성을 받았으며, 이 때에 안방준으로 개명하고 죽산군(竹山君)에 봉해졌다고 1999년에 편찬된 죽산안씨대동보에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신당서 70권의 당나라 종실 세계에는 이국정의 아들 중에 이원이라는 인물이 없다. 따라서 이국정 - 이원 - 이지춘으로 이어지는 세계는 근거가 애매하다.
중국에서 온 3형제에서 안씨가 연원했다는 주장이 나오기 이전까지, 씨족원류 등의 문헌에서 죽산안씨의 맨 윗대로 언급되는 사람은 안준(安濬)과 안영의(安令儀)이다. 이 두 사람은 계보가 다른 것으로 나오는데, 이들의 선대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는다. |
죽산안씨2(竹山安氏) |
안원형(安元衡) |
시조는 안원형(安元衡)으로 알려진다.
안원형은 고려 후기의 인물로 전해지는데, 관련 기록은 많지 않다. 우선 삼탄(三灘) 이승소(李承召)가 지은 회양부사안후묘갈(淮陽府使安侯墓碣)이 있는데 여기에는 “공의 이름은 안복초(安復初)이며 본관은 죽산(竹山)이다. 아버지는 안노생(安魯生), 할아버지는 안면(安勉), 증조는 중대광(重大匡) 광산군(光山君) 안원형(安元衡)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고려시대 과거 급제자 기록을 정리한 고려열조등과록(高麗列朝登科錄)에는 “죽산안씨 안노생(安魯生)의 아버지는 안면(安勉)이고 조부는 안원형(安元衡)”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승소가 지은 안복초의 묘갈과 고려열조등과록의 안노생 급제 기록에 나타난 안원형과 그 후대에 대한 기록은 대체로 일치한다. |
탐진안씨(耽津安氏) |
안원린(安元璘) |
탐진안씨(耽津安氏)의 시조는 안원린(安元璘)으로, 고려때 문과에 급제하고, 정당문학(政堂文學) 검교중추원사(檢校中樞院事)를 지내고 탐진군(耽津君)에 봉해졌으며, 이런 연유로 후손들이 탐진을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안원린이 과거에 급제하여 정당문학 등을 역임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사 등의 기록에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실존 인물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이 부분은 더 연구가 필요하다. |
태원안씨(太原安氏) |
안만세(安萬世) |
시조 안만세(安萬世)는 태원 사람으로 원나라 전서를 지냈다. 노국공주가 우리나라에 올 때 같이 와서 정착하여 대대로 살았으며 공민왕 때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냈다. 그의 후손들이 중국의 고향인 태원을 본관으로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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