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 불교냐 짝퉁 불교냐?
어떤 사람이 바다에 나갔다가 오래 동안 물에 잠겨 있던
검은 나무를 건져냈다.
그 나무는 그윽한 향기를 풍기는 흑단향 나무였다.
그는 매우 기뻐하며 수레에 가득 흑단향 나무를 싣고 돌아와
시장에 내다 팔려고 했다.
그러나 워낙 귀한 것이라서 선뜻 사려는 사람이 없었다.
그 옆에는 숯장수가 있었다.
그는 매일 한 수레의 숯을 끌고 나와 금방 팔고 들어갔다.
이를 본 사나이는 ‘팔리지 않는 흑단향을 내 놓고
하루 종일 기다리는 것보다
차라리 숯을 만들어 파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그는 흑단향 나무를 태워 숯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았다.
그러나 그 값은 흑단향 나무 반 토막 값도 안 되는 것이었다.
〈백유경〉에 나오는 이 우화의 비유가 딱 들어맞는 경우가 있다.
설법 대신 목탁으로 살아가는 우리나라 불교의 현실이 여기에 해당된다.
불교는 숯과는 비교가 안 되는 흑단향 같은 진리를 가진 종교인데
우리나라 불교는 그것을 숯으로 만들어 팔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의 출발은 고대 인도 종교의 제사주의 주술주의의
허구를 비판하고 이성에 의한 진리의 터득과
바른 지혜를 실천하라는 메시지에 있었다.
부처님은 종래의 기복적이고 운명론적인 종교 신념과
낡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낡은 믿음을 버리고’ 라고 외쳤다.
불교가 ‘깨달음의 가르침’이라고 불렸던 것도 여기에 있었다.
그렇지만 이 위대한 가르침은
어리석음이 깊은 중생일수록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욕망의 지배를 받는 중생은
어떻게 하든 출세하고 부자가 되는 것이 소원이다.
그것을 위해 훔치고 속이는 일을 물론이고
기도나 주술을 동원하려 한다.
그들은 불교의 이성적 메시지를 거부하려 한다.
불교는 여기에서 심각한 딜레마를 느꼈다.
그러자 생각해낸 꾀라는 것이
불교 안에 제사주의와 주술주의를 도입하는 것이었다.
사찰에서는 이성의 종교, 깨달음의 종교라고는
보기 어려운 일들이 생겨났다.
무명을 일깨우라는 목탁을
방편이라는 이름의 기복주의로 탈바꿈시키고만 것이다.
실제로 요즘 우리나라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법사(法事)는
진리의 설법해 중생을 깨우치는 것이 아니다.
목탁을 쳐서 복을 비는 불공과 요령을 흔들어
조상을 천도하는 재받이가 대종이다.
흑단향을 숯으로 만들어 팔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많이 달라지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숯보다는 흑단향을 찾는다.
고학력시대에 돌입하면서
제사주의나 주술주의는 점점 외면당하고 있다.
저질과 짝퉁의 시대가 가고 바야흐로
흑단향고 같은 명품의 시대, 불교의 시대가 도래 한 것이다.
현대사회처럼 불교의 진리가 절실하게 요청되는 시대도 일찍이 없었다.
그런데도 불교는 이런 상황을 눈치 채지 못하고
아직도 설법보다는 목탁에 더 연연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목탁 없이는 불교가 안 될 것처럼 말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
현대포교가 의욕만큼 성공을 거두지 못하는 것은
목탁대신 설법을 중심으로 포교하기 때문이 아니라
제대로 된 설법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날이 갈수록 젊고 학력 높은 사람들이 불교에서 멀어지고,
도시의 사찰들이 고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설법을 통해 중생을 깨우쳐 해탈의 길로 인도하지 않는다면
이를 어떻게 불교라 할 수 있겠는가.
손님조차 싸구려 숯을 사려고 하지 않는데
아직도 흑단향을 숯으로 만들어 팔려고 한다면 그 장사는 곧 망한다.
지금 우리나라 불교가 그렇다.
명품은 명품으로 팔아야 제값을 받는다.
명품을 짝퉁으로 팔면 천하의 웃음거리가 된다.
하루빨리 목탁중심의 짝퉁 불교에서
설법중심의 명품 불교로 바뀌어야 한다.
짝퉁 숯이 아니라 명품 흑단향을 내놓아야 한다.
이제 부처님이 외도들에게 했던 말을
들어야 할 대상은 불교 자신이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낡은 믿음을 버리고”
홍사성 / 불교평론 주간
출처: 불자모임광장
첫댓글 명품 흑단향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