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관 시인의 본 53 선지식 18차. 30. 윤동주의 슬픈 참회록
윤동주의 슬픈 참회록
윤동주의 일본 하라루마
윤동주의 창씨개명을 생각하니
일본식민지 시대에 자신을 바라볼
거울을 만들어냈던 역사다
자기 얼굴을 바라볼 수 없던 시대
바위에 거울을 만들어 보았다고 하면
대나무밭에서도 돌을 갈아 거울을 만들어 세웠다면
자기 얼굴을 바라볼 수 있었을 것인데
그러한 거울을 만들지 못했다고 본다,
백두산 너머에 있는 용정
용정이라는 지역에서 살았던 윤동주
고향에 있는 지역에 대학이 있었으면
고향에서 대학을 다녔을 수도 있었던 지역
윤동주의 마음에 가서 보았다
윤동주의 토담을 어루만지면서
윤동주의 창씨개명의 시대적 모습을
그림이라고도 그려 보려고 하지만
그림으로 그릴 수는 없는 사연
그러한 사연이 윤동주를 고향에서
고향에서 떠나게 하였던 것이라고
그날을 기억하면서 조선 독립군들이
여기저기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하기도 했던
그러한 지역에서 탈출하여 서울로 유학을 왔다.
경성에 와서 대학을 다니면서
거리를 거닐던 지역에서 보면
인왕산은 윤동주 오르던 산
그런 시연을 인고 살아 있는 모습을
그 모습을 버리고 떠나야 했다,
인왕산을 떠나야 하는 마음에 결심은
바로 일본이 전령하고 있는 인왕산
인왕산에 올라 바라본 조국
그러한 조국을 떠나야 한다.
식민지 삶에 사는 일을 기록하는데
그날을 기억하려는 모습이었다
조선왕조의 거울을 바라볼 수 있는 날
그날을 기억하려고 떠나야 했다
윤동주는 인왕산에 올라 바라본 왕궁
조선 왕궁이 불타고 있는 현실이
참으로 슬픈 날의 아픔을 기억하려고
인왕산을 떠나야 할 때가 되었다
그리하여 윤동주는 일본식 이름으로 바꾸고
대한해협을 건너 일본으로 가려고 했다,
아, 그런 데 슬퍼하는 일은 그에 대하여
자기 의사와는 관련이 없다고
그러한 말을 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이야말로 말도 되지 않는다
1942년 일본으로 유학길에 올라
일본 유학하려고 하면 일본 이름이 아니면
당시로서는 일본 대학에 입학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변명하려고 한다면 윤동주 시인에게 욕되게 함이다
윤동주 시인을 구하는 일을 해야 한다.
윤동주는 창씨개명을 했노라
아 슬픈 조국에 태어남이다
귀국하려고 할 때 윤동주는 치안 유지법으로
후쿠오카 감옥에 수용되었다가
감옥에서 옥사했다.
옥사한 것은 옥사한 것으로
기록하면 된다.
윤동주 시인이라는 이름으로 복권이 된다면
당시에 똑같은 역할을 하였던 인사들에게도
복권되어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윤동주 시인이여 우리는 슬퍼하자꾸나?
조국을 바르게 수지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존재를 망각하게 한다.
얼마나 슬픔이 인왕산을 휘감고
윤동주가 그러한 운명에 처해 있다면
만주 지역에서 보았다.
저 넓은 들판을 빼앗긴 것은
영국이 청나라를 아편전쟁으로 장악한 이후에
조선에 대하여 일본에 봉납했던 시대에
영국의 종교를 강요 숭상하게 하였다
보라 영국이 어떠한 나라인가를 보라
윤동주 시인이여 그날에 슬픔을 노래한다,
인왕산에 올라가 보았다
윤동주의 피눈물이 뿌려져 있는
인왕산에 바위도 슬퍼하련다.
윤동주가 창씨개명으로 이름을
아 우리는 너무도 슬프구나.
세월이 가면 갈수록 슬픈 참회록
당시에 그러한 역사를 고찰하지 못했나!
그 이유는 바로 자신의 존재를
성찰하지 못했던 날의 병
병든 몸으로 생각하지 못했던
그날을 기억하자꾸나?
바람이 불어온다고 해도
바람을 막아줄 결사가 있어야 했다,
치안 유지법으로 죽어간 이들
그들을 찬양하는 시를 창작했다고 하면
파도치는 바다를 항해하지 않았을 것인데
그렇게도 바다를 동경했던가?
윤동주가 무엇 때문에 일본을 향해
그곳에는 일본이라는 섬나라인데
섬나라를 섬기려는 시인들이 있더냐
임진왜란에 관하여 교과서를 만들었다고 하면
일본 바다를 향해 배를 몰고 가지는 않았을 것인데
임진왜란에 대하여 알지 못했던 윤동주였나
아 너무도 슬픈 날의 참회록이여
2022년 12월 10일
출처: 불교평화연대 원문보기 글쓴이: 진관 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