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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집 보기는 그렇게 끝났다
박 완 서
차 준비를 하려다 말고 나는 응접실 문을 살며시 밀어봤다. 정면으로 보이는 남편 민교수는 평소와 다름없이 점잖고 무심해 보였다. 방금 내가 안내한 손님은 뒷모습만 보였다. 구식으로 짧게 깎은 뒤통수가 청면으로 대할 때와는 딴판으로 확고하게 관료적 이어서 나는 새삼스럽게 가슴이 두근대기 시작했다.
나는 손님을 문전에서 따돌리지 못한 걸 후회했다. 민교수에겐 손님이 많은 편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가 손님을 좋아하는 성민지 싫어하는 성민지조차 알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손님은 대개 이미 졸업 했거나 재학중인 제자들이었고, 긴하거나 급한 용무보다는 그저 이야기가 하고 싶어 드나드는 젊은 친구들이었기 때문에 그가 일에 몰두해 있을 때나, 시간을 빼앗기고 싶지 않은 눈치일 때는, 내 마음대로 문전에서 그의 부재중을 꾸며대고 손님을 따돌려도 무방한 게 우리 부부의 오랜 묵계였다. 그렇게 할 때 나는 세도라도 부리는 것같이 얄팍한 쾌감을 맛본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나 자신의 기분에 따라 그런 세도를 남용한 일은 없었다. 또 그럴 만한 이유 없이 손님의 인상 봐가며 즉흥적으로 불쑥 그렇게 한 적도 없었다.
대학은 지금 긴긴 겨울방학중이었고 며칠 전에 학생들 성적처리를 끝낸 걸 알고 있었고, 급한 원고나 논문 준비를 하고 있는 눈치도 없었으니, 드물게 민교수가 한가한 때였다. 손님을 문전에서 따돌릴 만한 아무런 까닭도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문전의 손님을 대하는 순간 가슴 먼저 울렁대며 민교수가 여행중이라고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손님의 태도에 트집 잡을 만한 데라곤 없었다. 오히려 손님은 너무 붙임성 있고 공손했고, 어디서 많이 만났던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만큼 흔하디흔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어린애가 낯을 가리듯이, 단박 손님이 딴 손님과는 전혀 딴 용건을 갖고 온 것을 알아차리고: 거기 두려움을 느꼈다. 그래서 따돌리려고 하는데 손님의 시선이 내 어깨너머로 집 안을 넘겨다보면서, 문득 예리하게 빛나는 걸 나는 보았다.
우리집은 대문에서 현관까지 사이에 골목처럼 좁은 마당밖에 없는 작은 집이었고, 현관 옆은 바로 응접실 겸 민교수의 서재였다. 마침 아침나절이었다. 나는 뒤통수에도 눈이 달린 것처럼 민교수가 응접실 창가에 놓인 분재에 볕을 보이기 위해 커튼을 젖히고 있는 모습을 본 것처럼 느꼈다. 나는 손님을 따돌리지 못했다.
“저어, 아침을 같이 드시도록 준비 할까요? 차만 들여올까요?”
나는 남편의 예사로운 표정에 조금은 마음을 놓으며 물었다. 실상 그것은 엉뚱한 질문이었다. 특별히 초대한 손님 아니면 식사 대접까지 하는 일은 없었고, 또 우리집 식구 중에서도 남편만이 아직 아침식사 전이니 꽤 늦은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손님에 대한 나의 직감적인 두려움을 삭이지 못해 응접실을 엿보고 나서 꾸며댄 말론 과히 부자연스럽진 않았다.
“아, 아닙니다. 우리는 곧 가야 합니다.”
민교수 대신 손님이 고개를 이쪽으르 꼬면서 대꾸했다. 우리라는 말이 내 귀에 매우 거슬렸다.
“전 아직 아침 전입니다. 보통때 아침을 거르는 습관 때문인지 방학중엔 아침도 점심도 아닌 아점심을 먹 게 돼서요.”
남편이 손님에게 웃으면서 말했다.
“아점심이란 재미있는 말이군요. 저는 일 년 내내 방학은커녕 공일도 없는 주제에 아점심으로 때우고 삽니다. 실은 저도 아직 아침 전입니다.”
“그럼 같이 드시고 가시죠.”
“아닙니다. 식사는 제가 밖에서 대접하도록 해주십시오.”
“저는 아침은 외식을 안 하는 성미입니다.”
“이거 죄송하게 됐습니다. 대수롭지 않은 일로 교수님의 일상의 리듬을 망치게 해서·…‥.”
나는 두 사람이 주고받는 말뜻도, 두 사람의 친분의 정도도 헤아릴 수 없는 채 두려움만이 좀더 명백해졌다.
“여보, 외출 준비를 해주구려, 내복까지 일습을.”
남편이 처음으로 나에게 말했다.
“내복까지요?”
나는 내복에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것 같아 반문했다. 남편은 나한테 대답하지 않고 손님한테 물었다.
“암만 해도 내복은 두터운 걸로 껴입어야겠죠?”
“아, 아닙니다. 그런 준비는 조금도 안 하셔도 됩니다. 며칠 걸리지도 않겠지만 그 동안 조금도 불편하시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참 사모님, 교수님이 옷을 이 방에서 갈아입으시도록 해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여기서요?”
나는 나도 모르게 겁에 질린 목소리를 냈다.
“네, 여기서요. 참 책을 많이 가지고 계시군요. 전 그 동안 책구경이나 하고 있을 테니 조금도 신경 쓰지 마십시오.”
손님은 부드럽게 말했다. 그러나 거역할 엄두도 못 낼 만큼 우리를 무력하게 만드는 이상한 힘을 가진 목소리였다. 풍선에서 김이 빠지는 것처럼 몸에서 힘이 빠지면서 손끝 발끝의 감각이 아득해졌다.
안방으로 건너와 남편의 외출복과 내복을 챙기면서도 이런 무력감은 계속됐다. 나는 몹시 겁을 내고 있었지만, 왜 겁을 내고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할 힘이 없었다. 옷을 챙기는 나의 손은 그 일이 너무 힘들어 자주 부들부들 떨렸다. 중병을 앓고 나서 검부락지 하나 들 힘이 없는데, 중노동을 강요당하고 있는 것 같은 공포와 긴장감이 겨우겨우 그 일을 하게 했다.
내가 외출복을 다 챙겨가지고 다시 응접실에 들어섰을 때 남편은 여전히 점잖고 무심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손님은 등을 돌리고 있었다. 나는 아무 일도 아닌 걸 갖고 괜히 겁을 낸 것 같아 잠깐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내가 남편이 옷 갈아입는 걸 시중들려고 하자 손님이 말했다.
“사모님, 저한테 차를 한잔 마시게 해주시지 않으시렵 니까?”
그것은 단지 나가달란 소리와 같았으므로 나는 항의하기 위해 손님 쪽으로 돌아섰다. 이제야말로 그의 정체와 그의 횡포의 의미를 따져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손님은 앨범을 보고 있었는데 마침 올 봄, 마당에 앵도꽃이 활짝 핀 날 다섯 식구가 그 둘레에 모역 서서 웃고 찍은 컬러사진이 펼쳐겨 있었다. 나는 손님이 왜 갑자기 우리집에 나타나 횡포를 부리는지 그 까닭을 알 순 없었지만, 그의 횡포가 다섯 식구의 행복을 인질 삼은 횡포라는 것만은 알 것 같았다.
나는 순순히 부엌으로 나가 차를 끓여가지고 들어왔다. 남편은 옷을 다 갈아입고 넥타이만 안 매고 있었다.
“넥타이 좀 매주구려.”
남편이 보통 외출할 때처럼 덤덤히 말했다. 나는 우선 손님 눈치부터 살폈지만 못 들은 척하고 있길래 얼른 남편에게로 다가갔다. 나는 갑자기 남편이 손님 앞에서 나를 애무해주길 바랐다.
남편은 점잖은 가정교육을 받고 자란 남자답게 잠자리 외에서 아내를 애무한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 그건 가망 없는 일이었지만 나는 꼭 그래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 부부가 합심해서 손님의 횡포에 저항할 방법은 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남편은 뻣뻣이 서서 턱만 조금 쳐들었다. 나는 참을 수없는 기분으로 와이셔츠깃 밑에다 넥타이의 가는 허리를 펴넣고 늘어진 양가닥의 길이를 알맞게 겨냥했다. 남편이 천천히 말했다.
“아무 일도 아니니까, 아무 걱정 말아요.”
그리고 도움이라도 청하듯 흘끗 손님의 눈치를 살폈다. 손님은 아직도 앨범을 보고 있었는데 어떻게 자기가 나설 차례라는 걸 알아차렸는지 즉시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러믄요, 사모님. 교수님에겐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어디 며칠 여행 떠나시는 셈만 치십시오.”
“참, 그게 좋겠군. 어머님껜 내가 여행중인 걸로 말씀드려요. 아이들도 그렇게 알도록 하고. 어머님은 예민한 분이시니까 행여 눈치 못 채시게 당신이 각별히 조심해줘야겠어. 조석 진지는 물론이지만 절대로 근심스러운 안색도 보이는 일 없도록 신경 쓰도록 해요. 요컨대 당신도 내가 여행중인 걸로만 알고 있으면 돼. 그리고 참, 분재 돌보는 것도 부탁하오. 햇볕 보이고, 물 주는 거 거르지 말아요. 분재는 물 주는 게 좀 까다롭지. 물뿌리개로 조심스럽게 천천히 겉흙을 적시고 나서 듬뿍 주도록…….”
나는 넥타이도 가까스로 맬 만큼 맥 빠진 손끝에 안간힘이 생기면서 다 맨 넥타이의 한쪽 끈을 힘껏 잡아당겨 남편의 목에 죽지 않을 만큼의 고통을 가하고 짐승 같은 비명을 짜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런 충동은 순간적이었지만 싱싱하고 강렬했다.
넥타이를 다 매자 남편은 양복깃을 토닥거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도 남편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내가 거의 참을 수 없을 만큼 애무를 바랄 때, 고상하게도 어머니와 분재를 봉경하는 방법을 설교한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나는 욕지기처럼 울컥 그와 나와 같이 산 세월이 억울해졌다.
“어머님께 인사드리고 가도 되겠죠?”
남편이 손님에게 양해를 구하면서 처음으로 입가를 비굴하게 일그러뜨렸다. 손님은 못 들은 척 했다. 나는 남편이 어머니를 위해 어느 만큼 비굴해질 수 있나 보기 위해 손님이 오래오래 못 들은 척하길 바랐다.
“어머님은 지금 병흰중이십니다. 워낙 혈압이 높으신데다가, 몇 달 전 제가 담석증으로 수술을 받았을 때 놀라셔서 쓰러지셔 갖고 그 후유증으로 여직껏 자리에 누워 계십니다. 이 일이 만에 하나라도 그분에게 두번째의 충격이 될까 근심스럽습니다. 여행 떠나는 것처럼 인사 여쭙고 떠나도록 허락해주십시오.”
손님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매우 겸손하게 웃었다. 손님의 그런 겸손함은 어떤 거만함보다 더 효과적으로 남을 비굴하게 만든다고 생각하며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나를 기다렸다.
그는 잠깐 망설이는 것처럼 애매한 얼굴을 하고 있다가 말했다.
“좋습니다. 저도 시골에 늙은 부모님이 계십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당연히 어머님께 인사드리러 가는 남편의 뒤를 따랐다.
“사모님께선 여기 계셔주십시오.”
손님이 조용히 말했다.
“그렇게 해요.”
남편은 내가 따라가면 자기까지 못 가게 될까봐 두려워하는 눈치를 감출 척도 안 하고 손짓까지 해가며 나를 만류했다. 나는 응접실에 손님과 함께 남았다. 손님은 다시 앨범을 보며 말을 시켰다.
“참으로 단란한 가정이십 니다. 부럽습니다.”
“무슨 일로 우리 그분을 연행해가십니까?”
“연행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그럼 뭡니까?”
“동행입니다. 제가 교수님께 정중하게 동행을 부탁드렸습니다.”
“그럼 그분은 거절할 수도 있었겠네요?”
“다행히 교수님은 우리가 교수님의 협조를 필요로 하는 까닭을 쉼게 납득해주셨기 때문에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평생 외길을 걸어온 분입니다. 저 분재가 제가 아는 그분의 단 하나의 외도입니다. 학교 외의 고장에 그분이 협조할 일이 있을 것 같지 않은데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수님에겐 많은 제자들이 따랐나봅니다. 그중에는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말썽스러운 청년도 있었죠.”
“그런 게 다 죄가 될 수 있나요?”
나는 발끈했다.
“고정하십시오. 사모님, 전 한 번도 누가 죄지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댁의 신분은 뭡니까? 무슨 권한으로 첫새벽에 남의 집에…….”
나는 나도 모르게 입술을 떨었다.
“그건 이미 교수님께 밝혔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첫새벽이 아니라 열한시 다 돼가는 때입니다. 그러니까 아점심 때가 되겠군요.”
손님이 부드럽고도 냉담하게 말했다. 남편이 들어왔다.
“어머님껜 일 주일 내지 보름쯤 여행하는 걸로 말씀드렸소.”
“그렇게 오래요?”
“넉넉잡고요. 그러니 당신도 그렇게 알고, 평상시와 조금도 다름없이 지내도록 해요. 아마 이번 경험은 나에게 어떤 여행의 경험보다 굉장한 경험이 될 거요.”
남편이 별안간 겁쟁이 소년이 허세 부리듯이 서틀게 뽐냈다. 손님의 얼굴에 보일 듯 말 듯 연민의 그늘이 지나갔다.
나는 이런 두 사람의 대조가 보기 싫어 외면했다. 목이 메게 설움이 복받치면서 손님에게 매달려 남편하고 같이 가지 말아달라고 애걸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졌다. 내가 좀더 예쁘고 젊은 여자였더라면 하는 생각도 했다.
“자아, 가십시다.”
남편이 먼저 앞장섰다. 손님이 어깨를 움찔해 보이면서 뒤따랐다.
나는 두 사람을 골목 밖 한길까지 배웅하려고 했다. 그러나 손님이 대문간에서 우뚝 멈취 서더니 딴사람같이 사무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만 들어가보시죠.”
“저이가 여행 떠나실 땐 골목 밖까지 배웅하는 게 제 습관이라서요.”
“교수님은 지금 여행 떠나시는 게 아닙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또박또박했고 표정은 얼어붙은 것처럼 경직돼 있었다. 나는 그가 나를 세차게 떠다민 것처럼 느꼈다.
“다녀오세요. 여보.”
나는 가까스로 그 말을 했다.
“다녀오리다. 평상시와 조금도 다름없이 태연하게 지내도록 해요.”
두 사람이 뚜벅뚜벅 골목 밖으로 사라졌다. 나는 더 밖에 서 있을 수 없을 만큼 몸이 언 후에 안으로 들어왔다.
침착하게, 손님과 남편이 떠난 자리에 찻잔과 흐트러진 책을 치우고 남편이 벗어놓은 내복을 빨았다.
조금 멍청히 있고 싶었지만, 나는 끊임없이 평상시와 다름없이 지내야 한다는 남편의 부탁을 생각해내면서 숙제에 쫓기듯이 바쁘게 굴었다.
“얘야, 어멈아. 밥 다우. 배고파 죽겠다. 뱃속에서 무두질을 한다. 해가 저만큼이나 올라오도록 시어멈 점심 줄 생각 안 하고 뭐 하고 있는 게야?”
그것은 뒷방에 계신 시어머님의 목소리였다. 줄을 타듯이 아슬아슬하게 유지하고 있는 일상의 화평에 갑차기 뛰어든 이런 시어머님의 목소리가 쇠망치로 양철통을 두들겨패는 소리처럼 파격적으로 생경하고 끔찍해 나는 몸서리쳤다.
그렇다고 그런 목소리를 오늘 처음 듣는 건 아니었다. 당뇨병과 고혈압을 지병으로 갖고 계신 시어머님은 늘 허기져하셨다.
게다가 워낙 고령이셔서 어리광 비슷한 노망기도 있으시다. 외아들인 남편이 담석 제거수술을 받을 때, 별로 위험한 수술이 아니기에 숨기지 않았더니 수술이란 소리에 단박 까무라치셨다.
깨어나신 후론 늘 자리에 누워 계시고, 노망기가 좀더 심해지셔서 유난히 찹숫는 것만 밝히신다.
아침엔 꼭두새벽부터, 낯엔 열두시도 채 치기 전에 진지 재촉을 하시는데, 꼭 뱃속에서 무두질을 한다느니, 배창자가 오그라 붙는다느니 하는 극단적인 말만 골라서 하신다.
귀는 또 어찌나 밝으신지 삼시 진지 외에도 어디서 입맛 다시는 소리만 나도 “애들아, 느들만 먹지 말고 나 좀 다우. 늙은이 몰래 느들만 먹으면 죄받는다” 하고 고고(呱呱)의 소리처럼 생경하고 앳된 소리로 보채신다.
그러나 시어머님의 그런 생경한 목소리를 한 번도 우리 집안의 점잖고 화평스러운 일상과 대립된다거나 훼방이 된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남편이 가꾸고 아끼는 분재를 우리 식구가 모두 덩달아 위하듯이 시어미님의 노망 역시 남편을 덩달아 우리 식구가 힘을 모아 정성껏 가꾸고 기르고 있었고, 그것을 은근히 남에게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얘야, 내 배가 무두질한다”는 소리가 조금만 제 시간보다 늦게 나도 혹시 어디가 불편하신가 가슴을 두근대며 어머님의 방을 엿보고, 주무시면 숨결이 고른가 조용히 귀 기울여보고도 미심쩍어 꼭 그 소리를 듣고 나야 안심을 하는 게 우리 식구 모두의 진심이었다.
나는 그런 어머님의 목소리가 듣기 싫었다는 데 죄책감을 느끼며 서둘러서 점심 준비를 했다.
나야말로 아점심을 드는 남편과 같이 들려고 하다가 여직껏 아침도 못 먹은 채였지만 조금도 식욕을 느낄 수가 없었다. 자기가 식욕이 없을 때, 타인의 식욕처럼 덮어놓고 싫은 건 없다.
시어머님은 계속해서 뱃속에서 무두질을 한다고 악을 쓰셨고 점심상을 다 보았을 때는 그 소리가 너무 듣기 싫어 말대답이라도 할 것 같은 찰나였다.
고혈압과 당뇨병을 위한 식이요법 때문에 시어머님의 진짓상 보기는 늘 시간이 좀 걸렸다. 시어머님의 병적인 식욕은 남편의 무엇보다도 큰 근심거리였다.
고기를 즐기셨지만 주로 생선을 드렸고, 진지보다는 야채로 만복감을 느끼시도록 하기 위해 좋은 말로 달래고 속이고 겁주고 해야만 했다.
그러나 오늘은 도저히 그럴 마음이 아니었기 때문에 진짓상을 내려놓고 가만히 다 잡숫기를 기다렸다.
나는 어머님이 손으로 생선을 집어서 새하얀 틀니로 뼈까지 오지직오지직 씹어서 상 귀퉁이에 퉤퉤 뱉고, 비린 손가락을 쪽쪽 빠시는 걸 지켜보며, 나는 어쩔 수 없이 내 속에 자리잡은 그분에 대한 미움을 의식했다. 그것은 아직도 내 마음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점잖고 고상하고 도덕적인 것에 짓눌려 부피 작은 것이었지만 압축공기처럼 다부지고 위험스러운 것이기도 했다.
저녁에 아이들이 돌아왔다. 고3과 중3짜리 남매는 방학중이지만 오전엔 학교에서 보충수업을 받고 오후엔 과외수업을 하고 늦게나 돌아온다.
나는 아이들에게 아버지가 여행 가셨다고 말했다. 아이들은 저마다 고달픈 제 일을 갖고 있기 때문에 어른 일에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어디로 여행 가셨느냐고 묻는 아이도 없었다. 나는 고3짜리 딸과 중3짜리 아들의 키가 나보다 큰 것을 새삼스럽게 대견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거짓말을 시킬 게 아니라 진상을 일러주어 나와 함께 근심을 나눌 수 있었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이 생겼다. 우리 아이들은 이제 어린애가 아니었다.
그러나 어린애가 아니기 때문에 아버지 일을 안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 일을 이해하길 바랄 것이다. 아버지가 연행됐다는 사실보다는 왜 연행됐나를 아는 게 아이들에겐 보다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나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내가 그걸 이해시킬 수 없는 한 아이들은 아버지가 파렴치범이라는 것과 마찬가지의 상처를 입을 게 뻔했다. 나는 아이들과 근심을 나누기를 단념했다.
남편과 나는 의좋은 부부였지만 그와 나 사이엔 서로 침범해선 안 될 선(線)을 갖고 있었다. 그가 타온 월급으로 내가 죽을 쑤든 밥을 짓든 그가 무관심한 것처럼, 나 역시 그가 하고 있는 사회학이란 학문이나 그가 생각하고 있는 것에 대해 모르는 척 하도록 우린 서로 잘 길들여져 있었고, 그렇게 하는 게 여러모로 편했다. 나는 거기 대해 한 번도 회의와 불만을 품어보지 않았었다.
나는 아이들이 잠들고 나서 혼자가 된 후, 처음으로 남편과 나 사이의 그런 선에 대해, 누가 먼저 그걸 그었을까를 곰곰이 생각했다. 남편은 여자가 안에서 하는 일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알고 싶어하는 남자를 경멸하는 말을 자주 했었다. 그것은 그가 하는 일에 대해 내가 알고 싶어하는 걸 원치 않는다는 간접 표현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그 선을 먼저 그은 건 남편이라고 나는 단정
했다.
다 큰 자식들에게 아버지를 이해시킬 능력이 없다는 데 대한 열등감 때문인지 나는 어떡하든 남편에 대해 트집 잡고 싶어졌다.
남편은 그가 없는 동안도 평상시와 다름없이 지내길 신신당부했지만 그가 어디서 무슨 고생을 하고 있는지 모르면서 끼니마다 맛있는 반친을 만드는 일은 정말 참을 수 없었기 때문에 되는대로 끼니를 때웠다.
“아니, 너 애비가 없다고 이러기냐? 어쩌면 시에미 상에 비린 생선꽁지 하나를 안 올리냐, 안 올리길. 그러면 못쓴다. 못쓰고 말고. 애비만 와봐라. 내 안 일러줄 줄 알구.”
시어머님은 상을 받으실 때마다 이렇게 짜증을 부리시면서 진짓상을 밀었다 당겼다 수저를 소리나게 내동댕 이쳤다 하며 온갖 소란을 다 떨으셨다.
남편은 아직 안 돌아오고 손님만 다시 한번 나타나 남편이 곧 돌아오리라는 것과 지금의 건강과 거처는 만족스럽다는 소식을 전해줬지만 손님의 정작 용건은 남편의 서재를 뒤지는 일이었다. 그런 경황중에 쇠붙이로 양철통 깨부수는 것처럼 생경스러운 시어머니의 목소리를 견디는 것만도 고역 인데 까다로운 식이요법과 구미에 함께 맞는 식사를 연구하고 장만할 만한 정성이 우러날 리가 없었다.
시어머님은 투정은 투정대로 하시면서도 맹렬한 식욕은 조금도 줄지 않으셔서 상에 올린 거면 모조리 핥듯이 다 잡수셨다. 그러고도 곧 배고프다고 악쓰시구 욕하고 하셨다.
나는 시어머님의 악쓰시는 소리를 힘겹게 견디며 결코 그것을 우리 집안의 일상의 화핑으로 수용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럼 우리가 누린 일상의 화평이란 뭐였을까. 지난날 그것이 우리 집안의 화평을 조금도 거스르지 않고 잘 어울릴 수 있었다는 건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 이었다.
점점 나는 시어머님을 가족도 아니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가족의 한 사람이 고통받고 있을 때 같이 고통받는 것이 가족으로서의 의무라면, 그 의무를 저버리는 것은 곧 가족으로서의 자격의 포기였다. 나는 어느 틈에 시어미님을 가족에서 따돌려, 가족과 적대관계에 놓고 대결하고 있었다. 이제 견디기 어려운 건 생경한 목소리가 아니라, 가족 아닌 사람이 가족 중에 섞여 있다는 사실이었다. 허구한 날 군식구를 섬기는 고통이었다.
그런 경확중에도 나는 매일 아침 응접실의 커튼을 젖히고 남편이 아끼던 분재가 따뜻한 햇볕을 받도록 보살피고, 그 방의 난로의 연탄불을 꺼뜨리지 않도록 밤잠을 설치고, 물 주기도 남편이 가르쳐준 대로 했다.
그러나 나는 조금도 그것들한테 애정을 느낄 순 없었다.
남편은 마치 분재 속에 대자연을 축소해놓은 것처럼 만족해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 강제로 왜화(矮化)된 나무들한테 약간의 연민 외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그러나 어느 날 남편이 가장 아끼던 소나무 분재의 밑동을 보고 나는 이상한 충격을 맛보았다. 윗가지는 벼랑의 낙락장송처럼 품위 있게 늘어져 있는데 밑동은 뱀이 또아리를 튼 것처럼 심하게 감겨 있었다. 아마 인위적으로 억제된 성장이 그런 모양으로 괴롭게 또아리 틀고 있으리라. 나는 우리 집안의 점잖음과 화평도 남편이 분재 가꾸듯이, 그의 취미에 맞게 자르고 다듬고 억제해서 만들어낸 작품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아아, 남편이 빨리 돌아왔으면. 내가 그의 분재까지 구박하기 전에 제발 그가 돌아왔으면. 나는 곧 내가 분재를 구박하게 되리라는 걸 알고 있었으므로 그렇게라도 지레 발뺌을 해두어야 했다.
내가 조석 공경에 등한해질수록 시어머님은 극성스러워지셨다. 병석에 누우신 후로는 본 적이 없을 만큼 정정해지셨다. 여전히 대소변은 요강에다 보시면서도 확실한 걸음걸이로 부엌에 나오셔서 찬장을 등장질하시는가 하면 문이나 창을 와장창 소리나게 여닫으셨다.
그리고 반찬 없는 진짓상을 들고 들어갈 때마다 거의 난동에 가까운 소란을 피우셨다.
“아이고 이년의 기구한 팔자. 이 동네도 사람 사는 동네거든 천금 같은 내 아들 잠시잠깐 집 비운 사이 며느리 갖은 구박 다 받으며 모진 목숨 유지하는 이내 모습 구경하소. 아이고 아이고, 분하고 원통해라. 네가 나 굶겨 죽이려고 이러는 건 안다만 나 안 죽는다, 안 죽어. 내 아들 보기 전엔 어떡허든 목숨 부지하지 눈 못 감는다.”
한바탕 이렇게 심한 욕설을 퍼부으시고 나서 거의 동물적인 식욕으로 진짓상을 말끔히 비우셨다. 시어머님의 이런 욕설이 길어짙수록 말뜻보다는 목소리 그 자체를 견디는 게, 쇠붙이로 양철통 두드려패는 걸 견디는 것처럼 뭔가 아슬아슬했다.
드디어 나는 자제력을 잃었다. 내 속에서 뭔가가 꿈틀 용트림을 했다. 그것은 오랫동안 내 속에 억제되어 또아리 튼 채 굳어있던 열정적인 인간의 감정이었다. 그것을 폭발시키지 않으면 내가 미칠 것 같았다. 시어머님으로 하여금 지금의 처지를 인식시키자. 그래서 그분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주고 그분의 식욕에 심한 모욕을 주자.
“어머님, 지금 우리집 형편이 어머님 이 반찬투정이나 하실 계제가 아닙니다. 아범이, 어머님의 천금 같은 외아들이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 줄이나 아세요? 아범은 잡혀갔어요.”
“잡혀가다니.” .
“잡혀가는 것도 모르세요? 이렇게요.”
나는 나의 두 손이 오라를 지는 시늉을 해서 시어머님의 코앞에 들이탰다. 정말은 그는 그런 모양으로 가지 않았건만.
“이렇게?”
시어머님은 자기 손을 가지고 나의 흉내를 내보이면서 안색이 두려움으로 새하얗게 변색했다.
남편이 수술할 때도 그랬었다. 그러더니 픽 쓰러지셨었다.
나는 기다렸다. 마른침을 꼴깍 삼키면서 기다렸다. 내가 진상을 고해바치는 것만 갖고는 모자라 그런 흉측한 모습까지 지어보이면서 기다리는 건 뻔했다. 나는 시어머님의 두번째의 졸도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어머님이 처음 졸도했을 때 남편의 수술 뒷바라지하랴, 시어머님 병구완하랴 나의 고생은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시어머님은 외아들의 생사가 걸린 일에 그만큼 놀라 마땅한 일이었으므로 그 고생 때문에 고부간의 정까지 벗어나진 않았었다.
그때 일은 불행한 일이었지만 서로 사랑하는 가족끼리기 때문에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지금 또 그런 일을 당한다는 건 그때보다 더 큰 불행이 엎친데 덮치는 격이어서 내가 그걸 잘 감당할 수 있을는지조차 자신이 서지 않았지만, 가족 아닌 사람을 가족 중에 포함시키고 사는 마음 고통에 비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어머님은 까무라치시지 않으셨다. 그 대신 고고의 소리처럼 생경스러운 소리로 통곡을 시작하셨다.
“아이고, 아이고, 이게 꿈이냐, 생시냐. 남의 물건이면 검부락지도 겁내던 고지식한 내 아들이 관재구설이 당키나 한가. 아이고 아이고, 이 겨울에 춥기는 얼마나 춥고 배는 또 얼마나 고플고.”
아이들까지 아버지 일을 알게 되고 집안은 온통 초상집처럼 심란해졌다. 곧 입시를 치를 아이들한테 못 할 노릇을 한 셈이었다.
시어머님은 통곡을 제풀에 가라앉히시더니 곧 진지를 잡숫기 시작했다.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접시까지 싹싹 핥을 만큼 탐욕스러운 식사를 하셨다. 반찬투정도 다음 끼부터 다시 시작됐다.
“너 언젯적부터 이렇게 알뜰해졌냐? 서방만 제일이고 시에민 사람 같지도 않냐? 늙을수록 괴기를 먹어야 기운을 치리지 소증나서 지레 죽겠다. 괴기 먹고 기운 차려 내 아들 보고 죽을란다. 내 아들 보기 전엔 아무리 죽으라고 고사를 지내도 안 죽는다. 안 죽어.”
시어머님은 “안 죽는다, 안 죽어”에 특이한 악센트를 넣으면서 나를 노려보셨다. 나도 지지 않고 시어머님을 노려봤다. 그리고 악담을 했다.
“아무려면요. 오래오래 사셔 야죠. 아무쪼록 많이 잡숫고, 펄펄 기운 차리고 극성부리면서 오래오래 사셔야죠. 아들보다도 며느리보다도 오래오래 사셔 야죠.”
그러면 시어머님은 빈 그릇을 내던지시고 상을 밀어 부딪치셨다. 아이들이 달려와 나를 위로하고 할머니한테 눈을 흘겼다. 그건 점잖은 집안에서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지만 나는 아이들을 나무랄 수 없었다. 우리집은 이제 점잖은 집이 아니었다.
그러고 나면 속이 후련해지면서 슬그머니 시어머님이 불쌍한 생각이 들어서 안 하던 음식 장만을 하기 시작했다.
곰국도 끓이고 고기도 굽고, 진지도 잡곡 안 섞고 한 사발씩 펐다. 간식으로 꿀같이 단 케이크도 사다드렸다. 그것은 골고루 시어머님의 고혈압과 당뇨병 에 해로운 음식들뿐이 었다.
남편이 집에 있고 우리집이 점잖고 화평스러울 때는 절대로 시어머님께 드리지 않던 음식들이었다. 시어머님이 뒷방에서 외상을 받으시도록 한 것도 그런 음식을 멀리하시도록 하기 위함이었었다.
오랜만에 그런 미식(美食)을 잡숫는 모습은 가히 무아의 경지였다. 나는 끼니마다 시어머님께 미식을 대접 했고, 시어머님은 미식을 즐기시는 낙 때문에 외아들 걱정은 잊고 지내셨다.
처음엔 불쌍해서 맛있는 음식을 대접할 마음이 생겼는지 모르지만 진짜 본심은 그분을 가족으로부터 밀어내어 적대의 관계에 놓고 마음껏 미워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나는 남편이 없고 나서 처음으로 생기발랄해졌고, 나를 생기있게 하는 건 바로 증오였다. 시어머님이 맹렬히 미식을 탐하시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는 내 내부에서 왜화를 강요당한 채 괴롭게 또아리 틀고 있던 그분에 대한 솔직한 감정이 ― 홀시어머니가 외며느리 시집살이 시킬 때부터 접어두었던 묵은 증오까지가 활갯짓을 하면서 되살아나는 기쁨에 몸서리쳤다. 증오야말로 가장 확실한 삶의 보람이었다. 공허해야 할 남편이 없는 나날이 팽팽히 충족됐다.
나는 아이들에게까지 나의 증오를 옮기고 싶어했다. 그래서 딸애한테 지나가는 말처럼 말했다.
“얘, 너 낳았을 때 느이 할머니가 외아들 속에서 첫딸 낳았다고 우리 모녀를 얼마나 구박하신 줄 아니. 삼칠일 동안 미역국 얻어먹는 게 가시처럼 목에 걸렸단다.”
그러면 딸애도 나한테 안 하던 말을 해주었다. 아버지가 보내고 싶어하는 대학과 과(不斗)가 차기가 정말 하고 싶은 것하곤 거리가 먼 거여서 고민인데 엄마가 좀 도와달라는 간청도 했고, 자기는 일생에 결혼을 세 번쯤 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벌써부터 하고 있는데, 그런 생각이 용서받지 못할 부도덕이냐 아니냐에 댁해 나의 의견을 묻기도 했다.
나는 또 아들애를 데리고도 이런 실없는 수작을 했다.
“얘. 느이 할머니가 나 시집살이 시킨 건 말도 말아라, 며느리 본 게 아니라 꼭 시앗 본 것처럼 구셨으니까. 느이 아버지하고 나하고 의좋은 모습만 보시면 당장 화가 나셔갖고 어떡허든 우리가 부부싸움을 하는 걸 보셔야만 풀어지셨으니, 참 우리도 억울한 세월 살았다. 행여나 나도 느이 할며니 같은 시에미 노릇 할까 겁나서, 널랑은 아예 애저녁에 따로 낼 작정이다. 그러니까 이 다음에 마음에 드는 여자애가 외며느리 싫다고 트집 안 잡도록 해, 알았지?”
내가 이렇게 못 할 말을 예사롭게 하니까 아들도 제 속마음을 힘 안 들이고 털어놨다. 실은 이 다음 결혼하면 아버지나 엄마 같은 효자 효부 노릇 할 자신이 없어서 독신으로 살기를 바랐다는 고백을 들으며, 나는 저런저런, 불쌍한 내 새끼 하며 아들의 등을 토닥거렸다.
우리집은 이제 정말 점잖고 화평한 집이 아니었다. 나는 매일 포장지를 찢어내듯이 점잖고 화평한 겉껍질을 찢어내고 있었다.
이런 일에 열중하느라 나는 그만 며칠 동안이나 분재를 돌보는 걸 잊고 말았다. 아직 죽지는 않았지만 나무들이 몰라보게 추레해져 있었다.
그러나 나는 물 주고 볕 보이는 일을 다시 시작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마음 없이 그런 일을 해봤댔자 추레해지고, 종당엔 죽어가긴 마찬가지일 것 같았다.
어느 추운 날, 나는 추위에 약한 몇 그루의 꽃나무 분재를 바깥마당에 동댕 이쳤다.
드디어 남편이 돌아왔다. 여행 갔다 돌아오는 것처럼 시어머님과 아이들을 위한 선물까지 사가지고 돌아왔다. 약간 지쳐 보이는 것까지 여행 갔다 오는 사람다웠다.
아무도 그가 여행에서 돌아온다는 걸 믿지 않는데도 그는 여행갔다 돌아오는 척을 계속했다.
그라면 아마 어렵지 않게 그 동안 내가 갈기갈기 찢어놓은 우리 집안의 점잖고 화평스러운 포장을 감쪽같이 다시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결 말릴 생각은 없다. 도와주게 될지도 모른다.
포장 같은 건 그리 중요한 게 못 된다. 중요한 건 내가 포장 속에 들은 것의 진짜 모습을 보았다는 데 있다.
나는 아마 남편의 진짜 얼굴도 보지 않고는 못 건디리라. 그는 포장하려 하고, 나는 찢어내려 하고, 우리 부부는 처음으로 갈등하리라. 그것이야말로 진짜 살맛이 될 것 같았다. 나는 벌써부터 살맛이 났다.
남편은 내가 내동댕이친 분재를 거둬들이고, 나는 그를 위해 목욕물을 데웠다. 그가 없는 동안에 저지른 많은 잘못에도 불구하고 나는 의기 양양했다.
서로 진짜 얼굴을 통해 만나고, 알고 하는 일은 이제부터 그와 내가 해야 할 일이었고, 남편이 없는 동안 내가 홀로 알아낸 일이었고, 여직껏 경험한 어떤 일보다 살맛 나는 일이 될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나의 집 보기는 그렇게 끝났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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