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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경 : 시 20:1-9절
제 목 : 여호와여 왕을 구원하소서
일 시 : 2023. 6. 11.
시 20:1-9/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 2 성소에서 너를 도와주시고 시온에서 너를 붙드시며 3 네 모든 소제를 기억하시며 네 번제를 받아 주시기를 원하노라 (셀라) 4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계획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 5 우리가 너의 승리로 말미암아 개가를 부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의 깃발을 세우리니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 6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 줄 이제 내가 아노니 그의 오른손의 구원하는 힘으로 그의 거룩한 하늘에서 그에게 응답하시리로다 7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8 그들은 비틀거리며 엎드러지고 우리는 일어나 바로 서도다 9 여호와여 왕을 구원하소서 우리가 부를 때에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본 시편을 자세히 읽어보면 문장의 주어가 우리가, 우리는 이라는 단어임을 알 수 있고 또한 문장의 목적어는 네가, 너를 이라는 단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주어가 우리라는 것을 보면 시를 기록한 목적은 한 개인이 아닌 여러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를 위해서 기록된 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네가 너를 이라는 목적어를 보면 한 개인을 위해서 기록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이나 교회라는 공동체가 왕이나 지도자를 위해서 드리는 기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시편 20편은 전쟁터로 나아가는 왕을 위해서, 왕이 전쟁터로 나가기 전에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린 기도입니다. 이 시를 읽으면서 교회라는 믿음의 공동체인 성도들은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기도하지 않는 성도는 성도로서의 본분을 망각하였거나 아니면 중보기도의 사명을 소홀히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라는 믿음의 공동체는 동창회나 산악회 같은 친목단체가 아니라 전쟁터로 나가서 적들과 싸우는 군사들처럼 믿음의 선한싸움을 싸우는 자이기에 기도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자신을 무장하지 않거나 아무 준비없이 전쟁터로 나가는 사람과 같이 어리석은 일임을 깨닫게 됩니다. 예루살렘 초대교회는 처음부터 기도의 공동체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행1:12-14/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13 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14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고 했습니다. 모든 믿는 자들이 함께 모여서 오로지 기도에 힘쓰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했을 때 드디어 성령의 불과 권능이 임하여 초대예루살렘 교회가 탄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 시를 통해서 교회와 성도들의 삶은 어떤 삶이어야 하는지를 깨닫고 하나님이 세우신 믿음의 공동체로서 교회와 성도의 본문인 기도에 충실해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이제 본문을 살펴보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참된 교훈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겠습니다.
1. 우리의 매일의 삶은 치열한 전쟁터에서 싸우는 군사들과 같은 삶입니다.
지금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많은 통신들은 러시아를 향한 우크라이나의 반격이 시작되었음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 동안 우크라이나는 무기도 부족하고 전쟁준비도 되지 않는 상태에서 러시아의 공격을 받았기 때문에 러시아의 공격에 방어하는 일에만 전념했습니다. 그러나 1년이 지나면서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에서 전쟁의 경험과 노하우를 가진 군사훈련 기관들로부터 전쟁기술과 방법과 노하우를 전수받았으며, 또한 서방으로부터 많은 무기를 지원받은 우크라이나가 이제는 러시아를 공격하는 형태로 전쟁의 양상이 바뀌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도로서의 우리의 삶은 현재 진행 중인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과 같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초기의 우크라이나처럼 전쟁준비가 되지 않아서 적들의 선제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하고 방어하는 일에만 주력하느냐 아니면 1년이 지난 지금 전쟁의 기술과 노하우를 배우고 새로운 무기를 준비해서 적들과 적진을 향하여 공격하느냐 하는 두 가지 방법 중에 한 가지를 선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성도로서의 삶은 하루도 영적전쟁이 없이 그냥 지나가는 날이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사탄 마귀 귀신을 임시로 가두어 놓은 지구(감옥)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매일의 삶이 지옥같은 삶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지옥에서 건짐 받았고 원수 마귀에게 포로된 상태에서 벗어났다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아직도 천국에 도착하지 못했고 여전히 적진에서 원수마귀가 싸워야 하는 상황입니다.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죽음이라는 과정을 거쳐서 천국에 들어가는 그 순간까지 마귀지옥에서 생존을 해야 합니다. 때문에 성도로서 우리는 마귀지옥에서 살아 남고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적들의 공격으로부터 지켜 보호하고 또한 더 나아가서 적들을 공격해서 그들의 땅과 무기를 빼앗기 위해서는 전신갑주로 무장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즉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날마다 말씀과 기도로서 근신하고 깨어 있어야 할 뿐 아니라 자신에게 맡겨 주신 사명을 최선을 다해서 완수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삶의 많은 부분이 마귀의 공격을 받아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게 됩니다. 어느 한 부분은 잘 되지만 다른 많은 부분은 원수 마귀의 공격으로 제대로 작동되지 않습니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로부터 국토의 20%을 빼앗긴 것처럼 원수들에게 많은 것을 빼앗겨서 영적이 가난뱅이와 장애인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지금 우리의 삶이 마치 지상낙원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그렇게 안일하고 준비없이 살아간다면 그런 삶은 날마다 실패하는 삶이 될 것입니다. 하는 일마다 실패하게 될 것입니다. 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날마다 가난하고 실패하고 병들고 아프고 우울하고 비참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전쟁준비를 잘 해서 적들과 전진을 공격해서 그들을 정복하고 무너뜨리고 원수가 가진 모든 것을 빼앗는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원수 마귀에게 공격을 당해서 방어만 하다가 가진 것을 빼앗기는 불행하고 비참한 삶을 살 것인가를 선택해야 합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 모두는 적들의 공격에 방어만 하다가 끝나는 인생이 아니라 적들을 공격하고 그들의 땅과 재산을 탈취함으로 부요하고 신나는 삶을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이 시의 표제를 보면 다윗의 시라고 되어 있습니다.
시편 20편은 다윗이 지은 시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 시의 내용을 보시면 다윗을 위한 기도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는 다른 어떤 사람이 다윗을 위하여 기록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더구나 표제에 있는 다윗의 시라는 말에는 -의 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레는 -위하여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는 다윗이 지은 것을 백성들이 사용한 것이거나 아니면 다윗을 위하여 다른 어떤 사람이 지은 시일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시의 내용은 전쟁터로 나아가서 싸우는 다윗 왕을 위해서 모든 백성들과 사람들이 중보 기도하는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3. 적들과 싸우기 위해서 전쟁터로 나가는 왕을 위해서 백성들이 기도한 내용은 무엇입니까?
1) 하나님께서 왕의 기도에 응답하시기를 바라는 것이었습니다.
1-5절까지를 보시면 주시기를 원하노라 는 단어가 세 번씩이나 반복됩니다. 먼저 3절에 네 모든 소제를 기억하시며 네 번제를 받아 주시기를 원하노라 (셀라)/라고 했으며, 4절에도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계획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했으며, 5절에도 우리가 너의 승리로 말미암아 개가를 부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의 깃발을 세우리니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을 삼키려고 침공해오는 주위의 열강 등과 싸우기 위해서 전쟁터로 나아가는 다윗 왕의 마음과 전쟁터에 나아가는 왕을 바라보고 기도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은 하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3절에는 다윗 왕이 전쟁터에 나아서 전쟁하면서 드리는 소제와 번제를 받아 주시기를 원한다는 내용이며, 4절에는 다윗 왕의 마음의 소원과 모든 계획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한다는 내용이며, 5절에는 다윗 왕의 승리로 말미암아 승리의 개가를 부르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의 깃발을 세우게 될 것이라는 다윗 왕의 모든 기도를 이루어 주시기를 원한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전쟁터로 나가는 다윗 왕의 마음이나 배후에서 기도하는 백성들의 마음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교회라는 것입니다. 다윗 왕과 같은 위치에서 일하는 목사가 우리 모두 오른 쪽으로 갑시다 라고 말하는데, 어떤 성도는 아닙니다. 지금은 왼쪽으로 가야 합니다 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말로 그렇게 목사님을 반대하지 않더라도 행동으로 반대하는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목사의 배후에는 주님이 계십니다. 계1-2장을 보시면 교회의 사자로서 목사는 주님께서 오른 손으로 붙들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사가 이렇게 합시다 하면 예 알겠습니다. 하고 적극적으로 순종하며 따라와야 하는데 목사의 말을 듣지도 않고 순종하지도 않고 자기 혼자서 자신의 길을 간다면 그것은 자신을 위해서도 교회를 위해서도 어느 누구에게도 유익하지 않습니다.
2) 더 구체적으로 1-3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왕을 지키셔서 그가 하나님 편에 서 있음을 입증해 달라고 했습니다.
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 2 성소에서 너를 도와주시고 시온에서 너를 붙드시며 3 네 모든 소제를 기억하시며 네 번제를 받아 주시기를 원하노라 (셀라)/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가 다윗 왕을 위해서 드리는 기도의 내용을 보시면 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야곱의 하나님이 너를 높이 드시며, 성소에서 너를 도와주시고, 시온에서 너를 붙드시며, 네 모든 소제를 기억하시며, 네 번제를 받아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다윗 왕이 하는 모든 기도와 제사와 예배를 하나님이 받아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이 시의 내용처럼 성도들도 교회를 대표해서 예배를 주관하고 예배를 인도하는 목사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목사가 예배를 인도하면서 드리는 찬양과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하여 응답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예배에 참석하는 모든 성도들과 목사와 동일한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3) 특히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왕의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이루어 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이것은 왕(다윗)이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뻐하며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즐거이 행하였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다윗 왕의 마음의 소원대로 이루어 지기를 간구했습니다. 왜냐하면 다윗 왕은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기뻐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즐거이 행하였기 때문입니다. 목사는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라면 그것을 즐겁게 순종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교회는 하나님께 기도할 때마다 목사님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응답하시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제가 오래 전부터 광고란에 예배시간 1시간 전에 와서 기도하라고 권면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자기 자신만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예배를 준비하고 인도하는 목사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배시간에 미리 와서 기도하지 않는 것은 목사를 위해서 기도하지 않는다는 뜻이며, 자신은 다른 사람이 기도해 주는 것을 받기만 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기적인 삶이며 바람직하지 않는 일입니다.
4) 또한 본문은 성도 서로간에도 중보기도로 밀어주고, 나 또한 다른 성도들의 기도의 도움을 받는 일이 중요하며, 꼭 필요한 것이라는 사실을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기도는 어떤 특정한 사람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약5:13-16/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14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15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16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고 했습니다. 성도들은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을 중보기도라고 합니다.
4. 5-6절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5-6절에 우리가 너의 승리로 말미암아 개가를 부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의 깃발을 세우리니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 6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 줄 이제 내가 아노니 그의 오른손의 구원하는 힘으로 그의 거룩한 하늘에서 그에게 응답하시리로다/고 했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의 깃발을 세우리니 라는 말씀을 보시면 다윗 왕은 하나님의 휘하에 속해 있으며, 하나님의 영예를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며 살고 싸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깃발로 삼아 믿음의 선한싸움을 싸우는 성도들을 결코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그의 오른손에 구원하는 힘으로 구원하시며, 기도를 응답해 주십니다. 여기서 힘이란 말은 능력들이라는 뜻으로서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으로 기도하는 자들을 돕는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결국 여호와는 우리의 승리의 깃발이 되시므로 이 사실을 인정하고 나아가면 반드시 하나님의 도우심과 승리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란 1차적으로는 다윗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장차 세상에 오실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기도 하며, 더 나아가서 구원받은 성도들과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는 모든 성도들을 가리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5. 백성들이 전쟁에서의 승리를 확신하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7-9절을 보시면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8 그들은 비틀거리며 엎드러지고 우리는 일어나 바로 서도다 9 여호와여 왕을 구원하소서 우리가 부를 때에 우리에게 응답하소서/라고 했습니다.
1)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라고 했습니다.
병거와 말은 아람 연합군의 병력을 대표합니다. 삼하8:3-4/르홉의 아들 소바 왕 하닷에셀이 자기 권세를 회복하려고 유브라데 강으로 갈 때에 다윗이 그를 쳐서 4 그에게서 마병 천칠백 명과 보병 이만 명을 사로잡고 병거 일백 대의 말만 남기고 다윗이 그 외의 병거의 말은 다 발의 힘줄을 끊었더니/라고 했으며, 삼하10:18/아람 사람이 이스라엘 앞에서 도망한지라 다윗이 아람 병거 칠백 대와 마병 사만 명을 죽이고 또 그 군사령관 소박을 치매 거기서 죽으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처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은 병거와 말을 의지합니다. 즉 군사력을 의지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는 병거와 말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주로 산지로 형성되어 말을 사용할 형편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며, 보다 중요한 이유로는 신정국가의 왕에 대한 하나님의 계명에서 말의 사용을 금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다윗 이후 솔로몬과 다른 군주들은 말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보다 말을 의지했다는 뜻으로 불신앙의 삶을 살았다는 뜻입니다.
2)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라고 했습니다.
이는 상반절과 대구(對句)를 이룹니다. 대적들은 병력을 의지하나 이스라엘은 오직 여호와를 의지할 뿐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전쟁의 주관자가 되시고 모든 전쟁에 함께 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원수들의 병력들은 산산이 흩어져 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백성들의 믿음의 확신은 그들이 치루는 전쟁을 하나님을 위한 성전(聖戰, holy war)으로 이해하였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습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했다는 사실을 믿고 그렇게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전쟁터로 나아갔습니다. 때문에 어떠한 물리적인 힘보다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와 보호와 사랑이 훨씬 지극하고 신실하며 크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할 수 밖에 없습니다.
3) 그들은 비틀거리며 엎드러지고 우리는 일어나 바로 서도다 라고 했습니다.
그들(대적)와 우리가 서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엎드러진다는 말은 서 있음을 전재한 말이며, 일어나 선다는 말은 엎드러져 있음을 전제한 말입니다. 따라서 본 구절은 전쟁초기의 상황이 대적들에게 훨씬 유리하나 전세가 역전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비틀거리며 엎드러진다는 말은 완전한 패망하게 되는 진행과정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즉 적들이 처음에는 무릎을 꿇지만 다음에는 완전히 패망하고 말 것이라는 시적인 표현입니다.
반면에 일어나 바로 선다는 말은 이스라엘이 완전한 승리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진행과정을 보여 줍니다. 즉 일어난다는 말은 전세를 역전시킨다는 말이며, 바로 선다는 말은 완전한 승리를 거둔다는 의미입니다.
4) 여호와여 왕을 구원하소서 우리가 부를 때에 우리에게 응답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여호와여 왕을 구원하소서라고 했는데 이 구절은 본시의 주제입니다. 앞에서 이 주제를 다룬 다윗은 결론부분에서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부를 때에 왕은 응답하소서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부를 때란 환난 날, 곧 임박한 전쟁의 때를 의미합니다. 전쟁과 환난을 당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할 때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시50:15/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라고 했으며, 본문 시20:1/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라고 했습니다. 환난을 당했다는 것은 긴급하게 하나님을 찾으라는 신호이며,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하다는 신호입니다. 엎드려 기도해야 합니다.
여호와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왕이신 하나님께서 마침내 응답할 것을 확신하는 기도입니다. 믿음이란 결국 능력과 사랑의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신뢰이며 따라서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함으로써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될 결과를 미리 내다보고 지금 여기에서 찬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보이는 현실보다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을 믿으며, 승리를 확신하며, 그분께 감사하며,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믿음의 공동체이며,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공동체이며, 동시에 예배와 기도의 공동체입니다. 항상 무슨 일을 만나든지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기도하였으며, 또한 신실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온전하게 지키시고 보호하시겠다는 약속을 믿고 그분을 높이고 찬양하고 자랑하는 공동체였으며,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그런 믿음의 말과 행동 즉 중보기도를 보시고 마지막에는 항상 해피엔딩으로 끝났습니다. 저와 여러분과 비전교회가 이렇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첫댓글 아멘아멘 아멘 아멘
▩ 홀로 앉으십시오.
1. 시20:1-9절을 읽으시고 과거 이스라엘 공동체와 지금 교회공동체인 우리를 비교해봅시다.
▦ 함께 나누십시오.
1. 교회공동체는 친목단체와는 다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2. 교회와 성도들의 삶은 마치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와 같다는 말의 의미는?
3. 전쟁터로 나가는 왕을 위한 백성들의 기도의 세 가지 특징은 무엇입니까?
4. 1-5절을 보시면 전쟁터로 가는 왕과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백성의 마음이 어떠했습니까?
5. 불신자는 말과 병거를 의지하지만 믿음의 공동체는 무엇을 의지해야 합니까?
6. 백성들이 다윗 왕이 전쟁에서 승리할 것을 확신하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할렐루야 아멘
아멘 아멘 아멘
1.교회공동체는 전쟁터로 나가서 적들과 싸우는 군사들처럼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자이기에 기도하는 공동체입니다
2.죽어 천국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마귀지옥인 이세상에서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성도인 우리는 마귀지옥에서 살아남고 자신과 다른사람들을 적들의 공격으로부터 지켜보호하고 공격해서 그들의 땅과 무기를 빼앗기위해서 전신갑주로 무장하며 날마다 말씀과 기도로 근신하고 깨어있어 맡겨주신 사명을 최선을 다해 완수해야합니다
3.1)하나님께서 왕의 기도에 응답하시기를 바라는것
2)하나님께서 왕을 지키셔서 그가 하나님편에 서 있음을 입증해 달라는것 3)하나님께서 왕의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이루어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4.마음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5.하나님
6.하나님께서 환난이나 어려움을 당할때 부르짖어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믿음의 기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