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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에 파르티잔(Partisan 빨치산)이 더 이상 없다고 공식 선포한 것은 1955년 5월 23일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빨치산 정순덕(1933~2004)여인이 체포된 것은 1963년 11월12일 새벽이었다.
체포되기 직전에 북한에서는 '지리산 여장군'이라는 영화를 완성했다가 체포소식에 폐기하였다고도 한다.
또한 이병주의 '지리산'과 이태의 '남부군'그리고 조정래의 '태백산맥'은 모두 지리산을 배경으로 쓰여졌다.
지리산에는 두 가지의 벌(伐)을 겪게되는데,빨치산토벌(討
도벌사건은 논외(論外)이고,빨치산과 토벌대 사이의 격전이야말로 많은 주민이 희생되고 고통을 겪었던 현대사의 비극이였다.
답사로의 종점인 대성골은 1952년 1월 빨치산 수백명이 몰살된 지역이며 의신계곡 상류 빗점골은 남부군 총사령관이던 이현상이 최후를 맞은 곳.
그 길을 이 골짜기가 배출한 고승 서산대사(휴정·1520~1604)가 오갔던 옛길(서산대사 옛길:신흥마을~의신마을 4.2km)을 따라간다.
서산은 16살 때 화개동을 유람하다 출가해 두 차례에 걸쳐 18년을 머물며 수행했다.
신흥사가 있던 신흥마을과 의신사가 있던 의신마을을 연결한 옛길이다.
봇짐·등짐장수들이 광양 등에서 생산된 소금과 해산물을 이고지고 벽소령 넘어 함양 쪽으로 팔러 다니던 길이자 의신마을 주민들이 산에서 구워낸 참숯을
화개장에 팔러 넘나들던 옛길 그대로다
지리산 옛길 -이원규-
<화개동천 신흥~의신 십리 길>
살다 지쳐 자주 팍팍한 날이면
세상사 낡은 외투 훌훌 벗어던지고
화개동천 지리산 옛길로 가자
세이암 맑은 물에 두 귀를 씻고
연초록 산바람에 백태 낀 눈동자를 헹구자
저마다 외로운 구름처럼
한 마리 보리은어의 첫 마음으로 거슬러 오르자
아직 어린 새색시 첩첩 울며 시집오고
의신마을 코흘리개들 가갸거겨 배고픈 쇠점재
저 홀로 버림받은 사람도
아랫도리 후덜덜 화개장터 소금장수도
어금니 꽉 깨물고 넘던 사지넘이고개
날마다 서산대사는 입산출가의 자세로 오가고
비운의 혁명가 화산 선생은 빗점골로 들어가
마침내 죽어서야 돌아왔다
살다 지쳐 자주 침침한 날이면
저잣거리 빛바랜 안경을 벗어던지자
감감바위 아래 그 무거운 봇짐일랑 내려놓고
금낭화 피면 그 옆에 쪼그려 앉아 그냥 금낭화가 되자
산나물 조금 안다고 뜯지도 캐지도 말고
박새 초오 지리강활 동의나물
여차하면 독이 되는 오욕의 풀일랑 키우지 말고
그저 가만가만 보리은어의 눈빛으로
착한 다람쥐꼬리처럼 따숩게 두 손을 잡자
그래도 못다 한 속울음이 남았다면
벽소령 희푸른 달빛을 보며
대성폭포처럼 그예 대성통곡을 하자
그리고 돌이끼처럼 다시는 울지 말자
그 누구라도 외로운 산신령, 서러운 신선
온종일 의신동천 물소리로 내장을 헹구러 가자
모세혈관마다 연초록 바람이 이는 지리산 옛길로 가자
지리산 옛길(서산대사 옛길 4.2km)과 의신마을~대성동(2.5km왕복)을 합쳐 총 9.2km를 걷게 된다.
좌측 녹색실선은 덕평봉 남릉,우측 녹색실선은 촛대봉 남릉.
지리산 옛길(서산대사 옛길)의 개념도와 고도표.
꼭 답사하고 싶은 이현상 비트와 최후지의 개념도
섬진강을 좌로 끼고 지리산으로 향한다. 사진은 하동을 지나면서 섬진강 건너로 보이는 눈덮힌 백운산.
불났다던 화개장터를 지나고 또 쌍계사도 우측으로 흘리며 범왕(칠불사)갈림길에 닿았다. (앞에 보이는 다리는 '신흥1교')
다리를 지나자마자 '화개초교 왕성분교'에서 차를 멈춘다. 바로 범왕리 푸조나무를 보기 위함이다.
푸조나무는 갈잎의 키 큰 나무로 주로 남부지방의 들이나 산기슭에 자라며 사원 경내수나 공원수, 풍치목으로도 많이 심었다.
수레바퀴, 도낏자루, 땔감 등으로 이용된다.
잎은 상아, 녹각, 목기를 다듬는 데 사용했다고 한다.
하동 화개면 범왕리 푸조나무<도지정 기념물 123호>는 세이암 건너편에 자리하게 된 전설을 가졌다.
최치원 선생이 지리산 신흥사로 들어갈 때 꽂아 두었던 지팡이에서 싹이 자란 나무로 전해진다.
선생은 이 나무가 살아 있으면 나도 살았고 이 나무가 죽으면 나도 죽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다.
지금은 구구절절한 전설을 뒤로한 채 쉬어 가는 정자나무로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다. <부산일보>
안내문
화개초교 왕성분교 앞 '길목산장'에서 의신방향의 '신흥교'를 바라보면 신흥교를 건너기 전 펜스 좌측으로 '지리산 옛길'이 시작된다.
시작 지점의...
안내판과...
이정표
내려다 보는 신흥교
신흥~의신 옛길이 시작된다.
지리산 옛길은 잘 정돈된 길이다.
군데군데 붙은 '지리산 옛길' 안내판
외딴집과 아직도 달려있는 땡감.
흡사 의자를 닮은 바위에...
한마음 여성회원 두 분이 앉아본다.
왜넘들이 훔쳐가려던 의신사의 범종을 서산대사가 도술을 부려 돌의자로 바꿔 버렸다고 한다.
왜넘들은 범종을 훔치지 못하였고,그 돌의자는 지금도 지나가는 나그네들의 쉼자리를 만들어주고 있다는 스토리텔링.
옛길은 낮게 화개천에 갈아 앉는다.
바위 위엔 낙석의 위태함이 남아있고,바위벼랑 아래엔 토종벌통이 꿀을 모으고 있다.
다시 또 민가를 지나...
내려앉은 화개천으로 내려가 본다.
각자(刻
아무리 둘러보아도 '못찾겠다.꾀꼬리'다.
분명 엉뚱한 곳에서 멍청하게 헤메고 있었을 것.
무명폭포를 곁눈질해가며...
돌담길을 지난다.
바로 앞서가던 일행들이 밥자리를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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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자리에 있는 안내판
샌드위치 두 개를 게눈감추듯하고 다시 갈 길을 간다.
옹기종기 아늑하게 자리잡은 의신마을 너머로 하얀 눈을 덮어쓴 지리산 주능이 펼쳐진다.
살짝 당겨본 지리산.
임자없는 감나무엔 철지난 감들만...
팽개쳐진 채 매달려 있다.
산골답지 않은 모습의 집 뒤로 산허리를 감돌며 대성골로 들어가는 산길이 휘돌고 있다.
'지리산 옛길'은 여기까지다.
옛길이 끝나는 지점에 '베어 빌리지'가 있다.
지리산에서 적응하지 못한 반달 가슴곰 두 마리를 입식하여 생태학습장으로 활용하는 곳.
베어빌리지는 곰들이 동면에 들어서인지 휴관이고,학습관 앞에 부착된 안내문만...
스치듯 읽기만 한다.
특성과...
특징과..
어린이들의 흥미를 돋우기위하여 ...
동화를 차례대로...
벽면에 걸어 놨다.
베어 빌리지(Bear village)
마을 앞 한길로 올라오면 버스 종점이 있고,맞은 편에...
안내판과 이정표가 붙어있다.
월요일과 목요일이 휴관일인 줄은 알았지만 '지리산공비토벌루트'를 확인하기 위하여 '지리산 역사관'으로 올라왔다.
지리산역사관 앞의 안내판에 있는 토벌루트.
휴관인 역사관으로 올라가서...
휴관일과 관람시간을 들여다 본다.
아래의 자료들은 자료로 쓰기 위하여 빌려왔다.
빨치산 토벌작전의 사령관은 백선엽장군. 토벌작전은 제1기에서 4기 까지 나누어 진행되었다.
빨치산은 이념의 충돌속에서 당시의 큼직큼직한 사건들에서 좌익화한 세력들을 일컫는다.
그들은 지리산을 은거지로 삼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군경과 민간인들에게 많은 인명을 살상하고 물적 피해를 입혔다.
김일성은 패전책임을 남로당파에 씌워 박헌영,이승엽 등 남로당파를 제거하고 박헌영의 직계였던 이현상을 반당세력으로 몰아 나중엔 평당원으로 강등.
한편 이승만대통령은 특별담화에서 "지리산 평정 없이 남한의 평화 없고,이현상 체포없이 지리산의 평정없다"며
이현상을 직접만나 남한평화 이루겠다는 결의까지 표명.
1953.9.17 지리산 빗점골 너덜지대에서 사살된 이현상의 시체는 서울로 이송되어 창경원에 전시되었지만 아무도 찾아가는 이가 없자 다시 지리산으로 반송하여 섬진강변에서 화장되었다.
이현상이 죽은 지 두달, 마지막 빨치산의 거목 '이영회 부대'가 전멸하며 사실상 지리산의 대규모 작전은 끝이 났다.
다음은 사살되었을 때 그의 품에서 나온 한시이다.
이념을 달리하여 공산주의 신념에 철저한,그래서 그 길이 애국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智異風雲 堂鴻洞
伏劍千里 南州越
一念何時非祖國
胸有萬甲心有血
지리산 풍운이 '당홍동'에 감도는데
검을 품고 남주를 넘어오길 천리로다
언제 내마음 속에서 조국이 떠난 적이 있었을까
가슴에 단단한 각오가 있고 마음에 끓는 피가 있도다.
경찰 토벌대장 차일혁 총경
1953.10.8 차일혁은 섬진강 백사장 솔밭에서 이현상의 시체를 화장하여 자신의 철모에 뼈를 넎고 M1소총으로 빻아 섬진강에 뿌렸다.
그리고 권총을 꺼내 허공에 3발의 조총(弔銃)을 쏘았다.
비록 공비의 수괴였지만 그도 이제 한 인간에 지나지 않으니 공비가 아니라 한인간으로 마지막 가는 길에 정중히 예를 갖춰주기 위함이였다.
조선의용군 시절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함께 싸운 동지에 대한 예우이기도 하였다.
그리고는 다시 대성골을 가기위하여 한길을 따라 내려온다.
대성골은 지리산역사관 앞 한길가에서 200여 미터를 내려서면 왼쪽으로 선비샘 황토방 입간판 골목으로 들어가는데...
골목입구에 이정표와...
탐방로 안내판이 있다.
선비샘 황토방 간판에서 보면 벽소령산장 입간판이 보이고...
벽소령 산장 앞으로 가면 대성골.
벽소령 산장 앞의 이정표.
항일투사 17인 의총'을 지난다.
무명의 항일의병들은 왜병들을 상대로 결사항전을 하였지만 왜넘들의 계략에 빠져 그만 패퇴하고 만다.
그 희생자가 50여명이나 되었고,훗날 주민들이 희생자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무덤을 만들었다.
세멘트 포장도로 공사가 일정구간 진행되더니 본격 산길로 접어든다.
산허리를 감아도는 둘레길 같은 수준.
앗! ! 이 지점이 눈에 익었다. 오른쪽 작은 현수막이 붙은 지능길이 대성교에서 올라오는 비탐 등로이고...
왼쪽 대성동 산길 건너로 덕평봉 남릉이 숨어 있다. <덕평남릉 산행기 ☞ http://blog.daum.net/bok-hyun/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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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동으로 들어가면서 올려다 보이는 영신봉과 지리산 남부능선
겨울 물소리가 차갑게 느껴지는 대성골의 을씨년스러움.
혈기 왕성하게 가지를 펼치고 있는 소나무는 대성동 마을의 문지기.
대성동 마을엔 두 집이 있다. 임씨네 집은 내내 상주하고 이웃의 한 집은 주말에만 나와 영업을 한다고...
탐방객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데,아무래도 전화를 하고가야만 여러모로 편리하다.
상주하는 임씨네 집의 전화번호는 (055) 883-1818, HP 017-341-1818
임씨네 집엔 털빛에 광택이 나는 흑구 한 마리가 있는데,숫놈인 이 흑구는 순둥이다.
각 산악회의 시그널이 빽빽히 걸려있는 집 앞마당이 바로 등산로.
대성골에서-
수곡골 양진안 단풍보러 갔다가
단풍은 아직 일러 보지 못하고
바람 부는 어느날...
천왕봉에 올라가서 의정부 산다는
이쁜처녀에게 청혼하였다는
남성이를 만났다.
십 몇년 전 해맑던 그총각 남성이
어느새 의젓한 청년이 다 되었고
남성이 부부에게 이제 지리산
산신령의 하늘같은 축복 있으시라.
남성이 "반갑다"며 산에서 갓 따온
송이버섯,국버섯 안주로 한잔 술을
권하니 대성골의 가을이 벌겋게
술에 취한다.
단풍은 아직 일러 보지 못했으나
잘생긴 양진암 스님도 만났고
장가 간다는 "남성이"도 만났으니
자박자박 의신으로 돌아가는 우리들의
가을은 행복으로 가득하다.
2007,가을 -전 기 찬-
겨울 지리산 자락에 발갛게 그리고 알맞게 무른 홍시가 하늘 끝에 달려 있다.
민가 뒤로 세석대피소(6.5km) 가는 길이 안내되어 있다.
대성동 반환점에서 우리는 막걸리 한 주전자를 주문하여 산채나물과 함께 시원하게 목넘김을 하였다.
그리고 임씨네 듬직한 아드님한테 대성동의 유래와 역사는 물론이고 4대째 내려오는 집안의 이력까지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대성동엔 준수한 청년이 지리산을 닮으며 그렇게 살고 있었다.
이제 우리는 반환점을 돌아 다시 의신으로 향한다. 맑은 대화를 나누었음인가 정신이 맑고 기분도 상쾌하다.
하얗게 눈을 덮어쓴 지리산 자락에 또아리를 틀고 앉은 의신마을. 누가 이런 평화스런 마을에 피바람을 일으켰는가?
해동(解凍)을 하게되면 빨치산 토벌루트를 답사하기 위하여 또다시 들려야겠다.
"세상만사 허랑할 때 지리산 품에 안겨라"라고 "나의 국토..."의 작가 박태순님은 말하지 않았나?
그 때까지 '국토의 울음주머니'인 지리산아,대성골아,빗점골아,잘 있거라.
그리고 아직까지 구천을 헤매며 떠도는 영혼이 있다면 무거운 이념의 굴레에서 벗어나 이제 영원한 안식을 갖기를 바란다.
입산자의 노래 - 빈집을 찾는 후배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