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겐 이 그림이 어떻게 보이십니까? 점들의 집합 가운데 빨간 사슴이 선명하게 보이시나요? 제게는 그 사슴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냥 울긋불긋한 점의 집합으로 보일 뿐이지요.
이 그림은 어떻게 보이십니까? 64가 보이시나요? 정상적인 시각을 가지셨다면 64가 보입니다. 그런데 잘 살펴보시면 그 밑에 숫자 27도 희미하게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제게는 어떻게 보이냐구요? 당신에게 64가 보이는 것만큼이나 선명하게 27이 보입니다. 그리고 모니터에 코를 박고 들여다보면 간신히 6이 보이고... 4는 아예 안 보이는군요.
마지막으로 위 그림 두 개 중에 왼쪽을 봐 주세요. 일반적인 색각을 가진 사람들에겐 말이 보인다고 하는군요. 하지만 제게는 오른쪽 그림과 같은 사슴이 굉장히 선명하게 보이고 말은 보이지 않습니다.
저는 '적록색약'이라는 이름의 색각이상을 갖고 있습니다. 색맹과는 달리, 파란색과 노란색은 선명하게 보이는데 빨간색과 초록색은 덜 선명하고 그 비슷한 계열의 색상들이 상당히 탈색되어 보이는 증상이지요. 빨간색과 초록색이 '보이기는 한다'는 점에서 일상생활에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만, 이렇게 의도적으로 만든 테스트에서는 다른 사람들과 다른 결과를 내놓습니다.
저는 스스로가 색약이라는 사실을 10살 때 알았습니다. 어릴적에 제가 그린 수채화 가운데서 새파란 꽃을 보고 어머니가 '이게 무슨 꽃이니?' 하고 물으셨을 때 제가 '철쭉이요' 하고 대답하자 어머니가 경악하셨거든요. 저는 철쭉같은 보라색이나 자주색 계열의 색깔과 파란색을 잘 구분하지 못합니다. 다행히 이런 증상은 몇몇 특정한 두 색 사이를 헷갈리는 정도에 한정되어 있어 일상생활에 불편은 없습니다. 신호등이 안 보여서 문제를 일으킨 적도 없고, 스타크래프트를 플레이할 때 종종 어느 팀의 유닛인지를 헷갈린다거나, 가끔씩 엉뚱한 색 이름을 얘기해서 주변 사람들을 놀래키는 정도지요.
그런데, 색각이상에 대해 알고 나서 10년이 넘게 되고 좀더 경험이 쌓이면서, 재미있는 현상을 하나 알게 되었습니다. 색 사이에 혼동이 일어나는 것은 채도와 명도가 같은 색들끼리로 한정되어 있고, 빨간색과 초록색 계열에 관해서만 그런 일이 일어나며, 재미있는 점은, 그런 혼동이 일어나는 대신에 색의 채도와 명도 차에 관해서는 일반인들보다 더 민감하게 인식한다는 사실입니다.
위의 테스트 중에 세번째를 유심히 살펴보시면, 주변보다 밝고 선명한 파란색과 분홍색을 이용해서 오른쪽 그림과 같은 사슴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반인들에겐 왼쪽 그림의 사슴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하는군요. 그렇지만 제게는 첫눈에 봐도 사슴이라고 할 만큼 눈에 잘 들어옵니다. 파란색과 분홍색 사이의 구별은 잘 할 수 없지만 명도와 채도의 구별에는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거죠.
적록색약이 채도와 명도차에 더 민감하다는 사실에 관한 재미있는 가설은, 이런 특성이 숲 속에 위장색을 하고 숨어 있는 동물들이 눈에 더 잘 띄게 해서 사냥을 더 쉽게 하는데 도움을 주었고, 때문에 색각이상 유전자가 살아남게 하는데 도움을 주었다는 가설입니다. 정상적인 색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눈에 잘 띄지 않는 위장색을 색각이상자가 더 잘 찾아낼 수 있다는 가설이지요. 실제로 2차대전 때 영국에서는 탄착점 관측을 위해 색약 병사들을 모집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이 가설은 왜 파란색과 노란색을 구분하지 못하는 청황색약보다 빨간색과 초록색을 구분하지 못하는 적록색약이 훨씬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지도 설명해줍니다. 숲의 색깔은 초록색이기 때문이지요.
제가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는, 색각이상자는 장애자가 아니라 그냥 일반인들에 비해 '달리' 보는 사람이라는 얘기를 하고 싶어서입니다. 옛날에는 색약과 색맹을 장애로 취급했고, 지금도 많은 곳에서 그렇게 하고 있지요. 몇년 전까지만 해도 색약은 이공계에 갈 수 없다는 소리도 있었고, 경찰시험도 볼 수 없고, 운전면허도 내주지 않았고, 아무튼 여러가지 차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적록색약 가운데서도 좀 심한 편에 속합니다만, 퍼즐버블 게임할때 노란색 구슬과 연두색 구슬 구분하는데 옆사람의 도움을 받아본 것보다 큰 불편을 생활하면서 겪어 본 적이 없습니다. 이공계 학과에 진학하지 못할 이유도, 신호등을 구분하지 못할 이유도, 경찰에 지원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는 말이지요. 그래픽 디자이너나 화가 가운데서도 색약인 사람이 의외로 많은데, 단지 색각에 '이상'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차별을 가하는 것은 이 사회가 아직도 '비정상'에 대해 이해하려는 시도를 전혀 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