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겨울은 추웠네
송영애
소슬바람 내 맘을 흔드는 계절이 가까이 올수록
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좋을 기억의 파편들이 세월의 저편에서 바람을 타고 날아 들어온다.
서른 두해를 힘겹게 살아온 키 작은 아줌마 하나가 네 살짜리 아들을 앞세우고
둘째 아이를 임신하여 볼록하게 부른 배를 안고 크나큰 보따리 하나 든 채,
인천구치소 문을 가쁜 숨을 내쉬며 들어선다.
속없이 눈은 폴폴 내리고 소슬바람 눈치 없이 불어대는 날,
그녀는 슬픈 드라마에서처럼 처량하기 그지없는 장면을 잘도 연출하고 있다.
사람들이 그 장면을 본다면 구치소 안엔 분명 아이 아빠가 있어야 할 것이다.
변명을 하지 않는다면 내 남편은 참으로 많은 욕을 먹을 것이 분명하고
‘무슨 죄를 지었기에 어린 아들과 배부른 아내를 두고 구치소 안에 갇혀 있을까.'라고
생각하며 사람들은 혀를 끌끌 찰 것이 분명했다.
나 역시도 구치소 문을 드나들며 그런 눈초리로 날 쳐다보는 사람들 때문에
고개를 제대로 들 수가 없었다.
아예 묻지도 않고 슬픈 눈망울을 한 채 날 쳐다보는 사람들이 허다했고
아무 말씀도 하지 않고 내 손에 따뜻한 유자차 한 잔 들려주며 혀를 끌끌 차시던,
얼굴 가득 주름진 어느 할머니의 인정을 잊을 수가 없다.
허나, 구치소 안엔 내 남편이 아닌
온 몸에 화상자국 가득한 우리 아주버님이 고생을 하고 계셨다.
예기치 않은 실수로 세 들어 살던 집에서 LPG가스가 폭발했고
아주버님의 부주의로 일어난 일이라 온 몸에 화상이 채 아물기도 전에 아주버님은
구치소에 수감되셨다.
이혼 후, 어린 아들 하나 밖에 없는 아주버님을 구치소 면회 시간 맞춰 찾아갈 사람은
집에 있는 나 밖에 없었기에 어린 아들 앞세우고 임신한 몸으로 구치소를 드나들었다.
아마도 내 딸아이처럼 뱃속에서부터 구치소를 드나든 아이는 그리 흔치 않을 것이다.
구치소 문을 들어서기 전 난 항상 뱃속의 아이에게 속삭이곤 했다.
“아가야, 아직은 네가 보지 못한 세상엔
네가 알지 못하는 많은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단다.
지금 큰아빠도 그 많은 일들 중에서 힘겨운 고개 하나를 넘고 있는 중이니까
넌 잠시만 눈을 감고 아무 것도 듣지도, 보지도 말아주련.”
그럼 신기하게도 뱃속의 아이는 엄마 배를 차며 괜찮다는 듯 화답해 주곤 했다.
구치소 안에 들어서면
마치 장난감 상자처럼 하얗고 네모난 방들이 일렬로 죽 늘어서 있고
시간과 번호에 맞춰 정해진 방 앞으로 가서 짧은 5분간의 면회를 해야 했다.
안에 있는 사람과 바깥에 있는 사람과의 거리는 손도 잡을 수 없는,
가깝지만 너무도 먼 거리였다.
아들이나 남편을 그 안에 두고 있는 사람들은
문이 열리자마자 소리 내어 우는 사람들이 많았고
난 나도 모르게 아이의 귀를 막는 듯 배를 감싸 안곤 했었다.
굳이 보여주지 말아야 할 건 아니었지만
아직 아름다운 세상 빛을 보지도 못한 내 아이에게 굳이 보여주고 싶지도 않은 일이었다.
난 아주버님께서 부탁하신 속옷이나 먹을거리들을 가져다 드리고
식구들의 안부나 전하는 게 고작이었지만
겨울이라 춥다하시며 두꺼운 담요를 부탁하실 적엔
아주버님 앞에서 참았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화상을 당해 손가락도 구부려지지 않는 아주버님의 손을 바라보며
철없는 네 살짜리 내 아들도 울고 그런 조카를 바라보는 아주버님도 함께 우셨다.
남들이 보면 분명 아버지와 아들의 해후를 보는 장면이었을 것이다.
인천구치소를 내 집 드나들듯 하던,
몸도 마음도 춥던 그해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자
아주버님께선 원주교도소로 옮겨 가는 길이 확정돼 버렸고
거리도 너무 멀었지만 불러 오는 배를 안고 먼 거리를 갈 수가 없어
남편과 다른 식구들만 가끔 다녀오곤 했다.
그즈음, 뱃속의 아이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추운 겨울을 넘기자마자 4월의 어느 날 새벽,
열 달도 다 채우지 못하고 8개월 만에 세상에 나오려고 발버둥을 쳤고
1500g이라는 작은 체중으로 태어났다.
엄청난 병원비에 마음의 각오까지 하라는 청천벽력 같은 의사의 말에
나와 남편은 날마다 울기만 했고 온몸에 주사바늘을 꽂고 코에 호스를 끼고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딸아이를 보며 생전 찾지도 않던 신들에게 기도를 했다.
다행이 아이는 엄마와 아빠의 소원대로 몸무게도 늘고 눈에 감긴 붕대도 풀더니
한 달 만에 기적처럼 별빛 같은 눈망울을 우리에게 선물해 주었다.
그 작은 아이는 뱃속에서 만났던 큰아빠를 사진으로 찍혀 다시 면회를 가곤했다.
세월은 잘도 흘러서 5년,
교도소에서 출소하여 우리 집에 함께 사시던 아주버님은 몸이 어느 정도 나아지자
정상적인 몸은 아니지만 여름에도 화상의 흔적을 감추기 위해
긴 옷을 입고 장갑을 끼고서 땀을 뻘뻘 흘리며 택배 일을 하신다.
그리고
뱃속에서부터 만났던 내 딸아이와 아주버님과는
이제 그 누구도 근접하지 못할 각별한 사랑이 흐른다.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과 둘이서만 하는 것인 줄 알았다.
결혼을 하면 연분홍빛 꽃이불 속에서 내 사랑하는 사람과
발을 비벼대며 깔깔거리고 웃고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그저 그렇게
사랑만 하며 살아갈 수 있을 줄 알았다.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행복보다 우리의 행복이 가장 클 줄 알았고
우리가 가는 길엔 온통 고운 비단길만이 펼쳐 있을 줄 알았는데
결혼은 둘이서 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하는 또 다른 가족들을 사랑해야하는 길이었고
미처 품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배워가며 품어나가는 일이었고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싸리로 하나하나 촘촘하게 엮어 나가는 과정이었다.
돌아보면,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내 가정을 지켜왔다.
둘이서만 산다면야 겪지 않아도 될 시련들도
사랑하기에 겪고 눈물로 이겨내고 가시밭길 무성한 그 길을
오직 가정이라는 울타리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지켜오고 있다.
내 살아 온 날들이 그리 길지 않음에도 소중한 것들이 내 곁에 얼마나 많은지
내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많이 가르쳐 줄 수 있음에
지금이 가장 행복한 시간이라고 말하고 싶다.
앞으로도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이유 하나로 겪어야 될 시련들이
내 앞에 가시 되어 무성하게 펼쳐있을지라도
사랑한다는 이유 하나로 지금처럼만 살아간다면
먼 훗날, 내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엄마는 우리 가족을 이렇게 사랑했었단다.”라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으리라.
내가 뱃속에 딸아이를 품고 구치소로 아주버님을 면회 다니던 날들처럼
초겨울 바람이 차다.
오늘 밤엔 아주버님께 전화 한 통 해야겠다.
“아주버님, 삼겹살에 소주 한 잔 마시고 싶어요.”라고.
-귀뚜라미 주부 수필 문예상 장려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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