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화훼업계의 오랜 미션이 있었다. 바로 파란 장미를 개발하는 것. 그러나 서양에서 ‘파란 장미’는 ‘있을 수 없는 일’이란 말과 동의어로 썼다. 파란 장미만 만들어낸다면 상업적으로도 크게 성공할 뿐 아니라 이 분야 종사자들의 오랜 숙원을 푸는 일이기도 했다. 우리 외식업계에서는 쌀국수를 만드는 일이 이와 비슷하다. 밀이 아닌 쌀로 만든 국수. 그 동안 몇 번의 시도와 부분적인 성공이 있었으나 면으로서의 기본적인 맛과 질감을 충족시키지 못해 소리 없이 사라져갔다. 쌀로 만든 국숫집이 생겼다는 소문을 들었다. 기존 밀가루 면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가보았다.
음식 비평가의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100% 쌀국수’
‘T-kitchen 밥과술’에는 정말 쌀로 만든 국수가 있었다. 식감도 훌륭했다. 더 놀라운 것은 화학조미료를 일체 넣지 않고 맛을 낸다는 점이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주인장 남아영(31) 씨의 남다른 집념과 음식 철학이 있어서였다.
남씨는 음식 문화사에 관심이 많았다. 대학시절, 유럽에서 공부했던 교수들로부터 흥미롭게 들은 음식 관련 이야기가 그녀를 자극했다. 이때부터 인간과 인간의 역사를 이해하는 지표물로써 음식만한 것도 없다는 생각을 하였다.
여러 음식 중에서도 면식에 관심이 많았고, 베트남 쌀국수를 특히 좋아했다. 베트남에 가서 직접 쌀국수를 먹고 올 정도였다. 그런데 쌀국수에 대해 알수록 회의가 들었다. 찰기 없는 인디카 종 쌀에 타피오카 전분을 섞어 만든 쌀국수 면. 표면이 매끄러워 육수와 섞이지 않아 면 따로 육수 따로 노는 면발. 맛을 내기 위해 각종 인공 조미료를 듬뿍 넣은 쌀국수 메뉴들.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음식, 특히 면식에 관한 경험과 느낌을 비판적 시각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 사진(위-누룩/아래-면)
인터넷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 음식과 여행에 관한 원고를 기고하면서 남씨는 본격적으로 면식에 대해 연구했다. 밀 문화권인 서양에 비해 동양은 쌀 문화권이었다. 그런 탓인지 우리나라 사람 가운데 글루텐 과민성인 사람이 적지 않다. 밀가루 음식을 먹으면 소화를 못 시키거나 밀가루 음식을 멀리하게 되는 경우도 있고, 더러는 국수는 좋아하지만 먹으면 더부룩해서 망설이는 사람도 있었다.
기존 쌀국수의 문제점과 밀국수의 한계를 절감하면서 남씨는 쌀국수 메뉴 개발에 대한 열망을 키웠다. 맛과 식감은 밀국수와 같으면서 쌀의 성분과 영양을 보존한 국수를 찾고 또 찾았다.
- 쌀 지게미국수
드디어 지난 5월, 쌀로만 만든 국수를 만나 이를 메뉴화하는데 처음 성공했다. 이 쌀국수는 발아시킨 우리 쌀 현미 92%와 현미 미강(米糠, 쌀겨) 8%로 만든 국수다. 지금까지의 상식으로는 글루텐 성분이 없는 쌀은 반죽이 되지 않으므로 국수를 만들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기존 쌀국수에는 전분이나 밀가루를 섞었던 것이다. 그런데 현미를 발효시키면 그 효소가 글루텐 구실을 하기 때문에 반죽이 가능하다고 한다. 여기에 현미를 도정하면서 부산물로 나온 미강이 접착제 구실을 해준다고 한다.
일단 쌀에서 한 번 떨어져 나간 미강은 법적으로 ‘쌀’이 아니다. 일종의 식품첨가물이나 부재료 개념으로 규정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법적으로 따지자면 92%의 쌀국수지만 엄밀히 말하면 사실상 100% 쌀국수인 셈이다. 8%를 차지하는 미강도 한 때 쌀의 일부였으니까.
면은 규격에 따라 소면과 대면, 두 종류다. 소면으로는 쌀 지게미 국수와 쌀 콩국수를 만들고 대면으로는 쌀 볶음국수를 만든다. 소고기와 파채로 고명을 얹은 쌀 지게미 국수(7000원)는 양이 푸짐한데 국물도 깊은 맛을 낸다. 국물 내는 것도 국수만큼 공을 들였음이 분명하다. 소 뼈, 북어대가리, 다시마, 뒤포리, 멸치, 파뿌리, 양파 등 건어물과 해조류 채소류를 넣고 집 된장과 막걸리 식초, 그리고 술지게미로 조미를 했다.
재강이라고도 하는 술지게미는 청주와 막걸리를 거르고 남은 부산물이다. 충분히 발효되어 각종 미네랄이 풍부하고 음식에 들어가서 조미료 구실을 한다. 이 술지게미는 식후 장의 내벽을 청소해주기도 해 변비에도 일부 효험이 있다고 한다.
- 사진(위-쌀콩국수/아래-쌀볶음국수)
일반 국수와 동일한 방법으로 끓인 쌀 지게미 국수를 내왔다. 사진촬영으로 십 여분의 시간을 보냈는데도 전혀 면발이 불지 않았다. 예상을 깨는 반전이었다. 전분과 밀가루는 물론이고 글루텐을 넣지 않았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한 젓가락 입에 넣어보니 탱탱한 탄성과 쫀득한 점성이 느껴졌다. 밀가루 면에 비해 결코 못하지 않았다. 깨무는 순간 면의 단면이 끊어지는 걸 견디는 인장강도도 웬만큼 느낄 수 있었다. 이 정도면 국수로서의 물성은 다 갖춘 셈이다.
쌀국수의 단점은 역시 매끄러운 표면이다. 매끄러우면 육수의 양념과 맛을 포용하지 못 한다. 기존 쌀국수가 정체불명의 조미료를 첨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집 쌀국수도 당연히 ‘면 따로 육수 따로’일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먹어보니 전혀 그렇지 않았다. 쌀국수 면발이 육수의 맛을 충분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주 너그럽게…
조미료 넣지 않고 식사, 술, 안주를 쌀로 완결하는 건강 콘셉트
쌀 지게미 국수 외에도 진천 콩 100%로 국물을 낸 쌀 콩국수(9000원)가 있다. 방울 토마토, 닭 가슴살, 오이채로 고명을 얹었다. 인공의 맛이 전혀 없어 담담하기 이를 데 없다. 한없이 편하고 부담 없는 맛이다. 싱겁다면 그저 소금을 조금 넣어 먹는다. 이 소금마저도 맛이 싱겁다. 세 번 말린 ‘증폭염’이라고 한다.
- 사진(모둠전, 두부김치, 밥전)
이들 국수 메뉴에는 파김치, 깻잎 장아찌와 함께 밥전이 나온다. 밥전은 전북 지방의 향토음식이다. 김치와 채소, 김과 다시마, 다진 돼지고기를 밥과 함께 전으로 부쳐낸 것이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식감이 특징이다. 된장과 고추장으로 간을 맞추었는데 약간 짭짤하면서 고소한 맛이 막걸리 안주로는 일품이다. 점심은 국수 위주의 식사가 주 메뉴이지만 저녁에는 고급 막걸리와 함께 즐길 수 있는 안주 메뉴가 다양하다.
칼국수처럼 넓적한 대면을 중화풍으로 볶은 쌀볶음국수(1만1000원)가 있다. 쫄깃하면서 촉촉한 면발과 함께 아삭아삭 씹히는 고소한 채소류의 식감이 좋다. 옆의 손님은 인절미나 떡볶이를 먹을 때의 식감과 유사하다고 한다. 불 맛도 살아 있다. 최근 새로 개발한 알리오올리오 파스타 스타일 볶음면도 있다. 올리브 기름에 볶고 청양고추를 다져서 얹었다. 파마산 치즈로 향을 냈다. 머지 않아 메뉴화 할 예정이다.
모둠전(1만 5000원)은 구성물이 다채롭고 막강하다. 표고버섯전, 호박전, 김치전, 부추전에 피망동그랑땡과 무전이 있다. 다양한 신선 식재료의 개성 있는 맛과 식감을 한꺼번에 즐길 수 있다. 특히 무전은 얼핏 두부전과 비슷한데 무심하고 담백한 맛과 고소한 기름 맛이 묘한 조화를 이룬다.
막걸리에 빠질 수 없는 두부김치(1만 3000원)도 있다.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김치가 아니라 토마토, 대파, 돼지고기, 양파를 넣고 볶은 김치가 한결 입맛을 돋운다. 연화제와 표백제를 넣지 않은 엄선한 두부와 환상적인 듀엣을 이룬다.
이 집에서 준비한 막걸리도 국내에서 내로라 하는 수준급들이다. 전직 대통령이 즐겨 찾던 막걸리에서 인공 발효제나 감미료를 쓰지 않거나 최소화 한 막걸리들을 망라했다. 막걸리 병 뚜껑을 열면 실내에 누룩 내가 진동한다.
- 사진(좌에서 우로)=현미국수고추장볶음,이태리풍 알리오 올리오 스타일로 볶은 쌀국수면, 현미국수고추장볶음
‘T-kitchen 밥과술’은 쌀로 만든 식사를 하고, 쌀로 만든 술을 마시면서 쌀로 만든 안주를 먹는 집이다. 설탕 외에 여타 합성 조미료나 첨가제를 넣지 않고 만든 음식을 제공한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현미국수 메뉴 개발 실험과 테스트를 한다. 한식으로 설렁탕 국물에 고추장 베이스로 볶은 쌀국수 볶음도 조만간 선보일 예정이다. 고추장과 여러 채소에서 나온 자연스런 단맛이 밥과 술을 당긴다. 고추장과 현미 쌀국수의 찰떡 궁합을 입증한 메뉴다.
우리 현미 쌀국수의 무한 변신은 어디까지인지, 우리 한식의 지평이 어느 선까지 넓혀질 지, 이들의 의미심장한 실험에서 도대체 눈을 뗄 수 없다. 이 집 옥호에 붙은 ‘T’는 ‘Test’의 머리 글자이다.
<T-kitchen 밥과술> 서울 강남구 논현동 02-553-67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