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曺植(號:南冥, 字:楗仲) : 1501년(연산7)生~1572년(선조5)卒
1501년(연산7) 6월: 現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 토동마을에서 출생 -- -父: 언형(彦亨)은 문과에 8등으로 급제·승문원 판교(判校) 역임. -- -母: 인천이씨(仁川李氏, 외조부가 세종 때 좌의정을 지낸 창원 북면의 ‘최윤덕’임) -- *조식의 증조부 때 서울에서 現 합천군 삼가면 하판리로 이거함.
1518년(중종13): 함경도 단천에서 서울로 돌아옴. (만17세) -- -부친이 단천군수로 재임한 바 있음.
1519년(중종14): 막내 숙부 조언경이 기묘사화로 희생됨. (18세) -- -묘소는 합천군 삼가면 어전리 도두골에 있음. 이 때 조광조(趙光祖)도 전남 화순에서 사사(賜死)됨.
1520년(중종15): 생원과 진사과에 각 2등으로 합격함. (19세)
1526년(중종21): 부친상을 당하자 지동마을에서 3년간 시묘살이를 함. (25세) -- -증조부모·조부모·부모 묘소는 現 합천군 삼가면 하판리 지동마을에 있음. 지동마을에는'노파 이흘('내암 정 -- 인홍'문인)'의 문인인'창주 허돈(滄洲 許燉, 1586~1632)'의 후손들이 현재 거주하고 있으며, 가회면 오도리에 -- 도 창주 및 '후산 허유(后山 許愈, 1833~1904)'의 후손들이 살고 있음.
1529년(중종24): 자굴산에서 글을 읽음. (28세)
1530년(중종25): 처가인 김해로 가서 現 대동면 주동리에「산해정」을 짓고 학문에 정진함. 이 때 호(號)를 -- 남명이라 함. (29세) -- -신계성·이희안·성운·이원 등 거유들과 교유하였으며, 친구인 이준경(李浚慶: 1499~1572, 영의정 역임)이 지 -- 은 심경(心經)의 후발(後跋)을 씀. 이 후 삼가 토동으로 이거하기 전까지 김해에서 18년간 거주함.
1533년(중종28): 향시에 장원 급제함. (32세)
1542년(중종37): 경상 안찰사'회재 이언적'이 편지로 찾아 줄 것을 요청함. (41세)
1545년: 모친상을 당함. 現 대병 장단리의 노흠이 와서 배움. (44세)
1548년(명종3): 지동마을에서 3년간의 모친 복상을 마치고, 김해에서 삼가로 이거하여「계부당(鷄伏堂)」과 --「뇌룡정(雷龍亭)」을 건립하고 강학을 함. 이 후 13년간을 現 삼가 외토리 토동에서 거주함. (삼가에 총 24년 -- 간 거주함) (47세)
1549년(명종4)~1550년: 정인홍·문익성·이광우 등이 삼가 토동으로 와서 배움. (48세~49세)
1551년(명종6): 종부시 주부(宗簿寺 主簿)로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음. (50세) -- -오건(吳健)이 와서 배우고, 김우옹의 부친인 김희관이 찾아옴.
1553년(명종8): ‘퇴계 이황’에게 벼슬할 때가 아니라고 편지로 답함. (52세)
1555년(명종10): 단성현감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문정왕후를'과부'에, 명종을'고아'에 비유한 유명 -- 한「단성현감사직소(丹城縣監辭職疏)」를 삼가 뇌룡정에서 작성·명종에게 올려 조야(朝野)를 경동케 하는 등 -- 불의에 타협할 줄 모르는 강직한 선비정신을 보여줌. (54세)
1559년(명종14): 조종도·이정 등이 와서 배움. 초계의 '황강 이희안'이 별세하자 묘갈명을 지음. (58세)
1561년(명종16): 現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에서 산청군 시천면 사리로 이주하여「산천재(山天齋)」를 짓고 -- 강학을 계속함. (60세)
1562년(명종17): 밀양의·송계 신계성·이 별세하자 묘갈명을 지음. (61세)
1563년(명종18): 現 합천군 쌍책면 성산리의 ‘설학 이대기’와 성주군 대가면의 ‘동강 김우옹’이 와서 배움. -- (62세)
1564년(명종19):'퇴계 이황'에게 보낸 편지에, "요즘 공부하는 사람들은 손으로 물 뿌리고 빗질하는 것도 모 -- 르면서 천리(天理)를 얘기하여 헛된 이름이나 훔쳐서 남을 속이고 상처를 주고 있으니, 이는 장로(長老: 퇴계 -- )께서 꾸짖어 그만두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함. (63세)
1565년(명종20): 문정왕후가 별세함. 진주의 ‘수우당 최영경’이 와서 배움. (64세)
1566년(명종21): 성주의 ‘한강 정구’가 와서 배움. (65세) -- -명종의 부름에 나아가 독대한 후 정치의 원칙과 일신을 요구하고, 제자인 정인홍을 추천함.
1567년(명종 말년): 명종이 승하하고 선조가 즉위한 후 선조의 부름에도 나아가지 않음. (66세) -- -‘망우당 곽재우(1552~1641)’가 와서 배움. 곽재우는 남명의 외손서임.
1568년(선조1): 정치의 일신을 요구한「무진봉사(戊辰封事」를 선조에게 올림.「무진봉사」에서 특히, 서리 -- (胥吏: 아전)의 가렴주구를 강력히 비판하고 개선책을 요구함. (67세)
1569년(선조2): 정4품 종친부 전섬에 제수됐으나 부임 않음. (68세) -- -임진왜란을 예견하고 대책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줌. 이 때 대표적 제자로는 정인홍·곽재우·김면·이대기 -- (1551~1628) 등임.
1572년(선조5) 2월: 만71세에 별세. 現 충북 보은읍의'대곡 성운(大谷 成運, 1497~1579)'이 묘갈명을 지음. -- 대곡의 처가인 보은읍의 경주金氏가 1728년 무신의거 때 핵심 인물인 조성좌의 외가가 됨. 묘소는 現 산청 시 -- 천 사리에 있음.
1576년(선조9): 남명을 배향하는 서원이 세워짐. -- -산청의 덕천서원, 삼가 용암서원(구 봉산면 죽죽리 서원마을) 등이 건립됨.
1578년(선조11): 김해 신산서원이 세워짐.
1609년(광해1): 덕천·용암·신산서원이 사액서원이 됨.
1615년(광해7): 영의정에 추증됨.
1616년(광해8): 제자인 정인홍의 주도로 서울 삼각산 아래 남명을 모시는 사액서원인 백운서원이 건립됨.
1617년(광해9): 문묘(文廟)에 종사하기를 청하는 상소가 35차례나 있었으나 이루어지지 못함.
◆「욕천(浴川)」 *1914년까지 삼가현이었던 現 거창 신원 감악산 밑 구사리(원만마을) 계곡에서 1549년(명종4) 8월 제자인 함양 -- 의 임희무(林希茂)·박승원(朴承元) 등과 목욕하면서 지은 한시(漢詩)
◆「여전주부윤서(與全州府尹書)」 *1554년(명종9) 삼가현 옛집(現 합천 삼가면 하판리)에서 전주부윤인'숭덕재 이윤경(崇德齋 李潤慶, -- 1498~1562, 남명의 벗인'동고 이준경'의 兄)'에게 보낸 편지(書)로, 남명의 안빈낙도(安貧樂道) 사상이 -- 잘 나타나 있음.
◆「영련(詠蓮)」 *1563년(명종18) 現 광주시 신창동 풍영정(風泳亭)에서, 꽃봉우리(연꽃)는'남명'자신을, 해바라기는 공리공담의 사변적 철학에 물든 ‘보수적 사림’을 비유하여 지은 한시(漢詩)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총179건이 기록됨), 조선중기 사림파의 사회정치사상(권인호, 한길사), -- -- -- -- --1728년 무신사태 고찰(조찬용, 아이올리브, www.cyworld.com/cho21v) 등
남명 조식에 대한 재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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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리말 |
과거의 인물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에 관한 자료를 모아 그 사람의 삶을 거슬러올라가며 최대한 가까이 접근해 가는 방법을 택한다. 즉 한 인간의 삶을 재구성하는 것인데 그러나 실제로 한 인간에 대한 완벽한 접근이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인물에 대한 평가는 계속 내려져 왔고 그 평가가 마치 그 인물에 대한 가장 적당한 표현인 것처럼 여겨왔다. 여기에서 우리는 역사란 단지 해석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역사란 단지 해석 그 자체에 그쳐서는 안된다. 역사 속에서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을 찾아내어 그러한 역사변동의 원동력으로서 잘못된 시대의 흐름을 바꾸어야하며 그렇게 함으로서 역사를 한 걸음 더 발전시켜나가야 한다.
역사를 재해석하기 위해서는 먼저 선입관부터 배제하여 기존의 질서에서 벗아나야만 한다. 우리나라의 역사는 이제까지 특정개인의 미화와 봉건왕조의 숭배에 지나치게 얽매여 과거와 과거와의 단절, 과거와 현재와의 단절된 역사서술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는데, 여기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는 밑바닥 계층인 민중들의 생활을 소외시켰다는 점이다. 민중의 뜻을 저버린 시대는 민중들의 불만이 그 시대의 사회적 모순으로 심화되면서 필연코 민중에 의한 사회변혁을 일으키게 되며 이로 인하여 역사는 계속 발전해 나간다. 따라서 역사의 주체는 민중인 것이니, 만일 민중의 뜻을 저버리는 자가 있다면 그는 올바른 역사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려는 자인만큼 준엄한 역사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남명 조식에 대한 평가는 더러 내려져 왔으나, 여기에서는 새로운 각도에서 접근해보려 한다. 한민족의 역사 중에서 사대주의 문화에 푹 빠졌던 조선왕조의 흐름 속에서 남명이라는 한 인간이 얼마나 역사의 주체인 민중의 뜻과 같이 하며 살아왔는지 전체사의 맥락에서 살펴보았다. 따라서 봉건왕조 시대에서 벼슬을 했거나 혹은 이름난 조상들을 맹목적으로 찬양하기 위해서 잡다한 중국문화와 유교사상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자랑삼는 후손들의 기록은 되도록 멀리하였다. 한민족의 정신을 좀 먹는 사대사상에 빠져 제 조상까지 중국에서 왔음을 자랑하던 시대는 이제 끝났다고 본다.
시대 상황에서 본 남명의 일생 (I) |
이성계는 무인 출신이었기에 고려말에 상당한 세력을 가지고 자기를 위협하는 무인계층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건국과 더불어 유학을 장려하며 문인들을 우대하였다. 조선의 무인천시는 이와 같이 건국과 더불어 시작되었으며 문인들의 사회적 지위는 불교에 대체할 새로운 통치 이념으로 내세운 유학이 그 뿌리를 내릴수록 더욱 높아만 갔다. 그 결과 초기 조선왕조에 반발한 북쪽지방보다 남쪽지방에서 성리학이 발전하게 되었으며, 그 중에서도 끝까지 조선왕조에 벼슬하기를 거부한 길재가 은거한 영남지방이 가장 학문에 성행하였다.
길재 김숙자 김종직 김일손 정여창 등으로 이어져 내려오면서 성리학 사상을 체계화시킨 영남지방의 학자들을 사림이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향촌에서의 경제적 기반과 사상을 바탕으로 15세기부터 중앙정계로 진출하였다. 당시의중앙집권체제는 개국공신집안의 대물림에 의하여 세습되다시피 하였고 이들 훈구파는 많은 토지를 소유하여 경제적 부를 축적하였는데, 이에 불만을 품은 사림파는 유교의 정치이념을 실현하려는 명분으로 집권체제의 변혁을 요구하였다. 사림파는 차츰 요직에 등용되면서 훈구파의 경제적 기반을 무너뜨려 그 세력을 약화시킴과 아울러 향촌에서의 절대적인 지배력을 확보하기 위해 향약을 실시하여 농촌사회에서 자신들의 경제적, 정치적 기반을 다져 나갔다. 이에 위협을 느낀 훈구파의 반격으로 무오사화가 터졌고, 연산군7(1501년) 남명조식은 경상도 삼가현 토동에서 태어났다.
연산군10년 갑자사화가 일어나 수많은 선비들이 또 다시 목숨을 잃었으며 1505년 중종반정이 일어났다. 중종반정의 주축세력들은 훈구파였기 때문에 반정의 성공은 이들이 또 다시 집권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반정에 의해 추대된 중종은 상대적으로 왕으로서의 권위가 축소되었다. 반정공신들의 영향에서 벗어나 왕의 권위를 찾으려는 중종은 조광조를 내세워 도학정치로써 집권계층의 분위기를 바꾸려함과 아울러 민심을 수습하려 하였다. 그러나 초기의 개혁의지가 차츰 약해져 가는 중종에게 그동안 푸대접받고 있던 반정공신들의 불만이 터져 나오자 조광조 일파의 거대한 세력에 불안을 느낀 중종은 마침내 1519년 기묘사화를 불러일으켜 조광조 일파를 대거 숙청하고 사약을 내렸다.
이로써 당신 훈구파의 경제적 착취에 시달리던 민중들의 고통을 덜어보려던 조광조의 도학 정치는 기성집권세력에 의해 무너져버렸으며, 남명의 숙부 조언경도 이때 죽음을 당하였다. 당시 19세의 남명은 과거공부를 하고 있었으며 다음해 과거에 응시하였다. 그 후에도 계속 과거공부를 하였으나 과거에 대한 회의가 일었던지 좋은 결과가 나오지 못했는데, 가문의 명예 때문에 포기하지 못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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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 상황에서 본 남명의 일생 (II) |
과거를 위해 하는 공부를 위인지학(爲人之學)이라 하고 자기 수양을 위해 하는 공부를 우기지학(爲己之學)이라한다. 남명은 지배계층의 젊은이답게 처음에는 과거에 뜻을 둔 것 같으나. 토지와 권력을 독점한 훈구파에게 체제변혁을 시도한 사림파들이 죽음을 당하고 지배계층의 권력싸움으로 인해 생산활동을 담당하는 민중들의 고통만 늘어가는 현실 앞에서, 중앙정계로의 진출을 포기한 것 같았다. 그의 나이 37세 때 과거를 포기하고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뜻을 두었는데 과거 포기에 상당한 결단이 있었다고 보아진다.
그 후 김해의 산해정에서 독서와 제자양성에 소일하며 지냈는데, 희재 이언적을 비롯한 벼슬길에 나가있던 사람들에게 귀향을 권유한 것으로 보아 당시 집권세력들의 정치풍토에 상당한 불신과 우려를 가지고 있었다 할 것이다. 그의 나이 44세 때 중종이 죽고 그 뒤를 이어 인종이 즉위하였으나 8개월만에 죽었으니, 12세의 명종이 즉위하게 되면서 한차례의 회오리바람이 불어닥쳤다. 명종의 외척인 소운 윤원형은 인종파의 대윤 윤임을 비롯한 반대파와 이언적등을 숙청.유배시키고는 자신의 독점지배체제를 구축하여 막강한 권력과 토지로써 정권을 좌우하며 경제적 부를 축척해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문정왕후가 수렴청정하여 정사를 떠맡고 있었으니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는 윤원형을 몰아세우지 못하는 분위기인지라 차라리 이때 한자리하자는 족속들이 윤원형에게 달라붙는 풍토가 유행하였다. 윤원형의 독점세도.문정왕후와 윤원형의 소실 난정의 치맛바람이 한 시대를 풍미하며 민중들의 뼈저린 고통 속에서의 삶과는 유리된 제대로의 지배문화를 한껏 꽃피우는 세상이 되었는데 역;에 빌붙어서 제 한 몸 부기영화를 누려보려는 자가 있는 가 하면, 뜻있는 선비들은 산림에 묻혀 성리의 이론적.철학적 연구에 세월을 보내기도 하였다.
김해에서 고향 삼가로 옮겨와 계부당에서 학문연구와 제자양성에 힘쓰던 남명은 그에게 내려진 단성현감을 사양하는 상소에서 집권 세력층에 비판을 가하면 왕의 무능을 비난하였다. 그의 나이 55세때 삼가현 토동 뇌룡정에서 쓰여진 글이기에 그의 왕조관과 민중관이 잘 드러나 있는데 당시의 입장에서는 함부로 말하지 못하는 과격한 비판을 하고 있다 “자전께서는 마음이 깊으시나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못하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다만 돌아가신 왕의 외로운 아들일 뿐입니다”. 라면 당시의 척족정치를 비꼬는 그의 당당한 태도는 오늘날에도 감히 내세우기 어려운 영기이다.
민중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왕도 물러나야 한다는 그의 신념이 이 글을 쓰게한 것이지만, 거꾸로 이 글을 살펴보면 민중의 뜻을 저버린 왕이기에 물러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경고의 표시에 더 가깝다. 왕후와 왕을 일개 과부와 아들의 위치로 끌어내버리는 그의 왕조관과 민중에 의해 왕조가 바뀐다며 사회 변혁의 주체를 민중으로 보는 그의 민중관은 가히 혁명적이라 할 수 있는데, 그의 이러한 태도는 남명학파의 거의 공통된 기질이기도 하며 또한 이런 기질 때문에 남명이 여태까지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한다.
이 글은 조정을 발칵 뒤집어 놓기 충분했으며 퇴계 또한 불경스럽다고 까지 하였으나, 대신들이 언로를 막아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며 남명이 국가의 녹을 먹은 적이 없는 선비인 점을 들어 일은 무마되었다. 세도 당당하던 윤원형 조차도 남명을 “자기도 만나기를 꺼려하여 피하는 사람”이라고 할 정도였으니 그의 대쪽같이 꼿꼿한 기질은 아마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을 것이다.
남명의 나이 65세때 문정왕후가 죽자, 하룻밤사이에 20년 세도의 윤원형일파는 몰락하였으며 명종은 새로운 인물을 내세워 국정의 분위기를 바꿔볼 필요를 느끼고는 인재를 구한다고 널리 알렸다. 남명도 대신들의 천거로 이듬해 왕의 부름을 받고 사정전에 입대하여 명종과 독대까지 하였으나, 10여일 만에 다시 지리산 산천제로 돌아가 버렸다. 권력구조 밖에서 학문연구와 제자양성에 평생을 보낸 남명같은 처사를 끌어들여, 민중들의 마음의 떠나가 버린 왕조에 몇 명의 얼굴을 갈아넣고는 새로운 명분을 내세우려는 의도는 접어두고라도, 남명은 명종이 현 권력구조의 개편에 과감한 의지를 내비치기보다 현상태 유지에 더 집착하고 있다고 보고는 미련없이 돌아와 버린 것이다. 비록 윤원형은 물러났지난 명종은 잔존 세력들을 대부분 그대로 재기용하고 있었으며, 사람을 구한다는 말은 했지만 천거된 자들에게 실질적인 권한을 주기보다 말단관직밖에 내리지 않았던 것이다. 남명의 이 행동에 대해 퇴계는 “남명이야말로 군자의 출처(出處)하는 의리에 합당하다”고 말하였다.
‘중종 이후로는 궁녀가 임금의 세력을 믿고 나라의 정치를 어지럽히는 여알(대궐안에서 정사를 어지럽히는 여자)이 대단히 유행하였다‘는 사관의 지적과 같이 중종때부터는 왕실과 혼인관계를 맺어 자기들의 권력을 유지하려는 경향이 많았다. 중종은 제힘으로 임금자리에 오르지 못했기 때문에 왕비마저 신하의 요구에 의해서 다시 선택해야했는데, 그 결과 왕권은 약해지고 외척의 득세에 의해 정치가 좌우되었다. 중종이 죽은 후 인종파의 명종파의 대립은 이러한 외척세력들의 집권욕의 표현이며, 이러한 강행은 마침내 제각기 파당을 만들어 자기파에서 세자비나 왕이 선출되도록 입김을 불어넣었는데, 이것이 조선왕조의 고질적인 병폐가 되었다. 왕권이 약해 질수록 외척들의 세도는 자꾸 높아만 가니, 왕이 왕으로서의 제 역할을 못했다는 것은 한날 소수 집권세력의 권력을 정당화시켜 주기 위한 허수아비에 지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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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 상황에서 본 남명의 일생 (III) |
명종(明宗)이란 이름에 걸맞지 않게 외척에 끌려다니기만 하던 왕이 죽자, 대궐밖에서 자란 선조가 처음으로 임금이 되었는데, 이떄부터 왕의 적 손의 대가 끊어지고 대군(大君)이 아닌 서얼의 왕자, 군(君)의 자손이 왕위를 잇는 길이 열렸다. 이것은 대신들의 의사에 의해 왕이 결정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선조떄부터 본격적인 당파가 시작된다. 서로 자기 세력권내에서 왕이나 세자비를 택하게 하여 영구집권을 도모하려는 집권지배층의 욕구는 저마다 파당을 만들어 자기들의 세력을 키우는데 급급하였으니, 생사에 권세가 좌우되는 절박감속에서 이루어지는 이러한 암투는 마침내 당쟁이 구조적 모순으로 자리잡게 하였다. 주류라는 핵을 중심으로 그 주위에 비주류가 몰려드는 정치의 속성은 저마다의 이해관계에 얽매여 파당을 만들어 뭉치게 하였고 작은 집단은 또 다시 큰 집단에 달라붙어 서로 싸우니, 이로인한 상대방에의 거의 적대감에 가까운 감정은 조정을 지배계층의 싸움터로 만들고 말았다.
당쟁을 조선왕조의 고질적 병폐도 보기도 하는데, 이것은 사림파와 훈구파와의 오랜 주도권 싸움에서 새로운 기치를 내건 사림파가 번번히 기존집권 세력층인 훈구파에게 졌다는 배경에서 설명되어져야 한다. 그리하여 소인과 군자로 구별하여 상대를 비난하는 속좁은 흑백는리가 당쟁을 더욱 부채질하였고, 세력기반도 개혁의지도 없는 왕의 자세가 이를 계속 방치한 것이다. 이와 같은 정치적 혼란은 필연코 경제적 활동을 억누르게 되는데, 결국 생산활동에 종사하는 민중들의 수탈과 착취만 더해 갈 뿐이었다. 최하 말단관직인 서리에게 마저 수탈당하는 민중들은 자신들의 배를 굶기면서까지 지배계층을 먹여살려야 하는 고통을 차마 참지 못하여 대대로 살아온 고향을 밤에 몰래 떠나 떠돌아 다니거나 산속에 숨어 살기도 하였다.
그러나 민중들은 배가 고플수록 더욱 더 머리가 맑아지는 법, 마침내 곪고 곪은 상처가 터져 임꺽정을 중심으로 지배계층의 수탈과 착취와 억압에 저항하여 사람답게 살아보려고 민중 해방을 외치며 북부지방에서 일어났다. 수많은 민중 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호응을 받으며 근3년동안 지배계층에 대항하여 싸워온 임꺽정의 민중봉기는 거꾸로 흘러가는 역사의 물결을 올바로 잡아보려는 민중들의 희망 바로 그것이었다.
위에서 나타난 바와같이 정치가 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나타나는 왕조말기적 병폐를 지켜보아온 남명은 선조에게 올린 상소에서 폐단을 고치려는 왕의 강한 개혁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하며 민중들의 고통을 말하였다. 그러나 민중들의 비참한 삶을 대하면서 일생을 권력구조밖에서 살아온 남명의 현실감각이 지배체제의 논리속에서 길들여온 선조 및 기존 집권 세력들에게 그대로 전달되기에는 다소 무리가 아닐 수 없다. 결국 그는 평생을 두고 쌓아온 현실 인식과 모순의 극복을 위한 실천지학(實踐之學)을 그의제자들에게 넘겨주고서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마쳤다. 그후 끝내 자체내의 모순을 스스로 극복하지 못한 조선은 결국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외부로부터의 자극에 의한 사회변혁을 이루게 되었으며, 양란에 대한 자체내의 반선으로서 실학이 대두되었다.
◆ 현실인식 그리고 실천의 남명사상 |
남명조식에 대해서 말하면 으례 알고 있다는 식으로 고개를 끄덕이겠지만, 그의 어떤점이 훌륭하며 그의 사상의본질은 무엇인가라고 물어보면 제대로 대답하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제자들이 의병활동을 많이 하여 제자덕에 빛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이도 있을 것이며, 퇴계와 쌍벽을 이룰만큼 뛰어난 유학자라고 말하는 이도 있을 것이지만, 퇴계와 같은 이기 호반설을 주장하였으리라고 하여서 남명의 학문이 더 높아지는 것도 아니며 그의 제자중 에서 의병활동을 한 사람이 하나 더 발견되었다고 해서 남명이 위대해지는 것도 아니다. 비록 그 역시 지배계층의 한 사람으로서 민중들의 삶과 동떨어진 생활을 누린양반계급이었지만, 시대의 흐름이 잘못되었다고 판단하고는 제자들을 양성하면서 현시대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심어주고, 민중들이 고통을 덜어주는 실천의 학문을 일으키려했다는 데서 남명은 올바른 평가를 받을만하다.
조선시대의 무인천시는 국방의 약화를 초래하였으며, 그 결과 우리민족의 오랜 터전이었던 만주지역을 회복하려는 다물(옛 땅을 되찾자는 고구려의 말)의 얼은 사라지고 침략만 받는 왕조시대를 만들었다. 문인들은 중국 문화에 빠져 사대주의를 예찬하며 소중화가 되는 것은 왕조의 이상으로 내걸었으니 분명 조선은 처음부터 길을 잘못 걸어왔다. 남명 또한 시대의 흐름에 휩싸여 주.정자의 화상을 걸어놓고 숭배할 정도의 사대사상에 빠졌으나 차츰 시대의 흐름을 거부하는 태도를 취하기 시작하였다. 공리공감하는 학문을 버리고 실제로 쓰일 수 있는 실천학문을 내세웠을 뿐만 아니라, 무인을 천시하는 풍토속에서도 제자들에게 무예와 병법등의 주요성을 강조하였으며, 지배계층으로부터 착취와 수탈을 받는 민중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정치를 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임진왜란은 그의 이러한 생각들에 대하여 정당한 평가를 내려주었는데, 가장 먼저 가장 많이 그리고 가장 오래동안 활동한 경상우도 의병들의 선두에 선 사람들은 거의 다 남명의 제자들이었다. 그의 제자들에 의해서 그의 학문은 빛을 보게 되었으며, 곽재우가 의병을 모집할 때 한 말에서도 남명학파의 성격이 잘 드러난다. 왜군의 침입에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도망가는 관군에게서 차라리 배신감마저 느꼈을 민중들에게 곽재우가 내건 말은 가족과 마을을 위해 싸우자는 것이었다. 여태껏 철저하게 지배계층에 의해 수탈과 착취와 억압을 당해온 민중들에게 왕과 지배계층을 위해 싸우라는 말은 너무도 무리임을 그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민중들의 생존권을 위해 싸우자는 그의 외침은 마침내 민중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불러일으켰으며 스스로 모여든 의병들은 관군보다도 더 높은 사기로 왜군과 싸워 관군의 역할을 대신하였는데, 나중에 의병을 관군에 편입하려 하였을 때, 많은 사람들이 관군에 편입되기를 거부하며 끝까지 의병의 신분으로써 왜군과 싸웠던 것만 보아도 당시의 민중들이 지배계층을 얼마나 불신했는지 알 수 있다.
관군이 도망가버린 관가의 곡식을 군량미 삼아 왜군과 싸워 왜군에게 패배를 안겨주었던 곽재우에게 돌아온 말 또한 ‘반란자’였으니만큼, 당시 집권 지배층이 민중의 생활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었는지 짐작할 만하다. 그래서 정인홍이 영남의병대장직을 사양하면서 우선 내부의 적부터 없애야 한다며 무능한 책임자들을 처단할 것을 주장하였지만, 현실안 주의 급급한 집권층으로부터 과격하다고 비난만 받았다. 남명학파의 과감한 비판과 당호한 결단력은 현싱의 올바른 인식에서 출발하였으며, 현실에 대한 변혁을 통하여 민중을 위하는 실천정치를 하고자 하였지만, 너무나 단단한 기존의 정치질서에 부딪혀 끝내 실현되지 못하였다. 실천지학을 부르짖으며 등장한 남명학파는 관념적인 유교학풍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당시의 지배문화에 대한 하나의 반락이었으며 실학의 뿌리도 남명학파까지 거슬러 올라가야한다. 나라의 근본은 민중이며 민중에 의해 왕도 갈아치울 수 있다는 남명학파의 생각은 그 뒤 진주 농민항쟁으로 치솟아 올라 조선시대 민란의 첫발을 내디뎠으며 오늘날까지 경상남도에 면면히 흐르고 있다.
남명은 퇴계와 쌍벽을 이루었다고 하나, 퇴계에 비하면 그동안 너무 소외되어왔다. 이들은 둘다 지배계층의 문화속에서 살다간 사람들이며 중국에 종속된 문화의 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였지만, 퇴계가 성리학만을 고집하여 다른 학문의 발전을 저해하고 철저히 사대문화에 집착한 반면, 남명은 두루 학문을 섭렵하여 실천하는 학문을 주장하였다는데 그 차이가 있다. 그리고 그들의 사후, 임진왜란때 그들의 제자들이 보여준 의병활동을 비교 해 볼때도 남명이 살았던 경상우도에 비하면 퇴계가 살았던 경상좌도는 너무도 초라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만큼, 남명은 오늘날 새로운 각도에서 재평가 되어야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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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합천군 삼가 홈페이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