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 청사고(淸史稿) 조선열전(朝鮮列傳)
차 례
1. 서(序)
2. 조선(朝鮮)
○ 청사고(淸史稿)[註001] 조선열전(朝鮮列傳)[註002]
1. ○ 서(序)
○ 청(淸)나라는 장백산(長白山)[註003]에서 일어나 몽고(蒙古)를 복속시켜 번방(藩邦)으로 삼았다. 당시에 중원(中原)을 도모하려 하였으나, 조선(朝鮮)이 명(明)나라에 복속되어 팔꿈치와 겨드랑이처럼 가까이 있으면서 여러 차례 청나라의 군대에 항거하였다.[註004] 숭덕(崇德) 2년(A.D.1637; 朝鮮 仁祖 15) 두 번째로 그 나라의 국도(國都)로 쳐들어가니 [조선(朝鮮)]국왕은 항복하고 인질을 보내어 영원한 신복(臣僕)이 되었다.[註005] 이후부터 동방에 대한 우환이 사라져 중원 [경영]에만 전력하였다.
○ 순치(順治) 연간(A.D.1644~1661; 朝鮮 仁祖 22~顯宗 2)에는 명나라를 이어 국외(國外)에까지 위엄이 진동하였다. [순치(順治)] 3년(A.D.1646; 朝鮮 仁祖 24)에 유구(琉球)가 소문을 듣고 가장 먼저 봉공(封貢)을 청하여 왔으며, [순치(順治)] 9년(A.D.1652; 朝鮮 孝宗 3)에는 섬라(暹羅)가, [순치(順治)] 17년(A.D.1660; 朝鮮 顯宗 1)에는 안남(安南)이 연이어 귀부(歸附)하였다.[註006] 옹정(雍正) 4년(A.D.1726; 朝鮮 英祖 2)에는 소록(蘇祿)이, [옹정(雍正)] 7년(A.D.1729; 朝鮮 英祖 5)에는 남장(南掌)이 차례로 입공(入貢)하였다.[註007] 이것은 그 당시 [청(淸)나라의] 무의(武義)가 빛나서 육지나 바다에서나 한결같이 두려워하여 외국의 먼 지역에서도 어깨를 맞대어 무릎을 꿇은 것이었으니, 의(義)를 사모하고 덕(德)에 감화되어 온 것이지 무력(武力)으로 정벌하여 그러한 것은 아니었다.
○ 고종(高宗)이 대통(大統)을 계승하면서부터 나라는 더욱 부강하고 풍요하였다. 황제가 원방의 경략을 좋아하여 회강(回疆)을 평정하였으나, 군대의 피를 흘리지 않았다.[註008] 이에 호한(浩罕)· 포로특(布魯特)· 합살극(哈薩克)· 안집연(安集延)· 마이갈랑(瑪爾噶朗)· 나목간(那木干)· 탑십간(塔什干)· 파달극산(巴達克山)· 박라이(博羅爾)· 아부한(阿富汗)· 감거제(坎巨提) 등이 다투어 무리를 거느리고 와 새문(塞門)을 두드리니 통역(通譯)하는 인원이 4만 명이나 되었고, 한 결 같이 발돋움하여 천자(天子)를 알현하였다.[註009] 건륭(乾隆)(A.D.1736~1795; 朝鮮 英祖 12~正祖 19)중엽에 면전(緬甸)을 재차 정벌하였고, [乾隆] 34년(A.D.1769; 朝鮮 英祖 45)에는 緬愳가 조공하기를 빌었다. [건륭(乾隆)] 57년(A.D.1792; 朝鮮 正祖 16)에 다시 곽이객(廓爾喀)[註010]을 정복하니 머리를 조아리고 번방(藩邦)이라 일컬었던 것이다. 이에 이르러 중국 주위의 여러 나라가 고리처럼 이어져 모두 속국이 되었고, 영토는 규모를 이루고 변방은 튼튼하였으며, 군비(軍備)는 충실하여 황제의 덕(德)이 끝없이 뻗쳤다. 이것은 진(秦)· 한(漢) 이후 없었던 일이다.
○ 함풍(咸豊)(A.D.1851~1861; 朝鮮 哲宗 2~12)· 동치(同治) 연간(A.D.1862~1874; 朝鮮 哲宗 13~高宗 11) 에는 내란이 자주 일어나 이들을 쳐부수기 10여 년간, 비록 큰 도적은 평정되었으나 국력(國力)이 피폐하고 느슨하여져 먼 지역을 경영할 겨를이 없게 되었다.[註011] 일본(日本)이 유구(琉球)를 짓밟고 영국(英國)이 면전(緬甸)을 멸망시킬 즈음에[註012] 중국(中國)에서 이를 항의하고 꾸짖었으나 그들이 망하는 것을 구해 줄 수는 없었다. 또 월남(越南)과 조선(朝鮮)에서는 정치가 어지럽고 난리가 일어났으나, 국가에서 옛부터 지켜 오던 속국(屬國)에 대한 기미정책(覊縻政策)으로 말미암아 내정(內政)에 간섭하지 아니하여 흥망과 치란을 보고도 눈을 감은 채 수수방관하였다. 그리하여 끝내는 월남(越南)이 법국(法國)에 멸망당하고 조선(朝鮮)은 일본(日本)에 병탄(併呑)되었으며, 호한(浩罕)의 족속들은 아라사(俄羅斯)에 잠식되었으니 속국으로 겨우 남은 것은 감거제(坎巨提) 한 모퉁이 뿐이었다. 월남과 조선에서의 전쟁에 중국은 그들을 돕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였으나, 화전(和戰)이 엇갈리면서 국가의 위신은 사라졌다. 번방(藩邦) 울타리가 걷히면 집이 위태롭고, 외적이 압박해 오면 내분(內紛)이 일어나니, 번방(藩邦) 속국(屬國)이 국가[의 안위]와 연관된 것이 이와 같다. 『좌전(左傳)』에 이르기를 ‘천자(天子)의 직분은 사방의 만이(蠻夷)를 보호함에 있다’라고 하였으니 이 어찌 진실이 아닌가? 이에 속국전(屬國傳)을 기록한다.
2. ○ 조선(朝鮮)
○ 조선(朝鮮)[註013]은 한국(韓國)[註014]이라고도 부른다. 청초(淸初)에 조선의 왕은 이혼(李琿)이었는데, 명(明)나라를 매우 정중하게 섬겼다.[註015] 태조(太祖)[註016] 천명(天命) 4년[註017] (A.D.1619; 朝鮮 光海君 11) 혼(琿)은 그의 장수인 강홍립(姜弘立)을 파견하여 군사를 이끌고 명(明)을 도와 침입하였다.[註018] 부찰(富察)의 들판에 주둔하였는데, 싸움에 대패하자[註019] 강홍립(姜弘立)은 5천명의 군대와 함께 항복하였다.[註020]
태조(太祖)는 홍립(弘立)을 머물러 있게 하고[註021] 그의 부장(部將)인 장응경(張應京)등 10여명을 본국으로 돌려보내 주었다.[註022] [그들 편에 부쳐] 혼(琿)에게 보낸 국서(國書)에서, “옛날 그대의 나라가 왜란(倭亂)을 당하였을 때 명(明)나라에서 군대를 보내 구원한 적이 있었으므로 그대 나라 또한 군대를 파견하여 명(明)을 도왔소. 이것은 사정상 부득이 한 일이지 우리와 어떤 원한이 있어서가 아닐 것이오. 지금 사로잡은 장군과 군사들은 왕의 명령에 의하여 오게 된 것이니 모두 석방하여 돌려보내겠소. 진퇴의 실마리를 찾음에 있어 왕은 선택을 신중히 하기 바라오.”라고 하였다.[註023]
○ 앞서 명(明) 만력(萬曆)[註024] 연간(A.D.1573~1615; 朝鮮 宣祖 6~光海君 7)에 일본(日本)의 풍신수길(豐臣秀吉)이 조선(朝鮮)을 대대적으로 침략하여 그 나라의 팔도(八道)를 뒤덮고 있을 때, 명(明)은 조선을 도와 7년 동안 싸웠다.[註025] 풍신수길(豊臣秀吉)이 죽자 전쟁은 그쳤고, 조선도 나라를 되찾게 되었으므로 국서에서 그것을 언급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조선은 감사의 보답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註026] 국경을 넘어와 와이객(瓦爾喀) 군대에 항거하였다.[註027]
○ 오랍(烏拉)[註028]의 패륵(貝勒)[註029]인 포점태(布占泰)가 조선을 침공하였을 때,[註030] 황제와 포점태(布占泰)와는 친척간이어서[註031] 그들의 진군을 중지하도록 늑유(勒諭)하였건만 조선에서는 역시 감사의 뜻을 표하지 않았다. 또한 황제가 붕어(崩御)하였는데도 사신을 파견하여 조문(弔問)하지 않았다.[註032] 한편으로는 명(明)의 총병(總兵)인 모문룡(毛文龍)이 요동(遼東)의 백성 수만을 끌어 모아 피도(皮島)[註033]를 지키면서 조선과 합동으로 자주 군대를 내어 연해(沿海)의 성채(城寨)를 습격하였다.[註034]
○ 이 무렵 조선의 배반자인 한윤(韓潤)· 정매(鄭梅)가 귀순하여 와서 침입의 길잡이 노릇을 하겠다고 청하면서 전쟁을 일으킬 것을 부추겼다.[註035] 이 때가 태종(太宗)[註036] 천총(天聰)[註037] 원년(A.D.1627; 朝鮮 仁祖 5)으로서 조선 국왕인 이종(李倧)[註038]이 즉위한 지 3년째 되는 해이다. 정월에 패륵(貝勒) 아민(阿敏)[註039] 등에게 명하여 군대를 이끌고 조선을 정벌하도록 하였다.[註040] 압록강(鴨綠江)[註041]을 건너 모문룡(毛文龍)의 군대를 철산(鐵山)[註042]에서 쳐부수니 피도(皮島)로 돌아가 숨었다.[註043]
마침내 의주(義州)[註044]· 정주(定州)[註045] 및 한산성(漢山城)[註046]을 점령하여 그 곳의 군민(軍民) 수만명을 도륙하고 양곡 백여만을 불태웠다. 멀리서 [적을] 쫓으며 진격하여 청천강(淸泉江)[註047]을 건너 안주(安州)[註048]를 점령한 뒤 군대를 평양(平壤)[註049]에까지 보내니 성(城) 안의 군민(官民)들은 모두 도망하여 숨어버렸다. 이어 대동강(大同江)을 건너 중화(中和)[註050]에 이르렀다.[註051]
○ 이종(李倧)이 매우 당황하고 두려워하여 사신을 보내어 화의(和議)를 구하니,[註052] 아민(阿敏)은 그의 죄를 낱낱이 들어 책망하였다.[註053] 2월, 군대가 황주(黃州)[註054]에 이르니 나라 안은 두려움에 떨었고 화의를 구하는 사신의 행렬은 길에서 끊이지 않은 채 마침내 왕경(王京)에까지 육박하였다. 이종(李倧)은 사태가 급박하여지자 그의 처자를 데리고 강화도(江華島)에 숨은 뒤[註055] 사자를 보내어 고(告)하기를, “폐읍(敝邑)에서는 죄를 지은 사람이 도망갈 곳이 없으니, 오직 상국(上國)의 명령대로 따르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그의 화의를 허락하여 주었다.[註056] 강화도(江華島)는 개주(開州)[註057]의 남쪽 바다 가운데 있었으므로 사신을 보내어 섬으로 들어가[註058]이종(李倧)을 유시(諭示)하는 한편 군대는 평산(平山)[註059]에 주둔시켜 기다리도록 하였다.
○ 이종(李倧)이 족제(族弟)인 원창군(原昌君) 이각(李覺)[註060] 등을 보내어 말 백필, 호표피(虎豹皮) 백장, 명주· 비단· 모시 4백필, 베 만오천 필을 바쳤다.[註061] 이에 유흥조(劉興祚)[註062]와 파극십(巴克什)인 고이전(庫爾纏)[註063]을 강화도(江華島)로 보내어[註064] 맹약(盟約)을 체결하도록 하였다.[註065] 3월 경오일(庚午日)에 백마(白馬)와 오우(烏牛)를 목베어 천지에 서약(誓約)을 고하였다.[註066] 화의가 이루어져 형제지국(兄弟之國)이 되기를 맹세하였다.
○ 당초 조선이 화의를 구하여 왔을 때, 여러 패륵(貝勒) 등은 명나라와 몽고라는 양대적(兩大敵)이 둘러싸 엿보고 있어서 군대를 오랫동안 밖에 머무르게 할 수 없을 뿐더러 포로도 이미 많이 획득하였으므로 화의를 허락하는 것이 옳다는 의견이었으나,[註067] 아민(阿敏)은 조선 국도(國都)의 성곽과 궁전의 장려(壯麗)함을 흠모하여 군대를 철수하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註068] 패륵(貝勒)인 제이합랑(濟爾哈朗)[註069] 및 악탁(岳託)[註070]· 석탁(碩託)[註071] 등이 비밀히 의논하여 아민(阿敏)의 군대를 평산(平山)에 주둔하게 하고 우선 조선과 맹약을 체결한 다음 일이 성사되고 난 뒤에야 비로소 아민(阿敏)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이에 아민(阿敏)은, ‘나는 맹약에 간여하지 않았다’하며 군사를 사방으로 풀어 약탈을 일삼다가 마침내 이각(李覺)으로 하여금 평양성(平壤城)에서 아민(阿敏)과 더불어 재차 맹약을 체결하였던 것이다.[註072] 이에 황제가 아민(阿敏)에게 급히 유시하기를, “다시는 조그마한 소요도 일으키지 말라.”고 하였다.[註073] 군사 3천명을 떼어서 의주(義州)에 주둔케 하고 나머지 군사는 정돈하여 귀환시켰으며,[註074] 이각(李覺)도 돌아가게 하였다.[註075] 9월, 이종(李倧)의 청을 받아들여 의주(義州)에 주둔하던 군사를 불러 들였다.[註076] 아울러 포로의 속량(贖良)을 허락하였으며,[註077] 봄·가을로 보내는 세폐(歲幣)[註078]와 호시(互市)[註079]를 의논하여 정하였다.
○ [천총(天聰)] 2년(A.D.1628; 朝鮮 仁祖 6) 2월, 중강(中江)에서 개시(開市)하였다.[註080] 이 해에 명(明)의 경략(經略)[註081] 원숭환(袁崇煥)[註082]이 피도(皮島)에서 모문룡(毛文龍)을 죽이니[註083] 여러 섬의 군사가 주장(主將)을 잃게 되었다. [천총(天聰)] 5년(A.D.1631; 朝鮮 仁祖 9) 여러 섬이 빈 틈을 타 정벌하기 위하여 조선 병선(兵船)을 징발할 계획을 세웠다.[註084] 사신이 그 나라에 도착한 지 사흘만에 왕을 알현하였다. 이종(李倧)이 국서를 본 후, “명(明)나라는 나의 아버지 나라와 다름 없다. 남을 도와 아버지 나라를 공격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배는 하나도 빌려줄 수 없다.”[註085] 라고 말하였다.
이로부터 점차 맹약은 깨어져 갔다.
○ [천총(天聰)] 6년(A.D.1632; 朝鮮 仁祖 10) 파도례(巴都禮)[註086]· 찰합라(察哈喇)[註087] 등을 조선에 보내어 공액(貢額)을 정하여 발표하니,[註088] 이종(李倧)이 대답하기를 ‘정한 공액은 십분의 일만 내는 데 그칠 것이며, 금(金)과 은(銀) 그리고 우각(牛角)은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물건이 아니므로 따를 수 없다’고 하였다.[註089]
○ [천총(天聰)] 7년(A.D.1633; 朝鮮 仁祖 11) 정월, 이종(李倧)에게 국서(國書)를 내려 세폐액(歲幣額)을 줄인 것과, 가축을 훔쳐 가며 도망간 사람을 숨겨 준 죄를 꾸짖고, 사신 보내는 것은 그만두고 호시(互市)만 열도록 하였다.[註090] 2월, 비어(備禦) 낭격(郞格)[註091] 등을 회령성(會寧城)[註092]에 보내어 호시(互市)[註093]를 열고자 하니, 이종(李倧)이 이를 거절하였다. 이 해 여름, 모문룡(毛文龍)의 부장(部將)인 공유덕(孔有德)[註094]과 경중명(耿仲明)[註095] 등이 명(明)나라를 배반하여, 수군(水軍) 2만명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와 항복하였다.[註096] 황제가 조선에 사신을 보내어 식량을 징발하도록 하였다.[註097] 아울러 회령성(會寧城)에 있는 와이객(瓦爾喀)[註098]에서 도망간 사람과 포점태(布占泰)[註099]의 무리를 찾아내도록 하니, 이종(李倧)은 여러번 글을 올려 변명하면서[註100] 다시 경기(京畿)· 황해(黃海)· 평안(平安) 3도(道)의 성곽 및 백마성(白馬城) 등 12개의 성을 수리 축조하였다.[註101] 이에 황제는 이종(李倧)에게 의주(義州)의 호시(互市) 약속을 어긴다고 여러 차례 지적하였다.[註102]
○ [천총(天聰)] 8년(A.D.1634; 朝鮮 仁祖 12) 봄, 황제가 이종(李倧)을 사이에 넣어 명(明)과 화의하고자 하였으므로 종(倧)이 피도(皮島)를 수비하는 장수에게 국서를 보내어 이를 고하였으나 끝내 화의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註103] 겨울에 이종(李倧)이 나덕헌(羅德憲)[註104]을 사신으로 보내왔는데, 도망인 수색과 호시를 거절하였을 뿐 아니라 언사도 매우 거칠었다. 또한 조선 대신(大臣)의 아랫 자리에 만주(滿洲) 사신을 두고 앉고자 하였다. 황제가 노하여 그들의 세폐(歲幣)를 물리치고 나덕헌(羅德憲)을 머물게 하여 돌려보내지 아니하고는 연거푸 유시(諭示)하는 국서를 종(倧)에게 보냈다.[註105]
○ [천총(天聰)] 9년(A.D.1635; 朝鮮 仁祖 13) 찰이합(察爾哈)의 임단한(林丹汗)을 평정하고 원(元)나라의 전국새(傳國璽)를 얻었다.[註106] 팔화석(八和碩) 패륵(貝勒)과 외번(外藩)인 몽고(蒙古)의 사십구(四十九) 패륵(貝勒)이 함께 표문(表文)을 올려 존호(尊號)를 올리겠다고 주청(奏請)하였다.[註107] 황제가, “조선은 형제국이므로 함께 의논하는 것이 마땅하다.” 라고 하였다.[註108] 이에 내외의 여러 패륵(貝勒)들이 각각 글을 닦아 사신을 보내어 조선과 함께 추대할 것을 제의하였다. 조선의 여러 신하들은 다투어 그 불가함을 말하고, 군사로 하여금 사신의 주위를 지키게 하였다.[註109] 사신 영아이대(英俄爾岱)가 무리를 거느리고 말을 탈취하여 문을 박차고 나오니 이종(李倧)이 사람을 뒤따라 보내어 국서를 넘겨주었다.[註110] 또 변방의 장수들에게 계엄(戒嚴)을 명령하는 편지가 있었는데, 그 글 가운데에는 ‘정묘년(丁卯年)에 잘못 강화하였으니 이제 마땅히 단절하여야 한다’는 구절이 있었다.[註111] 영아이대(英俄爾岱)가 황제에게 바치기 위하여 이 또한 빼앗았다.
○ [천총(天聰)] 10년(A.D.1636; 朝鮮 仁祖 14) 4월, 숭덕(崇德)으로 개원(改元)하고 국호를 청(淸)이라 하였다. [註112] 조선의 사신 이곽(李廓) 등이 와서 조하(朝賀)하였으나, 배례(拜禮)를 하지 않았다.[註113] 국서를 내려 질자(質子)를 보내도록 하였으나 다시 아무런 회보가 없었다.[註114] 11월, 황제는 조선에서 맹약을 깨뜨렸다고 하여 친히 대군을 거느리고 정벌하고자 하였다.[註115] 먼저 그 나라 사신인 이곽(李廓) 등을 귀국시키면서 국왕에게 국서를 보내고, 한편으로는 조선의 관민(官民)들에게 격문(檄文)을 띄웠다. 12월 신미삭(辛未朔)에 정친왕(鄭親王) 제이합랑(濟爾哈朗)에게 본영(本營)[註116]을 수비하도록 하고, 무영군왕(武英郡王) 아제격(阿濟格)[註117]과 다라요여 패륵(多羅饒餘 貝勒) 아파태(阿巴泰)[註118]에게는 요하(遼河)의 해구(海口)를 나누어 주둔하여 명(明)나라 수군이 조선을 도우기 위하여 습격하여 올 길을 방비하도록 하였다.[註119]
○ 예친왕(睿親王) 다이곤(多爾袞)과 패륵(貝勒) 호격(豪格)[註120]은 좌익(左翼)의 만주병(滿洲兵)과 몽고병(蒙古兵)[註121]을 나누어 거느리고[註122] 관전(寬甸)[註123]에서부터 장산구(長山口)[註124]로 들어가게 하였다. 호부(戶部)[註125] 승정(承政) 마복탑(馬福塔)[註126] 등에게는 군사 3백명을 거느리고 몰래 들어가 조선의 왕경(王京)을 포위하게 하였으며,[註127] 예친왕(豫親王)[註128]은 호군(護軍) 1천명을 거느리고 뒤를 따르게 하고, 패륵(貝勒) 악탁(岳託) 등에게는 군사 3천명을 거느리고 후원군을 삼도록 하였다. 황제는 친히 예친왕(禮親王) 대선(代善)[註129]의 군대를 이끌고 출동하였다. 경진일(庚辰日)에 진강(鎭江)을 건넜다.[註130] 임오일(壬午日)에 곽산성(郭山城)[註131]에 이르니 정주(定州)· 안주(安州)[註132]가 항복하였다.[註133] 정유일(丁酉日)에 임진강(臨津江)[註134]에 이르렀다.[註135] 임진강은 국도(國都)의 북쪽 1백여리에 있는데, 국도(國都)의 남쪽에 있는 한강(漢江)과 함께 왕성(王城)을 둘러싸고 있다. 이 때 강물이 미처 다 얼지 않았으나 거가(車駕)가 이르자 얼음이 갑자기 단단해져서 6군(軍)이 완전히 건널 수 있었다. 마복탑(馬福塔) 등은 이 달 갑신일(甲申日)에 몰래 왕경(王京)을 습격하여 그들의 정병(精兵) 수천명을 패퇴시켰다.
○ 이종(李倧)은 창황히 성 밖의 진영에 사신을 파견하여 노고를 위로하는 한편 그의 처자들을 강화도(江華島)로 옮기고, 자신은 친히 군사를 이끌고 강을 건너 남한산성(南漢山城)[註136]에 들어가 방어하였다.[註137] 대군이 도성(都城)에 들어가고 다탁(多鐸)· 악탁(岳託) 또한 평양을 평정한 후 왕경(王京)에 이르렀는지라 군대를 합쳐 강을 건너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그 나라의 여러 도(道)에서 온 구원병을 연거푸 패퇴시켰다. 황제가 도착해서 군사를 분산하여 도성(都城)을 수색 약탈하고 친히 대군을 이끌고 강을 건너 남한산성(南漢山城)의 포위를 더욱 단단하게 하였다.[註138]
○ [숭덕(崇德)] 2년(A.D.1637; 朝鮮 仁祖 15) 정월 임인일(壬寅日), 전라도(全羅道)에서 온 원병(援兵)을 물리치고, 늑서(勒書)를 휴대한 사신을 조선 대신(大臣)에게 보내어 유시(諭示)하였다.[註139] 갑진일(甲辰日)에 대군이 북쪽으로 한강을 건너 왕경(王京)의 동쪽 20리 강안(江岸)에 진영을 설치하였다.[註140] 정미일(丁未日)에 전라(全羅)· 충청(忠淸) 양도(兩道)의 군사를 격퇴시켰다.[註141] 한편 다이곤(多爾袞)· 호격(豪格)이 이끄는 좌익군(左翼軍)은 장산구(長山口)를 거쳐 창주성(昌州城)[註142]을 점령한 뒤 안주(安州)· 황주(黃州)의 군사 5백명[註143]과 영변성(寧邊城)[註144]의 군사 1천명을 패퇴시키고, 구원병 1만 5천명을 차단시켜 죽인 후 이 날에 이르러 군대가 합류하게 되었다.[註145] 패륵(貝勒) 두도(杜度)는 대포(大礮)를 임진강(臨津江)에까지 운반하여 왔는데, 녹았던 얼음이 다시 얼어붙기가 전과 같았다. 성의 포위를 더욱 서둘렀다.
○ [숭덕(崇德) 2년(1637)정월] 계축일(癸丑日)에 이종(李倧)이 화의를 요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였다.[註146] 기미일(己未日)에 재차 화의를 요청하였다.[註147] 경신일(庚申日)에 항복하였다. 이에 칙령을 내려 성에서 나와 친히 알현하도록 하는 한편 맹약을 깨뜨릴 것을 주장한 대신(大臣)들을 결박하여 바치도록 하였다.[註148] 이 날 종(倧)은 주문(奏文)에서 처음으로 칭신(稱臣)하며 자신의 출성(出城)만은 면제해 달라고 빌었다.[註149] 황제가 다이곤(多爾袞)에게 소선(小船)을 바퀴로 끌어 육지에서 바다로 나가게 하였는데, 대포를 쏘아 그들의 큰 함선 30척을 격침시켰다. 소선(小船)은 곧장 바다를 건너 강화성으로 쳐들어 가, 왕비(王妃)· 왕자(王子)· 종친(宗親) 76명과 여러 신하들의 가속(家屬) 166명을 사로잡아 여러개의 별실(別室)에 안치하였다.[註150]
○ [숭덕(崇德) 2년(1637)정월] 갑자일(甲子日)에 종(倧)에게 성 밖으로 나와 친히 알현하라는 앞서의 조륵(詔勒)을 속히 이행하라고 유시하였다. 종(倧)은 마침내 맹약(盟約)을 깨뜨리자고 주장한 홍문관(弘文館)[註151] 교리(校理)[註152] 윤집(尹集)[註153]· 수찬(修撰)[註154] 오달제(吳達濟)[註155] 및 대간관(臺諫官)[註156]인 홍익한(洪翼漢)[註157]을 성 밖으로 내보내어 바치고 군영(軍營) 앞으로 나왔다. 황제는 칙령을 내리기를, “명(明)의 연호를 버리고, 명(明)으로부터 받은 고명(誥命)과 옥책(玉册)· 인(印)을 반납할 것. 왕자 2인을 볼모로 내놓고, 대청국(大淸國)의 정삭(正朔)을 받들 것. 만수절(萬壽節) 및 중궁(中宮)과 황태자(皇太子)의 천추절(千秋節), 동지(冬至)와 원단(元旦) 및 제반 경조사(慶弔事)에는 공헌(貢獻)의 예(禮)를 갖추어 행할 것. 대신과 내관(內官)을 보내어 표(表)를 받들어 올리고, 청(淸)의 사신과 상견(相見)할 때는 배신(陪臣)의 예(禮)로 알현할 것이며, 아울러 영송궤사(迎送饋使)의 예(禮)를 행하되 명(明)나라와의 구례(舊例)와 다름없이 할 것. [청(淸)이] 타국을 정벌할 경우에는 군대를 징발하여 협조하고 따름은 물론 군사를 호궤(犒饋)하는 예물을 바칠 것. 함부로 성곽을 쌓지 말 것. [청(淸)나라로부터] 도피하여 온 자를 함부로 받아들이지 말 것.
해마다 한번씩 조공하되 그 방물(方物)은 황금(黃金) 1백냥(兩), 백금(白金) 1천냥(兩), 물소뿔 2백대(對), 담비가죽 1백장(張), 녹피(鹿皮) 1백장, 다(茶) 1천포(包), 수달피(水獺皮) 4백장(張), 청서피(靑黍皮) 3백장(張), 호초(胡椒) 10두(斗), 요도(腰刀) 26구(口), 순도(順刀) 20구(口), 소목(蘇木) 2백근(觔), 대지(大紙) 1천권(卷), 소지(小紙) 1천 5백권(卷), 오조룡석(五爪龍蓆) 4령(領), 화석(花蓆) 4령(領), 백저포(白苧布) 2백필(疋), 면주(綿綢) 2천필(疋), 세마포(細蔴布) 4백필(疋), 세포(細布) 1만필(疋), 포(布) 4천필(疋), 쌀 1만포(包)로 할것.” 등이다.[註158]
이종(李倧)은 고립된 성에서 형세가 어렵고 급박하여진 데다 처자마저 포로가 되고 팔도(八道)의 군사는 모두 붕괴되어 뿔뿔이 흩어지니, 종묘사직이 끊기게 되었으므로 이에 머리를 숙이며 청(淸)의 명(命)을 받아들였다. 경오일(庚午日)에 종자 수십기(數十騎)를 이끌고 조복(朝服)차림으로 성(城)에서 나와 항복하였다.
○ [숭덕(崇德) 2년(1637)]2月, 한강(漢江) 동쪽 연안의 삼전도(三田渡)[註159]에 단(壇)을 쌓고 누런 장막을 설치하였다.[註160] 황제(皇帝)가 시위대(侍衛隊)의 호위하에 강(江)을 건너 단(壇)에 오르자 음악이 연주되었고, 장군과 사병들은 무장을 한 채 엄숙하게 정렬하고 있었다. 이종(李倧)이 그의 신하들을 이끌고 남한산(南漢山)을 벗어나 5리(里)쯤 걸어 나오자[註161] 영아이대(英俄
爾岱)와 마복탑(馬福塔)으로 하여금 1리(里) 밖에서 맞이하여 데리고 와 의장(儀仗) 아래에 서도록 하였다. 황제(皇帝)가 자리에서 내려와 이종(李倧)과 그 아들들을 거느리고 하늘에 절하였다. 예(禮)가 끝나자 황제(皇帝)는 자리로 돌아가 앉고, 이종(李倧)은 그 부하들을 이끌고 땅에 엎드려 죄(罪)를 청하였다. 조칙을 내려 그들을 용서하고, 단(壇) 아래의 좌측에 서(西)쪽을 향하여 앉도록 하였으니 제왕(諸王)들의 윗자리였다. 황제(皇帝)가 베푼 연회(宴會)가 끝난 뒤 그 나라의 임금과 신하의 가속(家屬)들을 돌려보내고, 여러 도(道)에 흩어져 있던 병사(兵士)들을 모두 돌아오게 하여 군대를 정돈하고는 서쪽으로 갔다.
조서(詔書)를 내려 조선(朝鮮)이 새로운 병화(兵禍)를 입었으므로 정축(丁丑)· 무인(戊寅) 두 해의 공물(貢物)은 면제해 주고,[註162] 기묘년(己卯年)[註163] 가을부터 시행하기로 하되 힘이 미치지 못할 경우에는 그 때에 가서 조정하겠다고 하였다. 조선(朝鮮)의 신민(臣民)들은 삼전도(三田渡) 단(壇) 아래에 송덕비(頌德碑)[註164]를 세웠다.
○ [숭덕(崇德) 2년(1637)]4월, 이종(李倧)이 아들과 호(淏)를 인질로 보냈다.[註165] 5월, 조선(朝鮮)의 병선(兵船)이 피도(皮島)를 공격하는 데 도와 준 공로가 있었으므로 이종(李倧)에게 은폐(銀幣)· 마필(馬匹)을 하사하였다.[註166] 10월, 영아이대(英俄爾岱)·마복탑(馬福塔)· 달운(達雲) 등에게 조칙(詔敇)을 주어 조선으로 보내어 이종(李倧)을 조선국왕(朝鮮國王)에 봉(封)하였다.[註167] 11월, 이종(李倧)이 배신(陪臣)을 보내어 만수절(萬壽節)을 축하하는 표(表)를 올리고, 동지(冬至)에는 방물(方物)을 바쳤다.[註168] 12월, 원단(元旦)을 축하하였다.[註169] 이어서 만수성절(萬壽聖節)· 원단(元旦)· 동지(冬至) 때마다 배신(陪臣)을 보내 표(表)를 올려 하례(賀禮)하고 방물(方物)을 바쳤는데, 해마다 이를 상례(常例)로 삼았다. 이 해에 조공로(朝貢路)를 정하였으니 봉황성(鳳凰城)[註170]을 경유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호시(互市)의 규정도 약정하였다. 무릇 봉황성(鳳凰城) 제처(諸處)의 관원과 백성들이 의주(義州)로 가서 교역(交易)할 경우에는 매년 두 차례로 봄에는 2월(月), 가을에는 8월(月)로 제한하였다. 영고탑(寧古塔)[註171]사람들이 회령(會寧)으로 가서 교역(交易)할 경우에는 매년 한차례로 하며, 고이객(庫爾喀)사람들이 경원(慶源)[註172]에 가서 교역(交易)할 경우에는 2년마다 한차례씩 하기로 하였다. 또 해당 부서에서 뽑은 조선(朝鮮)의 통사관(通事官)[註173] 2명과 영고탑(寧古塔)의 관리인 효기교(驍騎校)[註174]· 필첩식(筆帖式)[註175] 각 1명씩을 그곳에 보내어 감시하도록 하였으며, 20일을 기한으로 하여 즉시 돌아오도록 하였다.
○ [숭덕(崇德)] 3년(A.D.1638; 朝鮮 仁祖 16) 조선병(朝鮮兵)을 징발하여 명(明)을 정벌(征伐)하는데 따르도록 하였으나, 군대가 기일에 맞추어 도착하지 않았으므로 조서(詔書)를 내려 준절히 책망하였다. [숭덕(崇德)] 4년(A.D.1639; 朝鮮 仁祖 17) 6월, 사신을 보내 이종(李倧)의 계실(繼室) 조씨(趙氏)를 조선왕비(朝鮮王妃)로 봉(封)하였다.[註176] 동쪽의 고이객(庫爾喀)[註177] 반란인들이 동쪽 바다 가운데 있는 웅도(熊島)[註178]로 들어갔으므로,[註179] 조선(朝鮮)에 명(命)하여 이들을 토벌하게 하였다. 이에 이종(李倧)은 장군을 파견하여 경흥(慶興)[註180]· 서수라(西水羅)[註181]· 전포(前浦)를 거쳐 진군하도록 하였다. 7월에 반란군의 두목인 가합선(加哈禪)을 잡아와서 바치는 지라, 이종(李倧)에게 은(銀) 2백냥(兩)을 하사(下賜)하였다.[註182] [숭덕(崇德)] 5년(A.D.1640; 朝鮮 仁祖 18) 10월, 이종(李倧)의 탄진(誕辰)을 축하하여 세공(歲貢) 가운데 미(米) 9천포(包)를 감해 주는 은혜를 베풀었다.
○ [숭덕(崇德)] 6년(A.D.1641; 朝鮮 仁祖 19) 정월, 명(明)의 금주(錦州)를 공격함에 조선(朝鮮)의 배 5천척을 징발하고 군량(軍糧) 1만석(石)을 운반하라 하였다.[註183] 얼마 안있어 이종(李倧)은 군선(軍船)과 양선(糧船) 32척이 표류(漂流)하다 침몰되어 남아 있는 것이 없다고 상주하였다.[註184] 황제(皇帝)는 그것이 꾸며낸 것임을 알고 조서를 내려 준절히 책망하며 기일에 틀림없이 맞추도록 재촉하였다. [註185] 다시 군량 1만석을 실은 배 115척[註186]이 대릉하(大凌河)와 소릉하구(小凌河口)[註187]를 거쳐 삼산도(三山島)[註188]에 이르렀는데, 도중에 풍랑을 만나 50여척이 좌초 파괴되었고, 또한 명(明)나라 수군(水軍)의 공격을 받아 겨우 52척만이 남게 되었다.[註189] 개주(蓋州)[註190]에 이르러 앞으로는 더 나아갈 수 없게 되자 육로(陸路)로 운송하도록 청하였다. 이에 조서를 내려 조선(朝鮮)의 배 3척이 명(明)의 경내로 흘러 들어가 통신(通信)한 사실과 명(明)나라 병선(兵船)이 나타나도 맞이하여 싸우지 않은 사실, 그리고 수로(水路)로 전진하지 않은 사실을 들어 그들의 청을 단호히 물리쳤다. 조선(朝鮮)의 장수 임경업(林慶業)[註191]이 매우 두려워한 나머지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수로(水路)로 나가겠다고 하니, 황제는 그제서야 육로(陸路)로 변경할 것을 허락하였다.[註192] 그리고, 정포병(精礮兵) 1천명과 시졸(厮卒) 5백여명만 남겨놓고 나머지 병사는 모두 돌아가게 하였다.[註193] 벌써 운반되어야 할 군량과 병마가 오랫동안 도착하지 아니하자, [청(淸)에서는] 사신을 보내 이를 나무라고 꾸짖었다.[註194] 3월이 되어 비로소 조선(朝鮮) 총병(總兵) 유림(柳琳)[註195]과 부장(副將) 조하량(刁何良)[註196] 등이 군사를 이끌고 금주군영(錦州軍營)에 도착하였다. 6월, 이종(李倧)이 배신(陪臣) 이완(李浣) 등을 보내 신라(新羅) 단금(端金)을 바쳤다. 상주하기를, 함양군(咸陽郡) 신계서원(新溪書院)은 신라(新羅) 때의 옛 사찰(寺刹)터로서 주민(住民)인 원년(袁年)이 땅을 파다가 와담(瓦罈) 하나를 얻었는데, 뚜껑에 「일천년(一千年)」이라는 세 글자가 새겨져 있었고, 그 안에는 황금(黃金) 20근(斤)이 있었으며, 1근(斤) 안에는 「의춘대길(宜春大吉)」이란 네 글자가 조각되어 있었다고 하였다.[註197] 은정(恩情)을 담은 조서(詔書)를 내려 이에 답하고, 원래의 금(金)은 돌려보냈다.
○ [숭덕(崇德)] 7년(A.D.1642; 朝鮮 仁祖 20) 금주(錦州)의 전투에서 [명군(明軍)을] 크게 쳐부수니 명(明)나라에서는 사신(使臣)을 보내와 화의(和議)를 하고자 하였다. 황제가 이종(李倧)에게 칙서(敇書)를 내려 그의 의견을 개진하도록 하니,[註198] 이종(李倧)은, “살인(殺人)을 그만두고 백성을 편안하게 함이 위로 하늘의 뜻에 부합하는 일이다.” 라고 대답하였다. 그 후 얼마 아니되어 명(明)나라 병선(兵船) 2척이 조선(朝鮮)의 국경에 이르렀던 사실이 정탐되어[註199] 황제는 크게 노하였다. 아울러 각신(閣臣) 최명길(崔鳴吉)과 병사(兵使) 임경업(林慶業)이 명(明)나라와 비밀히 통해 국서(國書)를 왕래한 사정을 알고 나서[註200] 이들을 체포 심문하여 죄(罪)를 다스렸다.
○ [숭덕(崇德)] 8년(A.D.1643; 朝鮮 仁祖 21) 9월, 조선(朝鮮)에서 명(明)나라 천진(天津)[註201]의 정탐병선(偵探兵船) 1척을 사로잡아 보내오니 이종(李倧)에게 은(銀)을 하사(下賜)하였다.[註202] 이 달에 세조(世祖)의 즉위 사실을 그 나라에 조서(詔書)로 반포하고, 아울러 칙서(敇書)를 보내 세공(歲貢) 가운데 홍록면주(紅綠綿綢) 각 50필(疋)· 백면주(白綿綢) 5백필(疋)· 저사(紵絲) 2백필(疋)· 포(布) 2백필(疋)· 요도(腰刀) 6구(口)· 용석(龍蓆) 2령(領)· 화석(花蓆) 20령(領)을 감하여 준다고 하였다.[註203] 10월, 이종(李倧)은 그의 아들 요(㴭)[註204]를 보내 표(表)를 올리고 진향(進香)하면서[註205] 방물(方物)을 바쳤다. 12월, 이종(李倧)이 배신(陪臣)을 보내 표(表)를 올려 황제(皇帝)의 등극을 축하하였다.[註206]
○ 순치(順治)[註207] 元年(A.D.1644; 朝鮮 仁祖 22) 정월, 이종(李倧)에게 와이객(瓦爾喀) 백성을 잡아 보내는 것을 중지하도록 유시하였다.[註208] 5월, 유적(流賊) 이자성(李自成)[註209]을 무찌르고 연경(燕京)으로 돌아가 평정한 후 조선(朝鮮)에 이를 알렸다.[註210] 7월, 이종(李倧)은 신하를 보내 표(表)를 올려 축하하고 방물(方物)을 바쳤다.[註211] 11월, 세자(世子)를 귀국(歸國)시키고,[註212] 세공(歲貢) 가운데 소목(蘇木) 2백근(斤)· 다(茶) 10포(包)· 면주(綿綢) 1천필(疋)· 여러 색(色)의 세포(細布) 5천필(千疋)· 포(布) 4백필(疋)· 추포(麤布) 2천필(千疋)· 순도(順刀) 10파(把)· 도(刀) 10파(把)를 감하도록 하였다. 조선(朝鮮)의 원단(元旦)· 동지(冬至)· 만수(萬壽)를 축하하는 공물(貢物)은 길이 멀기 때문에 조정의 사행이 올 때 함께 부쳐 보내도록 하고, 이를 법령(法令)으로 확정했다.
○ [순치(順治)] 2년(A.D.1645; 朝鮮 仁祖 23) 3월, 이종(李倧)의 차자(次子)인 호(淏)를 귀국시켰다.[註213] 11월, 세자(世子) 조(溰)가 졸(卒)하였으므로 이종(李倧)의 차자(次子) 호(淏)를 봉하여 세자(世子)로 삼았다. [註214] [순치(順治)] 3년(年)(A.D.1646; 朝鮮 仁祖 24) 10월, 공미(貢米)를 면제하여 주었다.[註215]
○ [순치(順治)] 6년(年)(A.D.1649; 朝鮮 仁祖 27) 정월, 조선이 연례(年例)로 조근(朝覲)함에 있어서 본래 각신(閣臣)· 상서(尙書) 각 한 사람과 서장관(書狀官) 한 사람으로 [조선왕을] 대신케 하였던 것을 이후부터는 각신(閣臣)이나 상서(尙書) 중 한 사람만 대신 조근(朝覲)하토록 하고, 서장관(書狀官)은 그대로 하도록 하였다.[註216] 6월, 이종(李倧)이 훙(薨)하였다.[註217] 8월, 예신(禮臣) 계심랑(啓心郞)[註218] 악혁(渥赫)[註219] 등을 보내 제(祭)를 드리도록 하고, 장목(莊穆)이라는 시호(諡號)를 하사하였다.[註220] 또 호부(戶部) 계심랑(啓心郞) 포단(布丹)과 시위(侍衛) 철이대(徹爾岱)를 각각 정,부사(正·副使)로 임명하여 고명(誥命)과 칙서(敇書)를 가지고 가 세자(世子) 호(淏)를 봉하여 조선국왕(朝鮮國王)으로 삼고, 처(妻) 장씨(張氏)를 왕비(王妃)로 삼았다.[註221]
○ [순치(順治)] 7년(A.D.1650; 朝鮮 孝宗 1)정월, 이호(李淏)가 상주하기를 “일본(日本)이 근래에 밀서(密書)를 보내와 통사(通事)할 의사를 비치어 그 사정이 두려우므로 방어하기 위하여 성(城)을 쌓고 훈련(訓練)할 수 있도록 하여 주십시요.” 라고 하였다.[註222] 사신을 보내 조사하였더니, 경상도(慶尙道) 관찰사(觀察使)[註223] 이만(李㬅)[註224]과 동래부(東萊府)[註225] 노협(盧協)[註226]이 한결같은 말로 ‘조선(朝鮮)과 일본(日本)은 평소에 화호(和好)하고 있다’고 하므로 앞서 상주한 것이 사실에 맞지 않는다고 하여 조서(詔書)를 내려 이호(李淏)를 준절히 책망하고, 그 일을 꾸민 신하 이경여(李敬輿)· 이경석(李景奭)[註227]· 조동(趙洞)[註228] 등을 치직(褫職)시키도록 하였다.[註229]
○ [순치(順治)] 9년(A.D.1652; 朝鮮 孝宗 3) 정월, 이호(李淏)가 소성자수 황태후(昭聖慈壽 皇太后)의 휘호(徽號)를 더하여 올리게 된 것을 축하하는 표(表)를 올렸다.[註230] 5월, [조선인] 조조원(趙照元)[註231] 등이 반역을 도모하였다가 복주(伏誅)된 사실을 사신을 보내 알려 왔다.[註232]
○ [순치(順治)] 10년(A.D.1653; 朝鮮 孝宗 4) 3월, 조선국왕인(朝鮮國王印)[註233]에 청(淸)나라 문자(文字)만 있고 한전(漢篆)이 없었으므로 예부(禮部)에 명(命)하여 청,한자(淸·漢字)를 함께 써서 주조한 도장을 하사하도록 하였다. 12월, 이호(李淏)의 아들 연(棩)[註234]을 봉하여 세자(世子)로 삼았다. [순치(順治)] 15년(A.D.1658; 朝鮮 孝宗 9) 2월, 나찰(羅刹)이 변방을 침범하므로 조선(朝鮮)에 대하여 조창수(鳥槍手) 2백명을 징발하여 원정(遠征)에 따르도록 유시하였다.[註235]
○ [순치(順治)] 16년(A.D.1659; 朝鮮 孝宗 10) 5월, 이호(李淏)가 훙(薨)하였다.[註236] 9월, 공부상서(工部尙書) 곽과(郭科) 등을 보내 제사(祭祀)드리도록 하고, 충선(忠宣)이란 시호(諡號)를 내렸다. 또한 대학사(大學士)[註237] 장혁덕(蔣赫德)[註238]· 이부시랑(吏部侍郞)[註239] 각라박석회(覺羅博碩會)[註240]를 각각 정,부사(正·副使)로 임명하여 보내어 세자(世子) 연(棩)을 봉하여 조선국왕(朝鮮國王)으로 삼고,[註241] 그의 처(妻) 김씨(金氏)를 왕비(王妃)로 삼았다. [순치(順治)] 18년(A.D.1661; 朝鮮 顯宗 2) 성조(聖祖)가 즉위하였으므로 이연(李棩)이 배신(陪臣)을 보내 진향(進香)하고 등극을 축하하였다.[註242]
○ 강희(康熙) 원년(元年)(A.D.1662; 朝鮮 顯宗 3) 조선(朝鮮)으로 하여금 동지(冬至)· 만수절(萬壽節)을 축하하는 표문(表文) 및 세공(歲貢)의 진헌(進獻)을 조정(朝正)의 사행(使行)과 함께 행하도록 명하였다.[註243] 여러 해 동안 나라에 큰 의식이 있었는데, 그 때마다 사신(使臣)을 보내와 조하(朝賀)하였다.
○ [강희(康熙)] 13年(A.D.1674; 朝鮮 顯宗 15) 12월, 이연(李棩)이 훙(薨)하였다.[註244] 예부(禮部)에 유시하기를,[註245] “이연(李棩)은 번직(藩職)을 극진히 수행하였으므로 특별히 융숭한 술휼(卹䘏)을 베풀도록 하되 규정 외에 제(祭)를 한 차례 더 올리도록 하라.”[註246] 하고, 장각(莊恪)이란 시호(諡號)를 내렸다. 내대신(內大臣)인 수서특(壽西特)[註247]과 시위(侍衛)[註248] 상액은극(桑厄恩克)등을 보내 제사(祭祀)하도록 유시하였다.[註249] 아울러 사자(嗣子)인 이돈(李焞)[註250]을 봉하여 조선국왕(朝鮮國王)으로 삼고,[註251] 그의 처(妻) 김씨(金氏)를 왕비(王妃)로 삼았다.
○ [강희(康熙)] 15년(A.D.1676; 朝鮮 肅宗 2) 11월, 이돈(李焞)은 상주하기를, “전에 명(明)의 『십육조기(十六朝紀)』란 책에 우리나라 계해년(癸亥年)에 광해군(光海君) 이혼(李琿)을 폐위하고[註252] 장목왕(莊穆王) 이종(李倧)을 세운 일을 기록하면서 이를 찬역(篡逆)으로 무고하게 기록하였습니다. 이제 『명사(明史)』를 찬수(纂修)[註253]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 시말(始末)을 특별히 진언하오니 이를 고쳐서 다시 사실(史實)를 믿을 수 있도록 밝혀 주십시요.”라 하였다. 예부(禮部)에서 이를 의논한 결과 그렇게 하지 않도록 하였다.[註254]
○ [강희(康熙)] 20년(A.D.1681; 朝鮮 肅宗 7) 정월, 왕비(王妃) 김씨(金氏)가 세상을 떠나자 관원(官員)을 보내 제사하였다.[註255] [강희(康熙)] 21년(A.D.1682; 朝鮮 肅宗 8) 5월, 사신을 보내어 이돈(李焞)의 계실(繼室) 민씨(閔氏)를 봉하여 왕비(王妃)로 삼았다.[註256] 이 해에 황제(皇帝)는 조릉(祖陵)을 배알하였는데, 이돈(李焞)은 배신(陪臣)을 성경(盛京)으로 파견하여 근현(覲見)하고 방물(方物)을 바쳤다.[註257] [강희(康熙)] 24년(A.D.1685; 朝鮮 肅宗 11) 이돈(李焞)이 나라 안의 소(우,牛)들이 병으로 많이 죽어 백성들이 농사를 짓지 못하였으므로 호시(互市)를 잠시 중지시켜 주도록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註258] 예부(禮部)에서는 이돈(李焞)이 핑계로 하는 망령된 상주를 하였다고 의논하였으나 황제(皇帝)는 외번(外藩)을 용서하는 뜻에서 상례(常例)에 비추어 무역하도록 하였다.
○ [강희(康熙)] 25년(A.D.1686; 朝鮮 肅宗 12) 조선(朝鮮) 백성인 한득완(韓得完) 등 28명이 강(江)을 건너 산삼(山蔘)을 채취하고 창(槍)으로 회화여도 관리(繪畫輿圖 官吏)를 찔러 상처를 입혔다.[註259] 이를 상부에서 심리하여 우두머리에 해당하는 한득완(韓得完) 등 6명을 참형에 처하고, 나머지는 죽음을 면하게 하여 등급을 감해 각각 집행하였다. 이에 이돈(李焞)이 사죄(謝罪)하는 표(表)와 함께 방물(方物)을 바쳤다.[註260] 황제(皇帝)는 조선왕(朝鮮王)이 사죄(謝罪)의 뜻으로 진공(進貢)하는 것은 받지 않는 것이 타당하므로 연공(年貢)만 하도록 하였으며, 이후에도 사죄공물(謝罪貢物)을 중지시키게 하였다.
○ [강희(康熙)] 30년(A.D.1691; 朝鮮 肅宗 17) 7월, 조선국(朝鮮國)의 조공사(朝貢使)가 금지 규정을 위반하고 사사로이 『일통지(一統志)』[註261]란 책을 사들였으므로 내통(內通)하였던 관리 장찬(張燦)을 마땅히 파직하여 변방(邊方)의 국경지대에 충군(充軍)시켜야 하며, 정사(正使)인 이심(李沈)과 부사(副使)인 서문중(徐文重)[註262] 등은 이를 잘 살피지 아니한 실책이 있으니 마땅히 혁직(革職)시켜야 한다고 예부(禮部)에서 상주하였다. 황제(皇帝)는 관용(寬容)을 베풀어 혁직(革職)을 면하게 하였다.[註263] [강희(康熙)] 32년(A.D.1693; 朝鮮 肅宗 19) 정월, 조선(朝鮮)의 세공(歲貢) 가운데 황금(黃金) 1백냥(百兩)과 남청홍목면(藍靑紅木棉)을 감면하였다.[註264]
○ [강희(康熙)] 36년(A.D.1697; 朝鮮 肅宗 23) 7월, 이돈(李焞)의 아들 윤(昀)[註265]을 봉하여 세자(世子)로 삼았다.[註266] 11월, 이돈(李焞)이 중강(中江)[註267]에서 미량(米糧)을 무역하도록 청하는 상소에 대하여 이를 허락하였다.[註268]
○ [강희(康熙)] 37년(A.D.1698; 朝鮮 肅宗 24) 정월, 시랑(侍郞) 도대(陶岱)를 보내 미(米) 3만석을 조선(朝鮮)에 보냈는데, 1만석은 진제용(賑濟用)이고, 2만석은 쌀값을 안정시키기 위한 것이다.[註269] [이를 기록한 것으로] 어제해운진제조선기(御製海運賑濟朝鮮記)[註270]가 있다. [강희(康熙)] 39년(A.D.1700; 朝鮮 肅宗 26) 이돈(李焞)이 표(表)를 올려, 유구(琉球)에서 표류하던 배를 돌려 보내준 것에 대하여 사은(謝恩)하고, 방물(方物)도 함께 보내왔다.[註271] 황제(皇帝)는 표류인(漂流人)을 불쌍히 여겨 한 일이므로 공물(貢物)은 물리쳤다. 이후에도 만약 이와 같은 일이 있더라도 공물(貢物)은 보내지 말도록 하였다.
○ [강희(康熙)] 40년(A.D.1701; 朝鮮 肅宗 27) 12월, 왕비(王妃) 민씨(閔氏)가 세상을 떠나자 관원을 보내 치제(致祭)하였다.[註272] 이전에 어채선(漁採船)이나 무역인(貿易人)들이 조선(朝鮮)에 가 때때로 지방을 소요케 하는 일이 있었다. 이 때에 이르러 왕에게 유시하여 선표(船票) 및 사람 수와 성명·본적을 조사하고 간검하여 [중국의 해당]부(部)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이를 원적(原籍)의 지방관(地方官)에게 전달하여 죄에 따라 다스리도록 하였다.[註273] 또한 각 연해의 지방관들에게는 해상(海上)에서 어채(漁採)를 하거나 무역(貿易)을 한다는 명목으로 외국(外國)을 왕래하면서 금지된 화물(貨物)을 판매하는 행위를 철저하게 금지하도록 엄중히 신칙하였다.[註274]
○ [강희(康熙)] 41년(A.D.1702; 朝鮮 肅宗 28) 에 원외랑(員外郞)[註275] 등덕(鄧德)을 보내 중강(中江)의 세(稅)를 감독하여 받아들이도록 하였는데, 4천냥(兩)을 정액(定額)으로 하였다. [강희(康熙)] 42년(A.D.1703; 朝鮮 肅宗 29) 2월, 사신을 보내 이돈(李焞)의 계실(繼室) 김씨(金氏)를 봉하여 왕비(王妃)로 삼았다.[註276] [강희(康熙)] 43년(A.D.1704; 朝鮮 肅宗 30) 12월, 이돈(李焞)이 관원을 보내어 풍랑으로 표류(漂流)하다가 상선(商船)을 잃은 사람에게 물자를 주어 돌려보냈으므로 유지(諭旨)를 내려 포상하였다.[註277]
○ [강희(康熙)] 45년(A.D.1706; 朝鮮 肅宗 32) 10월, 대학사(大學士)에게 유시(諭示)하기를, “조선국왕(朝鮮國王)은 우리 조정을 받들어 섬김에 성심성의를 다해 공경하며 정중하다. 그 나라에는 8도(道)가 있다고 하는데, 북도(北道)는 와이객(瓦爾喀) 지방의 토문강(土門江)과 접하여 있고, 동도(東道)는 왜자국(倭子國)[註278]과 접하여 있으며, 서도(西道)는 우리나라의 봉황성(鳳凰城)[註279]과 접하여 있고, 남도(南道)는 바다로 접하여 있으며 몇 개의 작은 섬이 있다고 한다. 태종(太宗)께서 조선(朝鮮)을 평정하신 뒤 그 나라에서 주군(駐軍)하였던 곳에 비(碑)를 세워 덕(德)을 지금까지 칭송하고 있다. 명(明)나라의 말년(末年)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한결 같이 잘 섬겨 배반을 하였던 일이 일찍이 없었으니 실로 예의(禮義)를 중시하는 나라이므로 더욱 취(取)할 만하다.” 라고 하였다.[註280]
○ [강희(康熙)] 49년(A.D.1710; 朝鮮 肅宗 36) 5월, 조선상인(朝鮮商人) 고도필(高道弼) 등이 풍랑을 만나 배가 파손되어 해주(海州)에 이르기까지 표류되었다가 구호되었는데, 강소순무(江蘇巡撫) 장백행(張伯行)[註281]이 이 사실을 상주하였다. 이에 고도필(高道弼) 등에게 예부(禮部)에서 문서를 발급하여 역마(驛馬)를 이용하여 귀국케 하도록 유시(諭示)하였다.[註282]
○ [강희(康熙)] 50년(A.D.1711; 朝鮮 肅宗 37) 5월, 황제(皇帝)가 대학사(大學士)에게 유시하기를, “장백산(長白山)의 서쪽은 중국(中國)과 조선(朝鮮)이 이미 압록강(鴨綠江)을 경계로 삼고 있는데 토문강(土門江)[註283]은 장백산(長白山) 동쪽 변방에서부터 동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니 토문강(土門江)의 서남쪽은 조선(朝鮮)에 속하고, 동북쪽은 중국(中國)에 속하여 역시 이 강(江)으로 경계를 삼도록 하였다. 그러나 압록(鴨綠)과 토문(土門) 두 강(江)사이의 지방(地方)은 그것이 어디에 속하는지를 확실히 알지 못한다.” 라고 하였다.[註284] 이에 목극등(穆克登)[註285]을 그곳에 파견하여 국경(國境)을 조사케 하였다. 10월, 황제(皇帝)는 조선국왕(朝鮮國王)에게 지금까지 바쳐오던 공물(貢物) 가운데 백금(白金) 1천냥(兩)과 홍표피(紅豹皮) 142장(張)을 면제하도록 하고, 조선국(朝鮮國)의 사행(使行)이 머무는 연도(沿途)의 관사(館舍)를 수리하도록 유시(諭示)하였다.[註286]
이 해에 예부(禮部)에서 복준(覆准)하기를, 조선국(朝鮮國)과 봉천부(奉天府)[註287]의 금부(金州)[註288]· 복주(復州)[註289]· 해주(海州)· 개주(蓋州) 등은 서로 가까이 있는 지방이므로 성경장군(盛京將軍)[註290]과 봉천부윤(奉天府尹)[註291]에게 명하여 연해(沿海)의 거민(居民)들을 잘 단속하여 조선(朝鮮)에 가서 근해 어업(漁業)이나 벌채(伐採)를 하지 못하도록 하고, 혹은 다른 지방의 어채인(漁採人)이 조선(朝鮮)에 이르면 역시 모두 체포하여 압송하도록 하였다.
○ [강희(康熙)] 51년(A.D.1712; 朝鮮 肅宗 38) 5월, 이돈(李焞)은 표(表)를 올려 늘 바치던 공물(貢物)을 줄여 준 것에 대한 사은(謝恩)을 표시하고 방물(方物)을 바쳤다.[註292] 황제(皇帝)는 사은예물(謝恩禮物)을 동지(冬至)· 원단예물(元旦禮物)로 삼도록 하였다. 이 해에 목극등(穆克登)이 장백산(長白山)에 이르러, 조선접반사(朝鮮接伴使) 박권(朴權)[註293]· 관찰사(觀察使) 이선부(李善溥)와 함께 소백산(小白山)[註294] 위에 비석(碑石)을 세웠다.
○ [강희(康熙)] 54년(A.D.1715; 朝鮮 肅宗 41) 에 예부(禮部)에서 상주하기를, “혼춘(琿春)[註295]의 고이객제(庫爾喀齊)[註296] 등의 주거지는 조선(朝鮮)과 토문강(土門江)을 사이에 두고 있어 서로 왕래하여 일이 일어날까 걱정스러우므로, 안도립(安都立)·타목노(他木努)[註297]의 가옥과 상점들을 전부 헐어버리도록 하여야 합니다. 이후에라도 연변(沿邊) 근처에 집을 짓거나 씨앗을 뿌리지 못하도록 하고, 군민(軍民) 중 이를 위반하는 자는 모두 중죄(重罪)로 다스려야 합니다.” 라고 하였다.[註298]
○ [강희(康熙)] 57년(A.D.1718; 朝鮮 肅宗 44) 3월, 이돈(李焞)이 표(表)를 올려 공청(空靑)을 하사한 것에 대하여 사은(謝恩)하고, 방물(方物)도 함께 보내왔다. 황제(皇帝)는 이를 유치해 두었다가, 다음번의 정공(正貢)으로 쓰도록 하였다. 이로부터 조선(朝鮮)에서 사은(謝恩)의 명목으로 보내오는 공물(貢物)들은 모두 유치시켜 두었다가, 정공(正貢)으로 쓰기로 하였으니 이것은 광서조(光緖朝)에 이르기까지 고치지 않았다.[註299]
○ [강희(康熙)] 59년(A.D.1720; 朝鮮 肅宗 46) 10월, 이돈(李焞)이 훙(薨)하였으므로[註300] 산질대신(散秩大臣)[註301] 사극단(査克亶)[註302]과 예부우시랑(禮部右侍郞) 나첨(羅瞻)을 보내[註303] 조문(弔問) 치제(致祭)하고 희순(僖順)이란 시호(諡號)를 내렸다.[註304] 아울러 세자(世子) 윤(昀)을 봉하여 조선국왕(朝鮮國王)으로 삼고, 계처(繼妻) 어씨(魚氏)를 왕비(王妃)로 삼았다.[註305]
○ [강희(康熙)] 61年(A.D.1722; 朝鮮 景宗 2) 2월, 이윤(李昀)이 상소하기를, “신(臣)은 건강이 나쁘고 후사(後嗣)가 없어 동생인 이금(李昑)을 세제(世弟)로 삼아 종사(宗社)를 잇고자 합니다.” 라고 하였다. 황제(皇帝)는 그 청을 받아들였다.[註306] 4월, 사신을 보내 이금(李昑)을 봉하여 조선국왕세제(朝鮮國王世弟)로 삼았다.[註307]
12월, 산동어민(山東漁民) 양삼(楊三) 등 14명이 바람을 만나 표류하다가 조선(朝鮮)에 들어왔는데, 조사한 결과 신표(信票)가 없어 내지(內地)로 회송(回送)되어 왔다. 황제(皇帝)는 이후에 바람으로 표류(漂流)하게 된 선박과 사람은 조사하여 표문(票文)이 있는 자로써 실정을 모르고 온 자는 구례(舊例)에 따라 돌려보내고, 표문(票文)이 없는 자로 다시 범법(犯法)한 자는 왕(王)이 조사한 후에 제본(題本)을 갖추어 예부(禮部)에 자문(咨文)하여 명령(命令)을 기다려 문서조회가 완결되면 예부(禮部)에 보고하여 안건을 보존하라고 명하였다.[註308]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