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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경복궁 근정전 130년만에 보수공사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勤政殿)에 대한 보수작업이 내년부터 벌어진다.
지난 1867년 고종4년 대원군이 중건한 이래 1백30여년만의 일이다.
문화재청은 27일 국보 223호인 근정전이 지은지 오래돼 나무를 짜맞춘 부분들이 벌어지고 용마루.처마가 처지는 등 훼손이 심해 전반적인 보수공사를 벌이기로 했다고 밝혔다.
문화재청은 내년 '1월 우선 건물의 천장부분까지 해체해 건물 상태를 분석, 어디를 얼마나 바꿔야 하는지 등을 검토한 뒤 '5월부터본 공사에 들어가 2001년 8월까지 보수공사를 마치기로 했다.
5. '한일합방은 강점' 일왕실 극비문서 첫 공개
1910년의 한일합방은 일제의 강압과 협박에 의한 강점이었다는 사실이 최근 공개된 일본 왕실의 극비문서에 의해 최초로 밝혀졌다.
KBS 일요스페셜은 오는 19일 저녁 8시 방송되는 `일왕실 비문서는 왜 북으로 갔나' 시간에 지난 90년간 극비문서로 보관돼있다가 1980년대 초 일본국립공문서관에 이관되면서 일반에 공개된 일본 왕실 내각문고의 한국강점 관련 극비문서의 전문을 입수, 방송을 통해 처음으로 공개한다.
이 극비문서는 한일 합병 당시 일본측 전권위임자였던 통감 데라우치가 내각총리인 가쓰라 앞으로 보낸 보고서와 통감부와 내각 사이에 오갔던 전문 일체, 그리고 8월 22일 조약체결을 재가한 일본 추밀원의 회의기록 등 3가지 종류로 이뤄져있다.
이 문서는 1980년대 초 국립공문서관에 이관된 후에도 극비문서 해제사실을 미처 알지 못한 일본 및 한국 학자들의 무지로 그 내용이 소개되지 않았으며 최근 서지학자인 이종학씨가 4년간의 번역을 통해 그 전문이 처음으로 공개됐다.
이씨는 조만간 이 내용을 `일본의 1910년 한국강점 자료집'이란 제목의 책을 통해 공개할 예정이며 일요스페셜은 이 자료를 미리 입수, 방송을 통해 소개하게 된다.
지금까지 일본은 당시 대한제국의 왕이었던 순종이 제국의 통치권을 일본 천황에게 자발적으로 양여한다는, 한일합방조약문서에 쓰인 내용을 근거로 줄곧 `한일합방은 한국의 자발적 양여에 의한 것이었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데라우치가 가쓰라에게 보낸 병합시말 보고서 첫 구절에는 `본관은 성지를 받들어 지난 7월 23일 한국에 착임한 이래 이미 확정된 방침에 따라 시기를 노려병합의 실행에 착수코자 한편으로는 준비를 서두름'이라고 돼있다.
또 이 보고서에 딸린 `군사상의 관계'라는 부록 맨 마지막 구절에는 `그러나 한편 군대 경찰의 위협과 끊임없는 경비가 간접적으로 상당한 효력을 나타낸 것 역시다툴 수 없는 사실이라 하겠다'라는 내용이 적혀있다.
일요스페셜 제작진은 이런 내용과 함께 합병 당시의 일본 군대 배치도를 처음으로 입수, 함께 공개한다.
이 배치도를 보면 일본은 조약체결 당시 4대문과 경성의 주요 입구에 예외없이군대를 배치해놓아 명백한 군대의 위협이 있었음을 적나라하게 증명하고 있다.
수년간의 연구를 통해 이같은 사실을 밝혀낸 이종학씨는 지난 2월 도쿄의 한 호텔에서 일본의 조총련계 대학인 조선대학의 금병동 교수를 만나 천여장의 묵직한 고문서 사본으로 된 이 세가지 문서를 전해준다.
북일 수교를 앞둔 북한이 일본과의 수교 과정에서 과거 남한이 범했던 것 같은우를 범하지 말고 확실한 과거사 청산을 통해 올바른 양국관계를 정립하라는 바람에서였다.
이은택 PD는 "1906년 프랑스의 프랑시스 레이 교수의 국제법 해석에 따르면 `강압에 의한 조약'은 무효이며 이 원칙은 1935년 하버드 법대 관련 법규에 의해 다시한 번 확인된 바 있다"며 "이제는 일본이 작성한 문서에 의해 강점사실이 확인된 만큼 이에 따른 법적 청산문제를 다시 논의해야 될 것"이라고 말했다.(서울=연합뉴스) 정 열기자
6. 최초의 철도 경인선
여행이 고통에서 즐거움으로 바뀐 것은 교통수단의 발달 덕분이다.
19세기에 기차가 발명돼 철도여행이 시작되면서 사람들은 여행을 즐기기 시작했다.
1825년 영국의 스톡턴과 달링턴 사이에 철도가 부설된 것을 효시로 4년후 리버풀~맨체스터간 철도영업이 시작됐다.
아시아에선 1853년 인도에 처음 철도가 놓였고, 이어서 1872년 일본에 철도가 도입됐다.
우리나라에선 1899년 노량진~제물포간 경인선이 개통됨으로써 철도시대가 열렸다.
경인선은 원래 미국인 J R 모스가 부설권을 따냈으나 자금난을 겪자 일본이 인수해 공사를 마쳤다.
일본은 경부선 (1905).경의선 (1906).호남선과 경원선 (1914) 을 잇따라 개통시켰다.
철도는 일제의 식민지 경영이라는 정치.경제적 목적과 대륙침략이라는 군사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었다.
해방 당시 한반도 전체 철도 길이는 6천3백26㎞, 남한만은 2천6백42㎞였다.
현재 우리나라 철도 길이는 3천92㎞다.
7. [3․1운동 80돌기획]광주학생운동은 범민족 항일투쟁
《1929년 11월3일은 일본의 당시 메이지(明治)천황의 탄생기념일인 메이지절이었으나, 우리 민족에게는 국조 단군(檀君)이 개국하신 날(음력 10월 3일)이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이날 개천절에 신사참배를 강요당한 광주고보생 등의 울분에 찬 가두시위로 본격화됐으며 바로 직전인 10월30일에 있었던 광주~나주 통학열차에서의 여학생 희롱 및 집단충돌사건이 그 도화선으로 기록되고 있다.
광주에서 타오른 항거의 불길은 인근 전남지역에 이어 그해 12월초에는 서울의 대규모 학생시위로 번져 갔으며 개성 인천 원산 평양 함흥 공주 등 전국의 주요도시로 확산돼 나갔다. 투쟁형태도 시험거부 동맹휴학 격문살포 가두시위 등 다양한 것이었다.
이듬해 3월까지 전국적으로 전개된 이 운동에는 모두 1백94개 학교(전문학교 4곳, 중등학교 1백36곳, 보통학교 54곳)에서 학생 5만4천여명이 참가함으로써 3․1운동 이후 최대의 민족운동으로 발전했다.
이 사건으로 광주에서만 2백60여명이 구속됐고 그 가운데 보안법관련자 49명, 성진회(醒進會)관련자 38명, 독서회(讀書會)관련자 90명, 소녀회(少女會)관련자 11명 등 모두 1백70여명이 재판에 회부돼 실형을 선고받았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근저에는 일제의 기만적인 문화통치정책과 세계대공황(1929년), 1920년대 이후 성장해 온 노동 농민 학생운동의 역량 등 복합적인 변수가 작용했다는 것이 학계의 분석이다. 그러나 해방 50년을 넘기고 이 운동이 발발한 지 70년을 맞은 이 시점에서도 그에 걸맞은 역사적 평가와 기념사업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게 현실.
특히 우리의 어정쩡한 역사교육은 광주―나주 통학열차에서의 여학생 댕기희롱으로 인해 우발적으로 일어난 한일 학생간 충돌사건정도로만 이 사건을 기억하게 만들었다.
53년 이 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11월 3일이 학생의 날로 지정됐으나 73년 유신정권에 의해 정치적인 이유로 폐지된 일은 이같은 부당한 대우를 실증하는 상징적인 사례로 꼽힌다. 더욱이 84년 학생의 날이 부활되기는 했으나 국가적 재평가작업은 이뤄지지 않은 채 해마다 학교별로 기념식을 치르는 선에서 그치고 있다. 80년 이후 제기된 사회주의 운동세력의 영향과 지도아래 치밀하게 계획된 조직활동의 성과라는 일각의 주장도 일반인들에게는 쉽사리 납득되지 않는 하나의 가설로 남아 있었다.
그전까지 우리 사학계는 일부의 사회주의 영향설에 대해 민족운동을 공산주의운동으로 몰아붙여 탄압하려 했던 일제의 상투적인 수법이 기록에 남아있는 탓이라는 논리로 핵심은 피해 왔던 것이 사실.
따라서 96년 이후 국사교과서에 3․1운동 이후 사회주의사상은 청년, 지식인층을 중심으로 널리 파급되면서 사회 경제운동을 활성화시키기도 했다는 수준의 표현이 등장한 것은 그에 비하면 실로 엄청난 변화인 셈이다.
여러 사료들은 또 당시 지식인 그룹이 식민지에서 민족해방운동과 계급해방운동은 분리해서 볼 수 없으며 협동전선을 통한 민족해방운동이 최우선 과제라는 공감대를 갖고 있었던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20년대 후반에 탄생한 신간회(新幹會․1927년)가 좌우합작형이었다는 사실은 이 공감대를 확인해 주고 있다.
따라서 광주학생독립운동은 △당시 이 운동의 주도단체인 성진회 독서회 등 회원의 상당수가 신간회 등 외부단체와 연계됐거나 중복되는 인물들이고 △이 운동의 전국 확산과정에서도 이들 단체의 역할이 인정된다는 점 등에서 좌우합작형 거사로 기록될 만하다. 특히 성진회와 독서회는 광주지역의 학생운동을 주도한 학생비밀결사로서 그 조직적 역량이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전국으로 확산시키는데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는 평가를 받고있다. 그러나 이 두 단체의 주도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현장에서 이 운동을 이끌었던 장재성(張載性)의 경우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듯 사회주의계열에 기울어지는 일부 구성원들의 성향과 이력으로 인해 국사교과서에는 아직 그 활약상이 올라 있지 않다.
광주학생독립운동사(사단법인 광주학생독립운동동지회 간)의 집필실무를 맡았던 광주대 고영진(高英津․한국사상사)교수는 이 운동을 둘러싸고 여러 논란이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남북분단으로 인한 이데올로기적 대립과 역대정권의 비민주성에 기인한다고 지적했다.
고교수는 당시는 민족주의 사회주의는 물론 왕정복고주의 무정부주의까지 다양한 사상이 혼재했고 서로 교류가 자유로웠던 시기였다며 이를 무시한 채 냉전의 잣대만으로 흑백을 가리려 했던 것이 무리가 아닐 수 없었다고 덧붙였다.
동아일보1999/03/04(목)〈광주〓김 권기자〉
8. [3․1운동 80돌]박영석/민족주의 사관서 본 광주운동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일제를 몰아내기 위해 이어졌던 수많은 의병전쟁 독립전쟁 의열투쟁 3․1운동 6․10만세운동 등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학생들은 각지에서 동맹휴학을 단행하고 비밀결사를 만들었으며, 이 바탕에는 성진회와 독서회의 투쟁의식과 현실인식이 크게 작용했다.
여기에는 항일의 큰 테두리안에서 진보적 성향의 인물들이 가담했지만 그들의 사상적 수준을 구태여 요즘 식으로 표현한다면 의식화정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사회주의적 시각에서는 이를 너무 드러내려 하고 반대로 민족주의적 입장에서는 이를 배제하려고 하는데 역사는 객관적으로 쓰여져야 한다.
민족주의진영과 사회주의진영의 분열 대립을 극복한 신간회 조직을 위시해 여러 사회 청년단체들이 이 운동을 제2의 3․1운동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전력을 경주했던 것도 이 운동의 성격을 구명하는데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다.
또 동학농민운동의 중심지인 호남에서 발생한 점도 유의해볼만 하다. 당시 호남지방에서는 일제의 토지조사사업과 쌀증산계획 등을 내세운 일제의 토지 식량수탈이 가장 극심하게 진행됐으며, 이점이 나주 등지의 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우리는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통치사는 그것대로 취급하되, 한민족이 주체가 되어 항쟁했던 역사를 중심으로 한국사를 기술해야 할 것이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경우 이제 광주학생들의 깃발아래 우리 민족이 모여 일제와 싸웠던 것이며 일제는 이에 저항했다는 식으로 사관(史觀)자체를 바꾸어 보아야 한다. 이 운동을 단순히 일제에 대한 저항사 또는 일제식민통치사의 부산물로 보는 것은 올바른 역사파악이 아니다.
1999/03/04(목) 박영석(전 국사편찬위원장 한국민족운동사연구회장)
9. [3․1운동 80돌 특별기획]성격과 의미 재조명
1919년3월1일 오후 2시. 천도교 기독교 불교를 대표하는 민족대표 33명 중 29명(4명은 불참)은 서울 인사동의 중국집 태화관에 모여 역사적인 독립선언식을 거행했다.
같은 시간, 종로의 탑골공원(당시 파고다공원). 독립선언식을 기다리던 학생과 시민들은 학생대표 정재용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자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치며 거리로 뛰쳐나가 시가행진에 들어갔다.
이렇게 시작된 3․1독립운동은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으로 번져나가 4월말까지 국내와 국외에서 1천5백여차례 시위가 벌어졌다. 참가인원은 2백여만명. 일제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7천5백여명이 사망하고 1만6천여명이 부상했으며 4만7천여명이 체포됐다. 3․1운동의 성격과 관련해 그동안 학계에서는 여러 쟁점들을 놓고 논쟁이 치열했다. 80년이란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연구와 새로운 자료의 발굴로 쟁점들이 어느 정도 정리됐지만 아직 미흡한 점도 있다. 21세기를 앞두고 20세기에 있었던 민족의 중대사건인 3․1운동의 성격과 의미를 재정리하고 이 운동이 민족사와 세계사에 끼친 영향을 살펴보기 위해 그동안의 쟁점들을 종합적으로 소개한다.
■성공이냐 실패냐
70년대까지만 해도 상당수 학자들은 3․1운동을 실패한 것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8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를 실패보다는 성공으로 봐야 한다는 견해가 설득력을 갖기 시작했다.
3․1운동을 실패로 규정하는 학자들은 이 운동이 지향했던 독립의 성취가 당시 즉각적으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을 근거로 들었다.
반면 이를 성공한 것으로 보는 학자들은 당시 시위운동의 목표가 즉각적인 독립쟁취가 아니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김진봉(金鎭鳳)충북대교수는 만세시위를 즉각적인 독립의 쟁취보다는 항일운동의 씨를 뿌린다는 측면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신용하(愼鏞廈)서울대교수는 당시 초기조직자들이나 민족대표들은 누구도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한다고 해서 곧바로 독립이 실현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며 3․1운동을 장기적인 독립운동의 한 단계로 본다면 성공한 것으로 말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사상적 배경
60년대까지는 3․1운동의 동기를 당시 미국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외부요인으로 보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80년대 들어서면서 외부요인보다는 한국민족 내부에 축적된 독립역량의 발현에 의한 것이라는 자생적 내부요인 쪽으로 대세가 기울었다. 즉 갑신정변 갑오농민운동 애국계몽운동 의병운동 등 초기 개화운동 이후 계속 이어져온 일련의 민족운동으로 독립역량이 축적돼온 결과라는 주장이다. 내부요인 주장론은 다시 기회포착론과 상황론으로 대별해 볼 수 있다.
내부적으로 독립역량을 축적한 한국민족과 독립운동가들이 전술전략의 하나로써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발표를 기회로 활용했다는 것이 기회포착론의 핵심. 상황론은 당시 조선총독부가 일본으로 쌀을 대량 반출함에 따라 쌀값 폭등으로 인한 생활고에다 유행성 독감으로 14만여명이 사망했고 고종의 죽음으로 국민의 울분이 극도에 달하는 등 당시의 악화된 상황이 독립의지에 불을 지피는 역할을 했다는 주장이다.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이정은(李廷銀)연구원은 당시는 성냥을 긋기만 해도 폭발할 정도로 일제에 대한 반감이 극도에 달한 상태라고 지적했다.
■누가 주도했나
50년대까지는 독립선언을 한 민족대표 33인을 3․1운동의 주도세력으로 보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60년대 들어서는 민족대표들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면서 민중을 주도세력으로 보는 견해가 다수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일부 진보적 사학자들은 민족대표들을 패배주의자 투항주의자로 표현하거나 심지어 독립운동 억제세력으로 폄훼하기도 했다. 아직도 일부 학자들은 민중을 주도세력으로 고집하기도 하지만 지금은 민족대표와 민중을 대립관계보다는 상호 보완적인 관계로 이해하는 경향이 대세를 이뤄가고 있다. 신용하교수는 초기 조직단계에서 민족대표의 역할이 없었다면 3․1운동의 점화는 없었거나 늦어졌을 것이고 또한 민중의 역할이 없었다면 3․1항쟁이 소규모 운동으로 끝났을 것이라고 말했다.
■비폭력운동의 타당성
일부 독립운동가와 진보적인 학자들은 3․1운동이 비폭력을 지향했기 때문에 원초적인 한계가 있었고 이로 인해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고 지적했다. 또 일부 학자들은 도별, 시기별 시위횟수와 투쟁양상을 분석해 3․1운동이 상당히 폭력적인 양상을 띤 것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국사편찬위원회가 발간한 한국독립운동사(1968년)는 3․1운동의 폭력성과 비폭력성을 34.5대 65.5로 분석하고 있다. 그러나 3․1운동은 많은 지방에서 폭력성을 띠기도 했지만 비폭력이 주류였고 또 비폭력이었기 때문에 더욱 차원 높은 운동이 될 수 있었다는 게 오늘날의 지배적인 시각이다.
■민족사와 세계사에서의 의미
국내적으로 무단정치를 종식시키고 문화 경제 교육 농민 노동 사회운동 등을 활성화시키는 전기가 됐다. 국외적으로는 민주공화제를 표방하는 상해 임시정부의 탄생으로 독립운동이 한층 조직화되고 무장투쟁이 본격 전개되는 계기를 제공했다.
남녀 노소 지역 종교 신분 계급을 넘어 전민족이 대동단결해 일제에 항거했다는 점에서 한국민족의 통일역량을 보여주는 민족사의 신기원을 열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해외로 중국 인도 베트남 필리핀 이집트의 민족운동에 영향을 끼치는 등 약소민족 해방투쟁의 첫 봉화 구실을 했다는 점에서 세계사적 의미도 결코 적지 않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동아일보 1999/02/18(목)〈이진녕기자〉
10. 안기부 『고종황제때도 국가정보기관 있었다』
고종(高宗)황제 시절에도 국가정보기관이 있었다.
6일 국가안전기획부에 대한 국회 정보위 국정감사에서 안기부측이 느닷없이 여야의원들에게 고종황제의 비밀정보기관이었던 제국익문사(帝國益聞社)의 존재사실을 입증할 비디오테이프를 공개해 관심을 끌었다.
안기부가 뿌리찾기 운동의 일환으로 수집한 이 자료는 서울대 국사학과 이태진(李泰鎭)교수가 지난해 발굴한 제국익문사비보장정이라는 사료를 근거로 만들어진 것.
이 자료에 따르면 제국익문사는 1902년 통신사를 가장, 황제의 직속 정보기관으로 설립돼 비밀리에 운영됐으며 설립목적은 당시 고급관료들이 일본측의 매수공작으로 중요정보를 누설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동아일보 1998/11/06(금) 〈윤영찬기자〉
11. 『고종황제,통신사 가장한 비밀정보기관 운영』
대한제국시절 高宗황제가 일본의 침략 등 열강의 각축장이던 조국을 구하기 위해 통신사를 가장한 「제국익문사」(帝國益聞社)라는 황제직속의 정보기관을 운영했던 사실이 6일 밝혀졌다.
국가안전기획부는 이날 국회정보위의 안기부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1902년 6월 고종황제가 만든 비밀정보기관인 제국익문사의 설치목적과 활동영역 및 조직 운영체계 등을 명시한 규정집 「帝國益聞社秘報章程」을 공개했다.
서울대 李泰鎭교수(국사학과)의 논문을 토대로 만든 만든 이 규정집에 따르면 제국익문사는 표면적으로는 「매일 사보를 발간해 국민들이 보도록 하고 국가에 긴요한 서적도 인쇄」하는 현대판 통신사 기능을 담당했지만 내면적으로는 황제 직속의 국가정보기관 역할을 수행했다.
이에따라 익문사 수장인 독리(督理)는 「황제가 특별히 신뢰하는 사람으로 임명」했고 독리 아래 현재의 안기부 차장급에 해당하는 사무(司務) 사기(司記) 사신(司信)등을 두고 16명의 상임통신원 등 모두 61명의 정보원이 활약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익문사 요원들은 주로 당시 정부고관과 서울주재 외국공관원들의 동정, 국사범과 외국인들의 간첩행위 그리고 학교 종교-사회단체의 반국가적 행위 등을 탐지하는 역할을 주로 했는데 서울과 지방은 물론 일본 중국 러시아에서까지 활동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이 규정집 내용중 일본인과 일본기관을 지칭한 사항이 10개항에 달해 이들의 활동이 일본의 대한제국 침략을 저지하려는데 맞춰졌고 특히 1907년 7월 고종황제가 강제 퇴위당하기 전까지 황제가 전개했던 을사보호조약 무효화운동을 집중 담당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안기부의 한 관계자는 『대한제국 당시 많은 고급관료들이 일본측의 매수공작 대상이 돼 조정의 중요 정보가 수없이 빠져나감에 따라 이를 방지하기 위해 정보기관을 설립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익문사 요원들은 수집된 정보를 황제에게 「직보」하는 체제를 구축했는데 황제보고시 붓글씨(黑書)로 쓰지 않고 불빛에 비춰야 읽을수 있는 「화학비사법」(化學秘寫法)을 사용했고 봉투에 오얏꽃으로 된 황실문장과 「성총보좌」(聖聰補佐)라는 글귀를 넣은 전용 인장을 봉투에 찍었던 것으로 나타나 눈길을 끌고 있다.
그러나 익문사가 언제 해체됐는지는 구체적으로 밝혀진게 없으며 일본이 1905년 을사보호조약과 1910년 한국합병조약 등을 차례로 강요해 한국의 국권을 강제로 탈취하는 과정에서 해체됐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이 관계자는 설명했다. 안기부가 이처럼 고종황제 시대의 정보기관 역사를 공개한 것은 새 정부 출범후 전개되고 있는 국가정보기관으로서의 본연의 자세를 재확립하고 뿌리를 찾으려는 운동의 일환으로 풀이된다.동아일보 1998/11/06(금) <연합>
12.국내제작 17C 동아시아 古지도,佛도서관서 발견
조선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국내에서 제작돼 17세기 동아시아 지역 세력 판도를 나타내는 국보급 고지도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중인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다.
왕반지 여지도 모회증보본(王泮識 輿地圖 摹繪增補本)또는 왕반제지 여지도 조선모회증보본(王泮題識 輿地圖 朝鮮摹繪增補本)으로 명명된 이 지도는 가로 1백90㎝, 세로 1백80㎝ 크기 비단에 조선 명 일본 등 17세기 동아시아 전체를 붓으로 채색 필사했다.
이 지도는 현재 남아 있는 국내 제작 동아시아지도 중 1573년 무렵 제작된 화동고지도(華東古地圖)와 1747년 제작된 천하여지도(天下輿地圖)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보여 1백70여년간의 동아시아 지도사 공백을 메우고 있어 학문적 가치도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1637년에서 1644년 사이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지도에는 특히 뒷시기의 천하여지도보다 한반도와 일본이 실제모습에 가깝게 나타나 있으며 명나라의 13성 1천1백7현과 조선의 8도 3백60여개 군현 등 동아시아 각국의 행정구역도 세밀히 정리, 17세기 각국의 판도를 가늠할 수 있다.
지도를 발견한 서울대 국사학과 한영우(韓永愚)교수는 진황색 홍색 등 오방색(五方色)을 이용해 산맥의 흐름과 바다의 파도를 회화적 수법으로 처리하는 등 과학성 못지않게 예술적 가치도 뛰어나다고 평가했다. 또 지도 하단에 성명미상의 조선인이 쓴 발문에는 임란과 호란으로 국내에서 자취를 감춘 동아시아지도를 마련하기 위해 중국인 왕반(王泮)이 제작한 목판본 여지도를 바탕으로 당시 지도제작 관행에 따라 우리나라와 일본을 덧붙이고 중국 부분을 대폭 수정해 제작한 것으로 적혀 있다.
동아일보 1998/06/09(화)〈박정훈기자〉
13. 「東海」표기 日帝 공식지도 발견…황국사관교육 책자 수록
한반도 동쪽바다를 동해(東海) 로 표기한 일본 공식지도가 발견됐다.
이 지도는 일제가 1936년 발행한 역대문화황국사대관 (歷代文化皇國史大觀) 에 수록된 겐로쿠(元祿) 시대 일본지도로 일본 열도 서쪽바다를 동해(OCEAN ORIENTAL)라고 표기했다.
이 자료는 김원모(金源模․한미교섭사)단국대교수가 발견해 10일 공개한 것이다.
역대문화황국사대관에는 이 지도와 함께 1690년 한 프랑스 지리학자가 일본을 정밀 답사하고 돌아가 프랑스에서 제작했다는 설명이 들어 있다. 외국에서 제작된 지도이긴하지만 일제가 황국사관을 강요하기 위해 펴낸 책에 수록돼 있다는 점에서 1936년 당시 일제가 동해라는 이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었음을 입증해 주는 귀중한 사료로 평가된다.
19세기 후반 메이지(明治)유신을 전후해 일본으로 돌아온 이 지도는 특히 대한해협 근해를 조선해(朝鮮海․MER DE COREER)로 표시해 눈길을 끈다.
김교수는 이밖에도 일본의 공식 역사서인 일본국사대사전(1995년 일본국사대사전편집위원회 발행․전14권) 11권에 들어 있는 9점의 일본지도(1589~1821년 제작)에도 일본해라는 표기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김교수는 19세기 전반까지 일본해라는 이름은 있지도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발견은 일본의 공식 자료에조차 일본해라는 명칭이 사용된 적이 없음을 확인했다는 점에서 한일간 동해 일본해 명칭 논란에 쐐기를 박는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동아일보 1998/03/10(화) 〈이광표기자〉
14. 마지막 황제 순종의 임종前 유언
▼「마지막 황제」의 최후에 얽힌 스토리는 역사의 비정함을 새삼스레 일깨워 준다. 말년에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기계수리공으로 일하다 세상을 떠난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의 일생은 영화로도 만들어져 널리 알려져 있다. 지난 8월 타계한 베트남의 마지막 황제 바오 다이도 프랑스 파리의 한 서민아파트에서 쓸쓸히 생애를 마쳤다. 조선조 순종황제도 예외는 아니다. 나라를 일본에 내준 뒤 17년간 망국의 한을 씹으며 칩거하다 세상을 떠났다
▼고종황제와 명성황후 사이에서 태어난 순종황제는 1907년 33세의 나이로 즉위했으나 막상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즉위 2년전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상실한데다 주변은 친일 대신들뿐이었다. 일제의 침략 수순에 따라 재위 3년만에 한일합병을 맞은 그는 황제에서 왕으로 강등되는 수모를 감수해야만 했다. 그 뒤 신장병 등 여러 질병으로 고생하다 1926년 4월 타계한다
▼순종황제가 임종 직전 남긴 유서내용이 최근 서울대 국사학과 이태진(李泰鎭)교수에 의해 공개됐다. 당시 미국 교포신문에 실린 그 내용은 「나 구차히 산 지 17년, 2천만 생민(生民․국민)의 죄인이 되었으니 잠시도 이를 잊을 수 없다」고 자책하면서 「한일병합은 강린(强隣․일본)과 역신의 무리들이 제멋대로 선포한 것」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이 유서는 순종황제가 역사앞에 토로한 피맺힌 절규로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다. 특히 한일합병문서에 자신이 절대 서명한 적이 없음을 확실히 해 그 불법성을 증언하고 있다. 올해는 고종황제에 의해 대한제국이 선포된 지 1백년이 되는 해다. 최근 학계 일부에서는 대한제국을 재평가하는 움직임도 일고 있다. 역사란 시각에 따라 해석이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던 치욕의 역사는 영원히 잊어서는 안된다.
동아일보 1997/11/14(금)
15. 임금앞에서 안경끼면 불경죄
1898년 8월29일 외부에서 일본 전 총리대신 이토의 내한을 축하하는 잔치를 벌였었다. 각부 대신과 주한 외교관들이 참석한 잔치를 마치고 돌아가는데 상에 놓아두었던 이토의 안경이 없어졌다. 평소에 안경을 쓰지 않던 이토는 노안현상이 일어나면서 유럽제 금테 안경을 종종 꺼 내 쓰곤 했던 것이다. 우연이 아니라 고의적인 증발일 것으로 낌새를 챈 이토는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표하고 돌아갔으며 조정에서는 범인을 잡아 돌려줄 것을 내부대신과 경무사에 명했다. 그날 잔치 심부름하던 하인과 하급관리들을 차례로 불러다가 태를 치고 주리를 틀었으며 수십 명이 옥에 갇히기까지 했다.
그때 이 안경사건을 두고 황성신문은 이렇게 보도했다.
'8월29일에 외부에서 일본국 총리대신 이토 후작을 초치하야 향응할 새 후작이 그의 안경을 실하얏슨즉 경대해야 할 외빈에게 매우 무색하 난고로 비서과장 조성협씨가 그 향응장소에 거행하던 하인들을 무수히 연행하엿다 하니 우리난 차사건이 불연한 줄로 지하난 것이 그시 거행 하던 하인이 모두를 도둑으로 지목할 수도 업고 또한 하인이 거행치 안 코 관원만 잇서데면 그 관원을 다 면관하엿슬난지.'
항간에는 나라를 훔쳐간 놈의 안경 하나 훔친 것이 비교나 되는 일 이냐고 빈축의 여론이 비등하기도 했다. 공기가 험해지자 서울에 사는 일본인들에 외출금지령까지 내렸었다. 사건이 일어난지 열흘 후에 외부 의 한 종으로부터 욕심이 나 집어넣었다는 자백을 받았다고 발표하고 그 범인에게 100대의 태를 치고 안면도에 유배시켰다 했다. 물론 조작 된 시국수습용 발표였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후에 당시 궁에서 약방 기생을 했던 설도 할머니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 궁녀들 간에 친일기와 배일기가 대립돼 있었는데 그 잔치에 차출된 한 배일기의 소행이었다고 했다. 나라 먹어드는데 힘없는 한 여인이 할 수 있는 작은, 하지만 보 이지 않게 큰 저항으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안경사건이 아닐 수 없 다.
소급해 오르면 안경저항은 이것이 처음은 아니다. 1891년 새로 부임 해온 일본 오이시 공사가 고종을 알현하는데 무엄하게도 안경을 쓴 채 대전에 들려 했다. 윗사람 앞에 안경을 쓰지 못하는 것은 법도였기에 당시 궁정통역관이요 후에 한말의 마타하리라는 배정자의 남편이 되는 현영운으로 하여금 안경을 벗고 대전에 들 것을 종용했지만 막무가내였 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조정에서는 일본정부에다 나라를 얕보고 저지른 임금에 대한 불경으로 공식 항의를 하고 안경을 벗기지 못했던 현영운 만을 유배시켰었다. 안경과 지체에 대한 인식은 삼엄하기 그지없었다. 영국의 할머니 탐험가 이사벨라 버드 여사가 한국에 와 고종과 당시 왕 세자인 순종을 뵙고 사진을 찍고 있는데 '세자는 건강에 결함이 있어 보이며 강도의 근시안으로 몸을 잘 못가눌 지경인데도 예법상 상감 앞 에서 안경을 써서 안된다 하니 보기에 딱하기 이를 데 없었다' 했다.헌 종때 일이다. 임금의 외숙이 안질이 나 안경을 쓰고 궐안을 오가는 것 을 임금이 알고 둘레에 있는 근신들에게 뇌까렸다. '외숙의 목이라고 칼이 들지 않을꼬.' 이 말을 전해들은 외숙은 침식을 잊고 고민하다가 끝내 자결하고 말았던 것이다. 임금앞에서만 안경을 끼어서는 안되는 것이 아니라 임금이 계신 동일공간에서도 불손이 되는 안경이었다.
조정이 청나라의 실권자 이홍장에게 청하여 나라를 개혁할 서양인 하나를 천거받은 것이 독일인 묄렌도르프다. 안경 없이는 걷지도 못하 는 지독한 근시안이었다. 한국을 떠나기 위해 작별인사차 찾아가자 이 홍장이 물었다. 조선임금 앞에 가서 안경을 벗고 무릎꿇어 큰절을 할 수 있겠는가고--. 그가 임금을 처음 뵈올 때 그에게 주어진 협판(차관) 벼슬의 관복을 맞추어 입고 안경을 벗은 채 주춤거리며 어전에 나아가 머리를 바닥에 조아리는 고두배를 올렸다. 그리고 며칠 전부터 라틴어 활자로 발음을 적어 외워두었던 다음과 같은 인사말을 더듬거리며 외웠 다.
'신이 귀국에 와 불러보시니 감개하여 갈력진심 하오겠사오니 군주 께서도 강신을 신임하오시기 바랍니다.'
이에 호감을 가진 고종은 안경을 쓰라 하명하고 내시더러 부축하라 시키고 있다. 잊을 수 없는 안경사건으로 정계가 시끌벅적한 적이 또 한번 있었다. 미국 망명에서 독립운동을 위해 환국한 서재필 박사는 러 시아 공사관에 파천해 있는 고종황제를 찾아가 뵈었다. 서재필 자서전 에 그 당시 상황이 이렇게 적혀 있다. 황제는 서재필을 보더니 대뜸 '어떻게 해야 좋아?' 하시기에 서슴지 않고 '대궐로 돌아가십시오. 한 국은 폐하의 땅이요 한국인민도 폐하의 인민입니다. 폐하께서 대궐을 버린다는 것은 그 땅과 그 인민을 버리는 것입니다. 한 나라 임금으로 서 대궐에 계시지 않고 남의 나라 공사관에 계시다면 국체가 손상될 뿐 아니라 남의 나라들의 비웃음거리가 됩니다' 했다.
이때 황제는 '글쎄, 그렇지만 무서워 어디 갈 수 있어야지' 했다 한 다. 이때 곁에 서 있던 친로파의 거두요 법부대신이던 이범진이 황제에 게 말했다. '저놈은 역적이올시다. 이처럼 위험할 때 폐하께서 대궐로 돌아가시라는 말을 어떻게 할수 있습니까' 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친 로파는 서재필을 매장코자 모략을 해댔다. 황제를 배알할 때 서재필이 안경을 벗지 않고 배알했음이 역신의 제1조요, 미국 시민권을 가진 것 을 기화로 황제폐하께 스스로를 외신이라 일컬었다는 것이 역신의 제2 조라 했다.
서재필은 이 정치문제를 야기시킨 안경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고 말했으며 그의 망명 100주년을 기념하여 그의 유품전시회가 독립기념관 에서 있었는데 그때 바로 그 문제의 안경이 전시되어 안경에 얽힌 한국 의 풍운을 새삼스럽게 했다. 10여년전 임진왜란 직전에 일본에 통신사 로 갔던 선조때 학자 김성일의 후손집에서 김성일이 쓴것으로 전해진 안경이 발견되었는데 그것이 사실이라면 한국에서 발견된 최초의 안경 이 될 것이다. 왜란 전후의 사정을 적은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보면 임진왜란의 강화를 위해 조선에 온 명나라 장수 심유경과 왜승 현소가 둘다 늙었는데 작은 글씨를 볼 때마다 안경을 끼고 읽는 것을 신기한 일로 적고 있다. 이것이 안경에 대한 최초의 기록임을 미루어 볼 때 김 성일이 안경을 구입할 수 있었음직 하다. 그후 제주도 정의현감으로 있 던 이종덕이 풍랑에 쓸려 일본땅 나가사키까지 표류, 그 곳에서 서양사 람이 사는 아란타관을 구경했는데 안경끼고 있는 것이'마치 게(해)눈깔 이나 벌의 눈두덩만 같았다'고 적고 있다. 이 게눈깔을 쓴 문헌상 최초 의 한국인은 숙종때 명상으로 장희빈 사건으로 여러 차례 유배당했던 남구만이고-. '정조실록' 23년(1799) 기록에 보면 임금님의 시력이 나빠져 책을 읽 을 때마다 안경을 끼었다하고 우리나라에 안경이 들어온 것은 그로부터 200년이 되었다 했으니 한국 안경의 문헌상 시초는 1600년 전후가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순조 연간인 1820년께에는 안경가게가 있어 30여가지 의 각기 다른 안경을 만들어 팔았던 것이다.
중국문헌'아유만록'에 보면 1300년 전후하여 명나라 사람들이 서역 상 인들로부터 좋은 말 한필값을 주고 안경을 사들였다 하고 그 흘러든 뿌 리를 서양에다 찾고 있는데 서양에서는 동양에다 안경의 뿌리를 찾고 있다. 1250년에 몽골지방을 여행했던 프란체스코 수도사 윌리튀브크가 몽골 사람들이 안경을 끼고 있는 것을 보고 와서 동료 수도사인 베이컨 에게 말했고 이 베이컨이 1268년에 안경을 만든 것이 유럽에 있어 안경 의 기원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 무렵 몽골은 고려와 인적-물적 교 류가 왕성하던 때인지라 이미 안경이 그때 들어와 있었을지도 모를 일 이다. 다만 안경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아 문헌상 나타나는 것이 늦어 졌을 수도 있는 것이다. 교황 레오10세가 라파엘로에게 자신의 초상화 를 그리게 했을 때 눈이 나쁘지도 않았으면서 일부러 안경을 끼었다 하 리만큼 서양에서 안경은 위엄의 상징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어른이나 상 전 앞에서 끼어서는 윤상을 파괴하는 불손의 상징으로 기피해왔던 것이 다.더욱이 조선조에 들어 신체발부는 수지부모한 것으로 훼손해서도 또 덧붙여서도 안된다는 삼엄한 유교덕목에 사로잡히면서 안경은 반도덕적 요물로 취급받아온 것이다. 이렇게 윗사람 앞에서 쓰지 못했던 안경인 지라 아랫사람 앞에서는 신분과시용으로 즐겨 썼다. 임오군란후 수신사 로 일본에 갔던 김기수는 눈도 나쁘지 않았으면서 왜인들을 내려보는 효과를 위해 안경을 끼고 행진했다. 국내에서도 고관들은 말이나 가마 타고 행차할 때 안경을 곧잘 썼는데 신분 과시용이었으며, 안경을 쓰지 않고 들고 다니는 것이 유한계급인 한량의 멋 가운데 하나였던 시절도 있었다. 기생 가운데 궁중출신으로 격이 높음을 과시할 필요가 있던 약 방기생도 안경을 끼거나 손에 들고 다니는 것으로 그 격을 과시했다.일 제하에 소작인을 착취하는 지주의 대명사가 '금테안경'인 것도 눈이 나 쁜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안경의 신분과시 사례였다 할 것이다. 1999.8.19 이규태
16. 임금님 허락얻어 `두번째 본처' 행세 .
외부와 법부에서 국장을 두루 역임한 조중응은 그 정치적 후견인 김홍집 내각이 무너지자 일본으로 망명을 했다. 먹고 살길을 찾아 동경외국어학교 의 한국말 선생으로 취직하여 호구를 하면서 일본인 과부 하나를 알게 됐다. 미쓰오카 다케코. 한때 모 잡지사 사장의 아내로 문필계에 얼굴을 나타내곤 하다가 남편과 사별하고 공방을 지키고 있었다. 그 틈에 조중응이 접근, 동 서하기에 이르렀다. 을사강제조약이 맺어지고 통감부가 들어서자 망명해있 던 친일 정객들이 망명에서 풀리고 때를 놓칠세라 앞다투어 들어오기 시작 했다. 조중응도 귀국하여 농상공부대신으로 발탁되었고, 동거한 남편이 일 국의 대신이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미쓰오카는 주변을 정리하고 한국을 향해 떠났다.
조중응은 그녀의 내한을 원치 않았다. 왜냐하면 망명 10여년동안의 공방 을 지켜온 그의 조강지처가 엄연히 살아 동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작정 집을 찾아들어 짐을 풀고 들어앉자 조중응은 진퇴양난이 된 것이다. 좋게 봐서 지모가 있고 나쁘게 봐서 표독한 미쓰오카가 첩으로서 동거할수 없다 고 우기자 조중응은 순종황제를 찾아가 고충을 호소하였다. 왜냐하면 임금 이 허락하면 본처를 둘 둘수있는 관례가 있고 그 혜택을 받고 싶어서였다.
과거 사례를 조사시켜 본부인을 우부인, 미쓰오카를 좌부인으로 한다는 소칙을 내려 일부이처라는 풍속외적 선례를 따른 것이다. 물론 이토(이등박 문)의 보이지않는 후광이 작용했던 것이며, 이토는 비단 조중응의 경우만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앞으로 허다하게 있을수 있는 한일간의 변칙 남녀관계의 관례를 만들어 놓으려는 심산에서였다.
이 조중응의 좌부인인 일본여인은 그후 윤 황후의 일본말 교사로 궁을 무상출입했으며, 남편의 권세를 빙자하여 안하무인으로 놀았기에 많은 사람 으로부터 지탄을 받자, 이토가 이를 눈치채고 궁중출입을 금지시키기까지 했다. 조중응은 고종황제 서거후 몇달후에 죽었고 그의 일본인 좌부인은 유 언을 핑계대고 조중응의 유산 전부를 자신의 명의로 옮겨갖고 동경으로 떠 나버렸다. 이에 유족들이 곤궁에서 헤어나지 못한다는 소문을 들은 조선 총 독 사이토는 조중응의 아들 조대호를 총독부 촉탁관리로 특채하여 먹고살게 했다 한다. 이것이 그후 일본여자와 결혼하는 것을 기피하는 요인이 됐음은 물론이다.
이미 그 이전에 좌부인을 칙령으로 허락한 일이 있다. '고종실록' 광무 3년 5월 기록에 보면 조대비의 친정조카요 개국 외교를 도맡았던 조영하의 아들이요 군부협판과 영친왕 시종무관을 역임한 육군중장 조동윤이 참판벼 슬의 홍만식의 딸과 첫 결혼을 했다. 나라를 반신불수로 만든 을사강제조약 때 그 분통을 못이겨 순절한 바로 그분의 딸이다. 신부가 나이 겨우 열두살 때 3일천하의 갑신정변이 일어났고, 정변을 주도한 홍영식이 잡힌 몸이 되 어 역적으로 처형당했다. 그의 아버지 영의정인 홍순목과 그의 형이요 신부 의 아버지인 홍만식이 음독 자살을 시도했으나 홍만식은 미수로 그쳐 투옥 을 당하고 모든 벼슬을 몰수당한다. 역적 문중의 딸을 며느리로 들인다는 것은 바로 역적과 연루되는 것이기에 칠거지악에 해당되어 이혼사유가 된다. 그리하여 홍만식의 딸은 12세에 과부가 되어 친정에 돌아가야만 했다. 그 사이에 조동윤은 첨정벼슬의 김상준의 딸과 재혼하여 13년을 살아왔는데 홍 만식이 갑오개혁으로 복권이 되어 역적의 오명을 벗은 것이다. 소박맞힐 이 유가 사라진 것이다.
이에 조씨 가문에서는 문중회의를 열고 수절중인 홍씨녀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조동윤의 형인 사직서 제조 조동만으로 하여금 임금에게 아뢰어 두 아 내를 적처로 하는 칙령을 내려줄 것을 소청했던 것이다. 이에 임금은 옛 날에 첩 아닌 적처를 둘 두는 고사가 있는지 여부를 알아보도록 시켰다. 이 에 중국의 사례와 한국의 사례를 살펴 아뢰었다. 춘추시대의 주나라 장수 조쇠가 처음 숙괴와 결혼했다가 병때문에 조희와 다시 결혼했는데, 마음이 너그러운 조희가 숙괴와 더불어 살기를 바랐기에 임금에게 아뢰어 법외의 양처를 허락받았었다. 숙종때 정승이요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했던 여성제 는 우의정 강석기의 손녀와 결혼했었다. 바로 병자호란으로 심양에 볼모 가 고생했던 소현세자의 세자빈(민회빈) 강씨의 조카딸이기도 한 것이다. 한데 강씨가 저주를 하고 임금 잡수시는 밥에 독약을 넣었다는 무고를 받고 별당 에 유폐당한 끝에 사사당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강씨 집안이 역적으로 몰려 관작을 박탈당하고 여성제의 아내 강씨도 역적집안 규수라는 이유로 소박을 맞아야 했다. 그런 뒤 윤씨와 재혼해 사는데 숙종때 복권이 되면서 이 강씨 를 불러들여 두명의 정처를 둔 사실을 참작하여 조동윤에게 좌부인을 허락 함이 마땅하다고 아뢰었고, 임금은 이를 허락하고 있다.
고려말에는 일부이처제가 공인되어 있었는데, 그 호칭은 제2부인을 서처 또는 차처로 불렀고, 첫부인을 경처 둘째부인을 외처라 부르기도 했다.고려 말에 이성계가 두명의 정처랄 신의왕후와 신덕왕후를 둔것도 그것이다. 이 두번째 정처에 좌부인이란 명칭이 붙은것은 중국에서 전래된것이 아닌가 싶 다. '사기' 대완전에 보면 한나라때 오손국의 임금이 말 1000필을 보내며 한족의 여인 하나를 구하자, 종실인 강도옹주를 보내어 오손왕 곤막의 왕비 로 삼았는데, 역시 흉노가 또한 여자를 보내어 왕비를 삼았기로 한나라 왕 비를 우부인, 흉노 왕비를 좌부인으로 불렀었다. 이것이 본이 되어 한나라 에서도 첩 아닌 두번째 정처를 좌부인으로 불렀고, 그것이 한국에 전래된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기록에 처음으로 좌부인이 나타난것은 북청이씨 족보다. 송나 라에서 고려에 병력을 요구하자 조정에서는 함경도 북녘 변방에 강제 모병 을 했다. 이때 여진족으로써 귀화한 북청이씨 문중에 70노부를 대신한 딸이 남장을 하고 모병에 응모했다. 송나라 무목장군 휘하에서 3년간 종군했는데 끝무렵에 여자임이 들통이 났고, 무목장군이 그 미모와 기개에 반해 아내로 삼았다. 본부인은 우부인으로, 이 북청이씨 여인을 좌부인으로 삼아 아들딸 낳고 잘 살았다 한다. 그후 그 악명높은 진회가 무목장군을 죽이고 가문을 멸살하자 좌부인은 한 아이만을 둘러업고 고향인 함경도 청해(북청)에 와서 살았으며, 그 후손이 이태조의 건국공신인 귀화 여진족 이지란이다.
마음에 안맞으면 친 삼촌도 현장에서 죽여버리는 포악으로 유명한 홍윤 성도 한 전주 소녀앞에서는 허약했다. 순문사로 전주에 갔을때 행차를 구경 하는 미모의 이 소녀를 보고 혹하여 수청들 것을 명했다. 이 소녀는 홍윤성 이 밤중에 수작을 걸어오자 품고간 단도를 빼들고 사족의 딸로써 납채와 전 안합근의 예를 갖춘 다음에야 합방하겠다고 우겼다. 이에 정식 절차를 거쳐 남대문밖에다 살림을 차렸었다. 세조가 집권후에 쿠데타 공신인 이 남대문 밖의 홍의 집에 들렀을 때 홍의 후처가 주안상을 들고 들어가서 술을 따르 자 임금이 수란 호칭을 썼다. 성종때 홍윤성의 본처와 이 후처가 싸우자 '승정원일기'를 뒤져 세조가 수란 호칭을 쓴 사실을 확인하고 좌부인 호칭 을 내리고 있다.
조중응의 좌부인 이후 본국에 본처를 두고 돈벌이 나온 일본 홀아비들에 게 한국부인을 얻는데 좋은 명분이 되어 좌부인이 남용되었던 것이다. 한강 에 철교공사가 진행되었을 무렵 기무라라는 십장이 인근 노나루의 젊은 무 당을 데리고 살림을 차리고 살고 있었다. 노량진에는 무당들의 집단촌이 있 고 무당들의 이권과 풍기를 관장하는 무당조합이랄 풍류방이 있었다. 이 풍 류방에서 이 젊은 무당을 정식 아내로 받아들일 것을 왜십장에게 요구했다. 이 정식 결혼권고를 본국에 본처가 있음을 들어 반대하자 노나루 무당들이 파워를 행사했다. 50여명의 무당이 이 왜십장이 관장하는 공사현장에 가 연 좌데모를 한 것이다. 만약 이 여인들에 손을 댔다간 민중폭동이 야기될 것 을 미리 알아차린 총독부에서는 사안의 중재에 나서, 이 무당을 좌부인으로 받아들이기로 각서를 받고 닷새동안의 연좌데모를 푼 것이다.
외각씨(좌부인)는 비단 일본인이나 청국인의 현지처뿐만 아니라 1 900년 대 초의 상류사회에서도 첩을 미화하는 호칭으로 유행했었다. 이를테면 초 기 총독부의 수산국장인 정진홍도 좌부인을 두고 연회에 대동하곤 했었다.
여성의 인권의식이 눈뜨기 시작하고 첩제도에 대한 인식의 변화에서 과 도적 현상으로 이 좌부인의 사회적 위상을 잡아봄직 한 것이다. 조선일보 1999 8.5
17. 한민족 대단결 3.1운동---민족운동 분수령
역사상 우리 민족의 마음을 가장 폭넓게 하나로 모은 것이 3․1운동이 다.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와 인도 등 민족 독립의 외풍을 받 고, 고종 황제 인산으로 울분이 북받치는 내풍이 어우러졌다. 민족의 정 체성이 여러 측면에서 외침 앞에 드러나 있는 작금이다. 3․1운동은 지 나갔지만 3․1정신은 그래서 새삼스러워지는 것이다. (이규태. 조선일보 논설고문).
1919년 3월18일 경남 진주 읍내에서는 '조선 독립'을 외치는 대규모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장날을 맞아 진주읍내 세 곳에서 동시에 벌어진 만세 시위에는 학생과 청년을 중심으로 상인-노동자 심지어 기생과 걸인 까지 참여했다. 그중 광림학교 학생들은 악대를 앞세우고 애국가를 부르 며 분위기를 북돋았다.
시위를 주도한 사람들은 비밀결사 조선국권회복단의 김재화와 이강우, 의병장 유종환 휘하에서 활동했던 박진환, 그리고 훗날 이 지역 사회운 동의 주역이 되는 강달영-강상호 등이었다. 고종 인산에 참여하기 위해 서울에 왔다 3월 1일과 5일의 만세를 목격한 이들은 진주로 내려와 종교- 사회단체,학교와 연결해 시위를 준비했던 것이다.
일제 군경의 강제 진압에도 불구하고 만세 시위는 21일까지 나흘간 계속됐고 매일 4,000~1만명이 참여했다. 또 인접 농민들도 시위에 합류 하기 위해 봉기했고, 일제가 무력 차단해 읍내로 들어오지는 못했지만 남강건너편에서 만세 함성으로 호응했다. 진주의 만세 시위는 4월 들어 서도 2-8-18일 세차례 더 일어났고 이는 다른 지역에도 영향을 주어 사 천과 삼천포의 시위 주도자들이 진주에 와서 독립선언서를 구해 갔다.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 시위가 1000리나 떨어진 진주까지 파급되는데 보름밖에 걸리지 않은 것은 당시 교통-통신시설을 고려하면 엄청나게 빠 른속도였다. 만세 시위는 이렇게 해서 한 달이 채 안돼 전국 방방곡곡으 로퍼져 나갔으며 나아가 서-북간도, 연해주, 미주지역 등 국외까지 전파 됐던 것이다.
3․1운동은 우리나라 근대 민족운동의 '분수령'이었다. 이전 시기 개 화운동과 민중운동 등 방향을 달리했던 세력들이 하나로 뭉쳤으며 이후 모든 운동이 여기에서 갈라져 나갔다. 운동이 소강 상태로 접어드는 4월 하순까지 팔도에서 일어난 만세 시위는 모두 1,214건, 참가자는 약 110 만명에 이르렀다. 시위대 중 7,500여명이 사망했고 1만6,000명이 다쳤으 며 4만7,000명이 검거됐다. 이런 전민족적 독립 의지를 바탕으로 4월10 일 중국 상해에서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입헌공화제를 채택한 '대한 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됐다.
그러나 3․1운동의 진정한 의의는 이런 외형적 성과보다도 사람들 가 슴에 남긴 깊은 흔적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시기를 살았던 생각있는 사 람 중 3․1운동을 외면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수많은 사람이 시위 대 열에 가담함으로써 민족에 눈떴고 인생 행로가 바뀌었다. 당초 민족대표 추대를 거절했던 구한말 대신 김윤식마저 고민 끝에 일본에 독립요구서 를 제출하고 일제로부터 받은 작위를 반납했다.
조선일보 1999.2.24 이선민기자
17. 중앙아 고려인과 재일동포
유랑시대... 국경 초월한 코리안 네트워크를
작년 12월 중순, NHK교육TV 특집 「유전-중앙아시아 조선속의 20세기」라는 3회 연속 프로그램에 논평자로 출연할 기회가 있었다.
2차대전 중 스탈린에 의해 제2의 고향 연해주에서 수천㎞ 떨어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한 조선족 100년의 역사는, 구소련붕괴 후 다시 연해주로 신천지를 찾아 떠나려는 3세대 가족의 초상을 보여주며 끝을 맺었다. 비극적인 역사의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는 여행. 바로 「유전」이야말로 그들 「고려인」의 20세기 그것이었다.
조선말기의 기근과 가혹한 일본의 식민통치, 독․소전과 스탈린의 숙청 바람, 북한에 대한 지원과 6.25, 소련 북한의 관계악화와 흐르시쵸프시대, 그리고 소련의 붕괴와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독립『. 유랑민은 이향을 고향으로 삼은 것도 잠시뿐, 유전을 거듭하면서 이제 다시 이동하기 시작했다. 목표는 비극이 시작된 땅이다. 하지만 이번엔 강제가 아닌 자유의지로 그들은 지평선을 넘어 떠나기를 결심했다. 연해주에 안식의 장소가 기약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왜 그들은 이동하는가, 프로그램을 보며 줄곧 뇌리를 떠나지 않았던 의문점은 그것이었다. 경제적인 이유만은 아닐 것이다. 그들이 자유로와지고 자신들의 기억을 되찾으며, 남한과 북한, 러시아,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이라는 국가의 이야기가 아닌, 가족의, 그리고 「고려인」의 파묻혀진 이야기를 발견한 것이 그들로 하여금 제2의 고향, 연해주로 내몰고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나는 하게 되었다.
10년전이었다라면 일반 시청자들은 이 프로를 단지 비운의 민족과 가족의 기억으로만 받아들였을지 모른다. 보고있는 자신의 일상은 반석위에 안정된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유전」가운데 이동하는 조선족의 모습에서 무언가 혼의 깊은 곳으로부터 솟아오르는 공감을 맛보았던 시청자가 많았던 것은 아닌지.
거기에는 풍요로움의 정도가 다르겠지만, 내 말로 치면, 「스톡(stock) 환상」이 벗겨져 「유전」을 할 수 밖에 없게 돼 가는 사람들의 자유와 불안이 교차되고 있는 듯이 생각되었다. 토지와 공장, 숙련노동력의 집적과 국가 등, 「스톡」으로서의 아이텐티티와 안정의 기반이었던 것이 융해되어 유동화가 불가피해지고 있는 것이다.
20세기 끝에서 우리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목적지 없는 미래로의 자유이며 불확실성에 다름 아니다. 초점을 바꿔서 재일한국, 조선인의 경우는 어떤가. 해방후 반세기의 역사는, 한마디로 하면 일본의 고도성장이 만들어낸 방대한 스톡의 주변부에서, 그 일부를 얻어내면서 일본사회에 한없이 동화되어 가는 역사였다. 그것은 일본사회의 「2류 혹은 3류시민」으로서 「스톡 환상」의 일부를 공유하며, 종속적인 위치에서 가능한 한 그 「스톡」을 부풀려 가는 역사였던 것이다. 그리고는 어느 사이엔가 일본인 이상으로 일본경제의 「스톡현상」에 달라 붙으려 해왔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스톡을 중심으로 하는 일본의 경제와 사회속에서는, 재일한국인은 결코 중심적이고 각광을 받는 존재가 된 적이 없었다. 스톡 중심의 고도로 획일화된 일본사회는, 이질적인 것에 대해 결코 관용적이지 않았고, 또한 이질적인 소수자의 에네르기나 잠재력을 다양한 문화의 창조에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채널을 마련해 왔다고도 하기 어렵다.
그러나 지금은 사태가 크게 변하고 있다. 이 「잃어버린 10년」과 함께 「스톡환상」은 맥없이 무너지고, 사회의 분극화가 진행됨과 동시에 이른바 글로벌화라고 하는 끝없는 「플로우(flow)화현상」이 일본사회를 뒤흔들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자산과 소득, 직업위신과 교육 등, 계층적 양극화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다. 또한 방대한 토지와 자본, 안정된 노동력과 기술을 투하함으로써 고도의 생산력을 창출하는 경제시스템은, 생산성과 효율성의 면에서라도 후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은 「스톡환상」의 종말에 다름 아니다.
그 결과는 무엇일까. 지금까지 스톡에 달라 붙고 살아온 사람들이 거기서 떨어져 나가게 되면서 「유전」을 하는 것 이외에 별 도리가 없게 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지난날 「유전」이라는 운명에 놓여진 사람들은 재일한국, 조선인이나 외국인 노동자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젊은층이 「정규」 노동력으로서의 「스톡」으로 인정 받지 못하고, 「프리터」(free arbeiter의 일본식 합성어)라는 이름의 자유로운 「일용노동자」가 되어 쌓여지고 있다. 아니, 쌓여질 것도 없이, 갈 곳을 잃어 역이나 길거리, 공원을 술렁이는 젊은이들이 늘어나는 광경도 쉽게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재일한국, 조선인에 대해 이야기 하자면, 「스톡사회」속에서 종속적이기는 하나 이제 겨우 안정된 지위를 확보할 수 있게 된 그때, 이번에는 그것이 붕괴하는 현실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즉, 재일한국, 조선인이 평균적인 「일본인」에 가깝게 다가갔을 때, 이번에 「일본인」의 「재일화」가 시작되려 하는 것이다. 이 기묘한 역사의 패러독스속에, 도대체 어떠한 아이덴티티와 삶의 방식이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20세기가 막을 내리는 지금에 와서 확실해진 것은, 재일한국, 조선인에게 있어 평균적인 보통의 중산계급으로서의 「일본인」이 되는 것이 이제는 이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유전이라는 이름의 「플로우화현상」이 세계 각지에서 「스톡환상」을 부수어 버리고 있다. 「유전」이 재일한국, 조선인의 역사의 시작이였다면, 재일한국, 조선인은 과감히 그 「유전」을 살아가며, 이른바 「플로우경제」와 그 네트워크 속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요구받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전에 나는 중앙아시아로부터 중국, 동북부, 한반도, 그리고 일본에 산재하는 한국계 사람들의 연결을 「코리안․네트워크」라고 부른 바 있다.
냉전시대에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할것 없이 자신들의 호스트사회에서 그 스톡을 획득하는 것이 살아가는 가치를 이루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사람들은 국가단위의 발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또한 냉전의 대립은 국경을 뛰어넘은 한국계 사람들의 연결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지금 냉전의 의미는 사실상 없어지고, 민족적인 아이덴티티가 의식됨과 동시에 국경을 초월한 수평적인 관계에 눈을 뜨게 되었다. 재일한국, 조선인의 새로운 아이덴티티는, 그러한 코리안․네트워크 안에서 자신들의 살아가는 가능성을 보다 확대하는 것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유전」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자신들의 「유전」의 역사야말로 새로운 세기의 「프론트」라는 것을 자각하며 사는 아이덴티티이다. 이런 의미에서 중앙아시아 조선족「유전」의 20세기는 결코 남의 일만은 아니다. 조선일보 2000.1.31 동경대 교수
18. "조선왕가 외척이 권력 좌우"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 '친인척'이란 말은 묘한 느낌을 달고 다니기 시작했다. 단순한 친족관계 의미를 넘어서는 것 같은 정치적 사회적 커넥션의 냄새. 권력자의 친인척일 경우 이 말의 복합적 의미는 더욱 심해진다. 이는 현대 한국의 돌출 현상일까, 아니면 유구한 역사적 연원을 가진 것일까.
국민대 지두환(46․한국사)교수는 조선 조의 절대권력인 역대 왕들의 친인척 관계를 추적하는 이색 연구에 몰두해 있다.
시조 태조서부터 시작해 14대 선조 임금까지의 친인척 관계 집필을 끝낸 그가 최근 '태조대왕과 친인척' '정종대왕과 친인척'(역사문화간)을 출간, 일련의 '친인척 시리즈' 출간 작업의 첫 테이프를 끊었다.
"조선 역대 왕들의 정치사를 친인척으로 살펴보니 그 전모가 드러나고 역동성을 가지게 되더군요. 친가보다 외가나 외척이 정권다툼이나 치세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음을 이번에 확인했습니다."
지교수에 따르면 태조의 5번째 아들 방원(태종)이 부상한 것은 장인이자 대학자인 민제의 덕분이었다. 태종은 또 장남인 양녕대군을 두문동으로 들어간 학자인 전오륜의 손녀와 결혼시켜 '두문동 인맥'을 형성, 나중에 정도전 일파와 일전을 겨룰 때 한몫을 하게 했다. 수양대군(세조)과 안평대군의 갈등도 처가인 파평 윤씨 대 영일 정씨 간의 대립으로 이해해야 나중 을사사화로 이어지는 맥락이 이해된다는 주장이다.
"결국 사돈을 개혁적인 세력과 맺느냐, 훈구적인 세력과 맺느냐에 따라 권력도 부침하고, 문중의 흥망도 결정되더군요."
태조와 정종에 이은 나머지 14권은 제본을 끝낸 상태. 지교수는 이것을 쓰기위해 작년 9월부터 정사인 조선왕조실록, 왕실 족보인 선원록과 선원계보, 그밖에 열성왕비세보, 만성대동보, 국조보감 등 자료를 뒤졌다. 후궁이 많았던 왕은 성종으로 부인 12명에 16남12녀이고, 세종은 부인6명에 18남4녀였다.
"TV드라마의 사극은 왕비와 후궁을 중심으로 궁중비사나 암투만을 그릴 뿐, 그 이면에 있는 친족과 친족의 대립이라는 큰 것을 놓치고 있습니다."
조선조에서 세력을 유지했던 권문세가로 파평 윤씨, 여흥 민씨, 청송 심씨, 안동 김씨, 안동 권씨, 광산 김씨 등을 들었다.
서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지 교수가 얼핏보면 재미없는 왕실 계보도를 정리하는 진짜 이유는 한국사의 DB화에 있다. 70년대 후반 스승인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이 역대 왕릉의 비문을 조사했던 것에 뒤이어 왕실 친인척까지 연구 범위를 넓히는 작업이다. 이번에 작성하는 역대 왕들의 친인척 계보도가 줄기라면, 여기에 각종 자료를 찾아 가지와 잎을 달 생각이다. 앞으로 전국 2000개로 추산되는 신도비(정2품이상의 비석)를 비롯해 문중의 족보, 유명인물의 비문, 문집속의 행장 등을 조사할 계획. 계보도라는 파일에 차곡차곡 자료가 입력되면 마지막에 CD롬이 나온다.
"조선왕조실록의 DB화로 이런 작업이 가능해졌습니다. 그러나 실록만으로는 불충분합니다. 기록으로 남아있는 모든 자료들을 모아야지요. 일차적으로는 비문이고요."
지 교수는 이것을 위해 제자들과 출판사(역사문화)를 차려 재원을 조달하고 있다. 완성까지 잡고 있는 기간은 20년. 때마침 국민대 교수들 공동의 '금석문 DB화 프로젝트'가 BK 21사업에 채택되어 힘을 받고있다. 지 교수는 내년 안식년까지 이'역사의 큰집'을 짓는 기초작업을 마무리할 생각이다.
조선일보 1999.12/13(월) 이준호기자
19. 박춘금-민원식 이야기
이완용 송병준 등이 나라를 팔아넘긴 일차 친일파라면 내선일체를 주장, 일본에 동화시키려는 이차 친일파가 생겨났다. 그 대표적 인물이 정치깡패 박춘금이다. 그는 1932년과 1937년 도쿄에서 두 차례 일본 국회라 할 중의원 의원으로 당선된 자로 관동대지진 후 조선 노동자들을 모아 상애회라는 것을 조직해 내선일체를 표방, 일본에 아부하고 그 미끼로 착취를 일삼아왔다. 그리고 폭력을 필요로 하는 분쟁에 단골로 개입, 폭력의 대가로 돈을 뜯기를 일삼았다.
그러했기로 당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그의 잦은 공격대상이 돼있었다. 1926년 8월 조선일보 사장 앞으로 다음과같은 상애회의 협박장이 날라들었다. '귀사는 매일같이 상애회를 폭력단이니 공인사기단이니 조선인 노동자의 고혈을 착취하는 불량단체라고 악선전을 하니, 좌시할 수 없어 사죄문을 게재할 것을 요구하며, 이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최후수단으로 상호 생사를 쟁하기로 간부회의에서 결정하였다' 하고 '조선일보 박멸 선언문'을 첨부하였다. 이 협박장을 받은 조선일보는 '정체노현에 전율하는 /단말마의 상애회 / 소위 간부회의에 /조선 동아 양사에 박멸 협박장'하는 표제로 보도하고 '소위 상애회의 정체가 이와같은 것이라는 것을 세상에 알릴 필요가 있음을 생각한다'고 폭력에 정면대결 했었다.
마침 전라남도 하의도의 악덕 지주 문재철이 소작쟁의가 일어나자 소작인을 폭력으로 제압하고자 도쿄에서 박춘금을 불러들였다. 권총을 들이대며 무고한 소작인을 협박하고 다닌다는 조선일보 목포지국의 발신기사가 크게 보도되길 한두번이 아니었다. 이에 앙심을 품은 박춘금이 프록코트 차림으로 다무라라는 일본 경부 출신 비서를 대동하고 조선일보를 찾아들었다.
한기악 당시 편집국장 앞에 가 플록코트 포켓에서 문제의 신문을 꺼내 펴놓고 거친 육두문자로 삿대질하며 항의했다. 그리고 똑같은 사이즈로 정정기사를 내라는 것이었다. 박춘금이 일본말로 고함을 치면 한기악 국장은 한국말로 요구를 들어줄 수 없으니 고소를 하라고 막무가내였다. 빠져나갈 길이 없자 권총을 꺼내어 책상앞에 놓았다. 대포를 갖다놓아도 취소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장소를 옮기자고 해 사장실로 데리고 갔다. 왜냐하면 마감시간이 닥치는데 기자들이 웅성거려 제작에 지장을 주기 때문이었다. 신석우 사장이 외출중인 사장실에 들어가 문을 안에서 걸어잠그는 소리가 들렸다. 권총을 들고 들어갔으니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를 일이었다. 당시 사회부장이던 유광열, 그리고 기자였던 '상록수' 작가 심훈, 시인인 김동환, 그리고 김을한을 위시하여 역도로 힘께나 쓴다는 윤전부장 등 쇠파이프로 무장한 일단이 사장실 문전에 늘어서 방안에서 무슨 일이 있는가 엿듣고 있었다. 권총 장탄하는 소리가 들려 열쇠구멍으로 들여다보았더니 한기악 국장은 태연자약하게 권총총구 앞에 서있었다. 너무 늠름하고 태연한 한 국장의 태도에 박춘금이 질려 개꼬리를 내리고 신문사를 빠져나갔던 것이다.
그런 일이 있은지 5년전에도 동아일보를 찾아가 송진우 사장을 협박한 적이 있었다. 박춘금이 조선에 있는 친일단체를 연합한 각파 유지연맹의 이름으로 총독정치를 찬양하는 선언을 하자, 동아일보는 이이제이 곧 오랑캐로 하여금 오랑캐를 제압하려는 야합이라고 비난했다. 이에 앙심을 품은 박춘금 일행은 송진우 사장과 김성수 취체역을 요정인 식도원으로 유인하여 권총을 들이대며 배일사상을 고취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라고 강요하고, 때마침 해외동포 위문금을 모집하고 있음을 기화로 모금한 돈 10만원을 해외동포 모임인 상애회에 내놓으라고 협박한 것이다. 거절하자 이틀간이나 감금했던 무법천지의 통뼈다.
그는 패전으로 치닫고 있던 1945년 2월에 필승체제 확립과 내선일체 촉진을 촉구하는 대화동맹을 결성하더니 6월달에는 대의에 순국한다 하여 대의당을 결성해 당수에 취임했다. 패전 후 순국하지 않고 살아남은 박춘금은 일본에 재단법인 일한문화협회를 만들어 한국유학생을 불러들이고 문화교류를 하다가 81세까지 명대로 다 살았다. 그의 고향인 경남 밀양에는 그의 광복후 업적만을 적은 송덕비가 서있다.
매국 친일파를 계승한 동화주의 친일파로 매국 공로자의 집합체인 중추원 부의장으로 있던 민원식을 들 수 있다. '조선이 일본의 영토가 되고 조선인이 일본천황의 신민이 된 이상 참정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 3․1운동 이듬해에 일본 제국의회에 탄원서를 낸 장본인이다. 선거법을 조선에 시행하여 일본 국회에 조선지역 대표를 선출해 보내자는 동화정책의 일환이다. 강압으로는 안된다는 대원칙하에 채택된 3․1운동 후의 조선통치 문화정책은 크게 셋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하나는 열등민족은 우세민족에 지배당하게 마련이란 대전제 아래, 조선 민족은 일본민족에 비해 열등하니 민족개량을 해야 한다는 민족자성을 유발한다는 정책이다. 이것을 도맡은 게 소설가 춘원 이광수로 이 정책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그의 민족개조론이다. '허황되고 공론만 즐겨 나태하고 충성심이 없으며 일에 즈음하여 용기가 없고 이기적이어서 사회봉사심과 단결력이 없고… '하는 저의가 있는 기술을 하고 있다. 둘째가 모든 측면에서의 실력 양성이다. 조선이 무턱대고 독립하려 말고 독립하지 않을 수 없는 경제적 실력을 갖추라는, 역시 한민족을 위한 것처럼 위장한 고수의 침략정책이다. 이 계몽을 맡은 것이 3․1선언문을 기초한 최남선이다. 셋째가 자치운동으로, 그 전초가 바로 민원식의 참정권 운동이다. 저의가 훤하게 드러나는 이 문화정책을 수행하는 일선의 총책임자가 당시 총독부 경무국장이던 마루야마였다. 그는 말했다. '이렇게 세 가지가 잘돼나가면 반드시 일선이 융화하여 일본의 통치밑에 조선의 진보를 도모하려는 사조가 발달해 나갈 것이다.'
민족진영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친일주의요 영원한 예속을 획책하는 동화주의라 해서 맹렬히 반대했고, 민원식은 우국 유학생 양근화에 의해 일본 호텔에서 암살 당한다. 민 황후가 시해당했을 때 8세였던 그는 동학혁명 때 민씨문벌 타도의 여세로 양친을 살해당하고 청나라 일본으로 떠돌다가 이토의 침략공작망에 걸려 소위 '이토의 어항'속에 보호를 받고있다가 통감부의 위생과장으로 귀국했다. 병탐 후에는 이천 고양 등지의 군수를 역임하다가 3․1운동이 일어나자 '일본은 나라나 임금이 바뀐적이 없는데 한국에서는 국호가 바뀌고 임금이 역성을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래서 도요토미가 임금이 돼도 한일합방이 돼도 이상할 게 없다'는 소위 신일본주의라는 대담한 발상과 주장을 했다.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처럼 프랑스가 식민정책을 쓰는 것 보다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처럼 영국이 자치정책을 쓰는 것이 성공적이라며 조선도 일본 통치하의 자치를 제창한 것이다.
일제 때 내선일체의 동화 친일파의 3대 저작은 일본작가에 사숙했던 김문집의 '신민의 서', 조선 공산당원으로 있다가 전향한 김두정의 '반공전선승리의 필연성', 경성제국대학 출신으로 민족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를 편력했던 현영섭의 '조선인의 진로'다. 현영섭은 '한국 장기에서 적의 패를 따면 죽는 것이나 같지만 일본 장기에서 적의 패를 따면 우리편에서 활용하듯이 일본은 이민족을 배격하는 것이 아니라 공생공사하려한다'고 전제하고, 소승적으로 조선적인 것 이를테면 조선어, 조선 의복, 조선 집, 조상숭배, 조선사 등을 지양 방기하고, 정신적으로 일본 감정에 물들지 않으면 안된다'고 그 저서에서 말한 얼빠진 사람이다. 특히 그는 조선말을 없애버려야 한다는 박멸론으로 기억되는 사람이다.'조선인은 조선말을 잊어버리지 않으면 안된다. 조선 사람이 일본말로 사물을 생각할 때만이 조선사람이 가장 행복해 있을 때다. 우리는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일본인이다. 따라서 학교에서 조선말 가르칠 필요는 추호도 없다. 일본이 조선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조선말을 영속시켜 조선적인 저급문화에서 못 헤어나게 하는 일일 것'이다 했다.
1938년 당시 미나미 조선총독은 민원 청취를 위하여 일곱명의 한국사람을 초청했는데, 그중에 현영섭이 끼여있었다. 이 자리에서 현영섭은 조선 사람이 완전하게 일본 사람이 되려면 종래 체험하지 않은 신도에 통하고 조선말 통용을 전폐하지 않으면 연목구어라고 말했다고 당시 '매일신보'가 보도했다. 어느 시대건 망종이 있게 마련이지만, 이 민족 동화를 부르짖어 영원히 예속되려 했던 눈먼 망종들을 역사의 부패창고에서 꺼내어 들춰본 것이다. 조선일보 1999. 12/09(목) 이규태
20. 백백교 이야기
황해도 신천 사는 한 젊은이 유곤용은 할아버지가 임종에서 한 말을 듣고 충격을 받는다. 「나는 약방을 해서 큰 돈을 벌었다. 그 돈을 모았으면 천석 추수는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한데 백백교를 믿는 바람에 오늘 이같은 파산지경을 당하고 말았다.」 그런지 2년후 백백교의 수렁에 깊이 빠진 아버지가 유군의 18세된 누이동생 유정전을 백백교 대원님의 시녀로 바친 것을 뒤늦게 알았다. 대원님은 교주요 색마인 전용해(42세)를 부르는 신도들의 존칭이다. 대외호칭이 시녀일 뿐 많은 시녀의 환시속에 성적 가학으로 변태성욕을 충족시키는 첩이다.
분통을 참을 길 없는 유곤용은 이 소굴속에 들어가 한번 맞부딪혀 보겠다는 결심으로 백백교의 아지트들인 양평 양주 연천 화천 평강 철원 안변 금화 등 소위 9개 본소를 변장하고 탐방했다. 백백교의 종말론과 그에 수반된 감언이설에 속아넘어가 재산을 모두 바치고 처자식을 첩으로 바친 다음 이 본소에서 화전을 가꾸며 종말을 기다리는 암울한 인생집단들인 것이다.
유군은 독실한 신도인 아버지와 첩이 된 누이동생을 통해 대원님의 승안을 교섭했다. 백백교 가문에서 혼자만 믿지 않은 것은 잘못이었으며 그동안 해주에서 약종상을 해서 번 3만원을 헌금할 뜻을 비치고 인삼 녹용을 선물로 보내어 믿음을 다졌다. 철통같은 보안을 하고 그 보안을 위해 수백명을 살해온 살인마도 유군의 함정에 걸려들기 시작했다. 서울 하왕십리에 있는 유군의 아버지집에서 밤 12시에 승안을 허락받고 살인 기술자들인 참모 이경득 문봉조 등을 대동 하고 나타났다. 승안을 위해서 유군은 시킨대로 사흘동안 목욕재계 외출않고 근신을 하고 승안 규칙준수를 서약했다. 첫째 대원님 얼굴을 보지 말것, 둘째 호주머니에 아무것도 담지 말것, 셋째 묻는 말 이외에는 아무말 하지 말것, 넷째 그의 명령이면 이론을 달지 말고 승복할 것 등이다.
전용해는 늠름한 체격으로 머리통이 보통사람보다 곱절이나 컸다. 그래서 상점에서 파는 모자치고 맞는 것이 없어 탈모주의였다. 음성은 굵고 가는 것을 자유롭게하여 사람을 홀리기에 십상이었다. 유군을 만나자 처남 매부사이에 만남이 너무 늦었다하고 술상을 차려오라 시키더니 취하기를 기다려 유군에게 「10만원을 번 것으로 안다」고 했다. 이에 4년후면 10만원이 될 것이라고 하자 「내 분부를 쫓지 않겠다는 거지」하며 곁에 앉아있던 애첩 정전에게 「네 오라비 심났다」 하며 그가 항상 휴대하는 오덕도를 빼어 찌르러 들었다. 유군은 이 때가 바로 기회로 보고 몸을 날려 발길질로 교주를 차 쓰러뜨렸다. 「사람살려」를 연발하자 밖에서 망을 보던 참모들이 들어와 난장판을 이루더니 교주를 둘러업고 달아났다. 몽둥이 들고 뒤쫓아 왕십리 보통학교앞까지 추적해 휘두른 몽둥이에 이경득이 이마가 깨지기도 했다. 그길로 왕십리파출소에 달려가 신고를 하고 백백교 대검거가 시작된 것이다.
캐고 보니 감자 줄기따라 줄줄이 드러나는 가공할 죄악에 전세계가 놀라 외국 기자가 특파되기까지 했으며 20년대 세계 사건 10대뉴스가 되기도 했다. 공판기록에 보면 백백교 참모들인 피고인이 총 24명으로 전기 이경득은 61회에 걸쳐 166명을 살해했고 문봉조는 49회에 걸쳐 129명을 살해하는 등 그중 18명이 314명을 살해 암매장한 것으로 돼있다. 자살미수를 한 참모 정봉조가 회복되어 신문한 결과 주범인 전용해는 용문산 본소 곧 양평군 단월면 행소리에서 도피중 자살했다는 진술을 받고 용문산 일대를 수색한 결과 그토록 많을 인명을 살상했던 오덕도로 자결한 시체로 발견된 것이다.
왜 그많은 인명을 살상해야만 했던가. 백백교의 뿌리를 소급해 오르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 국운이 기울기 시작하던 1900년 평북 영변 사람인 전정운이라는 이가 함경도 문천군 운림면 마양동 (문천군 운림면 마양동)에 백도교라는 유사종교를 창설했다. 「백백백의의의적적적」이라는 주문만 외우면 무병장수하고 종말의 날이 닥치면 서양은 불로, 동양은 물로 심판받아 인류가 멸망한다 하고 이 종말에서 살아날 길을 제시한다. 팔도 53곳에 정해놓은 백도교의 본소에 가서 살다가 물심판의 날이 오면 금강산에 있는 피수궁으로 옮겨가고 그 곳에 기다리고 있으면 대원님이 하강하셔 소원에 따라 두패로 갈라 인도 하신다. 동해 천리밖에 둘레 3000리의 영주땅이 솟아 오르는데 그 곳에는 봉황과 기린이 놀고 불로초가 자란다. 불로장수하고 싶은 자는 그 영주땅으로 인도하고 벼슬과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은 자는 계룡산으로 인도한다. 그 곳에서는 대원님이 임금이 되어 헌금이나 헌신도에 따라 벼슬이 주어진다고 했다. 전정운은 이를 믿는 우중이 바치는 재물로 호의호식하다가 가평 화악산에서 죽었다.
그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교권다툼으로 백도교는 삼분열을 한다. 둘째인 전용해가 백도교의 정통을 이어 백백교로 이름을 바꾸어 전 조직을 계승하고 맏인 전용수가 인천교를 아우 전용석이 도화교를 만들어 나간 것이다.
백백교는 표면상 관헌의 눈을 속이기 위해 정상 종교인양 십오계 기도일 등을 정하고, 1세 2세 하는 선출 교주제와 근대화된 포교소 제도를 도입한 척했지만 배후에서 자신이 비범한 신격을 지닌것 처럼 조작, 조작극으로 마음을 휘잡는 한편, 재산 갈취와 피갈음으로 인한 이탈방지 그리고 들통날 우려가 있으면 여지없이 살해하는 공포 운영을 했다.
신도가 걸려들어 재산과 재물을 바치면 서울역 앞 경성하숙옥 청량리역앞 대흥여관에 묵게한 후 소위 생문방인 양평 양주 연천 철원 평강 영동 안변 등지의 오지에 화전 가꾸며 살 수 있는 본소 산막에 이주시킨다. 가공할 살해 암장이 저질러진 동기를 가려보면 이렇다.
1) 교주 전용해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은 경우 2) 믿음이 약화되어 배신할 기미가 보이는 경우 3) 숨어서 불평을 하거나 탈교할 기미나 우려가 있다고 밀고된 경우 4) 간부나 신복 첩의 태도에 약간 변화가 생겼을 때 5) 재산을 모두 헌금했다 해놓고 남은 재산이 있음이 발각되었을 때 6)살인극이 탄로날 조그만한 기미가 포착되었을 때 7) 공범 만들기 수단인 피갈음을 거부한 경우 8) 공범을 만들고자 살인에 참여시키는데 이 살인공범이 아닌자로서 살인 내막을 알고 있는 자는 쥐도 새도 모르게 산중으로 연행되어 구덩이를 파게 하고 난데 없이 밀어뜨려 그 구덩이에 생매장 당했다.
살인에는 항상 복수신도를 동원 공범을 만들었고 교주가 버린 첩은 간부가 돌리고 간부의 피갈음이 끝나면 본소로 돌려 신도 모두에게 돌려 윤간공범자로 만들어 이탈할 마음을 먹지 목하게 한 것이 교세를 유지시키는 수단 가운데 하나였다. 그가 도피 자결하기 직전 그가 살던 경성 앵정정 마굴에는 32명의 첩이 그를 에워싸고 있었으며 그 집안에 노루 기르는 우리까지 만들어 노루 피로 보신을 했다. 아기가 생기면 운신에 방해가 되고 정이 붙어 신격이 손상된다 하여 병아리 죽이듯 영아 살해도 서슴지 않았던 살인마다.
이를테면 선천 사는 간부 신도 이덕의 경우를 보자. 행동이 수상하여 세간을 뒤져보니 조선총독에게 보내는 백백교 폭로의 편지 초안이 발견되었다. 이 일가족 살해의 명령을 받은 문봉조는 그 가족뿐 아니라 12촌 친족까지 생매장하고 업힌 아기까지 죽이려하자 공범자인 간부가 아기가 무슨 죄입니까고 살려주자고 동정심을 발휘하자 그 간부마저 현장에서 살해하고 있다. 살해 장소는 그들이 종말에서 살아남기 위해 모여있는 본소로 서울 한복판에서 여의도 비행장 그리고 무주구천동에 이르기까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자행되었던 것이다.
교주 전용해는 신도로 하여금 그의 신격을 인정시키기 위한 살인 연극도 서슴지 않았다. 이를테면 본소에서 신도들을 불러모아 마당에 엎드려 기도하게 하고 속에 흑심을 품는 자는 나의 신통력으로 천벌을 받아 일어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예언 하고 모두 일어서라고 시킨다. 그중 한 신도가 일어나지 못하고 엎드려 있는지라 가서 발길질하니 죽어 있었던 것이다. 전용해는 미리 한 신도를 소리 못내게 죽여 엎드리게 해놓고 이 기도 연극을 벌여 신통력을 과시, 이탈을 방지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20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도 여느 때와 같은 기력을 과시, 신도를 홀리기도 했는데 이 역시 28수라는 그의 고도의 사기수단 가운데 하나였다.
또한 민간에서 굳게 믿고 있는 「정감록」에 합리화시키는 억지 이론에 무지한 신도들은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테면 「정감록」에 「전라도운봉두류산 성인출어함양림중」이란 대목이 있는데 이는 전씨가 도를 열(라)고 운(운=운)을 만(봉=봉)나고, 성인이 출현한다는 함양림은 그들 교가 창시된 함경도 운림면 마양리라고 강인부회했다. 그는 주기적인 제일을 만들어 이날 천제가 불러 천기를 내리신다 하여 계룡산 산상의 천제단에 올라 기를 받는데 마치 간질병 발작하듯이 몸을 꼬고 기성을 지르기도 했던 것이다.
조선일보 1999. 12/02(목) 이규태
21. 간도는 조선땅 지도 발견
일본이 1909년 9월 조선을 배제한 채 불법 간도협약을 체결해 청나라에 간도를 넘기기 직전 이곳이 조선 영토임을 명백히 표시한 1908년판 대한제국 지도가 발견됐다.
서울시립박물관 학예연구사 김영관씨가 최근 나온 역사 전문학회지 「백산학보」제53호를 통해 공개한 『신정분도 대한제국지도』(新訂分道 大韓帝國地)라는 지도책이 주인공. 양피지로 만든 이 지도책은 가로 18.2㎝,세로 26.5㎝ 크기로 아세아전도와 대한제국전도 다음에 경기도, 충청남북도, 전라남북도(제주 포함), 경상남북도, 강원도,함경남북도, 황해도의 13개도를 모두 10장의 지도로 수록하고 있으며 서문이 있다.
이 지도책은 융희 2년,즉 서기 1908년 11월17일 황성(서울) 용산인쇄국에서 인쇄해 11월21일 발행됐으며 편집 및 발행자는 현공렴(玄公廉), 발행자는 주한영,고유상 2명으로 돼 있다.정가는 50전. 일본의 지도제작기술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이는 이 지도책 중 간도를 조선영토로 표시한 함경남북도 부분이 특히 주목을 끌고 있다.
이 지도는 함남은 노란색, 함북은 두만강 이남 지역의 경우 보라색으로 표시하면서 두만강 이북, 토문강(吐門江) 이남의 북간도 지역은 분홍색으로 채색해 이곳이 함북에 부속된 대한제국 영토임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이는 간도를 청국과의 이권교섭과 대륙침탈 수단으로 간주했던 일본이 간도가조선땅이라는 대한제국의 주장에 의의를 달지 않았던 상황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김씨는 말했다. 이 지도책은 또한 동해 명칭과 관련, 울릉도 및 독도 서쪽은 대한해(大韓海)로,그 동쪽은 일본해로 기록하는 독특함을 보이고 있다.
실제 간도협약이 체결되기 직전인 1909년 7월 일제의 조선침탈 총괄기구였던 조선통감부 산하 간도파출소는 간도가 조선 영토임을 선언하기도 했다. 원래 간도지역은 일찌기 조선인들이 개척한 조선영토였다가 명나라를 대신한 청이 중국을 평정함에 따라 영토 귀속분쟁이 일어나 1712년 압록강과 토문강을 경계로국경을 삼는다는 징표로 백두산정계비를 세웠다. 그러나 이후 토문강이 송화강 지류라는 조선측과 두만강의 다른 표기라는 중국측 주장이 팽팽히 맞서다가 일제가 1909년 9월 조선은 배제한 채 청나라에서 남만철도 부설권과 무순탄광 개발권을 얻는 대가로 불법 간도협약을 체결해 청나라에 불법양도함으로써 중국에 편입돼 지금에 이르고 있다. 조선일보 1999.12/02(목) (서울=연합뉴스 김태식기자)
22. 박열열사 이야기
1923년 가을, 지금의 일본 임금의 아버지요 당시 왕세자였던 소화일왕의 결혼식이 약정돼 있었다. 한데 이 시기에 때 맞추어 폭탄을 해외로부터 입수하려고 물색하는 한국 청년이 있다는 제보가 일본 경찰 당국에 들어왔다. 제보자는 니이야마라는 일본 아가씨다. 그녀의 한국인 연인인 김중한이 독립사상을 품은 한 한국 젊은이의 부탁으로 폭탄 입수의 일을 진행중이라고 밀고한 것이다. 이것이 일본 왕과 왕세자를 폭살하려 음모했다는 소위 박열사건의 발단이다.
주모자인 박열은 경북 문경 점촌 태생으로 경성 고등보통학교를 다니면서 3․1운동을 겪고 잃어버린 나라를 위해 일해보겠다는 작심으로 일본 도쿄로 건너갔다. 당시 젊은이들을 매혹시켰던 오스기의 무정부 운동에 동조하여 그 산하에 한국인 동지 16명을 규합, 불령사라는 결사를 했다. 바로 고자질을 한 김중한과 니이야마도 그 결사의 같은 동지였다. 불령이라는 말은 일본 당국이 독립사상을 품거나 독립운동을 하는 한국인을 지층하는 불은이란 뜻으로 결사 이름부터 반항적임을 알수 있다. 그는 직업을 물으면 법정에서까지도 「불령업」이라고 대꾸했을 정도로 민족의지가 투철했다. 박열은 평소에 이런 말을 하고 다녔다. 「의회란 국가라는 이름의 대강도단의 소두목 회의요 천황(일왕)이란 국가란 강도단의 소두목을 거느린 대두목이다」는--.
박열은 1922년에 두 번 서울에 가 의열단의 한사람인 김한에게 폭탄을 의뢰했고 이 두사람과의 연락을 서울의 기생인 이소홍이 맡아했는데 암호편지로 내왕했다 한다. 한데 때마침 서울에 김상옥 의사의 폭탄사건이 일어나 아무런 진척이 없었다. 또한 그가 우편배달부로 임시 고용되어 일본 임금이 사는 궁성 내부를 드나들며 내부구조를 익히기도 했다. 곧 범죄 예비는 했을 망정 폭탄을 입수하거나 실행한 구체적 행동은 없었다.
이 박열 사건을 이해하고 진행하는데 일본 여인 가네코후미코를 빼고는 불가능하다. 일본 발음으로 부르지 말고 금자문자로 불러달라던 박열 의사의 연인이다. 박열이 금자문자를 만난 것은 무정부주의자들이 모이는 오뎅집이었다. 그 집에서 막심부름하던 그녀의 생각이나 지성이 너무 진보적이고 날카로우며 풍부한데 반한 것이다. 박열을 만나기 이전까지의 그녀의 인생역정은 어떤 통속소설보다 기구했다. 아버지는 첩을 들여놓고 어머니를 밤낮으로 패길 일삼았다. 어머니의 출타 중에 한 집에 살던 이모를 겁탈하는 아버지를 숨어본 것은 금자문자의 여섯살 때 일이다. 끝내 문자를 업고 가출한 어머니는 방직공장에 다니면서 호구를 했는데 나카무라라는 사나이와 동서 생활하면서 문자를 학대하기 시작했다. 방이 하나라 추잡한 일을 할 때면 엄동설한에 밖에 내쫓기길 일쑤였다 한다. 이 귀찮은 존재인 문자를 조선 경상도 김천에 동양척식회사의 개척이민으로 가 사는 외삼촌 집에 맡겼다. 후에 쓴 옥중기에 보면 조선에서 살았던 6년 간은 매일처럼 철로변에 나아가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뛰어들까 말까하는 추억밖에 없다 했다. 그는 도쿄에 돌아와 허리에 방울을 달고 달랑대며 신문팔이를 하면서 정칙영어학교에 들어가 중등교육을 받았다. 이 학교 문예반에서 알게 된 것이 박열을 대역이라는 어마어마한 혐의로 고자질한 니이야마다.
그녀의 일생을 살았다고 가정하면 이 세상 어느 누구가 세상의 부조리에 저항하지 않을 수 있으며 허무주의자가 되지않고 배겨났겠는가. 박열을 만난 금자문자는 이 부조리에의 억하심정을 무정부 운동의 열정으로 쏟았다. 그들은 결사의 기관지를 편집하며 과격 논설을 싣는 등 의기투합하여 심신을 같이하는 동서생활을 일본 빈민가 게다집 셋방에서 시작한 것이다.그 셋방에서 박열은 왕족폭탄살해 음모죄로 금자문자는 그 공범으로 잡혀든다.
박열이 과격한 반일 항일주의자인 것만은 틀림없고 일본국의 수장인 일왕을 폭사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평소에 품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일본 법정이 밝힌 대로 실행에 옮겼는지는 근거가 박약하며 따라서 조작설이 유력하게 나돈 채 의혹으로 남아 있다. 박열로 하여금 그런 범죄를 저지른 것처럼 조작할 정치적 배경을 훑어볼 필요가 있다. 이 사건은 1923년 9월에 일어난 관동지방의 대지진이 온상이다. 이 때 있었던 한국인 대학살은 그 처참함이나 무도함으로 온세상을 경악시켰고 일본이 궁지에 빠지게 한 사건이었다. 일본 자경대라는 민간단체에서 학살을 주도한 것으로 돼있지만 일본 정부나 군부 경찰이 배후 조작했다는 사실은 저희네 조사로도 엄연한 사실이 되고 있었으며 외국에서도 그 사실을 알아 날이 갈수록 외교적 입장이 난처해지고 있었다.
이 학살의 정치적 조작을 한 배후로 당시 일본 내무대신이요 3․1운동 후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지낸 한국통 미즈노가 지목되기도 했다.그는 관동 대지진 이전에 일어났던 일본 각지의 쌀 파동의 무서움을 체험해 알고 있는지라 대지진 후에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될 식량 파동에 겁을 먹고 있었다. 시어머니한테 호통맞은 며느리가 부엌에 들어와 무고한 강아지 배때기를 차 깨갱거리게 하여 스트레스를 전위시키듯이 팽배한 일본민중의 욕구불만을 한국인으로 향하게 하여 분출시키는 불만 전위정책을 쓴 것이다. 한국인이 난리 틈에 일본인을 습격하고 샘물에 독약을 풀고 다닌다는 루머를 퍼뜨려 대량 살상을 야기시킨 것이다.
이 무자비하고 잔인무도한 학살 사례가 구미 각국에 외교채넬과 신문 보도로 알려지자 열강에서 항의 규탄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일본 주재 외국대사들이 연서명하여 한국인 학살을 항의하는것을 필두로 세계 여론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이에 대한 정치적 음모 하나를 진행시킬 필요가 생기고 이것이 바로 박열 사건인 것이다. 곧 일본인이 재일 한국인에게 그토록 모질게 굴 수밖에 없는 골치아픈 한국인임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한국인이 일본 왕을 죽일 뻔했다는 연극을 조작할 필요가 생긴 것이다.
당시 세상을 떠들석하게 했던 박열과 금자문자의 옥중괴사진도 이 조작선상의 한 작품이다. 괴사진이란 판사의 예심조사실에서 박열이 앉아있는 무릎에 금자문자가 태평스레 책을 들고있는 사진이다. 뿐만 아니라 취조하던 다치마쓰 예심판사는 피의자인 박열과 금자문자를 취조실에 놓아두고 변소가는 척 오랜 시간을 비워두곤 했다 한다. 당시 일본 우익은 괴사진을 두고 춘화라 표현하고 사법권의 문란이라 하여 당시 와카키 내각의 사퇴를 들고 나오기까지 했다. 끝내는 박열과 금자문자가 옥중결혼을 했다는 설이 끈질기게 나돌았다. 당시 조선일보에 보면 옥에 갇히기 전 1년 남짓을 동거한 사이로 굳이 옥중결혼까지 할 아무런 필요를 느끼지않는다 하고 당사자들이 부인한 것으로 보도되었지만 일본에서는 사법사상 전례없는 옥중결혼을 시킨 것이라 하여 떠들석했다. 이 괴사진과 옥중결혼은 그들의 공작대로 피의 사실을 자백케하기 위한 유화정책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공판이 열리기 전에 박열은 면회갔던 조선 학우회의 조헌영에게 자신과 금자문자가 한복을 입고 재판받게 해달라 부탁해서 한복을 차입했다. 공판정에 입정한 박열은 쌍학교비하는 혼례복에 사모를 쓰고 관대를 둘렀으며 태극선을 든 채였고 금자문자는 흰 옥양목 저고리에 검은 공릉치마 차림이었다. 일본 왕을 대표하는 재판관이라면 나는 한국민족을 대표하기에 한복을 요구함이며 재판관석과 피고석의 높이를 동등하게 하라고 요구함이며 나는 한국말을 사용할 테니 통역을 딸려라고 말함이며 심문에 재판관이 꿀릴만큼 기개가 당당했다.그는 지구를 깨끗이 청소하는 일 가운데 첫걸음이 일본 제국을 쓸어버리는 일이다는 등 보도하지 못하게 한 「아의 선언」 등 극단 발언이 많았다. 형법73조인 왕 왕비 왕세자 왕세손에 위해를 가하거나 가하려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법규를 적용, 사형을 언도하자 박열은 태연히 웃음을 띠었고 금자문자는 「박열과 나를 한 교수대에서 같이 목매어 죽여달라. 그리고 죽은 백골도 더불어 묻어달라」고 진술했다. 1926년 3월25일의 일이었다.
한데 10일이 지난 4월5일에 무기징역으로 특사를 받는다. 특사를 받은 지 넉달이 되는 7월23일 우쓰노미야 형무소 여죄수 독방에서 금자문자가 수인작업인 마니라 삼끈을 꼬다가 그 끈을 창살에 매어 목매어 자살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소설보다 더 기구한 한많은 25세의 삶을 그렇게 맺은 것이다. 꼭 그 시기에 죽을 이유도 없고 또 작은 심경 변화에도 글로 써 나타냈던 평소 성격으로 보아 자살이라면 유서를 남겼을 텐데 흔적없이 사라진 게 또 하나의 의혹이 응어리진 것이다. 그 무렵 박열의 형인 박정식씨가 금자문자를 면회코자 신청을 했으나 이유없이 거절당한 사실이 복합되어 더욱 그러했다. 옥중에서 일어난 일이라 추측이 만발했는데 그 중 유력한 추측이 임신한 것이 외형으로 드러났고 옥중임신이 알려지면 사법부가 또 한번 곤욕을 치러야 하기에 낙태수술을 하다가 치사한 것을 자살로 변조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20년의 옥살이를 하고 일본의 패전으로 출감한 박열은 한국거류민단장을 하다가 6․25전쟁 때 납북된 것이다. 그후 금자문자는 경북 문경읍 마성면 격리 박열씨 집안의 선형에 이장되어 한국 땅에 잠들고 있다.
조선일보 1999 11/18(목) 이규태
23. 조선시대 유흥업소 이야기
한말 사양의 궁중에서 퇴출당한 것은 궁녀만이 아니다. 팔도에서 음식솜씨 좋다하여 선상된 숙수들도 퇴출대상이었다. 그 가운데에는 고종황제가 흡족해하시는 간을 가장 잘 맞춘다는 안순환이라는 숙수가 있었다. 일제의 강제병탐 후 궁에서 퇴출당한 안순환은 황로마루(지금의 광화문 네거리 남동쪽 모서리)에 조선 요리집을 차렸다. 당시 풍토로서 조선 요리집이란 벤처산업 가운데 하나였다. 이것이 한국 현대사에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 명월관이다.
3․1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명월관은 태화정에 지점을 내고 있는데, 바로 이 지점 2층이 민족대표 33인이 모여 독립선언을 했던 만세의 진원지가 된 것이다. 이 독립선언의 산실은 2층 동쪽 끝방으로 만세를 부르기 전에 고종황제의 빈소가 차려진 남쪽 문을 열어 만세 소리가 빈소에 까지 들리게 하는 배려를 했다. 명월관의 지점이 들어가기 이전에 이 태화정에는 매국노 이완용이 살고 있었다. 강제병탐 후 중추원 부의장으로 있었을 때 일이다. 이 집에 놀러갔던 이완용의 누님의 아들 한상용이 둘째 아들 이항구와 놀고 있는데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태화정 마당에 있는 아름드리 느티나무에 벼락이 떨어진 것이다. 겁이 나 방으로 쫓겨들어가 이불을 둘러쓰자 이완용이 '벼락이 떨어진 후에는 도망쳐야 쓸데 없는 일이다'고 말하더라고 한상용이 회고하고 있다. 벼락뿐 아니라 장독대가 자주 울고 떨며 깨지는 변고가 잇따르자 이완용이 이 집을 팔고 이사한 것이다. 민족정기가 서린 명월관 터였던 것이다.
명월관 본점은 1200평의 땅에 건평 600평이 넘는 큰 집이요 종업원수가 120명이나 되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규모 큰 기업형 요정이었다. 이 명월관은 기미년 이듬해에 이종구에게 넘어가는데 한말에 육군 정위로 군관학교 교장을 역임한 이규진의 아들로 외국어학교를 나와 잡화상과 주식 거래소를 하여 돈을 벌어 명월관을 사기에 이른 것이다. 요식업계의 대부인 안순환은 명월관을 팔고 지금의 태평로1가 인근에 식도원을 차린다. 명월관의 절반정도의 규모요 수입이지만 요식업계의 양대 라이벌이었다. 안순환은 풍류객으로 항상 갓을 쓰고 유생들과 시회와 유람과 풍악으로 지새운 멋쟁이였다. 그래서 식도원의 객실들은 봉황수 놓은 비단 보료에 산수화 병풍을 두르고 풍악과 가무로 응접했기로 명월관보다 품위가 있고 외국인들이 즐겨 찾았던 것이다. 이밖에 이 두 요정 이외에 국일관, 송죽원, 태서관 등이 있었으나 품격이나 규모, 역사에서 이 두 요정과는 거리가 있었다.
당시 접대하는 기생은 요정 소속이 아니라 기생조합이랄 권번 소속으로 손님이 어느 권번 아무개를 예약하거나 부르면 인력거로 권번에 가 모셔오곤 했다. 곧 인력거꾼이 요정 전속이요 기생은 인기에 따라 격차가 심했다. 고종말년 사양의 궁실에서 큰 잔치가 있을 때마다 팔도에서 명기들을 차출해서 잔치에 가무와 풍악을 잡게 했다. 이를 선상기라 했는데, 잔치가 끝나면 후하게 화채를 주어 돌려보내곤 했다. 한데 후에 순종이 되는 황태자의 혼례 때 팔도에서 불러들인 선상기들에게는 화채를 나누어줄 수가 없었다. 궁의 재정도 궁핍했으려니와 궁의 재정 깊숙이 침투한 일본의 입김이 지출을 억제한 때문이다. 창덕궁 낙선재 앞마당에서 이 선상기들의 화채를 위한 농성 데모까지 있었으면 알아볼만 하다. 궁밖으로 쫓겨난 이들은 고향에 내려갈 엄두도 못내고 서울에 흩어져 기생업으로 호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에 당시 정락원 학감이던 하규일이 이 선상기들이 가무에 뛰어난 것에 착안해 정악교습분소라는 이름으로 기업을 뒷받침해주는 기둥서방 곧 포주가 없는 무부기들을 모아 합숙 교습을 시켰다. 이것이 발전하여 기생 300여명을 거느리는 다동기생조합이 된다. 이 평양기생들의 집합체에 대항하여 서울의 유부기들과 관기 출신들 400여명이 모여 한성조합을 만들어 경쟁을 한다. 그밖에 몸을 파는 삼패기생들을 취합하여 신창조합, 전라도와 경상도 기생을 중심으로 한남조합, 그리고 한성조합에서 프라이드가 높은 평양기생끼리 분리하여 대동 조합을 만든다. 이렇게 난립된 기생조합들이 본래의 기생조합 호칭인 권번이라는 호칭으로 바뀌어 부르게 됐다.
권번마다 권번화가 정해져있어 모란화 하면 한성권번, 국화 하면 대정권번, 월계화 하면 한남권번, 해당화 하면 경화권번을 뜻하여 꽃이름으로 소속권번을 불렀다. 요정에는 '조선미인도감'이 비치돼 손님으로 하여금 기생을 선택할 수 있게 했는데 그 도감에는 권번별로 사진과 성명, 예명, 나이, 그리고 남도잡가니 사군자 등의 특기, 용모와 심성의 특징을 미화한 미사여구가 나열돼 있다. 단골이 없으면 이 도감을 훑어보고 용모와 심성을 읽어보고는 '오늘의 절지는 모란화 향심이다'고 외친다. 기생 선택하는 것을 꽃가지 꺾는다는 뜻인 절지라 했으니 감각적인 기방용어가 아닐 수 없다. 그러면 대령했던 인력거가 모란화원인 한성권번에 달려가 향심이를 태워 모셔온다. 인력거 대기소가 요정앞마다 있었음은 그때문이다.
1930년대초 4대 권번 중 한국사람이 경영하는 한성권번의 소속 기생수는 177명이요 예비기생이랄 동기가 100여명으로 경기 출신이 221명, 평안도 출신 40명, 경상도 출신 10명 순이었다. 그중 송연화의 서화와 유운선의 아리랑타령은 소문나 있었다. 기생 64명에 동기 31명의 한남권번은 경상도 55, 경기도 34명으로 명기 오류색을 불러다 노는데 당시 총독부 고등관 봉급과 멎먹는 3600원을 화채로 내놓아야 했다. 권번은 배후에 물주랄 권력자가 도사리고 있었는데, 한성권번의 뒤에는 나라 팔아먹는데 앞장섰던 송병준이 있었다. 그의 고리대금업체인 대성사로 하여금 권번을 관리토록 했는데, 권번 감독인 하일규와 송병준의 대리인인 유흥업계의 대부 안순환과의 충돌로 하일규가 물러나면서부터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왜냐하면 하일규의 노련한 가창과 그의 인품의 품안에 있던 기생들이 다른 권번으로 이산해갔기 때문이다. 이렇게 술집에서 손님들이 지명 또는 무지명으로 인력거를 보내 기생을 부르면 권번에서는 태워보내는 주기 분리체계였다.
'붉고 파란 등불 밝지못한 샹들리에 아래 담배연기 술 냄새를 재즈에 맞춰 춤추는 젊은 남녀의 옷깃이 소용돌이 친다. 그 틈에 흘러나오는 여급의 목소리는 누님처럼 차분히 가라앉고 오히려 사나이들의 언행이 초조하고 격앙돼있다.' 김동환의 30년대 카페 풍경의 묘사다. 당시 서울에는 '낙원' '왕관' '엔젤' '태평양' 등의 카페가 있었는데 카페마다 소위 '부정스타'가 있었다. 일본경찰이 독립운동을 하거나 민족사상을 신봉하거나 그 혐의자를 부정선인이라 부른데서, 독립운동에 간접 연관이 되거나 민족사상에 동조적인 여급들이 인기가 있었고, 일본 형사들 색안경의 감시를 받았으며, 따라서 부정스타로 불리었다. 우미관 건너편에 있었던 '왕관'에는 만주에 망명중인 젊은 독립지사와의 비련으로 소문난 최다순, '엔젤'에는 만주 독립군 지도자 이아무개의 누이 이애자가 소위 부정스타였다. '낙원'에는 한국 보이스카우트 창설자인 조철호의 제자로서 연극배우가 되어 등단했다 하면 눈물을 한 말쯤 쏟게 한다는 전기봉이 스타였다. 당시 카페 여급들은 3명중 2명은 여학교 출신이요, 3명중 2명이 조혼에 거역하고 가출했으며, 3명중 2명이 만주나 중국에 가 살아본 체험자였다. 30년대의 카페는 돈많은 집 자제들의 환락장소였다기보다 한국여성 사회진출의 시대적 한 양상이요 남성상위의 구습에 저항한 선구자들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카페에서 댄스하는 것은 허락됐지만 전문 댄스홀은 총독부 방침으로 허가가 나지 않았다. 이에 이서구(레코드회사 문예부장) 복혜숙(비너스끽차점 마담) 오도실(영화배우) 최선녀(연극배우) 그리고 한성권번 조선권번 종로권번 기생 셋이 연서명하여 서울에 댄스홀을 허가하라고 '삼천리'잡지 1937년 신년호를 통해 미쓰바시(삼교) 당시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에게 공개 청원을 하고있다. 이 글에서 동양 서양의 큰 도시 그리고 일본 만주 중국의 도시를 다 돌아보았지만 댄스홀 없는 곳은 서울 뿐이라고, 댄스가 건전한 가정을 파괴하고 청소년을 타락시킨다는 우려가 얼마나 전근대적인가도 지적했다. '교육가 부인도 관공리 부인도 은행회사원 부인도 모두 요리집보다 차라리 댄스홀에 출입하는 것을 그 남편이 원할 것이외다. 어찌 원하고만 있으리까. 명랑하고 점잖은 사교댄스 홀이면 부부동반하여 하루저녁 유쾌하게 놀고 올것이 아니오리까. 이리되면 가정부인에겐들 얼마나 칭송받을 일이 아니오리까. 서울 도심이 아니면 한강 건너 영등포나 동대문밖 청량리에라도 댄스홀을 허하여 유쾌한 기분을 60만 서울 시민에게 맛보게 하여주소서' 했다. 조선일보 1999. 11/11(목) 이규태
24. 정사붐 촉발시킨 윤심덕 이야기
1925년 초가을 서울 을지로 3가에 있었던 광무대의 배우 화장실에서 선배인 석금성이 신출내기 윤심덕의 얼굴 화장을 손질해주고 있었다. 「어떤 잠재심리의 표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윤심덕은 별나게 붉고 진하게 입술을 칠했으며, 여러 번 충고했으나 들어먹은 적이 없었다」고 석금성은 회고했다. 윤심덕은 일본 도쿄 우에노 음악학교를 나와 서울 여자고보에서 성악을 가르쳤던 엘리트요 신여성이다. 신상에 상처입은 일이 있어 1여년 만주지방을 여행하고 심기일전코자 성악가에서 연극배우로 변신, 그 첫 무대에 선 것이다.
「동도」라는 작품으로 그녀가 맡은 안나역은 사나이 거짓사랑에 속아서 신명을 바친 순박한 여인이다. 한데 윤심덕은 대사마다 흐느낌과 울음 때문에 대사를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잠시 무대 뒤에 나와있는 윤심덕을 보고 연출자인 박승희가 충고했다. 「배우는 관중을 울려야지 자신이 울어서는 안 된다. 배우가 울면 관중의 마음 속에서 슬픔이 증발해버리는 법이다」고 . 다음 공연부터는 미리 실컷 울어 눈물을 말리고 나오라는 말을 듣고 극장문을 나오려 하는데 꽃집에서 장미 꽃다발 하나가 윤심덕에게 전달되었다. 꽃 속에 꽂힌 명함을 본 윤심덕은 그 꽃다발을 땅에 던져 짓밟아버렸다. 그리고 현기증 때문에 몸을 가누지 못해 누군가가 부축해야만 했다.
윤심덕이 무대에서 운 것은 실은 자신의 처지를 운 것이며 그토록 울린 자가 바로 그 장미 꽃다발을 보낸 자였기 때문이다. 그가 유학에서 돌아와 노래로 서울바닥을 누볐을 때 유혹의 손길이 여기저기에서 뻗쳤으며 그중 하나가 백만장자의 아들 이영문이라는 이였다. 그는 조선악단을 중흥시키는 것이 여생의 꿈인데 윤심덕의 노래를 듣고 후원할 생각이 들었다 하며 요구한 대로 뒷받침하겠다는 뜻을 전해왔다. 그리고 조선호텔 식당에서 만나 위장된 유혹의 망에 철부지 새 한 마리는 걸려들고 만다. 윤심덕에게는 도쿄 유학시절에 사랑을 맹세한 애인이 있었으며, 그 애인 김우진에게 사연을 말해 동의까지 얻었다.
음악중흥사업을 위해 학교를 그만두게 하고 우선 살집을 마련해주었으며 음악학교 용지를 물색하는 등 사업이 진행되어 나갔다. 이렇게 진행시키면서 집 밖에서 만나던 것을 자기 양옥으로 불러 만나고, 낮에 맞나던 것을 시간이 안 난다는 핑계로 밤에 만나고, 응접실에서 만나던 것을 병을 핑계로 침실로까지 불러들였다. 그러는 사이에 항간에 소문이 나돌았다. 이가의 양옥 방 침실에서 비명소리가 났느니, 여자 울음소리가 났느니, 윤심덕이 이가의 첩으로 들었느니, 윤심덕이 돈에 환장했느니 하는 와중에 그 소문을 들은 도쿄의 연인 김우진으로부터 절연장까지 날아들었다.
이에 충격을 받고 1여년 동안 만주 유랑을 떠난 것이다. 소문을 잠재우고 김우진의 사랑도 회생시키는 데 필요했던 진통의 세월이었다. 그리고 서울에 돌아와 심기일전을 위해 여주인공으로 서게 된 토월회 연극 주제가 마치 그녀의 일생을 다룬 것만 같았고, 또 그 무대 뒤에서 받은 꽃다발이 바로 자신을 망친 그 자였던 것이다. 그는 마의 새장을 피해 도쿄로 건너가 절연장을 보낸 김우진이 자신의 진정을 실감할 때까지 침묵의 데이트를 했다. 그들 사이에 앙금이 가시고 사랑이 재연되었으나 그것이 기구한 숙명을 극복하기에는 한계를 느낀 것이다.
그 무렵 일본 오사카에 있는 레코드회사에서 녹음교섭이 들어왔다. 그녀는 동생 윤성덕의 피아노 반주로 녹음을 하고 예정에 없던 곡 하나를 추가하고 싶다고 했다. 그 노래가 자신이 작사하고 이바노비치의 「도나우강의 잔물결」의 곡에 맞추어 부른 「사의 찬미」다.「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 너의 가는 곳 그 어데메냐 /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러 가느냐 / 눈물로 된 이 세상이 / 나죽으면 고만일까 /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건 서름」. 사흘 동안 취입을 하고 윤과 김은 관부연락선을 타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당시 신문기사들을 취합해보면 이렇다. 오후 11시 한밤중에 시모노세키를 떠나 부산으로 가던 연락선 덕수환이 오전 4시즈음 대마도 앞바다를 지날 무렵 양장을 한 여자와 중년 신사 한 명이 껴안고 갑판에서 바다를 향해 몸을 던졌다. 이에 배를 멈추고 인근 해역을 수색했으나 시신을 찾을 수는 없었다. 승객명부에서 사라진 남자는 전남 목포부 수교 김수산(30)으로 돼 있고 여자는 경성부 서대문정 2정목 173번지 윤수선(30)으로 돼 있었다. 김수산이라는 필명을 쓴 김우진은 지주의 아들로 1897년 장성에서 태어나 구마모토 농업학교와 와세다대학 영문과를 다녔다. 연극 창작과 연출에 남다른 정열을 보였으며, 그 관계로 윤심덕과 만나 사랑에 빠진다. 1924년에 졸업과 동시에 고향에 돌아와 토지관리를 하며 창작을 계속했으나 토지에 묶인 자신의 신세를 비탄하는 나날이었다 한다.
「사의 찬미」가 공전의 베스트셀러로 심금을 사로잡고 있을 때 정사한 윤심덕과 김우진이 이탈리아에 살고 있다는 풍설이 나돌았다. 정사 후 5년이 지난 어느날 김우진의 아우인 김익진이 총독부 외사과에 출두하여 이 두 사람을 찾아봐 달라는 수색원을 제출한 것이다. 정사설을 부인하는 사람의 말을 듣고 지친인 아우가 제출한 수색원의 근거는 이러하다. 윤과 김이 바다에 뛰어든 현장을 목격한 사람은 없다. 윤과 김이 일등실 선원을 돈으로 매수해 정사한 것처럼 말을 내고 이들은 나가사키를 통해 중국이름으로 상하이로 갔다가 이탈리아 로마로 가서 악기점을 경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후쿠오카의 한 신문사 사장이 로마에서 김우진과 윤심덕으로 보이는 한 쌍의 부부가 악기점을 경영하며 남편은 극문학을, 부인은 성악공부를 하고 있음을 보았다는 기행문이 동기가 된 것이다. 또한 그 방증으로 「사의 찬미」를 취입할 때 반주하는 동생 윤성덕에게 「내가 성공하기 전에는 절대로 세상에 나타나지 않을 테니 나를 찾지 말라」고 말했다는 것과 거부인 김우진의 부모가 엄청난 현상금을 걸고 시신이나 유류품을 찾았으나 나타나지 않은 점, 그리고 윤심덕의 집에서 일절 윤의 상을 치르지 않은 점 등을 들었다. 심지어는 「사의 찬미」가 떼돈 벌 수 있을 것이라는 레코드사로부터 3만원이라는 거금을 미리 받고 사랑의 도피를 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나돌았었다.
동생 윤성덕은 『언니(운심덕)는 만인의 호기심 속에서 익사했거나 호기심이 살해한 것일 뿐 죽지 않았음을 확신한다』 하고 영원히 그 사실 여부가 밝혀지지 않더라도 그의 죽음을 믿지는 않겠다고 말했었다. 물론 총독부의 수색원에 대한 이탈리아 영사관측의 회답은 레코드 가게를 하는 한국인 부부를 찾을 수 없다는 보고가 있었고-.
여성이 살고 싶고 살아갈 삶의 구도는 전통 사회가 여성에게 요구하고 부여하는 가치체계와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그 가치갈등에서 20~30년대의 한국 신여성들은 어떤 형태로든지 피해자였다. 그 피해증후군 가운데 하나가 그 갈등을 겪느니 죽음을 선택하는 정사였다. 20년대의 정사사건으로 기억되는 「한국의 카투사」로 불린 평양기생 강명화와 경상도 백만장자의 아들 장병천을 들 수 있다. 결합을 반대하는 아버지 장길상의 슬하를 떠나 강명화가 벌어놓은 돈과 패물을 팔아 도쿄로 사랑의 도피를 한다. 강명화가 어머니에게 호소하여 살던 집까지 팔아 장병천은 대학 예과에, 강명화는 우에노 음악학교에 다녔지만 지탱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백만장자로서 가문에 소외당한 연인을 구제하는 길은 자신을 죽이는 길밖에 없다고 판단한 강명화는 장안의 최고 미기요, 최고 재기이며, 최고 가기라는 명성을 나래접듯 23세의 인생을 접고 자결했으며, 당시 신문들은 명사들이 총출동하여 신세대의 인권에 대한 구세대의 살인이라고 비난했다. 그래서 구시대의 논리가 횡포를 부리는 것을 「강명화의 자살」이라는 말로 개념화하기까지 했었다. 그녀가 죽은 며칠 후 시구문 밖 강명화가 묻힌 무쇠리 공동묘지 곁에 장병천이 묻혔다. 죽음의 길 오리정에서 장병천이 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동반한 것이다.
초기 유행가수 이애리수의 죽음도 일련의 시대적 증후군으로 충격을 주었던 정사다.아홉살에 유랑극단에 팔려온 개성 소녀 이애리수는 1932년에 「황성옛터」를 불러 하루아침에 5만장의 레코드 매출을 올렸고, 민족감정을 건드렸다 하여 제작 관계자들은 감옥에 가고 가수는 「민족의 연인」으로 소문이 났었다. 이애리수와 사랑에 빠진 것이 연희전문학교 학생이던 배동필이었다. 부모의 반대가 극심하자 이들은 정사를 기도, 미수에 그쳐 병원에 입원을 했었다. 이에 놀란 아버지가 노래를 버리고 주부로서 들어앉으라는 조건부로 허가를 했다. 「죽음의 언덕을 넘어온 너른 광야에서 뭣을 노래하리까. 백합처럼 비단으로 몸을 꾸미고 새처럼 지저귀리이까. 황새가 파먹고난 우렁껍질처럼 사오리까.」 그 보금자리에서 이 두 연인은 두 번째 독약을 마신다.
조선일보 1999.11/04(목) 이규태
25. 퇴출후의 순종황제 이야기
못마땅할 땐 수라상 거부로 저항...자녀 못낳아 콤플렉스
대신들간의 강제 합방조인이 끝나고 국권의 종지부를 뜻하는 순종황제와 일본 칙사 가쓰라와의 조칙교환이 이어 있었다. 일본 기병중대의 삼엄한 포위하의 창덕궁 인정전 한복판. 금빛 나는 탁자를 가운데 두고 황제는 동쪽을 바라보고 앉고 일본칙사는 서쪽을 보고 맞바라 보았다. 한국측에서는 민병석 궁내대신, 윤덕영 시종원경, 이병무 시종무관장이 배석했고, 일본측에서는 데라우치 총독, 야마가타 정무총감, 아카시 경무총감이 정장을 하고 배석했다.
말은커녕 기침소리 하나 없이 가로 세로 한자 남짓의 조칙이 든 상자가 교환되는 광경은 무언극이라 해도 손색이 없었다. 식이 끝나고 동행각으로 자리를 옮겨 샴페인을 터뜨렸는데 이때까지도 양편의 얼굴에는 근육 하나 움직이질 않았다. 일본측 일행이 떠나가고 내외기자들의 성화로 비운의 식장을 공개했는데 그때까지도 입도 대지 않은 샴페인 잔에서 거품이 일고 있었다 한다. 일본 칙사에 대한 반례로 황제께서 칙사가 묵고 있는 통감관저를 가는데 그것이 이화 문장의 황제기를 나부끼는 마지막 행차였던 것이다. 궁녀들이 맞붙들고 통곡하는 가운데 궁문을 나서자 우중충했던 하늘이 더 이상 무게를 못 견뎌내고 비를 쏟아댔다. 조선왕조의 사직이 끝나던 이날, 궁에 돌아온 순종은 두 눈의 초점이 흐려 부축이 없었던들 몇번이고 쓰러질 뻔 했었다는 윤황후의 후일담이다.
'황태자(순종) 전하는 언뜻 보기에도 허약체질이었으며 몸집이 비대해 보였다. 게다가 심한 근시안이었는데도 폐하 앞에서 안경 쓰는 것이 법도에 어긋난다 하여 안경을 못 쓰고 있는 걸 보니 딱하기 이를 데 없었다. 황태자를 배알한 분이면 누구나 느낄 수 있듯이 전하의 건강에는 중대한 결함이 있어 보였고 내가 배알하는 동안에도 민황후께서 전하의 손을 꼭 쥐고 부축하다시피 보살피고 있었다.'
영국의 할머니 탐험가 이사벨라 버드 여사가 고종-순종을 배알했을 때의 기록이다. 뿐만아니라 이도 18개가 의치였다. 황제와 황태자를 독살하려 했던 김홍륙의 독차 사건의 여독때문이다. 통감부는 임금과 백성을 가깝게 한다는 명분으로 왕궁의 권위를 말살시키고자 왕궁의 일부를 창경원으로 개방시키기로 했다. 개원파티에 주빈인 순종의 복장이 문제가 되었다. 어복을 입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대원수의 군복을 입고 나갈 수도 없었다. 고민끝에 평민의 양복차림을 하기로 하고 일본 양복점인 정자옥에서 주인이 재단사 하나를 대동하고 내전에 들었다. 재단사가 황송스럽다고 엎드려 큰절을 하고 몸을 재러 황제에게 접근하자, 상궁 하나가 달려와 가로막으며 어신에 손을 댈 수 없다 하고 옷 기장 같은 건 큰방 상궁에게 물으면 된다고 했다. 이에 순종은 재단사더러 괘념 말고 칫수를 재라 분부하자 뭇 상궁과 궁녀들이 줄지어 엎드려 통곡을 했다. 이렇게 맞춘 옷을 처음 입으시면서 '이제 나도 하이카라가 되는 건가'하고 야릇한 웃음을 띄며 말했다 한다. 이 웃음을 이해하는 데는 양복을 둔 평소의 인식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고종 인산때 문상객이 덕수궁으로 몰려들었었다. 한 귀족이 양복 정장에 플록 코트를 걸치고 빈소에 와 무릎을 꿇었다. 이를 본 상주 순종은 그 양복 문상객으로부터 등을 돌려 예 받기를 거절하였다. 이 소문이 번져 일본 고관들마저도 한복을 구해 입거나 두루마기만을 걸치고 문상하는 진풍경이 벌어졌었던 것이다. 심신이 나약한 편인 순종은 못마땅하다고 생각되는 일이 있으면 곧잘 밥상을 물리는 수라 레지스탕스를 곧잘 했다.
일제때 왕실 일을 맡아 했던 이왕직에서 부왕의 홍릉 동구에 있는 버드나무를 잘라버렸다는 말을 듣고 진노한 끝에 보다 좋은 나무를 옮겨 심었을 때까지 수라를 들지 않았었다. 또 한번은 부왕의 혼전에 올린 사과중 하나에 약간 상한 놈이 있음을 보고 그날로부터 수라를 반감하였다. 그런 일이 있은 후부터 수라상은 순종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거울 구실을 했다. 직접 하명을 하지 못하고 해보았댔자 곧바로 시행되지 않음에 대한, 그러지 않을 수 없는 슬픈 선택이 아닐 수 없다. 어느 가을날 부왕(고종)의 복중에 순종은 상복 차림으로 홀로 비원을 거닐고 있었다. 밤나무 밑을 지나다가 알밤 한 톨을 주워 들고 손바닥에 받쳐들더니 흐느껴 우는 것이었다. 임금의 행차에는 몰래 숨어서 뒤따르게 마련인 이때 수행하던 근시의 회고담에 나온 이야기다. 고종과 병약한 순종은 곧잘 비원을 거닐었었다. 알밤이 떨어져 있는 것을 보면 고종은 이를 주웠다가 화로에 구워 재를 털고 손수 껍질을 벗겨 순종에게 먹이곤 했던 것이다. 순종이 장성한 후 비원에서 주운 밤을 손수 구워다가 부왕에게 바치길 일삼았으며, 고종은 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이 순종이 구워 온 밤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또한 고종의 혼전에 이 군밤이 놓이지 않으면 예를 행하지 않았을 정도였다니 효심의 군밤이 아닐 수 없다.
고종과는 달리 국정을 내각에 맡김으로써 집정 시절부터 고독했던 순종은 이렇다 할 즐기는 오락도 없었다. 서양 궁중에서 왕족들은 옥돌 곧 당구를 치며 소일한다는 말을 듣고 옥돌대를 들여놓고 소시때 더불어 공부했던 학우를 불러 당구를 치기도 했다. 대궐에는 세자의 문과 공부방으로 춘방, 무과 공부방으로 계방이 있었으며, 한말에는 이를 합쳐 춘계방이라 했다. 세자 혼자만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나이 또래의 학우와 같이 공부를 했는데, 모시고 더불어 읽는다 하여 배독 또는 배리라 했으며, 순종의 배독은 외가집 친척들인 일제때 최고 갑부 민영휘, 궁내부대신을 지낸 민병석, 민영환의 아우인 민영찬, 종실인 이재곤 등이다. 간간이 궁녀들을 불러 머리맡에 앉혀놓고 강목이나 명현전기를 읽게 하는 것이 낙이었다. '내가 30년간 대행을 모시는 동안에 단 한번 진노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합방후의 어느 날 한 젊은 시녀를 곁에 불러 앉혀 무슨 옛소설을 읽혔을 때 일입니다. 어떤 임금이 민재를 많이 긁어모아 호의호식하는 바람에 민정을 돌보지 않다가 마침내 애써 모아둔 만고의 재보가 일조에 남의 나라로 돌아갔다는 대목에 이르렀을 때, 옆에 앉았던 천 상궁이 말했습니다. "어느 나라 임금이든 그따위 짓을 하면 어찌 나라가 망하지 않고 지탱하겠는가"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습니다. 그러자 그 소리를 들은 대행께서 홀연히 변색을 하시고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어친수로 천상궁의 뺨을 치시며 "꽤씸한 것! 사식 나가거라. 내가 무슨 죄가 있기에 그같은 불측한 소리를… " 하시며 진노하셨습니다. 그것을 본 근시자는 눈물 겨우리만큼 대행의 어충정을 배찰할 수 있었다 합니다.' 만년의 순종을 가깝게 모셨던 이교영씨의 회고담이다. 일본 당국은 외로운 순종의 여가를 위해 신경을 썼으며, 창덕궁에 임시로 씨름판을 만들어 일본 씨름을 피로한 일이 있었다. 씨름꾼이 넘어지자 '모래알이 박혀 얼마나 아프겠는가, 옷을 입혀 겨루게 하든지 하지 나는 딱해 못 보겠다' 하며 일어섰다 한다.
굳이 임금님의 취미를 들라면 족보 따지는 일이었다. 누군가 배알하면 반드시 조상의 벼슬이며 학덕이며, 친가 외가 처가로 누구와 몇 촌간인가에 이르기까지 일가견이 있었고, 또 따져 묻는 바람에 순종을 배알하려면 족보를 마스터해야 하는 것이 상식화돼 있을 정도였다. 순종에게는 자녀 콤플렉스가 심하였다. 아이를 낳을 수 없었던 탓인지 궐에서 이왕직 직원을 만나면 '딸을 낳았다며?' '아직 해산 안 했나' '지난번 낳은 놈 돌이 지났겠구먼' 하는 식의 말을 건네기 일쑤였다 한다. 왕실 경찰서장인 일본사람이 상처를 했는데 그 일곱살, 다섯살 난 자녀를 비원입구에 불러 과자와 노리개를 몰래 주다가 윤황후한테 들켜 어색한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했다. 순종이 아들을 못 낳는 데 대한 풍설도 하나 둘이 아니다. 순종의 할아버지인 대원군은 무척 풍수도참에 집착했었다. 그의 집권 이전에 풍수사 정풍을 시켜 충청도 내포에 두 자리의 명혈을 잡아놓고 그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이장키로 했다. 한데 그 두 혈중 어떤 혈을 택하느냐를 두고 고민했다. 덕천 가야산에 있는 혈은 '이대천자지혈' 이요, 오서산에 있는 혈은 '만년영화지혈'로 점지됐기 때문이다. 대원군의 호기는 구체적 제시가 없는 만년영화보다 당장 임금을 보증하는 혈에 마음이 쏠렸다. 그 가야산 산소의 발복으로 고종-순종 2대의 황제를 누렸으며, 순종에게 후사가 없음은 바로 2대로 발복이 끝난 풍수때문으로 합리화했던 것이다.
조선일보 1999. 10/28(목) 이규태
26. 신흥교주 차천자 이야기
3.1운동 좌절감 이용 보천교 만들어...야한 옷 여관이 술시중
정읍에서 30리 떨어진 입암면 대흥리의 풍수부터 따져볼 필요가 있다. 누가 보아도 관이나 갓을 쓰고 있는 듯한 갓 바위가 있어 천관산이요 천하를 다스릴 천자가 태어나 크게 대흥할 땅이다. 대흥동 맞바라지에는 제영봉이 있고 윗마을 이름은 왕심리다. 인근 들판이 '정감록'에 신인이 태어난다던 해도다. 이 모두 이곳에 천자궁을 짓고 천자로 군림한 차천자가 지은 지명이 아니라 이전부터 있었던 지명을 천자출현에 부합시킨 것이니 이 곳 찾는 데 머리도 많이 썼으려니와 대단한 지모의 소유자임을 미루어 알 수 있게 한다.
1920년대의 그 현장에 가보기로 한다. 동구에 들어서면 길 양편으로 나지막한 같은 규격의 초가 1000호가 줄지어 있는데 팔도에서 모여든 신도들의 집이다.천자궁으로 통한 이 길을 종로라 하는데 조금 걸어 들면 종각이 나오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천자를 상징하는 노란 놋쇠종이 걸려있는데 서울 종로의 종보다 크다. 대궐 정문이 삼광문으로 우람한 3층 지붕으로 돼있어 이 문을 드는 이를 압도시킨다. 그 문을 들어서면 수백간짜리 기와집이 나오는데 오른쪽이 부인들이 사무를 보는 총의원이, 왼편이 남자들이 사무를 보는 총정원이다. 복판에 경복궁 근정전을 본뜬 본전을 십일전이라 하는데 주역에 나오는 토자형 구조로 내전을 지었기 때문이다. 그 안에 들면 오색단청이 된 아름드리 원주들이 수십길 뻗쳐 있고 그 복판 계단위에 용트림 기둥으로 받친 성소 삼광단이 차려져 있는데 그 뒤켠에는 산천 일월성진이 그려진 병풍이 처져 있다. 이 천저궁에 들어갔다 나오는데 한시간 이상이 걸리는 규모였다. 처음에 천자를 상징하여 황기와로 구워 지붕을 얹었더니 경찰이 금지하여 여느 기와로 바꿔 얹었다하며 목재는 멀리 백두산에서 실어나르느라 대흥리에 임시 정거장까지 두었었다한다.
직접 차천자를 뵌 분의 기록에 보면 정전의 양편에는 팔뚝만큼 굵은 황촉이 켜져 있고 세그루의 커다란 석상이 나열해 있는데 바로 이들이 믿는 보천교의 주신인 옥황상제상이다. 당아래에는 기골이 장대한 육척장신의 역사 둘이 시립하고 있으며 약 10분 동안 허리를 반쯤 숙이고 기다리고 있으니 통천관을 쓴 40대중반의 차천자가 나타난 것이다. 키는 6척이요, 체구는 비대한 편이며 얼굴은 타원형으로 이마와 콧등이 펀펀하고 수염을 거꾸로 세워 사나운 인상을 주었다.
신도들이 호칭하는 용코 용수염인 것이다. 시종들이 굴복사례하고 있는 가운데 이 탐방자와 문답이 시작된다. 분분한 조선의 민심을 여하히 통일하겠나이까고 묻자 인심을 통일하는 데는 종교아니곤 안되며 종교중에서도 서양의 기독교같이 국가와 밀착돼 있으면 안된다했다. 조선문제의 해결은 그 시기가 불원하다길래 장차 조선이 독립되면 무슨 정체를 쓰는 것이 좋으냐고 물었더니 그때 민심의 동향을 보고 정할 일이라고 회피했다. 그리고 보천교도들이 가산을 모두 팔고 탕진한 것이 선생의 명령이냐고 묻자 하늘이 준 재산은 하늘 일에 쓰면 네것 내것이 없다하고 교인들로 하여금 왜 장발시키느냐고 묻자 기독교도들이 단발하는 것은 흉하게 보지않는 그 근본이 틀렸다고 했다.
이 탐방자는 오신 손님이니 융숭하게 대접해 보내라는 분부대로 거창한 주안상를 받는데 그릇과 수저가 모두 은제요 느슨한 옷차림의 여관이 술을 들고와 차천자가 친히 권한 것이라며 따랐다. 보천교주 차천자의 본명은 차경석으로 아버지 차치구는 동학혁명때 전봉준의 참모로 싸우다가 관군에 잡혀 포살당했고 당시 15세의 차경석은 울분을 품고 동학당에 들어 갔다. 동학당을 기반으로 형성된 일진회의 전주 지회장을 한것도 그런 연분에서였다. 전라도에서 교세를 떨치고 있던 증산교의 교주 강일순은 바로 차경석의 이모부요 그 교권 계승에 차경석이 뛰어들어 유리한 고지를 차지한다. 그리고 교권 이양을 뜻하는 전바리(전발)를 받는다. 삼일운동이 일어나던 해 12월12일 경상남도 함양 지리산 줄기에 있는 대황산 정상에서 대황 곧 천자로 즉위하는 제천의식을 올렸다. 그 휘하에 60벼슬아치를 두었는데 그 벼슬 이름들이 기발하다. 동서남북하는 방위, 금목수화토하는 요일, 갑을병정하는 십간, 자축인묘하는 십이지, 동지 소한 대한하는 (이십사기절), 간손곤건하는 팔괘로 벼슬이름을 삼았다. 그리고 정씨 성을 가진 사람이 자기 어머니를 겁탈하여 태어났으므로 자기 이름은 정경석이라하여 당시 민중을 사로잡고 있던 정감록에 결부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정읍 입암아래 천자궁을 짓고 신도를 모으는데 1백명을 모으는 자에게는 국권이 회복되면 군수벼슬을, 1000명을 모으는 자에게는 감사벼슬을, 1만명을 모으는 자에게는 대신 벼슬을 약속하는 증서를 써주었다.
이렇게 모은 신도의 입교 의식을 본다. 입신한 교도들은 목욕재계하고 ' 새옷으로 갈아입는다. 옥황상제강령지위란 신위를 복판에 두고 제상이 풍성하게 차려지고 스스로를 환난에서 구제해준다는 태을주라는 주문을 합송하며 사배를 하는데 허공에 코끼리 호랑이 선녀선동 관음보살 등 헛것들이 보일때까지 계속한다. 보통 침식을 하지않고 사나흘동안 이 태을주 사배가 계속되기에 허기가 지고 현기가 나 헛것이 보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를 가리켜 눈이 떴다해서 개안이라했다.
개안으로 얻는 이득은 다음과 같다. 1) 자신은 물론 자손 삼대까지 부자가 된다. 2) 악질을 피하고 숙병을 피하게 된다. 3)국권회복과 동시에 신도들은 이전 신분과는 아랑곳 없이 양반이 된다. 4) 삼재팔난을 면한다. 5)몸을 뜻대로 움직이게 되어 공중비행을 자유자재로 한다. 6) 상투를 보존함으로써 상제께서 그를 통해 보호를 한다. 7)죽어서도 선경에 들어 살게 된다. 몽매한 민중으로서 혹하지 않을 수 없는 입신조건들이 아닐 수 없다. 이 개안이 초등교도요 그후 2여년간 태을주 사배를 게을리하지 않으면 옥황상제가 눈앞에 어른거리는 단계에 이르는데 이를 얼굴을 보았다해서 승안이라 했다. 이것이 중등교도요 의식하지 않아도 태을주가 절로 튀어나오고 사지를 들어 약동을 하며 춤을 추는 망아단계를 전신이라하며 이 단계에 이르면 고등교도다. 전신도가 되면 앉아서 만국이 돌아가는 일을 훤히 볼 수 있으며 장생불사하고 산채로 지옥에 들락날락하여 죽은 부모도 만날 수 있다했다.
당시 함경도 덕원에서 관헌에게 체포되어 '제령위반'조목으로 기소당한 차천자교도 일행 14명에 대한 기소장을 보면 이렇다. 차천자교에 들면 질병에 걸리지 않고 죽었던 부모를 만나볼 수 있다하고 일단 교에 들면 한 사람당 열사람을 입교시키고 입교금으로 10원씩을 받는다. 이렇게하여 가입인원이 15만 5000명이 되면 일제히 일어나 독립운동을 할터인데 지금 그 수령되는 차경석이 360명을 거느리고 전라도 지리산에 들어가 총기와 화약을 만드는 중이라했다. 그리하여 오는 갑자년(1924) 음력 3월 15일 차경석이 조선국의 황제로 즉위하고 신도들은 응분의 높은 벼슬을 받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구 한국 관제에 따른 벼슬과 품작을 응분의 헌납자와 신심의 농도에 따라 증서로서 보증했다는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국권을 빼앗겼을 때 민중의 불안 심리를 수렴하는 유사종교들이 창궐했었다. 그리고 3․1운동의 좌절로 앞날이 안개속에 잠기면서 다시 그 불안 수렴의 유사종교가 창궐했으며 가장 폭넓은 수렴에 성공한 것이 바로 차천자의 보천교였다. 보천교에는 유사종교의 공통점인 민중염원의 공통분모를 모조리 교리에 수렴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무병장수 호의호식은 만인에게 공통된 숙원이지만 살아서 지옥에 가 돌아사신 부모를 뵈올 수 있다는 것은 한국적 효사상의 수렴이다. 그밖에 10%미만의 극소수 양반위주의 사회였던데 대한 상민의 반동과 선망이 수렴되고 수탈만 해가는 관료에 대한 민중의 반감과 선망이 수렴되었으며 단발 양복 등 새 풍조에 대해 반동을 상투와 푸른두루마기를 고집하는 것으로 수렴한 것이다. 주의를 끄는 것은 3․1운동후에 팽배돼 있는 국권에 대한 혼미와 불안을 수렴했다는 점에서 주의를 끈다.물론 그 조건이 탄압받는 빌미가 되긴했지만 당시 한국인의 잠재된 민족의식의 일단을 반짝 보는 것만 같다. 또한 유사 이래 현재까지도 과학이나 논리로 나누어지지 않는 이 한국인의 샤만적 심정의 20세기 전반의 존재형태로 이 차천자는 역사에 기억될 것이다.
조선일보 1999.09/16(목) 이규태
27. 중경 임정기관지 `독립신문' 최초공개
중경(中慶) 임시정부와 광복군의 활동사항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이 처음으로 공개됐다.
국가보훈처는 6일 임시정부에서 요직을 두루거친 양우조(楊宇朝)선생의 부인 최선화(88)여사가 소장해 온 독립신문과 양선생의 저작물 등 42건을 수록한 독립운동사료집을 발간했다.
독립신문은 중경 임시정부의 중문판 기관지로 1943년 6월 창간호부터 1945년 7월의 7호 가운데 4호만 빠진 채 모두 소장돼 이번에 처음 공개됐으며 중경시절의 임시정부 및 독립운동 활동상 연구에 소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신문은 미국의 한 중의원(상원)이 미국정부에 임시정부 승인을 요구하는 내용을비롯, 광복군의 인도전선 활약상, 중국과 인도, 만주지역 광복군 활동사진 7장, 부녀자들의 군사훈련 참가 등을 소개하고 있다.
또 조선총독부의 전시국가총동원법과 조선항공기공업 발전계획 및 동향 등을 소개, 임시정부가 국내정세를 자세히 파악하고 있었음을 입증했으며 40년대 초 사회주의계열의 조선민족혁명당 기관지 「앞길」과 조선민족해방동맹 기관지 「신조선」 등도 게재했다.
이밖에 연안에서 활동한 조선독립동맹 산하 조선의용군의 활약상을 소개, 그동안 임시정부와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단체가 심각한 대립관계였다는 주장을 뒤집는 중요한 사료로 평가된다.
단국대 한시준(역사)교수는 『임시정부의 활동이 가장 왕성했던 중경시절의 독립신문 원본이 보존됨에 따라 일제 패망을 앞둔 시기의 독립운동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최선화여사는 1936년 상해로 망명, 흥사단에서 활동하다 1937년 양선생을 만나결혼했으며 40년에 한국독립당에 가입, 교포부인들을 규합해 한국혁명동맹을 결성했으며 43년에는 한국애국부인회 재건에 결정적으로 기여해 7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서훈받았다. 조선일보 1999. 9.6(월) 황대일기자
28. 친일공작 앞장선 윤덕영 고종 괴롭혀 간접살인...영친왕 정책결혼 추진
고종 황제가 돌아가신 것은 1919년 1월22일 오전 6시20분으로 당시 황실업무를 담당했던 이왕직에서 발표했고 그리고 지금까지 공식화 돼 있다. 하지만 이 일시는 조작된 것으로 시정돼야 한다. 실제로 황제가 숨진 것은 21일 새벽 1시45분이었다. 그렇다면 28시간 남짓을 속인 것 이 된다. 속여야 할 그 속사정이 뭣일까. 돌아가신 그 시간에 하세가 와 조선 총독을 비롯하여 황실 사무를 총괄할 이왕직장관등 간부들이 일본에 가있거나 가고 있는 도중이었다. 영친왕의 결혼이 결정되어 그 준비를 위해서였다. 서울에 남아 있던 하급관료들로서는 겹치게 된 영 친왕 결혼의 경사와 고종 서거의 애사의 선후를 어떻게 해야할지 결정 할 수가 없었기에 발표를 망설였던 것이다. 동경에 가있는 고위층과 전화연락 끝에 선조후경으로 결정되어 통고된 것이 21일 밤이다. 그렇 다면 돌아가신 사실대로의 시간으로 공표해도 될 것을 왜 조작해야 했 을까. 흉흉했던 당시의 민심이 바로 그 변수다.
이미 발표하기 이전에 임금이 돌아가셨다는 소문은 궁밖에 퍼져 있 었다. 일본 총독부가 순종황후인 윤비의 친정 큰아버지 윤덕영에게 50 만원의 거금을 공작금으로 주어 독살한 것이라느니, 궁내부대신을 역 임했던 민병석과 윤덕영을 총독부가 사주, 고종의 전의 안상호로 하여 금 독탕을 마시게 하여 죽게 했다느니, 돌아가신 즉시 시신이 흑갈색 으로 변색했느니 등 독살설이 무성하게 나돌았었다. 그무렵 파리강화 회의에 조선독립을 주장하는 밀사를 고종이 보낸다는 소문이 나돌았고, 이에 놀란 총독부는 '조선 백성들은 일본의 문명통치를 고맙게 받아들 이고 있을뿐 아니라 짐도 감히 독립을 원치 않는다'는 친필 서한을 고 종으로부터 받아내려는 역공작을 펴 고종과 가깝게 오갈 수 있는 윤덕 영에게 시켰다는 것이다. 이를 들어줄 고종이 아니요 그 앙갚음으로 밀명을 내린 것이 독살이라는 것이었다. 윤덕영이 후에 말한바에 의하 면 이 독살설 때문에 팔도의 유생들로부터 협박장이 답지했고 암살단 까지 조직했다는 경찰 보고도 있어 한동안 일본군이 신변 보호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했다. 이런 민심의 회오리속에 돌아가신지 28시간이나 늦춘후에 발표를 했다가는 독살설을 확인시켜주는 것이 되고 그때 회 오리 칠 민심에 겁을 먹고 붕어일시를 조작한 것이다.
윤덕영의 독살설은 미지수로 남았지만 적어도 간접살인자로서의 오 명은 벗어날 수가 없다. 고종은 갑자기 졸도, 심장마비로 숨을 거둔 것으로 돼있다. 졸도이전까지는 건강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한데 졸도 하게 된 유발요인이 있다. 졸도 십수시간전에 그토록 반대해왔던 영친 왕과 일본 귀족인 방자여사가 정책결혼을 위해 슬하를 떠나갔던 것이 다. 작별인사를 하러 들어온 영친왕을 본 고종은 몸의 중심을 잃고 고 개를 의자에 기댄채 들지못했을 만큼 이미 충격을 받고 있었다. 이 정 책결혼에 수행할 순종황제의 장인이요 윤덕영의 아우인 윤택영, 이완 용 송병준 조동윤 등이 함녕전으로 고종에게 인사드리러 갔을때도 '가 엾은 세자를…' 하며 말을 못맺었다 했다.
이 충격의 씨앗을 만들어낸 이가 바로 윤덕영인 것이다. 그의 회고 담의 일부를 여기에 옮겨본다. '왕세자(영친왕) 전하와 일본 귀족과의 혼인은 내가 주장해 온바요 이것이 이루어진 것은 오로지 나의 노력덕 분이다. 한데 이태왕(고종)께서는 이 일을 반대하시고 민영돈의 딸과 혼약하고서 마치 영친왕의 어머니인 엄비가 살아계셨을 때 약혼해놓은 것처럼 속여 일본 귀족과의 결혼을 방해했다. 이에 이왕가의 흥망이 걸린 문제로 보고 이미 혼약예물로 호박반지까지 보낸 이 사이를 분쇄 하는 공작을 자임하고 나선 것이다. 약혼녀의 아버지인 민영돈은 나와 는 가까운 인척관계에 있었다. 나의 맏며느리가 바로 민영돈의 큰딸이 기에 만약 이 혼사가 이루어지면 후덕이 만만치 않음을 내가 모를바가 아니다. 이 영화를 버리고 이왕가의 혼약을 밑바닥부터 부서버린 나의 충심을 아는 사람은 알고 있을 것이다.'
영친왕이 떠나던 그날 고종은 저녁을 든체만체 하고 자리에 누우셨 다. 이때 상궁 몇이 여느때처럼 머리맡에서 책을 읽어드렸는데 이때 읽은 책은 사방산 이야기였다. 잠 못이루고 몸을 뒤적거리시더니 10시 넘어 뇌일혈 증상을 일으킨 것이다. 이왕직 사무관인 겐도오가 전화를 받은 것은 새벽 2시. 덕수궁 함녕전으로 달려가니 전의 안상호와 총독 부 병원 모리야스 박사가 머리맡에 넋을 잃고 앉아 있었고, 이강 이지 용 이재각 민영휘 조중응 등이 별실에 와있었다 했다.발표도 있기전에 돌아가신 사실이 궁밖으로 흘러나가게 된 것은 궁녀들의 애절한 곡소 리 때문이었다.일본 관리들은 함녕전의 문을 모두 닫고 커튼을 쳤으며 덧문까지 닫았는데도 그 곡소리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울지 못하 도록 협박을 했지만 유독 한 여인의 울음만은 막을 길이 없었다. 정화 당 김씨였다. 영친왕의 약혼녀 민규수의 백년한이 윤덕영의 작품이거 니와 고종황제의 약혼녀 정화당의 천년한도 바로 윤덕영의 노회한 작 품이다.
강제합방후 일본이 해야 하는데 하지못하고 있는 숙제가 순종으로 하여금 일본까지 친히 가서 일본 천황앞에 가 무릎 꿇리는 주종의 예 를 베푸는 일이었다. 이 일을 처음 맡았던 이완용이 고종을 배알했을 때 끝내 등을 돌리고 얼굴을 대하지 않았으며, 순종을 배알했을 때에 는 좀체로 성낸적이 없던 황제가 '총독의 힘을 빌려 짐을 협박하는게 로군' 했다 한다. 이렇게 두 황제의 눈밖에 나고 그로써 일본측에서도 쓸모가 없게되자 친일파로서도 퇴락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이 공작 의 악역을 좋다하고 자임하고 나선 것이 윤덕영이다. 순종의 모든 것 을 덕수궁의 고종이 조종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터라 고종의 마음을 돌리기 위한 첫공작이 고종의 일상생활을 불편하게 하고 괴롭히는 일 이다. 덕수궁의 살림들에 이 명분 저 명분을 들어 딱지를 붙였다. 그 래도 굽힐 기미가 보이지 않자 윤덕영은 고종이 친근히 지내는 광화당 이씨 삼축당김씨를 내쫓고 수발드는 궁녀를 축소함으로써 인의 장막을 풀고 고독속에 몰아넣었다. 충분히 계산된 고립정책이었다.
그래놓고 어느날 고종에게 아뢰었다. '민 황후 참변후에 후궁으로 혼약한 규수 김씨가 30년동안 공규로써 전하의 은총을 기다리며 정절 을 지키고 있사오니 군덕을 베푸옵소서' 했다. 미인계인 것이다. 그리 고 하세가와 총독도 이 사실을 알고 어찌 한 인생을 그토록 불행하게 저버릴수 있는가고 말하더라는 공갈을 잊지 않았다. 물러가라고 여러 번 호통치는데도 윤덕영은 6시간을 버티어 고종을 피로케한 다음 일단 누군지도 모르는 김씨를 궁안에 들여놓고 살도록 하는데 허락을 받아 냈다. 그리하여 1917년 5월 윤덕영이 고종의 특사로서 수절하고 있는 김씨 집에 가 서른일곱살의 노처녀를 이화문장이 영롱한 쌍두마차에 태워 덕수궁 문안에 들여놓았다. 정화당이라는 호칭이 주어지고 별당 에 살게 했으며 이왕직에서는 월 3백원을 내려 생활토록 했다. 물론 고종은 이 정화당을 한번 불러본적 없고 정화당도 고종의 얼굴 한번 본적 없이 상을 당한 것이다. 동서고금에 남편 얼굴 한번 보지 못하고 아내로 산 여인은 정화당뿐이 아닐까 싶다.
그녀가 고종이 계신 침전에 든 것은 고종 서거후의 일이며, 윤덕영 의 빈전을 지키라는 분부때문에 였다. 정화당의 애절한 울음소리는 밤 을 새웠고 이 통곡이 덕수궁 담 넘어가 윤덕영의 독살설을 유발한 것 이다. 물론 정화당의 울음은 고종의 주검을 슬퍼하여 우는 울음은 아 닐 것이다. 한번 보지도 않은 남편에 무슨 정이 있어 울겠는가. 그녀 의 울음은 너무도 기구한 자신의 인생을 그렇게 울었을 것이다.
강제 합방 전후해서 이완용과 윤덕영의 사이는 험악할 정도로 나빴 다. 이완용은 외척을 빙자하여 농간을 일삼는 소인배라고 말하고 다녔 으며, 윤덕영은 일본 유력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다녔다. '일본 에서는 이완용을 조선 제일의 인물로 치지만 그자는 본래 주의주장도 없고 절조도 없으며 대세의 굴곡을 잘 탔다는 것밖에 없다. 러시아 전 성시대에는 친로파가 되고 미국 전성시대에는 친미파가 됐으며 노일전 쟁후에 일본이 득세하자 이등박문의 그늘 뒤에서 춤추지 않았는가. 나 는 동양정신의 고루함을 못벗어난 탓인지 지난 30년 일본을 신뢰하지 않고는 조선이 존립할 수 없다는 오로지 그 한 신념으로 모든 사람이 기피하는 크고 작은 일을 다 처리해내지 않았던가' 했다. 누구나가 손 대기 싫었던 일로 윤덕영이 지탄을 받아가며 해낸 일이 궁녀들을 궁밖 으로 내쫓고 임금의 재정을 바짝 죄는 소위 궁중숙정을 해냈고, 고종 과 순종을 갈라놓는 덕수궁 창덕궁 분리도 역적소리 들어가며 해냈으 며, 강제병탐의 궁내공작과 순종황제를 일본 천황앞에 데려가 무릎 꿇 리는 굴복의 예를 성사시킨 것이며, 고종의 죽음을 부른 영친왕의 일 본여인과의 결혼도 그가 해낸 악역이었다. 합방후 윤비의 친아버지인 윤택영은 몰락하여 서울의 고리대금을 다 갖다 쓰고 중국 일본을 방랑 하는 처지가 됐는데, 윤비의 큰아버지인 윤덕영은 옥인동의 아방궁으 로 불리는 초호화주택을 짓고 살며 당시 양대은행인 해동은행을 설립, 은행장으로 취임하는가 하면 1930년대 전반 소득세납부로 본 20대 재 벌 가운데 18번째로 돈많은 거부가 됐다. 토속부자인 박영효나 윤치영 보다 부자고 신흥부자인 박흥식보다 부자였다. 일제때 왕가의 급용을 핑계대고 몇백원씩 타간 돈과 순종에게 연 9만원, 윤비에게 그 반액으 로 드린 용돈을 이런 저런 핑계로 가로챘다는 소문이 끈질기게 나돌았 다. 결국 그 돈 다 날리고 그 역시 유랑의 신세가 되고 말았긴 하지만-. 조선일보 1999. 08/26(목)
29. 한-영국 교류 이야기
거문도 혼혈아는 서울로...여왕예방 민영환 단발-양복 .
1885년 영국 해군이 거문도를 점거하자 식량을 얻으려고 서도 뱃골에 소 목장을 만들고 수병 하나를 막사에 상주시켰다. 이 목 장에서 목동 노릇을 했던 92세의 김윤삼옹을 병석으로 찾아 뵌 것은 39년 전인 1960년 일이다. 옹은 목동 시절에 외웠던 영어 몇마디를 잊지 않고 있었다.
'커팅 글라스 차오차오'는 풀 베어 소 먹이라는 말이요, '미 식이 차오'는 밥 먹으라는 말이라 했다. 함대의 숙수가 중국 사 람이라 중국말도 섞여있음을 알 수 있다. 또 '베이수'는 생선, '몬태'는 언덕바지라 기억하고 있었는데, 아마도 피시(fish)나 마운트(mount)가 아닌가 싶었다. 구레나룻이 무성한 목장 담당 수병으로부터 '요오-요오 요오이-'로 시작하는 소 모으는 요 들송도 배웠다면서 불러주기도 했다. 막사는 개벽지꽃이 현란하 게 피는 언덕바지에 있었으며 이 수병은 자기 아들과 같은 나이 라면서 이 목동을 끌어안고 볼대기를 자주 하곤 했는데 수염 끝 이 무척 아팠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영국 군인들은 내외가 깍듯하여 섬 부녀자를 만나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외면하고 서 있었으며 동네 샘에서 물 한 바가지 퍼마시고는 마신 바가지 수만큼 동전을 놓고 갔다 한다. 한 수병 이 서도 주막에서 술에 취해 40대 주모를 끌어안고 입을 맞춘 사 건이 일어났다. 주모의 아들이 보고 뛰어 다니며 고함을 쳤고 몽 둥이 든 섬 장정들이 잡아다 함대에 인도했다. 이튿날 통변(통역) 이 섬을 돌아다니며 해변으로 섬 사람을 불러 모아 놓고 이 키스 수병을 응징하는데, 뱃머리에서 바다에 떨어트리고 기어나오면 다시 밀어뜨리길 여러번 하더라 했다.
'자기네 여자 임금(빅토리아 여왕) 생신날'에도 섬 사람 불러 모아 놓고 댕구(대포)를 쏘는데 택보(군함의 섬 사람들 별칭)가 누리디디- 번쩍 꽝! 하니 이어 아가리가 누리디디-번쩍 꽝! 하 던 일을 되뇌었다. 이 댕구 소리에 섬 개들이 놀라 모조리 산으 로 도망쳐 내려오지 않는 바람에 함대에서 조를 짜 찾아다니길 사흘 동안이나 했다. 함대에서는 서양 개들을 기르고 있었는데 그 개들을 앞세운 바람에 섬 개들이 나타나지 못해 그렇게 늦어 졌다고 했다. 거문도 개와 빅토리아 여왕의 기구한 만남이 아닐 수 없다. 섬 사람들의 구전에 따르면 영국 함대가 거문도를 떠난 후 한 섬여인이 아이를 낳았는데 노랑머리 파란눈의 혼혈아였다 한다. 꽤 장성한 후 서울로 데려간 것까지만 알고 그 뒤 소식은 모른다고 했다. 당시 전후하여 한영간 외교 문서에서도 이 혼혈 아에 관한 어떤 기록도 찾아볼 수는 없다.
백인과 피가 섞인 역사는 병자호란 후인 1628년으로 소급된다. 당시 경주 동해안에 표류한 화란 선원 워터블레는 조선에 귀화, 훈련도감 외인부대에 다니면서 한국 여인과 결혼, 1남1녀를 두었 으며 그 후 1653년 제주도 모슬포 인근에 표착한 화란 선원 하멜 등 일행중 3명만이 남원에 귀화해 한국아내를 얻어 아들딸 낳고 자손 대대로 도기 굽는 일을 가업으로 물리며 살았다. 이 17세기 의 혼혈아이후로 최초였을 거문도 혼혈아의 행방을 추적할 수 없 으니 안타깝기만 하다.
거문도와 관계되기 70여년 전인 1816에 영국의 해군 군함인 알세스트호는 한반도 서해안을 측량하면서 내륙까지 찾아들어 많 은 교류를 하고 있다. 함장인 베이질 홀이 본국으로 돌아가는 도 중에 때마침 대서양 외딴 섬 세인트 헬레나에 유배살이를 하고있 던 나폴레옹을 방문한다. 만난 자리에서 홀 함장은 한국과 류큐 (류구) 풍물을 스케치한 그림 몇 장을 나폴레옹에게 보였다. 그 가운데에는 테가 큰 갓을 쓰고 긴 장죽을 물고있는 하얀 수염의 노인 스케치가 있었는데 그에게 별나게 관심을 보이며 이것저것 물었다. 평생 전쟁으로 지새운 그에게 류큐 사람들은 무기를 모 르고 산다는 말과, 전쟁과는 거리가 먼 이 큰 갓과 장죽에 뭣인 가 충격을 느꼈을 법한 일이다. 이렇게 서구와 접촉을 시작해 나 갔던 은둔의 나라 한국이었다.
충정공 민영환이 러시아 마지막 황제인 니콜라이 2세 대관식 에 하객으로 참석했을 때 일이다. 식전은 크렘린궁 안에 있는 교 회에서 베풀어졌는데 관을 쓰는 의식이기에 식장에는 어떤 사람 도 관을 벗고 들어가게끔 돼있었다. 충정공은 고민했다. 우리 한 국에서 관은 바로 인격이나 직책의 상징이다. 관을 벗는다는 것 은 인격 파괴일 뿐 아니라 황제를 대신한 사명을 포기하는 일이 다. 그러니 벗고서 식장에 들어갈 수는 없는 일이요 식장에 참석 하기 위해 수만리길 시달려가며 왔는데 들어가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대단한 갈등을 겪었음 직하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식장이 내려다보이는 문밖에 서서 식을 지켜보아야 했던 것이다.
이런 일이 있은지 3년 뒤인 1897년 충정공은 영국 빅토리아 여왕 즉위 60년을 축하하는 하객으로 버킹엄궁으로 여왕을 예방 한다. 당일 충정공이 쓴 일기는 이렇다. '여제를 뵈오니 얼굴은 둥글고 턱이 두툼하며 정신이 싱싱하여 조금도 피로한 기색이 없 었다. 절차대로 나아가 국서를 봉정하니 여제도 절차대로 받으셨 다. 또 친서를 봉정하니 귀국의 대군주 폐하께서는 성안하옵신가 하고 물으매 그러하오이다 하고 대답하고 절차대로 물러나왔다' 했다.
한데 황현은 그의 일기인 '매천야록'에 이렇게 적고있다.
한국 사람은 머리와 관을 소중히 한다는 소문을 들어 알고 있 었던지 여왕은 충정공이 관에 도포 차림일 것을 예상했다는 것이 다. 한데 단발에 양복 차림인 것을 보고 예상에 어긋났다 하고 이 말을 들은 사람이나 민공 자신도 단발 양복을 국체에 어긋난 차림으로 후회했다는 것이다. 국법으로 단발령이 내린 이후 일이 기에 국법에 맞추어 차림을 바꾼 것인지 상투 머리에관을 쓰고 도포 차림을 하는 것이 국제 관행에 이질감을 주기에 개명 사상 을 발휘하여 차림을 바꾼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또한 당시 단발 에 저항했던 보수 세력이 지어낸 말인지도 알 수 없는 일이고-.
서양 여자가 길을 걸으면 돌팔매질을 곧잘 하던 1900년 전후 로 영국의 63세 난 할머니 탐험가 이사벨라 비숍은 대담하게도 배로 한강을 역상하여 금강산을 구경하고 있다. 그가 한국을 떠 날 때 친구인 의사 스튜어트는 그의 심장 활동이 약화되고 한쪽 폐에 질환이 있어 맥박이 느리고 호흡이 곤란하다며 여행을 만류 했으나 막무가내고 한국에 와 금강산을 구경하고 있다. 도중 주 막에서 자는데 많은 마을 여인과 아이들이 몰려와 입은 옷을 만 져보고 들추어보는 것까지는 좋으나 머리 핀을 빼고 머리를 풀어 헤치는가 하면 소매를 거둬 올려 꼬집음으로써 저희네와 같은 사 람인가를 확인하기도 했다.
우울했던 고종황제 즉위식에도 참석했다. '하늘은 어둡고 음 산하며 살을 에는 듯한 차가운 동풍이 불고 있었다. 이런 날씨는 한국에서 불길한 조짐'이라고 일본 세력에 강요된 이 원치않은 즉위식날 날씨를 적고 있다. 그는 고종황제와 시해 직전의 민황 후를 세 차례나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관심사는 주로 여왕에 관한 것이었다. 왕실 비용이 어떠하며 여왕의 경비를 개인이 부 담하느냐 국고 부담이냐, 탁지부대신이 여왕의 경비에 간섭할 수 있느냐,또 여왕이 대신을 해임할 수 있느냐 등을 물었다. 알현하 는 동안 문밖의 한 사나이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이를 의식하여 황제의 말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했다.
한국과 영국의 관계를 존 메이저 영국 전 총리는 200년이 넘 었다고 했다.
1797년 정조 21년에 영국의 브루턴 함장이 해로를 측량하려고 동래에 상륙, 우리 관원과 만났다는 영국쪽 기록을 바탕으로 한 말이다. 한데 '정조실록'에 보면 동래부사의 보고에 아란타-곧 화란으로 돼있다. 문헌 '주영편'에 보면 동래부사와 첨사 비장이 이 배에 승선하여 응대를 받았으며 3천섬을 실을 만한 크기에 선 원 50명이 타고있다 했다. 키들이 장대만하고 콧등이 우뚝한데 광대뼈가 없어 마치 은행 열매를 모로 보는 것 같다고도 했다.옷은 협착하기 짝이 없어 무릎을 굽힐 수 없어 궤자에 걸터앉으며 필담코자 글을 쓰는데 체가 마치 구름 흐르듯 했다. 조총 한 자 루를 내보이는데 화승을 쓰지 않고 총등에 메뚜기 업듯이 총알을 업혀 쏘니 빠르기가 이를데없었다. 동래 앞바다를 떠나가는데 쏜 살같았고 왜관에서 왜인이 천리안으로 들여다보니 떠나자마자 대 마도에 접근해 있더라 했다. 비교적 상세히 기록돼있는 한-영 첫 만남이다.
그보다 한결 앞선 선조 연간의 기록인 '지봉유설'에 보면 흥 양 앞바다에 이양선이 들어왔는데 몇 층 다락의 큰 쇠배인지라 아군의 공격에도 까딱않고 사라졌다 하고 후에 일본 사신에게 물 으니 영결리배라 했다는 것이다. 옛 한국 식자들은 영결리는 밤 오경이 이경밖에 안되어 양갈비를 삶기 시작, 익을 만하면 날이 샌다 하고 보릿가루를 먹고 가죽옷을 입으며 배를 집으로 삼는다 했다. 또 여왕을 군(Queen)이라 한다고도 했다. 교류 200년만의 대성사로 그 '군'이 글피인 19일 한국 땅에 발을 딛는다.
조선일보 1999.4.5 이규태
30. 용정 3.13독립운동
1919년 3월 13일 만주 북간도 용정에서 조선독립 만세 함성이 울려 퍼졌다. 서울의 3․1운동 소식을 접한 이곳 독립운동 유지들이 이날 서전 벌판에서 고국의 독립선언을 축하하는 군중집회를 열었다. 3만명 이 참가한 집회였다.
군중들은 "아 조선민족은 민족의 독립을 선언하노라…"로 시작되는 독립선언 포고문을 낭독한 뒤 용정 시가지로 행진해갔다. 일경은 무차 별 사격을 가했다. 공덕흡 등 19명이 순국했다. 이 운동은 해외 독립 운동의 기폭제가 됐다. 만주와 연해주에서 항일 무장투쟁이 시작된 결 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 운동을 주도한 사람은 규암 김약연 목사와 초대 연변대 총장을 지낸 임민호 등이다. 일찍부터 신학문에 눈뜬 규암은 만주 독립운동의 요람이었던 명동촌의 중심인물이었다. 이곳을 개척하고 명동학교와 교 회를 세워 젊은이들에게 독립 의지를 심어주는데 앞장섰다.
중국 5․4운동에 많은 영향을 준것으로 평가받았던 이 운동은 그러 나,중국이 사회주의 체제로 바뀌면서 자연 잊혀져갔다. 조선족들의 운 신의 폭이 좁아진데다 문혁 기간에는 심한 박해까지 받았다. 임민호는 소련 유학을 한 '죄'로 홍위병들에게 길거리로 끌려다니다 참살당했 다.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부인 김찬희는 정신이상을 일으켜 사망했다 고 한다.
역사의 그늘에 가려졌던 이 운동은 중국이 변하면서 다시 우리의 현대사 무대에 드러나게 되었다. 독립만세 함성이메아리쳤던 서전 벌 판 자리에는 '3․13 반일의사릉'이 세워졌다. 엊그제는 80년만에 처음 국내 인사들까지 참가한 가운데 성대한 기념식이 열렸다. 독립정신을 기리는 것도 시대와 체제를 타는 것일까. 이런 운동을 잊지 않고 이어 가는 것 자체가 독립정신일 것이다. 조선일보 1999.3.16
31. "日민간업자도 한국인 위안부 모집"
한림대 객원교수이자 재미사학자인 방선주 교수(66)는 1일 조선총독부와 함께 일제시대의 한국식민통치 양대기구였던 조선군사령부가 민간매춘업자들을 통해 한국인 여성 703명을 위안부로 모집, 버마(현 미얀마)를 비롯한 동남아 각지의 전선에 분산 배치했음을 증명하는 한 일본 민간매춘업자의 미군 포로심문서를 공개했다.
방교수가 미국 워싱턴 소재 미정부기록보존소에서 발굴한 이 영문 자료는 미군이 한국인 위안부 20명과 함께 1944년 8월10일 버마 와잉마우에서 체포한 일본인 민간매춘업자 기다무라 부부를 조사한 것.
이 자료에 따르면 서울에서 요리점을 경영하던 기다무라는 1942년 조선군사령부의 지시로 성격, 외모, 나이에 따라 1인당 300~1천엔의 선금을 가족들에게 주고 한국인 여성 22명을 사들여 선박편으로 버마로 데려갔으며 이 배에는 일본인 남녀 민간매춘업자 90명 가량과 한국인 여성 703명이 타고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기다무라는 조선군사령부가 자신처럼 조선에서 요리점을 하고 경영하고 있는 일본 민간인들에게 한국인 위안부를 모집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밝혔다.
조선일보 1999.3.1(월)
32. 3.1운동 격문-전단 찾았다
3․1운동 7개월 후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국내 청년 조직이 연 계, 또한 차례의 거족적 민족운동을 계획했음을 보여주는 격문 원본들 과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와 함께 뿌려졌던 전단, 시위 때 불렸던 행진가 가사 등1급 독립운동 사료들이 무더기로 새로 발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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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 3․1운동 당시 시위 현장에서 불렸던 '독립가'가사. "터졌고나 터졌고나 조션독립성/십년을 참고 참아 이졔 터졌네/삼천리 금수강산 이천만 민족/ 사랏고나 사랏고나 이 한소리에/(후렴)만셰 만셰 독립만셰/만셰 만셰 조선만만셰"등 2절로 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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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신용하 사회과학대학장은 당시 대구-경주의 독립시위를 주 도했던 독립운동가 손달진(1895~1965) 선생 자제인 손탁(74․경남 진 주시 칠암동)씨로부터 자료 일체를 기증받아 28일 3․1운동 80주년을 맞아공 개했다. 자료들은 3․1운동 전단인 '경고 아 이텬만 동포'와시 위 노래인 '독립가' 필사본,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이동녕 내무총장 이 1919년 10월 15일 국내 학생들에게 재차 봉기를 호소하는 포고 제 1호 '남녀 학생에게', 국내 청년 조직인 대한청년단(단장 안재홍)이 9월 30일 발표한 격문 '적의 관공리 된 동포에게' 등 4점이다.
손탁씨는 부친이 3․1 운동 때 수집, 해방 직전까지 경주 집 벽장 천장에 숨겼던 자료들을 설날 직전 택배로 신 교수에게 전달했다.
현재 협심증으로 요양중인 손씨는 "선친은 6․25 때 다른 귀중 서 화와 고서들은 다 훼손되는 상황에서도 이들 자료는 나무 상자에 담아 고이 뒤뜰에파묻었다"며 "몇번 공개를 망설이다가 '민족의 자료는 갈 곳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에서 연구 및 처리를 신 교수에게 일임키로 했다"고 말했다.
자료 중 특히 주목되는 것은 임정 내무총장의 포고 제1호와 대한청 년단의격문. 포고문은 3․1운동 후 7개월 동안 남녀 학생들이 '순교자 같은 용사적 태도'로 항일 자세를 보여준 것에 감사를 표하고, "적은 소위'무차별' 정책이란 간계와 기만으로 또다시 우리 민족의 정신을 마비시키려 하니 적의 심장이 서늘하도록 다시 한번 천지가 진동하는 만세를 합창하자"고 촉구했다.
대한청년단의 안재홍 단장은 '적의 관공리 된 동포에게'란 격문에 서 "고등 교육을 받고 식견을 갖춘 상류인들이 어찌 적의 수하에서 동 포를 파는 반역적 행위를 감히 하랴"고 일제하의 관리들을 질타했 다. 전단 '경고 아 이텬만 동포'는 "자유의 죽음이 속박의 삶보다 나 으리라"는 내용 속에 "난폭과 음모는 절대로 피하라"며 공약 3장의 비 폭력원칙을 재천명했다.
신 교수는 "이처럼 1급자료들이 한꺼번에 발굴되기도 드문 일인데 다 자료의 보존 및 공개 경위가 눈물 겹다"며 "특히 1919년 10월의 2차 봉기 계획은 그동안 학계에도 알져지지 않았던 것이고 당시 민족 운동가들의 국제 감각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라고 말했다.
조선일보 1999.2.8(일) 김태익기자
33. 선구자의 고향 용정의 '항일함성' 되살린다
3.13운동 `선구자의 고향'엔 기념비만...희생자묘역 복원 .
'선구자의 고향' 용정은 여전히 엄숙함 속에 80년전 독립지사들이 독립만세를 외치던 그날을 맞고 있었다. 시내에서 멀리 일송정이 바라다 보이는 이 곳에는 과거의 숨결이 곳곳에 배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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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 3․13만세운동 때 희생됐던 13인의 묘역에 헌화하고 있는 3․13운동기념사업회 관계자들. 희생자 묘역은 90년만에 처음 발견돼 7년여에 걸쳐 복원됐다. [용정=최정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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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은 비교적 현대식으로 바뀌었지만 일경을 피해 달아나던 독립투사의 가쁜 숨소리와 독립을 위한 민중들의 함성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는 듯 했다.
지금은 용정시 제일유치원으로 바뀐 3․13항일운동 집회장소에는 '서전대야유적지'라고 쓰인 작은 기념비만 한 구석에 서 있다. 거사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던 성당의 종루도 사라지고 대신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용정에서 일제의 상징물로 여겨졌던 일본총영사관은 용정시청으로 이용되고 있다.
시청의 한 관계자는 "당시 총영사관의 지하에서는 용정 등 만주에서 활동하다 붙잡혀온 조선 독립투사들이 고문을 당해 매일 비명소리가 들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고 말했다. 성난 파도처럼 태극기를 흔들고 몰려오는 시위대에 일경이 총탄을 퍼부었던 '오층대거리'는 '번영거리'라는 이름으로, '서시장'이 들어서 있는 용정의 가장 번화한 거리가 됐다.
현재 용정의 인구는 20여만명. 그 절반 가량이 조선족이다. 그들은 이제 역사적 사실이 재조명되기 시작하면서 3․13운동에 대한 이해도 확산되고 있는 중이라고 전했다. 이곳에서 만난 이운학씨는 "그동안 만주 항일운동의 중요한 사건이었던 3․13운동이 우리 민족 스스로에게서조차 홀대받아온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라고 개탄했다.
차를 타고 시내를 빠져나와 10분 가량 동쪽으로 가면 합성리촌이 나온다. 3․13 운동 때 희생됐던 13인 묘역이 있는 곳이다. 명동촌으로 가다 용남촌 부근 큰 길에서 논둑길을 따라 가면 왼편 멀리 '떼'도 없는 봉분이 눈에 들어온다. 묘역은 90년 최근갑(73) 당시 용정대외경제문화교류협회장이 '만세 묘지'라고 불리는 곳이 있다는 주변 노인들의 말을 통해 처음 발견한 후 7년여에 걸쳐 복원됐다.
국내의 독지가들이 보내온 돈으로 묘비와 비석이 세워지면서 민족유적지로서의 모습을 갖췄지만, 그래도 황량했다. 묘역 앞은 중국 인 소유의 파밭으로 입구도 좁은 데다 바로 옆에 공장건물이 들어서 있어 들어가기가 쉽지 않았다. 또 이상설 선생이 교육계몽운동을 위해 세운 서전서숙은 실험소학교로 변모해 있었으며, 은진중학터는 군부대로 이용되고 있었다.
세월은 흘러 유적지도 많이 변했지만, 이곳 사람들은 한결같이 '용정 정신'을 잊어서는 안된다고들 했다. 그래서인지 오는 12~13일 열리는 3․13운동 학술대회를 앞두고 들뜬 분위기였다. 이들은 오래 전 일이라 과거사를 집중부각시키는 것이 어려운 현실인데도, 조선족들은 후대에 유적지를 알리고 보존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조선일보 1999.2.26(금) 용정=최원석기자
Ⅴ. 대한민국
1. 전 문교부편수관, 국사교과서 파동 전모밝혀
80년대를 뒤흔든 국사 교과서 개편 파문의 실무 주역이었던 윤종영 전 문교부 역사담당 편수관(현 서울 금천고 교장)이 31일 정년 퇴임을 앞두 고 당시의 개편 작업 전말과 뒷얘기 등을 엮은 회고록 '국사교과서 파동' (혜안간)을 출간했다. 윤씨의 회고록은 때마침 시인 김지하씨가 상고사 바로세우기 운동에 뛰어듦으로써 단군조선 복원 열기가 고조된 시점에 발간됐다는 점에서 비상한 관심을 모은다. 윤씨는 "12년 동안의 재임(1980~ 1992년)중 가장 힘들었던 것은 단군조선을 둘러싼 재야사학자와 기존 학 계의 논쟁이었다"며 "이 때 제기됐던 문제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어 여 기 깊이 관여했던 입장에서 전후 과정을 정확히 알려야겠다는 책임감으 로 이 책을 썼다"고 밝히고 있다.
회고록에선 재야사학계의 교과서 개편 국회청원 운동과 공청회(81년), 조선일보에 의한 고대사 개편 문제제기(86년)등이 계기가 된 국사교과서 개정작업 과정이 당시 자료들과 함께 상세히 전해진다. 단군조선의 실재 여부를 둘러싼 재야와 강단 사학자 간의 건널 수 없는 인식 벽, 이 나라 의 대표적 원로-중진 학자들이 출석한 가운데 이런 문제가 국회에서까지 다뤄져야 하는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 등이 절절히 느껴진다. 특히 86년 광복절 기념 조선일보 '국사교과서 다시 써야 한다' 시리즈로 인해 휴가 지에서 급거 상경했더니 당시 문교부 고위 관리가"오늘 중 국사편찬위원 장을 만나 당장 대책을 세우라"고 지시했다는 얘기에선 졸속 처방을 서 둔 분위기가 엿보인다. 고심 끝에'국사교육심의위원회'를 구성했으나 일 부 교수들은 여론의 열기에 압력을 느껴 참여를 꺼리기도 했으며 어떤 원로는 사표를 내기도 했다는 사실등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얘기도 처 음 공개된다. 또 최종적으로 단군신화를 역사적 사실의 반영으로 파악하 고 고조선이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형성이었다는 사실을 중시한다는등 35 개 조항의 개편안을 확정하자 기독교 측에서 "우리가 어떻게 곰의 자식 일 수 있는가"라며 반대 서명운동을 전개, 교과서 화형식을 하겠다고 공 언한 사실도 공개된다.
한 공직자가 재임 중의 쟁점에 대한 자료와 의견을 꼼꼼히 정리했다는 기록정신과 함께, 지금도 진행 중인 단군조선 논쟁에 대한 시사를 얻을 수 있는 저작이다.
조선일보 1999.8.31 김태익기자
2. "'대한민국' 창안자를 아십니까"
역사학자들 거의 몰라...상해 임시정부서 신석우 선생이 제안
우리 국민 중에 대한민국이라는 국호가 언제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는지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3.1운동 81주년을 맞아 새삼 우리 국호의 창안자가 누구인가가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10여명의 근현대사 전공자들에게 질문했으나 뜻밖에 모른다는 대답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서울대 사회학과 신용하교수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탄생한 상해임시정부의 국호였으며 1948년 8월15일 건국과 함께 계승한 우리의 국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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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 '대한민국'이란 국호를 만든 신석우,조선일보 사장을 지냈던 그는 신간회 차립의주역이기도 했다.
---------------------------------------------------------------------1919년 4월10일 오후10시 중국 상해 프랑스 조계의 김신부로에 있는 허름한 셋집. 밤을 새워 열린 임시정부 첫 의정원(오늘날의 국회)의 가장 중요한 안건은 국호의 결정이었다. 참석 의원은 29명.
처음 「대한민국」이란 명칭을 제안한 사람이 신석우(1894~1953). 그러나 논란이 만만치 않았다. 여운형의원이 반대했다. 대한이란 말은 조선 왕조 말엽 잠깐 쓰다가 망한 이름이니 부활시킬 필요가 없다는 게 이유였다. 그러자 신석우가 되받았다.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흥하자. 결국 표결에 부치기로 했고, 다수결로 대한민국 국호가 채택됐다.
어떻게 많은 역사전공자들조차 대한민국 국호의 발안자를 모르고 있는 것일까.? 한 소장역사학자는 우리 역사학계가 거시적 흐름을 중시하다 보니 개개의 사안과 관련된 인물들에 대한 연구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자연히 「신석우」란 인물에 대한 연구나 일반의 인식도 낮을 수 밖에 없었다.
신석우는 20~30년대 민족운동 과정에서 겉으로 화려하게 드러나진 않았지만 중요한 고비마다 결정적 역할을 했던 거목이었다. 임시 의정원 기사록에 따르면 신석우는 국호 제정 말고도 임정 관제에 군무부 증설, 임정 초대 총리에 이승만 추천, 임시헌장에 병역 포함 등을 관철시키는 등 초기 임정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한국의 언론사에서 굵직한 흔적을 남긴 것은 24년 30세의 나이에 만석꾼 부친을 설득해 8만5000원을 주고 조선일보를 인수한 것이었다. 만성적인 경영난을 겪고 있던 조선일보는 신석우의 인수로 재도약 계기를 마련했으며 사장으로 민족의 스승 월남 이상재선생을 추대하는 등 대대적인 개편을 단행했다.
신석우의 활약은 일제하 최대의 민족운동인 신간회 활동에서 절정에 이른다. 27년 2월15일 오후7시 서울 종로 기독교청년회 대강당에서 열린 신간회 창립총회에서 신석우는 사회를 맡았고 벽초 홍명희가 개회를 선언했으며 이어 이상재가 회장으로 추대됐다. 처음에 이상재선생이 사양하자 신석우는 신간회 회장이 되시는 것이 그렇게도 겁이 나십니까라며 간곡히 설득해 추대를 성사시켰다. 신간회 창립 때 간부 및 발기인은 모두 51명이었다. 그중 조선일보계가 사장 부사장 편집국장 등 9명으로 가장 많았다.
31년 5월 신간회가 해산되자 신변에 위험을 느낀 신석우는 민세 안재홍선생에게 사장직을 물려주고 상해로 탈출했다. 그 후에는 이렇다 할 행적을 보이지 못했다. 신용하교수는 아마도 전재산을 쏟아 부으면서 펼쳤던 독립운동이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는데 대한 실망 때문이었을 것으로 분석하면서 그러나 대한민국이라는 국호 제정이야말로 신석우라는 이름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이유라고 밝혔다.
조선일보 1999.2.29 이한우기자 :
3. 日주민 독도 호적이전 파장 확산…일 치밀한 준비한듯
중앙일보 [ 정치 ] 1999. 12. 27. 月
日주민 독도 호적이전 파장 확산…일 치밀한 준비한듯 일본 시마네(島根) 현의 일부 주민들이 독도로 호적을 옮긴 사실이 드러남에 따라 한.일관계에 여러 가지 파장이 일고 있다.
우선 일본측의 이같은 행동이 은밀히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논란이 일고 있다.
그동안 외교통상부는 '일본 주민들이 호적을 이전하고 있다' 는 정보를 입수하고 여러 차례 외교서한을 통해 확인을 요청했다.
이에 대해 일본 외무성은 공식적인 답변이 없었다.
고작 지난달 말 외무성의 실무자가 "수년간 수명이 다케시마(竹島 : 독도의 일본명) 로 호적을 옮겼다" 는 대답이 처음이었다.
그것도 공식 서한이 아닌 구두로 했으며, '개인 프라이버시' 라는 이유로 명쾌하게 공개하지 않고 있다는 게 정부측의 설명이다.
일본측의 이런 행태에 대해 우리 외교소식통은 27일 "일본의 독도에 대한 집념이 드러난 것" 이라고 지적했다.
그렇지만 정부는 적극적인 대응은 자제하는 모습이다.
외교부 관계자는 "일본은 어떻게든 독도를 '국제분쟁지역' 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를 자극하고 있다" 고 강조했다.
호적 이전도 그런 전략의 하나라고 분석한다.
무엇보다 우리가 독도에 대해 '실효적 지배' 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가 과민반응을 보이는 것은 일본의 전략에 말려드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게 외교통상부의 판단이다.
그러나 정치권과 학계 일각의 시각은 다르다.
올초에 타결한 한.일어업협정이 이런 움직임의 빌미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한나라당은 성명을 발표, "새 어업협정에서 독도수역을 양국 중간관리수역으로 규정함으로써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을 부추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며 정부측을 비판했다.
이에 대해 외교부 관계자는 "국제법규상 일반 어업협정의 수역구획은 영해 개념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고 해명했다.
◇ 독도 현황〓해양경찰청 소속 경비대 병력 40여명이 상주하고 있다.
독도에는 2명의 우리 주민이 주민등록을 옮겨놓았고, 호적을 독도에 둔 주민은 11세대 42명에 이르는 것으로 외교부는 파악하고 있다.
4. 독도 본적 옮긴 120명 내달 16일 독도 방문 ...
한겨레신문 [ 사회 ] 2000. 3. 25. 土
편집시각 2000년03월25일14시50분 KST 한겨레/사회 [독도] 독도 본적 옮긴 120명 내달 16일 독도 방문 독도로 본적을 옮긴 사람들이 처음으로 '제2의 고향땅'을 밟는다.
부산의 극일운동시민연합은 다음달 16일 독도에 본적을 갖고 있는 120명이 참가한 가운데 `제2의 고향 방문 및 경비대 위문행사'를 갖는다고 25일 밝혔다.
이를 위해 최근 경북도로부터 울릉군 직원의 인솔하에 지정된 통로만을 이용한다는 조건으로 독도에 들어가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
참가자들은 다음달 15일 포항항을 출발, 울릉도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인 16일 독도에 들어가 1시간 가량 머물면서 독도사수결의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극일운동시민연합 관계자는 "본적을 독도로 옮긴 사람들에게 고향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이번 행사를 준비했다"며 "앞으로도 이와 같은 행사를 계속 추진해 독도에 대한 애향심을 키워나가도록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한편 울릉군에 따르면 25일 현재 독도로 본적을 옮긴 사람은 82가구 299명으로 집계됐다.
5. 독도 '里' 로 행정독립
중앙일보 [ 사회 ] 2000. 3. 20. 月
독도 '里' 로 행정독립 독도가 행정구역상 이(里) 라는 자격을 갖게 됐다.
경북 울릉군의회는 20일 시민단체들이 지난 1월 제출한 '독도리 신설 청원' 을 받아들여 관련 조례 개정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울릉군은 경북도와 협의를 거쳐 20일 안에 이를 공포하면 독도는 지금까지의 울릉군 울릉읍 도동리 산 42~76에서 독도리 산 1~37로 행정구역상 지위와 주소가 바뀌게 된다.
현재 독도로 본적을 옮긴 사람은 모두 82가구 2백99명이다.
독도리 신청 청원서를 제출한 4개 단체 중 하나인 극일운동시민연합 황백현(黃白炫.53) 의장은 "독도가 법적으로 이름을 갖게 됨으로써 우리 영토임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며 "독도로 본적을 옮기는 사람이 더 늘어나게 될 것" 이라고 말했다
6. '일본, 독도주변 해저케이블 설치'
중앙일보 1999. 11. 18. 木
'일본, 독도주변 해저케이블 설치' 한나라당 김광원 의원은 18일 "일본이 해저광케이블을 독도 인접 공동수역 해저에 설치했다"면서 "이는 독도를 일본의 영토로 점령하기 위한 장단기 대책의 일환"이라고 주장했다.
김 의원은 이날 국회 예결위 정책질의에서 "일본이 시마네현에 독도를 편입시키고 일본인을 호적등록하고, 자위대가 지난해 11월 비밀리에 독도 탈환 모의상륙훈련을 실시한데 이어 JIH(Japan Information Highway) 해저광케이블을 독도 주변공동수역에 설치했다"면서 "이 때문에 일본 열도를 따라 직선으로 설치하면 350㎞에불과한 케이블 길이가 480㎞로 늘어났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한.일 어업협정을 일본이 일방적으로 파기한 지난해 1월부터 일본이 이같은 케이블공사를 진행했다며 정부의 대책을 따진뒤 케이블공사로 인한 홍게잡이어선의 피해 6억4천여만원의 보상대책을 마련하라고 촉구했다.[서울=연합]
7. '독도는 한국 땅' 일본정부 1883년에도 인정
중앙일보 999. 12. 2. 木
'독도는 한국 땅' 일본정부 1883년에도 인정 ▲ 1883년에 간행된 환영수로지 제2권. 신(新) 한.일 어업협정에 따라 독도 영유권 문제가 다시 불거진 가운데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알려주는 일본측 자료인 '수로지(水路誌) ' 최고(最古) 본이 공개됐다.
이번에 공개된 '환영수로지' 는 1883년(명치 16년) 에 간행된 것으로 지금까지 학계에서 최고본으로 알려졌던 1886년(명치 19년) 것보다 3년 앞선 것이다.
이 문서는 일본의 공식문헌에도 기록돼 있지 않은 것이어서 자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1952년에 일본 해상 보안청이 발간한 '조선남동안 수로지' 의 범례에도 1886년 것을 가장 오래된 수로지로 기록하고 있다.
이 자료를 공개한 이종학 독도박물관장은 "독도를 한국 영토로 기록한 최고본으로서의 의미 뿐만 아니라 일본의 국가기관이 독도를 한국영토로 인정했다는 사실을 입증해주는 것이어서 독도 영유권 문제에서 한국에 유리한 자료" 라고 평가했다.
환영수로지' 란 일본 해군수로국이 동아시아의 해안 자료를 기록한 책자로 한국 관련 내용은 조선 동안(東岸) .남안(南岸) .서안(西岸) 으로 구분돼 있다.
독도는 한국의 동해안을 기록한 '조선 동안편' 에 실려있어 일본이 독도를 한국 영토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독도 관련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리앙쿠르 열암(列岩.늘어선 섬) ' 이란 이름으로 섬의 위치와 크기, 섬 사이의 거리 등을 명시하고 있다.
또 "리앙쿠르 열암이란 이름은 1849년 독도를 '발견' 했던 프랑스 선박 '리앙쿠르' 호의 이름을 딴 것" 이라고 설명돼 있다.
한편 일본이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과정은 수로지의 변천사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번에 공개된 자료를 포함해 1945년까지 제작된 수로지에서는 독도를 한국의 영토로 기록하고 있으나 1952년 판에서는 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시켰다.
1952년 판은 해상보안청에서 그 이전 판은 해군수로부에서 제작했다.
8. 野 6․3세대, 한중어협 비난
중앙일보 [ 정치 ] 2000. 3. 22. 水
野 6․3세대, 한중어협 비난 한나라당의 한.중 어업협상 비난은 22일에도 계속됐다.
홍사덕(洪思德) 선대위원장과 김덕룡(金德龍) 부총재, 서청원(徐淸源) 선대본부장, 이부영(李富榮) 총무 등 총선에 출마한 7명의 6.3세대 들은 22일 "학창시절 대일(對日) 굴욕외교 반대에 몸을 던졌던 심정으로 김대중(金大中) 정권의 신(新) 굴욕외교를 저지하겠다" 고 선언했다.
이날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열린 현승일(玄勝一.대구남구) 위원장 후원회에서다.
洪위원장 등은 "독도 앞바다를 일본에 내주더니 이어도 앞바다까지 중국에 넘겨준 셈" 이라고 지적했다.
지난해 한.일협정에 이어 이번에는 동중국해의 황금어장을 잃게 됐다는 지적이다.
이와 함께 한나라당은 이날 金대통령과 김종필(金鍾泌) 전 총리, 홍순영(洪淳瑛) 전 외교부장관 등 협상에 관여한 외교라인을 '굴욕외교' 로 규정했다.
장광근(張光根) 대변인은 "황금어장을 뺏긴 것은 매국행위" 라며 "국민 앞에 석고대죄하라" 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편 이한구(李漢久) 선대위 정책위원장은 이날 독도 개발 특별법 제정 등 해양주권 강화를 골자로 한 정책공약을 발표했다.
한.일어협 피해보상을 위한 '수산업발전기금' 을 활성화하고 국회에는 해양국가발전위원회를 신설하겠다는 등의 내용이다.
9. '미군 양민학살' 12곳 현장조사 ...
한겨레신문 [ 사회 ] 1999. 11. 9. 火
경북도의회(의장 장성호)가 미군의 양민학살 지역 12곳에 대한 현장조사에 나선다.
도의회 운영위원회는 9일 모임을 갖고 양민학살 진상규명 특별위원회 구성을 결의했다.
운영위는 10일중 본의회의 의결을 거쳐 15명의 의원들로 특위를 구성한 뒤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갈 예정이다.
의원들은 이날 결의문에서 한국전쟁을 전후해 냉전의 이념대결에서 죄없는 선량한 양민들이 무참히 학살됐지만 아직까지 진상이 밝혀지지 않아 억울한 희생자들의 명예회복과 보상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앞으로 다시는 양민의 학살행위나 가혹행위가 재발되지 않도록 진실을 규명하겠다고 밝혔다.
특위는 2000년 5월말까지 경북지역에서 미군들이 양민을 학살했다고 주장하는 12곳과 국군에 의해 한마을 주민 86명이 떼죽음을 당한 문경시 산북면 석봉리 석달마을을 찾아가 관련자료와 증언 등을 수집할 계획이다.
채희영(59․문경) 의원은 도의회 차원에서 조사작업을 끝낸 뒤 진상규명을 촉구하고 중앙정부를 상대로 희생자들의 위령비 건립 등 명예회복과 보상이 이뤄지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도의회 양민학살 특위가 현장조사에 나설 지역은 다음과 같다.
△구미 형곡동=100여명 사망 또는 중상 △칠곡 왜관교=300여명 사망 △예천 보문면 산성리=50명 사망 90여명 중경상 △고령 득성교=수십명 사망 △독도=150여명 사망․실종 △포항시 송골계곡=100여명 사망 △포항시 흥해면 북송리=40명 사망 △포항시 송라면 광천리=16명 사망 △구미시 구평동=18명 사망 △김천시 농소면=수십명 사망 △예천 감천면=26명 사망 △의성군 금성면 제오2리=17명 사망 △문경시 산북면 석봉리=86명 사망
10. 한․일 어선 고기잡이 경쟁
중앙일보 1999. 12. 9. 木
한․일 어선 고기잡이 경쟁 지난 4일 오후 6시쯤. 제주도 남쪽 30마일 해상에서 부산 금성수산 소속 대형선망 95금성호가 그물(길이 1.2㎞) 을 둘러치기 시작했다.
20분쯤 뒤 금성호가 그물을 끌어 올리자 일본 선망어선 21원복환(源福丸) 이 1.5㎞ 정도 떨어진 곳에 그물을 내리기 시작했다.
일본 어선도 20분쯤 후 그물을 올려 생선들을 운반선에 실어 보낸 뒤 다시 고기떼를 좇아 이동했다.
금성호가 잡은 생선을 운반선에 모두 옮겨실은 시간은 이날 오후 7시50분. 원복환이 떠난 지 30분 뒤였다.
일본 어선이 1시간 동안 잡은 고기는 7t. 금성호도 7t정도를 잡기는 했지만 시간이 50분 더 걸렸다.
그물을 끌어올려 정리하는 양망기(揚網機) 성능 차이 때문이다.
일본어선 양망기는 그물을 끌어올리면서 자동으로 그물을 정리한다.
그러나 금성호 양망기는 반자동으로 기계가 끌어올린 그물을 선원 3명이 차곡차곡 쌓아야 한다.
95금성호 어로장 한수찬(韓秀燦.48) 씨는 "우리 어선이 그물질을 두 번 하는 동안 일본 배는 세 번 한다" 며 "고기떼가 몰리는 곳마다 달려들어 재빨리 고기를 잡아 가는 일본 배가 얄밉기도 하고 억울한 생각도 든다" 고 말했다.
한일어업협정 이후 배타적 경제수역(EEZ) 에서 한일 어선들이 조업 경쟁이 치열하다.
우리 어선이 그물을 친 해역에 일본 어선이 바싹 붙어 고기를 잡는가 하면 일본 어선이 먼저 자리잡고 조업하는 장소 주변에 우리 어선이 다가가기 일쑤다.
신경전과 가벼운 시비도 벌어진다.
한일 양국 어선이 함께 조업하는 해역은 제주도 남쪽 30~50마일(2백43~2백53해구) 과 소흑산도 근해. 지난 4일에는 일본 선망 1백8척이 이 해역에서 고등어.참치 등을 6백57t 잡은 것으로 해양수산부에 신고됐다.
본선 1척.불배(燈船) 2척.운반선 2척으로 구성된 1통이 평균 24t을 잡았다.
그러나 같은 날 같은 해역에 출어한 부산선적 대형선망 1백50척(33통) 은 통당 평균 15t밖에 잡지 못했다.
어군탐지기는 성능이 같은 제품(일제) 을 사용하지만 투망기(投網機) .양망기 성능 차이로 하루 평균 어획량이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지난 2월 한일어업협정 발효 이후 우리 나라 EEZ에 소규모로 일본 어선이 들어왔었지만 대규모로 입어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지난달 말부터 일본 근해에 머물던 고등어.전갱이.삼치떼가 한국쪽으로 이동하자 일본 선단이 고기를 뒤쫓아 왔다.
이에 대해 수협 관계자는 "우리 어선들은 일본 수역에서 전갱이.잡어 등 비교적 값싼 고기들을 주로 잡았는데 일본 어선들은 우리 해역에 들어와 좋은 장비로 비싼 고기를 훑어가고 있다" 며 분통을 터뜨렸다.
11. 한․중 어협도 외교실수…동중국해 황금어장 잃을판
중앙일보 [ 정치 ] 2000. 3. 20. 月
한․중 어협도 외교실수…동중국해 황금어장 잃을판 관련기사: [한․중 어협 외교실수] 한․일 어협파동 재판 우려 정부가 중국과 어업협정과 관련한 양해각서에 가(假) 서명(1998년 11월 11일) 하면서 중국측 법령(조업금지수역) 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는 실수를 저질러 황금어장을 잃을 상황에 처한 것으로 드러났다.
정부는 99년 4월 뒤늦게 이런 실수를 알고 양해각서와 관련한 법령을 철회해 달라고 줄곧 요청했지만 중국측이 거부, 본협정 정식서명을 놓고 협상이 장기간 교착상태에 빠졌다.
이에 따라 "본협정의 정식서명이 늦어져 우리 영해에서 중국 어선의 남획을 막지 못하는 국익손실 상황도 계속되고 있다" 고 19일 정부 관계자가 인정했다.
한.중 어협 실무회담은 문민정부 첫 해인 93년 12월(당시 韓昇洲외무부장관) 시작해 98년 11월 김선길(金善吉) 당시 해양수산부장관이 어협 양해각서에 가서명할 때까지 모두 19차례 계속 됐었다.
한편 해양수산부는 98년 9월 한.일 신어업 협정에서도 기존 어업실적중 22만 9천t을 포기해야 하는 내용에 서명, 동.남해안 어민에게 큰 타격을 주었으며 당시도 金전장관이 재직 중이었다.
98년 한.일 신어업협정에 이어 한.중 어업협상에서의 이같은 외교적 실책을 정부는 비밀에 부치고 있다.
중국법령에 따른 조업금지수역에는 우리의 쌍끌이.통발.안강망어선 1천5백척이 조기.갈치.꽃게의 전체 어획량 중 절반 이상을 잡는 황금어장인 '동중국해 어장' 의 일부가 들어가 있다.
이와 함께 지난해 초 당시 정상천(鄭相千) 해양수산부장관이 "이어도를 한.중어협에서 배타적 경제수역(EEZ) 에 포함되도록 할 것" 이라고 다짐했으나 아직 명문화된 합의를 만들지 못하고 있다.
◇ 양해각서〓외교통상부.해양수산부에 따르면 어업협정에 가서명하면서 해양수산장관과 중국 농업부장 명의로 양해각서에도 가서명했다.
양해각서는 '잠정조치수역 및 과도수역 이남의 중국측 일부 수역에서 연안국이 현재 시행하고 있는 어업에 관한 법령을 존중하고 자국의 국민과 어선이 이런 법령을 준수하도록 필요한 조치를 취한다' 고 규정했다.
가서명 때 "이 수역에 적용될 중국법령이 우리의 조업권을 거의 침해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고 정부 관계자는 기억했다.
그러나 중국은 지난해 4월 양쯔(揚子) 강 하구 수역 관련법으로 외국어선 조업을 금지한 '뤼쓰(呂四) .창장커우(長江口) 및 저우산(舟山) 어장해역에서의 어로허가관리규정' 을 제시하면서 우리측의 조업을 규제하겠다고 통보했다.
◇ 협상교착 및 해명〓이후 우리 정부는 법령 철회를 요구했으나 중국은 "확인의무는 한국에 있으며 양해각서를 준수하라" 고 일축했다.
지난 1년간 해양수산부의 노력이 겉돌자 외교부가 지난 13일 수석대표로 나섰으나 협상이 결렬됐다.
해양수산부 당국자는 "가서명 직전 관련법 법령을 확인하려 했으나 중국측이 정비 중에 있다며 이를 주지 않았다" 고 책임을 중국측에 떠넘겼다.
그러나 해양수산부 자문위원인 김찬규(金燦奎) 경희대 명예교수는 "가서명 전에 관련법을 확인할 의무는 우리측에 있다" 고 강조했다.
12. 한일어업협상, 통계도 전략도 없었다
조선일보는 17일부터 `실패의 연구'라는 이름의 심층 취재물을 새로 연재합니다. 크게는 국가전략부터 정부 정책, 그리고 작게는 특정기업 의 경영 실패사례를 정밀 분석, 똑같은 실수를 다시 되풀이하지 말자는 취지입니다. 연중 수시로 독자 여러분을 찾아갈 `실패의 연구'는 공 정한 사회감시와 비판의 기능을 충실히 다하려는 조선일보의 새로운 기 획물입니다. 최근 최대의 실패작으로 비판받고 있는 한-일 어업협상을 첫 검증 대상으로 삼아 실패의 원인과 문제점, 그리고 대응방안을 점검 해봅니다. (편집자).
최대피해 어민들, 남획-불법어로로 협상불리 자초 .
우리 어민 쪽에는 어떤 문제점이 있을까.
우선 어민들이 제시하는 어획량 통계가 부정확하고, 일부 피해 액수 는 과장됐을 수 있음을 들 수 있다. 예를 들어 쌍끌이 어선 추가협상에 서 한국측은 일본 배타적경제수역(EEZ) 내 쌍끌이 어획량을 연간 6500t 이라고 제시했다가 망신을 당했다는 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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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측이 "어획량 통계의 정확성을 믿을 수 없다"며 근거를 대라는 요구에 대응을 하지 못했다는 것. 해양부 관계자는 "어획량 6500t은 기 선저인망 수협이 작년 11월 보고한 숫자이나 아무런 근거자료가 없었다" 고 말했다.
기선저인망 수협 간부도 전화 인터뷰에서 "근거가 무엇이냐"는 질문 에 "96, 97년 전체 어획량과 98년에 실시한 샘플 조사 및 출어 빈도수를 감안해서 나온 추정치"라고 고백했다.
어민들의 무리한 조업 형태도 협상팀의 발목을 붙잡는 요인이다. 대 게잡이의 경우 어민들은 해저면에 그물을 설치하는 저자망 방식으로 일 본수역 내에서 '싹쓸이' 조업을 해왔다.
지난해 영덕지청에서 몸통 길이 9㎝ 미만의 대게 치어를 잡지 못하도 록 단속을 벌였을 정도다. 장어통발도 성어기때 100t급 어선 100여척이 어구 7000~8000개를 싣고 일본 해역에서 조업해왔다. 5t 미만의 어선으 로 어구 600~700개를 싣고 장어를 잡는 일본 어선들에겐 공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일본 어민들은 자기네 국회에 이를 호소, '장어통발과 대 게저자망 조업 금지' 결의안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부경대 해양관련학과의 한 교수는 "금지구역 내 불법 어로나 사매매 등에 따른 어획량 통계의 부정확성, 일부 업종의 남획이 협상에 불리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그동안 우리 어민들이 일본 부근 바다에서 저지른 불법-부 정 어로행위가 워낙 극심해 협상 테이블에서 무작정 큰소리 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이번 사태로 인한 어민들의 피해는 예상을 뛰어넘고, 이에 대한 정부 지원 대책도 충분해야 할 것이라는 여론이다. 다만, 어민단체 중에 는 지역 정서를 부추기면서 은근히 피해를 과장하는 사례까지 목격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조선일보 1999.3.16(화) 부산=정웅기기자
13. 야간통금 해제(1982년 1월5일)
전쟁 속에 태어나 지속되는 전란 속에서 제대로 먹고 입고 살지 못한 세대에게 통행금지와 교복은 야간 생활이나 인신자유의 구속 수단이기 이전에 더러는 한숨도 서리고 쓴 웃음도 자아내는 필요악이요 향수다. 통행금지가 없었다면 빈곤 속에 횡행하는 범죄를 감당하기 어려웠을 테고, 교복이 없었다면 사춘기의 옷에 대한 컴플렉스를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구속은 풀릴수록, 인신은 자유로울수록 좋은 것이다. 군사정권이 억압심리를 풀어주는 수단이었다는 비판도 없지 않았으나 이를 계기로 새로운 개방문화가 개막한 것이다. (이규태 조선일보 논설고문).
"밤을 걷어내는 먼동이 텄다. 통금이여 안녕. 마지막 통금을 넘긴 5일 새벽 4시는 유보됐던 권리가 회복되고 '24'시가 비로소 시작되는, 기억해야 할 시간이었다. 그것은 37년 세월동안 일상속에서 길들여졌던 밤의 통제와 제한이 마지막을 고하는 순간이었고, 또 다른 자제와 절제의 시민의식이 요구되는 시작이기도 했다.서울 한복판의 동맥, 서대문 로터리를 가로막았던 육 중한 이 바리케이트도 앞으로는 볼수 없게 되겠지--.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것이 마지막인 것보다 값진 것의 출발점이라는 점--."
1982년 1월5일자 조선일보 1면에 바리케이트를 걷어내는 사진에 붙은 설명이다. 이 기사는 한 편의 시처럼, 1945년 9월 미국사령관 하지의 군정포고 1호로 이 땅에 시작된 통행금지가 해제된 기쁨을 오롯이 드러내고 있다.
통금 마지막날 표정은 어떠했을까? "얼큰히 술이 오른 취객, 가게문을 막 닫은 상인들. 역과 터미널에서 막차를 내린 여객들. 그리고 마지막 손님을 태운 택시들. 모두가 바빴다. 그러나 평상시 자정에 임박한 때와는 뭔가 달랐다. '이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공연히 유쾌한 걸음걸이들. '통금해제가 오늘밤부터인줄 알았는데요--' 멋적게 머리를 긁적이는 통금위반자. '오늘이 마지막 통금이죠'라는 경찰관의 친절한 말씨. 이제 내일부터 저 거리가 24시간 살아서 숨쉬겠지." 사회면은 30대이상 세대라면 아련한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사이렌 소리, '야통'이 사라지는 풍경을 절제된 문장으로 그리고 있다.
이 조처는 81년 국회에서 민정, 민한, 국민 3당이 만장일치로 통과시키고, 국무회의를 거쳐 이날 전격적으로 실시한 것이었다. 정부는 이와함께 중고교생의 머리모양도 자율화시키는 한편, 교복도 1년 준비기간을 거쳐 자유복장으로 바꾸기로 했다.
야통 해제 및 중고교생 두발 자유화는 국민들의 오랜 염원이었지만 일각에서 비정상적으로 정권을 장악한 5공화국의 선심성 정책이라는 비아냥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괄호속에 4시간을 넣어놓고 하루를 살아야했던 국민들이나, 죄수처럼 머리를 깎은채 군복같은 검정색 교복속에 몸을 가둬 놓아야했던 사춘기 중고생들에게 준 반향은 대단했다.
오랫동안 눌려왔던 탓인지 반작용도 강했다. 두발 자유화가 시작된지 석달도 안돼 중고생들 사이에 장발이 늘어났다. 남학생은 뒷머리만 길게 기른 '제비꼬리형'머리, 여학생은 '디스코 퍼머'가 유행했다. 망사 스타킹에 굽높은 샌들, 무릎까지 올라오는 디스코 바지, 당시로서는 비싼 2만~3만원짜리 외제 운동화로 멋내기 경쟁이 벌어졌다.
1920년대부터 존속된 군국주의 잔재가 사라지면서 빚어낸 일시적 현상이었다. 분명했던 것은 통금해제와 교복-두발 자유화는 획일적 사회에서 다양화 사회로, 규제된 사고에서 자유로운 상상력으로의 대전환이었다. 이런 혁명적 변화는 컬러 텔레비젼 보급과 함께 한국의 80년대를 비로소 대중시대로 이끌었다.
조선일보 1999. 9.7 이준호기자
14. 천주교 "역사 앞에 잘못 반성"
2백여년 역사를 가진 한국 천주교가 2000년 대희년을 앞두고 역사적 과오를 민족 앞에 참회하고 반성하는 토론회를 가져 주목을 끌었다.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한국사목연구소(소장 김종수)가 최근 개최한 '한국천주교회사에 대한 대희년 심포지엄'에서 발제자들은 ▲18세기말 서양선박 요청사건 ▲제사금지에 따른 갈등 ▲민족 고유의 정서와 문화 무시 ▲민족운동에 대한 소극적 태도 ▲신사참배 허용 등을 교회가 저지른 대표적인 잘못으로 꼽았다.
이날 참석자들은 천주교 전래기에 교회와 사회가 충돌했던 것은 대부분 교회가 당시의 민족사적 요구나 보편적인 가치를 외면한 채 맹목적인 신앙의 논리만을 고집했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았다.
원주교구 교회사연구소의 여진천 신부는 1796년과 1801년 천주교회 지도자들이 서양 선박과 병력을 요청하는 서한을 중국 베이징의 주교에게 보낸 것은 서양 배와 군대가 오면 천주교에 대한 금령이 풀려 선교의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라고 풀이하면서도 이는 신유박해를 확대하는 결과를 낳았을 뿐 아니라 당시 조선의 입장에서 보면 반민족적인 중대한 협박이었다고 평가했다.
인천가톨릭대의 최기복 교수는 18세기 교황청의 정복주의적 선교 정책에 따른 제사금지 조처는 천주교를 패륜의 사교로 낙인찍히게 하는 결과를 낳았을 뿐아니라 선교지 문화와의 교섭을 통한 복음의 토착화를 더디게 하는 장애로 작용했다며 교회의 잘못을 인정했다.
가톨릭대 장동하 교수도 개항기 프랑스 선교사들이 민족 고유의 문화와 풍습등을 야만시함에 따라 유교적 전통을 고수하는 주민들의 강한 반발을 산 것은 물론지식인들의 반외세감정을 부추겼으며 1899년 강경포 교안과 1901년 이재수의난에서 절정을 이루게 된다고 지적했다.
이와 함께 전남대 윤선자 교수는 구한말과 일제시대에 천주교회가 민족운동에 대해 소극적이었던 태도를 문제삼았고, 한신대 강인철 교수도 교회가 신사참배를 허용하고 태평양전쟁 참전을 독려한 것은 반민족적․ 반가톨릭적인 과오였다고 강도높게 비판했다.
조선일보 1999.11.11 '서울=연합뉴스 이희용기자'
15. 제야의 종 왜 33번 치는가
새해 첫날이 밝는 자정, 서울 종로 보신각에서 제야의 종을 33번 치는 것은 조선시대에 이른 새벽 사대문 개방과 통행금지 해제를 알리는 타종, 즉 파루를 33번 친 데서 연유한 것이다.
시계가 없던 시절, 사람들은 해를 보고 시간의 흐름을 짐작했다. 해시계가 보급된 후엔 좀 나아졌지만 밤중에 시간을 몰라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백성들에게 밤 시간을 알려주는 것이정부가 맡은 큰 일 중 하나였다.
자시 축시 인시 등으로 불렀던 하루 12시간 중 밤에 해당하는 5시간, 즉 술시에서 인시까지는 이를 초경 이경 오경으로 나누어 각 경마다 북을 쳤다. 또 각 경은 다시 5점(오점)으로 나누어 각 점마다 징이나 꽹가리를 쳤다. 한 경은 오늘날 시간으로 따지면 2시간, 한 점은 24분에 해당한다.
하지만 이 소리를 모든 주민이 들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사대문이 닫히고 주민 통행금지가 시작되는 이경(밤 10시경)과, 통행금지가 해제되는 오경(새벽 4시경)만큼은 종로 보신각에 있는 대종을 쳐서 널리 알렸다. 이경에는 대종을 28번 쳤는데 이를 인정(인정)이라 했고, 오경에는 33번 쳐 이를 파루라 했다.
인정에 28번을 친 것은 우주의 일월성신 이십팔수(28별자리)에게 밤의 안녕을 기원한 것이고, 파루에 33번을 친 것은 제석천(불교의 수호신)이 이끄는 하늘의 삼십삼천에게 하루의 국태민안을 기원한 것이었다.
조선일보 1999.12/05
16. 허준 스승으로 알려진 유의태는 150년뒤 인물
MBC TV 드라마 '허준'이 큰 인기를 끌고 있는 가운데 그동안 알려졌던 허준의 초기 생애가 사실과 크게 다른 것으로 밝혀졌다.
조선시대 의학사를 전공하는 김호(33)씨는 최근 서울대 국사학과 대학원에 제출한 박사 학위 논문 '동의보감 편찬의 역사적 배경과 의학론'에서 '미암 일기' 등 각종 자료를 이용, 허준의 생애에 대해 처음으로 체계적인 연구를 진행했다. 그 결과 드라마 '허준'이 토대를 두고 있는 이은성 지음 '소설 동의보감'(1991)의 통설들은 잘못이 많은 것으로 드러났다.
허준의 생애에 대한 통설은 "① 1546년 또는 1547년에 태어났다. ② 경기도 양천에서 태어나 경상도 산청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③유의태로부터 의학을 전수받았다. ④ 의과에 합격, 왕실 의료기관인 내의원에서 근무했다. ⑤'동의보감'을 비롯한 여러 의서를 저술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드라마에서 허준의 스승으로 알려진 유의태는 허준보다 150년 뒤인 숙종 때 경상남도 일원에서 명의로 유명했던 유이태라는 인물로 김씨 추적 결과 판명됐다. 또 허준의 내의원 진출도 의과 합격에 의한 것이 아니라 집안과 특별한 관계에 있던 유희춘의 추천에 따른 것이었다.
한편 허준의 출생 연도는 족보와는 달리 1539년로 확인됐다. 이는 진주 박물관에 소장 중인 '태평회맹도병풍(임진왜란 때 선조를 모시고 의주로 피난한 신하들의 모임 그림)'에서 허준에 대해 '기해 생'이라고 적은 데서 알 수 있다. 출생지 역시 경기도 양천은 양천 허씨가 대대로 살아 온 곳일 뿐 분명한 근거는 없으며 허준이 성장한 곳도 경상도 산청이 아니라 그의 외가가 있던 전라도 지역이라는 것이다.
김씨는 "1965년 한의학자 노정우씨가 허준의 할머니가 진주 출신이라는 데 착안하여 경상남도 일대를 답사한 후 허준의 생애에 대해 글을 썼는데 이것이 별다른 문헌적 고증 없이 널리 퍼져 통설의 뿌리가 됐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2000.2.12 이선민기자24. 일본 역사 왜곡 여전
일본 역사 교과서가 한국사의 기원인 고조선을 누락하는가 하면, 「조선」을 「이씨조선」으로, 주권침탈을「병합」으로 표기하고, 「임나일본부설」을 계속 주장하는 등 여전히 한국 관련 역사 왜곡이 시정되지않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같은 사실은 한국교육개발원(책임연구원 이찬희 박사)이 일본과 중국 교과서에 나타난 한국사 부분을 분석해 펴낸 「일본․중국 중등학교 역사 교과서의 한국 관련 내용 분석」 보고서에서 밝혀졌다.
이에 따르면 일본 고교의 「일본사」 7종과 「세계사」 7종을 분석한 결과, 모든 교과서가 최초 국가인 고조선 대신 한군현을 처음에 등장시켜 한국사의 상한선을 끌어내리고 한국 역사는 시작부터 중국 지배를 받은 것으로 암시했다.
고대 한․일관계사에서 가장 쟁점이 되는 「임나일본부설」에 대해서도 대부분 교과서가 이를 역사적 사실로 인정해 서술하고 있다. 임나일본부설은 일본의 대화정권이 한반도 동남부에 진출해 백제, 신라, 가야를 지배했으며, 특히 가야에는 일본부라는 기관을 둬 6세기 중엽까지 직접 다스렸다는 주장이다.
또 상당수 교과서는 국호인 「조선」을 「이씨조선」이나 「이조」로 표기, 일제시대 식민통치를 합리화하기 위해 만든 용어를 그대로 사용했다.
근세사에서는 주권침탈 행위를 여전히 「병합」으로 표현하고, 일군 위안부에게 가해진 범죄 행위에 대해 단순히 「젊은 여성들이 위안부로 전쟁터에 보내졌다」라고 처리하는 등 제국주의적 사관을 버리지 않고 있다.
이찬희 박사는 『일본 교과서가 한국사 관련 서술에서 이전보다 진전된 역사인식을 보여주고 있으나, 불리한 부분에서는 의도적인 은폐나 축소, 왜곡이 여전하다』고 분석했다.
조선일보 2000.3.20 양근만기자23. 재외동포법 재고해야 한다
83년 중국 학자들은 중국인의 인종적 특성 규명을 위한 혈청조사를 실시했다.
우리 동포와 다른 소수민족을 포함해 32만명을 대상으로 하는 대대적인 조사였다.
결과는 흥미로웠다.
닝샤 (寧夏) .베이징 (北京). 산둥 (山東) .다롄 (大連). 상하이 (上海) 지구의 한족 (漢族) 과 우리 동포가 북방형으로, 우한 (武漢) .광시 (廣西).광둥 (廣東). 쓰촨 (四川). 구이저우 (貴州).대만 등지의 한족은 형질이 다른 남방형에 속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같은 중국인으로 아는 한족에 사실은 남.북 두 계열이 있고, 우리 동포는 창춘 (長春).다롄.산둥.상하이 지구의 한족과 같은 형질을 지닌 것으로 분류된 것이다.
상하이 지역민이 북방계로 밝혀진 것도 의외였다.
이 조사에 쓰인 혈형기인 (血型基因) 은 1백만년 이상을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으로 밝혀져 형질적으로는 남.북 중국인 상호간보다 북방중국인과 한국인이 더 친연관계에 있음이 확인됐다.
몇해 전 일본에서는 또 한 학자가 비슷한 연구조사 결과 '일본인의 80%는 한국계' 라고 밝혀 화제가 되기도 했다.
중국어가 남방의 티베트.베트남.태국어와 같은 계열로 분류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북방중국인의 남방중국인과 다른 인종적 특질은 유사 이래 반복된 고조선.고구려.백제.돌궐.선비.거란.몽고.만주족 등 북방계 정복민의 이주정착.융화과정의 결과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그렇다고 이런 사실들을 놓고 새삼 '원조' 논쟁 따위를 벌이는 것은 어리석다.
한국인 가운데도 중국계.일본계가 적지 않고 중국인들은 해외에 3천만명을 헤아리는 화교 (華僑) 의 효시를 고조선으로 망명한 기자라고 주장하고 있으니까.
한국과 중국과 일본이 서로 다른 민족과 국가로 분화한 현재의 상황은 수많은 인종집단이 이합집산을 거듭해온 역동적인 역사과정의 반영이라는 것을 이해하면 그것으로 족하다.
만일 고구려가 만주.몽고.화베이 (華北) 지방을 아우른 최성기의 강역을 후대까지 유지할 수 있었더라면 지금 중국북부와 만주.몽고지역인들은 한국인이 됐을 터이고, 백제의 일본지배가 더 오래 지속됐더라면 일본은 다른 민족으로 갈라져나가지 않고 한국의 변방으로 남았을 것이라고 상정해 볼 수도 있지만 역사에 가정이 무슨 소용 있겠는가.
최근 국회를 통과한 '재외동포의 출입국과 법적지위 등에 관한 법률' 은 이 점에서 많은 것을 생각케 한다.
법안은 해외동포들에게 출입국.경제활동 등에서 내국인에 준하는 법률상의 특수지위를 부여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입법추진 과정에서부터 법무부와 외무부간에 주도권 다툼.의견대립이 있었고, 논란에도 불구하고 중국과 러시아지역 동포들을 적용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5백만에서 6백만명을 헤아리는 재외동포 가운데 2백만명의 중국동포, 40만명의 재러시아 동포 등 절반 가량을 빼놓은 것이다.
이런 법안을 만든 정부의 논리는 해당국과의 마찰 우려다.
국회통과 후에도 논란이 끝나지 않아 시민단체와 국내 체류 중인 중국동포 등의 단식.시위 등 반발에 부닥치자 대통령은 적용과정에서 재중.재러 동포들이 차별받는 일이 없도록 행정적 차원에서의 보완을 지시했지만 이미 통과된 법의 한계를 넘을 수는 없는 일이다.
재중.재러 동포의 문제는 단순히 해당지역 동포사회와의 관계문제가 아니라 우리 겨레의 21세기 비전과 직결돼 있다.
거주국 사정에 따라 법률적 지위는 다르지만 그들의 선택 이전에 우리 정부가 먼저 그들을 법률적 보호나 배려의 대상에서 제외해 차별을 두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해방 직후 2백만명을 넘던 재일동포는 65년 한.일협정 후 우리 정부가 사실상 보호를 포기하면서 일본 귀화가 급속히 늘어 현재는 60만명 내외로 줄었다.
'재외동포법' 의 취지대로라면 러시아.중국동포도 머잖아 전철을 밟을 것이다.
불과 한 세대 후에는 옌볜 (延邊) 의 자치주나 러시아의 동포사회는 해체되고 말 가능성이 크다.
우리 정부의 정책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단일민족국가를 지향하는 일본과 달리 중국.러시아는 다민족국가다.
특히 중국은 자기네 해외 화교에 대해 음양으로 정책적인 배려를 하고 있는 나라다.
이들 국가의 소수민족정책과 배치돼 갈등을 유발할 수 있다고 우려하기에 앞서 그런 우려가 기우 (杞憂) 임을 해당국 정부에 납득시켜 차별없는 동포정책을 펴는 당당한 정부가 돼야 한다.
중앙일보 1999년 9월 2일문병호 편집국장 대리
17. '佛약탈 외규장서 문서 알려진 것 외에 더 있다'
병인양요 (丙寅洋擾) 때 프랑스군에 의해 약탈된 외규장각 고문서 가운데 일부를 추가로 확인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프랑스 리옹3대학 이진명 (李鎭明.53.한국학) 교수는 30일 프랑스국립도서관 (BNF) 이 소장한 관련 서적 및 도서목록 등을 분석한 결과 지금까지 알려진 외규장각 고문서 2백97권 이외에 다수의 외규장각 고문서를 더 확인했다고 밝혔다.
새로 확인된 외규장각 고문서는 ▶선원계보기략 (璿源系譜記略) 3권 등 의궤와 조선 국왕들의 글을 모아 엮은 열성어제 (列聖御製) 26권 등 고문서 43권 ▶동아시아지도인 왕반 천하여지도 (王伴 天下與地圖) 1점 ▶별자리를 돌에 새겨 탁본한 천체도인 천상열차분야지도 (天象列次分野之圖) 1점 ▶사도세자의 글씨가 담긴 무안왕조비명 (武安王朝碑銘) 등을 탁본해 만든 족자 7점이다.
이를 바탕으로 91년 서울대는 외교통상부를 통해 프랑스에 반환을 요구하고 있다.
지금까지 BNF에 있는 것으로 확인된 외규장각 고문서는 의궤 (儀軌.조선왕실의 세자나 왕비의 책봉과 혼례, 존호 부여, 장례, 건물 및 산릉 축조 등 각종 행사에 관해 기록한 책) 2백97권이다.
이진명 교수는 "BNF 현장조사와 1890~1892년 조선에서 통역사로 일한 프랑스인 모리스 쿠랑이 1894~1896년에 작성한 '조선서지' 에 적힌 조선의 고문서 목록을 통해 확인했다" 며 "당시 고문서를 경매했던 파리의 트루오 경매장 경매기록부에도 이같은 사실이 적혀 있다" 고 밝혔다.
이에 대해 서울대 이태진 (李泰鎭.한국사. 전규장각도서관장) 교수는 "이진명 교수의 주장 가운데 왕반 천하여지도 이외에 새로운 고문서는 없다" 고 말했다.
중앙일보 1999년 8월 31일 배익준 기자
18. 애국가 작사자 논란
어느 외국인이 한국의 애국가는 누가 지었소 하고 물어본다면 뭐라고 답할 것인가. 작곡자는 안익태인데 작사자는….
애국가 가사는 작사자 미상이다. 윤치호 안창호 최병헌 김인식 그리고 한민족 공동창작까지 설(說)은 분분하지만 55년 국사편찬위원회의 작사자 미상 발표 이후 한치도 나아가지 못한 실정이다.
이런 와중에 최병헌 김인식설을 입증하기 위해 최근 그 후손들이 책자를 만들고 홍보에 나서는 등 애국가 작사자 논란이 재연되고 있다. 각각 최병헌목사 애국가 작사 관련 자료집 김인식선생 애국가 작사에 대한 고증 자료집 등을 만들어 배포하고 있으며 최목사 후손들은 10월에 최병헌설을 입증할 수 있다고 하는 사람으로부터 증언도 들을 계획이다. 물론 이들의 주장은 아직까지 명확한 물증이 없다. 현재로선 윤치호설이 유력하지만 이것 역시 논란의 소지가 있다. 그런데도 애국가 태극기 무궁화 등 국가 상징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행정자치부나 관련 학계에서는 팔짱만 끼고 있다. 행자부의 한 관계자는 공동 창작일 가능성이 높은데 꼭 작사자가 밝혀져야 하는가란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학자들도 특별한 관심 없이 그저 55년 수준의 논의만 되풀이하고 있다. 설령 공동창작이라 해도 치밀한 연구를 거쳐 나온 결과여야 한다. 지금 상황에서 한민족 공동창작을 거론하는 것은 논란을 회피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언제까지 작사자도 모르는 애국가를 불러야 하는가. 애국가 작사자 문제는 한 가문만의 문제가 아니다.
동아일보 1998/09/10(목) 이광표(문화부)
19. 애국가 노래말 누가 지었을까…국가상징硏 13일토론회
애국가 가사는 과연 누가 지었을까. 정부수립 50주년을 맞았어도 애국가는 여전히 작자 미상.
안창호설, 윤치호설, 민영환설, 안창호 윤치호 공동작사설, 심지어 한민족공동창작설까지 의견이 분분하지만 어느 것 하나 확실치 않은 형편이다.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가 작자미상으로 발표한 이래 간헐적인 논문 발표가 있었을 뿐 본격적인 논의는 이뤄지지 않았다.
현재 가장 유력한 것은 윤치호설과 안창호설. 이 두 견해를 놓고 13일 오후3시 서울 사간동 대한출판문화회관에서 열띤 토론이 벌어진다.
국가상징연구회가 주최하는 애국가의 작사자 규명.
윤치호설에 대해선 국가상징연구회의 김연갑 연구원이, 안창호설에 대해선 독립기념관의 이명화 연구원이 논문을 발표한다.
윤치호설의 근거로는 첫째, 지금의 애국가 가사가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노래집 찬미가(1908)가 윤치호 역술(譯述)이라는 점. 당시 정황으로 보아 역술은 곧 지음이라는 주장이다.
둘째, 미주 신한민보 1910년 9월21일자에 소개된 윤치호의 국민가가 애국가가사와 일치하는 점.
셋째, 1925년 10월21일자 동아일보에 동해물과 백두산이…의 애국가가 윤치호 애국가에 부속되어 생겼다라는 기록이 남아있는 점 등. 신한민보 동아일보 기록은 이명화 연구원이 이번에 처음 밝혀낸 것이다.
안창호설 역시 만만치않다.
첫째, 주요한 이광수가 쓴 윤치호전기에 안창호가 1908년 애국가 가사를 짓고 윤치호가 찬성하자 이를 윤치호가 지은 것으로 발표하자고 제의했다고 쓰여 있는 점. 도산은 실제로 많은 노래가사를 짓고도 자신의 이름을 내세우지 않았다.
둘째, 안창호가 그 누구보다 애국가를 즐겨 불렀고 애국가 3절가을 하늘 공활한데…가 안창호가 즐겨쓴 표현이라는 점 등.
그러나 양측 모두 완전치 않다. 안창호설의 결정적인 약점은 구체적인 자료가 없다는 사실.
윤치호설의 경우 찬미가 역술을 작사로 볼 수 있는지, 또한 윤치호의 많은 일기 서한에 왜 애국가 관련 내용이 없는지 등의 의문이 남아 있다.
동아일보 1998/02/12(목)〈이광표기자〉
20. 안중근의사 유해발굴 가능성 높아져
안중근의사 유골 발굴위원회 도쿄사무국이 17일 개설돼 일본 관계자들과 함께 중국에서 본격적인 발굴작업에 들어가게 됐다.
도쿄사무국의 송영순국장과 업무담당 사이토 미치노리씨는이날 기자회견을 통해 "안의사 순국 90주년을 맞는 올해가 한반도 평화의 원년이 되기를 바란다"면서 "가능한한 빠른 시일내에 안의사 성역사업추진위원회와 사무국 대표가 중국과 북한을 방문해 구체적인 사업계획을 설명하고 협조를 요청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사무국에 따르면 추진위측은 지난 2월20일께 구일본군 헌병대와 검찰청, 법원등을 뒤져 관련 지도와 보고서, 사진등 7점을 찾아냈다.
송국장은 "관련 지도는 뤼순감옥 근처 매장지 부근을 표시, 신빙성이 매우 높다" 면서 "1만5천여평에 이르는 문제의 장소는 당초 항일운동을 하던 중국 애국자의 묘소였으나 현재는 공동묘지로 바뀌었으며 부근에 아파트가 들어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사이토씨는 "1910년 안의사가 묻힐 당시 중국인들의 매장습관과는 달리 뉘인 상태로 십자가등과 함께 목관에 넣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어 식별해 내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발굴위는 중국측과 협의를 마치는대로 2개월동안 컴퓨터 단층촬영등을 통한 묘소 수색작업과 DNA(유전자) 검사등을 통한 신원 확인작업을 벌일 방침이다.
중국정부는 지난 97년 한국에 안의사 유골발굴에 적극 협조하겠다는 `외교 메모'를 교환한 바 있어 발굴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될 것으로 사무국측은 내다봤다.
송국장은 "안의사의 유해발굴은 한-일 양국의 책무일 뿐만아니라 한-일 양국이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국제사회적 공헌"이라면서 "안의사의 유해가 발굴되면 고향인 북한쪽이 아니라 휴전선에 안장, 휴전선이 이산가족의 `만남의 장'이 되도록하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말했다.
21. 일본 역사 교과서 왜곡 여전
일본 역사 교과서가 한국 역사의 기원을 중국 지배 하의 한군현(漢郡縣)으로 설명하고,가야가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고 암시하는 등 교과서 역사왜곡 현상이 여전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한국교육개발원 이찬희(李讚熙)박사팀이 최근 일본.중국 교과서의 한국사 기술 내용을 분석한 '일본.중국 중등학교 역사 교과서의 한국 관련 내용 분석' 보고서를 통해 20일 밝혀졌다.
李박사팀은 일본 고교의 '일본사' 7종과 '세계사' 7종을 분석한 결과 모든 교과서가 한국사의 기원을 설명하면서 고조선을 누락한 채 한군현부터 등장시켜 한국 역사가 시작부터 중국의 지배를 받은 것으로 암시했다.
또 고대 한.일 관계사에서 학계의 쟁점이 되고 있는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 에 대해서도 대부분 교과서가 이를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직.간접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와 함께 상당수 교과서들은 국호인 '조선' 을 '이씨(李氏)조선' 으로 표기했으며, 임진왜란 당시 군인과 양민의 귀와 코를 베어 만들었던 귀무덤(耳塚)도 군사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위령탑으로 둔갑시켰다.
일부 교과서는 명성황후(明成皇后)시해사건을 '민비(閔妃)살해' 로 표기하면서 '반일(反日)정권을 타도하기 위한 합목적적인 행위' 로 미화했으며, 일본군 위안부도 강제동원 주체 등에 대한 언급이 없이 '젊은 여성들이 위안부로 전쟁터에 보내졌다' 고만 간단히 언급하고 있다.
李박사는 "일본 교과서가 한국사 관련 서술에서 한국 학계의 요구를 수용해 과거보다 진전된 역사인식을 보여주고 있으나 임나일본부.종군위안부.상해 임시정부와 관련된 사항은 여전히 왜곡되거나 은폐.축소돼 있다" 고 지적했다. 중앙일보 2000년 3월 21일 강홍준 기자
22. '우리 국사교과서도 고대사 왜곡 심각'
중앙일보 2000. 3. 22. 水
'우리 국사교과서도 고대사 왜곡 심각' 한국과 일본 두나라 관계에서 매번 터지는 게일본 국사교과서의 한국사 왜곡 문제이다.
이 문제는 최근 일본 교육부 장관의 방한을 계기로 다시 국내 언론을 장식하고 있다.
국가가 교과서를 공식 편찬하는 한국과는 달리 검인증인 일본 중.고교 국사교과서가 한국인의 감정을 자극하는 대표적인 대목은 고대일본이 한반도를 식민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는 고대사와 일본의 책임과 만행을 기피하는 일제침략기부분이다.
일본 국사교과서야 그렇다 치고 우리 국사교과서는 도대체 어떨까? 현행 고교 국사교과서를 보면 임나일본부설만 주장하지 않았지 일본 교과서와 마찬가지로 한국 고대사를 왜곡,말살하기는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특히 초기 삼국시대 부분에 대한 우리 국사교과서의 왜곡 정도는 심각한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예컨대 현행 고교 국사교과서는 고구려(BC 37년) , 백제(BC 18년) , 신라(BC 57년) 의 건국을 전설이나 신화로 치부하면서 삼국사기가 기록한 건국연대 또한 본문에 나오지 못하고 괄호안에다 묶어 두고 있다.
삼국의 건국연대가 괄호안에나마 들어간 것도 80년대 임호상,임승국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재야사학자들이 들고 일어났기 때문이다.
또한 그러면서 고구려의 실질적인 건국을 1세기 중,후반 태조왕대, 백제와 신라가 국가다운 국가가 된 시기를 각각 3세기 중,후반 고이왕대, 4세기 중반 내물왕대로 보고 있다.
이는 이병도가 주장한 것이며 일제식민사학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 이전 시기는 삼한 78개국이니 조그마한 동네국가들이 득실되는 원시미개사회로 그리고 있다.
그러나 삼국시대 초기의 이런 모습은 삼국사기가 그리고 있는 모습과는 딴 판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이들 3국은 건국초기에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마련하고 주변국가들을 활발히 정복해 나가 이미 기원전후한 시기에 만주와 한반도 일대를 장악했다.
또한 이런 삼국사기 기록은 최근 고고학적 발굴성과와도 잘 맞아떨어지고 있다.
사실 신라와 백제의 건국이 삼국사기 기록대로 기원전 1세기, 혹은 이보다 더위로 올라갈 수 있음은 80년대 초반에 발굴된 경주 조양동 유적과 최근 발굴이 이뤄지고 있는 서울 풍납토성 유적을 통해 명확히 증명되고 있다.
더구나 이런 발굴성과를 통해 백제와 신라는 이미 기원전후한 시기에 넓은 영토와 강력한 힘을 갖춘 고대국가였음이 확정되고 있다.
그럼에도 왜 일본국사교과서와 마찬가지로 한국국사교과서도 고대사를 이처럼왜곡했을까? 서강대 이종욱 교수가 지적한대로 한국고대사를 말살하기에 혈안이 됐던 일제황국사관, 즉 식민사관에서 한국 역사학계가 완전히 탈피하지 못하고 있는게 가장큰 이유로 지적된다.
일제의 조선 식민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한 구실을 고대사에서 찾고자 했던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삼국, 특히 이른바 그들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에서 가까운 신라와 백제의 건국연대를 마구잡이로 깎아내리는 한편 서기 3,400년쯤까지 한반도 남부를 원시미개사회로 설정했다.
이를 위해 일제학자들은 백제,고구려,신라가 기원전후에 이미 강력한 고대왕권 국가였다고 기록한 삼국사기를 조작이니 윤색이니,가짜니 하면서 몰아붙이는 한편서기 280년경 중국사관 진수가 편찬한 삼국지 위지 동이전을 기본사료로 활용했다.
일제 식민어용사학자들이 삼국사기 대신 삼국지 동이전을 끌어들인 까닭은 따로있지 않다.
삼국지 동이전에 따르면 서기 3세기 중,후반까지도 신라와 백제는 한반도 남부에 흩어져있던 78개 국가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런데 더욱 큰 문제는 이처럼 한국고대사를 고의로 말살한 일제 식민사학을 해방 이후 한국고대사학계가 무비판적으로 계승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한국학자들은 말로는 식민사관 청산을 외쳤지만 삼국사기를 부정하기는 마찬가지였고 삼국지 동이전을 신주단지 모시듯 했다.
최근들어 삼국사기 초기기록에 대한 극단적인 부정론이 많이 사라지고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되 연대를 깎아내리는 이른바 수정론이 득세하고 있지만 이 교수 지적처럼 수정론 또한 부정론의 연장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로 현행 국사교과서도 삼국사기가 아니라 삼국지 위지 동이전을 그대로 베껴다 놓았다.
삼국사기 초기기록이 믿을 만하다,아니다 하는 논쟁과 관련, 한국고대사나 고고학이 아닌 한국과학사 전공인 전상운 전 성신여대 총장의 말은 경청할 만하다.
"우리 과학사 전공자들 사이에 이런 논쟁은 이미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삼국사기 기록이 정확하다는 것은 이미 과학사에서는 다 밝혀졌다.
아직도 삼국사기가 가짜이니 혹은 후대에 일어난 일이 위로 올라가 붙었느니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가? 고대사학자들이 지금껏 기원 3,4세기까지 삼국시대 초기를 원시미개사회로 보는모양인데 그보다 훨씬 앞선 청동기시대 유물만 봐도 당시 한반도와 만주는 이미 고도의 문명사회였음이 확실하다".
(서울=연합뉴스) 김태식기자
23. 백범 김구 암살범 안두희
백범(白凡) 김구(金九) 선생을 살해했던 안두희(安斗熙) 는 1996년 10월 은신처를 찾아온 한버스기사에게 몽둥이로 타살(打殺) 당했다. 백범 사후 47년 만의 일이었다.
安은 그때 심한 중풍으로 와석 중인 70대 노인이었다.
'패역자' 안두희의 불행은 백범살해 배후의 숱한 비밀을 안고 구차하게 목숨을 부지해야 했다는 것이다. 사건 후 그의 삶은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생불여사(生不如死)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끝까지 백범살해를 자신의 단독범행이라고 우겼지만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安의 뒤를 쫓아다녔다.
그 역시 6개월, 1년마다 거처를 옮기며 두더지같은 생활을 계속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安은 60년대 이후 서울 일원에서 다섯차례 이상 이들에게 붙들려 칼을 맞거나 무자비한 각목세례를 받았다. 그러다가 安이 막상 한 시민의 '정의봉(正義棒) ' 에 맞아 죽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물론 절대 다수는 '민족정기의 응징' 이니, '역사의 업보' 니 하는 말로 安의 죽음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예상됐던 반응이었다.
그러나 뜻밖이었던 것은 다른 한편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安을 죽이지 말아야 했다" 며 안타까움을 내비쳤다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안두희가 어떻게든 살아서 자기양심을 걸고 역사의 진실을 말할 기회를 폭력으로 빼앗아버린 데 대한 애석함의 표현이었다.
누군가는 "安을 그런 식으로 죽인 것은 일종의 사료(史料) 인멸행위" 라고까지 말했지만 조급한 감정과 폭
력에 의한 보복이 행여 역사의 진실을 가리는 우(愚) 가 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24. 양녕주의
「현대」그룹 총수의 후계문제를 두고 형제간에 엎치락뒤치락하는 암투가 선거에 쏠렸던 이목을 빼앗았던 지난주 말이었다. 후계 암투 자체가 전근대적인 황제식 경영의 잔재라는 비난도 나오고, 국제 신인도를 추락시키는 행위요, 집안에서 해결했어야 할 일의 외부 노출로 국민의 눈에 추태로 반영되어 앞으로 재벌들의 후계구도에 교훈을 던져주었다.
권력이나 금력은 클수록 그 후계에 암투가 따르게 마련이요, 그 사례와 교훈을 역사의 왕위승계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맏아들을 세자로 책봉하고 왕위를 계승시키는 것이 법도이나 개혁적인 임금은 명군으로서의 능력과 자질을 장자 승계에 우선했다. 그 전형적인 임금이 자신이 혁명을 여러 차례 단행했던 태종이다. 맏아들이요, 세자인 양녕을 대군으로 강등시키고 후에 세종으로 즉위하는 셋째 아들 충녕을 세자로 삼은 것이다. 양녕이 주색과 사냥에 빠져 세자로서의 법도를 지키지 않은 것이 이유로 돼 있으나 태종의 뜻이 충녕에 있음을 갈파하고, 아버님을 편하게 해드리고자 일부러 법도 밖의 일을 저지르고 미친 척한 것으로 「자해필담」에 명기돼 있다. 세속에 구애받지 않는 활달한 성품으로 오해받기 쉬운 성품이긴 하나 양녕대군의 과실은 사냥을 좋아한다는 것 밖에 없다고 말한 것은 황희정승이요, 내외상하에 환심을 얻지 않은 데가 없고, 특히 세종과의 우애에 대해 극찬한 것은 세조다. 범상을 넘는 시재와 숭례문의 현판 글씨를 썼으리만한 명필이기도 했고.
양녕이 세자에서 물러나면 둘째인 효령대군의 차지다. 문헌 「연려실기술」에 보면 양녕이 부왕의 뜻이 충녕에게 있음을 눈치채고 효령에게 귀띔하자, 그 길로 절에 들어가 북가죽이 처지도록 북을 쳐 스트레스를 풀었다고 한다. 권력승계를 두고 그로인해 야기될 외부의 부조리를 해소시키고자 미친 척했던 양녕의 소행이나 북 배가 늘어지도록 북을 쳐 그 마음의 갈등을 스스로 풀어버린 효령의 소행이 돋보이기만 하는 것이다.
권력승계를 둔 형제간의 아름다운 선례가 아닐 수 없으며 갈등으로 불안했던 「현대」의 후계구도가 무난히 타결되고 보니 양녕대군이나 효령대군의 겸양지덕이 새삼 돋보이기만 하는 것이다. 조선일보 2000.3.27(월)
25. 재외동포법 재고해야 한다
중앙일보 [ ] 1999. 9. 1. 水
83년 중국 학자들은 중국인의 인종적 특성 규명을 위한 혈청조사를 실시했다.
우리 동포와 다른 소수민족을 포함해 32만명을 대상으로 하는 대대적인 조사였다.
결과는 흥미로웠다.
닝샤 (寧夏) .베이징 (北京). 산둥 (山東) .다롄 (大連). 상하이 (上海) 지구의 한족 (漢族) 과 우리 동포가 북방형으로, 우한 (武漢) .광시 (廣西).광둥 (廣東). 쓰촨 (四川). 구이저우 (貴州).대만 등지의 한족은 형질이 다른 남방형에 속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같은 중국인으로 아는 한족에 사실은 남.북 두 계열이 있고, 우리 동포는 창춘 (長春).다롄.산둥.상하이 지구의 한족과 같은 형질을 지닌 것으로 분류된 것이다.
상하이 지역민이 북방계로 밝혀진 것도 의외였다.
이 조사에 쓰인 혈형기인 (血型基因) 은 1백만년 이상을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으로 밝혀져 형질적으로는 남.북 중국인 상호간보다 북방중국인과 한국인이 더 친연관계에 있음이 확인됐다.
몇해 전 일본에서는 또 한 학자가 비슷한 연구조사 결과 '일본인의 80%는 한국계' 라고 밝혀 화제가 되기도 했다.
중국어가 남방의 티베트.베트남.태국어와 같은 계열로 분류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북방중국인의 남방중국인과 다른 인종적 특질은 유사 이래 반복된 고조선.고구려.백제.돌궐.선비.거란.몽고.만주족 등 북방계 정복민의 이주정착.융화과정의 결과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그렇다고 이런 사실들을 놓고 새삼 '원조' 논쟁 따위를 벌이는 것은 어리석다.
한국인 가운데도 중국계.일본계가 적지 않고 중국인들은 해외에 3천만명을 헤아리는 화교 (華僑) 의 효시를 고조선으로 망명한 기자라고 주장하고 있으니까. 한국과 중국과 일본이 서로 다른 민족과 국가로 분화한 현재의 상황은 수많은 인종집단이 이합집산을 거듭해온 역동적인 역사과정의 반영이라는 것을 이해하면 그것으로 족하다.
만일 고구려가 만주.몽고.화베이 (華北) 지방을 아우른 최성기의 강역을 후대까지 유지할 수 있었더라면 지금 중국북부와 만주.몽고지역인들은 한국인이 됐을 터이고, 백제의 일본지배가 더 오래 지속됐더라면 일본은 다른 민족으로 갈라져나가지 않고 한국의 변방으로 남았을 것이라고 상정해 볼 수도 있지만 역사에 가정이 무슨 소용 있겠는가.
최근 국회를 통과한 '재외동포의 출입국과 법적지위 등에 관한 법률' 은 이 점에서 많은 것을 생각케 한다.
법안은 해외동포들에게 출입국.경제활동 등에서 내국인에 준하는 법률상의 특수지위를 부여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입법추진 과정에서부터 법무부와 외무부간에 주도권 다툼.의견대립이 있었고, 논란에도 불구하고 중국과 러시아지역 동포들을 적용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5백만에서 6백만명을 헤아리는 재외동포 가운데 2백만명의 중국동포, 40만명의 재러시아 동포 등 절반 가량을 빼놓은 것이다.
이런 법안을 만든 정부의 논리는 해당국과의 마찰 우려다.
국회통과 후에도 논란이 끝나지 않아 시민단체와 국내 체류 중인 중국동포 등의 단식.시위 등 반발에 부닥치자 대통령은 적용과정에서 재중.재러 동포들이 차별받는 일이 없도록 행정적 차원에서의 보완을 지시했지만 이미 통과된 법의 한계를 넘을 수는 없는 일이다.
재중.재러 동포의 문제는 단순히 해당지역 동포사회와의 관계문제가 아니라 우리 겨레의 21세기 비전과 직결돼 있다.
거주국 사정에 따라 법률적 지위는 다르지만 그들의 선택 이전에 우리 정부가 먼저 그들을 법률적 보호나 배려의 대상에서 제외해 차별을 두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해방 직후 2백만명을 넘던 재일동포는 65년 한.일협정 후 우리 정부가 사실상 보호를 포기하면서 일본 귀화가 급속히 늘어 현재는 60만명 내외로 줄었다.
26. 일본, 북한에 6만7천달러 지원
일본 정부가 평양 근교의 고구려 무덤을 보존하는 데 5만7000달러를 지원하기로 했다고 이 30일 보도했다.
은 일본 정부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이같이 보도하고, 지원된 돈은 고구려 무덤의 보존 기술 연구에 사용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지원금은 일본이 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유네스코)에 보유하고 있는 문화 기금가 운데서 지출될 것으로 보인다.
평양 부근의 고구려 무덤은 100여개가 있으며 이 가운데 20여개는 화려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그러나 일본 외무부 관리는 이같은 보도를 확인할 수 없다고 밝혔다.
한겨레신문 2000. 1. 30. 도쿄=AP 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