遊擊 白馬部隊 略史 (槪要)
1950.6.25 北韓共産軍의 不法 南侵으로 同族相殘의 悽慘한 戰亂
이 發勃하여 全 國土는 죽음의 불바다로 휘말리게 되었다. 共産
軍의 기습공격에 대비하지 못했던 我軍은 낙동강까지 後退를 거
듭함으로서 祖國의 運命은 사상 최악의 國難을 맞이하게 되었다.
多幸히도 유엔군이 仁川上陸 作戰을 敢行하여 大勝을 거두고 전
세를 逆戰시킴으로서 我軍은 마침내 38선을 突破여여 平讓을 거
쳐 1950.10.26일에는 國軍 제6사단이 초산 北쪽의 鴨綠江까지 到
達 하는데 成功함으로서 드디어 南北統一은 實現되는 듯 하였다
새로운 歷史를 향해 民族의 宿願인 統一에 대한 소망이 바야흐로
눈앞에 전개 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를 누가 알았으랴 !
豫想치 못했던 中共軍의 개입으로 유엔군은 다시 南쪽으로 撤收
함으로서 北한 全域에서는 數百萬에 달하는 避亂民의 洪水로 大
混亂이 발생하였다.
이즈음 유엔군 進駐時 平北 定州郡 五山學校 學生들이 主軸이 된
학생과 청ㆍ장년들은 鄕土 死守와 自由를 웨치며 蹶起하여,治安
隊를 조직하고 人海戰術로 攻擊해오는 中共軍과 목숨을 걸고 攻
防戰을 벌이며 싸웠다. 然이나 武器 不足과 訓鍊도 제대로 받지
못한 五合之卒의 治安隊 병력으로서는 잘 훈련된 大兵力의 중공
군을 擊退하기는 어려웠다.오직 決死 抗戰의 의지 하나만으로 一
進一退를 거듭하며 西海岸의 艾島로 撤收 하기로 결정하게 되었다.
最大의 위기에 直面한 치안대원들은 1950.11.22일 金應洙氏를
部隊長으로 추대하고 各面 치안대를 통합하여 遊擊白馬部隊로
재편성함으로서 지휘 계통을 단일화하고 戰鬪部隊로서 편제와
조직을 강화하여 戰力保强을 도모하였다.
마침내 艾島로 철수한 당부대는 共産軍과의 대결전을 앞두고 防
禦陣地 구축과 전술적 병력 배치 등 철저한 방어태세를 갖추어 나
갔다. 예측했던 바 1950.12.7일 人民軍 일개대대의 功擊을 받았
으나 敵을 有效射距離 내로 유인하여 집중사격과 峽功作戰으로
완전 섬멸하는 大勝利를 거두었다.
또한 平北 다른地域에서 活躍하고 있던 치안대원들 중에서 白馬
部隊에 합류하지 못하고 他境路를 통하여 西海의 여러섬으로 撤
收했던 대원들은 백령도로 집결하여 金昌根 부대장이 지휘하는
平北部隊를 1951.2.3일 부로 創設하고 공작임무를 수행하고져
2.17일에 平北 定州郡 방면으로 침투하여 敵의 후방 군사시설들
을 破壞하여 다대한 戰果를 올렸다.
西海 도서 지역에서 막강한 戰鬪力을 발휘하여 공산군을 攻擊하
며 유격전을 敢行하고 있던 유격부대의 전투능력을 알게된 美軍
當局에 의해 1951.3월 유격백마부대는 美極東軍 표기지사령부의
동키 第15聯隊로 또한 평북부대는 동키 第14聯隊로 예속되여
各種武器와 食糧補給을 받고 전투력을 加一層 증강 하게되었다.
부대전력을 保强한 당부대는 1951.3.21일 黃海道 월사리 作戰과
同年 3.27일 黃海道 감정리 작전 등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많은
戰果를 수립하였다.
1951.4.16일에 평북부대는 北韓內陸으로 침투하기 위한 교두보를
구축하고져 艾島로 북진하여 많은 戰果를 수립하였으나 1951년
11월15일 子正 불행하게도 중공군 1개연대 兵力의 공격을 받고
치열한 血戰을 벌이며 勇戰憤鬪 하였으나 중과부족으로 艾島基地
는 失陷되고 360여명의 대원중 불과 50여명 만이 生還하는 不運
을 격겄다. 그후 1951.12.20일부로 生存同志들은 유격백마부대
로 吸收 通合되여 해산될때 까지 生死苦樂을 같이 하였다.
1951.5.2일 당부대는 북위40도선 근방의 平北 鐵山半島 海岸으
로 북진하여 大和島를 점령하고 그인근의 大ㆍ小 島嶼들을 모두
奪還하여 새로운 전초기지를 구축하고 북한 內陸地域에 대한 遊
擊戰 전개와 해상 봉쇄작전을 감행하여 적해군력을 無力化시키
고 制海權을 완전히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1951.年末頃부터 공산군은 陸 ㆍ海 ㆍ空軍을 동원하여 西海의
我軍基地에 대한 총공세를 開始했으며 동년 11.30일 중공군
第148師團은 당부대의 大和島 기지에 대한 총공격을 加해왔다.
當部隊는 육탄전을 벌이며 必死的인 방어전을 폈으나 人海戰術
로 3면에서 압박해 오는 敵의 공세를 저지하지 못함으로서 大和
島를 포기하고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이戰鬪에서 敵에게 幕
大한 손실을 주었으나 當部隊 또한 많은 인명손실과 致命的인
打擊을 받았다.
休戰이 체결될 때까지 유격전을 통한 作戰回數는 大小 전투를
망라하여 約500 餘回에 달했으며 敵死殺 5,400 여명 捕虜235명
愛國同胞 구출 21,000 여명 反共愛國靑年 구출 15,000 여명
美空軍 조종사 구출 2명 武器노획 400 여정 船舶擊浸 및 나포
30 여척 기타 수많은 적군 軍事施設과 보급수송 車輛 폭파등
실로 방대한 戰果를 수립하였으니, 階級 軍番도 없는 義兵일지
언정 진정한 大韓民國의 전사로서 勇戰墳鬪 하였다.
前導有望한 젊음과 희망에 부풀었던 청운의 꿈을 접고 전투에 參
戰했던 동지들은 戰鬪期間중 552명의 戰死者와 수백명의 負傷者
가 발생했으며 1953년7월27일 休戰協定으로 인하여 모든 섬들
을 포기하고 作戰地區를 철수하여 仁川 앞바다의 龍遊島로 部隊
駐屯地를 옮기게 되었다.
남쪽의 외로운 섬 龍遊島로 부대를 移動한 후에도 다시 北進할
그날 만을 고대하며 戰鬪訓鍊에 여념이 없었다 .
約 3년간에 걸쳐 生命을 걸고 鄕土奪還과 조국의 통일을 念援하며
싸웠스나, 本意 아니게 남쪽으로 後退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痛嘆
스러운 心情을 어찌 말로 다 表現할 수 있으랴 !
더욱이 祖國을 위해 싸우다 散華한 수많은 戰友들은 아직도 이름
모를 山野와 서해의 파도속에 묻어 놓고 돌아섰으니 哀痛한 心情
을 禁할 수 없으며 조국을 위하여 산화하신 護國英靈들에게 머리
숙여 冥福을 비는 바이다.
遊 擊 白 馬 部 隊 戰 友 會
※ 註釋
美 極東司令部 情報處 KLO (KOREA LIAISON OFFICE)
8240 部隊 D - 14 (平北部隊)
D - 15 (白馬部隊)
D ---- Donkey 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