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세 보성의 역사인물
임병식 rbs1144@daum.net
근세 보성역사인물을 꼽자면 우선 독립운동가이며 의사인 송재(松齋)서재필(徐載弼.1864-1951)박사와 대종교를 중광한 홍암(弘巖 나철(羅喆.1868-1916)선생을 거명함이 마땅하지 않나 생각된다. 이 두 분은 한 말 우국지사로서 무너져가는 나라를 일으켜 세우는데 분골쇄신하는 삶을 살다가 한 생을 마쳤다.
홍암선생은 잠시 일본에 건너가 있다가 한일합방소식을 들었다. 곧바로 조선에 들어와 ‘국수망이도가존(國雖亡而道可存)’ 즉, ‘나라는 비록 망했으나 정신은 가히 존재한다’는 생각으로 대종교를 중광하는 한편, 을사오적을 처단할 계획을 세운다. 그렇지만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홍암은 거사가 발각되어 귀양을 살다가 악랄한 데라우치 총독의 민족종교 탄압을 피해서 중국 길림성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포교활동을 하는 한편,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그 결과 봉오동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는 밑걸음이 되었다. 독립군 대다수가 대동교 교인이었던 것이다.
그만큼 대동교는 독립운동에 선봉장에 섰으며 홍암은 그 독립운동의 선도자였다. 홍암은 한말에 치러진 과거시험 문과에 장원급제를 하였다. 그 후 중앙부처인 승정원에 들어가 복무하다가 나중 젊은 나이에 징세서장이 되었지만 바로 사퇴를 했다. 가렴주구의 부패소굴에서 수행할 직책이 아니라고 판단한 때문이었다.
이는 평소에 백성을 사랑하는 선생의 마음이 반영된 것이었다. 홍암은 보성 벌교 칠동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적부터 비범함이 남달라 주위에서 신동이란 말을 듣고 컸다. 그렇지만 시국을 잘못만나 조국독립에 힘쓰다가 구월산에 들어가 제사를 지낸 후 순명했다. 향년 52세였다.
한편, 송재는 보성군 문덕면 용남리 가내마을 성주이씨 집성촌에서 태어났다. 그곳은 외가 마을로 어머니는 이기대(李箕大)선생의 둘째따님이었다. 당시 송재는 천재로 일컬어졌으며 약관 20세에 과거시험에 응시하여 당당히 3등으로 합격했다. 이 시험은 임오군란이 수습된 다음해에 치러진 시험이었다.
선생은 갑신정변에 참여했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등과 함께한 거사했으나 3일천하에 끝나고 말았다. 곧바로 청국이 개입하여 수비대와 함께 무력진압을 한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을 맞아 선생은 급히 제물포에 정박한 일본 무역선으로 피신했다. 그렇지만 가족은 데려오지 못했다. 그의 부인은 친정으로 몸을 숨기려고 갔지만 출가외인이라며 내쫓기는 바람에 독약을 먹고 자결하고 말았다.
선생은 일본으로 들어가 막노동을 하다가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 당초에는 박영효등과 함께 떠났으나 그들은 중도에서 돌아오고 선생은 혼자 남아 온갖 허드렛일을 하며 공부를 계속해 의학박사가 되었다. 전공은 세균학. 선생은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그것은 나중에 조국에 돌아가면 위생상태가 엉망인 백성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함이었다.
선생의 가족사를 돌아보면 비참하다. 역적으로 몰린 가족은 멸문지화를 당하고 말았다. 생부는 자살하고 양부는 전 재산을 몰수당한 후 노비가 되었다. 맏형은 옥에 갇혀 있다가 독약을 먹고 자살하고 생모는 노비가 된 후 역시 자결을 하였다.
이런 가족사를 떠올리면서 당시 한말의 나라 사정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1900년을 전후하여 조선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청나라와 일본은 호시탐탐 침략의 기회를 노리고 러시아 또한 발을 담그려고 애를 썼다.
그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시사만화 한 컷이 있다. 나는 이것을 직접 본적이 있다. 그것은 얼마 전에 미국에 거주하다 여수에 정착한 조영만사장이 간직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신문에 난 것인데 칼라사진이다. 그걸 소장하게 된 것은 어떤 수집가가 이웃에 살고 있었는데 그가 죽자 가족이 쓰레기장에 버렸다고 한다. 조 사장은 그것을 수습한 것이었다. 다른 앨범도 함께 있었는데, 특별히 그것은 역사적인 사료로써 가치가 있을 것 같아서 보관하게 되었단다.
이것은 누가 인터넷에도 올려놓은 만화다. 그렇지만 그것은 흑백의 그림인데 조사장이 소장한 것은 칼라로 되어 있어 더 가치가 있지 않나 생각한다.
만화는 일본인과 청국 인이 양편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물고기(조선) 낚고 있는 장면이다. 그 너머에서는 러시아가 넌지시 건네다 보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특별히 주목이 되는 것은 한국을 표시한 영어 알파벳이 k가 아니라 c로 표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중대한 시사점이 있지 않나 한다. 전해오는 말로 일제가 일본의 표기 J앞에 c를 넣지 못하도록 바꾸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얼마나 음흉한 작태인가.
조선말에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로 처하고 국가 재정이 파탄 난데는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그중에는 군왕의 무능과 탐관오리의 횡포, 척신들의 부패 때문이 아닌가 한다.
먼저 윗대를 보면 선조는 당파가 태동한 것을 거의 방치하고 인조는 서인세력에 의해 거의 힘을 쓰지 못하고 숙종 대에 와서 당쟁을 막아내는가 싶더니 영조 때에 이르러는 다시 특정정파에 의존했다.
무수리 아들로 정통성이 약한 영조는 완전히 서인벽파의 등에 올라탔다. 그 과정에서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이는 전대미문의 사건을 일으켰다.
순조 때는 어떤가. 부왕 정조의 탁월한 정치력으로 그런 데로 기틀을 바로 잡았으나 선왕이 1800년에 승하하자 나라는 세도정치 나락에 떨어지게 되었다.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15세의 나이로 쉰 한 살이나 차이가 난 영조와 결혼 후 대왕대비로서 실권을 휘두르는 가운데 순조의 국구(國舅) 조만영은 은밀하게 세도정치를 구축해 나갔다.
헌종이 집권하자 이번에는 신안동 김씨가 세도를 부리고 대원군이 조대비와 내통으로 고종을 들인 후에는 명성왕후의 일족과 파평 윤씨 일문이 국정을 좌지우지 했다.
이미 순조 때는 매관매직이 일상화 되었으며 돈을 쓰고 벼슬을 얻은 관리들은 바친 뇌물을 보충하기 위하여 가진 횡포를 다 부렸다. 젖내 나는 어린아이에게 세금을 물리는가 하면 죽은 사람에게도 면포(綿布) 부과했다. 소위 황구첨정(黃口簽丁), 백골징포(白骨徵布)등이 그것이다.
그들의 배 채우기는 날이 갈수록 더 해갔다. 당시 유행한 우스갯말이 뇌물을 쓴 관리가 현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뇌물을 먹인 후임자가 한양도성을 출발하는 진풍경이 벌어질 정도였다.
대한제국이 망할 무렵의 사정은 더욱 기가 막힌다. 고종의 무능 속에 명성왕후는 이상한 진령군이란 무속 인에게 빠져 국고를 탕진하고 그 인척들은 매관매직을 일삼았다.
그러니 나라가 온전할 리가 있겠는가. 더욱 기가 막힌 것은 혹세무민한다며 제2대 동학교주 해월 최시형선생을 사형집행 할 때는 포악한 가렴주구 조병갑을 판사로, 천하의 친일파 이완용을 검사로 임명하였으니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
그들이 무슨 정의감이 있다고 죄를 판결한단 말인가. 똥 묻은 개가 재 묻은 개를 나무라는 촌극을 넘어서 가소로운 일이다.
말년에 나라 팔아먹은 짓거리를 보면 피가 거꾸로 솟는다. 억만장자 친일파 민영휘는 나라를 일본에 넘기려고 안달을 하고, 순정효황후 큰아버지 윤덕영은 어쇄를 빼앗아 그 대가로 훈1등을 받아 이완용보다 4배가 넘은 토지를 얻었다. 그리고 아우인 순정효황후의 친부 윤택영은 거금 50만4,000엔의 은사금을 받았다. 그러니 조선은 척족들이 말아먹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마당인데 나라를 걱정한 우국지사들은 고통 속에 살다가 가족을 잃고 세상을 떠났다. 특별히 보성은 피해를 많이 입은 고장이었다. 이 두 분의 희생뿐 아니라 의병활동에 나선 안규홍선생, 임창모 선생 부자 등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나라는 이미 병들어 썩어 가는데 그래도 어떻게든 다시 일으켜보려고 물불 가리지 않는 행동에 마음이 숙연해 진다. 그런 의미에서 선각자 두 분은 반드시 기억하고 가슴에 새겨야 할 인물들이 아닌가 한다. (2023)
첫댓글 보성이 낳은 서재필 박사와 나철 선생을 뵈오니 시대의 파란과 선현의 구국항쟁이 가슴을 뜨겁게 합니다 송재 서재필 박사의 활약상은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운데
홍암 나철 선생의 항일 구국항쟁의 역사 앞에서 수년 전 찾아뵌 선생의 존영과 기념관 웅자가 샹생하게 펼쳐집니다 명실공히 보배로운 고장 보성입니다
두분은 보성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기념관을 잘 만들어 두 위인을 기리고 있는 것은 잘한 일이 아닌가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두분이 활동한 행적을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나라가 망할 때는 꼭 부정부패와 뇌물이 횡행하지요.
나라가 백척간두에 있을 때 보성 출신 서재필박사와 나철선생이 나라를 위하여 분골쇄신함은
국가의 큰 광영이며 자랑이었습니다.
이후에도 안규홍선생이나 임창모선생부자가 순국하셨으니 참으로 자랑스러운 보성입니다.
청석선생님께서는 글로써 이 사실을 천추에 알리니 큰 자랑이고 귀감이 됩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보성의 역사인물을 좀 조망해 놓고 싶었습니다.
보성에는 일찍이 선각자와 훌륭한 애국지사가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댓들달아주셔고 고맙습니다.